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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자료해제 연합군번역통역부(ATIS) 조사보고서 제1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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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에 관한 미국보고서 자료해제 1부. 연합군번역통역부(ATIS) 조사보고서 제120호 2부. 연합군번역통역부(ATIS)가 생산한 포로 심문보고서 3부. 미 전시정보국(OWI) 49번 보고서 4부. 동남아시아 번역통역부(SEATIC) 심문회보 제2호 연합군번역통역부 조사보고서 제120호 (ATIS Research Report No. 120)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는 몇 가지로 구분가능하다. 먼저 위안소를 만들고 운영한 주체였던 일본군이 생산한 자료가 있다. 당사자가 만들었기에 가장 정확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위안소의 설치는 물론 운영 과정을 알려주는 적지 않은 자료가 발굴되어 그 실상을 이해하고 일본군의 책임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일본군이 만든 자료는 조직적 폐기 대상이 되어 많이 사라졌고 남아 있는 자료도 여러 사정상 발굴하기가 쉽지 않다. 다음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구술 자료가 있다. 할머니들의 체험과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확실한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오랜 세월 속에 기억이 망실된 경우도 많고 또 개인의 체험이기에 전체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기도 하다. 또한 일각에서는 구술의 주관성을 문제삼기도 한다. 다음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던 연합군이 생산한 문서들이 있다. 연합군은 군사적 필요에 의해 일본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면밀한 심문을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정도의 ‘위안부’ 관련 정보가 입수되었다. 또한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문서 중에 위안소 관련 내용이 확인되기도 했다. 미국을 비롯해 영국, 네덜란드, 호주, 중국 등 일본군과 전투를 치른 연합군은 모두 빠짐없이 ‘위안부’ 관련 문서를 생산했다. 심지어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지 않은 태국과 프랑스 군에서도 위안소 관련 자료가 만들어졌다. 이는 그만큼 위안소가 광범위하게 설치되어 운영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된다. 연합군이 만든 자료는 크게 포로 심문보고서, 노획문서 번역 자료, 정보 보고서 그리고 특별 보고서 등으로 대별된다. 그중에서도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미국 남서태평양 사령부 연합군번역통역부(Allied Translator and Interpreter Section)에서 만든 조사보고서 120번(Research Report No. 120)이다. 이 자료는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 측에서 생산한 ‘위안부’ 관련 자료 중 현재까지 발굴된 가장 자세하고 방대한 내용의 문서이다. 조사보고서는 최고 사령관 맥아더까지 보고되는 연합군번역통역부의 가장 비중있는 문서였으며 그만큼 정보의 정확성과 내용상의 풍부함이 여타 자료들을 압도한다. 특히, 이 보고서는 1945년 2월과 11월 두 차례 생산되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사례가 된다. 두 판본의 차이는 위안소에 집중되어 있는데, 1945년 8월 일본 패망과 전후처리가 중요한 변수로 매개된다. 즉 전중(戰中)과 전후(戰後)라는 정세가 두 판본의 차이를 만든 결정적 요소였다. 요컨대 이 보고서는 전중과 전후에 걸친 연합군의 ‘위안부’ 문제 인식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연합국번역통역부 조사보고서 제120호(ATIS SWPA Research Report No.120)의 원문이미지는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링크이동)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 자료 발굴 및 수집 경위 이 자료가 최초로 공개된 것은 1992년이다. 자료 공개의 배경은 1989년 히로히토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증대와 관련된다. 한국에서는 조문사절 파견을 놓고 다양한 논쟁이 전개되었으며 일본에서도 이른바 ‘쇼와시대’의 전쟁 책임문제가 불거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1990년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는 민간업자의 소관이기에 정부 차원의 조사가 불가능하다고 하여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일본군의 관여를 부정하는 일본 정부의 태도는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샀고 1990년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의 결성과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으로 이어졌다. 일본에서는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주오대(中央大) 교수의 자료 발굴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이에 미 캔사스대 굿맨(Grant K. Goodman) 교수가 자신이 군대 시절 확보했던 보고서를 공개하게 된 것이다. 1992년 2월 일본 교도통신(共同通信)사 워싱턴 지국을 통해 공개된 제120호 보고서는 일본 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이후 요시미 교수에 의해 1992년에 발간된 『종군위안부자료집』(『從軍慰安婦資料集』, 大月書店)에 수록되어 대중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자료집에는 보고서 전체가 아니라 위안소 관련 부분만 선별되어 일본어로 번역 수록되었다. 그런데 제120호 보고서의 최초 발굴자는 따로 있었다. 1992년 1월 28일 국사편찬위원회가 입수한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에 이 보고서가 포함되어 있다. 이 자료를 발굴하여 국사편찬위원회에 제공한 사람은 다름아닌 재미 사학자 방선주 박사였다. 방선주 박사는 한국 관련 자료를 조사하는 와중에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도 발굴하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제120호 보고서 중 1945년 11월 15일자 보고서(이하 11월 판본)는 미 국립기록문서청의 네 곳의 자료군(Record Group 이하 RG)에서 확인가능하다. RG 165, 331, 407, 554가 그것인데 이외에도 맥아더 기념관 RG 3에도 소장되어 있다. 1945년 2월 16일자 보고서(이하 2월 판본)는 RG 554에서만 확인가능하다. ATIS SWPA Research Report No.120_02 2. 자료 생산과정 조사보고서는 남서태평양총사령부와 연합군최고사령부 수뇌부에게 보고되는 최고의 자료였다. 조사보고서는 애초 ‘정보회보’(Information Bulletin)라는 제호로 발간되다 1944년 6월 30일 이후부터 조사보고서로 개칭되었다. 이 자료는 포로 등을 통해 획득한 정보를 바탕으로 전쟁 수행상 필요한 특정 주제에 관한 조사와 분석을 시도한 문서이다. 따라서 보고서의 대종을 이루는 것은 군사관련 내용들이었다. 주목해야 될 보고서 중 하나는 일본군의 전쟁법 위반 문제를 다룬 제72호 보고서이다. ‘일본의 전쟁법 위반’을 주제로 한 이 보고서는 1944년 4월 29일 처음 발간되었고 이후 1945년 3월 19일과 6월 23일 두 차례에 걸쳐 보충본이 나왔다. 일본군의 불법 살해와 연합군 포로 학대, 성폭력 문제 등을 다룬 이 보고서는 내용상 제120호 보고서와 가장 근접한 자료라고 판단된다. 물론 이 보고서에 일본군 ‘위안부’나 위안소 관련 내용은 전혀 없지만 일본군의 전쟁범죄라는 맥락에서 연결될 수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한 가지 검토해야 될 문제는 위안소와 ‘위안부’ 문제가 일본군의 전쟁법 위반을 다룬 제72호 보고서가 아니라 ‘일본군의 편의 위락시설’(Amenities in the Japanese Armed Forces)이라는 제목의 제120호에 포함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1945년 시점까지 연합군 내에서 ‘위안부’ 문제가 전쟁범죄 차원에서 이해되지 않았음을 반증해준다. 그러나 1945년 초 연합군번역통역부가 일본군 위안소와 ‘위안부’를 중요한 정보로 인지하고 비교적 소상하게 보고서에 포함시켰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자료는 두 개의 판본이 있다. 11월 판본은 위안소 부분 서술이 대폭 강화되고 확대되었으며 특히 위안소 설치 및 운영규정을 포함한 일본군 노획문서가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에 따라 문서 분량도 상당한 차이가 나는데 2월 판본은 22쪽인 반면 11월 판본은 42쪽에 달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는 두 문서를 생산한 연합군번역통역부의 소속이 바뀐다는 점이다. 2월 판본은 남서태평양지역사령부(SWPA Hq.) 산하였고 11월 판본은 연합국최고사령부(SCAP) 산하였다. 두 사령부 모두 맥아더가 사령관이었다는 점에서 연속성이 있기는 했지만 전자는 전쟁을 수행중이었고 후자는 일본의 패전 이후 전후 처리와 일본 점령을 책임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른 정세 하에 있었다고 하겠다. 2월 판본은 치열한 전투가 진행중이던 상황 하에서 일본군에 대한 다양한 정보수집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정세 속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11월 판본은 전쟁이 종료된 이후에 작성되었다는 점에서 2월 판본과 구별된다. 그렇다면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전쟁이 종료된 마당에 굳이 11월 판본을 간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2월 판본과 11월 판본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위안소 관련 부분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연합군 번역통역부가 11월 판본을 간행하게 된 1차적 이유는 전범재판 관련 자료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전범재판은 미국의 전후 정책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2차대전 전후 처리를 주도하게 된 미국은 민주주의와 인권, 휴머니즘과 같은 보편적 가치와 규범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자신의 대외 정책을 관철시키고자 했다. 연합국은 이미 1943년 10월 연합국전쟁범죄위원회(United Nations War Crimes Commission, 이하 UNWCC)를 조직해 추축국의 전쟁범죄를 처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UNWCC는 독일 나치의 전쟁범죄를 주요 대상으로 하여 활동했다. 이에 중국의 강력한 요구와 함께 일본군의 미군 및 연합군 포로 학대 정보가 확인되면서 1944년 8월 남서태평양사령부 차원의 전쟁범죄위원회(War Crime Board, 이하 WCB)가 조직되었다. WCB 구성을 주도한 것은 맥아더의 정보참모였던 윌로비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11월 판본은 전범재판 책임을 맡고 있는 연합국최고사령부로서는 상당히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였다고 판단된다. 정식명칭이 극동 국제군사재판인 도쿄 전범재판은 1946년 5월 3일 시작되어 1948년 11월 12일까지 진행되었다. 1945년 말경은 전범재판을 위한 제반의 준비가 시급했던 시점이었다. 결과적으로 제120호 보고서는 전범재판에 활용되지 못했다. 이는 11월 판본이 실제 활용과는 무관하게 전범재판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관련되어 생산된 자료임을 설명해준다고 판단된다. 