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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인터뷰 2차 ‘위안부 소송’ 판결, 국제인권법 ‘마그나카르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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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일본군'위안부'문제 대응 TF 단장 이상희 변호사 서울고등법원 제33민사부는 2023년 11월 23일 '위안부' 피해 생존자와 유족 포함 원고 16명이 일본국을 상대로 제기한 2차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일본국의 불법성과 책임을 인정하면서 원고의 청구를 그대로 인용하는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다. 소송단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일본군'위안부'문제 대응 TF' 단장을 맡았던 이상희 변호사를 만나 세기의 재판이 일군 성취와 고군분투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주문. 1심판결을 취소한다. 피고(일본국)는 원고에게 '청구금액(항소금액)'란 기재 각 돈 및 이에 대한 2023년 9월 21일부터 2023년 11월 23일까지는 연 5%의,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연 12%의 각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 2023년 11월 23일 서울고등법원 제33민사부(부장판사 구회근)가 '위안부' 피해 생존자와 유족 포함 원고 16명이 일본국을 상대로 제기한 2차 손해배상 청구소송 판결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2016년 12월 28일 김복동, 이용수 등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 11명과 이미 고인이 된 피해자의 승계 유족 10명, 총 21명이 1인당 2억 원의 손해배상액을 청구한 1차 소송 이후 8년 만에, 1차 소송이 각하된 2021년 4월 21일로부터는 약 2년 7개월 뒤 대한민국 법원이 원고 측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여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과 피해자에 대한 배상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기념비적' 선고였다. 이 소식은 항소심 소송 원고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용수 할머니의 기뻐하는 모습과 함께 주요 뉴스로 보도됐고,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민변) 등 소송 경과를 예의주시해 온 시민사회는 일제히 '피해자들의 절박한 호소에 성심껏 귀 기울여 '인권의 최후 보루'로서 책무를 다한 판결'이라며 서울고등법원에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민변 일본군'위안부'문제 대응 TF 단장을 맡아 1, 2차 소송의 한가운데 자리했던 이상희 변호사(법무법인 지향)를 만나 이번 판결의 국내외적 의미와 함께 역사적인 판결이 있기까지 소송인단이 '수명이 닳는 듯한' 느낌으로 헤쳐 온 크고작은 고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식민지배의 불법성 그리고 온전한 시민권자로 인정받은 피해자들 서울고법 판결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일차적으로 피해자의 법적 권리를 인정하고 온전한 시민권자라는 확인을 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희 변호사의 일성은 판결문 초반부에 명시된 내용과 또렷하게 조응한다. 서울고법이 일본 육군의 물품판매 규정 「야전주보규정(野戰酒保規程. 1937.9.29. 육달陸達)」과 「영외시설규정(1943.7.18.)」, 「전시복무제요(1938.5.)」 등의 기록을 채택, '일본국이 중일전쟁 내지 태평양 전쟁을 하면서 군인들의 사기 진작 및 민원 발생 저감 등을 목적으로 위안소를 설치·운영'했다는 사실과 함께 그 불법성과 책임을 분명하게 인정한 것이다. 판결문은 또 개인별 '위안부' 동원 과정과 '위안부' 생활을 하나하나 짚어나가면서 피해자들이 이로 인해 회복하기 어려운 육체적·정신적 피해를 입었고, 이는 당시 일본국이 비준한 국제조약이나 국내 형법에도 위배된다는 사실을 명확히 했다. 다음으로 1차 소송의 한계를 극복한 2차 소송의 가장 빛나는 성취, 곧 '국가면제'에 대한 판단이다. 생소한 법률 용어로 '주권면제'라는 용어로도 혼용되는 국가면제는 국제관습법으로, '국가 평등 원칙에 입각해 국제법상 국가에 인정되는 법적인 면책'을 말한다. 이에 따르면, 주권 국가의 국가기관이나 그의 행위는 타국의 재판관할권 적용에서 면제될 수 있다. 쉽게 풀어서 주권 국가는 타국의 국내 재판에서 강제로 피고가 될 수 없다는 원칙인데, 이는 대소나 강약 같은 힘의 논리에서 벗어나 개별 주권국을 중심으로 '대등하게' 국제 질서와 평화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이 되는 법리이기도 하다. 인권 침해, 불법 행위는 '국가면제' 불가 쟁점은 그동안 국가면제가 보편적 인권 침해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명분으로 작용해 왔다는 사실이다. 이는 국제적으로 '무력 분쟁 중에 법정지국 영토 내에서 이뤄진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국가면제를 인정하고 있으며, 강행규범 위반으로 인한 중대한 인권 침해 여부가 재판권 존부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본 1차 소송 재판부의 소극적이고 사대주의적인 판단이 닿아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2차 소송에서 서울고법은 전향적인 판단을 내렸다. '법정지국 영토에서 그 국민에게 발생한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그 행위가 주권적 행위인지 여부를 묻지 않고 국가면제를 인정하지 않는 국제관습법이 현재 존재한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한 것이다. 서울고법은, 국가면제에 관한 국제관습법은 항구적이고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태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다수 국가가 국내법의 입법을 통해 영토 내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국가면제의 예외를 인정하고 있는 점, 이탈리아를 비롯해 최근 브라질 최고재판소, 우크라이나 대법원 등에서 가해국에 대해 국가면제의 적용을 부정하는 판결을 하는 점, 국가면제와 관련된 국제법 체계가 이미 개인의 재판청구권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이행되고 있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관련해 이 변호사의 설명은 변화의 핵심을 보여준다. 세계적으로도 국가면제를 극복한 몇 안 되는 사건입니다. 그만큼 국가 중심의 국제법 질서, 국제관습법이 항구적이고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개인의 재판청구권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이행하고 있다는 도도한 시대적 흐름을 드러낸 세기적 선언이고요.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개개인에게 부수적인 피해라는 건 있을 수 없잖아요. 국가는 인권을 보호하고 보장하며 실현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약 피해를 입었는데 국가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법률상 구제절차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헌법에서 보장하는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이번 판결이 인권의 관점을 넓고 깊게 확장시키는 측면에서 조금 과장하면 국제관습법의 '마그나카르타'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닌 이유입니다. 번역 또 번역, 거액의 자문료… 고비고비 과정은 험난했더라 당연히 여기까지 오는 동안은 한순간도 순조롭지 않았다. 불법행위를 객관적으로 밝히고 책임을 묻는 주장, 그에 따른 손해 규모를 입증하는 것 하나하나가 원고 측 일이었다. 