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검색
-
- 2023년 좌담 피, 땀, 눈물: 일본군‘위안부’ 풀뿌리 운동사의 흔적을 매만지며 〈1부〉
-
지난 2월 15일, 창원대학교박물관에서 여성인권운동가 김문숙(1927-2021)의 생애와 관부재판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전시 〈 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가 개관했다. 이번 전시는 김문숙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이사장이 설립한 부산의 ‘민족과 여성 역사관’(2004-2023)이 폐관하면서, 경상도 지역 일본군‘위안부’ 문제 민간기록물 조사정리 연구사업과 함께 이루어졌다. 5톤 트럭 2대 분량의 방대한 소장 자료가 뜻깊은 전시로 탄생하기까지는 이 연구팀에 참여한 세 명의 대학원생들의 보이지 않는 수고가 존재했다. ‘연구보조원’이나 ‘조교’라는 이름으로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자신의 삶과 연구자 정체성을 고민하는 대한민국의 대학원생 김효영, 민경택, 장찬영 씨를 청년좌담에서 만나 보았다. -좌담 일시: 2023년 5월 4일 -사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 이헌미, 황진경, 정나라 -대담: 김효영, 민경택, 장찬영 -정리: 퍼플레이컴퍼니 -사진: 오늘의 나 그 시작에 대하여 Q. 안녕하세요. 각자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민경택 창원대 사학과 석사수료생이고, 연구 주제는 가야사입니다. 가야 중 비화가야로 발전하는 삼한시대의 불사국이라는 국가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연구 주제가 지역사다 보니 위치가 특정되는데 비화가야와 불사국은 창녕 지역으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경남학, 경남 지역사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구술 작업과 전시 작업에도 참여하게 됐습니다. 김효영 창원대 국제관계학과 석사수료생입니다. 학사 때도 국제관계학을 공부했고, 석사도 같은 전공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졸업논문을 쓰는 중인데, 동아시아 트랜스내셔널 인식에 대한 연구를 주제로 삼고 있어요. 제가 참여했었던 ‘walk9’ 한국 순례를 중심으로 주체들의 만남, 접속을 통해 형성된 ‘동아시아인’ 의식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창원에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이하 마창진시민모임)의 이경희 대표님도 계셔서 어렸을 때부터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대학원에 들어온 후 창원대 국제관계학과 문경희 교수님 덕분에 이번 프로젝트에 함께하게 됐습니다. 장찬영 창원대 국제관계학과 석사수료생입니다. 지금은 민족적 기억, 집단 기억의 형성, 기억의 과정에서 생기는 망각 등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저도 문경희 교수님 덕분에 일본군‘위안부’ 청년 포럼에 참여했고, 이후 시민단체와 같이 일한 경험이 있습니다. 대학원에 들어와서는 교수님께서 구술사 작업에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이번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게 됐습니다. Q. 〈 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 전시회를 비롯하여, 경상도 지역의 일본군‘위안부’ 풀뿌리 운동사 연구에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장찬영 일본군‘위안부’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피해자분들이 겪은 트라우마나 기억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는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던 와중에 교수님께서 포럼 참석을 권유해주셨어요. 2018년 마창진시민모임에서 개최한 포럼(일본군 ‘위안부’ 주제의 청년·대학생 국제포럼: 여성인권과 평화의 씨앗 뿌리기)이었죠. 포럼에 참여하고 다른 나라(대만, 일본, 필리핀, 미국)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위안부’ 문제의 공유 방식과 관련 기억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알게 됐습니다. 그 후로는 수업을 통해 배우다가 대학원에 들어와 기억을 중심으로 공부하면서 ‘위안부’ 문제는 기억의 확산과 민족적 기억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게 맞겠다고 생각했어요. 기억에 대해 공부하다 보니 주류 역사가 아닌 개인이 갖고 있는 기억들,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교수님께서 ‘위안부’ 프로젝트를 진행하실 때 구술사 작업에 따라갈 기회를 주셔서 일반 시민들에겐 ‘위안부’가 어떻게 비춰지고 있고, 또 ‘위안부’에 어떤 계기로 관심을 갖게 됐고, 그들에겐 어떤 기억이 형성되고 재현되는지 알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번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게 됐습니다. 김효영 석사 생활을 하면서 찬영 씨와 거의 늘 함께했기 때문에 비슷한 과정으로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홈스쿨링을 해서 시간이 많았어요. 그래서 여러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당시 써냈던 신청서를 보면 ‘저는 학교를 안 다녀서 시간이 많은데 의미 있는 곳에 쓰고 싶습니다’라고 했더라고요. 생각해보면 활동에 참가할 때마다 뚜렷한 의식 없이, 단순히 좋은 활동이라 참여했던 거예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찾아뵙는 거나 수요집회에 갔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고, 그런 활동을 했다는 것 자체에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찬영 씨와 유사한 방식으로 ‘위안부’ 문제를 배우게 되면서 구술사 작업에 따라갈 기회가 있었고, 그것을 계기로 제가 이 문제를 안일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를 통해 많이 배우고 싶었고, 그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서 참여하게 됐습니다. 민경택 학부 때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인터뷰를 기록하거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작업을 하게 됐습니다. 경남의 노동자나 청년 인터뷰를 진행해오면서 이야기를 듣는 일에 익숙해졌고, 자연스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지원 단체의 이야기도 듣게 됐어요. 피해자가 가장 많은 지역이 경남 지역이다 보니 그분들의 인식과 고충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Q. 선생님들의 세대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이 미디어를 통해 보도되던 때는 아니지요? 김효영 피해자의 증언보다는 ‘위안부’에 관한 영화나 소설이 많이 나오던 시기라 친구들과 본 기억이 있습니다. 장찬영 소설이나 영화처럼 뉴스 보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피해자의 존재가 이야기되던 때였던 것 같은데, 자극적인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보니 충격을 받으며 이 문제를 알게 됐던 것 같아요. Q. 세 분은 고(故) 김문숙 이사장님이 부산에 설립하신 ‘민족과 여성 역사관’에 소장되어 있던 방대한 자료의 목록화 작업에 참여하셨습니다. 그 시작은 어떠했고 어떤 기준에서 진행됐는지 그 과정과 애로사항을 말씀해주시죠. 장찬영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전에, 문경희 교수님이 진행하시던 인터뷰를 따라간 적이 있었어요. 그때 역사관의 존재를 알게 됐는데 이런 프로젝트로 이어지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죠. 프로젝트의 시작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저희에게 주어진 시간은 3일에 불과했습니다. 그토록 방대한 양의 자료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새벽 4시 반에 연구 책임자이신 창원대 사학과 신동규 교수님의 차를 타고 역사관이 있는 부산 수영구로 갔어요. 첫째 날엔 자료 파악을 하며 번호를 붙였고, 둘째 날엔 짐을 쌀 준비를 하고, 셋째 날엔 이삿짐을 싸서 창원으로 보냈어요. 모든 것이 3일 안에 이뤄졌습니다. 역사관 건물을 허물어야 해서 빨리 나가야 했거든요. 시간이 더 있었으면 어떤 자료가 있는지 더 꼼꼼하게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습니다. 작업이 끝나면 저녁 10~11시가 됐고, 신동규 교수님이 저희를 데리러 오셔서 다시 창원으로 넘어갔어요. 리스트 작업도 모두 수기로 했는데, 자료에 번호를 붙이고, 그 자료가 무엇이고 어디에 있었는지 일일이 손으로 적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자료를 5톤 트럭 2대에 실어 창원대 박물관으로 갖고 왔어요. 그게 4월이었고, 이후에는 수장고에서의 작업이 시작됐죠. 김효영 신동규 연구책임자님이 첫날 저희에게 “몸으로 굴러야 하는 일이니 각오해라”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자신 있게 “괜찮습니다. 저 힘셉니다!” 했는데 그렇게 답한 게 후회될 정도로 일이 많았어요. (웃음) 장찬영 이상할 정도로 뭐가 계속 나오더라고요. 문을 열면 온갖 박스와 서류와 종이 뭉치들이 쏟아져 나왔어요. 그래서 ‘이게 끝이 날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민경택 이런 종류의 작업을 사학과에서는 많이 하긴 합니다. 자료가 방대하면 그만큼 좋은 자료도 찾을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생각되는데 이번에는 시간이 따라주지 않았죠. 이 서류가 역사관의 어느 곳에서 발견됐는지 그 배치 맥락까지 기록해두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쉽습니다. Q. 김문숙 이사장님이 2021년에 돌아가신 후 2023년에 건물이 철거되면서 그 자료들이 어떤 형태로든 정리되어야 하는 운명이었고, 또 그것들이 창원으로 넘어오게 됐다는 점이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장찬영 다들 열심히 해주셨어요. 힘들어도 짜증 내는 분들이 아무도 없었죠. 어떻게 해서든 이 일을 잘 끝내자는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쉬는 시간을 가지면서도 “거기 얼마나 됐어요? 빨리 끝내고 그쪽으로 갈게요.” 이런 종류의 대화가 오갔어요. 그래서 ‘이분들은 정말 헌신적이구나, 참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Q. ‘이분들’은 누구인가요? 장찬영 연구보조원들입니다. 그분들은 그날 처음 뵈어 서로를 소개하거나 깊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없었거든요. 김효영 계명대의 손선희(박사수료생), 성수진(석사생) 님과 경상대의 고명진(석사생) 님, 그리고 저희 3명까지 총 6명이 함께했습니다. 교수님들도 강의를 마치고 오셔서 세밀하게 검토해주셨고요. 그런데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체계적인 매뉴얼이 없었다는 거예요.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 현장에서 매뉴얼을 만들다 보니 아쉬운 점이 있었죠. 장찬영 매뉴얼이 부족하다 보니 ‘일단 다 가져오자’라는 마음으로 작업했어요. 김주용 창원대박물관 학예실장님께서 “버려도 창원에서 버리자”라고 말씀하셔서 작은 것 하나까지 다 가져왔어요. 심지어 벽에 붙어있던 그림까지 떼서 가져왔습니다. Q. 그 자료들은 모두 어디에 저장해두었나요? 김효영 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있어요. 시간이 있었다면 상세하게 읽어보면서 중요한 자료를 더 많이 도출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큽니다. Q. 구술조사와 전시 작업을 병행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장찬영 대구, 경남 지역에서 피해자분들을 도와드리고 ‘위안부’ 운동을 하셨던 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작업이었어요. 김효영 연구보조원 중에서 그 작업은 대부분 경택 씨가 하셨습니다. Q. 구술은 이 전시 작업과 별개였나요? 장찬영 이 사업 하나에 전시, 아카이빙, 구술조사 3가지가 모두 결합돼 있었어요. 민경택 현장에 나가 직접 구술 작업에 참여하진 않았고, 대체로 영상을 보며 녹취록을 푸는 일을 했습니다. Q. 구술채록은 자료를 새로 수집하는 작업이라면, 전시는 기존의 자료를 아카이빙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같은 주제 아래서 진행됐지만 두 개가 다른 결의 작업 방식인 만큼 차이점을 느끼신 게 있을까요? 민경택 구술채록 작업은 정해진 시간 안에 진행되다 보니 일정을 잘 맞춰야 하고, 짧은 시간 안에 높은 퀄리티의 답변을 얻어내야 해서 매 순간 신경을 써야 합니다. 목록화 작업은 그 반대인 것 같고요. 이건 다른 얘기이지만, 이번에 구술채록 작업을 하며 한 가지 느낀 점이 있습니다. 구술 면담자들이 대체로 부채 의식을 갖고 계셨다는 것인데요, 이분들은 자신을 피해자들의 자식 혹은 조카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고 죄송하다는 마음을 갖고 계신 것 같았어요. 반면 김문숙 선생님은 자신을 피해자들의 친구라 생각하고 ‘나는 너희들과 함께 간다’라는 마음으로 운동에 힘 쏟으셨던 것 같습니다.
