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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좌담 독자에게 듣는다. 2021년 웹진 〈결〉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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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다난했던 2021년. 벌써 2년째 계속되고 있는 COVID-19로 인해 모두의 일상은 급격한 변화를 맞았다. 웹진 <결>은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다각도에서 알리며 많은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 노력해왔고, 그러한 노력이 독자들에게는 어떻게 가 닿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직접 만나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운 시절인 만큼 서면을 통해 독자 의견을 받았지만, 덕분에 지역에 구애받지 않고 해외에 거주하는 독자의 의견까지 폭넓게 청취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짧은 글이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결>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무엇을 기대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 아쉬움을 느끼고 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였음을 고백하며, 소중한 의견을 나눠주신 모든 독자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참여 독자(가나다순) 권지명(충북대학교 사회학 전공 /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 컨퍼런스>펠로우 참여) 김현정(배상과 교육을 위한 위안부행동(CARE) 대표) 정용숙(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2021_결_독자의_편지_1. 다리에서 쓴 편지 우리는 ‘사랑’에 ‘빠지’고, ‘생각’에 ‘잠기’며, ‘웃음’을 ‘터뜨린다’. 말에는 언중(言衆)의 인식이 담겨있는데, 일례로 ‘생각’이라는 명사에 ‘잠기다’라는 서술어를 쓰는 이유는 생각에 몰입한 상태와 물에 잠긴 상태 사이에 유사점이 있기 때문이다. 주변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생각’엔 또 어떤 참신한 서술어를 연결할 수 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서술어는 ‘뻗다’이다. ‘마인드맵’ 덕분에 생각이 나무와 같이 가지를 치고 뻗어 나가는 모습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알다시피, 마인드맵의 필수 조건은 ‘연상(聯想)’이다. 처음 ‘결’을 보았던 날부터, ‘결’은 쭉 내게 생각을 잇고, 뻗기 위한 마중물이 되어주었다. 누군가 ‘결’의 특이점을 하나 꼽으라고 하면, 나는 각주를 떠올릴 것이다. 각주에 짤막하게 적힌 사건과 책, 영상을 찾아보며 생각은 가지를 뻗었고 이는 분명 일반 기사를 통해 얻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답을 내리고 떠난 다른 글들과 달리, ‘결’의 글이 호기심을 자극한다고 느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나를 비롯하여 ‘더 알고 싶다면 따라오라고’ 손짓하는 각주를 무시하지 못한 독자들은,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의 아이들처럼 호기심을 따라갔고, 덕분에 ‘위안부’문제를 동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런 ‘결’의 콘텐츠 중 가장 좋았던 기획은 2021 기림의 날 특집으로 나온 <박필근을 만나다>이다. ‘위안부’ 전체가 아닌 한 명의 이야기를, ‘위안부’ 피해 이후의 삶을 소개하는 기획이 인상 깊었던 이유는 ‘위안부’를 교과서에서 꺼냈기 때문이다. 교과서나 책을 통해 ‘위안부’를 접하다 보면 ‘위안부’를 “일제강점기 시절, 어린 소녀들의 이야기”로 기억하기 쉽다. ‘위안부’를 교과서로 기억하던 독자는 포토스토리, 논평, 에세이 등 다양한 형식으로 쓰인 박필근 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위안부’ 문제를 현실로 끌고 올 수 있다. 포토스토리에 담긴 박필근 님의 주름에서, 눈물 나는 밤에 우황청심환을 드신다는 에세이 속 진술에서 ‘위안부’는 더 이상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피해자 개개인이 어떤 삶을 사는지, 어떻게 사건을 극복하고, 왜 오늘날에도 ‘위안부’ 피해 사실을 밝히기 어려워하는지(생애사를 듣는 과정에서 박필근 님이 “그 말 모하니더(못합니다)”라고 말씀하셔서 인터뷰가 중단되는 상황이 잦았다고 한다) 등은 모두 현재의 문제와 연결된다. 독자는 <박필근을 만나다>를 통해 가부장제적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품고, 피해자가 겪는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며, 정형적인 피해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뭉뚱그려졌던 ‘위안부’ 피해자 각각의 경험을 마주하게 된다. 화투를 치며 행복을 찾는 박필근 님의 삶을 통해 누구는 위안을 얻고 또 다른 누구는 피해자의 정형성을 깬다. <박필근을 만나다>를 가장 좋았던 기획으로 뽑은 이유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독자의 참여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기획을 보고 소감을 남기거나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도록 소통의 장을 열어놓았다면 더욱 깊이 있는 사유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행위가 ‘위안부’ 문제를 보다 ‘나’의 이야기로 끌어당기는 데 도움을 주리라 믿는다. ‘결’을 읽는 사람은 누구일까? 아마 학생이나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 연구원이 아닐까 싶다. ‘결’이 ‘소개’란의 바람대로 “국민들의 관심을 모으고”, “‘위안부’문제를) 내 문제로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면, 독자에게 소통의 기회를 열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물론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음모론이나 2차 가해와 같은 문제로 인해 다시 피해자가 상처받고 거짓 정보가 퍼지는 상황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플랫폼을 통해 의견을 모아 일부를 소개하는 등 소통의 방식을 고민하고, 이를 통해 아무개들의 경험이 공유된다면 기존의 독자는 단순히 콘텐츠를 향유하는 소비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참여자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간 ‘결’은 다리로서 나의 곁에 존재해왔다. 다리가 사라지지 않는 한, 독자는 그 위에서 사색을 이어갈 것이다. 다리는 공간의 경계를 지우는 속성이 있다. 시간과 사람, 사건 사이의 경계를 지우고 끊임없이 현재로, 내게로 ‘위안부’를 끌어오는 ‘결’에 감사를 전한다. 앞으로 ‘결’의 논의는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독자는 풍성한 논의 위에서 촘촘히 자신만의 결을 짜낼 것이다. 덕분에 오늘, 나는 ‘결’ 위에서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결을 이야기할 미래를 그린다. 권지명 충북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있다. 페미니즘과 환경에 관심이 깊다. 전공 수업과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 컨퍼런스>에서 펠로우 활동을 통해 ‘위안부’문제에 대한 이해를 넓혀왔다. 2021_결_독자의_편지_2. 결에 바란다 3년 전, 8월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라는 전문기관이 처음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 만들어졌을 때, 멀리 미국에서 그 소식을 들으며 참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피해 생존자 분들이 명예회복과 법적 해결을 위해 줄기차게 싸워 오신 근 30년이라는 기간 동안 대한민국 정부 산하에 아직 그런 기관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아프게 다가왔던 기억이 있다. 그동안은 매년 갱신해야 하는 1년짜리 프로젝트로서 장기적 사업구상을 하기 어려운 조건이었으나, 이제 연구소는 실력 있는 인재들을 영입해서 자리를 잡아가는 듯 보여 반가운 마음이 크다. 연구소가 수행하는 다양한 역할과 활동이 있겠으나 외부인들이 그것을 피부로 느끼기는 쉽지 않다. 웹진 ‘결’은 연구소의 활동 성과를 보여주고, 국내외에서 필요로 하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다양한 자료와 생각거리를 제공할 수 있는 중요한 창구이기 때문에 ‘결’이 훌륭한 웹진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몇 자 적어본다. 구성 : 웹진이기 때문에 온라인 잡지의 구성을 띠고 있고, 그 안에 좋은 글들이 많이 있으나, 연구소의 취지대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와 관련한 각종 연구사업의 결과를 집대성한 허브 역할이 강화되기를 기대한다. 