목차 제 I부 주보 제 II부 오락 제 III부 뉴스 제 IV부 우편 제 V부 결론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링크이동)에서 해당 조사보고서의 목차와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3. 자료 내용 제120호 보고서는 매점(Canteen stores), 오락(Amusements), 뉴스(News), 우편(Mail), 결론(Conclusion)의 5장 체제로 작성되었다. 위안소는 제2장 오락의 제9절로 배치되어 있다. 체육, 영화, 게이샤와 연예단, 휴가 등이 제2장의 나머지 절을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장과 절의 배열은 2월 판본과 11월 판본이 동일하다. 먼저 두 문서의 내용상의 차이가 무엇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두 문서의 차이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위안소 관련이고 다른 하나는 위안소 이외의 서술상 차이다. 전자의 차이는 매우 크며 사실상 11월 판본이 나오게 된 실질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위안소 관련 부분의 차이를 살펴보자. 두 문서 모두 제2장 오락의 서론 격에 해당하는 일반 항목에서 위안소 소유 상황에 대한 기술이 나타나는데, 2월 판본에서는 포로들의 진술이 엇갈리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즉 정부가 위안소를 소유하고 통제한다고 진술한 포로가 있는가하면 다른 포로들은 사설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문서 작성자들은 더 이상의 분석을 진행하지 않고 다만 두 의견이 엇갈린다는 서술로 갈음했다. 반면 11월 판본에서는 포로들 사이에 이견이 있음을 전제하면서 버마에서 체포된 위안소 주인의 진술과 남서태평양 지역에서 노획한 위안소 규정에 따르면 위안소가 사적으로 소유되었으나 군의 감독 하에 있었다는 기술을 추가했다. 확보된 정보량이 늘어나면서 위안소의 소유 및 운영 상황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판단이 가능해진 것으로 보인다. 즉 군 직영과 사설 위안소가 공존하되 사설이라 하더라도 군의 통제 하에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부분이다. 다음으로 제2장의 제9절 위안소 항목에서의 차이를 보자. 먼저 제9절 위안소의 하위 항목 구성이 약간 변화하는데 2월 판본은 a. 버마, b. 수마트라, c. 남서태평양지역 등 세 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었으나 11월 판본에는 a. 규정(Regulations), b. 버마, c. 수마트라, d. 남서태평양지역으로 배열되어 총 네 항목으로 구분되어 있다. 두 판본의 제9절의 차이는 a. 규정과 b. 버마 두 항목에 집중되어 있다. 나머지 차이는 11월 판본 d. 남서태평양 지역에서 포로 진술 사례 하나가 추가된 것이 전부였다. 요컨대 두 문서의 차이는 노획한 위안소 규정과 버마 지역 위안소 업주의 진술에 따른 셈이었다. 두 문서의 차이를 보여주는 또 다른 부분은 결론부이다. 2월 판본은 결론에서 ‘군 당국의 인가를 받은 위안소가 설치되어 있다’고 기술한 반면 11월 판본에서는 ‘군 당국의 인가를 받은 위안소가 엄격한 규정 하에 설치되어 있다’라고 서술했다. 즉 문서화된 위안소 규정을 입수한 이후의 인식 변화가 반영된 기술이었다. 마지막으로 두 문서의 중요한 차이는 2월 판본에는 없었던 첨부 문서가 11월 판본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첨부 문서는 A와 B 두 개인데, A는 마닐라 위안소 설치 및 운영과 관련된 서류들이고 B는 마닐라 위안소에 관한 경찰 보고서이다. 두 개의 첨부 문서는 일본군 및 경찰이 직접 생산한 문서들을 연합군번역통역부가 영역한 것이다. ATIS SWPA Research Report No.120_03 다음으로 문서의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자. 먼저 2월 판본의 위안소 서술은 전량 포로들의 진술에 의거했다. 이에 반해 11월 판본은 노획한 위안소 규정문서와 위안소를 직접 운영한 업자의 진술을 보강하여 상당히 구체적이고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다음으로 11월 판본을 중심으로 제120호 보고서의 위안소 부분 내용을 살펴보자. 먼저 a. 규정 항목은 상하이 지역으로 추정되는 남부 지구, 타클로반, 브라우엔, 라바울 등 다섯 곳의 규정문을 모아놓은 것이다. 이렇게 총 다섯 곳의 규정문을 함께 모아놓은 자료는 11월 판본이 유일한 것으로 보이는데, 일본군 위안소의 전체적인 윤곽을 그릴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다섯 개 규정 중 가장 분량도 많고 자세한 것은 마닐라 지역의 규정이다. 이 규정집은 위안소 설치와 운영 전반에 관한 거의 모든 세세한 규정들을 담고 있기에 현재까지 발굴된 위안소 관련 규정으로는 가장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이다. 이 규정집만 꼼꼼하게 살펴봐도 일본군의 위안소 운영의 대강을 파악하기에 큰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이 규정은 마닐라 병참지구대 소속 육군 중좌 오니시(Onishi)가 1943년 2월 발행한 ‘마닐라의 인가 음식점과 위안소 규칙(Rules for Authorized Restaurants and Houses of Prostitution in Manila)’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영역한 것이다. 제1부 총칙, 제2부 영업, 제3부 운영, 제4부 위생, 제5부 규율, 제6부 특별클럽 규정 등 총 여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칙부터 규율까지 모두 37개의 세부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고 마지막 제6부는 별도의 15개 조항을 두고 있어 도합 52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설치와 영업 중지, 폐업 그리고 그에 따른 손해 보상까지 전적으로 일본군의 책임으로 처리된다는 총칙의 규정 내용을 보면 위안소가 일본군의 부대시설이었음이 명백하게 입증된다. 영업 항목에서는 개업허가신청서를 비롯해 총 4종의 서류가 구비되어야 개업허가가 가능하도록 규정했으며 종업원의 교체까지 일일이 허가를 맡도록 명시했다. 나아가 군 소유 건물 수리도 허가사항이었고 대기실 규약과 요금표는 물론 심지어 타구(唾具, cuspidors) 설치까지 규정되어 있다. 운영에 있어서도 영업 시간 및 요금은 물론 업주와 위안부의 수익 배분 비율, 질병 치료비 부담 비율, 저축까지 규정해놓은 것은 위안소가 독립적인 민간시설일 수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나아가 매일 보고서를 비롯해 매월 말일에는 영업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규정했다. 위생 부분 역시 청결, 세척, 소독을 매우 강조하면서 생리 중 성교 금지, 매일 목욕, 침구 청결 등에 대한 세세한 규정을 잊지 않았다. 규율 부분 역시 위안소의 운영과 사용 시 지켜야 될 자세한 규정들로 구성되어 있다. ‘위안부’의 이동 금지, 주류 반입 금지, 콘돔 사용 의무 등이 규정되었고 심지어 입맞춤 금지 조항까지 삽입되어 있다. 위안소는 운영자와 ‘위안부’는 물론 이용자인 병사들까지 포함해 위안소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군 당국의 직접적 통제 하에 놓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고 판단된다. 두번째 항목인 버마 지역의 내용은 주로 포로가 된 위안소 업주 심문내용에 기반했다. 이 자료는 위안소 설치와 운영이 일본군은 물론 조선총독부까지 포함한 일본의 국가 전체가 관여되는 과정이었음을 분명하게 증거한다. 즉 식민지 조선에서 703명의 조선인 ‘위안부’를 모집하는 과정과 출국, 군사령부가 제공한 무료 항행권으로 해군 호송선 7척의 호위를 받으며 대만과 싱가포르를 경유하여 버마에 도착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조선, 대만, 싱가포르, 버마를 지배하고 있던 일본 제국 전체가 동원된 셈이었다. 마지막으로 부록 문서를 살펴보자. 앞에서 언급했듯이 부록 A는 마닐라 위안소의 구비서류들이다. 개업허가 신청서를 위시해 서약서와 이력서, 종업원 명단 양식, ‘위안부’ 인가 신청서와 퇴소 허가 신청서, 수익 일계표, 일일 및 월례 보고서와 검진표 등 위안소 설치, 운영과 관련된 제반 서류가 꼼꼼하게 구비되어 있다. 총 14종에 달하는 서류 양식은 매우 세세하다. 예컨대 수익 일계표를 보면 고객을 계급별로 구분하여 시간과 인원 및 요금을 기재하여 총계를 내는 형식이었다. 이러한 서류 양식들은 위안소가 야만의 산물이자 근대 국가의 ‘합리적’ 기획물임을 동시에 보여준다. 위안소는 20세기의 야만적 현상을 집약한 전쟁을 배경으로 하여 주로 사회적 최약자 중의 하나인 식민지 여성들을 동원하여 설치되었다는 점에서 제국주의 일본의 야만성을 상징해준다. 그러나 그 야만이 근대국가의 합리적 관료제에 기반했음도 분명했다. 이 서류양식들은 위안소의 기획, 모집, 수송, 운영 등 전 과정은 일본의 국가이성이 ‘합리적’으로 작동한 결과였음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부록 B는 마닐라 위안소에 대한 경찰 보고서이다. 주지하듯이 제국주의 일본은 위생경찰 제도를 채택했는데, 이 보고서도 위안소에 대한 위생경찰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보고서에 따르면 마닐라에는 총 17개소의 군 위안소가 있었고 하사관・병사용 위안소의 ‘위안부’는 1,064명이었다. 장교용의 ‘위안부’는 119명으로 총 1,183명에 달했다. 위안소에 대한 일반 소견을 보면 “많은 업주들은 자신만의 이익 이외엔 아무 관심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위안부’들의 생계나 위생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다고 질타했다. 경찰의 결론은 “업주들의 이기적인 처사는 억제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조사보고서 120호는 지금까지 발굴된 영어로 생산된 문서 중 가장 방대하고 종합적이며 자세한 자료이다. 두 번에 걸쳐 발행될 정도로 연합군이 ‘위안부’ 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즉 전쟁범죄 재판을 위해 이미 발간된 자료를 보완하여 재발행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자료는 연합군이 만든 문서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일본군이 직접 생산한 문서를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요컨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연합군의 시각과 함께 일본군의 위안소 운영실태를 함께 보여주는 드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ATIS SWPA Research Report No.120_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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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그녀들의 법정 3부 - 12.28 합의는 헌법소원청구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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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8 한일합의' 이후, 그녀들의 법정 1부. 단 800자의 기자합의문이 해결을 담을 수 있는가 2부. 합의 이후, 양국 정상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가 3부. 12.28 합의는 헌법소원청구 대상이 아니다? 12.28 위안부 합의는 헌법소원청구 대상이 아니다? 2016년 3월 27일, 피해자 할머니들은 12.28 ‘위안부’ 합의에 대해 외교부 장관을 피청구인으로 하여 헌법소원을 청구했습니다. 헌법소원이란 공권력의 행사 또는 불행사로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되는 경우에 국민이 헌법재판소에 자신의 기본권을 구제하여 줄 것을 청구하는 것을 말하는데요. 