-
- 2022년 인터뷰 [캐롤 글럭-김은실 대담] 민족주의를 넘어서: 현재 진행형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젠더 정치
-
2022 기림의 날 특별 대담 (이 대담은 영문웹진 KYEOL에 게재된 “Beyond Nationalism: The Ongoing History of the “Comfort Women” and Gender Politics“를 국문으로 옮긴 것입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8월 14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역사학자 캐롤 글럭 교수와 페미니스트 인류학자 김은실 교수의 특별 대담을 마련했다. 이번 대담에서는 시민사회, 국가, 국제사회를 포함해 다양한 차원에서 전개되어온 ‘위안부’ 운동을 통해 형성된 초국적 연대의 의미를 조명해본다. 캐롤 글럭 컬럼비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는 일본 근대사, 20세기 국제사, 제2차 세계대전, 역사 서술, 아시아 및 글로벌 공공기억 등을 연구해왔다. 최근 연구로는 “세계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빚진 것(What the World Owes the Comfort Women)”(2021)과 “정치적 현재로서의 국민적 과거: 동아시아의 전쟁 기억”(2022) 등이 있다. 김은실 교수는 1995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여성의 신체, 섹슈얼리티, 생명권력(biopower), 한국의 국민국가 형성, 민족주의, 젠더 정치, 글로벌화에 대해 연구해왔다. 현재 식민지 시대와 냉전 시대에 발생한 여성에 대한 젠더 기반 성폭력을 연구하고 있다. [2022년 기림의날 특집] 현재진행형 ‘위안부’ 역사와 공존을 향한 연대 1. 한일양국의 시민들과 함께 ‘위안부’문제에 관한 공동연구를! 2. 다큐멘터리 〈애프터 미투〉를 통해 본 증언을 기록하는 일 3. ‘지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운동: 경상도 지역 역사관과 ‘지역성’에 대하여 4. [캐롤 글럭-김은실 대담] 민족주의를 넘어서: 현재 진행형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젠더 정치 5. [라다 이베코비치-백영경 대담] 젠더화된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진 우리 시대의 여성 연대 ‘위안부’문제와의 만남 역사학자, 페미니스트 학자로서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요? 김은실 1993년 미국에서 귀국했을 때 ‘한국 여성학의 전망과 과제’라는 주제로 열린 한국여성학회 창립 10주년 기념 컨퍼런스에 연사로 초청받았습니다. 컨퍼런스에서 한국 여성학이 무엇이고 어떻게 정의되고 있는지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여성학을 정의하는 데 있어 민족주의 담론이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했죠. 구체적인 사례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첫 증언집[1]을 고찰함으로써 민족주의 담론이 ‘위안부’들의 증언을 재구성하는 데 깊게 관여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발언은 상당히 파격적이었고 엄청난 반발을 불러 왔습니다. 이 사건으로 나에게는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가 붙게 되었어요. 그 이후로는 학계에서 페미니즘의 시각을 바탕으로 민족주의를 공격하는 한국 페미니스트 학자로 알려지게 되었고요. 페미니즘과 민족주의의 대립에 관한 담론이 일어날 때 나는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사람으로 종종 언급되고 있지요. 당시 사람들은 내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성을 옹호하기 위해 어떻게 민족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가? 국가가 없다면 여성을 어떻게 구할 수 있는가? ‘위안부’도 여성이지 않은가. 동시에 그들은 한국 사람이기도 하다. 여성을 어떻게 국가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가? 여성은 한국이라는 국가의 한 부분이다.”라고 말했어요. 나는 이에 대해 “여성이 곧 국가이다. 여성은 한국 국민이다. 국가를 대표로 간주하고, 여성을 국가의 종속된 부분으로 간주해 여성의 이익이 국가의 이익에 종속되는 경우 ‘위안부’문제의 해결은 어렵다. 국가는 여성의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 여성이 국가의 이익을 위해 침묵해야 한다는 식으로 국가를 우선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라고 답했어요. 그때가 처음으로 ‘위안부’문제를 공부하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1993년의 일이었죠. 1994년 발간한 내 논문 ‘민족 담론과 여성: 문화, 권력, 주체에 관한 비판적 읽기를 위하여’[2]는 젊은 여성 대학원생들과 연구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다수의 젊은 여성들이나 페미니스트들이 이 논문을 읽고 ‘위안부’를 페미니즘의 틀로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곤 했습니다. 캐롤 글럭 나는 ‘위안부’ 문제를 일본의, 그리고 일본과 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전쟁 기억, 기억의 정치라는 좀 더 큰 맥락에서 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내 관심사는 기억이 역사와 관련되는 방식이었어요. 내가 역사라고 알고 있던 것과 공공 기억 속에 자리잡은 것 사이에 괴리가 있었고, 이 때문에 기억이 만들어지고, 유지되고, 변화하는 과정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올바른 역사’를 ‘올바른 기억’과 연결시키려는 목표를 추구하면서, 나는 세계대전이라는 전지구적 충돌에 대해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거의 모든 기억은 국경과 국가라는 틀 안에서 말해지고, 쓰여지고, 집중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이 점은 이해가 되지 않았지요. 그래서 나는 ‘세계를 제2차 세계대전 안에 담아두는 것’을 슬로건으로 삼았습니다. 이에 다양한 지역에서 공공 기억이 형성, 유지, 변화하는 과정을 연구했지요. 내 첫 번째 목표는 현재 사회에서 기억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것이었어요. 개인의 기억과 집단기억은 모두 특정한 때에 형성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유지되기도 하고 변화하기도 해요. 기억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연구하면서 두 번째 목표를 규정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공공 기억을 바꾸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예를 들어, 강고하게 민족주의적인 내러티브들에 맞서 ‘세계’를 어떻게 제2차 세계대전 안에 담아낼 수 있는가?’, ‘역사와 기억을, 과거와 현재 및 미래를 더 바람직하게 연결지으려는 희망을 가지고 어떻게 기억형성 과정에 개입할 것인가?’라는, 점점 더 시급해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고자 했어요. 이런 상황이 내가 1991년 ‘위안부’문제를 접했을 때의 맥락이었고이후에도 이러한 관점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홀로코스트와 마찬가지로 ‘위안부’는 오랜 과정을 통해 공공 기억 속에 자리 잡았습니다. 유대인 대학살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 유럽인들의 기억 속에서 전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니었어요. 대부분 지역에서 이러한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이후였습니다. ‘위안부’는 199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공공 기억에 눈에 띄게 자리 잡게 되었죠. 사실 감춰진 것은 없었어요.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위안부’를 알고 있었어요. 이들은 이미 소설이나, 연극, 시각예술에 등장하고 있었거든요. ‘위안부’의 경우 일본 의회에서 논의까지 되었어요. 문제는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공공 기억 속에 이들의 존재가 부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위안부’는 대학살하면 홀로코스트를 떠올리는 것처럼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대변하는 개념으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죠. 나는 처음에 ‘위안부’ 문제를 국가와 집단을 넘어서, 그리고 국가와 집단 안에서 기억이 어떻게 변하는지의 사례로 바라보았습니다. 이 주제에 접근해온 방식이 서로 다를지언정 김은실 교수님과 나는 젠더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요. 김은실 페미니스트 인류학자로서 나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신체에 가해진 성폭력과 고통이 어떻게 표현되고 재현되는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어떤 내용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말해지고어떤 권력이 ‘위안부’ 내러티브를 통제하는가에 관심이 있었죠. 또 이들의 경험이 증언집이나 다큐멘터리를 통해 어떻게 대변되는지에도 관심이 있었어요. 1990년대, 2000년대, 그리고 현재 ‘위안부’ 생존자들의 증언 내용과, 청자/청중이 이들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은 변해왔습니다. ‘위안부’가 처한 상황이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세계를 여행하는 소녀상: 맥락과 위치성 일본군‘위안부’문제가 국가적 차원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세계 곳곳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초국적인 문제임을 보여주는데요. 이런 점에서 평화의 소녀상이 세계 여러 지역에 건립된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은실 평화의 소녀상은 한국의 ‘위안부’들이 겪었던 강압적 성폭력과 고난을 상징합니다. 소녀상은 두 가지 측면을 대변하고 있어요. 하나는 전쟁 시 여성이 겪어야 했던 성폭력과 강간이 보편적이고 일반적이었다는 측면을 상징합니다. 다른 하나는 식민지 지배 하에 있던 한국의 순진무구한 소녀들이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가 ‘위안부’가 되었다는 한국의 특수한 맥락을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소녀상이 만들어졌을 때 순진한 소녀들이 취직을 시켜준다는 거짓말에 속아 사기를 당하고 강제 연행되어 위안소로 끌려갔다는 이야기에 중점을 두면서 한국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었던 강제 연행과 피해를 대변하는 데 강하게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이것은 강력한 이미지이자 메시지였습니다. 하지만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소로 강제로 끌려간 다양한 여성들의 경험과 이야기를 침묵시켜버리는 상징이라는 비판이 일었어요. 소녀상의 이미지가 특정 여성들만이 ‘위안부’ 피해자에 해당한다고 각인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도 처음에는 소녀상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를 특정한 방식으로 재현하고 국한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소녀상이 일본군‘위안부’들이 겪은 다양한 경험을 모두 대변할 필요는 없고 전쟁에 동원되어 성폭력을 겪었던 여성들을 대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녀상이 전시 여성폭력과 그들의 고통을 재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재현이 처음에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이루어졌다고 해서 항상 모두에게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 의미는 소녀상이 대변하는 표상이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 누구와 조우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거예요. 세계 곳곳에 소녀상이 설치되면서 많은 논란이 불거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다른 나라로 소녀상을 보내는 것은 일본 정부가 일제강점기의 ‘위안부’ 문제를 인정하지 않고 사죄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려는 측면이 강합니다. 여기서 한국의 민족주의가 강하게 시사돼요.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된 글렌데일, 샌프란시스코, 베를린의 경우 현지 사람들에게 소녀상이 전달하는 의미는 한국인들에게 전달되는 의미와 같지 않습니다. 