특히, 30년간 이어져 온 명예회복과 법적 해결 운동에도 불구하고, 가해자 일본정부의 역사 부정과 수정주의가 판치는 작금의 상황에서, 피해 당사자들의 생생한 증언은 어떤 군 문서나 사료보다 중요한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할머니들의 증언을 문서, 비디오, 오디오, 시각자료 등으로 잘 정리하여 각 언어로 제공하는 것은 연구소와 ‘결’의 시대적 사명이라 생각한다. 정치적, 사회적 논란으로서만 ‘위안부’ 문제를 접하는 대중이 이 사이트에 들어왔을 때 간결하게 정리된 언어로 독자를 이끌어 줄 수 있는 소개 글이 있다면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를 위해 영어판 <결>과 같이 ‘연구소 소개’, ‘웹진 결 소개’ 메뉴를 상단 메뉴로 디자인 수정을 하면 좋을 것 같다. 제공 언어 : 우선 한글과 영어 두가지 버전으로 컨텐츠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긍정적이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정작 가해자 일본과 일본 국민들은 엄청난 역사수정주의와 가짜 뉴스의 홍수 속에서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결’을 일본어판으로 제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업이라고 생각된다. 분류 : 현재 인터뷰, 에세이, 논평, 좌담, 자료해제, 전체보기로 나누어져 있는 분류 방식은 좋으나, 각 카테고리 안에 들어 있는 글들의 제목들이 모두 나열되어 있는 페이지가 없어 아쉽다. 각 카테고리에 어떤 글들이 있는지를 보려면 일일이 페이지를 넘겨가며 검색을 하거나 키워드를 미리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해당 카테고리에 들어 있는 글들을 모두 볼 수 있는 페이지가 있다면 훨씬 효과적으로 ‘결’을 활용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앞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와 교육에 있어 연구소와 ‘결’의 맹활약을 기대한다. 김현정 배상과 교육을 위한 위안부행동 CARE 대표 2021_결_독자의_편지_3. '위안부'문제의 논의와 합의의 장이 되기를 바라며 안녕하세요. 저는 웹진 <결>의 독자이지만, 창간과 제작에 참여한 초기 편집위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때 기억의 일부가 웹진 <결> 좌담 코너에 ‘편집회의’로 남았네요. 재작년 초의 일이었을 뿐인데 까마득한 옛날로 느껴지는 건, 그동안 일본군‘위안부’문제와 관련해서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때 교육홍보팀장으로 웹진 <결> 창간과 초기 발간을 담당했던 소현숙 선생님을 비롯해 우리가 고심했던 것은 학술적 엄밀성과 대중적 친화성을 함께 담아내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위안부’문제는 넘어서지 못한 과거를 대표하는 주제입니다. 제국주의 식민지 전쟁범죄 ‘과거청산’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소환되는 주제이죠. 그런 만큼 학계와 예술·문화계의 많은 분이 노력해온 결과가 쌓였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위안부’문제를 여전히 모른다 생각하고 그래서 알려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습니다. 이런 온도 차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걸 좁히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즉 ‘위안부’ 지식의 공공화가 웹진 <결>에 주어진 과제였습니다. 전문 연구 결과를 전하는 <자료해제>, <좌담>, <논평>, 그리고 이 주제에 관여하는 각계각층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에세이>와 <인터뷰> 모두 다섯 개의 코너가 기획된 배경입니다. 웹진 <결>은 학생이나 일반인이 ‘위안부’문제에 관하여 궁금한 게 생겼을 때 ‘믿고’ 이용할 수 있는 지식창고가 되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었습니다. 매 호 차곡차곡 쌓이는 글을 기술적으로 연결해 독자들이 웹진 <결>의 바다에서 파도타기 하듯 연관 지식을 탐색할 수 있도록 설계한 이유입니다. 그렇지만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라서, 저를 포함해 전문 연구자가 쓰는 글은 아무리 쉽게 쓴다고 해도 쉽게 읽히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글을 쉽게 쓰는 문제가 아니라, 지식 자체를 완전히 다른 목적과 독자에 맞게 구성하는 일이었고, 별도의 훈련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연구자인 저도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인터뷰가 훨씬 더 재미있습니다. 특히 나눔의 집 김대월 실장 인터뷰(2019년 10월 8일자)나, 원래 연재 글로 기획한 <할머니의 방>을 흥미롭게 봤죠. 연구자나 일반인들이 알지 못하는 활동가의 세계와 김대월 실장님의 표현을 빌린 “퇴근 후” 할머니들의 일상이 손에 잡히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 허윤 선생님의 글 「지구는 평평하지 않습니다 – 영화 <나는 부정한다> 다시보기」(2021년 11월 22일자)도 유익했습니다. 피해자들이 한 분도 안 남게 되는 날이 오면 ‘증언’과 ‘기억’도 사라질 거라는 많은 이들의 걱정에 훌륭한 답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자료해제>는 독자에게 가장 인기 없는 코너이겠지만, 그래도 꼭 필요한 기획으로 이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웹진 <결>의 운영 주체는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 소속된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입니다. 이 기관들은 여성가족부의 지원과 감독을 받고 있지요. 박물관과 기념관의 나라인 독일에서는 그것을 유지하는 일을 해당 주 정부가 맡아서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입니다. 돈을 준다는 이유로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많은 박물관과 전시관이 정부 지원으로 운영됩니다. 나랏돈이 들어가는 만큼 국가가 원하는 방향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그 돈은 ‘나랏돈’이 아니라 ‘공공자금’이므로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 목표가 돼야 합니다. 이것은 나라가 원하는 방향을 따르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죠. 그럼 ‘공공의 이익’은 누가 정하느냐, ‘위안부’문제에 관한 ‘공공의 이익’은 뭐냐는 질문이 나오겠지요. 이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 정해주는 것도 아니고 ‘시민’인 우리가 의논하고 합의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웹진 <결>이 이런 논의가 펼쳐질 수 있는 장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정용숙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조교수 adieu2021 ⓒ백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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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자료해제 일본군은 중국 점령 후 어떻게 ‘위안부’를 제도화했는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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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海 당안관 소장자료 『日僞上海특별시정부』 중 일본군'위안부' 관련 사료 (2) 위안부 동원에 관한 사료군 ③ 소장번호 『R1-3-134』 「정찰총대의 보고에 의하면 쟈딩의 정찰분대가 쟈딩 반장의 지시에 따라 군인위안소를 조직하는 경과 상황」 「爲據 偵緝總隊 呈報 嘉定 偵緝分隊 遵 嘉定班長 指飭 組織 軍人慰安所 經過 情形 仰祈 鑑備査由」 소장번호[R1-3-134] 정찰총대의 보고에 의하면 쟈딩의 정찰분대가 쟈딩 반장의 지시에 따라 군인위안소를 조직하는 경과 상황 본 문건은 상하이 특별시 경찰국에서 시 정부로 보내는 보고문건이다. 이 문건은 주임, 과장 비서를 거쳐 비서장에서 시장의 결재 라인을 거쳤다. 「지령」문건으로 분류했다. 본 서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39년 12월 27일 제12 분대장이 경비 총대장(郭紹儀)에게 일본육군 특무기관 이케다 (池田) 반장이 개설한 위안소에 관한 내용을 첩보한 문건이다. 즉, 자딩(嘉定)지역의 일본육군 특무기관 자딩반(嘉定班)의 이케다 반장이 젊은 여자 4명을 모아 “군인위안소 즉 사창과 같은 것”을 조직했다고 보고했다. 