저희 변호인단은, 양국 정부가 합의에 이르는 과정에서 당사자인 할머니들의 참여를 보장하지 않았고, 합의 이후에도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인정했는지의 여부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기에 헌법에 명시된 절차적 참여권과 알 권리를 침해했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피해 당사자들이 앞으로 개인적인 손해배상청구를 할 경우, 일본 정부가 ‘이미 합의가 이뤄진 것’이라고 주장할 근거를 제공했기 때문에, 사실상 할머니들의 손해 배상 청구권 행사를 막아버린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처럼 위헌의 소지가 충분하다고 생각했기에 변호인단은 12.28 ‘위안부’ 합의가 피해자 할머니들의 재산권, 알 권리,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했다는 점에 대해 헌법소원을 청구했습니다. 헌법소원청구에 대해 외교부는, “12.28 ‘위안부’ 합의는 형식적인 면에서는 조약에 해당하지 않고 합의의 내용 또한 ‘위안부’ 문제라는 외교적 현안에 대한 정부 간의 해결일 뿐 할머니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을 포기한다거나 손해배상을 막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즉 외교부의 입장은, ‘12.28 합의는 공권력의 행사가 아니’기 때문에 헌법 소원 대상은 아니라는 점인데요. 현재 우리 헌법과 헌법재판소법은 ‘공권력의 행사’만을 헌법소원청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헌법재판소에 공개변론 신청, 쟁점을 분명히 해야 그러나 변호인단에서는 헌법소원의 대상인 공권력의 행사 유무가 ‘조약’이라는 합의의 형식에 따라 달라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12. 28. 위안부 합의의 주체가 개인이 아닌 양국 정부였고, 양국 정부의 행위로 인하여 피해자 할머니들의 손해배상청구가 힘들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 정부는 피해자 할머니들이 여전히 일본 정부에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있다고 함에도, 일본 정부는 법적 책임을 질 수 없다고 주장하는 모순된 상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설령 외교부의 주장대로 12. 28. 위안부 합의가 외교상의 합의로 피해자 할머니들의 손해배상청구권 그 자체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피해자들을 외교적으로 보호해야 할 국가의 의무를 다했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기에 여전히 위헌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는 피해자 할머니들을 외교적으로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외교적으로 보호한다는 것은 일본과 국제사회를 향해 피해 사실을 알리고 피해 구제에 나설 것을 요청하는 외교적 노력뿐만 아니라 피해자들과 가해국간의 분쟁이 발생하였을 때 이를 외교적 교섭을 통해 해결하도록 애쓰는 것을 모두 포함합니다. 이를 ‘외교적 보호권’이라 부르는데요, 이미 지난 2011년 8월 30일, 헌법재판소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가 훼손된 것을 국가가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하여 회복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한 바가 있습니다. 2011년 8월 30일 헌법재판소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지 않은 상태(부작위)가 우리 헌법정신에 위반된 것으로 판단( 헌법재판소 부작위 위헌 결정)했는데, 지금 ‘위안부’ 문제의 현황이 당시와 크게 달라졌다고 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합의가 손해배상청구권 자체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외교부의 답변은 형식적 논리로서, 피해자들이 처한 현재의 모순된 상황을 반영하고 있지 않으며, 문제의 해결책 또한 되지 못한다는 것이 변호인단의 의견입니다. 지난 연말에 헌법재판소는 이 사건에 대하여 각하 결정을 하였습니다. 12.28. '위안부' 합의는 '조약'이 아니고, 법적 구속력이 없는 '약속'에 불과하니, 피해자 할머니들의 인격권과 재산권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것이죠. 결론만 놓고 보면 헌법재판소가 외교부의 주장을 받아들인 듯 하지만, 내용상으로는 12.28. 합의는 '위안부' 문제 에 대한 일본의 법적 책임이나 할머니들의 손해배상의 문제에 대하여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점과 우리나라 정부 또한 앞으로 할머니들의 피해구제를 위하여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하여야 한다는 점을 명시하였습니다. 어찌 보면 12.28.합의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밝혀 준 것이죠. 물론 이미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었던 것이지만요. 저희 변호인단은 이번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12.28.합의로 인해 발생한 불필요한 논쟁을 종결하고, 우리 사회가 '위안부'문제의 본질을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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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인터뷰 [라다 이베코비치-백영경 대담] 젠더화된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진 우리 시대의 여성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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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영문웹진 KYEOL에 게재된 “Women’s Solidarity in Our Troubled Times of Gendered Violence and War“를 국문으로 옮긴 것입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철학자 라다 이베코비치(Rada Iveković) 교수와 인류학자 백영경 교수의 대담 자리를 마련했다. 이번 대담에서는 남성화된 전쟁과 여성화된 피해라는 기존 틀을 벗어난 토론이 이루어지리라 기대된다. 두 연구자들의 역사적 통찰과 연대를 향한 비전이 더해진다면, 전쟁의 젠더화와 특정 기억의 형성 과정 뒤에 있는 국가 통제, 민족주의, 가부장제의 삼위일체를 서서히 무너뜨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2022년 기림의날 특집] 현재진행형 ‘위안부’ 역사와 공존을 향한 연대 1. 한일양국의 시민들과 함께 ‘위안부’문제에 관한 공동연구를! 2. 다큐멘터리 〈애프터 미투〉를 통해 본 증언을 기록하는 일 3. ‘지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운동: 경상도 지역 역사관과 ‘지역성’에 대하여 4. [캐롤 글럭-김은실 대담] 민족주의를 넘어서: 현재 진행형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젠더 정치 5. [라다 이베코비치-백영경 대담] 젠더화된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진 우리 시대의 여성 연대 사회주의의 붕괴와 여성에 대한 역풍 백영경 역사적 맥락에서부터 시작해보려 합니다. 가장 잘 알고 계실 유고슬라비아의 분할과 해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데요.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사회주의가 해체되는 동안 일어났던 정치적, 사회적 변화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그러한 분할이 왜, 그리고 어떻게 전쟁의 젠더화로 이어지게 되었는지도요. 라다 이베코비치 1989년 이후에 공공연히든 아니든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경험했던 구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사회 재산과 공유 재산이 하룻밤 사이에 팔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야말로 대대적이고 급격하게 이루어진 이런 매각 사태를 주도한 세력은 지역의 조직폭력배, 정치인, 마피아들로, 이들은 구 사회주의 국가에서 새로이 자본주의를 이끌어갈 과두 지도 체제를 형성했습니다. 산업, 토지, 인력이 헐값에 이들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이들은 외국인 투자자와 협력자들과 함께 착취한 자원을 팔아넘겨 부를 축적하는 데 혈안이 되었죠. 사회주의 몰락 직후에 구 사회주의 국가 주민들, 특히 구 소련 주민들은 극심한 빈곤과 굶주림, 기대 수명의 감소에 시달렸습니다. 약탈이 일어나지 않은 곳이 없었고, 주민들은 필요한 물건이나 시설을 확보할 수 없게 됩니다. 무법 상황이 펼쳐졌고, 유럽 내 탈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대규모로 갱스터리즘이 확산되었습니다. 인권은 설 자리를 잃었고, 여성 인권의 상황은 더 심각했죠. 1989년 직후 유고슬라비아에서처럼 전쟁이 발발하자 모두에게 최악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고, 특히 여성에게는 더 그러했습니다. 이 가운데 약탈과 법치주의의 전면적 파괴가 지속되었고, 이런 과정이 전쟁과 동시에 진행되었습니다. 여성의 권리와 관련해서는 항상 합의, 협상, 동맹, 타협의 여지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다양한 유형의 현 지배 체제, 남성 지배 체제 하에서 타협이 가능한 대상인 것이죠. 여성은 사회주의 시절에 보장받았던 인권을 오히려 탈사회주의 시대에 상실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회주의 시절에는 명목상이라 할지라도 일반적인 인권뿐 아니라 여성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면, 이제 이 모든 것이 파기된 상황이었어요. 더는 과거처럼 권리 보장을 근거로 국가에 지원을 요청할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이 시기에 재가부장제화(repatriarchalization) 흐름과 무관한 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백영경 분단과 통일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이제 보편적 민주주의에 관해 이야기해 보고 싶습니다. 보편주의(universalism) 혹은 보편적 민주주의가 현재 맥락에서 큰 중요성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라다 이베코비치 제가 생각하는 보편주의는 인간 전체, 즉 우리 모두를 평등한 기반에서 포용하는 것입니다. 보편적이라는 말 자체가 전체를 의미하죠. 이 보편적인 전체는 수많은 특수성과 차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특수성들 가운데 지배적인 것이 보편주의가 되는 일이 정치적으로 자주 일어납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원하지는 않아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모든 특수성, 모든 차이, 모든 소수자, 모든 감수성이 가시성과 권리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이야말로 보편적 민주주의의 추상적 얼개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라면 나는 보편적 전체를 옹호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보편성을 옹호한다고도 표현하겠습니다. 그동안 사회 과학과 좌파 운동의 내러티브에서는 보편성이 기각되어 왔죠. 하지만 페미니스트로서 우리는 보편주의자이기도 하므로 이를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여성만을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페미니스트로서 우리는 다른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고 그러길 원하죠. 모두를 위한 민주주의는 보편적 민주주의를 의미합니다. 물론, 이상적인 설명이 그렇고 실제로 모두를 위한 민주주의가 가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항상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종속시키거나 해 왔던 예들을 통해 우리가 그 이상에 더 가까워지거나 더 멀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죠. 