소녀상이 주는 메시지는 그 지역의 사람들, 역사와 만날 때 만들어지는 것이죠. 캐롤 글럭 하나의 동상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먼저 소녀상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인데, ‘위안부’를 순진한 소녀에 국한시키는 것은 확실히 환원적인 관점입니다. 한편, 베를린의 경우 소녀상이 일반적인 성폭력을 대변하기 때문에 소녀상 본래의 의미를 잃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아마도 소녀상의 의미가 축소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소녀상이 지속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소녀상이 상징하는 순수성에 대한 비판은 가부장제와 순결을 강조하는 한국적 맥락에서는 이해될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비슷한 동상이 베를린 미테(Mitte)에 설치되면 그 맥락은 달라집니다. 방문객은 한국에서 그 동상이 갖는 의미를 모를뿐더러 같은 관점으로 그 동상을 바라보지도 않을 거예요. 상징성 자체가 캘리포니아나 베를린에서 같을 수가 없어요. 이 점은 의미가 환원되고 쉽게 변하는 경향이 있는 기념물이나 기념비 일반에 적용됩니다. 하지만 동상이 여러 곳에 설치되는 경우 환원되거나 의미를 띠는 방식은 다를 수 있어요. 베를린 미테의 경우 소녀상은 한국의 순진한 소녀라기보다는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여성 성노예, 전시 강간, 성폭력의 상징으로 인식돼요. 미테의 소녀상은 최근 들어 아시아계 이민자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커뮤니티를 강화하기 위한 모임의 장소가 되었고, 이는 평화의 소녀상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습니다. 김은실 평화의 소녀상이 상징성을 띠는 것은 확실합니다. 소녀상은 하나의 상징으로서 전시 성폭력의 피해를 대변해요. 인종적으로 소녀상은은 백인 주도 사회에서의 아시아 여성을 나타냅니다. 이런 점에서 서구사회의 경우 소녀상이 설치된 장소는 디아스포라, 이민자, 소수인종이 모이는 만남의 장소로서 비서구권과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 ‘위안부’의 역사를 꼭 알지는 못하지만 현재 어려운 삶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글럭 교수님께서 기억과 공공 기억이 변하는 과정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세월이 흐르면서 공공 기억이 변하는 과정을 직접 보면서 해외에 동상을 건립하는 것을 꼭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다이나믹스가 초국적 차원에서 흥미롭게 생각되었습니다. 동시에 소녀상의 역사도 이러한 맥락에서 재위치되고, 수정되며, 변형되고 있지요. 캐롤 글럭 ‘위안부’ 문제를 논할 때 다민족 정치에 방점이 찍히는 미국과는 달리, 독일의 경우 소녀상은 이민자들과 더 연계되는 것 같습니다. 또는 캘리포니아 글렌데일 평화의 소녀상 설치를 지지했던 아르메니아계 미국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잊혀졌던 과거의 공포와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어요. 각각의 사례마다 맥락은 다르고 그것은 중요하죠. 일본 정부가 한 몫을 한 것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일본 정부가 세계 곳곳에 소녀상이 건립될 때마다 매번 요란스럽게 항의하지 않았다면 ‘위안부’는 지금보다 덜 알려졌을 것이고 조직적인 성 노예제가 갖는 상징적 의미가 전 세계인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죠. 그런 점에서 일본 정부는 ‘위안부’ 운동에 도움을 주었어요. 일본 정부가 어느 한 지역에 설치될 소녀상에 반대할 때마다 또 다른 소녀상이 다른 곳에 세워지고 있기 때문이죠. 이것은 완벽한 기념비 ‘건립’ 정치예요. 소녀상이 설치되는 위치 또한 중요합니다. 베를린의 도심이든 글렌데일의 교외든 애틀랜타 외곽의 공원이든 그 지역성을 반영하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다양한 기념물에 결부된 의미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변합니다. 한 세대에게 의미 있었던 기념비나 동상이 50년이 지난 후에는 후손들이 빨래를 널어놓는 물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평화의 소녀상이 시간과 장소를 넘어 ‘위안부’에 대한 기억을 전달하는 주요 매개체가 아니라 일부분일 뿐이라는 사실은 어쩌면 좋은 일인지도 몰라요. 베를린에 설치된 소녀상과 관련한 비판도 있습니다. 독일 사회가 제2차 세계대전 말에 발생한 전시 성폭력, 특히 소련군이 자행한 독일 시민 강간 사실에 대해 오랜 시간 침묵해왔다는 비판이 그것이죠. 김은실 어느 전쟁에서나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전쟁 관련 역사와 연구에서조차도 지금까지 성폭력은 다뤄지지 않았어요. ‘위안부’문제는 독일 페미니스트 학자들이 제2차 세계대전 말에 일어난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고 조사하게 만든 중요한 촉매제였습니다. 베를린 소녀상을 둘러싼 논쟁과 논란이 있었지만, 논란 당시 독일의 전시 성폭력 문제는 함께 논의되지 않았어요.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과 한국 사이의 문제, 특히 약자로서 식민지 한국의 여성이 처했던 문제였죠.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아시아 여성의 문제가 서구권이나 일본에서 다뤄지는 경우 여성의 문제가 ‘비서구권’ 또는 ‘아시아’의 문제가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좀 있다고 느껴지는데, 특히 젠더를 자신들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외주화(아웃소싱)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일의 성폭력 문제는 한국의 ‘위안부’ 문제를 다룰 때 함께 다뤄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독일인들이 자국보다 덜 ‘발전한’ 나라들의 문제를 자신들의 문제와 함께 논의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젠더 관련 문제들을 독일인들 자신의 문제와 동일하게 보지 않는 게 아닐까 반문하게 됩니다. 캐롤 글럭 동의합니다. 국제적인 또는 초국가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사실이에요. 예를 들어 미국의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자기 사회의 인종차별을 대면하는 것보다 편합니다. 이렇게 국가중심적인 근시안은 새로운 것이 아니에요. 이런 시각은 다른 나라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의 부족에서 기인합니다. 또한 고정관념에도 영향을 받죠. 그런 점에서 “유리로 된 집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돌을 던져서는 안 된다(*편집자 주: 비난받을 여지가 많은 사람은 남을 비난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는 오래된 격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군요. 독일 학자들과 기억 운동가들이 독일이 겪은 붉은 군대(Red Army)에 의한 전시 강간을 외주화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소련군이 자행한 강간 사건의 대부분이 발생했던 구 동독에서 이 문제가 정치적으로 금기시된 것은 사실이에요. 이탈리아 남부, 프랑스 및 다른 국가의 여성들처럼 많은 독일 여성들이 오랜 세월 이에 대해 침묵해왔다는 것 또한 사실이고요. 하지만 이 주제는 이제 독일의 공공 기억의 일부분이 됨과 동시에, 학계의 연구(다른 연합군들에 의해 자행된 성폭력을 다룬 미리암 게브하르트 저 <무언의 범죄(Crimes Unspoken)> 참조) 뿐만 아니라 뒤늦게나마 피해자들을 인정하고자 하는 측면에서도 지속적인 노력이 이뤄지고 있어요. 한국의 일부 운동가들은 ‘위안부’에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춘 나머지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전시 성폭력 경험을 ‘내주화(인소싱)’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각각의 맥락은 달랐어요. 1945년의 베를린은 1944년의 이탈리아 남부나 1970년대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Dirty War), 1990년대 보스니아나 르완다와는 다릅니다. 하지만 전시 성폭력이 어디에서 발생하든지 간에 그것은 참담하게도 똑같아요. 일본의 ‘위안부 제도’만큼 광범위하고 잔혹하지는 않았더라도 군 매춘소 또한 드물지 않았습니다. 물론 일본이 점령한 여러 아시아 국가 출신의 ‘위안부’는 수십만 명이었죠. 이는 단순히 한국만의 문제나 기억이 아니에요. 김은실 ‘외주화’가 여기서는 적절한 단어가 아닐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젠더 문제가 항상 어떻게 전치되는지에 대해 조금은 비판적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외주화’라는 말을 썼어요. 글럭 교수님께서 한국의 일부 활동가들이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전시 성폭력 경험을 ‘위안부’에 초점을 맞춰 ‘내주화’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흥미롭고 통찰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한국 학자들이 전 세계 다른 사례들을 깊이 있게 탐구하지 못하고, 전지구적으로 발생하는 전시 또는 분쟁 시 성폭력 문제 해결에 연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지적되어야 합니다. 분쟁 중 발생한 성폭력 문제를 제기했던 많은 사회가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운동에 영향을 받았지만, 한국의 ‘위안부’ 운동은 전 세계의 다른 사례들과 접점을 만들고 연구한 경험이 많지 않습니다. 캐롤 글럭 서로 다른 맥락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 다른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 동일한 것에 대해 말할 때, 마법과도 같은 일이 일어나죠. ‘위안부’라는 말이 어떻게 ‘성노예’가 되었는지를 그 예로 들 수 있어요. ‘성노예’는 1990년대 국제변호사들과 페미니스트들이 보고서에서 강조의 뜻으로 썼던 용어입니다. 지금은 물론 그 단어가 폭넓게 사용되고 있고 일본 정부가 극렬히 반대하는 바람에 오히려 이 단어의 사용이 더욱 확고해지기도 했어요. 미래의 ‘위안부’ 기억과 행위자로서의 여성 캐롤 글럭 나는 이 글을 읽으실 많은 분처럼 활동가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위안부’ 제도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고 다시는 반복되어서도 안 되는 성노예 제도였다는 것에 공감하고 있어요. 내 요점은 이러합니다. 나는 ‘위안부’에 대한 기억이 세계에 영향을 주었으면 좋겠어요. ‘위안부’에 대한 기억이 현재와 미래의 여성들에게 변화를 가져다주기를 바랍니다. ‘위안부’ 여성들이 겪었던 일을 기억함으로써 그러한 종류의 제도와 성착취 및 성폭력이 덜 빈번하게 일어나고, 그것들을 더욱 범죄적인 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공공 기억을 도구적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기억이 일을 해주었으면 해요. 피해자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피해자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더 많은 일을 해주고, 미래 여성들을 위해서도 무언가를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다른 점에서는 의견이 다를 수도 있는 사람들과 국경을 넘어 서로 연결되고, 협업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어 자신의 사연을 들려주고, 공공 기억에 그것이 담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증언 자체로는 절대 충분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피해자들의 경험을 공공 기억으로 가져오고 효과를 발휘하도록 만드는 다른 행위자들이 필요합니다. 1991년부터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에서 바로 그런 양상이 보였습니다. 행위자로서의 여성에 대해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성은 근대 세계의 거의 모든 사회에서 억눌려왔고 억압받아왔어요. 안타깝지만 그것이 사실이에요. 하지만 여성은 또한 행위자이고 항상 행동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즘은 이들이 취하는 행동 중 하나이자, 변화를 가져오는 데 도움이 된 것들 중 하나이죠. 하지만 (남성을 포함한) 다수의 다른 행위자들의 목소리와 시각도 도움이 되었어요. ‘위안부’ 문제가 이러한 예입니다. 