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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좌담 밝은 미래: 20대의 감각과 생각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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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기 일본군‘위안소’ 성노예 제도가 전쟁범죄로 공론화된 지 30여 년이 지났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생존자 증언과 법정 투쟁, 한일 외교 공방을 거쳐 역사 대중화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 사회의 20대 대학생들에게 이 문제는 어떻게 와 닿을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서울 소재 대학생 6명에게 넓은 의미에서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나눠달라고 요청하였다. 수요시위와 소녀상 지킴이, SNS 해시태그로 운동하는 세대, 피해자 증언을 직접 들은 적이 없이 영화와 소설로 ‘할머니’를 만난 사람들, 나비 배지와 추모 팔찌를 사고 모금과 기부를 하는 기념 산업의 자연스러운 소비자. 사회적 기억과 기념의 미래 주역으로 종종 호명되는 ‘청년’은 집합적 주체로 존재하는가? 그들을 만나보자. -좌담 일시: 2023년 8월 16일 -사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 이헌미, 황진경, 정나라 -대담: 강대현, 김도경, 김민정, 김희연, 심현희, 이혜주 -정리: 퍼플레이컴퍼니 Q. 정부 등록 피해자가 이제 아홉 분 생존해 계십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남은 과제는 무엇일까요?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하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이혜주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피해자들이 만족할 만한 사과와 보상, 미래에 대한 약속이 이뤄져야 합니다. 앞으로 이런 피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국가적 차원의 합의가 필요해요. 또 이 문제에 꾸준히 관심을 갖는 것이 개인이 할 수 있는 기본이자 중요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희연 국가적인 대응이 미흡한 상황이잖아요. ‘일본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고 한국 내에서 알아서 하자’는 분위기가 강한 것 같아요. 피해자분들이 돌아가시길 기다리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고요. 그래서 해결까지는 아직 멀었습니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로는 이 문제를 공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 관련 프로젝트에 참여해보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강대현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죠. 지금 한일 정부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상황이라 어느 쪽에서도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아요. 생존자분들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일부러 다루지 않는다는 생각도 듭니다. 김민정 피해자분들이 생존해 계실 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더 왕성하게 논의하지 않고 넘어간다면, 그것은 우리 세대가 역사적 소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존자분들과 대화하며 보다 가깝고 생생하게 들여다볼 기회가 있는데 저버리게 되는 거잖아요. 또 ‘위안부’ 문제에 대해선 완전한 해결이란 없다는 인식이 먼저 합의되어야 합니다. 일본이 사과와 보상을 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모두 끝나는 것이 아니잖아요.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의견 나눔의 장을 통해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계속해서 배워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김도경 피해자가 인정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위안부’ 문제가 해결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희에게 남은 과제는 정치·외교적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고 일본의 진정한 사과와 반성을 이끌어내는 것이에요. 개인으로서는 계속해서 이 문제를 기억하고 이야기해야 하고요. 심현희 피해자들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배상을 비롯해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 문제를 통해 여성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해요. Q.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대학 내에서 미투운동, 낙태죄 폐지 등 다양한 여성운동을 비롯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체감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앞으로 청년들이 계속해서 페미니즘과 ‘위안부’ 이슈에 대한 관심을 이어갈 수 있도록 대학에서 어떤 배움의 장들이 마련되어야 할까요? 심현희 현대의 여성운동과 ‘위안부’ 문제는 성평등과 인권을 주제로 다루는 중요한 사안입니다. 대학에서는 관련 교육과 논의의 장을 제공해 학생들이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해야 해요. 강대현 어느 순간부터 대학에서 사회 운동이나 페미니즘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 같아요. 학생과 청년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공부할 수 있는 논의의 장이 더 많이 마련됐으면 합니다. 김도경 제가 아는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온라인 커뮤니티를 보면 페미니즘이 금기시되고 일부는 부정적으로 보더라고요. 