재판을 위해 '피고' 일본정부에 소장을 전달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공시 송달을 하면서 반복적인 기피와 거부 사실을 법원에 설득한 끝에 재판을 이어갈 수 있었다. 재판 때마다 보도자료도 발표했다. 기사를 통해서라도 일본 정부에 재판 소식이 전해질 수 있도록, 동시에 절차적으로도 발뺌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대응이었다. '국가면제'를 둘러싼 법리 공방은 더욱 지난하고 복잡했다. 영어 외 여러 언어로 된 해외 자료와 국제 판례를 발굴하고 번역하는 일이 끝도 없이 밀려들었어요. 국제적인 인권법 전문가, 학자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메일을 수도 없이 보냈고요. 인권 보호의 폭을 넓히고 국가면제 예외를 지지하는 국제적인 변화를 재판부에 확인시키기 위해 국내 198명을 포함, 전 세계 법률가 410명이 참여한 '세계 법률가 선언'을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피해 할머니 살아계실 때 결론 나와야 한다! 당황스러운 기억도 있다. 거액의 자문료를 요구받았을 때였다. 국제적인 법률 전문성과 경륜을 가진 변호사였기에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했다가 거액의 자문료를 원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항소심 법정에서 영상으로 지지 의견을 전해준 영국 버밍엄대 법학대학원 알렉산더 오라케라쉬빌리 교수를 비롯해 연대의 목소리를 내준 세계 법률가들이 그래서 더욱 고맙다. 가장 힘든 시기는 재판이 막바지로 향할 때였다.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며 준비 서면을 마련하는데 에너지도, 시간도 역부족이었다. 재판은 공전됐다. 그렇다고 변론 기일을 늦출 수도 없었다. 밤을 새고 다들 엄청 고생을 하는데도 재판 일정까지 서면이 나오기 힘들 것 같아 연기를 해야 하나 고민이 깊었어요. 그런데 고비 때마다 다른 걱정이 훨씬 앞서는 거예요. 원고 중에 살아계신 분이 이용수 할머니 한 분이잖아요. 행여 연기했다가 슬픈 소식이 들려오면 그 죄책감을 어떻게 감당하나, 안 계신 상태에서 선고가 나면 어쩌나, 다들 부담이 어마어마했어요. 온몸이 떨릴 정도로 에너지를 쏟았던 터라 서면을 접수할 때마다 수명이 닳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변호사는 피해자를 넘어 '기승전-전쟁은 안된다'는 지구적 메시지를 호소해 온 인권활동가 할머니들 생전에 결과를 보여드릴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전했다. 브라질 판결이 우리 항소심에 영향, 이는 다시 중국에 참고 한편으로 이 변호사는 세계 각국의 법원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인권의 역사를 진전시켜 가는 현장을 현재진행형으로 경험 중이기도 하다. 2013년 8월에 고 배춘희 할머니 등 피해자 12명이 일본정부에 1인당 1억 원씩 배상하라는 소송에 대해 2021년 1월 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일본측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없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어요. 당시 전 세계에 이슈가 됐습니다. 그런데 이 판례가 이듬해인 2022년 브라질 최고재판소에 영향을 미쳐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폭격으로 침몰한 선박에 탔던 피해자의 유족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1, 2심에서 각하됐는데, 최고재판소에서 우리 판결을 근거로 뒤집는 결정을 내린 거예요. 우리 재판 덕분에 가능했던 결과라 자부심을 느꼈죠. 그런데 다시 브라질 최고재판소 판결이 저희 항소심에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지난 4월 21일에는 중국인 '위안부' 피해자 18명의 후손이 한국의 최근 판결을 참고해 산시성 고급인민법원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제 인권 수준을 도약시키고 진일보한 국제관습법 관행을 만드는 사례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것이다. 일 정부에 가시적 이행 촉구하며 '강제집행'도 검토 다만 역사적인 판결에도 한·일 두 나라 정부의 반응은 냉랭하다. 우리 정부는 외교부 대변인실 차원에서 '2015 한일 '위안부' 합의를 양국 간 공식 합의로서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을 뿐이고, 일본 정부 또한 항소하지 않고 기존 '무대응 원칙'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2월 29일 민변, 정의기억연대,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일본군'위안부'연구회, 시민모임 독립 등 시민사회는 국제심포지엄을 열고 '일본국 상대 손해배상 청구소송 2심 승소 판결 의미와 과제'를 공유했다. 승소 판결 이후 호흡을 고르고 있는 이 변호사는 향후 계획에 대해 일본군'위안부'문제 대응을 통해 일본 정부에 가시적인 이행을 촉구하는 한편 '강제집행' 절차를 구체적으로 검토해 나갈 예정이라 전했다. 이번 소송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의사에 반해서 강제 또는 사기를 당해 일본군'위안부'로 동원된 피해 사건인 동시에 전시를 포함해 어떤 상황에서도 국가 폭력이나 인권 침해는 책임이 면제될 수 없다는 강력한 제도적 유산을 이끌어냈어요. 이는 결국 일본 사회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 압력으로 연결되고 우리나라의 인권감수성 확장에도 기여하리라 믿습니다. ※ 일본국을 상대로 한 2차 손해배상 청구소송 판결문은 아래 링크로 들어가 확인 후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링크 : 2차 손해배상 청구소송 판결문 Credit 인터뷰어: 손정미 인터뷰이: 이상희 글/정리: 손정미 인터뷰 일시: 2024년 4월 11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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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좌담 '중국귀환자연락회' 활동이 던지는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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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문제 <2부>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개최 20주년인 2020년, 다양한 전공의 연구자들이 국제법 관련 자료를 함께 읽으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젠더 기반 폭력을 새로운 시각으로 공부하는 모임인 '국제법×일본군'위안부'세미나팀'이 출발했다. 그동안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여러 보고서와 판결문, 의견서, 포로 심문서 등을 읽으며 무력 충돌 하 젠더 기반 폭력, 국제 전범 재판에서 보이는 젠더 기반 폭력에 대한 불처벌 문제, 범죄 행위로서 식민 지배와 이에 대한 불처벌 문제 등을 예민하게 들여다보며 논의를 발전시켜 왔다. 세미나팀이 최근 함께 읽고 토론한 자료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일본군 전범이 말하는 '위안부' 문제 Ⅱ: 중국 침략 일본군 전범 자필진술서 선집』(2023. 이하 선집)이다. 웹진 <결>은 이를 좌담으로 정리,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문제'라는 주제로 소개한다. 시리즈는 전범 자필진술서의 등장 배경과 사료적 가치, 겹겹의 함의 등을 조목조목 들여다보는 토론으로 3회에 걸쳐 구성했다. <1부>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1) 전범 자필진술서 속 범죄 고백과 '위안부'의 자리를 찾아서 <2부>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2) '중국귀환자연락회' 활동이 던지는 질문들 <3부>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3) 국제법적 맥락에서 보는 전범 재판과 전쟁 책임 🧶 김수용 : 전범 재판에서 관대한 처벌을 받고 일본으로 귀환한 전범들은 중국귀환자연락회(中国帰還者連絡会. 이하 중귀련)를 만들어 평화운동과 전쟁 반대 운동을 해요. 그렇기에 '인죄'와 '탄백'은 전범 재판을 받은 시기뿐 아니라 일본 귀환 이후 이어지는 반성과 사죄를 위한 증언, 평화운동을 시야에 넣어서 논의해야 합니다. 