기꺼이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피해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이들을 위해 일하는 기억 활동가들과 지원자들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지요. 김은실 글럭 교수님께 멋진 생각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행위자들’에 대해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본인이 피해 당사자는 아니지만 피해자를 위해 일하고 있는 활동가들이 많습니다. 현재 그 행위자들을 둘러싼 다양한 목소리와 갈등이 있는데요. 이러한 경우, 우리는 모두 ‘피해자의 목소리’에 대해 말합니다. ‘위안부’문제를 둘러싸고 행위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합과 긴장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캐롤 글럭 이용수 님의 사례가 여러 가지 면에서 흥미롭다고 생각해요. 그가 최근에 개입한 배경에는 맥락이 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한국의 대표적인 지원 단체와 관련된 사태(‘정의연 사태’)가 있고, 부분적으로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포함한 여러 변화로부터 기인한 것이죠. 비록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이전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수년에 걸쳐 행동한 것을 보면, 이용수 님 혼자만 거침없는 것은 확실히 아닙니다. 그가 최근에 취한 행동은 그 자신의 완강함, 지원 단체 관련 사태, 변화하는 시대와 맞물려 촉발된 것이에요. 활동가들끼리 서로 싸우는 양상에 대해서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싸움을 통해 ‘위안부’ 문제가 더 역동성을 갖게 된다면 더 낫다는 입장입니다. 캐롤린 딘(Carolyn Dean)은 홀로코스트 기억에 관한 글을 쓰면서 그가 ‘지구적 피해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대신해 발화하는 사람들을 ‘도덕적 증인(moral witnesses)’이라고 정의했고, 때로는 사람들이 활동가들의 목소리만 듣는다고 했어요(『The Moral Witness』, Cornell University Press, 2019). 캐롤린 딘은 활동가들이 증인을 대신해 증인으로서 행동하기 시작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해요. 그렇다면 모든 활동가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겠죠.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하고 있는가, 누구를 위해 하고 있는가, 우리가 하는 일에서 얻고자 하는 개인적인 이득은 무엇이며 개인적으로 그 일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하는 질문들 말이에요. 운동, 즉, 액티비즘이 항상 열린 마음으로 좋은 의도를 갖고 특정한 입장 없이 취하는 행동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는 모두 맥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용수 님은 아직 살아계시고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갖고 계세요. 하지만 10년 뒤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세상을 떠나시겠죠.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위안부’ 기억에 대해, 대신 목소리를 높이는 지원가와 활동가를 둘러싼 문제를 안고 있어요. 우리의 동기가 무엇인지 자문해야 해요. 이것은 정직성, 지성적이고 정치적인 정직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저는 이것이 진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성차별과 전시 성폭력을 논할 때, 분단으로 인해 심하게 군사화된 한국만의 고유한 상황을 고려하게 됩니다. 군사와 안보에 우선순위를 두면서 한국의 가부장적인 사회구조가 형성되었는데요. 글럭 교수님은 제2차 세계대전을 연구하면서 일본군 성노예 연구에 관심을 두게 되셨고 또 전후 일본사 연구의 권위자이시기도 하시죠. 군사화된 상황, 가부장적인 사회구조, 성차별 사이의 관계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캐롤 글럭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에 종식되지 않았어요. 영토분할과 상실, 강제 인민 교환, 반식민주의 투쟁 등은 모두 수년간, 수십 년간 몇몇 지역에서 계속되었어요. 이런 점에서 동아시아와 동유럽은 유사해요. 두 지역 모두 냉전이 종식된 후 전쟁 기억으로 돌아가 과거를 새롭게 대면했고, 이는 대개 민족주의적 측면에서 이뤄졌죠. 한국이 고도로 군사화되고 남성중심적인 유일한 지역은 아니라는 점 또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쟁 기억의 정치는 오늘날 동아시아에서만큼이나 동유럽에서도 활발히 다뤄지고 있습니다. 두 지역 모두 국가 내에서, 그러나 무엇보다 국가 간에 이러한 정치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역사를 이데올로기적 도구이자 정치적 무기처럼 휘두르고 있는 부정론자, 남성주의자, 지도자들 모두 이 두 지역에 존재하고 있고 이 점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났어요. 눈에 띄게 대조적인 사실 하나는 ‘위안부’ 운동 때문에 소위 ‘여성 문제’라는 것이 다른 지역보다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더 크게 부각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누군가는 한국의 ‘위안부’ 문제가 특수하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것이 특정 민족의 역사로 인한 결과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초국가적인 차원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가지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김은실 국가 차원에서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폭력을 둘러싼 개념과 사회적 제도가 한국 사회에서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화시 성폭력과 싸우기 위해서는 남성 중심 성 규범과 관행을 바꿔야 합니다. 평화시와 전시의 성폭력은 서로 관련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어요. 따라서 젊은 여성들 중심으로 시작된 미투 운동은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에 대해 다시 깊게 생각해보고 멈출 수 있는 중요한 실천이에요. 남성 중심의 섹슈얼리티나 욕망의 구조로 도배된 관행이 평화시에 바뀌지 않는다면 전시에 여성을 상대로 한 성폭력을 멈추기는 어려워요. 젊은 여성들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과 스스로를 연루시킨 한국의 미투 운동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폭력을 문제화한 미투 운동과 성폭력 피해자들과의 연대를 바탕으로 한 위드유 운동은 평화시의 성폭력과 전시의 ‘위안부’ 문제를 함께 연결시키는 중요한 정치적 운동이죠. 저는 이것이 긍정의 윤리학을 실천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고 믿어요. 초국가적인 차원을 말하자면, 글럭 교수님이 말씀했던 것처럼 일본군 성노예 문제가 어디에서나 똑같은 기억을 소환해내는 것은 아니에요. 서로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죠. 또한 초국가적인 ‘위안부’ 운동을 통해 조금 더 많은 사람이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면, 평화시의 성폭력 문제가 더 크게 논의되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변화들을 서로 연결시키면시켜 더욱 의미 있는 대의를 성취할 수 있을 겁니다. 캐롤 글럭 김은실 교수님의 말에 모두 동의하며, 두 가지만 강조하고 싶습니다. 먼저 전시 성폭력은 만연한 가정폭력과 일상 속의 모든 형태의 여성 폭력을 포함해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이라는 연속성의 한 극단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위안부’에 대한 기억이 이 세계에서 할 수 있는 일은,여성 권리의 침해를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사고하고, 분쟁과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그러한 침해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에요. 다시 말해 인신매매, 가정폭력, 그리고 김은실 교수님이 말씀하신 미투 운동 등이 그 예이죠. 직장에서의 성희롱은 여성이 아주 젊었을 때부터 겪을 수 있는 일례이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러한 성적 괴롭힘은 극도로 폭력적이거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초국적으로 연결되기 위해 더 노력하고 공통 기반을 찾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통 기반이라고 해서 의견이 일치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의 목표가 무엇인가, 우리가 함께 노력해 개선하고자 하는 공통기반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국가적, 지역적으로 특수한 맥락을 고려하여 행동해야 하지만 단결된 초국적인 협업은 상당한 가능성을 갖고 있어요. ‘위안부’ 문제가 매우 강력한 대의이기 때문인 연유도 크죠. 아시아에서 ‘위안부’ 연대 컨퍼런스를 개최하는 것뿐만 아니라 초국가적으로 한 자리에 모여 ‘이 기억으로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공동의 질문을 던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21세기의 두 번째 분기점이 곧 시작됩니다. 이제 함께 노력해야 할 때예요. 효과적인 초국적 운동, 즉 액티비즘은 미래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위안부’에 대한 기억과 과거 이들의 고통을 기릴 수도 있는 기회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합니다. 각주 ^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울, 1993. ^ 김은실, "민족 담론과 여성 - 문화, 권력, 주체에 관한 비판적 읽기를 위하여", 『한국여성학』 제10집, 1994, pp. 18-52.
-
- 2022년 논평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법과 사법(司法)의 동향
-
*이 글은 2022년 8월 29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전문가포럼 라운드테이블의 기조발제문입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군‘위안부’ 손해배상청구소송(이하 ‘위안부’ 소송으로 약칭함)의 현황 및 제기되는 법적 쟁점(특히 국내 법원이 담당한 ‘위안부’ 소송)을 개관하고 몇 개의 토론거리를 제시하고자 한다. 토론거리는 ① ‘위안부’ 소송의 효과는 무엇인가, ② ‘위안부’ 소송의 배경과 원인, 사회적 함의는 무엇인가로 집약할 수 있다. 토론거리는 글 속에 흡수하여 서술한다. 사회운동 전략으로서의 법동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와 지원 단체가 소송을 중요한 전술적 수단으로 삼은 것은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세계적인 공감을 얻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였다. 그 시기는 법적 규칙들을 자원으로 삼고 소송을 통해 법적 자원을 동원하는 이른바 법동원(legal mobilization)이 사회운동의 유력한 수단으로 대두한 시기이기도 했다. 탈냉전시대에 거대담론과 이념에 기초한 정당정치가 쇠퇴하고 법치의 중요성이 증대함에 따라 법을 무기로, 법정을 싸움터로 삼아 정치적·사회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시도들이 활성화되었다. 이는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위안부’ 소송은 그러한 현상을 보여주는 사례에 해당한다. 소송을 통한 법동원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경성법(hard law)을 원용하는 전술이지만 ‘위안부’ 소송은 국내외 시민사회의 강력한 문제제기에 의해 추동되었고, 점차 국제기구와 글로벌 시민사회의 발화를 통한 연성법(soft law)의 생산으로부터 힘을 얻었다. 소송은 해외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일본국을 상대로 한 소송이어서 국가면제(state immunity)의 법리 때문에 국내 법원을 활용할 수 없음을 감안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본 법정에서 전개된 소송의 실패와 국제적 관심 ‘위안부’ 소송이 시작된 것은 일본에서였다. 1945년부터 2019년 7월까지 일본 법원에 제기된 과거청산소송은 98건으로서, 그 중 한국인이 제기한 소송은 53건으로 절반을 넘고 있다.[1] 그 가운데 20건이 1990년대 전반기 5년에 집중되었다. 