사회적으로 왜곡된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라도 대학에서 배움의 장이 많아져야 합니다. 김민정 논의가 건강하게 지속되려면 페미니즘의 올바른 개념과 정의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강의가 확충되어야 합니다. 백래시 현상을 접할 때마다 암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 과도기의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사회적으로 진일보하지 않을까 기대하며 버텨내려고 합니다. 이혜주 낙태죄 폐지 등 페미니즘 논의에 늘 관심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최근에 백래시로 인해 미국에서 낙태죄가 부활했고, 우리나라도 낙태죄 폐지 관련 법안이 방치되다시피 한 상황이잖아요. 페미니스트라면 우울감과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죠. 그런데 학교 여성학 강의에서 김현경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어요. “우울하고 불안한 이 시간이 절대적일 것 같겠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이런 시간을 몇 번이나 겪었습니다만 결국 백래시 이전보다 나아졌습니다.” 덕분에 큰 용기를 얻었고, 대학에 여성학 수업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부장적인 틀 안에서 남성의 관점으로만 바라봤던 사안을 여성의 눈으로 다시 보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리거든요. 모든 학문에 여성학적 관점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김희연 한 남자 교수가 학생을 추행해서 대학교 온라인 커뮤니티인 ‘에브리타임’에서 공론화된 적이 있어요. 그 후 그 교수의 연구실에 비판의 메모지가 가득 붙었고요. 미투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작년부터 백래시가 심해졌다고 느끼는데 그래서 그런지 올해 초 학교 내에 페미니즘 동아리가 많이 생겼어요. 저도 새로 페미니즘 동아리에 들어갔는데 거창하게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같이 책을 읽거나 생각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란 나에게 00이다”라는 문장을 완성시킨다면 괄호 안에 어떤 단어를 넣으시겠어요? 이혜주 ‘붉은색’이라고 넣어보고 싶어요. 빨간색을 떠올리면 마음이 불안하기도 하지만, 운동이나 혁명에 흔히 사용되는 만큼 에너지를 갖고 있는 색이죠.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바라볼 때 마음이 편하지는 않지만 그 문제가 저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될 때도 있습니다. 김희연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저의 ‘평생의 연구 과제’입니다.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이고, 어떤 방식으로든 연대하고 싶어요. 역사학도로서 가져가야 할 큰 숙제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도경 ‘숙제’인 것 같아요. 때로는 하기 싫고 미루고 싶지만 숙제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성장하고 발전하잖아요. 이 문제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고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돼 좌절감도 들지만, 그럼에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최대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심현희 저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사명’입니다. 역사적으로 희생된 피해자분들의 고통과 그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이뤄지기를 바라며 연대하겠습니다. 강대현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가진 본질과 특수성을 객관적으로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객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김민정 저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기억’입니다. 개인적으로 어릴 때부터 늘 기억 한편에 자리하고 있던 것이기도 하고, 인류사에도 중대하게 기억될, 특수하면서도 만연한 여성 대상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인류의 마지막 남은 식민지가 있다면 그것은 여성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인권 유린이 전 지구상에서 근절될 때까지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잊혀서는 안 되며 계속해서 새롭게 정의되는 기억이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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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자료해제 기록물로 보는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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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여성법정 20주년 특집] 1부 - 20년을 되돌아보다 1. [논평] 정의를 위해 앞장선 이름 없는 영웅, '위안부' 피해자들 2. [자료해제] 기록물로 보는 2000년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3. [에세이]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으로부터 20년을 되돌아보다 4. [에세이] NHK의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상) 5. [에세이] NHK의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하) 기록물로 보는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Women's 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 on the Trial of Japan's Military Sexual Slavery in 2000, 이하 2000년 여성법정)이 2000년 12월 7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2000년 12월 12일까지, 6일에 걸쳐 일본 도쿄 구단회관에서 개최되었다. 