중국 전범 재판에서 관대한 처벌을 한다는 원칙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어요. 그래도 양형을 결정하는 과정은 치열했다고 해요.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현장 의견과 관대해야 한다는 중앙 의견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저우언라이(周恩來) 생각대로 결정된 것 같아요. 사형과 무기 징역이 없는 관대한 처벌로요. 🧶 조시현 : 자필진술서를 작성했던 시점의 증언과 이후 2000년 법정에서 가해 증언을 했던 중귀련의 두 분에 관해서도 좀 더 알고 싶어요. 그들의 자필진술서가 남아 있다면 2000년 법정 당시의 증언과 대조해 보고도 싶고요. 교화 목적으로 작성된 자필진술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쓴 전범이 가해자로서 '당사자성'을 획득했다고 보는 것은 다소 추상적인 것 같아요. 진술서를 쓴 전범의 귀국 후 활동이 일관성을 유지하는지 보려면 개개인의 삶의 궤적을 알 필요가 있어 보여요. 그래야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궁금한 게 있어요. 진술서를 쓴 900여 명이 전부 중귀련 회원이 되었나요? '중귀련' 결성 경위와 활동 내용 🧶 김수용 : 다는 아니에요. 찬조 회원까지 합해서 1996년 2월 1일을 기준으로 중귀련 회원은 1258명이었어요. 귀환 1년 후에 중귀련 설립을 위해 전체 회원 명부를 작성했다고 해요. 일본으로 귀환하는 배 안에서 조직을 만들어 이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반전평화, 중일우호를 위한 활동을 하자는 내용에 동의했어요. 그래서 암묵적으로 모든 회원을 대상으로 명단을 작성했지만 활동 방향에 대한 이견(경제적 차원/정치적 차원)으로 실제 조직률은 50~55%를 넘지 않았고, 회비 납부율은 40~50% 정도였다고 해요. 🧶 심아정 : 중귀련 소식지 계간 『중귀련』은 1997년도부터 발간됐죠? 1997년 역사 수정주의가 판을 치는 가운데 창간호가 발간된 건데, 무려 7천 부나 팔렸대요. 적은 숫자가 아니에요. 중귀련이 자위대 해외 파병 반대 운동 등 여러 활동을 했어요. 그런데 일본군'위안부' 관련 증언을 시작한 건 1992년부터라고 해요. 확실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 이후인 거죠. 중귀련 조직 차원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증언하기로 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성폭력 문제에 관해 가해자가 공개된 장소에 직접 나서서 증언하는 문화는 없었어요. 2000년 전범 여성국제법정 이전에는 거의 없었다고 생각해요. 그런 맥락에서도 2000년 법정이 굉장히 중요한데, 당시 후지이 다케시 선생은 중귀련 사람들의 탄백, 죄를 고백하는 말들이 상정하는 대상이 '중국 인민'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지적해요. 자필진술서에 돼지 콜레라로 묻어버린 돼지나 장티푸스에 걸린 어린 아이를 숨이 붙어 있는 상태로 묻어버렸다는 것까지 전부 얘기하잖아요. 그렇게 일일이 나열하며 이야기했다고 정말로 그런 존재들을 인죄의 대상으로 생각했을까… 이들의 인죄는 추상적인 중국 인민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전후에도 여전히 '일중우호', 이런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 김수용 : 그 부분이 중귀련을 비판할 수 있는 가장 큰 지점이죠. 그러니까 너무 중국과 일체화되어 있다고 할까요? 이후에 중국에서 일어난 문화대혁명과 관련해 중귀련 내부에서 해석이 갈렸지요. 우리가 은혜를 입었다고 중국의 뜻이 다 옳은 것은 아니라는 입장과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옳다는 입장이 대립하면서 오랫동안 조직이 분열됐다가 전범관리소 직원들의 설득과 두 단체의 노력으로 다시 결합한 일도 있었어요. 본국 귀환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살았으면 '정말 미안한 거 맞나?' 하고 의심할 수 있을 텐데 평생 증언하고 반전운동을 했어요. 사실 그렇게까지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저는 정말로 미안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중귀련 활동을 통해 과거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한 형벌과 사죄가 평생 이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 장은애 : 진정성을 의심한다기보다 진술서 형식의 고백이 어떻게 반성이나 성찰의 계기로 작용했을까 라는 질문이 해소되지 않아요. 어떤 전범이 귀환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나는 아주 기쁘다. 많은 재난과 고통을 입은 중국인에겐 죄송하다. 나는 사람이 변하여 좋은 사람이 된 것보다 더 유쾌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부터 인생의 제일보를 걷고자 한다. 나는 후반생은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 여러분에게 감사한다. 지금 내 마음은 유쾌함으로 충만해 있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며 충분히 반성할 기회를 얻어 기쁘다고 이야기할 때 누가 그것을 받아주고 용서해줬는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한편으로 이런 대목에서 역시 섬뜩해요. 아무리 진술 과정의 복잡함을 섬세하게 이해하려고 해도 저런 식의 발언은 비위가 좀 상하네요. 근데 또 중귀련 활동을 보면 분명히 의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 김수용 : 이 사람들도 진술서에서 죄를 인정한 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고 얘기해요. 법정에서도 직접 피해자들을 대면하거든요. 그러니까 법정에서 한 번 만나고, 그 전에 자기들이 죄를 지었던 지역들을 방문해 살해당한 사람들의 가족들을 만나기도 해요. 그러한 경험을 한 뒤에 증언을 추가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귀환 뒤 중귀련도 결성하고,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증언하기도 하면서 나름대로 자신들의 죄를 반성하고 사죄하고자 노력해 왔던 것 같아요. 일례로 일본으로 강제 연행되었던 류롄런(劉連仁)이란 중국인이 일본이 패전한 줄 모르고 14년 동안 산속에 숨어 있다가 발견된 사건이 있었어요. 이 사건이 중귀련 회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어요. 왜냐하면 중귀련 회원 중에 제59사단이 많았어요. 일명 '토끼몰이'라고 하는, 노동자 강제동원에 관한 일을 했던 부대였는데, 자신들이 잡아다 일본으로 보냈을지도 모르는 중국인이 눈앞에 나타난 거잖아요. 이 사건을 계기로 중귀련은 전시에 강제동원됐다가 일본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유해를 송환하는 일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어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계속 반성해 나갔던 게 아닐까요. 저는 중귀련의 글을 많이 봐서 그런지 이들을 변호하게 되네요. 중국의 전범 재판과 자필 진술의 진정성 🧶 장원아 : 저는 문학연구자가 아니어서 그런가 진술서에서 진정성을 따질 수 없지 않을까 해요. 애초에 진짜 형식만 볼 수 있는 글이라 '정말 반성했는가?' 하는 건 이 자료로는 파고들 여지가 없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 김수용 : 저는 중귀련 분들의 진정성을, 귀환 이후 행동과 삶을 보면서 의심하지는 않게 됐어요. 하지만 중국 정부가 처음부터 자국민에게 “이 사람들을 용서해야 돼. 이들을 우리가 인간으로 개조해서 일본에 돌려보내야 해”라고 한 거잖아요. 그건 개인이 용서할 자격을 국가가 선취한 거라고 할 수 있잖아요. 화해도 국가가 시킨 면이 있고. 그 부분이 제일 마음에 걸리고 고민도 돼요. 중귀련 분들이 전범관리소 소장, 부소장뿐 아니라 모든 직원들과도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한단 말이에요. 일본에 전범관리소 직원들을 초대도 하고, 또 중국에 가서 다시 만나기도 해요. 끝까지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관리소 직원들을 스승처럼 대하거든요. 근데 들여다보면 일본 전범들이 제일 먼저 만났던 피해자가 관리소 직원들인 거예요. 관리소 직원 중에는 형을 잃은 사람도 있고, 심지어 아버지를 잃었는데 그 아버지를 죽인 사람을 관리소에서 대면하기도 해요. 처음 중귀련에 대해 공부할 때는 관리소 직원과 수감된 전범들을 피해자-가해자 관계로 파악하지 않았어요. 