이케다 반장이 위안소를 개설하여 매월 여자들에게 돈(洋銀) 15원을 보조금으로 보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는데 상하이 특별시 당국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이케다 반장은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해, 상하이로 통역을 보내, 결국 12월 10일 여자 4명으로 위안소 설립 허가받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여기에서 일본군 이케다 반장이 직접 젊은 여자 4명을 모아 위안소를 조직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즉, 상하이 특별시 내에서 친일 중국인을 이용한 것 이외에도 일본군이 직접 위안소를 운영했고, 위안부도 일본군이 직접 동원했다는 것, 즉 일본군이 위안소 및 위안부의 동원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중요한 사료이다. (3) ‘위안부’ 관리에 관한 사료군 ④ 소장번호 『R1-4-364』 「쟈베이 분국에 의거해 해군부흥부함 훙커우 쟈베이 일대 창기가 小谷冠櫻씨가 평강복리회를 조직한 일을 처리하는 안을 격문과 요람을 초록해 첨부」 「據 閘北分局 呈報 幷 准海軍 復興部函 以 虹口 閘北 一帶 娼妓 由 小谷冠櫻氏 組織 平康福 利會 統籌 辦理 一案 抄附 繳文及簡章等件 會銜呈請核示由」 소장번호[R1-4-364] 가오챠오 경찰서 보고에 의하면 야수이창이 차오전 71호에서 위안소를 개설 본 문건은 상하이 특별시 위생국 및 경찰국의 「지령」문서로, 평강복리회 조직을 위해 일본 해군 부흥부와 교환한 문건이다. 해군 부흥부는 일본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본해군무관부 및 육전대 사령부의 지령에 의해 상하이의 군방비 구역의 도시계획, 중국인민생활지도, 위무, 토지, 가옥의 조사 및 물품 보관 및 대여, 물자보급 등 재산관리 및 분쟁 조사, 기관 간의 분쟁, 적산처리 등 광범위한 일을 수행하는 기관이다.[1] 따라서 평강복리회의 조직 및 관리는 해군 부흥부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본 문건은 1941년 9월 29일 해군 무관부와 해군 부흥부는 공문 「해군부흥부 제48호」를 상하이 특별시 정부 경찰국과 상해 특별시 정부 위생국 앞으로 보낸 것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하이시 당국은 화류병 예방 및 사고방지의 견지에서 해군경비구역 내의 중국인 및 제3국인의 사창을 통제하는 기관으로 평강복리회 설립을 허가하고, 치안, 방역(防疫) 상 만전을 기해 유감없기를 바란다고 했다. 또한 지금까지 관리해 왔던 ‘위안소 조합’도 동일한 목적의 기관이지만, 평강복리회로 조직을 통합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즉, 1939년 일본군의 지시에 따라 생긴 위안소들을 관리했던 것은 위안소 조합이었고, 1941년 9월에 위안소 조합을 평강복리회로 일원화한다는 것이다. 이 요청에 따라 갑북 경찰분국과 상하이 특별시 경찰국 연락관은 상하이 방역위원회의 분과회의 (참석자 : 笹井중장, 田中중장, 大内흥아원 技師, 出本조사관, 해군육전대 군의장, 해군의부장, 安藤군의관, 天野해군군의중좌, 일본인의사공회(日本人醫師公會) 부회장, 일본영사관 가타야마(片山) 경부(警部), 위생국 직원 등)를 개최했다. 상하이 특별시 정부는 해당 부처와 회의를 거쳐, 일본 해군의 뜻을 존중할 것으로 해군에서 원하는 대로 시행하고, 이 평강복리회에 드는 비용은 상하이시 정부가 부담하기로 결정했다. 평강복리회는 일본해군부의 허가를 받아 개설한 것으로, 하세이(笹井)중장의 지도 하에 운영하며, 평강복리회의 대표는 경찰국의 감독을 받아야 하며, 경찰국은 해군부흥부에 그 결과를 보고하여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초기에는 당분간 해군부흥부에서 직접 감독할 것이라고 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평강복리회는 치우지앙루(虬江路) 679호에 설치되었다. 특별회장은 상하이 사상문화연구소 소장인 吳一新(일본인, 일본명 小谷冠櫻)으로 정하고, 근무개시일은 1941년 10월 1일로 했다. 본 사료를 통해 상하이 지역의 위안소의 관리는 중국 민간인 吳一新의 평강복리회가 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초기는 해군부흥부, 이후에는 일본 해군부의 중장이 담당했다는 점, 그리고 형식적 운영자인 민간인 吳一新은 중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각주 ^ 支那事変第10回功績概見表 上海海軍特別陸戦隊 D作戦部隊陸戦隊 自昭和16年6月1日 至昭和16年11月30日、C14121077300(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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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인터뷰 ‘주전장’을 줌인하다 - 영화 〈주전장〉 미키 데자키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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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주전장’은 어디일까. 최근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왜곡된 내용을 논문에 실어 논란을 일으킨 하버드 교수 사건만 보더라도 주된 싸움터 중 하나가 미국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일본계 미국인 미키 데자키(Miki Dezaki) 감독의 다큐멘터리 <주전장>(2019)이 갖는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다. 한국, 미국, 일본 등 3개국을 가로지르며 관계자들의 목소리를 세밀하고 촘촘하게 담아낸 이 영화는 현재 각국에서 ‘위안부’ 이슈가 어떻게 논의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특히 감독은 일본 우익세력의 목소리를 전면에 담아냄으로써 과거보다 더욱 복잡하고 교묘해진 ‘부정론자’들을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은 왜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전쟁 범죄와 제국주의적 침략을 부정하는 것일까. 그들을 넘어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고 여성 인권에 대한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어떤 논의가 개진되어야 할까. 이를 묻고 답하기 위해 김은경 한성대 상상력교양대학 교수가 인터뷰어로 나서 미키 데자키 감독과 서면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 대화를 전한다. Q. <결>의 독자들을 위해 감독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영화 <주전장>의 감독이자 제작자인 미키 데자키입니다. 인터뷰를 요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Q. 영화의 제작 동기와 기획 의도를 알고 싶습니다. <주전장>을 통해 관객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셨나요? 저는 영화감독이 되기 전에 태국에서 불교 승려로 수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면과 외면의 평화에 상당히 관심이 많았지요. 제가 대학원에 다닐 때에는 학문적으로 세계 평화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한국과 일본이 계속 갈등을 겪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한 적이 많았는데요. 두 나라의 정부와 국민들을 화합하지 못하게 만드는 주요 문제 중 하나가 일본군‘위안부’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볼 때, 갈등은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에 관한 다양한 맥락과 정보를 담은 영화를 제작한다면, 한국과 일본 국민들이 이 문제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것이고, 서로의 관점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이 이 문제에 대해 더욱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대화를 함으로써 양국간의 화해, 정의, 평화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이 다큐를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관객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지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제가 영화를 통해 특별히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영화를 통해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이 이 문제가 얼마나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인지 인식하고, 이들이 자국의 언론을 통해 전달받는 많은 정보들이 서로에 대한 증오와 반감을 부추기는 식으로 필터링되기도 한다는 점을 알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다큐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면, 한국과 일본의 주장을 종합적으로 분석해봤을 때 ‘위안부’ 제도는 일본군의 성노예 제도였음이 상당히 분명하며, 일본 정부가 이러한 역사를 삭제하려는 행위는 ‘위안부’ 제도 피해자들에게 부당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Q. 내레이션을 통해 감독님의 시각과 목소리를 노출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일본계 미국인 남성으로서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어떤 고민을 하셨나요? 처음에는 제가 직접 내레이션을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온갖 연구조사와 인터뷰를 하며 복잡한 과정을 겪은 끝에 최종 편집 작업을 하면서, 관객들도 나와 같은 여정을 경험한다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이 다큐를 위해 연구조사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제가 느꼈던 힘들고 복잡했던 감정들을 관객들도 경험해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지요. 