이 시기는 한국의 여성단체들이 ‘위안부’ 동원에 대한 사실인정, 사죄, 추모, 배상, 교육을 내용으로 하는 일본 정부의 책무를 제시, 요구하고 1990년 정대협을 발족한 이후 활발하게 규탄 활동을 전개한 때였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 증언으로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일본을 방문해 증언을 계속했다. 김학순 증언에 따른 일본 국회의 질의에 대해 1991년 8월 말 일본 외무성 조약국장 야나이 슌지는 청구권협정이 외교적 보호권만을 포기한 것이며 개인 청구권 그 자체를 소멸시킨 것은 아니라고 발언했다.[2] 같은 해 12월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의 첫 제소가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한국인에 의해 일본 법정에서 전개된 ‘위안부’ 소송은 1991년 12월부터 1993년 4월까지 제소된 3건에 불과하다.[3] 그러나 소송 건수는 ‘위안부’ 피해자의 숫자를 고려할 때 당연한 것이었다. 한국인 피해자의 제소 후 1990년대에 걸쳐 필리핀, 중국, 대만인 ‘위안부’ 소송이 잇따랐다. 같은 시기에 전세계적으로 ‘위안부’ 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부상해 일본을 압박했다. 일본 정부는 1993년 고노담화를 발표했다. 유엔에서는 1996년 인권위원회(Commission on Human Rights) 특별보고관 쿠마라스와미(Radihka Coomaraswamy)의 보고서와 1998년 맥두걸(Gay J. McDougal)의 보고서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었다.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는 일본에 대해 국제법 위반 사실과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 개인들에게 배상하며, 관련 자료를 공개하고, 피해자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하며, 역사적 사실을 교육하고, 범행에 가담한 자를 처벌할 것으로 요구했다.[4] 맥두걸 보고서는 일본이 피해자 개인에 대해 배상해야 하고, 일본 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일본의 법정이나 관할권을 가지는 국가의 법정에서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하고, 범행에 가담한 자를 일본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조사하고 기소해야 하며, 일본은 배상과 범죄자 처벌의 진전에 대한 보고서를 유엔 사무총장에게 격년 보고해야 한다고 선언했다.[5] 두 보고서는 공히 1965년 청구권협정이 위안부 피해자의 중대한 인권 침해에 따른 손해배상청구권으로부터 일본을 면책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위안부’ 소송은 성공하지 못했다. 한 사건에서만 1심 법원이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가능하게 하는 입법을 하지 않은 위법한 부작위가 있었음을 인정했고, 그것도 항소심에서 번복되었다. 모든 소송에서 법원은 전전(戰前) 일본 국가는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국가무책임의 법리, 어차피 20년의 제척기간이 지났다는 점, 또는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된 문제라는 점을 들어 원고패소의 판결을 내렸다.[6] 이 모든 법리가 위의 두 보고서에서 제시한 판단 기준에 반하는 것이었다. 미국 법원에의 제소와 관할권 공방: 주권면제와 사법자제 맥두걸 보고서에서는 일본에서의 사법적 구제가 시원치 않을 경우 관할권을 인정하는 다른 나라의 법원에 제소하는 방안을 제시했고, 국제법이나 미국의 조약법을 위반하는 불법행위에 대해 미합중국 법원에 관할권을 부여하는 외국인불법행위손해배상청구법(Alien Tort Claims Act)을 예로 들었다.[7] 바로 그런 견지에서 시도된 소송이 2000년 미합중국 DC관할 연방지방법원(US District Court for the District of Columbia)에 제소된 황금주 사건이었다. 이 소송은 황금주를 비롯한 6인의 한국인과 중국인, 필리핀인, 대만인을 포함하는 15인을 원고로 하지만 동종 사건의 피해자에게 승소 판결의 효력이 미치게 되어 있는 집단소송(class action)이었다. 원고들은 배상과 사과, 문서 공개를 청구하는 한편 일본 정부의 행위가 외국인불법행위손해배상청구법과 강요된 성매매 및 강간 금지 규범에 반한다는 확인판결을 구했다.[8] 이 사건에서 가장 큰 쟁점은 미합중국 법원이 이 사건에 대해 관할권을 가지느냐였고 그 골자는 국가면제(미국법에서는 주권면제sovereign immunity)의 법리에 따라 주권국가인 일본을 상대로 한 소송에 대해 미합중국 법원이 관할권을 가지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주권면제가 배제되어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인지의 문제였다. 원고들은 이 사건이 외국주권면제법(Foreign Sovereign Immunities Act)이 규정하는 주권면제 예외 사유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면서, 주권면제의 배제 근거로 ① 포츠담선언을 통해 주권면제를 포기했고, ② 국제적 강행규범(jus cogens)을 위반함으로써 주권면제를 묵시적으로 포기했으며, ③ 위안소의 설치·운영과 ‘위안부’의 동원은 미합중국에 직접적 효과를 가지는 상업적 행위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연방지방법원은 포츠담선언이 주권면제의 포기를 담고 있지 않고, 주권면제의 묵시적 포기는 포기의 의사가 드러나는 경우에 인정할 수 있는 것이지 국제적 강행규범의 위반으로부터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위안소의 설치·운영과 ‘위안부’의 동원은 원고들의 주장으로부터 보아도 국가의 관여가 분명하여 상업적 행위라 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예비적 판단으로서 설사 주권면제를 배제한다고 해도 이 사안은 행정부가 판단할 정치문제(political question)로서 법원의 관할권이 배제된다고 보아 소를 각하했다. 원고들의 항소를 수리한 DC관할 연방항소법원(US Court of Appeals for the DC Circuit)은 제1심 판결을 승인하면서도 다소 다른 근거를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미국이 모든 종류의 사건에서 주권면제를 인정했다가 1952년에야 상업적 행위 등을 배제하는 제한적(restrictive) 주권면제로 이행하였는바, 그 이전 사건에 외국주권면제법을 적용하는 것은 모든 행위에 대해 주권면제를 인정하는 것에 대한 일본의 확립된 기대에 반하는 소급효를 가지게 되어 불공정하다는 것이었다. 1952년 이전에는 행위의 성격을 따지지 않았으므로 상업적 행위인지의 여부를 판단할 필요도 없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제1심 법원의 판단과 차이가 있다. 아울러 19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의해 연합국은 일본에 대해 청구권을 포기했는데 제3국 국민이 미합중국 법원에서 일본을 상대로 제소한 사건을 미합중국 법원이 수리하는 것은 이상하다는 이유를 추가했다. 그런데 원고들의 상고허가(미국법상으로는 연방대법원에의 이송명령certiorari) 신청을 수리한 연방대법원은 항소법원 판결 중 외국주권면제법의 소급적용을 부정한 부분을 파기하고 사건을 항소법원으로 환송했다. 이에 따라 항소법원은 주권면제 쟁점을 제쳐두고, 이 사건이 법원의 판결로 다루기 힘든 정치문제(political question)임을 이유로 소를 각하했다. 샌프란시스코조약에 후속하는 한국, 중국, 대만과의 조약에 대한 해석을 수반하는 것이고, 한·일간의 청구권협정에 대한 한·일간의 해석이 다른 상황에서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지는 법원이 다룰 수 없는 고도의 정치적 쟁점이라는 것이다.[9] 국제규범에의 호소와 세계시민법정 황금주 소송이 시작된 같은 해에 전시성노예를 규탄하는 여러 나라의 시민단체가 준비한 「일본군 전시 성노예 국제여성법정」(Women’s International Tribunal on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이 열렸다.[10] 1998년 제정된 국제형사재판소규정(Rome Statute of the International Criminal Court)이 무력분쟁 하의 성폭력에 대해 국제형사재판소의 관할권을 인정한 것이 보여준 국제규범의 동향에 힘입은 것이었고, 이 법정의 판결 녹취문 중 “법은 정부에 배타적으로 귀속하지 않는 ‘시민사회의 도구’”라는 대목에서 보듯이 법다원성(legal pluralism)을 구현하려는 시도였다. 1994년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는 피해자와 시민단체 대표들의 일본 검찰에의 고소·고발도 당연히 무위로 돌아간 후 그러한 공식 법제와 대조되는 비공식적 시민사회의 법을 내세운 것이다. 한국 사법부를 통한 논의의 확대: 한일회담 문서 공개와 청구권협정상 분쟁해결 부작위 위헌 확인 일본과 미국에서 소송이 실패로 귀결된 후 결국 ‘위안부’ 운동을 위한 법동원의 장은 국내 사법부가 되었다. 이는 국제적·국내적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국가가 매개하여 권리 주장의 바탕을 이루는 조약 해석을 제시한 것에 힘입었다. 즉 2005년 노무현 정부는 한일회담 문서공개에 따른 후속대책을 논의하는 민관공동위원회를 가동했고, 동 위원회는 청구권협정이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기 위함이 아니고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는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되지 않았다고 선언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여전히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민관공동위원회의 입장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해석이 갈리지만, 민관공동위원회는 일본군위안부, 사할린동포, 원폭피해자 문제가 청구권협정에 의해 커버되지 않았음은 분명히 했다.[11] 민관공동위원회라는 장을 열게 만든 수단 역시 소송이었다. 즉 ‘위안부’ 피해자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1952-1965년 기간의 한일회담 회의록을 공개하라는 정보공개청구에 대해 외교통상부가 거부처분을 한 것에 대한 행정소송이 이끌어낸 결과였다.[12] 이듬해 64명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은 정부가 청구권협정 제3조에 따른 분쟁해결 절차에 나서지 않는 것이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두 해 뒤 원폭피해자 역시 같은 취지의 청구를 했다. 2011년 헌재는 두 사건에 대해 국가의 부작위가 위헌에 해당한다는 결정을 내렸다.[13] 1998년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국가가 청구권협정에 관한 일본과의 의견차이를 해소하기 위한 중재회부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위헌심판을 청구한 것에 대해 각하 결정을 내린 것과 비교해보면, 다소의 법리상 차이가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입장을 바꾼 것에 다름 아니었다.[14] 2015년 한일외교장관 합의와 2021년 두 개의 충돌하는 판결 이러한 압박 속에 나온 것이 박근혜 정부의 2015년 12월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외교장관 합의이다. 치유를 위한 재단의 설립과 일본 정부 예산으로부터 10억엔 정도의 출연, 주한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으로 인한 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 및 불가역적 해결 확인 등을 내용으로 하는 이 합의는 정치적 논란과 법적 성격에 대한 이견 속에 현재 그 운명조차 알 수 없는 상태에 있다. 헌법재판소는 이 합의가 조약의 성격을 가지지 않는 비구속적 합의로서 법적 권리·의무를 창설하지 않으며, ‘위안부’ 피해자들의 권리가 처분되지 않았다고 판정했다.[15]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압박받아 서두른 한일‘위안부’합의가 오히려 일본군‘위안부’ 문제로 인한 정치·외교적 난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의 정치적·외교적 노력이 미흡하다는 이유로 사법 - 헌법소원심판과 헌재 결정 - 에 의존하여 문제해결을 재촉한 결과 발생한 정치적 혼란이 다시 역으로 사법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려는 동인을 생산해냈다. 이미 2012년 대법원이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을 내렸고 그 판결에 대한 반론보다는 지지하는 여론이 더 강한 상태에 고무된 바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피해자 지원단체는 그간 국가면제라는 제약을 의식하여 시도하지 않았던 국내 소송에 나서게 되었다. 2016년 일본국을 상대로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두 개의 소가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기된 것이다. 이 사건들에 대한 판결은 2021년 1월과 4월에 각각 선고되었다. 