2000년 여성법정 판사단은 2000년 12월 8일~10일 사흘간 이루어진 심리를 바탕으로 2000년 12월 12일, 일본군'위안부' 동원의 강제성과 이들에게 가해진 폭력을 인정하고, 히로히토 천황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예비판결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1년 뒤인 2001년 12월 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아시아 피해국들이 공동 기소한 히로히토 천황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일본 정부에 진실 규명과 사죄, 피해자에 대한 배상 등을 권고한 최종판결이 내려졌다. 2000년 여성법정이 민간법정이었기에 이 판결은 법적 강제력을 가지지는 않지만, 국제연대를 통해 시민의 힘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법정에 올리고, 여성 인권과 평화의 관점에서 전시 하에서 발생한 여성에 대한 폭력을 단죄할 필요성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그 상징적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아카이브 814'에서는 2000년 여성법정과 관련하여 국제검사단의 공동기소장을 비롯해 남북한, 중국, 필리핀, 대만, 말레이시아, 네덜란드, 인도네시아, 동티모르의 기소장, 예비판결과 최종판결 요약문, 본 법정의 요약 녹취록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웹진 <결>에서는 2000년 여성법정 20주년을 맞아, '아카이브814'에 등록된 2000년 여성법정 관련 기록물을 법정이 진행된 시간순으로 정리하여 소개한다. 2000년 여성법정 첫째 날 2000년 12월 8일 (금), 일본 도쿄 구단회관 프로그램 진행 순서 - 개정인사(국제실행위원회) - 개정 선언(맥도날드 수석 판사) - 모두 진술(패트리샤 샐러즈 수석 검사) - 법정참고인(아미카스 큐리에), 진술(이마무라 쓰구오 변호사) - 남북한 공동 기소 및 심리 - 전문가 증언 : 일본군의 구조(하야시 히로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인도주의에 반하는 범죄로, 강간과 집단 강간죄에 기반하여 기소한다. 노예제는 누군가를 소유, 운송하거나 성적, 정신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말한다. 1945년으로 돌아간다고 가정해도 노예제는 여전히 범죄로 성립한다. 다양한 증거를 볼 때 아시아 지역에 위안소는 일상화되어 있었고, 장군들의 역할 중 하나가 점령지인 한국, 대만 등지로부터 여성을 모아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 여성들을 정신적인 죽음으로 몰아갔고 결국 고립시켰다. 이러한 고문과 조직 체계에 입각하여 성노예제를 행했던 당시 일본 천황 히로히토를 피고로 고발한다. 일본 헌장은 인간의 존엄성을 근본적으로 존중하고 있다. 수십 년간 일본이 '위안부'문제를 알고 있으면서 방관하고 사죄와 배상을 하지 않는 것은 일본 헌장의 위법이다. - 패트리샤 샐러즈 수석 검사 기소 요지 중. (녹취록 발췌) 2000년 여성법정의 첫째 날인 12월 8일에는 법정의 개회 선언, 패트리샤 샐러즈(Patricia Viseur-Sellers) 수석검사의 모두 진술, 변호인 측의 변론, 남북한 공동검사단의 기소와 발언이 이어졌다. 패트리샤 샐러즈(Patricia Viseur-Sellers) 수석검사와 검사단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인도주의에 반하는 범죄로 규정하고, 히로히토 천황을 비롯해 마쓰이 이와네, 하타 슌로쿠, 데라우치 히사이치, 이타가키 세이시로, 도조 히데키, 우메즈 요시지로, 고바야시 세조, 안도 리키치, 야마시타 도모유키를 기소하였다. 그리고 일본 정부에 일본군'위안부' 관계 서류를 공개할 것, 피해자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할 것, 사후 배상 및 보상할 것 등을 요구했다. 남북한 공동검사단 역시 역사적 자료와 생존자들의 증언 등을 근거로 히로히토 천황 등을 인도에 반한 범죄로 기소하였다. 그리고 위안소 운영 과정에서 발생한 범죄사실, 국제법 위반 사실, 이에 대한 피고의 형사 책임을 구체적으로 정리해 제시하였다. 남북한공동기소단의 증언자로 김복동(비디오 증언), 김군자, 박영심(비디오 증언), 하상숙, 김영숙, 문필기, 김복동, 안법순, 최갑순(비디오 증언), 유순옥(비디오 증언), 정옥순(비디오 증언)이 참여했다. 2000년 여성법정 첫째 날의 모습과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에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아래 녹취록 요약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검사단의 논고와 남북한 공동기소장 전문은 전쟁 당시 일본의 영토 확장 정책, 피고인들의 지위, 개인별 피의 사실, 피고인에 적용 가능한 법 등을 전체적으로 고찰하고 있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파악하는데 매우 유용한 자료다. 관련 기록물 1.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녹취록 요약(2000년 12월 8일) 관련 기록물 2.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검사단 논고 관련 기록물 3.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남북한 공동기소장 2000년 여성법정 둘째 날 2000년 12월 9일 (토), 일본 도쿄 구단회관 프로그램 진행 순서 - 전문가 증언 : 천황제도(야마다 아키라) - 중국 검사단 기소 및 심리 - 필리핀 검사단 기소 및 심리 - 전문가 증언 : '위안부' 제도(요시미 요시아키) - 대만 검사단 기소 및 심리 전쟁 중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잔학행위를 전 히로히토 천황이 알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 외무대신인 히로타 고키, 이시 이타로와 측근 도쿠가와 요시히도가 알고 있었으며, 시종이었던 도쿠가와 요시히도가 알고 있었으므로 히로히토 천황이 이를 모를 리가 없다. 일본군 고관들의 잔학행위 속에 강간이 포함되어 있다. (...) 히로히토 천황의 동생 다카마 공의 일기에 동생 미카사 공이 육군의 잔학행위에 너무 놀라 천황에게 말했다고 쓰여 있다. 또한 성노예제에 대하여 천황의 측근인 육군, 해군대신, 참모총장 등 군부 최고 간부들이 알고 있었다. 