요즘에는 일본인 전범들이 가장 먼저 만난 피해자가 전범관리소 직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 이 사람들이 서로 갈등도 해요. 일본인들은 '나는 전범이 아니다.' '나는 소련에서 포로였는데 왜 전범 취급을 하느냐. 빨리 나를 풀어줘라.' 하고, 관리소 직원들은 '내 부모를 죽인 철천지원수를 나보다 더 좋은 밥을 먹여가면서, 정말 찢어 죽여도 모자랄 사람들을 우리가 이렇게 인격적인 대우를 하는데, 저렇게 자기들은 포로라고 막 난동 부리는 것을 봐줘야 되는가'라고 하고. 그래서 차라리 이러느니 한국전쟁 의용군으로 가겠다고 한 직원도 있었죠. 한편으로 이들의 관계가 어쩌면 제일 먼저 화해한 피해자와 가해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화해와 연대 이런 말이 너무 앞서가는 게 아닌가 했는데, 이 안에서 이들은 화해를 하고 있었구나 싶어요. 그래서 아직도 너무 복잡한 느낌이에요. 피해자와 가해자를 나누기도 힘들고요. 선생님들의 말이 뭔지는 알겠어요. 이걸 보면 저도 되게 기괴해요. 그래도 이들의 과정을 아니까 '그래, 이때는 이 정도의 인식이었구나' 하면서 그 의도가 의심되거나 그렇지는 않아요. 너무 몰입해 있나 봐요. 🧶 심아정 : 이 자료집은 진술서라는 특성을 잘 이해하면서 읽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문건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재판받기 전에 진술서를 다 썼고, 그래서 1955년에는 연극 같은 걸 하면서 나름 문화생활을 해요. 저는 그 장면이 뭔가 부조리극처럼 느껴졌어요. 그러니까 집단 치료 심리극 같이 자기들이 시나리오를 쓰고 역할도 맡아 공연을 하는데, 연극 제목을 보면 '일본군에 의한 강간과 고문'이에요. 그러니까 강간을 죄라고 인지를 한 거죠. 근데 강간당하는 여성도 자기들이 연기해요, 농부의 아내라던가. 이런 내용이 노다 마사아키의 『전쟁과 죄책』에 나와요. 김수용 선생님 말대로 섣불리 해당 시기만으로 판단하지 말고 전 생애를 통해서 이 사람들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귀환 이후 이들이 앞다투어 내는 수기가 있잖아요? 후지이 다케시는 이런 현상에 대해 '가해자들의 미투'라는 표현을 썼어요. '나도 잘못했어, 나도 잘못했어' 이런 식으로 계속 병사들이 수기를 내는데, 저는 처음에는 정말 대단하다 했지만 이렇게 경합하듯 최선을 다해 자신의 가해 행위를 드러내는 방식에 도대체 누구를 향한 말이지?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인가? 하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위화감이 들기도 했어요. 아까 나온 얘기처럼 국가가 용서한다는 방침을 정했고, 남자들(전범과 관리소 직원들) 사이에 생긴 화해의 무드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때 여자들의 자리는 또 어디 있지? 누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정말 복잡했어요. 처음에는 긍정적인 인간의 변화를 촉발한 어떤 계기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는데, 전범관리소 내에서 연극을 하는 상황을 읽고 나니 또 한편으로 이게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드는 거죠. 그러니까 연극 무대에 올라가 각각의 역할을 적나라하게 재현하는, 완곡한 우회로를 전혀 쓰지 않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어떤 가해 행위에 대한 인정 경쟁을 하는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진술서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 진술의 시간 이후에 나온 관련 자료들을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체제와 진술 형식, 말하기의 이면 🧶 이슬기 : 심아정 선생님이 말한 위화감이 사회주의 국가가 갖고 있는 특성에서 기인하는 부분도 크다 싶어요. 지금 우리에게 너무 이질적이고 낯설어 더 이상하고 기괴하게 다가온다는 거죠. 저는 진술서를 볼 때 어떤 면에서는 약간 익숙한 지점도 있었어요. 인민재판에서의 말하기 같거든요. “내가 이걸 잘못했고, 이걸 잘못했고…”라고 말해야만 인정해주는 것, 뭉뚱그려 표현하면 “네 죄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구나”라고 하는 게 사실은 북한이나 북베트남, 중국처럼 공산주의 국가들이 전쟁 이후에 자본주의자나 미 제국주의자들을 단죄할 때 썼던 방식이잖아요. 그래서 이들의 말하기는, 이게 정말 진심이냐 이런 건 잘 모르겠지만 당시에 이렇게 말하도록 했던 분위기들이 있었을 것 같아요. 이것은 다른 체제, 사회주의 인민재판의 성격과 연결돼 있어 지금 우리에게 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겠다 싶어요. 🧶 김수용 : 공감되는 말씀인 게 이 시기 중국에 있었던 '삼반오반운동'이라는 인민재판 형식의 반부패 운동과 그 형식이 거의 같아요. 어떤 잘못을 얘기하게 하고, 그 일에 대한 증인이 있다면 그에 대한 반론을 얘기하고, 그 반론을 듣고 자신의 진술을 다시 수정하는 자기비판의 형식이죠. 따라서 탄백인죄는 특별한 전범 정책이라기보다 중국이 항일 전쟁과 내전을 겪으면서 만든 포로 정책의 연속선상에서 이뤄진 일들이라서 심아정 선생님이 말씀하신 위화감은 사회주의 정치운동 형식에 대한 것이 아닐까 해요.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니까요. 🧶 조시현 : 중국의 전범 재판에서 탄백과 인죄라는 명목으로 자아비판을 하는 것은 진술서를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인민 또는 당국에 투항, 즉 몸을 맡긴다는 의미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죽어 마땅하니 재판의 처분이나 조치에 순응하겠다는 의사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거 같아요. 그렇다면 이건 재판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중국의 전범 재판 구상에서 핵심적인 기둥이겠구나 싶고, 이게 관대한 처분과 연동되겠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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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일본군‘위안부’ 증언의 과거와 미래(2): 영원(永遠)한 증언과 ‘오지 않은(未來)’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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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제작한 <黎明之眼(여명의 눈동자)>(呂小龍, 2014)라는 영화가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1991~1992)를 리메이크한 것으로, 일본군에 연행되어 ‘위안부’가 된 여성 기자의 삶을 다루고 있다. 흥미로운 지점이 많은 영화이지만, ‘위안부’ 피해생존자의 증언에 접근하는 방법에 주목해보자. 영화는 할머니가 된 ‘위안부’ 피해생존자가 역사관 전시를 둘러보다 쓰러지는 데서 시작한다. 그녀는 병원으로 이송되고, 영화는 플래시백으로 과거를 비춘다. 그녀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관객은 그녀가 왜 전시관에서 충격을 받았는지 납득하게 된다. 이때 영화가 현재와 과거를 매개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매우 독특하다. 그것은 그녀의 회고도 아니고, 역사관에 전시된 기록물도 아니다. 영화는 피해생존자의 ‘뇌’를 스캔함으로써 과거를 보여준다.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위안부’ 피해생존자는 헤어진 가족과 상봉하게 되는데, 가족들은 그녀가 회고록을 쓰는 걸 꺼려 한다. 그녀는 역사의 증인이 되고자 가족을 떠나지만, 정신을 잃고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영화는 끝난다. 영화에서는 과거를 드러내는 두 가지의 방법이 제시된다. 하나가 뇌를 스캔하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피해생존자가 자신의 언어로 과거를 진술한 회고록이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때까지 회고록은 출간되지 못한다. 대신 영화는 플래시백 지점에서 뇌 스캔 데이터 영상과 과거의 장면을 직접 연결한다. 요컨대 관객들은 피해생존자의 증언을 ‘들은 것’이 아니라, 그녀의 뇌를 ‘본’ 셈이다. 이러한 설정 탓에 영화 속 피해생존자는 다소 괴기스럽기까지 한 복잡한 기구를 머리에 쓰고 뇌 검사를 받는다. 