2018년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재상고심 판결이 내려지고 2019년 판결의 집행이 준비되자 일본과의 갈등이 고조되었고 국내 여론도 극심한 분열 상태에 빠져들면서 문재인 정부의 국정난맥과 함께 소송을 통한 법동원을 지지해온 민족주의적 대중정서가 약화되기 시작한 이후였다. 배춘희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12인이 청구한 사건에 대한 판결에서 재판부는 위안소의 설치·운영과 ‘위안부’ 동원을 주권적 행위로 규정하면서 그것이 반인도적 범죄행위라는 점에서 국가면제에 대한 예외에 해당한다고 보아 국내 법원의 관할권을 인정하면서 원고들에게 각 1억원을 지급하라는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에서는 2차대전 말기 독일에 의해 강제동원되어 노동에 혹사된 이탈리아인들이 독일을 상대로 이탈리아 법원에 제소한 소위 페리니(Ferrini) 사건에서 이탈리아 대법원이 주권적 행위라 해도 국제적 강행규범을 위반한 행위라는 이유로 국가면제 배제를 결정했다는 점, 그리고 이에 대해 이탈리아의 국제법 위반을 인정한 국제사법재판소(ICJ)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헌법재판소가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 및 그것을 반영하는 국내 입법이 위헌임을 선언했다는 점에 주목했다.[16] 반면 곽예남·김복동 할머니를 비롯한 20인을 원고로 하는 사건에 대해 같은 법원의 다른 재판부가 3개월 후에 내린 판결에서는 페리니 사건으로 촉발된 독일과 이탈리아의 분쟁에 대한 국제사법재판소 판결의 취지에 공감하면서 국제적 강행규범 위반 행위를 국가면제로부터 배제하는 국제관습법이 형성되었다는 원고의 주장을 배척했다. 아울러 국가면제가 인정되더라도 피해자들이 소송 외에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 행사로 볼 수 있는 2015.12.28. 한·일 합의에 의하여 이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대체적인 권리구제수단’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이유로 침해가 과도하다는 주장도 배척했다. 이 재판부가 한일‘위안부’합의의 실효성과 이를 통한 권리구제의 가능성을 상당히 인정하고 있음이 주목된다.[17] 위의 두 판결은 일본국이 항소하지 않음으로써 확정되었다. 이처럼 동일한 배경과 성격의 사건에 두 개의 충돌하는 판결이 내려진 가운데 승소한 원고들의 집행을 개시하는 재산명시를 명하는 결정이 내려진 상태이다.[18]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의 집행을 앞두고 긴장이 고조된 상태에서 정부에 의한 채무인수 등 여러 대안이 논의되고 있으나 정부와 피해자들 사이에 협의가 진전되지 않고 있고 일본의 태도 변화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충돌하는 ‘위안부’ 판결의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조율할지, 열린 마음의 토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법동원의 양가적 결과: 사회적 인정, 정치의 사법화, 의제의 축소 지금까지 ‘위안부’ 소송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일본에서의 소송은 모두 패소했다는 점에서는 실패라 할 수 있지만 “반세기 가까이 가슴 속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던 피해를, 일본의 재판소가 판결문이라고 하는 공적인 문서에서 그 피해를 상세하게 기술하여 피해의 사실을 인정한 것도, 피해에 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고 기록하는 것 자체가 피해의 구제를 위한 첫걸음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중요한 성과”가 있었다는 평가가 있다.[19] 미국 법원에서의 소송도 마찬가지이다. 한편 소송전이 본격화되자 1990년대 초반 다소나마 우호적인 면모를 보인 일본의 여론이 보수화되는 경향을 보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소송이라는 수단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왔다기보다는 소송을 비롯한 여러 문제제기의 수단들이 동원되어 일본을 압박한 것이 방어심리를 자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나아가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은 한일관계를 경색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원고승소의 ‘위안부’ 판결은 직접 일본국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국가면제를 부정하고 배상을 명했다는 점에서 위협적이었다. 정치적으로 비중이 있거나 민감한 사안을 정치적인 방법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사법에 의존하여 해결하려는 정치의 사법화(judicialization of politics) 경향이 탈냉전시대 세계 곳곳에서 목도된다. 강제징용 손해배상 소송과 ‘위안부’ 소송은 정치의 사법화의 좋은 예들을 제공했다. 정치의 사법화를 가져오는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뜨거운 감자를 회피하려는 정치권의 소극적 자세도 그 중 하나이다. 정부는 피해자 및 시민사회와의 대화를 소홀히 하다가 소송과 판결에 따른 압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조치를 취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그것이 미흡하다고 생각한 피해자와 지원단체들이 다시 소송전을 전개하고, 법원은 후속 조치를 정치권이 해결해줄 것으로 보고 권리 존중의 이상적인 판결을 한다. 즉 뜨거운 감자를 다시 정치권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법학자로서 한일간 과거청산을 위한 법적 투쟁을 지원해온 김창록은 ‘위안부’ 문제가 서 있는 지점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법적으로 파고드는 것은 곧 현재의 세계질서와 그 속에서의 동북아질서 및 한일관계의 법적 틀을 근원적으로 재점검하는 작업, 즉 ‘전후 국제질서의 정통성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것’이기도 하다.”[20] 소송이 이처럼 큰 질서의 균열을 보여주는 엄청난 사건임은 그만큼 소송이 정치와 외교에 큰 숙제를 안겨준다는 뜻이다. 그리고 소송이 가진 그러한 정치적 무게는 개인의 피해 구제와 국가의 역사적·정치적 명분의 보호 사이에 긴장을 초래한다. 그러한 긴장은 일본군‘위안부’ 소송에서 아이러니컬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미국에서 벌어진 황금주 소송과 국내 두 건의 소송 모두에서 위안소의 설치·운영 및 위안부 동원이 상업적 행위라는 주장이 원고측에서 나왔다. 위안소가 “국가가 감독하는 유곽(brothel)”이며 병사들은 고정된 가격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받았다는 점을 강조할 정도였다. 사건이 대법원으로부터 항소법원에 환송되자 원고들은 상업적 행위임을 재삼 주장하면서 그 행위가 미국에 직접적 효과를 가진다는 점을 판단하기 위해 사건을 지방법원으로 환송해줄 것을 요청했다. 위안부 소송을 지원하는 세계의 단체 - 한국 단체도 포함 - 를 대표해 아미커스(amicus curiae) 의견서를 제출한 전문가들도 일본의 행위가 상업적 행위임을 주장했다. 국가의 행위이긴 하지만 그것은 카라유키상을 모집하고 동원한 매춘업자들의 행동을 모방했기 때문에 성격에 있어서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위안소의 설치·운영과 위안부 동원을 매춘업자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일본의 주장 자체가 그 행위가 상업적 행위임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논리도 피력했다.[21] 2000년 국제여성법정에서 판사로 역할했고 국내에서 2016년 제기된 12인 원고 소송을 지원한 영국의 국제법학자 친킨(Christine Chinkin) 등도 일본의 행위가 상업적 행위라는 주장을 폈고, 그러한 의견은 원고측 주장의 일부를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22] 두 판결 모두에서 그러한 주장을 배척했다. 위안부 동원을 상업적 행위로 취급하는 것은 한국에서는 위험한 주장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인신매매(trafficking)를 수반하는 매춘을 모두 동일하게 취급해 규탄하는 국제적 페미니즘의 논리와 외세에 유린된 과거사를 다루는 입장이 충돌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초기 소송에서 나타난 다양한 청구들 - 사실인정, 사죄, 배상, 교육 - 은 소송전이 여론을 환기하고 의식을 고양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2016년 소송에서는 청구가 금전적 배상으로 축소되어 있다. 이는 여론 동원 수단으로서 소송이 가지는 역할이 줄어드는 한편 민사소송제도가 허용하는 청구의 형태에 규정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배상 판결은 금전적 배상을 둘러싼 논란을 일으킴으로써 피해자 주장에 대한 여론의 공감을 약화시킨다. 각주 ^ 「한-일 ‘강대강’ 대결의 진원... 대법원 판결 핵심 정리」, 『오마이뉴스』, 2019.7.30. ^ 김창록, 「일본에서의 대일과거청산소송 - 한국인들에 의한 소송을 중심으로」, 『법사학연구』 제35호 (2007), 343-345면. ^ 같은 글의 부록에서 김창록은 2007년 2월까지의 한국인 제소 40건의 목록을 제시하고 있다. ^ Report on the Mission to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the Republic of Korea and Japan on the Issue of Military Sexual Slavery in Wartime, E/CN.4/1996/53/Add.1, 4 January 1996. ^ An Analysis of the Legal Liability of the Government of Japan for ‘Comfort Women Stations’ Established During the Second World War, E/CN.4/Sub.2/1998/13, 22 June 1998. ^ 김창록,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법적 검토 재고」, 『법제연구』 제39호 (2010), 79-108면; 오승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손해배상소송에 관한 연구 - 해외 법원의 판결을 중심으로」, 『법학논총』 제42권 제1호 (2018), 130-141면; 髙良沙哉, 「‘慰安婦’訴訟の意義と課題」, 『地域研究』 제13호 (2014), 133-152면. ^ 위의 맥두걸 보고서, para. 52. ^ 이 소송이 일본에서의 더딘 소송 진행과 비관적 전망에 따른 것인지 필자는 알지 못한다. 이 소송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1990년대에 일본에서 제기된 3건의 위안부 소송 중 시간적으로 뒤에 제기된 1992년과 93년 소송의 제1심 판결이 각각 1998년과 99년에 선고되었을 뿐이었다. ^ Hwang Geum Joo et al. v. Japan, 172 F. Supp. 2d 52 (D.D.C. 2001); 332 F.3d 679 (D.C. Cir. 2003); 542 US. 901 (2004); 413 F.3d 45 (D.C. Cir. 2005). 환송심 판결은 한·일간 청구권협정의 해석 차이를 언급하면서 김창록의 의견서를 인용했다. 황금주 사건에 대한 해설로는 김창록, 앞의 글(2010), 91-93면; 오승진, 앞의 글, 141-145면. ^ 그 배경과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김창록, 「2000년 여성국제법정의 맥락」, 『법과 사회』, 제66호 (2021), 205-244면. ^ 「한일회담 문서공개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 개최 보도자료」, 2005.8.26. ^ 서울행정법원 2004.2.13. 선고 2002구합33943 판결. ^ 헌재 2011.8.30. 2006헌마788; 2011.8.30. 2008헌마648. ^ 헌재 2000.3.30. 98헌마206. ^ 헌재 2019.12.27. 2016헌마253. ^ 서울중앙지방법원 2021.1.8. 선고 2016가합505092 판결. ^ 서울중앙지방법원 2021.4.21. 선고 2016가합580239 판결. ^ 서울중앙지방법원 2021.6.9. 선고 2021카명391 결정. ^ 김창록, 앞의 글(2010), 100면. 중국인 ‘위안부’ 소송에서 최고재판소가 샌프란시스코조약의 틀 속에서 청구권이 포기되었다는 취지는 청구권이 실체적으로 소멸했다는 뜻이 아니고 재판상 소구할 권능만이 상실된 것이라는 해석도, 비록 청구를 배척하기 위한 또 하나의 논리이지만, 일본 사법부가 과거청산 문제에 대해 압력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 ^ 같은 글, 103면. ^ Brief of Amici Curiae Askin et al. in Support of Plaintiff-Appellants Hwang Geum Joo et al. and Reversal of the District Court’s Decision, United States Court of Appeals for the District of Columbia Circuit, No. 01-7169, August 28, 2002. ^ Christine Chinkin and Keina Yoshida, Opinion in the Case of Kwak Ye-Nam et al. v. Japan in the Seoul Central District Court, 7 October 2020.