그들은 히로히토 천황의 신임을 받아 임명된 사람으로써 비밀사항에 관한 말을 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다. - 야마다 아키라의 전문가 증언 중 (녹취록 발췌) 법정 둘째 날인 12월 9일에는 천황의 책임에 관해 야마다 아키라 메이지대 교수가 전문가 증언을 했고, 이어 중국 검사단, 필리핀 검사단, 대만 검사단의 기소장 제출과 피해자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중국의 '위안부' 피해자를 대표하여 완아이화, 위안주린, 양민쩐이 증언자로 참여했다. 중국 검사단은 기소장에서 일본군에 의한 중국 점령 과정, 중국 내 위안소의 설치 과정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에 설치되었던 위안소에 관한 내용을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필리핀 검사단은 전쟁 중 인도주의에 반한 범죄를 저지른 데에 대한 책임을 물어 히로히토 천황과 필리핀에 주둔한 일본군 사령관이었던 홈마 마사하루 등 6명을 고발하였다. 기소장에서는 피해자들의 증언, '대동아 국제 전쟁 법정(IMTFE)'과 미군의 태평양 전쟁 범죄 사무실의 자료 등을 토대로 일본군의 필리핀 침략과 점령 사실, 일본군'위안부'의 동원 과정, 동원된 여성이 겪어야 했던 처우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대만 검사단은 일본의 대만 점령과 식민 지배 과정에서 일본군'위안부'를 동원한 데에 대한 책임을 물어 히로히토 천황을 비롯해 1936년~1945년 사이에 대만 총독을 지냈던 고바야시 세조, 하세가와 기요시, 안도 리키치를 인도에 반한 범죄로 고발하였다. 대만 검사단은 기소장에서 일본의 대만 점령, 일본군'위안부'로 동원된 대만 여성 등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대우 등을 구체적으로 기술했으며, 또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전쟁 중 발생한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식민지배 상황에서 발생한 것임을 명확히 했다. 중국, 필리핀, 대만의 기소인들 또한 공통적으로 일본 정부에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동시에 피해자들에게 보상함으로써 국가 책임의 의무를 다할 것을 요구하였다. 관련 기록물 1.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녹취록 요약(2000년 12월 9일) 관련 기록물 2.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중국 기소장 관련 기록물 3.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필리핀 기소장 관련 기록물 4.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대만 기소장 2000년 여성법정 셋째 날 2000년 12월 10일 (일), 일본 도쿄 구단회관 프로그램 진행 순서 - 말레이시아 검사단 기소 및 심리 - 네덜란드 검사단 기소 및 심리 - 인도네시아 검사단 기소 및 심리 - 전문가 증언 : 트라우마(레파 무라제노비스치) - 일본 검사단 : 전후 일본 정부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대응(가와구치 가즈코) - 전문가 증언 : 국가책임(프리츠 칼스호벤) - 동티모르 검사단 기소 및 심리 - 일본 검사단 기소 및 심리 - 전문가 증언 : 일본군'위안부'(후지메 유키) - 일본군 병사 증언 : 전(前) 일본군인 가네코 야스지, 스즈키 요시오 - 참고인 진술 : 스즈키 이소미 변호사, 아이타니 쿠니오 변호사 - 최종논고 며칠 동안 여성법정 재판을 열었다. 이 재판정에서 용기를 보여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감동은 컸다. 1933년 일본 정부가 문서로 성노예제에 대한 언급을 했다. 가해자의 증언에서도 강간행위가 처벌 대상이 아니었으며 군 당국에 의해서 장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것들은 헤이그 조약을 위반한 사항이다. 일본 정부가 의도적으로 실시한 것으로 국가 책임이다. 여러 전문가의 의견대로 군 차원의 성노예제 운영 계획이 기본협정 때문에 소멸할 수 없다. 개개인 피해자는 청구권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계속 자신들의 범죄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사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판사 여러분의 정당한 판결이 필요하다. - 우스티나 돌고풀 국제검사의 최종논고 발언 중 (녹취록 발췌) 본 법정 셋째 날인 12월 10일 오전에는 말레이시아 검사단, 네덜란드 검사단, 인도네시아 검사단의 기소 및 심리와 피해자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말레이시아 검사단은 말레이시아 여성들을 일본군'위안부'로 강제 동원한 책임을 물어 일본 천황, 일본 정부, 육군 의장 데라우치 히사이치, 야마시타 도모유키, 이타가키 세시로 등 일본군 간부들, 전쟁 당시 싱가포르 시장과 10개 지역의 지사들, 마담 차우 추이와 남편 아용 등과 위안소 관계자들을 고발하였다. 네덜란드 검사단은 성노예화와 고문, 그리고 학대에 의한 고문을 저지른 혐의로 전쟁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현재의 인도네시아)를 점령했던 일본군 사령관을 기소하였다. 인도네시아 검사단은 여성들을 일본군'위안부'로 동원하는 등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데 대한 책임을 물어 히로히토 천황을 비롯해 일본 정부 및 군부의 지도자 9명을 고발하는 한편, 일본 정부에 생존자와 희생자의 후손에게 배상금과 보상금을 지급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 역시 명시하였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에 대한 증언자로 얀 러바현(네덜란드), 이브 수하나(인도네시아), 마르디엠(인도네시아)이 참석하였다. 12월 10일 오후에는 트라우마에 대한 전문가 증언, 일본군'위안부' 제도에 관한 전문가 증언, 일본의 국가책임에 관한 전문가 증언, 동티모르 검사단의 심리, 전(前) 일본군 병사의 증언, 최종논고 등이 이루어졌다. 동티모르 검사단은 동티모르 여성을 일본군'위안부'로 강제동원하고, 이들을 감금한 가운데 성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을 저지른 책임을 물어 일본 정부를 전쟁범죄 및 인도에 반한 죄로 고발하였다. 동티모르 검사단의 증언자로 마르타(비디오 증언)와 에스메랄다가 참여했다. 동티모르 검사단과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전문가 증언 뒤에는 전 일본 군인인 가네코 야스지와 스즈키 요시오의 가해자 증언이 이어졌다. 