여성의 경우는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지만, 종속되는 쪽입니다. 그러나 물론 우리가 원하는 건 그 이상입니다. 또한 보편적 민주주의는 너무 광범위하고 추상적이라서 실제로 적용 시에 민주주의를 담보할 가능성에 대한 불확실성이 존재하기에 개념적으로도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조건에서 우리는 의회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이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죠. 이상보다 현실은 항상 부족한 법입니다. 하지만 이상향과 이상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 추상적인 경향을 띠게 됩니다. 백영경 현대적 형태의 젠더 갈등에서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또한 현재 상태에서 민족주의를 규정하는 조건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라다 이베코비치 민족주의가 항상 갈등의 원인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다른 이유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조차도 민족주의의 형태를 취하는데, 세계화에서의 전반적인 파편화(fragmentation) 현상 때문입니다. 세계화에는 두 층위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세계성(globality)의 층위, 즉 우리가 상호 연결된 세계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파편화된 세계화라는 상황에서 폭력, 특히 여성에 대한 폭력이 더 현저화되고 가시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여성은 극심한 반발에 부딪혔습니다. 세계 모든 곳에서 여성들이 가부장주의 공동체들의 반발과 마주했죠. 많은 나라에서 여성 살해와 여성 대량 살상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여성의 생명에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듯이 말이죠. 이런 특징은 비교적 최근부터 생겨났지만, 예전에도 아예 없지는 않았죠. 그렇기는 해도 최근 수십 년 사이에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한편, 전쟁 중에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이 바로 대규모 강간입니다. 이 역시 예전부터 있어 온 일이죠. 한국의 '위안부'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에나 '위안부'가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여성은 다른 어떤 이유가 아니라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합니다. 이런 문제는 항상 존재해 왔지만, 최근에는 #MeToo 운동과 다른 페미니스트 운동, 학술 운동을 통해 더 가시적으로 드러나게 되었죠. 이 모든 것이 미완의 이야기로, 세대를 거쳐 계속될 그런 일입니다. 요약하자면, 여성에 대한 반발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저는 생각해요. 많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재건에 기본적으로 뒤따른 현상들이 재가부장제화, 군사화, 원시화, 그리고 폭력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여성들은 '여성 파업(women's strike)'의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개념은 노동 계급의 역사와 여성의 역사 모두에서 설득력을 얻습니다. 폭력의 규모가 커지면 동시에 여성의 저항이 일어납니다. 한 현상이 다른 현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죠. 폭력이 더 심각한 양상을 띨수록 더 많은 여성들이 생각하고 저항할 것입니다. 이런 움직임은 여성뿐 아니라 여성화된 개인과 신체, 또는 여성과 동일시되는 사람들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꼭 여성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유색인종, 장애인, 영향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 이민자, 외국인, 사회 계급이나 신분 계급의 하위층에 속하는 사람들로도 구성될 수 있죠. 모두가 미래를 위한 공동의 전투를 벌이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여성만을 위해 싸울 수 없어요. 우리에게는 협력자가 필요합니다. 여성 평화 운동과 2015년 구 유고슬라비아 여성 법정 백영경 2015년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 국가 여성 법정에 직접 참여했던 당신의 경험에 한국 청중들과 독자들이 많은 관심을 가질 듯합니다. 앞서 언급하신 폭력과 저항의 동시적 진행이 유고슬라비아 전쟁 기간에는 어떤 양상으로 나타났는지 자세히 들어보고 싶습니다. 라다 이베코비치 저는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유고슬라비아 페미니스트 세대입니다. 당시 저는 젊은 나이로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었고, 페미니스트 문학 연구를 위한 워킹 그룹에 속해 있었습니다. 모두가 함께 연구하고, 읽고, 쓰고, 출판하는 일을 했죠.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사회주의가 붕괴된 상황에서 경제적 이유로 발발했습니다. 연방 정부는 무너졌고, 사람들은 하룻밤 사이에 일자리를 잃었지만, 도움을 청할 만한 최고 기관이 부재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지역 정체성(그리고 민족주의)에 몰입하는 결과가 빚어졌는데, 더는 연방 국가에 의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유고슬라비아는 연방 국가로 6개 공화국 중 5개 공화국의 국민들이 각기 다른 국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 국가들에서도 지역 정체성 운동이 일어났고, 이 운동은 민족성 중심주의(ethnicism) 운동으로 발전합니다. 민족성은 보통의 경우 국적보다는 하위의 구분이지만, 원리 면에서는 국적과 동일한 구분입니다. 이 모든 이데올로기(정체성주의, 민족성 중심주의, 민족주의)는 여성 혐오와 닿아 있습니다. 이런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와 관련해서 볼 수 있는데요. 그들은 가부장제 질서를 재도입하려 하고, 그럴 때 제일 먼저 하는 생각은 여성의 권리를 축소해야 한다는 것이죠. 곧 여성들은 평화 유지를 위해 그룹을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평화 운동으로서 시작된 움직임이었죠. 여성들은 새로운 국경을 넘나들며 그룹을 형성하고, 소통하고, 탈영병들과 협력 그룹을 만드는 등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운동에는 희생자였던 여성들, 즉 '위안부'와 같은 대량 강간의 희생자들, 혹은 전쟁 남자들을 포함해 모든 것을 잃었다는 의미에서 '희생자'들이었던 여성들도 참여했습니다. 이 페미니스트 운동은 구 유고슬라비아 전역에서 다양한 여성 그룹과 협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운동은 기본적으로 평화 캠페인으로 시작했고, 종전 후 오랜 뒤인 2015년에 이르러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2015년은 우리가 '구 유고슬라비아 및 승계국을 위한 여성 국제 법정(Women’s International Court for the Former Yugoslavia and Successor Countries; 이하 '여성 법정')을 열었던 해였습니다. 이는 전쟁 기간과 그 이후의 20년 동안 이 지역에서 페미니스트 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결과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활동은 처음부터 여성의 사회적 재건을 위해 시작된 하나의 긴 과정으로서 중요성을 지녔죠. 그 의의는 여성은 물론 전반적인 사회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주체성의 재건에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전반적인 페미니스트 혁명을 의미했죠. 우리는 여성이 전시 및 전후의 희생자일 뿐만 아니라 평화 시에도 희생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성 법정을 이보다 더 앞당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양한 국적의 여성들 간에 연대를 구축하려면 이 모든 선행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죠. 서로 다른 국적 하에서 남성들은 서로를 죽였지만, 여성들은 기꺼이 대화하기를 원했습니다. 구조적 불평등으로서의 여성 문제 백영경 한국의 경우 과거 가부장적인 국가와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된 표현들은 '위안부' 관련 논란에서 볼 수 있듯 전시 성폭력을 범죄로서 규정하지는 못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의 상황도 달라졌고, 이제는 여성의 고통을 수치와 불명예의 문제보다는 민권 침해의 문제로 접근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국가가 여성의 구원자이자 여성 인권의 궁극적인 보증자로 인식되는 경향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주지하고 계시듯, 여성 시민의 몸은 아직도 국가나 민족의 영토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은 내러티브와 상상에서 탈피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조언이나 견해를 나누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라다 이베코비치 한국과 유고슬라비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유고슬라비아의 여성들은 전쟁 동안 국가가 아니라 그들과 같은 국적 공동체, 민족 공동체에 의해 '국가화(nationalized)'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지역의 가부장주의 공동체들에 의해 국가화된 것입니다. 또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있었던 지역들의 가부장주의 공동체들은 서로 협력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여성 문제를 놓고 볼 때 어떤 의미에서는 협력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후에 그들은 여성을 서로 사고 팔거나 인신매매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리고 이들 공동체는 각각 가장 강력한 가부장제의 회복이라는 목표에서는 뜻을 같이 했습니다. 어떤 국가 당국도 한국이 일본과의 관계에서 혹은 '위안부' 문제의 제도화를 통해서 보여줬듯, 전시 강간을 타 국가와의 외교 관계나 대화의 대의나 무기로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문제 자체가 국가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 문제는 탈국가화되어야 하죠. 그렇게 될 때 여성은 국가의 문제를 넘어 여성 문제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여성 문제와 젠더 질서는 사회와 국가 모두의 구조를 반영합니다. 사회와 경제 체제, 정치의 측면에서 이 문제들은 구조적이며 또한 근본적인 성격을 지닙니다. 우리는 국가의 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은 일이고, 모든 여성들이 그렇게 느낄 것입니다. 우리가 치렀던 대가는 2015년 여성 법정 당시 언론의 철저한 무시였습니다. 하지만 여성들은 이미 알고 있죠. 집권자들은 끈질길 정도로 이런 문제들을 정치적인 문제로 다루기를 거절합니다. 