일본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낸 이유는 이러합니다. 저는 이 문제에 있어서 제3자인 동시에, 그런 전쟁범죄를 저지른 나라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저는 관객들에게 그런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를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일본에서 10년 넘게 거주한 경험이 있고 부모님도 일본 분들이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미묘한 뉘앙스를 비일본계 미국인들보다는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일본인들은 제가 일본의 미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본계 미국인으로서 이 영화를 제작했다는 점을 존경하며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가 더욱 신빙성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Q. 왜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은 제국주의 침략과 ‘위안부’ 피해를 부정할까요? 저도 그 점이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일본 정부와 역사수정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국제적인 평판을 떨어뜨리면서까지 많은 시간과 돈, 에너지를 들여서 그러한 역사관을 전파하고 있거든요. 제가 볼 때 그 이유는 일본인들이 다른 아시아인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보수우익 집단을 형성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천황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려고 하던 사람들처럼, 다시 한번 국가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국민 집단을 만들려는 것이지요. 이것은 자민당과 일본회의(日本会議)가 평화헌법을 개정해서 재군비를 추진하려는 야욕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일본이 다른 국가들보다 우월하고 순수하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만들어 냄으로써, 더 많은 일본인들이 군대를 지지하고 입대를 마다하지 않게끔 유도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국민들이 자신의 국가가 과거에 무력을 남용하고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고 믿게 되면, 그 국민들에게 군대를 지지해 달라고 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Q. 미국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은 일본 정부나 사회단체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나요? 미국에 있는 일본계 미국인 단체 일부가 일본 역사수정주의자 단체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단체들의 리더들은 미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심포지엄을 열고 기금 모금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 영화에도 출연했던 일본회의 도쿄 본부장인 가세 히데아키(加瀬英明)는 캘리포니아 글렌데일에서 한 일본계 미국인 단체가 제기했던 ‘평화의 소녀상’ 철거 소송을 위해 백만 달러를 모금하는 데 힘썼습니다. LA 일본 영사관도 그 소녀상을 철거할 것을 전적으로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이런 사회단체들과 직접 접촉하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일본 정부 역시 동일한 명분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위 일본계 미국인 단체가 제기한 글렌데일 소녀상 철거 소송에 대해 ‘법정 조언자 의견서(amicus brief)’와 같은 지지 서한을 보낸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 소녀상을 철거하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이민 1세대(즉, 일본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세대) 일본계 미국인들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민 2,3,4세대 일본계 미국인들은 차별당하는 입장에 놓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더 잘 알기 때문에 ‘위안부’ 운동을 지지하는 편입니다. Q. 이른바 ‘램지어 사태’로 미국의 역사수정주의 학자들이 새로 주목 받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이들이 주로 어떤 활동과 발언을 해왔는지 알고 싶습니다. 램지어 교수 사건은 미국 학자들이 자신의 학문적인 권위를 이용해 연구의 질이 떨어지는 논문을 저명한 학술지에 발표함으로써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시각을 뒷받침하는 행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다행히도 많은 학자들이 램지어 교수의 논문에 반박을 했고, 이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램지어 교수를 신뢰할 수 없다는 여론이 형성됐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미국인 학자들이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역사관을 확산시키기 위해 관련 책을 쓰고 대담을 하며 일본의 인터뷰에 응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중 제일 유명한 사람이 제 영화에도 나왔던 켄트 길버트(Kent Gilbert) 변호사입니다. 그는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역사관을 지지하는 유명한 책들을 발간한 바 있고, 극우 TV 프로그램에 정기적인 기고를 하고 있습니다. 또 몇몇 미국 학자들이 이와 동일한 행보를 보이면서 일본에서 유명세를 얻고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이런 현상이 빠른 시일 내에 사라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일본 보수우익들이 자신의 역사관을 백인 미국인들에게 검증받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신)냉전체제와 동북아 안보논리를 내세운 미국의 ‘보이지 않는’ 역할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주전장’인 미국은 이 문제에 어떤 관련이 있다고 보시나요? 영화 후반부에 보면, 우리가 ‘위안부’ 문제와 일본의 정치적 상황에 대처하면서 현 상황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꽤 큰 역할을 했다는 제 내레이션이 나옵니다. 미국은 –‘위안부’ 피해 여성들과 한국을 위한 진정한 화해와 정의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과거사 문제에 대한 화해를 두고 한국과 일본을 밀어붙인 게 분명해 보입니다. 저는 미국인으로서 이 내용을 제 영화에 꼭 넣고 싶었습니다. 즉, 미국인들에게 한일 ‘위안부’ 문제는 우리와 동떨어진 일이 아니고, 미국도 이 문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현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을 통감해야 하며, 문제 해결과정에 참여하고 정의를 위한 운동을 지지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지금 미국 일각에서는 과거 미국 내 소수인종들에 행해졌던 차별행위들을 되돌아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미국의 역사가 얼마나 편파적으로 기록됐는지 살펴보고 있지요. 저는 이 영화를 계기로 미국도 다른 나라들에 행했던 부정적인 행위들을 살펴보고 깨달음을 얻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Q. 글렌데일의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초국적 기억 형성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요? 저는 ‘평화의 소녀상’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는 데 매우 효과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일본계 미국인 단체들과 일본 영사관이 이 소녀상에 대해 너무 심한 반대를 하는 바람에 여러 미디어의 조명을 받게 됐기 때문이지만요. 일본에서는 ‘위안부’에 대한 기억이 지워지고 있기 때문에 ‘평화의 소녀상’이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평화의 소녀상’은 전세계가 이 중요한 역사를 잊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일본에 일깨워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일본이 이 역사를 지우려고 할수록, 이 소녀상의 중요성은 더 커질 것입니다. Q. 