이들은 당시 일본 군인으로서 군인을 위한 '위안부'가 실제로 존재했음을 증언했다. 이들의 자세한 증언 내용은 아래 녹취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검사단이 최종논고를 하였다. 우스티나 돌고풀 국제검사는 "재판정에서 용기를 보여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에 대한 감동을 이야기하면서 일본 정부에 피해자들에게 사죄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판사단의 정당한 판결이 필요함을 피력했다. 위안소 시스템과 피고인들의 범죄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검사단의 공동기소장은 대만, 한국, 중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동티모르, 말레이시아 등 피해국의 기소장에 기초하여 작성되었다. 관련 기록물 1.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녹취록 요약(2000년 12월 10일-1) 관련 기록물 2.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녹취록 요약(2000년 12월 10일-2) 관련 기록물 3.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말레이시아 기소장 관련 기록물 4.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네덜란드 기소장 관련 기록물 5.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인도네시아 기소장 관련 기록물 6.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동티모르 기소장 관련 기록물 7.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검사단 공동기소장 2000년 여성법정 넷째 날 2000년 12월 11일 (월), 일본 도쿄 구단회관 프로그램 진행 순서 - 현대 무력 분쟁 하에서 발생한 여성 대상 성폭력에 관한 국제공청회 2000년 12월 11일에는 "현대 무력 분쟁 하에서 발생한 여성 대상 성폭력"을 주제로 국제공청회가 개최되었다. 국제공청회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현재성을 부각하고 전 세계 여성들 간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2000년 여성법정 초기 기획단계부터 논의되었으며, 그 결과 분쟁 하에서의 여성 인권과 관련된 문제들이 함께 논의되었다. 본 국제공청회에서는 베트남 전쟁, 버마의 군부독재, 과테말라, 르완다, 동티모르의 무력분쟁과 같은 상황에서 폭력을 경험한 피해자들이 증언하였고,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해결이 분쟁 하 여성 인권 문제 해결을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관련 기록물 1.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녹취록 요약(2000년 12월 11일) 2000년 여성법정 다섯째 날, 예비 판결의 날 2000년 12월 12일(일), 일본 도쿄 일본청년관 프로그램 진행 순서 - 국제실행위원회와 국제검사단의 요구 - 예비 판결 법정은 제출된 증거에 기초하여 검사단이 피고인 천황 히로히토에 대해 입증한 것을 인정하며, 천황 히로히토는 공통기소장 중 인도에 반한 죄의 소인(訴因)1과 소인2인 강간과 성노예제에 대한 책임으로 유죄로 인정한다. 또한 인도에 반한 죄의 소인3의 강간에 대해서도 유죄이다. 나아가서 판사는 일본 정부가 '법정헌장' 제4조에 기초하여 '위안소' 제도의 설치와 운영에 대해 국가 책임을 져야한다고 판정한다. - 2000년 여성법정 도쿄판결문 39항 법정 마지막 날인 12월 12일에 예비 판결이 발표되었다. 2000년 여성법정의 판사로 구(舊) 유고 국제형사재판소의 수석판사이기도 했던 가브리엘 커크 맥도날드(Gabrelle Kirk McDonald), 아르헨티나의 형사법 판사이자 당시 국제여성법률가협회 회장이었던 카르멘 마리아 알히바이(Carmen Maria Argibay), 여성 국제법학자인 크리스틴 친킨(Cristine Chinkin)과 케냐의 인권변호사 윌리 무퉁가(Willy Mutunga)가 참여하였다. 2000년 여성법정의 판사단은 일본군'위안부' 동원의 강제성과 이들에게 가해진 폭력 등을 명확히 인정하고, 히로히토 천황에게 유죄를 선언했다. 또한 일본 정부가 위안소의 설치와 운영에 대해 국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관련 기록물 1.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녹취록(2000년 12월 12일) 관련 기록물 2.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판결요약문, 2000년 도쿄 2000년 여성법정 최종판결 2001년 12월 4일(화), 네덜란드 헤이그 뤼켄트 단스 극장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에게 저질러진 범죄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저질러진 범죄 중 가장 알려지지 않고 보상받지 못한 범죄로 남아있다. 지금까지 희생자들을 위한 박물관도, 알려지지 않은 '위안부' 여성들을 위한 무덤도,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도, 일본군 성노예와 심각한 성범죄와 잔혹행위에 대한 판결도 없었다. 따라서 본 재판정은 이 판결을 통해 일본군 성노예 제도하에 희생당한 여성들을 기리려고 한다. 판사단은 고생을 극복하고 살아남아, 산산이 부서진 삶을 재건하고, 공포와 수치를 이겨 내고 세계를 향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 생존자들의 강건함과 위엄을 인지한다. 정의를 위해 앞으로 나선 많은 여성들은 이름없는 영웅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에 새겨진 이름은, 고통받은 여성들이 아니었다. 고작 범죄를 저지르거나 그들을 기소한 남성이었다. 이 판결문은 증언대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최소한 4일간은 잘못된 일을 단두대에 올리고 진실을 왕좌에 앉힌 생존자들의 이름을 병기하는 것이다. - 2001년 헤이그 판결 1094항 2000년 여성법정의 최종판결은 1년 뒤인 2001년 12월 4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뤼켄트 단스(Lucent Dans) 극장에서 이루어졌다. 