우리는 정론(政論)이나 여론, 혹은 정치적 여론의 측면에서 돌파구를 마련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카이빙(기록 보관)의 측면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여성 법정에 참여한 여성들은 생존해 있었고, 우리는 그 여성들과 또 다른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자료가 유엔에 제출되었고, 유엔은 이 문제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잘 알고 계시듯, 1990년대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성폭력 및 강간과 관련한 두 주요 결의안을 채택했습니다. 바로 결의안 1820호와 1888호입니다. 결의안과 법이 마련되었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 대한 사회적 해법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많은 교육과 사회 사업이 필요하죠. 여성을 종속적인 위치에 두는 것은 국가만이 아닙니다. 사회이기도 합니다. 국가와 사회 모두 수직적이고 가부장적이며 서로에게 일조합니다. 여성은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갈 협력자를 사회 내에서 찾아야 합니다. 인정(認定)으로서의 정의 백영경 이러한 '위안부' 문제, 젠더화된 전시 폭력, 또 다른 여성들의 고통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정의의 문제로 고민하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정의의 의미를 어떻게 정립할 수 있을지요? 이 문제들에 대해 정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고, 또한 정의는 어떤 형태를 취할 수 있을지도 궁금합니다. 어떤 초국가적인 형태가 되어야 할까요, 혹은 보다 지역적인 형태를 취해야 할까요? 당신의 의견을 나누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라다 이베코비치 정의에 관해서라면 당연히 법이 존재합니다. 국제 재판소에서는 국제적 정의가 실현되어야 하죠.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희생자들은 아직도 삶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보스니아에서는 상당수의 여성이 민족주의 전쟁 중에 남편과 아들을 잃었습니다. 죽은 남성들의 미망인과 어머니들은 그곳에 남았거나 다른 곳으로 흩어졌습니다. 더는 그곳에서 살 수 없었으니까요. 그들에게 정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정의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정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돌려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NGO와 페미니스트 단체들이 유족과 함께 인정(認定)을 위한 작업을 해나갈 수 있죠. 여기서 인정은 희생자로서의 지위와 상실에 대한 인정, 정치적 주체로서의 인정을 말합니다. 이러한 인정은 그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공개적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법정이나 재판소에서 인정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학살을 자행한 장본인들에게서 인정의 여론을 얻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양한 여성 단체 중 '우먼인블랙(Women in Black)'이라는 이름으로 베오그라드에서 활동 중인 단체가 있습니다. 동료들과 놀라운 업적을 이뤄 온 스타샤 자요비치(Staša Zajović)가 설립했죠. 이 단체는 전쟁 기간 내내 활동했고, 현재는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 전역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인터뷰, 연구 자료, 거리 행동에서 빼놓지 않는 것은 세르비아의 전쟁 범죄를 공개적으로 규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리 행동에서 정기적인 행사는 단체 회원들이 검은 옷을 입고 베오그라드의 주요 광장에 서서 지역 민족주의자들을 고발하는 증언에 나서는 일입니다. 활동가들은 국가의 이름으로 국내의 다른 지역과 타 국가에서 자행되었던 일들을 증언합니다. 매우 용감한 행동이라 할 수 있는데, 그들은 민족주의자들의 공격과 폄하에 자주 노출되어 왔고, 주류 언론을 통해 알려지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활동이야말로 정의의 필수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정이 무엇을 하는지와는 무관하게, 이러한 활동을 통해 전범인 가해자들에게 그들이 응당 짊어져야 하지만 알고 싶어하지 않은 책임을 상기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백영경 이런 유형의 폭력 문제들이 법정으로 가면, 초점이 지나치게 '보상'에, 즉 한국적 맥락에서는 '금전적 보상'에 맞춰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정의 여론 형성을 가장 중요한 첫 단계로 강조해주신 점이 매우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라다 이베코비치 매우 중요하지만 완료되지 않은 단계죠. 아직은 그렇다고 보여요. 그것이 이 문제가 미해결로 남아 있는 이유이고, 여성 법정이 아직도 미완으로 남아 있는 이유기도 합니다. 여성 단체들은 계속해서 동일한 사안에 대해 활동하면서, 다른 새로운 사안들도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 세대로 이 과업을 이어가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세대 교체가 진행 중이고 이는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이민자 문제도 다루어야 합니다. 유고슬라비아 국가들은 유럽에 정착하고자 하는 이민자들의 주요 경로인 '발칸 루트(Balkans Route)'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가는 나라마다 좌절을 경험합니다.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결국 어떤 해결책도 없이 이들 나라에 발이 묶이게 됩니다. 이것이 지금 유럽 전역과 국경 지역에서 이민자들이 겪고 있는 끔찍한 상황입니다. 이민자 여성들이 겪는 문제도 있습니다. 자녀를 둔 많은 수의 여성들이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이주하는 과정에서 반복적인 강간, 인권 침해, 믿기 힘든 수준의 폭력과 같은 끔찍한 경험을 합니다. 그렇기에 이 여성들에 대한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고, 여성 단체들이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를 돕는 것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입니다. 전통적으로 이런 일은 돌봄 노동의 일부로 간주되죠. 우리는 전통에서 벗어나길 원하지만 이 경우에는 절대 그럴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전통도 유용할 때가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인은 현재 이민자로서 예외에 가깝습니다. 다른 지역 출신의 이민자에 비해 우크라이나인은 유럽연합에서 상대적으로 환대받는 대상입니다. 우크라이나인에게는 유럽 전역을 이동하고, 유럽연합 내에 발을 들이고, 숙박 시설은 물론 일자리를 찾을 수도 있는 권리가 주어집니다. 그들은 또한 백인이기도 합니다. 다른 이민자들은 이와 같은 관심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런 대우가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르겠습니다. 유럽 우월주의자들이 곧 우크라이나인에게 등을 돌린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우월주의자들은 곧 그들을 침입자로 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지금으로 봐서는 아직까지는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을 듯합니다. 유럽인들이 그들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유럽 전역의 여성 단체가 이들 이민자들을 돕고 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민족주의 백영경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어떤 동기로 움직이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세계를 대상으로 착취의 기회를 확대하고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강력한 욕구가 작용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러시아의 상황에 대한 견해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무엇이 러시아를 지금과 같은 국수주의(ultra-nationalist) 전쟁 범죄 기계로 변질시키고 있는지, 그 동기에 대한 관점을 나누어 주셨으면 합니다. 라다 이베코비치 확실히 전쟁 기계라고 말할 수 있죠. 제 견해로는, 러시아의 경우 민족주의가 전 국민을 균질화하는 도구로서 이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세계화의 산물인 일반화된 민족주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푸틴을 비롯해 유사한 전쟁을 치렀던 유고슬라비아 출신 국가의 지도자들은 지지를 얻으려 민족주의를 옹호합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 우리는 이런 전략이 얼마나 빠르게 성공을 거두는지 목도했고, 충격을 받았죠.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항상 TV를 통해 접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에는 탱크 한 대와 카메라 한 대만 있으면 전 국민을 선동하고 국가적 문제라는 프레임을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탱크 사진 한 장과 동영상 한 편, 그리고 지역 민족주의의 개념이 무엇이든간에, 이 모두에 한마디만 덧붙이면 충분했습니다. "자, 보십시오, 이것이 그들이 우리 국민에게, 여자들에게, 아이들에게 한 짓입니다." 이런 식이었죠. 유고슬라비아 전쟁 초기에 바로 이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푸틴은 손쉬운 전략인 민족주의를 통해 지지를 모으고 있습니다. 그의 목표가 러시아 제국을 재건하고 소련이나 그 영토를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재건하는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푸틴이 과연 어디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우크라이나에서 그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무기한으로 지속될 것으로도 보입니다. 이런 일련의 계획은 민족주의의 측면에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목표는 직접적으로 국제적이거나 초국가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그 영향은 전 세계적일 것입니다. 한편, 푸틴 개인의 문제도 확실히 부분적으로는 이런 사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고슬라비아에도 지나친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혔던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푸틴이 멈추지 않을 것이라면 해결책은 없습니다. 푸틴에게는 뛰어난 수완이 있고, 현재로서는 러시아 국민 다수의 지지도 있으니 아마 오랫동안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크라이나가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입니다. 유럽연합이 공약을 내놓고는 있지만, 이들 국가들이 개입을 원치 않는 까닭에 우크라이나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전 세계적에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미국이 관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사태에 개입할 것이고, 어느 정도일지는 알 수 없지만 중국 역시 개입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 국민은 전쟁의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와 다름없이, 여성이 치르는 대가는 더 큽니다. 