-
- 2019년 논평 ‘위안부’ 문제의 초국가성과 기억의 글로컬화 1부
-
‘위안부’ 문제를 새롭게 사유한다 ‘위안부’' 문제의 초국가성과 기억의 글로컬화 그동안 수많은 이들이 외쳤던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란 결국 무엇을 의미한 것인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선언했던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3여년 간의 국내외 상황은 한일 정부 간의 양자 합의라는 틀이 ‘위안부’ 문제의 해결에 과연 얼마나 적절한 접근이었는지를 다시금 질문하게 한다. 2011년 헌법재판소 부작위 위헌 결정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한국정부가 일본 정부와 협상을 개시하도록 하였다. 가장 많은 수의 ‘위안부’ 생존자가 등록된 한국정부는 이를 계기로 국가에 의한 성폭력과 같은 중대한 인권문제에 피해국 정부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바람직한 모델을 제시할 것이 기대되었다. 하지만 한일 양국은 석연찮은 비밀협상으로 피해자와 시민사회의 기대를 저버리고 서둘러 문제를 종결하는 데에 역점을 둔 합의를 해버렸다. 한일관계 개선이라는 목적에 종속된 ‘위안부’ 문제 해결의 협상에서 여성인권과 성폭력, 그리고 피해국 정부의 역할은 과연 어느 정도 고려되었을까? 한일합의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스스로 생존자이며 평화운동가였던 김복동 할머니가 최근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이제 남은 생존자들도 몇 분 되지 않는 2019년 봄, ‘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합의의 역풍으로 인해 오히려 지금 ‘위안부’ 문제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수요집회는 회를 거듭할수록 새로운 참여자가 늘어나고 젊은 세대들은 기성세대보다도 ‘위안부’ 문제에 더 공감하고 있다. 이제 남은 우리들에게는 일본 정부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법적 책임의 인정과 같은 가해자의 반성을 통한 “해결”의 틀을 넘어 이 문제를 사유하는 새로운 방식이 절실히 필요해 보인다. 필자는 그동안 ‘위안부’ 문제는 과거사와 한일관계라는 국가 및 국익 중심의 인식적 틀로는 포괄할 수 없는 여성인권규범의 발전이라는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것을 주장해 왔다. ‘위안부’ 피해자의 범위는 최대 피해국인 한국을 넘어, 일본이 전쟁했던 아시아의 여러 국가 및 인도네시아 주재의 네덜란드 여성들에게까지 이른다. ‘위안부’ 문제는 그 자체가 국제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다. 또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은 90년대 초 빈번했던 민족분쟁에서 전쟁수단으로 사용되었던 성폭력을 범죄화하는 국제여성인권규범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 그 과정에서 ‘위안부’ 문제는 20세기에 발생한 국가에 의한 여성인권침해의 대표적 사례로 인식되었고, 미래세대에 대한 교육과 집단적 기억을 통해 재발을 방지하도록 노력해야 할 인류의 공동과제의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위안부’ 문제는 한일관계를 넘어서는 초국가적인 성격을 가지는 문제로 인식되어 왔다. 여기서는 아래에서 논하는 여섯 가지 측면에서 초국가적이고 글로벌한 성격을 검토한다. 1. ‘위안부’ 문제는 아시아국가의 공통의 전쟁피해이다. 먼저 ‘위안부’ 문제의 피해상황을 보자. ‘위안부’ 문제는 한국(조선)만이 아니라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했던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광범위하고 공통된 전쟁피해이다. 위안소 분포지도에서 보듯 그간 연구에 의해 밝혀진 위안소만해도 아시아·태평양 각지에 수백개가 넘는다. 일본, 조선, 대만의 ‘위안부’는 주로 군의 관여하에 강제 모집되고 운영되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현지여성들을 모집하거나 납치하여 위안소를 설치하거나, 현지여성을 납치나 폭력으로 제압하여 가두고 강간하였다. 이렇게 수만에서 수십만으로 추정되는 아시아의 여성들이 위안소의 ‘위안부’ 또는 전장에서 다양한 형태의 성폭력 피해자가 되었다.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피해를 숨기고 살아오다가 1991년 김학순의 증언으로 그 일부가 “‘위안부’ 피해자”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는 아직도 아시아 미해결의 아시아 공통의 과제로 남아 있다. 2. ‘위안부’ 문제는 글로벌 여성인권규범사적인 의미를 가진다. 1991년 ‘위안부’ 문제가 김학순의 증언으로 가시화된 이후부터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곧 글로벌 이슈로 부각되어 1990년대에 비약적으로 발전한 세계여성인권규범의 형성에 큰 공헌을 하였다. 1990년에 한국여성들이 처음으로 이 문제를 일본 정부에 정식 제기했을 때 일본 정부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국가책임을 부인하였다. 그러자 지원단체들은 일본 정부의 성의 있는 태도를 이끌어내기 위해 유엔 인권기구에 문제제기를 하기로 하였다. 1992년에 한국의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유엔 인권소위원회에 이 문제를 제기하였고, 일본 시민단체도 같은 해 2월 유엔 인권위원회에, 그리고 5월에는 현대형 노예제 실무회의에서 강제연행 노동자 문제와 함께 ‘위안부’ 문제를 제기했다. 그 결과 당시 인권소위원회의 ‘중대한 인권침해의 피해자에 대한 배상’ 문제 특별보고관 테오도르 반 보벤이 한국을 방문하는 등 큰 관심을 받게 되었다. 12월에는 국제인권기구의 전문가들이 동경에서 한국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는 공청회를 열었다. 당시 유엔에 한국 측과 함께 ‘위안부’ 문제를 제기했던 일본인 변호사에 따르면 일본 관련 다른 어떠한 인권 문제들도 그만한 주목을 받은 예가 없었을 만큼 ‘위안부’ 문제는 즉각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회고한다. 여성 폭력문제를 다루던 글로벌 여성인권 네트워크의 반응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특히 1993년의 비엔나 세계인권회의는 여성인권규범의 발전에 큰 분기점이었는데 ‘위안부’ 생존자들은 1993년 비엔나 세계인권회의에서 직접 증언하는 등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알리는 데 주력하였다. 비엔나 세계인권회의는 탈냉전 이후 주요 관심사로 떠오른 인권 문제에 기존의 인권 레짐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음을 반성하기 위해 개최된 만큼, 이 회의에서 세계여성단체들은 기존 인권 레짐이 남성중심적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들은 “여성의 권리는 인권이다”(Women’s Rights are Human Rights)를 내걸고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를 강력히 제기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 그해 12월에는 유엔 총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철폐 선언(Declaration of the Elimination of Violence Against Women)」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비엔나 세계인권회의의 최종 결의사항에는 여성단체들의 주장을 반영해 유엔 인권위원회(UNCHR)에 여성에 대한 폭력실태를 조사하는 특별보고관 제도(Special Rapporteur on Violence against Women)를 신설할 것이 포함되었다. 1994년에 쿠마라스와미(Radhika Coomaraswamy)가 그 첫 번째 특별보고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녀는 ‘위안부’ 문제를 조사한 여성폭력에 관한 조사 보고서를 유엔 인권위원회에 제출하였다. 이 보고서는 ‘위안부’ 문제를 다룬 최초의 유엔기구의 보고서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위안부’ 문제는 국제적인 관심을 받으며 글로벌 인권 문제로 이슈화되었다. 1995년에는 베이징에서 제4차 유엔 세계여성회의가 열려 여성폭력 문제의 근절이 주요 과제로 논의되었으며 ‘위안부’ 문제도 계속해서 중요한 사안으로 다루어졌다. 1990년대 초는 특히 보스니아 전쟁 및 르완다 내전과 같은 민족분쟁에서 집단 강간 및 강간소와 같은 반인륜적인 범죄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이 두 전쟁은 각각 1993년과 1994년에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전쟁범죄를 재판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재판 과정에서 성폭력과 여성에 대한 집단 강간은 전쟁을 위해 계획된 수단임이 밝혀졌다. 또한 이러한 종류의 계획된 성폭력은 ‘인도(人道)에 반하는 범죄’라는 인식에 이르게 되었다. 이후 국제상설형사재판소 설립을 위한 1998년 로마조약에서 강간, 성노예화, 강제매춘, 강제임신과 불임, 성폭력 등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인도에 반하는 범죄로 정의하고 국제법사에서 여성인권에 대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이렇게 1990년대는 여성인권과 전시 성폭력과 관련된 국제규범이 크게 발전하는 시기였고, 이러한 맥락 속에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많은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이후 1996년에 인권위원회에 제출된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1998년에 유엔 인권소위원회에서 채택된 맥두걸 보고서, ILO 보고서, 인권고등판무관 연례보고서 등에서 ‘위안부’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위안부’는 성노예(sex slave)로, 위안소는 강간소(rape center)로 개념화되었다. 특히 맥두걸 보고서는 중대한 인권침해를 저지른 가해자에 대한 불처벌의 문제를 다루고 범죄 책임자 처벌을 포함한 매우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보고서들에 기반하여 지금까지 많은 국제인권기구들이 일본 정부에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하는 수많은 권고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
- 2020년 에세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들 2부 - 웹진 〈결〉 편집위원 추천도서
-