다큐 제작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다큐를 제작하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많았습니다만, 편집과정에서 삭제된 한 독일 사학자와의 인터뷰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보통 문서로 기록된 것들을 가장 강력한 역사적 근거 자료라 여기고 구술 증언은 근거가 빈약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역사로 기록된 문서들은 특권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남긴 자료라는 것입니다. 만약 문서 기록에만 의존해서 역사를 쓴다면, 정부 엘리트 시각에서 본 역사가 되는 것이지요. 구술 증언은 보통 글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설명할 수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근거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는 대로, 일본은 과거 전쟁에서 미국이 일본에 도착하기 전에 대부분의 문서들을 태워버리고 일본인들이 알기를 바라는 문서만 남겨두었습니다. 따라서 역사를 쓸 때에는 문서기록에만 의존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Q. <주전장> 개봉 후 영화에 출연한 역사수정주의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그들은 이 영화를 보고 굉장히 화가 난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들은 제 다큐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기 위해 기사를 쓰고, 동영상을 제작하고, 심포지엄을 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공격을 꼽자면, 제가 단순 인터뷰를 하는 것처럼 자신들을 속였기 때문에 이 다큐가 잘못됐다고 주장하면서 저를 고소한 것인데요. 이들은 저와 인터뷰를 할 때 자료이용 공개 허가서(release form)에 모두 서명을 했기 때문에 그런 주장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소송이 공적 참여를 방해하기 위한 전략적 소송(SLAPP: Strategic Lawsuit Against Public Participation), 즉 겁을 줘서 상대방을 침묵하게 만들려는 소송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소송은 사회 전반적으로 침묵을 강요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합니다. 예술가, 활동가 등 많은 사람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나중에 소송당할 것이 두려워 권력을 가진 단체나 사람들에 대해 자유로운 비판을 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이지요. 미국의 여러 주에서는 SLAPP소송이 언론과 의사 표현의 자유를 저해한다고 인정되면, 그러한 소송을 제기한 개인이나 조직에 벌금형을 내리는 SLAPP 금지법이 있습니다. Q. <주전장>에 대한 각국 관객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특히 독일 관객이 이 문제에 가장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독일이 과거에 전쟁 범죄를 저지른 역사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닐까 싶습니다. 독일 관객들은 일본인들이 자국 역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과거 전쟁 범죄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것에 굉장히 놀라워했습니다. 미국 관객들도 이 이슈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는데요. 미국인들은 특히 여성의 인권 측면에 중점을 두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미투 운동’이 미국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경험을 ‘미투 운동’ 참여 여성들의 경험과 연결해서 동질감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많은 젊은 여성분들이 저에게 ‘이 문제가 단순히 두 나라 간의 싸움이 아니라 인권과 여성의 권리에 관한 문제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됐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들은 ‘위안부’ 피해여성들을 지지하는 일본인 학자들과 활동가들을 보고 이를 깨달았다고 했는데, 한국 언론에서는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일본 청년들이 제 영화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해줬을 땐 희망을 볼 수 있었기에 정말 특별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일본의 많은 젊은 이들이 자신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그리고 일본정부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잘 몰랐는데, 이 다큐에 나온 내용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예전에는 일본정부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이 과거 문제에 분노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한국인들은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또 일본 미디어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역사수정주의적 관점만 보도한 적이 많았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예전에는 전혀 몰랐던 정보를 알게 됐다고 하는 일본 청년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 영화를 통해 새로운 시각을 배웠고, 자신이 예전에 ‘위안부’ 문제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 역사는 현재 젠더 불평등을 포함한 글로벌 인권 문제를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될까요? ‘위안부’ 역사는 글로벌 인권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는 한국인들이 물건이나 화물처럼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면서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존엄성을 박탈당했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위안부’ 피해가 여성에게 국한됐으며, 남성이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존재로 인식하지 않았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위안부’ 역사는 여성의 권리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사회적인 수치심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침묵을 강요당하고 자신의 피해 경험을 숨겨야만 했다는 점을 고려해 보더라도, ‘위안부’ 역사는 여성의 권리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여성들은 지금도 역사를 삭제하려는 일본 정부에 의해 다시 한번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Q. 차기작 계획이 있으면 간략히 소개해주세요. 현재 차기작을 위해 리서치를 하는 중이지만, 구체적인 주제는 아직 말씀드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한국과 일본간의 또 다른 정치적 이슈를 다루게 될 것 같아요. Q. 마지막으로, 한국 관객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와 제 영화를 지지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요즘 소송에 대응하느라 힘든 시간을 보낼 때가 있는데, 많은 한국 분들이 보내주신 따뜻한 메시지들이 저에게 정말로 많은 힘이 됩니다. 언젠가 코로나 팬데믹이 잠잠해지면 한국에 가서 여러분들을 직접 만나 뵙고 싶습니다. 부디 안전하고 건강하게 지내십시오! 인터뷰어: 김은경 한성대 상상력교양대학 교수 인터뷰이: 미키 데자키 감독 인터뷰 도움: ㈜시네마달 일시: 2021.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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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여행에세이] 총구는 늘 약자를 향한다–전쟁과 일본군‘위안부’, 그리고 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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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으로 ‘여행’의 가능성이 차단된 시대, <결>은 이에 대한 갈증을 글로나마 풀며 여행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는 일제 침탈과 일본군‘위안부’관련 흔적이 남아있는 지역을 살펴보고 그 안에 담겨있는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서울, 통영, 천안, 대구, 제주 등 ‘위안부’ 역사와 관련된 다섯 지역을 따라가며, 꼭 기억해야 하지만 쉬이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 1. 