백영경 무척 복잡한 상황이라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저는 자주 가부장제를 독버섯에 비유하곤 하는데요, 하룻밤 사이에 생겨나 그 자리에 있나 하면 갑자기 커버리죠.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이런 비슷한 점을 지적해 주신 것 같습니다. 라다 이베코비치 민족주의는 그 자체로만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한 가지 형태의 민족주의는 다른 반대되는 형태의 민족주의를 불러일으키죠. 민족주의가 한 가지 형태만을 취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적어도 둘 이상이거나 그보다 더 늘어나야 만족하죠. 전 세계적으로 이 민족주의야말로 우리 시대의 전쟁 기계라 하겠습니다. 어떻게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여성에게는 이를 가능케 할 에너지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여성은 민족주의적 편협함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은 국경을 넘어 협력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유고슬라비아 전쟁 기간에도, 이 전쟁에 개입된 국가의 여성들조차 국경을 오갈 수 있었습니다. 남성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죠. 지금 우크라이나인의 상황처럼, 남성은 전쟁에서 싸워야 하는 존재이기에 국경을 넘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성은 할 수 있습니다. 여성은 공격적인 존재로 보이지 않죠. 이것이 여성이 부정적이고 불리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누리는 이점입니다.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를 오가면서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연대를 형성하며, 함께 저항할 수 있습니다. 운동(activism)을 통한 학습: 세대 간 여성의 연대 백영경 이베코비치 교수님께서는 오늘 다양한 생각과 지성뿐 아니라 인내와 용기까지 아낌없이 나누어 주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지금과 같은 어려운 시기에 이 위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동료 여성 시민,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나 제안이 있으실까요? 라다 이베코비치 우선 백영경 교수님께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또한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우리는 비슷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고, 그래서 많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젊은 여성들에게 내가 해줄 만한 이야기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기꺼이 나누고 싶지만요. 그래도 꼽아 보자면, 내가 보기에 페미니즘이 한 가지 특별한 난제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운동을 이어나가는 일입니다. 어떤 페미니스트 단체가 특정한 일을 해온 경우, 자신들을 대신할 사람들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단체에 젊은 사람들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든, 젊은 세대에서는 기꺼이 도전에 응하고, 계속해서 나아가는 이들이 드물다는 것입니다. 젊은 여성들은 다른 방식으로 대처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어떻게 표현할지 감이 잡히지 않네요. 이러한 어려움은 세대 교체, 아마도 세대 차이에서 연유하는 듯합니다. 또한 각 세대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들의 차이에 기인할 수도 있습니다. 나이가 많은 우리는 오늘날 젊은 여성들을 괴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거나 상상조차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한국의 '4비(비혼, 비출산, 비연애, 비섹스)' 운동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된 이유입니다. 이런 접근은 매우 독창적이기도 하고, 결혼을 비롯하여 그들이 원치 않는 이 구체적인 네 가지가 시사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세대가 상상할 수 있는 것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놀랍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 세대에서 성취해야 하지만 성취할 수 없을 모든 일들에 대한 약속으로도 느껴집니다. 저는 인류 공통의 입장에서 나이 든 활동가와 젊은 활동가가 가능한 한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서로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젊은 세대가 기성 세대에게 배울 뿐 아니라, 기성 세대도 젊은 세대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운동을 통한 학습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운동을 통해 정치에 대해 배웁니다. 이는 우리 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특징입니다. 우리는 운동을 통해 개인적인 정치적 경험을 얻어 정치에 대해 학습합니다. 이런 움직임은 최근 수십 년 사이에 두드러진 새로운 특징으로,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안을 두고 함께 일할 협력자를 얻게 되면, 서로가 중시하는 사안과 관점을 경시하는 대신 존중하고, 힘을 합쳐야 합니다. 우리 세대는 "아니요, 당신들은 여성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어요"라는 말을 듣곤 했습니다. 이것이 여성 운동과 액티비즘이 오늘날에도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결코 해결되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우리는 계속 싸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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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일본인 ‘위안부’ 다미 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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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 씨에게 전화가 걸려오다 1991년 1월 14일부터 16일까지 일본군 위안소 및 ‘위안부’에 관한 정보 수집을 목적으로 네 개의 시민 단체가 실행위원회를 결성하여 ‘위안부 110번’을 운영했다. 필자 또한 ‘종군위안부문제를생각하는모임’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사흘 동안 점심 먹는 시간도 아껴가며 수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위안부 110번 조사 카드’는 현재 100여 장 남아 있다. 전화를 받은 담당자가 한 장 한 장 작성한 A4크기의 카드다. 카드에는 정보 제공자의 이름과 주소, 보고 들은 때와 장소, 소속 부대(당시 직업), 위안소의 형태, ‘위안부’의 연령과 민족, 기명(妓名), 모습, 에피소드, 군의 관리(현지에서의 강간 등), 재판(기타), 접수일 등을 적는 칸이 있다. 정보 제공자 대부분은 일본군 장병 출신이었지만, ‘위안부’ 당사자의 정보 또한 두 건이 접수됐다. 한 건은 “한 번 찾아와 주세요”라는 말을 남긴, 미야기현(宮城県)에 사는 송신도(宋神道) 씨의 정보다. 3월 말에 필자는 송 씨를 찾아갔고, 약 1년여 후인 1992년 4월 5일, 송 씨는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며 도쿄지방법원에 제소했다. 다른 한 건은 도쿄에 거주하는 당사자 다미(가명) 씨가 직접 보내온 정보다. 필자는 우연히 다미 씨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언론에는 한국 사람 얘기만 나오던데, 국내에도 위안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실까 해서요.” 다미 씨는 제보 이유를 먼저 밝혔다. 그의 조사 카드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나는 이상하게 (다른) ‘위안부’보다 과거 일에 신경을 쓰는 것 같다.” 그후 필자는 다미 씨가 운영하는 가게로 찾아갔다. 마침 문을 닫는 시간이었다. 통화할 때의 느낌과는 달리, 민첩하게 뒷정리를 하는 모습이 발랄해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그런데 그가 마주 앉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나이 들어간다는 건 서글픈 일이에요. 몸이라도 고달프면 정신없이 지나가 버리겠지만… 옛 기억이 유령처럼 스멀스멀 기어 나오거든요.” 여성 고객을 상대하는 점포 세 곳을 운영하며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던 다미 씨를 위협했던 것은, 어린 시절에 겪은 일들 그리고 패전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기억이었다. 어린시절의 기억 부모님은 다미 씨가 여섯 살, 남동생이 네 살 때 이혼했다. 아버지는 투기꾼이라고 해야 할까, 일확천금을 꿈꾸며 일정한 직업도 없이, 다미 씨와 동생을 할머니에게 맡겨 놓고 가끔씩만 집에 왔다. 할머니는 곧 돌아가셨고, 다미 씨와 동생은 증조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이런저런 일로 돈을 벌면 게이샤의 전차금을 갚아주고 집에 들였다며 떠들어댔고, 경기가 안 좋을 때면 집안을 들여다보지도 않았어요. 엄마라고 부르라는 사람이 두세 명 있었는데 다 싫었어요. 분 냄새가 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는 돈도 보내지 않았다. “할머니한테 미안해서 월사금을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하는 수 없이 월사금 얘길 꺼내면 허리가 굽은 증조할머니는 사촌집에 돈을 빌리러 가셨다. 어머니는 친정으로 돌아가 재혼했고, 아이도 두세 명 더 낳았다. 그런 어머니에게 증조할머니는 이따금 나와 동생 편에 쌀을 들려 보내주곤 했다. 가난한 나날이었지만 별 탈 없이 지냈다. “할머니와 살았던 5년이 가장 행복했어요. 저는 손주가 아니에요. 증손주죠.” 다미 씨는 소학교 5학년 1학기를 마치고, 농가에 애보개로 들어갔다. “할머니를 도와드리고 싶었어요.”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이 할망구가 내 딸을 어디로 보낸 거야!” 라며 증조할머니를 두들겨 패고, 농가로부터 받은 전차금을 쌀로 돌려주고 다미 씨를 데려왔다. 그리고 아버지는 증조할머니에게 다미 씨와 동생을 떠맡긴 자기 책임은 나 몰라라 하고, 술을 마시면서 큰소리를 쳤다. “이 할망구가 내 딸을 애보개 따위로 보내? 오기로라도 내가 오차노미즈(お茶の水)에 보내겠어!” 다미 씨는 오차노미즈가 어떤 곳인지 몰랐다. 오차노미즈는 전후에 국립 오차노미즈여자대학이 된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를 말한다.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다미 씨는 또래 아이들을 만나는 게 싫었다. 밖에서 애를 보고 있을 때 소풍 가는 동급생의 행렬을 본 적이 있었다. 다미 씨는 아기를 등에 업은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싫어 몸을 숨겼다. 학교에 갈 수 있을까, 갈 수 있다면 일 년 늦어지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오모리(大森)에 있는 게이샤 집에 연계(年季) 양녀로 맡겨졌다. 아이를 고용주의 호적에 올렸다가 계약 기간이 지나면 원래의 호적으로 되돌리는 고용 형태였다. 자식이 없었던 주인 부부는 다미 씨를 귀여워했다. 샤미센(三味線, 일본 전통 현악기의 한 종류)을 배우기도 하고, 게이샤가 오비(帯, 기모노의 허리 부분을 감싸는 띠)를 매는 것을 돕거나 심부름을 하기도 했다. “그곳에 있을 때는 행복했어요. 몸을 파는 사람도 있었지만, 기예를 파는 사람도 있었어요. 