그렇다면 영화는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피해자의 뇌를 열어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의도를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다. 사실 영화에서도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계속해서 역사 왜곡의 문제가 제기된다. 결국 영화의 의도는 줄곧 공격의 대상이 되는 피해자의 진술이 아니라, 피해자가 실제 경험한 ‘사실’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에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환상이 작동하고 있다. 더 문제는 ‘사실 입증’의 강박이 피해생존자가 자신의 경험을 스스로 해석할 여지를 차단해버린다는 점이다. ‘원본성’에 대한 강조는 당사자성을 존중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일 테지만, 실제로는 피해자의 주체성을 삭제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 나아가 증언자와 청취자의 상호 소통과 대화의 여지도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증언을 상상하는 방식은 이것과 얼마나 거리가 있을까. 현재 일본군‘위안부’ 증언 문제는 곤경에 처해 있는 듯하다. 역사 왜곡과 증언에 대한 공격이 계속되는 가운데, 고령인 증언자들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위기감까지 겹친 것이다. 진실을 규명하고 역사를 바로잡는 일은 요원한데, ‘증언(자) 부재’의 시대는 임박하게 다가와 있다. 이는 피해생존자가 한 분이라도 더 계실 때 증언을 아카이빙 해야 한다는 다급함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피해생존자를 AI로 구현한 <영원한 증언>이라는 콘텐츠가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일본의 역사왜곡의 노골적인 시도”가 계속되는 가운데 “생존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고령화”[1]가 콘텐츠 개발을 촉발했다는 데서 오늘날 증언이 당면한 문제를 돌파하기 위해 이 연구가 기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원한 증언>은 미리 추출된 질문지를 통해 시나리오를 데이터베이스화한 뒤 청취자가 증언자의 형상을 한 AI에게 질문하여 ‘대화형 증언(Interactive Testimony)’을 청취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 콘텐츠 개발에서 특히 공들인 부분은 증언자의 ‘현존감(presence)’인 듯하다. 기획 의도에서 청취자가 지금 여기에서 피해생존자 당사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실감이 전달될 때, ‘사실 효과’를 배가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강하게 묻어난다. 물론 당사자의 증언은 존중되어 마땅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 원본성에 대한 강박이 오히려 증언을 편협하게 이해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영원한 증언>은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증언자의 현존감을 구현하겠다고 하지만, 이렇게 재현된 증언자에게서는 오직 ‘피해자’의 면모만이 부각되기 쉽다. 증언 연구의 역사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위안부’ 피해가 과거의 경험에 한정되지 않으며, 동시에 전 생애가 피해자성으로만 점철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디지털 증언에 관한 학술대회에서 한 토론자는 ‘위안부’ 피해생존자와의 ‘만남’이 피해사실에 대한 청취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2] 피해사실을 거듭 말하는 AI를 구현하겠다는 발상은 증언을 세련되게 ‘화석화’하는 것을 넘어, 피해자로 왜소하게 구현된 증언자를 증언자의 전체적 면모라고 착각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대화’라는 착시효과다. <영원한 증언>은 사전에 구축된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하여 AI가 청취자와 대화를 하는 형태다. 따라서 “증언자의 데이터가 질문자의 질문 데이터와 매칭이 되지 않는, 이른바 비유효 질문들(Fallback-questions)이 발생”하는 경우가 문제가 되는데, 이때에는 “자연스럽게 이미 데이터베이스화해둔 일반적인 증언자의 발화내용으로 자동 매칭되는 방법을 구사”[3]하게 설계되었다고 한다. 물론 AI 기술은 발전 중에 있는 것이므로, 기술 진보에 따라 새로운 방법이 도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여기서 짚고 싶은 것은 ‘대화’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다. 대화는 서로가 한 번씩 돌아가며 말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2000년 이후 학계는 증언이란 말하는 이와 듣는 이 간의 공동 작업이며, 생존자의 기억이란 그를 둘러싼 사회의 사고방식과 규범 속에서 다각도로 영향을 받는 와중에 생산되는 것[4]이라 인식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곧, 증언이 증언자와 청취자 사이의 ‘대화’라고 할 때, 이때 대화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로써 집단적 기억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디지털 매체로 구현하고자 하는 증언이 청취자를 대화참여자, 다시 말해 ‘증언참여자’로 이끄는 ‘대화’로 나아가고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증언(자) 부재’의 시대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다른 한편 새로운 매체 기술에 힘입어 증언 아카이빙을 서두르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증언자를 디지털 매체로 구현하여 영속하게 하려는 시도로 나타났다. 그런데 ‘영원한 증언’은 이렇게밖에 달성될 수 없는 것일까. 증언집 4권 『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에 참여한 조사자들은 증언자의 ‘침묵’까지 들으려고 노력하면서 “점차 ‘증인’이 되어갔다”고 한다. 침묵을 듣는다는 것은 “왜 그때 증인이 침묵했었을까에 대한 면접자의 ‘이해’가 요청되는 차원의 것”이고 “따라서 이 과정에서 이미 증인과 면접자의 상호 주관성이 만들어지고 표출”된다는 것이다. 증언이 조사자와 증언자의 공동 생산물이라면, 조사자가 “점차 ‘증인’이 되어”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5] 이러한 사례를 참조하자면, ‘영원한 증언’은 증언자를 ‘보존’하는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 그야말로 ‘오지 않은(未來)’ 증인을 초대함으로써도 가능할 것이다. 그동안 ‘위안부’ 증언 연구는 사실성의 잣대로 증언을 검증하려는 실증주의와 모든 진실은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라는 상대주의적 진실관 양쪽 모두를 지양하면서, 법적 진실을 초과하는 증언의 진실을 탐구해 왔다. 새로운 매체를 통해 증언에 접근한다고 해서 이러한 고민의 결과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간의 연구 성과를 되돌려 다시 시작하기엔, 우리에겐 정말 시간이 없다. 각주 ^ 김상용, 「AI기반 실감형 인터랙티브 콘텐츠, <영원한 증언>-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증언의 인터랙티브 콘텐츠 제작을 통해 본 ‘증언의 현재성(The present of testimony)’ 고찰」, 『디지털콘텐츠학회논문지』, 2021, 1816쪽. 이하 <영원한 증언> 콘텐츠에 관한 설명은 위의 논문을 참조한 것이다. ^ 이는 2022년 7월 29일 열렸던 <다차원의 증언을 만난다는 것> 학술워크숍의 토론자 후루하시 아야의 발언이다. 이외에도 학술워크숍에서는 중요한 논점이 제기되었기에 간략하게 밝혀 둔다. 