최종판결에서는 2000년 12월 12일 일본 도쿄에서 히로히토 천황의 유죄와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을 선고했던 예비 판결에 뒤이어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성노예적 성격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히로히토 천황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또한 일본 정부 역시 국가 책임을 가진다는 사실 역시 명시하고, 일본 정부에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운영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하며, 진상규명을 위한 기구를 설치하고, 박물관과 도서관의 설립을 통해 피해자와 생존자를 인정하며, 피해자에게 배상할 것 등을 권고했다. 관련 기록물 1.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구두판결 요약문, 2001년 헤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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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인터뷰 '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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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같은 이슈를 이야기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지금과 같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뉴스들이 넘쳐나고 정치적으로 쟁점화된 상황에서는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온전한 해결을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컴필레이션 앨범 <이야기해주세요 – 세 번째 노래들>에 참여한 뮤지션들이다. 이들은 어떤 생각으로 ‘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할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말과 글로도 어려운 이야기를 어떻게 음악으로 풀어냈을까. <이야기해주세요> 세 번째 앨범에 참여한 뮤지션들을 만나 ‘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 1부 - 김목인, 백정현, 김율희, 한받 2부 - 이정아, 최고은, 황푸하, 김해원 이정아 Three Hundred Thousand Flowers Q. 참여곡 <Three Hundred Thousand Flowers>를 통해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나요? 안녕하세요, 저는 싱어송라이터 이정아입니다. <그리고 싶은 것>(권효, 2013)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어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심달연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한·중·일 작가들이 각자 생각하는 ‘평화’의 이미지를 그려 『꽃할머니』(권윤덕, 사계절, 2010)라는 동화책을 만드는 과정이 담겨있는데요, 그 영화와 책을 바탕으로 노래를 쓰게 되었습니다. 다큐멘터리에서 보면, 할머님께서 유난히 꽃을 좋아하셔서 책이나 앨범 사이에 꽃을 꽂아 놓으시고 압화(꽃누르미) 작업을 하시더라고요. 곡 제목은 당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굉장히 많았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가져왔습니다. 아무리 에둘러 표현해도 고통스럽고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되도록 쉬운 멜로디와 단순한 가사로 표현하여 더욱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게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곡을 써보았습니다. 그리고 일상을 살아가다가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겪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어요. 나물 캐러 갔다가 끌려가신 분도 계시잖아요. 제가 조금만 일찍 태어났다면 장 보러 나갔다가 끌려갈 수도 있었던 거죠. 그런 사실을 일상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게 하고 싶었어요. 나였을 수도 있고, 너였을 수도 있는, 모두의 일처럼 느껴지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Q. 곡을 만들면서 느낀 점과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요? 일단은 접근 자체가 조심스러웠습니다. 작업을 위해 공부하면서 힘들기도 했죠. 특히 피해자들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정말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저럴 수 있을까?’ 싶어서 끝까지 다 못 보기도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려면 우리가 계속 생각하고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앞으로도 비슷한 주제의 작업이 있다면 참여하려고 해요. 필요한 일 같아서요. */ It was an ordinary dayAnd the sun was shining On the meadow and the hills And on the trees But as rain fell on the ground A dark dark shadow was coming around And rootlessly they torn the flowers Oh as cruel as they could be They were just starting to bloom At the edge of sixteen They were just starting to bloom At the edge of sixteen 35 whole years Then the shadow disappeared But the flowers oh our flowers Were left bleeding and abused How can someone do these things And say it isn't true? How can someone do these things And just go by as if they're through? But they couldn't take away The scent of the flowers Spreading through And through here in our hearts It was never your fault Please don't be afraid And you'll never fade away Cause you're in our hearts And you'll never fade away Cause you're in our hearts 최고은 악순환 Q. <악순환>은 어떻게 시작된 곡인가요? 