서울편 - “기억의 길”을 걷다 – 일본군‘위안부’ 기억의 터와 기림비 2. 통영편 - 아름다운 항구, 통영에 자리한 아픈 역사의 길을 걷다 3. 천안편 - 하늘아래 가장 편안한 곳에 잠든 당신들의 안식을 기원하며 4. 대구편 -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으로 떠나는 근대문화거리 투어 5. 제주편 - 총구는 늘 약자를 향한다–전쟁과 일본군‘위안부’, 그리고 제주도 추천코스 성산 일출봉(제주 일출봉 해안 일제 동굴진지) - 성산 위안소 터 - 모슬포(알뜨르 비행장) - 섯알오름 - 백조일손지묘 #제주도와 나 대학교에 입학하던 2018년, 갓 20살이 되었던 나에게 제주는 ‘평화의 섬’ 이미지가 강했다. 휴양을 즐기러 오는 관광객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드넓게 펼쳐진 바다의 모습은 볼 때마다 아름답고 새로웠다. 그리고 대학생이 된 나는 단순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으로 ‘평화나비’라는 동아리에 가입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제주평화나비 활동은 단순히 피해자를 돕는 단체가 아니었다. 제주평화나비 활동을 통해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을 넘어 왜 우리가 평화를 추구해야 하는지, 어떤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평화의 섬이라고 굳게 믿어왔던 제주에 어떤 역사적 아픔이 있는지, 현재는 또 어떤 아픔을 겪고 있는지 역사 기행과 이번 답사를 통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직접 보고 만난 제주의 모습은 내가 생각했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결7호 작전과 제주도 태평양 전쟁 말, 패망을 앞둔 일제는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결7호 작전을 준비했다. 그중 6개의 결전지는 일본 본토에 있었고, 마지막 최후 결전의 장은 제주도였다. 이에 일제는 제주도를 완벽한 군사적 요충지로 이용하기 위해 제주 전역에 군사시설을 설치했다. 그리고 군사시설 건립에는 제주도민들이 강제로 동원되었다. “강제 징용돼 흙 운반 일을 하다가 도로꼬(궤도차)에 깔려 다치거나 죽은 사람도 있다.”[1] 이는 알뜨르 비행장 확장공사에 징용된 김웅길 씨의 증언이다. 그의 증언처럼 당시 강제로 동원된 주민들은 굶주리고 매질을 당하는 등 반인권적 취급을 당했다. 결과적으로, 주민들의 희생으로 제주 곳곳에 각종 군사시설이 설치되었고, 아직도 당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여전히 아름다운 해안가에, 그리고 각종 오름에 존재하는 일제 동굴기지들이 전쟁의 잔인함을 보여준다. 만약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다면 불바다가 됐을 수도 있는 평화의 섬, 제주도의 역사를 따라 가보려 한다. #성산일출봉 일제 동굴진지와 성산위안소 #과거 일제 강점기로 돌아가 보기 흔히 알려진 것처럼, 성산일출봉은 제주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한 번쯤 방문할 만한 관광지이다. 나도 성산일출봉 위에 올라가 제주의 풍경을 감상했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이번 답사에서는 관광객들이 볼 수 없는 곳에 자리해 온 제주도의 아픈 역사를 마주했다. ‘제주 일출봉 해안 일제 동굴진지’는 다른 동굴에 비해 접근이 쉬운 편이었으나, 일반 여행객들이 접근하기는 쉽지 않았다. 동굴로 통하는 길이 어딘지 한참을 둘러보다가 마을 주민들이 이용하는 해안가를 통해 진지동굴에 가까이 가봤다. 멀리서 봐도 동굴의 모습이 대략 보였으나 가까이 가서 보니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동굴진지에 관한 표지판 설명에 따르면, 성산일출봉 동굴진지는 연합군이 성산포 해안으로 상륙할 경우를 대비해 만든 자살특공부대 시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그 동굴 안에는 자살 폭파 공격을 위한 소형선박이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웠던 건, 그런 동굴이 성산일출봉 동쪽 해안절벽을 따라 무려 18개나 구축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바닷가로 나가지 않는 이상 18개의 모든 동굴진지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고, 내가 있던 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동굴은 겨우 3개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당시 강제 동원된 주민들의 고된 노역과 전쟁에 대한 일제의 욕망을 느낄 수 있었다. 성산일출봉 일제 동굴진지로부터 대략 2~3분을 걸어가면 성산위안소 터가 나온다. 2019년 제주평화나비에서 갔던 ‘성산리 일본군 위안소 공개 기자회견’ 이후 첫 방문이다. ‘제주에 위안소라니’라는 마음으로 간 기자회견장에서 오시종(성산리 주민) 님의 증언을 들으며 참 많은 감정이 스쳤던 기억이 떠오른다. 오시종 님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해주셨다. 자살 공격을 감행할 자폭 병기의 조종사였던 요카렌[2] 생도들이 주로 위안소를 이용했다는 것부터, 30년 뒤 위안소에서 목격했던 여성을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그가 제주어를 사용했다는 것, 그리고 여성들이 하루에 2~6명 정도의 요카렌을 상대했다는 것을 들었다는 것까지 모두 말씀해주셨다. 성산위안소 터에 처음 갔을 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집터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놀랐다. 심지어 공터는 주변 식당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흔한 장소가 알고 보니 성산위안소 터였다는 증언이 나오면서 역사적 가치가 생긴 것이다. 어쩌면 우리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역사가 숨겨져 있는 땅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닐까? 현재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총 240명이다. 하지만 그중 제주도 출신 피해자는 한 분도 안 계신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본군‘위안부’문제만 봐도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에서 피해자임을 고백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섬이라는 환경, 고립된 제주 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피해자임을 고백하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오시종 님이 위안소에서 목격했다던 그 여성 또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숨긴 채 여생을 살아가지 않았을까? 아직 제주에 위안소가 있었다는 것을 명확히 할 수는 없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충분히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런 복합적인 감정을 가진 채 모슬포로 향했다. #알뜨르 비행장, 섯알오름, 백조일손지묘 #반복되는 역사 일제는 제주도 내에 동굴진지뿐만 아니라 비행장도 총 다섯 군데에 설치했는데, 그중 하나가 대정읍 모슬포에 있는 알뜨르 비행장이다. ‘알뜨르’는 ‘마을 아래 있는 넓은 들’이라는 뜻의 제주어로, 알뜨르 비행장 근처에 가니 실제로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고, 곳곳에는 관제탑과 지하벙커 등 전쟁의 잔해들이 남아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비행기 격납고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콘크리트로 튼튼하게 지어진 모습과 적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풀로 위장한 모습, 그리고 격납고 내부에 전시된 전투기 모양의 작품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격납고 내부에 전시된 작품은 태평양 전쟁에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전투기 ‘제로센’을 똑같이 형상화한 것인데, 방문객들의 평화의 메시지가 담긴 리본들로 휘감겨 있었다. 마치 평범한 이들의 목소리가 하나 둘 합쳐져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비행기 격납고 입구에는 격납고에 대한 설명을 만화로 풀어놓은 표지판이 있는데, 그 표지판에는 격납고가 6.25 전쟁 당시 미군기지로 사용됐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모슬포 주민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격납고가 결국 전쟁에 두 번이나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군사기지화의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섯알오름에 가서도 계속되었다. 섯알오름은 글만으로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곳이다. 그만큼 섯알오름은 제주가 겪은 아픈 역사의 흔적들을 잘 머금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되도록 직접 방문해보면 좋을 것 같다. 