임경화는 <영원한 증언>이 모델로 삼은 쇼아 재단의 ‘증언의 다차원성(Dimensions in Testimony)’ 프로젝트를 참조하면서, 증언 수집에 있어 ‘피해자’들 사이의 국경을 넘고 ‘피해자’와 ‘해방 주체’의 경계선을 넘으려는 다차원적 시도가 필요함을 지적하였고, 박소현은 증언을 전시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발표하면서 ‘위안부’ 할머니와의 대화가 무엇을 공론화하기 위한 것인지, 어떻게 ‘다른 목소리들’과 연대하며 증언을 ‘현재화’할 것인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더불어 역사의 책임을 밝히기 위해 희생자에 관한 데이터를 수집할 뿐 아니라, 퇴역군인들의 증언 등을 통해 폭력 시스템을 밝힐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또, 장수희는 윤리적 목적을 내세우면서도 ‘위안부’ 문제를 외설적으로 소비했던 대중소설들을 제시하면서, 정의감만으로 증언의 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경계하길 주문했다. 나아가 손쉽게 청취할 수 있는 증언이 ‘증언 서비스’로 가볍게 소비됨으로써 본래의 의도를 배반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지적하였다. 학술워크숍에서 제출된 논점들은 앞으로 증언 아카이빙 방법론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좀 더 깊이 있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 김상용, 앞의 글, 1819쪽. ^ 양현아, 「증언과 역사쓰기」, 「증언과 역사쓰기-한국인 “군 위안부”의 주체성 재현」, 『사회와역사』, 2001.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신대연구회편,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4』, 한울, 2001,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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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에세이 배봉기 씨가 오키나와에서 걸어온 전후(戦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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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기림의 날 특집 : 일본군‘위안부’ 역사, 우리 모두의 삶 오키나와의 할머니, 배봉기 님이 돌아가시고 7년이 흐른 뒤, 그 반평생을 취재하여 기사로 엮어낸 일본인 기자가 있습니다. 매 학기 대학 강의실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다양한 논점을 학생들과 토론하는 서울의 교수님들이 있습니다. 미국 내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역사를 알리고 소수자 혐오범죄 및 성폭력 방지 교육활동을 하는 샌프란시스코의 시민단체가 있습니다. 이처럼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교훈은 저마다의 공동체와 시민적 삶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변화를 촉구합니다. 2023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그 작지만 큰 실천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1. 배봉기 씨가 오키나와에서 걸어온 전후(戦後) 2. 샌프란시스코 시민운동과 미국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이 가지는 의미 3.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듣다 I 4.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듣다 II 기자로서 한 여성이 걸어온 궤적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 그러나 그분은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본인에게 직접 물을 수도 없는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망설임과 불안을 안은 채, 그래도 나는 취재를 진행하기로 했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 한반도에서 오키나와현 도카시키섬(渡嘉敷島)으로 끌려와 일본군‘위안부’가 된 배봉기 씨. 전후에도 계속 오키나와에서 생활하다 1991년 10월 18일 나하(那覇) 시내 아파트에서 잠자듯 숨을 거둔 채 발견됐다. 향년 77세였다. 내가 배봉기 씨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대학생 때였다. 배봉기 씨의 증언을 기록한 책을 읽다가 그가 겪은 전시 상황의 처절한 경험을 알고 나서 할 말을 잃었다. 기자가 될 수 있다면 이런 사람들의 기록 작업에 임하고 싶었다. 배봉기 씨가 생을 마감한 1991년, 나는 류큐신보 기자로 일하기 시작한 지 겨우 2년 차였다. 그의 부고를 전하는 짤막한 기사를 접했을 때,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현실을 깨닫고 아쉬움에 의욕마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한편, 당시의 나는 기자로서 미숙했고, 애초에 배봉기 씨로부터 신뢰를 얻어 취재를 실현할 만한 역량은 갖고 있지 않았다. 어쨌든 배봉기 씨를 마음 한편에 품은 채 기자 일을 계속하게 된다. 그 후, 나는 오키나와 전투를 몸소 겪은 분들에 대한 취재를 조금씩 이어나갔다. 1995년에는 우루마(うるま)시 구시카와(具志川)에서 일어난 집단자결(강제 집단사)의 생존자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 등 전쟁을 겪은 분들이 오랜 세월 봉인해 온 힘들고 슬픈 기억을 더듬어나갔다. 이러한 취재는 당사자의 과거를 다시 끄집어냄으로써 묵은 상처를 헤집는 죄도 동시에 저지르게 된다.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바람에서 입을 열어준 증언자의 마음을 헤아려 기사화했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취재하는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찾은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1998년. 마침내 나는 배봉기 씨의 반평생을 기사로 엮는 취재에 도전하기로 했다. 배봉기 씨 본인에게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대신, 생전 그와 친분이 있던 사람들을 찾아다니기로 했다. 배봉기 씨를 17년간 지원해온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오키나와현 본부의 김수섭, 김현옥 씨 부부를 비롯해 배봉기 씨를 담당했던 나하 시청 기초생활 담당 직원, 배봉기 씨가 살던 아파트의 집주인 등 관계자들을 찾아다녔다. 6월 2일부터 21일까지 20일간 연인원 41명을 취재했다. 증언은 취재노트 4권으로 남겼다. 배봉기 씨는 전후 전쟁 후유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계속 시달렸다. 그는 1970년대 후반 몇 년간 난조(南城)시 사시키아자쓰하코(佐敷字津波古)에 있는 오두막집에서 살았다. 사탕수수밭 옆에 세워진 집은 베니어합판으로 사방을 에워싼 약 1.2평 정도의 작은 공간이었다. 어느 날 오후 교류가 잦았던 조총련 김 씨 부부가 집을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불상화 울타리를 지나 샛길로 접어들자 사탕수수 잎사귀들이 흔들리는 소리 사이로 오두막집에서 금속음과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을 들여다보니 배봉기 씨가 고함을 치며 식칼로 냄비를 두들기고 있었다. 배봉기 씨는 전쟁 때보다 혼자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지금이 더 괴롭다고 주변에 털어놓았다. “배봉기 씨는 청춘과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은 상태인 게 당연하다”라고 김 씨 부부는 당시를 회상했다. 이 무렵 배봉기 씨의 증언을 듣기 위해 종종 오두막집을 찾았던 논픽션 작가 가와다 후미코(川田文子) 씨도 “홀로 살면서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육체적 고통을 견디며, 행복감을 느낄 수 없는 데서 오는 괴로움 같았다”라고 말했다. 배봉기 씨는 병적인 수준의 결벽증에 걸려 있었다.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의 진상규명을 추진하던 이화여대 윤정옥 교수는 1980년 나하시의 목조 단층집에 살고 있던 배봉기 씨를 찾아갔을 때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눈 1시간 동안 배봉기 씨는 6번이나 부엌에서 손을 씻은 것이다. “차를 끓인다며 손을 씻고, 주전자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고 손을 씻고, 물이 끓고 나서 손을 씻고, 찻잔에 차를 따르고 나서 손을 씻고, 쟁반 위에 찻잔을 올려놓고선 다시금 손을 씻었다. 