저는 싱어송라이터 최고은이라고 합니다. <이야기해주세요> 3집에 <악순환>이라는 곡으로 참여했습니다. 이 노래는 최승자 시인의 시집 『즐거운 일기』(문학과지성사, 1984)에 수록된 「악순환」이라는 시와 제목이 같아요. 이 시는 “근본적으로 세계는 나에게 공포였다”라는 구절로 시작하거든요. 이게 <이야기해주세요> 작업과 맞아떨어진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시의 구절을 토대로 작업을 시작했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제 삶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렸을 때 한이 많은 남도의 판소리를 배웠는데, 의도한 정서를 담으려니 자연스레 국악적인 표현이 나오더라고요. <악순환>은 그런 한국적인 풍경을 느낄 수 있는 곡입니다. 올해는 제가 데뷔한 지 10년이 되는 해예요. 10년 전에는 노래를 만들면 생각과 표현 사이에 괴리가 컸어요. 음악을 할수록 그 간극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기쁨이 있어요. 제가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됐을 때 <악순환>을 작업하게 됐죠. 2019년 겨울에 한 달 반 정도 유럽 투어 공연을 했어요. 30여 번의 공연에서 매번 <악순환>을 불렀습니다. 관객들이 가사를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겠지만 ‘한’을 느꼈는지, 공연 때마다 <악순환>에서는 박수 소리가 길게 나왔어요. 곡에 대한 상반된 피드백도 재미있었어요. 기획팀 서상혁 님은 처음 이 곡을 듣고 내재된 ‘흥’을 느끼셨대요. 반대로 송은지 님은 공포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Q. <이야기해주세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소감은 어땠나요? 참여 제안을 받았을 때 굉장히 반갑고 좋았어요. 음악으로 소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지점이 만들어진다는 게 기뻤거든요. 그래서 곡이 술술 나올 줄 알았는데, 주제를 담으려다 보니 스스로 검열을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굉장히 조심스러웠어요. <이야기해주세요> 시리즈를 응원하고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참여했는데, 그러려면 ‘사람들이 더 쉽게 들을 수 있는 작업을 해야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도 최소한 저에게는 좀 더 소신을 지키는 방향으로 작업했습니다. <이야기해주세요>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번에 많은 뮤지션이 정말 좋은 음악들로 참여했는데, 기획팀이 부디 지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웃음) 네 번째, 다섯 번째 이야기가 계속되고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됐으면 좋겠습니다. 근본적으로 세계는 나에게 공포였다 시간이 가도 시간이 온다 어제가 가도 어제로 온다 나는 나를 사용하면서 하루하루 생산한다 일 년을 생산한다 인생을 생산한다 황푸하, 김해원 나의 고향 Q. <나의 고향>이라는 곡에 담긴 메시지를 소개해주세요. 김해원 : 안녕하세요, 김해원이라고 합니다. ‘김사월X김해원’이라는 포크 팀으로 활동해왔습니다. 지금은 솔로 활동과 영화음악을 하고 있습니다. <나의 고향>을 황푸하 씨와 함께 만들었어요. 저는 편곡과 프로그래밍, 믹싱 등을 맡았습니다. 황푸하 : 저도 포크 음악을 하는 황푸하라고 합니다. <나의 고향>에서 가사와 멜로디를 만들었습니다. <이야기해주세요> 앨범 안에서 이 곡이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할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고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조심스럽기도 했고요. 다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꺼내 놓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은유적으로 나무들이 우리에게 계속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는 가사를 썼습니다. 지금도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들으려 하지 않거나 곡해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이런 소통의 부재와 답답함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김해원 : 저희가 함께 작업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에요. 어떻게 나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작업했죠.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이 주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처음에는 아주 모호하기도 했습니다. 황푸하 : ‘고향’이라는 키워드 안에는 잃어버린 곳을 다시 꿈꾸는 판타지적 요소가 들어가 있어요. 처음 곡을 구상할 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뿐만 아니라 전쟁이나 재난의 피해자들이 고향을 잃어버린 장면을 떠올렸어요. 김해원 : 황푸하 씨가 처음 가사를 보여주셨을 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사건을 겪기 전에 살던 공간이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해봤어요. 어릴 적 배웠던 동요나 근대에 만들어진 신민요 안에 담겨있는 향수의 정서 같은 걸 계속 떠올리게 되더라고요. Q. <이야기해주세요>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느낀 점은 무엇인가요? 김해원 : 앨범에 수록된 곡들이 이 주제에 대한 일종의 음악적인 연구 결과라고 생각해요. 곡을 만들기 위해서는 고증도 필요하고, 해당 주제에 대한 사유의 결과를 감정적으로 표현하기도 해야 하죠. 저도 그 어려운 과정을 겪었죠. 황푸하 : 예전에 <세월호 미수습자를 찾기 위한 프로젝트 ‘집에 가자’> 앨범에서 사회 이슈를 음악을 통해 저의 이야기로 풀어가는 작업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 작업을 하면서 나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윤리적 책임감을 가지고 음악 작업을 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치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도 했고요. 