유녀(女郎, 유곽에서 일하는 여성)와는 달라요.” 유곽에서도, 샤미센, 고우타(小唄, 에도시대 속요), 춤 같은 기예를 갖춘 게이샤가 접객을 하는 화류계에서도, 처음 손님을 받는 것을 ‘미즈아게(水揚げ)’라 불렀다. “열네 살 때 미즈아게를 했어요. 열네 살이라구요.” 바로 그 무렵, 아버지가 제재업을 시작한다면서 후나바시(船橋)의 업자와 함께 나타났다. 다미 씨는 열네 살이었다. 업자는 아버지와 함께 제재업을 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후나바시에 있는 다이키치로(大吉楼)라는 유곽 주인의 조카였다. 아버지는 이미 다미 씨를 다이키치로의 몸종으로 보내겠다는 약속을 했고, 전차금뿐만 아니라 거액의 사업자금도 빌렸다. “게이샤 집에서는 내가 집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하지만 나는 빚차금의 저당으로 잡혔어요. (게이샤 집보다) 유녀(女郎)가 훨씬 더 돈이 되잖아요.” 다이키치로는 격식 있는 가게였다. 다른 가게에서는 긴 속옷 차림으로 가게 앞에서 호객행위를 시켰지만, 다이키치로에서는 가부키(歌舞伎) 등에서 연기하는 요시와라(吉原)[1]의 오이란(花魁, 유곽에서 일하는 유녀들 중 계급이 높은 이를 일컫는 말)처럼 머리를 커다랗게 묶고, 오비를 앞에서 매고 겉옷을 제대로 입고 있었다. 몸종끼리 싸움이 붙어서 다미 씨가 괴롭힘을 당하자 여주인이, “오이란이 될 아이와 싸우면 못 써” 라고 나무랐다. 오이란이 되기 전에 계약 기간이 끝나는, 전차금이 적은 몸종도 있었을 것이다. 게이샤 집에서 다이키치로로 옮겨간 후, 어머니를 만나러 간 적이 있었다. 아버지와 헤어진 어머니는 친정으로 돌아가 재혼을 한 상태였다. “여름에 찾아갔을 때 엄마가 저더러 ‘누구?’ 하는 거예요. 저를 못 알아보시더라고요. 비참했어요. 눈물이 뚝뚝 떨어졌어요. 어떻게 자기 자식을 잊어버릴 수가 있을까 싶어서. 열 살에서 열네 살쯤 되면 얼굴이 몰라보게 달라지나 봐요.” 젖먹이를 안고 있던 어머니는 다미 씨에게 말했다. “술 파는 일은 절대 하면 안 돼.” “술 파는 일을 하지 말라니. 이미 유곽에 들어갔다고는 말을 못했어요. 아버지는 그런 곳에 딸을 팔고도 죄책감이 없었을까요? 자기가 놀러 다니는 곳이니 즐거운 곳이라고 생각한 걸까요? 좋은 단골손님을 만나면 그만이라는 듯이.” 열여섯 살, 위안소로 보내졌다 1944년 가을, 다이키치로는 군의 요청으로 지바(千葉)현 모바라(茂原)에 위안소를 개설했다. 모바라에 해군 항공기지가 완공된 것은 1943년이다. 통상 해군의 항공기지는 해당 기지를 전용하는 항공대가 있지만, 모바라항공대가 신설되지 않아 기존 항공대가 기지를 사용하고, 제로센전투기와 함재폭격기 약 80기 그리고 4,000여 명의 장병이 배치되었다. 기지 근처에 일곱 채의 위안소가 개설되었다. 길을 사이에 두고 다이키치로 쪽으로 네 채, 건너편에 세 채. 도쿄의 스사키(洲崎)유곽에서 가게를 접고 온 업자들이 많았다. 다이키치로는 모바라 위안소에서도 같은 이름을 사용했다. 열여섯 살이 된 다미 씨는 모바라의 위안소로 보내졌다. 다른 위안소에도 또래의 소녀들이 각각 예닐곱 명씩 있었다. “말하고 싶지 않지만 제 첫 경험이 위안소의 주인이었어요. 강간당한 거죠. 다들 그랬던 것 같아요.” 모바라에 오기 전에 성경험이 없었던 다미 씨는 다이키치로 주인에게 강간을 당했다. 다른 소녀들도 그랬던 것 같다. 다이키치로의 주인은 후나바시에 남았고, 주인의 조카가 모바라의 다이키치로를 관리했다. 위안소 이용자는 물론 일반 장병이 많았다. 특공병도 때때로 위안소에 왔다. 특공병에게 출격 명령은 대부분 죽음으로 이어졌다. “죽기 전에 놀러 왔다는 사람이 많았어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아무런 즐거움도 없었죠. 제 또래였어요. 내일 출격 명령이 떨어질지도 모르고.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요.” 위안소의 소녀들은 출격 명령을 받은 특공병에게 깨끗한 무명천에 손가락을 베어 일장기를 그려서 무사하기를 기원하며 선물했다. “○○씨, 즐거웠어요”라는 편지를 놓고 가는 특공병, 모바라를 떠나는 날짜를 알려주는 특공병도 있었다. 그 시각에 밖에 나가 보니, 전투기에서 흰 머플러를 흔들며 위안소 상공을 여러 번 선회하고 사라졌다. 기쿠치(菊池) 하사관은 위안소의 소녀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술에 취해서 신발을 신은 채 들어왔고, 아무 방이나 함부로 문을 열어 민간인을 발견하면 내쫓곤 했다. “아, 싫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죽음을 예감하고 발악한 거구나 생각했어요.” 어느 날, 위안소에서 다미 씨를 몰래 데리고 나와 자신의 숙소인 민가에 데려간 특공병이 있었다. 짚신 두 켤레를 방 앞에 가지런히 놓아 방에 있는 것처럼 꾸미고, 살며시 신발을 들고 창문으로 나왔다. 기찻길을 따라 손을 잡고 달려 특공병의 숙소인 민가로 향했다. “평범한 여자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기뻤어요.” 숙소로 쓰는 민가의 아주머니는, 땋은 머리의 다미씨를 보고, “오야마(유녀의 총칭)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여섯 채에서는 그런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다이키치로에서는 다미 씨의 행동을 주인의 조카가 눈치 채고도 매상이 제일 높아서 눈감아 주었을지도 모른다. 다미 씨는 다이키치로가 다른 여섯 채에 비해 관리가 엄하지 않다고 느꼈다. 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 같은 처지인 건너편 위안소의 소녀와 친해져 그쪽에 놀러갔을 때 깜짝 놀랐다. 다이키치로는 욕실과 별도로 손님을 상대한 뒤에 씻는 곳이 있었는데, 건너편 위안소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욕실의 남은 물로 씻는다는 말을 듣고 불결해서 병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다이키치로에서는 자신의 전차금 잔액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고 싶어하면 장부를 보여주었다. 싫은 손님은 피하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헤아려주었다. 그러나 좋은 손님만 가려 받아서는 빚이 줄지 않는다. 전황이 나빠지면서 전사(戰死) 소식이 위안소에도 전해졌다. 위안소에서는 날마다 늘어나는 영정에 소녀들이 향을 피웠다. “많이 죽었어요. 임시로 연인이 되었죠… 빼곡히 늘어선 사진에 향이라도 피우려고.” 모바라 상공에 연합군 전투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 비행기가 추락하는 게 다 보였어요. 그루먼(연합군 전투기)이 사람을 쫓아왔어요.” 위안소 요금이 저렴하게 책정되었기 때문에 일곱 채의 위안소에서는 높은 요금을 받을 수 있는 민간인도 몰래 들이고 있었다. 다미 씨의 손님이었던 민간인이 “이 전쟁은 질 거야. 푸른 눈의 군인이 이곳에도 많이 몰려올 거야”라고 예언했다. 아내와 별거 중이던 그 남자는 다미 씨의 전차금을 지불하고 다미 씨를 집으로 데려갔다. 자유의 몸이 되고 싶어 필사적으로 일했던 다미 씨의 전차금은 얼마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별거하던 아내가 다시 그 남자에게 돌아왔다. 1945년 8월 15일, 옥음방송[2]이 끝난 뒤 군의 임무에서 벗어났는데도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위안소에서 지내던 사람들도 있었다. 계속 머무는 손님들의 속옷을 세탁하는 동료들의 모습을 다미 씨는 부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패전 이후의 생활 다미 씨는 패전 직후, 라면가게와 이발소에서 잠깐 일했으나, 다시 고탄다(五反田)의 화류계로 들어갔다. “유녀는 두 번 다시 유곽으로 돌아가지 않지만, 게이샤는 화류계로 돌아간다고 해요.”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샤미센을 연주할 수 있는 게이샤가 적었다. 화류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손님의 상당수는 전장에 파병되었고, 사치금지령도 발령되었으며, 전시에 요정과 게이샤 집도 개점 휴업에 가까운 상태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게이샤를 키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샤미센을 연주할 수 있는 다미 씨는 인기가 많았다. 화류계에서는 요정에서 예기를 데려갈 때 조합의 권번을 통해 연락을 하는데, 기다리다 못한 요정에서는 지배인이 직접 다미 씨를 데리러 왔다. 게이샤들은 대부분 게이샤 집에서 살았다. 신참 게이샤는 맨 처음에 ‘오히로메(お披露目)’라는 첫 선을 보인다. 이때 의상비 등으로 목돈이 필요하다. 다미 씨는 대다수의 게이샤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돈이 없었기 때문에, 벌이를 게이샤와 게이샤 집이 반씩 나누는 것을 조건으로 게이샤 집에 들어갔다. 요정이 중개하는 투숙객의 주문에 응해야 하는 일도 있었다. “파는 물건, 사는 물건이라는 태도가 있었죠. 그럴 때는 밤새 방을 나와 복도에 서 있었어요. 빨리 잠들어 줬으면 하면서요.” 다미 씨의 동생이 늑막염을 앓은 것은 패전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값비싼 스트렙토마이신 주사를 매일 맞았다. 어느 날 병원에 갔는데, 동생이 “오늘은 아직 주사를 안 맞았어”라고 했다. 그 날의 주사 값을 내기 전이었다. 다미 씨는 “주사 값이 하루 늦었다고 주사를 놔주지 않는다는 말인가요?”라고 의사에게 거친 어조로 물었다. 의료보호제도가 있다는 것을 그날 간호사가 알려 주어 처음 알게 되었다. 다미 씨는 그런 제도가 있는 줄 몰랐다. 동생은 낮에 일하고 밤에 대학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몸에 무리가 온 것이었다. 다미 씨는 규슈(九州)에서 부모가 치과를 운영하고 있는 집의 아들과 사귀게 되어 도쿄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투병중인 동생을 두고 가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지만 규슈로 향했다. 필자에게 결혼식 사진을 보여주면서 다미 씨는 예복 차림의 수많은 참석자들을 보며 “죄다 저쪽 친척들뿐”이라고 혼잣말을 했다. 한동안 시댁에서 살았는데 ‘며느리’로서 적응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도쿄로 돌아왔다. “돈 때문에 지옥을 경험해서 아끼고 또 아껴요. 저 보고 구두쇠 클럽 회장이래요.” “자기가 일해서 번 돈은 쓰는 게 아니야. 저축한 돈에서 나온 이자를 써야지”라고 가르쳐 준 사람이 있었다. 악착같이 일해서 어느 정도 재산을 모았다. “그런데 나이를 먹는 게 너무 슬퍼요.” 오랜 세월, 여성 고객을 상대하는 가게를 운영해 온 다미 씨는 그동안 많은 여성을 만났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고객들도 있었다. 전쟁 후 게이샤로 있을 때, 우연히 모바라의 위안소에 함께 있던 친구를 만나, 줄곧 친하게 지내왔다. 다미 씨가 게이샤였다는 걸 아는 사람도 있다. “모바라에서의 일은 아무도 몰라요. 그녀만 알아요. (다른 사람에겐) 말할 수 없어요.” 다미 씨는 위안소에서 있었을 때의 일을 그 친구와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친구는 “아, 싫어 싫어. 몸서리 나”라며 이야기를 피했다. “떨쳐내지 못하고 있으니까 이상해지는 거야” “잊자, 잊으려고 애쓰고 있으니까 그 얘기는 꺼내지 말아줘.” 친구는 자신이 번 돈이 “부모 형제에게 도움이 되었으니 만족한다”고 말한다. 게이샤는 자기도 몸을 파는 경우가 있었음에도, 몸을 파는 일을 경멸했다. 화류계나 위안소에 가지 않아도 되었던 여성들뿐만 아니라, 위안소를 이용한 장병들, 유곽에서 놀던 남성들조차 성 착취의 대상이 되었던 여성들을 천시하는 풍조가 사라지지 않았다. “(한 사람에게) 능욕을 당하면 죽고 싶잖아요. 매일 강간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구요. 죽고 싶었어요. 정말 죽도록 힘들었어요, 하루하루가. 어린애가 힘든 일을, 그런 힘든 일을 겪었으니까요.” 다미 씨가 화류계에서 미즈아게를 하는 나이가 열네 살이라고 말했을 때, 필자는 그도 화류계의 풍습에 따랐는지 확인하지는 않았다. 모바라의 위안소에서 약 8개월을 지냈을 때 다미 씨의 나이는 열여섯 살이었다. 각주 ^ 편집자주) 일본 에도 시대 때 조성된 거대 유곽촌을 일컫는 말. 교토의 시마바라유곽(島原遊郭), 오사카의 신마치유곽(新町遊郭)과 함께 3대 유곽으로 꼽혔으며,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한 지역으로 ‘유곽촌’의 대명사 혹은 번화가를 상징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 편집자주) 1945년 8월 15일, 정오 뉴스에 방송된 천황의 종전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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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논평 돌이킬 수 없는 변신과 점거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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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거 운동과 평화의 소녀상 “운동에 참여하고 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이전처럼 살지 않는다.”