차를 다 마신 뒤에도 손을 씻었다”라고 회상했다. 윤 교수는 “배봉기 씨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만난 ‘위안부’였던 많은 분들이 결벽증을 갖고 있었다. 위안소에서 겪은 일들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싶다는 표현일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배봉기 씨는 1975년 ‘불법 체류자’로 국외로 강제 퇴거될 뻔했다. 그때 신원보증인이 되어준 사람이 과거 배봉기 씨가 일하던 난조시 사시키의 일품요릿집 주인장 부부였다. 그는 그때의 은혜를 절대 잊지 않고 나이 들어서까지 가게 주인집 청소를 위해 정기적으로 버스를 타고 다녔다. “나는 꽃이 싫다”고 말하던 배봉기 씨가 숨지기 몇 달 전 아파트 인근 꽃집에 들렀다. 가게 주인의 말에 따르면 배봉기 씨는 소국 딱 한 송이만 샀다. 고난의 연속이었던 삶이었지만 마지막에는 마음에 평안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전시 중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뒤, 배봉기 씨는 오키나와에서 많은 사람들과 교류했다. 77년간의 생을 마감한 뒤 개최된 배봉기 씨 추모회에서는 제단에 오키나와현 지사, 나하 시장의 화환이 장식되었고 생전에 인연이 있었던 분들이 다수 참석했다. 배봉기 씨의 만년은 결코 외롭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배봉기 씨가 사망한 지 30년이 되는 2021년 11월 하에바루초(南風原町)에서 추모 심포지엄이 열렸다. 행사장에는 주최자의 예상을 뛰어넘는 청중 130여 명이 참석했다. 등단한 조총련 김현옥 씨는 “만년에는 삶의 의욕을 갖고 사신 것 같아 기뻤다”라고 말했고, 3년간 배봉기 씨의 기초생활 수급을 담당한 나하시 부시장 구바 겐고(久場健護) 씨는 “배봉기 씨를 통해 인권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는 점을 배웠다”라고 말했다. 배봉기 씨는 이 세상에 없다. 하지만 지금도 많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마음속에 배봉기 씨는 살아 숨 쉬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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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지금/여기 ‘위안부’ 영화의 안과 밖 2부 - 다른 상상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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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상상은 가능하다 이 글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요청에 따라 『페미니즘 리부트』(손희정, 나무연필, 2017)에 수록되어 있는 「기억의 젠더 정치와 대중성의 재구성: 대중 ‘위안부’ 서사를 중심으로」를 요약하고 수정한 글입니다. ‘위안부’에 대한 다른 재현: <눈길>의 경우 <눈길>은 그 ‘반복과 차이’ 때문에 <귀향>과 자주 비교되었다. 두 작품 다 위안소에 끌려가는 소녀들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어 그 소녀들 사이의 우정, 죽음과 생존, 그리고 노년에 다다라 벌어지는 일들을 담는다. 이렇게 비슷한 서사구조를 공유하는 이유는, 두 작품 다 증언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증언 안에서도 두 작품은 서로 다른 재현을 선보이고 있다. <눈길>은 <귀향>과 달리 발가벗겨진 채로 두들겨 맞는 여성의 몸을 날것으로 우리 앞에 던져놓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그렇게 한낱 ‘몸뚱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하루하루와 그 일상을 버텨내는 마음이다. 예컨대 <귀향>이 강간당하는 ‘처녀’의 비명을 담아낼 때, <눈길>은 매일 반복해야 했던 콘돔 세탁의 비루함과 그 안에서 묻어나오는 한탄을 보여준다. <눈길>에서 여성은 그저 ‘유린당한 몸’으로 이미지화되지 않는다. 주인공 스스로 자신을 ‘짓밟힌 짐승’으로 여길 때에도, 카메라는 그를 그렇게 대하지 않는 것이다. 폭력을 스펙터클로 만드는 것이 피해자의 고통을 묘사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폭력을 볼거리로 만들지 않기 위해 우회로를 택하는 것이 피해자를 또다시 대상화하고 물신화하지 않을 방법이기도 하다. 미카엘 하네케(Michael Haneke) 감독의 말처럼, 폭력의 재현은 폭력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눈길>이 ‘여성들의 읽고 쓰기’에 공을 들이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영애(김새론)는 종분(김향기)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삶의 이유를 찾고, 종분에게는 글을 배운다는 것이 삶의 동기가 된다. 한 평론가는 이것이 가르칠 수 있는 자와 배워야 하는 자라는 계급적 위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판했으나, ‘가르친다’와 ‘배운다’라는 행위가 결과적으로 가지는 의미에 주목한다면 그렇게 단순하게만 해석될 수 없다. 영애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이유를 되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을 잘 아는 종분이 영애에게 ‘글을 가르칠 기회’를 준다. 읽는 법을 알려달라며 책을 먼저 내미는 것은 종분이다. 그리하여 “너 착각하지 마라, 너나 나나 똑같애!”라는 종분의 외침은 성노예화가 어떻게 피식민자의 계급과 무관하게 진행되었는가를 폭로한다. 이후에 종분에게 있어 글을 안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로 쓰이게 된다. 글을 알게 됨으로써 그는 비로소 이 국가 시스템에 시민으로서 다시 기입된다. 영애 덕분에 『소공녀』를 읽게 된 그는 귀향하여 ‘강영애’라는 이름으로 국가 시스템에 등록하고, 국가보훈처가 보낸 고지를 읽으며, 첫사랑에게 편지를 쓴다. 종분에게 “쓴다”는 것은 더 이상 이 사회에 ‘없는 자’가 아니라 ‘등록된 자’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동시에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 자, 기록할 수 있는 자가 된다. 그렇게 ‘들리는 자’, ‘읽힐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증언의 힘: “아이 캔 스피크” 우리는 왜 “비명과 울부짖음”만이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일까? 결국 ‘위안부’ 피해자 여성이 역사의 주체로서 자신의 피해를 증언하고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어떤 형태였든 간에 자신의 언어로 말을 했기 때문이 아닌가. <귀향>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국가의 완전한 부재’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스템의 완전한 부재’다. 여기서 ‘부재’란 영화가 그것을 재현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렇게 사라진 일본과 조선/남한은 ‘사악한 일본인’과 ‘무능한 조선/남한 남자’라는 정형으로 개인화된다. 오빠는 동생을 구하지 못하고, 아버지는 딸을 지키지 못한다. 그런 무능은 현재까지 계속된다. 그래서 여자들은 미친년이 되거나 불귀의 객이 되고, 접신을 통해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영매가 된다. 이는 가족 로망스 안에서만 정치가 상상되고 재현되고 설명되는 가부장제 사회의 인식론을 반영하면서 재생산된다. 물론 국가의 부재야말로 이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일본 정부는 물론이고 한국 정부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대처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영화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굿이라는 문화적 형식에 기대는 것이 설득력을 가지고 대중을 매혹시킨다. 