알뜨르 비행장에서 멀지 않은 섯알오름에 도착했을 때, 일제가 탄약고로 사용했던 터이자, 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자 추모비 및 제단이 그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섯알오름은 일제가 제주도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구축한 제주도 내 최대의 탄약고였고, 탄약고 위 오름 정상에는 일제가 항공기 공습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고사포 진지가 있었다. 하지만 일제가 패망하면서 탄약고는 미군에 의해 폭파되었고, 그 폭파 과정에서 큰 웅덩이가 생겼다. 그리고 그곳은 훗날 6.25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자 집단 학살 터가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4.3사건으로 인해 ‘레드 아일랜드’로 찍힌 제주도 안에서 법적인 절차 없이 예비검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고한 이들까지 모두 예비검속자로 끌려갔다. 그리고 1950년 8월 20일 새벽 4~5시경, 모슬포경찰서 관내에 예비검속된 252명이 무참히 학살당했다. 새벽 트럭에 실려져 섯알오름으로 향하는 길, 그들은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자신이 있는 장소를 알리고자 했고, 트럭 이동 중에 자신이 신고 있던 검정 고무신을 던졌다. 군인들에 의해 희생자들의 유품은 불태워졌지만, 당일 새벽 길 위에 흩어져있는 고무신을 보고 쫓아온 유족들에 의해 현장이 발견되었다. 유족들은 시신을 수습하고자 했으나 군경은 6년이 지나도록 출입 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시신 수습을 허가받았을 때는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 희생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이에 유족들은 한 날, 한 시, 한 곳에서 돌아가신 희생자들의 시신을 모아 한 곳에 모셨다. 그리고 ‘조상이 각기 다른 일백서른 두 자손이 한 날, 한 시에 죽어 하나의 뼈로 엉키어 하나의 자손으로 환생하시라’는 의미를 담아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는 비석을 세웠다. 스산한 분위기의 ‘사계리 공동묘지’를 지나 희생자분들이 모셔져 있는 ‘백조일손지묘’로 가는 길, 6.25 전사자 충혼비가 보였다. 전쟁으로 인한 희생을 의도치 않게 또 만나게 되었다. 백조일손지묘에 도착해, 입구에 설치된 표지판의 설명문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오래돼 보이는 표지판을 읽으며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당시 나보다 어리거나 내 또래의 사람들이 국가 권력에 의해 희생됐다는 것이었다. 희생자 대부분의 나이가 10대에서 30대 사이였고, 유족의 대부분이 희생자의 부모였다. 4.3을 거치며 ‘레드 아일랜드’로 낙인이 찍힌 제주도에서 6년 동안 자식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을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졌을지 안타까운 마음과 동시에 분노가 일었다. 5.16 군사정권에 의해 파괴된 묘비 조각이 전시된 것을 보고는 국가가 왜 존재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전쟁이, 국가 권력이 도대체 뭐길래 제주의 역사는 이토록 끊임없이 아파야만 했는지…. 애틋한 마음이 들면서 화가 났다. 알뜨르 비행장 건설에 강제 동원된 모슬포 주민, 일제와의 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타국의 피해자들, 6.25 전쟁으로 인한 예비검속 집단학살 희생자와 제주 4.3 피해자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 모두 공통점이 있다. 전쟁과 폭력 상황에서 약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총구는 늘 약자를 향하기 마련이다. #잊는다는 것의 결과 여기까지 제주에서의 다크투어 여정은 마무리된다. 제주의 아픈 역사를 마음에 새기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제주도로 향하는 여행객들의 설레는 발걸음을 이어주는 제주공항은 사실 일제가 제주 내에 설치한 또 다른 비행장이자, 4.3 당시 최대의 학살 터인 정뜨르 비행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공항이라는 특성 때문에 민간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당시 많은 학살이 이뤄졌고, 희생자들의 시신은 바로 수습되지 못했다. 넓게 펼쳐진 활주로 밑, 4.3의 아픔이 묻혀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은 수십 년간 진행해온 수요시위에서 늘 재발 방지를 외쳐왔다. 다시는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군사기지화와 가부장제의 구조 속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같은 전시 성폭력 문제는 언제 어디서든 반복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내전 중인 국가에서는 여전히 전시 성폭력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평화를 외치는 이유이자, 일제에 의한 아픈 역사를 잊지 말자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바꾸지 않으면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일본군에 의해 만들어진 알뜨르 비행장 비행기 격납고를 후에 미군들이 사용한 것처럼. 일제 군사시설이 위치한 섯알오름이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자 학살 터가 된 것처럼. 제주에서 국가에 의한 또 다른 군사기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강정해군기지). 그렇기에 역사를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기억하는 것을 넘어 모두가 평화를 위해 행동하고 함께 하는 미래를 그려본다. 각주 ^ "제주는 거대한 군함도였다" 도민 4만명 일제 군사요새 강제노역, 연합뉴스, 고성식, 2017.08.14. ^ よかれん(予科練). ‘해군 비행 예과 연습생’의 준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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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여행에세이] 하늘아래 가장 편안한 곳에 잠든 당신들의 안식을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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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으로 ‘여행’의 가능성이 차단된 시대, <결>은 이에 대한 갈증을 글로나마 풀며 여행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는 일제 침탈과 일본군‘위안부’관련 흔적이 남아있는 지역을 살펴보고 그 안에 담겨있는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서울, 통영, 천안, 대구, 제주 등 ‘위안부’ 역사와 관련된 다섯 지역을 따라가며, 꼭 기억해야 하지만 쉬이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 1. 서울편 - “기억의 길”을 걷다 – 일본군‘위안부’ 기억의 터와 기림비 2. 통영편 - 아름다운 항구, 통영에 자리한 아픈 역사의 길을 걷다 3. 천안편 - 하늘아래 가장 편안한 곳에 잠든 당신들의 안식을 기원하며 4. 대구편 -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으로 떠나는 근대문화거리 투어 5. 제주편 - 총구는 늘 약자를 향한다: 전쟁과 일본군‘위안부’, 그리고 제주도 추천코스 천안 독립기념관(제2 전시관-겨레의 시련관) → 국립 망향의 동산(추모비-장미묘역-망향의집-무연고합장묘역) → 천안 평화의 소녀상(신부공원) #천안 독립기념관 천안(天安)은 하늘아래 편안한 곳으로 불리며,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듯 3.1만세운동의 함성과 유관순열사의 고향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많은 곳 중 하나이다. 아우내 장터의 뜨거운 함성과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독립기념관으로 향한다. 독립기념관은 1982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사건을 계기로 역사를 잊지 않고 진실을 지키려는 국민들의 모금과 역사자료 기증 운동의 결과로 1987년 8월 15일 개관됐다. 그 뒤로 해마다 8.15광복절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다양하게 열리고 있다. 독립기념관에 들어서면 하늘을 뚫을 것처럼 높고 날카롭게 솟아있는 겨레의 탑이 우리를 마주한다. 겨레의 탑을 지나면 독립기념관의 대표 건물로 수덕사 대웅전을 본떠 만든 동양 최대의 기와집인 겨레의 집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겨레의 집 뒤편으로는 총 6개의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전시관의 테마는 ‘우리 민족의 뿌리’로 출발해 ‘민족의 시련’과 ‘겨레의 함성’, ‘독립운동’, ‘일제에 맞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가기 위한 우리 민족의 노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제2전시관 ‘겨레의 시련’관에서는 가슴 아픈 역사의 상처를 마주하게 된다. 