[1] 2011년 12월 14일 1000회 수요시위에서 제막된 평화의 소녀상이 올해로 열 돌을 맞이한다. 1000회 수요시위 이후 10년 동안 일본군‘위안부’를 기억하기 위한 소녀상이 전국적으로 다양한 장소에 만들어졌다. KBS데이터저널리즘팀이 제작한 소녀상 지도[2]를 통해 지역의 다양한 주체들이 세운 전국의 평화의 소녀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백서도, 국가에서 운영하는 일본군‘위안부’ 역사관도 없는 한국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잊지 않기 위한 노력은 그간 피해자와 시민활동가들의 손으로 이루어져 왔다. 대구의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의 경우, 개관을 위해 시 정부에 지원과 도움을 요청했을 때 도움을 받지 못했다. 평화의 소녀상 건립은 역사관까지는 건립할 수 없더라도, 내가 사는 지역에서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기리고자 하는 열망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이 열망들이 모인 곳이 아마도 소녀상 지도 속의 장소들일 것이다. 평화의 소녀상을 만들기 위해 뜻을 함께할 사람을 찾고, 기금을 모으고, 시민들이 모이기 쉬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알리기에 가장 좋은 장소를 찾고, 소녀상을 설치하는 것은 녹록한 일이 아니다. 부산의 일본 영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설치 당시에는 소녀상 설치를 위해 몸싸움을 불사한 활동가들이 있었다. 1000회 수요시위를 기념하며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은 이미 세워지기 이전부터 일본의 반대가 있었고,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가 사실상 파기된 지금도 소녀상 지킴이들의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소녀상 설치를 위해 몸싸움을 불사했던 활동가들과 소녀상 지킴이들이 지킨 것은 단순히 사람 모양을 한 동상인가? 그렇지 않다. 이들이 지키고 있는 것은 평화의 소녀상이 만들어내는 ‘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요시위가 열리기 이전의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은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20년간 수요시위 때 일주일에 한 번 피해생존자, 활동가, 시민들이 모였다 해산하는 곳이었다. 그곳에 일본군‘위안부’를 기리고 기억하는 평화의 소녀상(혹은 동상)이 세워졌다는 것은, 그 거리를 점거하고 목소리를 냈던 운동을 영구히 지속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제는 수요일이 아닌 날에 일본 대사관 앞을 지나도 반드시 소녀상을 볼 수밖에 없다. 어떤 이들은 매우 불편해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아, 이곳이 그곳이구나’, ‘그 장소구나’하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떠올릴 것이다. 이제 수요시위는 ‘일본대사관 앞’이라기보다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에서 이루어진다. 수요일 12시에 잠깐 점거당하고 금방 일상의 거리로 돌아가곤 했던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2길 22라는 장소는 평화의 소녀상이 점거하게 되었다. 전국에 만들어진 평화의 소녀상이 단지 설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 행동의 장소가 된다는 점에서 시민들이 주도했던 평화의 소녀상 설치는 아큐파이 운동이기도 하다. 식민주의와 언아큐파이(unoccupy) 아큐파이(occupy)는 ‘점령(占領)’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일본 제국주의의 강제 점령기를 생각하면 ‘아큐파이’라는 단어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말이기도 하다. 전후 일본의 많은 지식인이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해 얘기해 왔지만, 이와 별개로 식민주의와 ‘식민지 책임’을 인식하는 문제 제기는 드물었다. 이러한 역사 속 일제강점기가 한반도가 점령(occupy)당했던 기억이라면 평화의 소녀상은 이러한 식민주의와 점령에 저항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언아큐파이(unoccupy)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전국을 넘어 해외의 시민들까지 동참해온 평화의 소녀상 설치는 아큐파이 운동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동시에, 식민주의와 점령에 문제를 제기하는 언아큐파이(unoccupy)에 대한 요구 역시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아큐파이(occupy)는 동시에 언아큐파이(unocuupy, 점거해제, 해방)여야 한다는 아큐파이 운동의 역설적 과제[3]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 평화의 소녀상을 둘러싼 일련의 활동이다. 김세진 씨의 『평화의 소녀상을 그리다』(보리, 2018)를 보면 많은 지역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평화의 소녀상을 만들어 낸 일에 한번 놀라게 되고, 평화비를 설치할 의미 있는 장소를 찾았던 노력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식민지 시기 경찰서가 있었던 담양 중앙공원에 세워진 소녀상, 1919년 3․1운동의 만세 현장에 세워진 양평의 소녀상, 일본군 주둔지 - 미군 주둔지를 거쳐 시민에게 돌아온 인천의 부평공원에 세워진 소녀상, 식민지시기 강제노동의 현장이었던 광명동굴에 세워진 소녀상 등은 일제강점기 식민주의를 환기하고 역사의 망각에 저항하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이 장소들은 일제강점기(occupy)와 식민주의에 문제를 제기하는 ‘언아큐파이’(unoccupy)로서 평화의 소녀상을 대면하게 한다. 한편, 이는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되돌아보게 한다. 가부장제와 가족주의, 군사주의와 성차별주의로 구성된 교육 시스템과 사회 시스템을 전제로 키워진 ‘나’의 삶이라는 것은 그 같은 시스템에 점령당한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가부장제 속에서 딸의 역할과 여성의 역할을 받아들여 온 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식민주의의 역사와 구조에 대해 의문이 없었던 나는 어쩌면 이러한 것들이 유지되는데 기여해온 것과 다름없다. 평화의 소녀상이 이런 나에 대해 다시 인식하고 문제를 제기하게 한다면, 어쩌면 내 마음과 머릿속까지 언아큐파이(해방)하는 존재, 나를 구성해 온 시스템을 전복시키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평화의 소녀상과 해방된 관객의 정치적 자각과 활동이 지금까지 우리를 구성해 왔던 이데올로기와 담론을 거역[4]하고 부정하게끔 하는 것이다. 해방된 관객과 네트워킹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반대 시위에서 퍼포먼스를 했던 어효은 씨의 「2주간의 소녀상 관찰기」는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나의 삶을 살았다. 소녀를 점점 잊어갔다. 다시 마주할 자격이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일상’이라는 것은 아마도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계가 없는 개인적인 시간으로서의 ‘일상’일 것이다. 어효은 씨는 일상으로 돌아간 자신이 일본군‘위안부’를 다시 마주할 ‘자격’이 있을까 묻는다. 그러나 어효은 씨가 돌아갔다고 하는 그 ‘일상’은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반대 시위에서 퍼포먼스를 하기 전의 그 ‘일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반대 운동의 성과는 정권을 교체하고 바뀐 정권이 합의를 검토하고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한 것에 있지 않다. 운동의 성과를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거기에 참여한 이들의 변신[5]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화의 소녀상을 전국에 만들었던/만들고 있는 사람들, 평화의 소녀상에서 함께 했던 세월호 유가족들, 일본 오키나와의 헤노코 기지 반대 운동을 하는 활동가들, 기지촌 여성 운동 활동가들, 반전 평화 운동가들이 연대하고, 발언을 듣기 위해 귀를 열고, 문제 제기에 입을 열었다. 이처럼 다양한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몸은 그 이전의 몸과 같은 몸이라고 할 수 없다. 구글 검색창에서 ‘소녀상’과 ‘평화비’를 검색해 보면, 이제 적어도 검색된 첫 페이지에는 모두 ‘평화의 소녀상’ 혹은 일본군‘위안부’와 관련된 기사와 페이지가 나온다. 검색 엔진에서조차 평화비나 소녀상이라는 단어는 일본군‘위안부’와 따로 생각할 수 없게 된 단어가 된 것이다. 반세기 동안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말할 수조차 없었던 사회를 구성하는 언어의 질서와 문법(에피스테메)이 이제 겨우 조금씩 바뀌고 있음을 검색 엔진이 가장 먼저 보여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운동의 성과가 있다면 그것은 운동한다는 사실,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6] 웹진 <결>에서 인터뷰한 김세진 씨는 각 지역의 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 간에는 네트워크가 없었고, 어느 지역을 가도 비슷한 시행착오를 겪고 있어 자신이 우연히 네트워킹하는 역할을 맡게 되기도 했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이 『평화의 소녀상을 그리다』를 보고 가까운 평화비를 찾아가 보기도 하고, 집회의 장소로 활용하기도 한다. 김세진 씨가 한 일은 단지 ‘소녀상 그림을 그리다’가 아니라, 평화비를 만드는 움직임과 마주하고, 이어주는 일이었다. 한반도에 나비로 표시된 ‘소녀상 지도’를 보면, 일본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위해 활동해 온 ‘액티브 뮤지엄 여성들을 위한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 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의 ‘위안소 지도’[7]가 떠오른다. 아시아태평양 각지, 일본의 군인이 점령하는 곳마다 만들었던 ‘위안소’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와 그 ‘위안소’ 피해자들의 목소리와 역사가 기록되는 소녀상(평화비) 지도가 드러내는 것이 단지 ‘지도’ 자체만은 아닐 것이다. 때때로 급박하게 진행되는 운동은 사실 변화를 위해 지루하고 긴 시간을 투쟁하는 일이다. 이른바 1987년 이후의 ‘민주화’에 젠더와 인종이 삭제되어 있었음을 꾸준히 문제 제기한 결과 이를 확인하고 감각하는 2019년과 2020년. 평화의 소녀상에서 또 어떤 의제들이 논의될까. 우리는 또 어떻게 바뀌어 갈까. 각주 ^ 고병권, 『점거, 새로운 거버먼트』, 그린비출판사, 2012, 221쪽. ^ KBS데이터저널리즘팀은 2017년 이후 전국 소녀상 지도를 제작하고, 이후 매년 새롭게 세워지는 소녀상을 지도에 업데이트하고 있다. ^ 고병권, 앞의 책, 231쪽. ^ Vicki Sung-yeon Kwon, “The Sonyŏsang Phenomenon: Nationalism and Feminism Surrounding the "Comfort Women" Statue,” Korean Studies 43 (2019): 28. ^ 고병권, 앞의 책, 113쪽. ^ 고병권, 앞의 책, 113쪽. ^ https://wam-peace.org/ianjo/m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