이때 정민(강하나)의 혼을 ‘귀향’할 수 있도록 이끄는 영매 은경은 ‘위안부’ 여성들이 겪었던 그 성/폭력의 역사가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에 머물지 않으며 가부장제의 보편적인 폭력으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음을 폭로한다. 은경이 영매가 되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그래서 중요했을 것이다. 은경은 성폭행을 당하고 그 가해자가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까지 목격하면서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자, 이성의 언어를 넘어서는 자, 그 제도의 틈새에 존재하는 자, 영매가 된다. 과연 생존자에게 세상을 떠난 동무와 그로 상징되는 고통의 기억은 영매를 통해서만 불러올 수 있는 타자였을까. “몸은 돌아왔지만 마음만은 그곳에 있었다”는 영옥(손숙)의 말은 생존자들이 삶에서 언제나 죽은 자들의 혼과 함께였다는 것에 대한 고백이다. 그러니 도대체 왜 영매여야 하는가? 다시 <눈길>을 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살아가는 생존자 ‘할머니 종분’(김영옥)은 돌아오지 못한 소녀 영애의 영혼과 일상적으로 만나고 대화한다. 종분은 귀향 후 영애의 이름으로 살아왔다. 이는 종분을 ‘국가 시스템에 등록된 자’로 그려내는 전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종분에게 그 과거가 '귀신의 것’이 아니라 ‘사람의 것’으로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오랜 침묵을 깨고 이 사회에 ‘위안부’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리게 한 것이 ‘진혼’이 아니었음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살아가겠다’고 선언한 할머니들의 용기와 결기였다. 그리고 그 옆을 지켜온 살아 있는 운동들이었다. <귀향>에도 가슴을 두드리는 장면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나이 든 영옥이 ‘위안부’ 피해 신고를 하기 위해 동사무소를 찾았던 장면이다. 신고할까 말까 주저하던 영옥은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신고를 하겠느냐”는 동사무소 직원의 말에 되돌아가 외친다. “내가 그 미친년이다!” 이는 제도에 ‘미친년’의 목소리를 기입함으로써 제도의 성격 자체를 다시 쓰는 순간에 대한 묘사다. ‘위안부’ 피해자의 ‘소녀 시절’의 재현을 과감히(!) 삭제하고 말하는 자로서 “할머니”의 모습으로 점프한 <아이 캔 스피크>가 등장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아이 캔 스피크>는 <귀향>에서 할머니가 “그 미친년임”을 선언하는 순간, 그리고 <눈길>에서 상상하고 재현했던 ‘말하고 쓰고 기록하는 행위’에 주어졌던 의미를 살려낸 작품으로 ‘위안부’ 재현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영화는 “민원 왕” 옥분 할머니(나문희)와 원칙주의자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의 우정을 다룬 코미디를 표면적으로 내세웠지만, 영화가 실제로 집중하고 있는 것은 미국 연방회의 일본군‘위안부’ 사죄 결의안이 통과되었던 2007년 미 하원 의회 공개 청문회였다. 민원 왕 옥분은 이 청문회에서 공개 증언하기 위해 영어를 배워야 했고, 민재를 자신의 영어 선생으로 찍으면서 사건과 사고가 펼쳐진다. ‘위안부’ 피해자의 말하는 행위 그 자체가 영화를 추동하는 모티브이자 에너지이며 사건이고 주제인 셈이다. 영화는 한국 영화사상 가장 제목을 잘 지은 작품으로 꼽혀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영화 제목인 <아이 캔 스피크> 안에 줄거리뿐만 아니라 주제가 정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허스토리언’의 탄생과 남겨진 과제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에 걸쳐 진행된 관부재판 과정을 그리고 있는 <허스토리> 역시 제목을 통해 영화의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했다. 이 작품의 타이틀 크레딧은 <히스토리(History)>로 시작된다. 이어서 영화는 ‘그의(His)’를 지우고 그 자리에 ‘그녀의(Her)’를 다시 써넣으면서 남성 중심의 역사 서술을 바로잡아 여성 중심으로 재기술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여성들의 삶 속에서 쌓인 이야기가 어떻게 ‘역사’가 되는지 보여주고 싶었던 셈이다. 타이틀 크레딧에서 선언하고 있는 것처럼, 영화는 다른 어떤 ‘위안부’ 영화보다 여성의 관점에서, 그리고 페미니즘적 서사-이미지 구성을 통해 이 주제에 접근하려고 노력했다. 강간을 볼거리로 만들어버리는 재현을 피하고, 여성들의 주체성에 집중하며, 여성들 간의 관계를 구축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영화가 많은 부분을 재판정에서의 증언 장면에 할애하고 있는 것도 이런 문제의식 안에서였을 터다. 민규동 감독의 여러 인터뷰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허스토리>는 지금까지 페미니스트 비평이 ‘위안부’ 재현에 대해 고민해 온 내용을 세심하게 참조하면서 영화의 서사와 이미지를 쌓아 올렸다. 이 작품은 일종의 ‘교본’과도 같은 작품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교본이 정답은 아니고, 언제나 ‘좋은 작품’인 것도 아니다. <허스토리>는 아쉽게도 (그 자체로 이미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을) 페미니스트 비평이 그려놓은 서사-이미지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질문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어째서 여전히 ‘위안부’ 피해자의 재현은 소녀-할머니의 이분법 속에 갇혀있는가.” 잠시 <눈길>로 다시 돌아가 보자면,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문 성숙한 어른으로서의 종분이었다. 이런 평가에 대해 <눈길>의 유보라 작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애초에 <눈길>을 기획할 때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생존해 돌아온 여성들이 30~40대가 되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고, 결국 소녀-할머니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만약 처음부터 그냥 ‘할머니’ 캐릭터를 상상했다면, 나 역시 상처받거나 분노에 찬 캐릭터를 상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분들이 살아온 삶에 대해 리서치하고 생각하고 상상해 보니, 종분과 같은 두터운 맥락을 가진 캐릭터를 만들게 되었다.” ‘상상력’의 문제란 이런 것일 수 있다. 즉각적으로 손쉽게 주어진 익숙한 이야기가 아닌, 오랜 고민과 성찰 안에서 등장하는 ‘발견되지 않았던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것. 그런 ‘새로운 이야기’야말로 역사를 구성하는 또 다른 관점을 제공해 줄 터다. 그렇다면 문득 궁금해진다. ‘위안부’ 피해자의 30~40대를 재현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던 상황”이란 과연 무엇일까? 바로 그곳에 한국사회의 한계가 놓여있는 것은 아닐까. <허스토리>는 영화와 여성 관객이 만나는 자리에서 매우 흥미로워졌다.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한국 영화의 남성 중심성에 지친 청년 여성 관객들은 새로운 영화를 찾아 헤맸다. 2018년에 <미쓰백> 팬덤 ‘쓰백러’와 <허스토리>의 팬덤 ‘허스토리언’의 등장은 이런 흐름 위에 있었다. 허스토리언은 단체관람과 티켓 구매 등을 통해 관객 운동을 펼쳤고, 이는 배우 김희애의 팬덤 형성으로도 이어졌다. 그들은 가부장제의 폭력을 예민하게 인식하면서 ‘파워하우스 여성 영웅’인 문정숙(김희애)에 열광했다. 이렇게 새로운 관객이 등장한 것이 새로운 상상력의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그 관객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장 안에서 대중 ‘위안부’ 서사는 무엇을 갱신해야 하고 갱신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언제나 형성 중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상상력의 여정에는 종착지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