바로 일본군‘위안부’강제동원의 아픔이다. 안타깝게도 얼마 전 우리 곁을 떠나신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님과 북이 고향인 김화선 님의 증언이 담긴 영상을 볼 수 있다. 일본의 강제동원을 당당하게 밝히는 그들의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밖에 일본군의 ‘위안소’ 운영을 입증하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피해생존자들의 증언과 역사적 자료들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의 파렴치함에 주먹을 쥐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을 되새기며 전시관을 나선다. #국립 망향의 동산 망향(望鄕)…. 고국을 그리워하다. 푸르른 가을 하늘아래 펼쳐진 초록의 잔디와 많은 묘역들은 가슴 한편을 저릿하게 한다. 저 작은 돌 아래 잠들어 있는 망자들의 수많은 가슴 아픈 사연들과 눈물을 푸른 하늘은 알고 있을까. 망향의 동산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고국을 떠난 후 망국의 서러움과 갖은 고난 속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다 숨진 재일동포들의 안식을 위해 1976년 10월 2일 조성되었다. 이후 해외동포 가운데 조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지만 적당한 묘역을 구하기 어려운 분들의 경우 이곳에 모셔지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이곳은 ‘위안부’피해자만을 위한 곳은 아니다.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어 해외 여러 곳을 거치며 고통을 당하셨기에 본인과 가족들이 원할 경우 이곳에 모셔지고 있다. 사실 부끄럽게도 천안 토박이인 나도 이곳 망향의 동산에 ‘위안부’피해자들이 잠들어 계신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2015년 광복 70주년이 되었음에도 아직 진정한 해방을 맞이하지 못했던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을 기억하고자 천안시민들과 함께 평화의 소녀상 건립운동을 하며 망향의 동산에 잠들어 계신 할머니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장미묘역에 잠들어 계신 고(故) 김학순 님의 묘 앞에서 가만히 눈을 감아본다. 올해는 김학순 님이 “내가 일본군 ‘위안부’피해자다”라고 첫 공개증언을 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위안부’는 없다고 주장하는 일본 정부에 ‘희생자’ 중 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드러내 그 ‘존재’를 증명하며 세상을 깨운 용기 있는 증언을 하신 김학순 님. 떨리는 목소리로 눈물을 흘리며 증언을 한 지 30년이나 지났지만, 그들이 그토록 원하셨던 진정한 사과와 명예회복은 여전히 이뤄지고 있지 않음에 가슴이 아파온다. 안타깝게도 연세가 많고 건강이 안 좋으신 분들이 점점 이곳에 오고 계신다. 누구보다 강인하고 꿋꿋하게 일본의 사과를 외치며 전 재산을 전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위한 나비기금에 기부하고,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을 위해 장학기금재단을 마련한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님도 2019년 2월 1일 이곳에 잠드셨다. 1000번째 수요시위에서 “이 늙은이들 다 죽기 전에 하루 빨리 사죄하라! 알겠는가. 일본대사여.”라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호통 치셨던 모습이 생생한데, 이제 말없이 이곳에 잠들어 계신다. 안타깝게도 김복동 님 별세 이후 몇 분의 피해자가 영면에 드셨다. 진실을 알리고 진정한 사과를 듣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치열하게 사셨던 그들이 떠나고 남은 빈 자리는 이제 우리들의 몫이 아닐까. 이곳 망향의 동산의 장미묘역과 납골당인 망향의 집에는 56명의 ‘위안부’피해자들이 잠들어 계신다. 누군가의 묘비에는 노란 나비가 붙어있지만, 그렇지 않은 묘비가 더 많다. 고인의 가족들이 ‘위안부’피해자인 것을 밝히기 부담스러워 하는 경우가 많아 표시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들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직 세상이, 그리고 우리가 그들의 명예회복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이곳에는 김학순 님과 김복동 님 이외에도 그들의 벗들이 주변에 많이 잠들어 계신다. 망향의 동산에 안장된 ‘위안부’피해자의 특별묘역을 추진하여 그분들의 넋을 기리고 기억해야 한다는 의견이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고인 가족들의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여 묘역을 별도로 만드는 것은 추진되지 않았고 2015년 8월에 ‘위안부’추모비가 건립되었다. 추모비의 명칭은 ‘안식의 집’이며 ‘영혼의 눈-시간의 벽-연대의 벽-승화의 벽’으로 구성되어 있고 한쪽 바닥에는 피해자의 글귀가 적힌 돌이 있다. 안식의 집의 의미를 살펴보면 영혼의 눈은 우리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과 할머니들을 위로하고 기억하는 우리들의 시선, 그리고 그들이 흘렸던 눈물을 상징한다. 시간의 벽은 피해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던 오랜 고통과 좌절의 시간을 표현했다. 연대의 벽은 피해자로 침묵하던 할머니들이 인권운동가로 연대하며 활동했던 시기를 상징한다. 승화의 벽은 추모비가 연이어 선 형상으로, 피해 할머니들의 생애를 시기별로 나눠 두려움과 고통, 좌절, 고된 삶, 용기와 활약,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가는 모습 등을 표현하고 있다. 마지막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가는 모습처럼 고인들은 편안하게 웃으며 하늘을 날고 계실까. 그 답은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무연고합장묘역 망향의 동산 가장 위쪽 언덕에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무연고합장묘역이 있다. 일제강점기 태평양 전쟁 때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희생되었던 분들을 위한 묘역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름도 나이도 알 수 없기에 유골만을 추려서 합장한 묘역이다. 오른쪽에는 뜻 있는 일본인들이 세운, 고보댐 건설현장에서 희생된 노동자들의 죽음에 사죄하는 비가 있다. 고보댐에서 희생된 노동자들은 약 4000명에 달한다. 가장 기본적인 인권마저 유린당하며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 공사장에 매장되고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 그들의 죽음 또한 우리 역사의 비극의 한 장면이며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할 이들이다. 일본은 여전히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부정하고 있으며 역사 지우기에 혈안이 되어있고 그들의 역사왜곡은 현재진행형이다. 그 사실을 잘 알려주는 것이 2017년 3월에 있었던 사죄비 무단훼손사건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강제연행의 책임자였던 요시다 세이지(吉田 清治)가 자신들의 범죄를 참회하고 반성하며 희생자들을 위해 1983년12월 사죄비를 세웠다. 사죄비에는 ‘귀하들께서는 일본의 침략 전쟁 시 징용과 강제연행으로 강제노동의 굴욕과 고난에 가족과 고향 땅을 그리워하다가 귀중한 목숨을 빼앗겼습니다. 나는 징용과 강제연행을 실행 지휘한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비인도적 그 행위와 정신을 깊이 반성하여 이곳에 사죄하는 바입니다. 늙은 이 몸이 숨진 다음도 귀하들의 영혼 앞에서 두 손 모아 용서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요시다의 장남은 부친의 증언이 위증이라며 일본의 극우인사를 통해 사죄비를 위령비로 교체하도록 시켰다. 다행히 수사기관을 통해 범인이 잡혔고, 사죄비는 복구되었지만, 일본의 역사왜곡은 계속되고 있기에 우리에게는 더욱 경각심이 필요하다. #천안 평화의 소녀상 “우리에게는 아직 진정한 해방이 오지 않았습니다.” ‘위안부’피해자들의 가슴 맺힌 절규를 기억하고 함께 행동하고자 2017년 8월 천안 평화의 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고 그 아픔에 공감하는 많은 시민들과 학생, 기업들의 모금으로 천안 평화의 소녀상이 건립됐다. 소녀상은 빈 의자와 앉아있는 소녀, 함께 해주신 분들의 이름이 새겨진 명판으로 구성돼 있다. 시민들이 언제든 편하게 보며 기억할 수 있도록 소녀상은 천안의 가장 번화한 거리의 작은 공원에 자리 잡고 있다. 그 바람처럼 시민들은 계절에 따라 늘 소녀상과 함께 하고 있다. 비가 오면 우비를 씌워 주고, 겨울이 되면 망토와 모자와 덧신을 입혀준다. 어느 날에는 사탕과 초콜릿을, 어느 날에는 곰 인형을 소녀상 옆에 놓아준다. 참 고마운 마음들이다. 그 마음들이 모이고 모여 잠들어 있는 그들이 나비처럼 훨훨 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날을 기원하며 소녀상은 오늘도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기사 게재일: 2021. 10.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