5.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 제도 윤명숙 지음, 최정원 옮김, 이학사, 2015. 추천 편집위원 : 류광옥(법무법인 가로수 변호사) 2015년 출간된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 제도』는 위안소 제도를 입안한 일본군의 매뉴얼은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고, 위안소를 운영하고 감독한 기록은 매우 제한적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일본군이 위안소 제도를 입안하게 된 이유, 위안소를 직접 운영하거나 운영에 관여한 실태, 그리고 위안소로 '위안부'를 이송하는데 관여한 사항 등을 집요하게 실증해낸다. 이 책의 진가는 일본군 위안소 제도를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 책 2부에서는 일본군이 입안하고 운영한 위안소에 동원된 조선인 군'위안부'에 관해 다루고 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조선인 군'위안부'를 만든 식민지 시기 조선의 경제‧사회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군 위안소 제도는 일본군의 전쟁 수행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위안소 제도에 대한 일본군의 책임은 전쟁 책임이다. 그러나 이 위안소에 조선인 군'위안부'가 징집된 이유는 조선이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인 군'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책임은 식민지 책임이다. 전쟁 책임을 추궁하는 경우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구별은 명확하다. 그러나 식민지 책임을 추궁하는 경우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이 까다로워진다. 하지만 조선인 군'위안부' 문제는 식민지 시기 조선의 상황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더욱 선명하게 그리고 무겁게 실감하게 되었다. 조선인'위안부' 희생자를 만든 것은 전쟁이라는 날카로운 칼날이 아니라 식민지라는 무거운 돌이었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저자는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여사의 증언을 계기로 '위안부'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고 이 책을 썼다고 한다. 피해자의 증언이 주는 충격은 대단하다. 피해자의 증언은 우리의 감정을 쉽게 움직인다. 그러나 피해자의 증언이 말에 그치지 않고 피해의 회복으로 나아가게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책이 지나칠 정도로 견지하고 있는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태도는 증언이 감정으로 휘발되지 않고 피해의 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증언에 무거운 추를 달아주고 있다. 6. 빨간 기와집 가와타 후미코 지음, 오근영 옮김, 꿈교출판사, 2014. 추천 편집위원 : 임경화 (중앙대 중앙사학연구소) 이 책은 일본의 논픽션 작가 가와타 후미코가 오키나와에서 살고 있던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을 다년간 취재하고 그녀의 삶을 기록한 작품이다. 그 피해 여성은 바로 1975년에 최초로 일본군'위안부'임을 증언한 배봉기이다. 배봉기는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일본 본토 진격을 막기 위한 희생양으로 선택된 오키나와 전투에 '위안부'로 동원되어 도카시키 섬에서 일본군의 성적 '위안'을 강요당한다. 이 책의 제목인 '빨간 기와집'은 주민들과의 소통이 통제된 섬마을 어귀의 '위안소'를 가리키는 말이다. 봉기가 머물던 빨간 기와집은 미군의 집중공격에 노출되어 6명의 동료 중 3명이 죽거나 행방불명이 되고 2명은 가까스로 탈출한다. 남겨진 봉기와 또 한 명의 조선인 여성은 전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오키나와를 방랑한다. 이 책은 식민지 시대에 충남 신례원에서 머슴의 자식이라는 박복한 운명을 타고난 봉기가 정처 없이 떠돌다가 결국에 일본군'위안부'가 되어 오키나와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는 이야기, 그녀와 함께 오키나와의 섬으로 끌려왔던 여자들이 그 후의 운명을 찾아가는 이야기, 한국행을 거부하는 봉기를 대신해서 한국을 찾은 가와타 후미코가 봉기의 언니 봉선을 만나는 이야기의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가와타를 통해 각자의 소식을 전해 들은 봉기와 봉선이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차라리 (소식을) 안 듣는 게 나았다고 하는 장면은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이들의 이산과 방랑은 고국이 짊어진 식민지 지배라는 역사의 무참함을 빈곤 계급이라는 저주를 안고 태어나 '위안부'가 되어 전쟁터로 끌려가야 했던 여자들의 숙명이었을 것이라고 가와타는 말한다. 7. 성의 역사학 : 근대국가는 성을 어떻게 관리하는가 후지메 유키 지음, 김경자, 윤경원 옮김, 삼인, 2004. 추천 편집위원 : 이선이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이 책은 근대국가 일본이 민족과 계급을 교직(交織)하여 성과 생식을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치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는 근대국가의 (여)성관리 양상을 비교사 속에 두고 논하고 있어, 공창제나 일본군'위안부' 제도를 일본 사회의 특수성 안에 가두지 않는 현명함도 잃지 않고 있다. 근대 이후 성의 역사를 국가(민족), 젠더, 계급을 교차시켜 통합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8. 일본인 '위안부'- 애국심과 인신매매 니시노 루미코, 오노자와 아카네 지음, 번역공동체 '잇다' 옮김, 논형, 2021. 추천 편집위원 : 심아정(독립연구활동가) '매춘부였으니까 피해자가 아니다.' 전(前) 일본인'위안부'는 정조 이데올로기의 낙인이 찍힌 채 오랜 시간 침묵을 강요당해 왔다.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 일본인'위안부'도 피해자임이 인정되었지만, 그 후 수차례 제출된 「전시 성적 강제 피해자 문제해결 촉진에 관한 법률안」에는 피해 보상의 대상에서 일본인이 제외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식민지 지배와 전쟁범죄라는 틀에서 아시아의 피해에 관심을 두는 역사 인식의 획기적인 전환의 이면에, 일본인'위안부' 문제는 조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배제되어 왔다는 문제가 버티고 있다. 애초에 전전(戰前)의 일본 사회에서 창기, 예기, 작부 등은 인신매매로 팔려와 대부분 폐업의 자유도 없이 매춘을 강요당했던 여성들이었다. 인신매매는 당시의 국제조약이나 일본 형법에서도 금지되었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내버려 뒀을 뿐 아니라, 전시 '위안부' 모집에 이러한 관습을 이용한 것이다. 공창제에 대의명분을 제공했던 정조 이데올로기에서 전제된 여성차별과 계급차별은 강간 방지를 위해서 '위안소'가 필요했다는 주장과 같은 정당화 구조를 가진다. 거기에 민족차별까지 얽혀 여성들 사이의 분리를 조장한다. 이제 여성들의 피해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 사이에 계급차별과 민족차별을 가능하게 했던 권력이 어떻게 작동되면서 각각의 차별을 견인하고 강화하는지를 보아야 할 때다. 이는 식민지적 차이를 지우려는 시도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이 책은 일본인'위안부' 모집과정을 공창제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고, 당시 '위안부' 징집으로 일본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사례 등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오키나와에서 자기 집이 위안소로 사용된 이들과 '위안부' 모집업자를 인터뷰한 내용, 일본인'위안부'의 전후의 삶, 그리고 일본군 위안소와 전후 점령군을 대상으로 한 위안 시설의 연속성을 선명하게 밝혀낸 부분은 주목할 만하다. 이 책을 읽고 난 독자들이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피해'가 무엇인지, 지금-여기의 여성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과의 관련 속에서 다시금 정의할 수 있기를 바란다. 9. 그곳에 한국군 위안부가 있었다 : 식민주의와 전쟁, 가부장제의 공조 김귀옥 지음, 선인, 2019. 추천 편집위원 : 여순주(한국정신대연구소 전 연구원) 이 책의 저자인 김귀옥 교수는 지난 2002년 공식 발표한 한국군'위안부' 문제를 2019년 단행본 『그곳에 한국군 위안부가 있었다 : 식민주의와 전쟁, 가부장제의 공조』로 펴냈다. 1996년 처음 속초에서 월남인 김씨를 인터뷰하다 한국군 위안대 문제를 알게 된 때로부터 23년 만이다. 저자는 한국군'위안부' 문제를 일본군'위안부'와 미군'위안부'의 궤적과 함께 연결해서 쓰고 있다. 한국 언론 속의 군'위안부'의 의미를 고찰해서 '위안부'는 외국군을 포함한 군인을 상대하는 여성으로 사용해온 것으로 정리했다(103쪽). 저자의 발표 후 한국군'위안부' 문제의 문서증거인 한국 육군이 펴낸 『후방전사』는 국회도서관에서 이용 불가로 분류되어 일반인들이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학계 반응도 사실은 인정하지만 뭔가 불편해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119쪽). 진보학계의 거목인 리영희 교수조차 1988년에 낸 회고록에서 관련 사실을 기록했지만, 저자가 인터뷰를 요청하자 회고록 이상의 이야기가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그 실망감이 얼마나 컸을까? 저자는 한국군'위안부'를 만나기 위해 무척 애를 썼지만 엇갈림의 연속이어서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한국군'위안부' 피해자들은 주로 인민군 부역자와 포로, 북한 출신들로 보인다. 또 김희오 회고록에 의하면 "거금의 후생비를 들여 서울에서 조변하여" 왔다. 북파공작원 최 씨는 1951년 5월경 원산에서 여성 4명을 끌고 왔다. 그중 한 명은 미 전투기의 공습으로 죽고, 남은 3명이 '위안부'로 넘겨졌다. 3명 중 한 명인 문 씨는 이아무 하사관에게 겁탈당한 후 아이를 낳고 살았다고 한다. 양도에서도 성진 부근의 여성 2명을 납치해와서 성노리개로 만들었다(123~124쪽). 저자는 문 씨와 전화통화를 몇 번 하면서 '위안부'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으나 문씨는 저자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언짢음을 표현했다고 한다. 저자는 2004년경 소문으로 한국전쟁 때부터 '위안부'였고 50~60년대 기지촌 생활도 했던 할머니를 만났지만 "고통에 찬 얼굴을 본 순간 어떤 사람에게 신뢰도 없는 상태에서 고통에 찬 인생담을 듣고 싶다고 말하는 게 너무 염치가 없어서 다시 찾아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57쪽)."한국전쟁기 한국군'위안부' 제도는 전시 정부인 육군본부에 의해 기획 및 설치되고 관리·운영되어 초법적으로 존재했다"(145쪽). 군이 직영한 군인 전용 '위안소'였다(144쪽). 한국군 위안소는 군이 직영한 형태였으므로 한국군의 책임은 일본군보다 더 무겁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제도 운영에는 많은 군인이 관련되어 있다. 이 제도를 기획하고 만든 장석윤 휼병감, 북파공작원 등 피해 여성들의 동원에 관여한 군인들, 『후방전사』를 작성한 군인, 여기에 실린 특수 '위안대' 실적 통계표를 위해 기초 자료를 만든 군인들은 물론이고 주 2회 성병 검사를 수행한 군의관들도 있었다. 제일 다수를 점하는 것은 통계표에 1952년 한 해에만 20만 4천 회가 넘는 것으로 기록된 피위안자들, 즉 한국 군인들이다. 식민주의, 전쟁,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이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된 후 어떤 행동을 하면 좋을지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10. 기억전쟁 : 가해자는 어떻게 희생자가 되었는가 임지현 지음, 휴머니스트, 2019. 추천 편집위원 : 조경희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면 기억은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이다." 공식적 기록과 문서자료를 바탕으로 한 역사에 대해 기억은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재현이라는 비공식적 지위를 부여받아 왔다. 증언의 시대가 열린 지 30년이 지난 현재도 우리는 '부정의 실증주의'라 할 수 있는 부정론의 국제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을 산다. 이 현실에 대해 저자는 기억과 증언의 역사적 맥락을 살피고 그 현실적 함의와 비판적 가능성을 제시한다. 폴란드 근현대사를 전공한 역사학자 임지현은 그동안 유럽의 지성사를 경유하고 한국의 민족주의나 파시즘을 둘러싼 내적 성찰의 지평을 열어왔다. 자신을 '기억 활동가(memory activist)'로 정체화하는 그의 관심은 나치 홀로코스트에서 출발하여 아시아에서의 일본군'위안부' 피해, 분단국가 한국의 민주화운동, 나아가 20세기에 전 세계가 겪었던 국가폭력과 제노사이드로까지 확장된다. 4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다루는 고통의 폭은 근대 문명이 인간에 가한 폭력이 얼마나 전 지구적으로 얽혀있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기억의 회색지대를 묻는 아슬아슬하고도 첨예한 문제의식은 한국에서 현재진행형인 기억과 증언을 둘러싼 혼란을 생각하는 데도 매우 시사적이다. 특정 역사적 사건에 관한 관심만이 아니라 이 책은 피해자와 가해자, 방관자와 공범자, 경계와 기억, 양심과 죄책감 등의 중첩되는 관계를 드러냄으로써 우리에게 역사와 기억을 마주하는 윤리의 차원을 환기시킨다. * 위의 책들 중 일부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자료센터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코로나19로 인해 개관이 연기됨에 따라 현재는 자료센터를 이용하실 수 없으며, 향후 자료센터를 개관하는대로 소식을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카이브814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