이런 작업을 통해 책임감이 더 생기는 것 같아요. 김해원 : 현재를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고민을 항상 하고 있는데, 사실 제 자신이 아닌 주변과 사회 구성원의 이야기를 소재로 음악 작업하는 것을 어려워했어요. 그런데 이번 기회를 통해 계속 음악으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또 이 주제에 대해서 더 찾아보고 공부하게 되었어요. 김해원 : 처음에는 앨범을 정말 많은 분이 들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컸어요. 하지만 이 주제에 대해서 일종의 작은 연구를 했다는 것 자체에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황푸하 : 최근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뉴스가 쏟아지고 여론이 다양하게 형성되는 과정에서,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음악이 ‘이야기’의 근본적인 부분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음악은 정치적인 논쟁이나 여론몰이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에서 끌어낸 근본적인 무언가를 담아낼 수 있습니다. 이 앨범을 들으시면서 음악에서 언어보다 더 깊이 있는 무언가를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 우리 동네 골목길 나무들의 이야기 그동안 살아오며 많은 걸 봐왔었다 우리 동네 골목길 나무들의 이야기 그동안 살아오며 많은 걸 봐왔었다 바람이 유독 많은 날 더 크게 말하잖아 누군가가 살았었다 꽃이 피는 언덕의 봄 무심하게 아름다운 파란 하늘 그리운 나의 고향 내가 겪은 일들을 수없이 말했었어 많은 사람들에게 수없이 말했었어 내가 겪은 일들을 수없이 말했었어 많은 사람들에게 수없이 말했었어 빗방울 떨어지는 날 더 크게 말하잖아 누군가가 살았었다 꽃이 피는 언덕의 봄 무심하게 아름다운 파란 하늘 그 아래서 살고 싶다 살고 싶다 그리운 나의 고향 Credit 기획/진행/인터뷰/글 : 현승인 편집 : 금혜지 사진 : 팝콘(popcon) 일시 : 2020년 6월 10일 수요일 장소 : 서울시 마포구 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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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좌담 일본군‘위안부’ 투쟁 영역의 확장 〈2부〉 - 부딪치는 기억들: 채록·발굴·선택·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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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운동은 제국과 식민지, 남성과 여성, 국가와 인민 사이의 차별적 권력 구조에 맞서 소수자와 인간, 여성의 몫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와 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청년좌담에서는 젊은 연구자이자 활동가인 이은진, 이재임, 최성용과 만나 이들의 삶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어떤 의미와 동인이 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동세대 신진 연구자들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원들과의 문답을 통해, 기지촌 여성들의 생애 구술 채록, ‘피해’와 ‘피해자’를 둘러싼 법적 담론 분석, 한국 사회의 ‘위안부’운동과 담론에 대한 탈식민적 비판 작업 등을 만나 보시죠. -좌담 일시: 2022년 9월 6일 -사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 이헌미, 황진경, 장소정, 이안 -대담: 이은진(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이재임(서울대학교 여성학협동과정), 최성용(성공회대학교 국제문화연구학과) -정리: 퍼플레이컴퍼니 Q. 증언을 비롯한 사료들이 현재도 (재)해석/발굴되고 있는데요. 수집과 해석 과정에서 연구자로서 무엇을 고민했는지 듣고 싶습니다. 이은진 평택 기지촌 여성 구술집 작업을 할 때 의식적으로 ‘증언’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어요. 일부러 ‘구술사’라는 말도 쓰지 않고, ‘구술집’이라는 말로 책을 소개했어요. 여기에 실린 말들을 증거처럼 뭔가를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보지 말고, 역사적 의미가 있어서 들을 가치가 있다고도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였죠.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집 4권(2000)의 전환이라고 한다면, 피해자들의 말을 어떤 정보값으로 다루기를 거부했다는 점인 것 같아요. 인식체계 자체를 전복하고 재구성하게 만드는 힘을 가짐으로써 그들의 말을 재위치시키고 전달하고자 한 작업물이었던 거죠. 기지촌 여성 구술집은 한 발 더 나아가, 사실과도 완전히 결별한 작업을 해보았습니다. 『영미 지니 윤선: 양공주, 민족의 딸, 국가 폭력 피해자를 넘어서』(이경빈·이은진·전민주, 서해문집, 2020)에는 피해자들이 완전히 상반된 사실을 진술하는 것도 그대로 실었어요. 사실을 밝히는 건 피해자가 아니라 연구자의 몫이자 공통의 과제라고 생각했거든요. 피해자에게 부정확한 말도, 틀린 말도 할 수 있는 발화 공간을 허락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다양하게 변주되는 상황들과 당시의 대화 분위기 등을 서술하는 데 중점을 뒀습니다. 그리고 연구자의 위치와 윤리를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듣고 말하는 행위의 정치적 의미를 어떻게 하면 잘 드러낼 수 있을까 고민했죠. 연구 윤리와 관련해서 쉽게 빠지는 함정이 있는데요. 가령, 피해자가 중요한 말을 했는데 그 말이 지금 당장은 도움이 안 된다고 가정해보죠. 사회가 승인해줄 법한 피해 서사와 맞지 않을 경우 그것을 공개했을 때 피해자가 오히려 불이익을 겪을 수도 있겠죠. 이런 상황에서 연구자들은 그 발언에서 어디까지 가릴 것인가 고민하게 돼요. 듣는 태도를 변화시키기 위해 작업을 시작했는데 ‘듣는 태도는 결국 바꾸지 못할 거야. 그렇다면 피해자의 말을 어디까지 편집해야 하지?’라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는 거죠. 이 작업은 그러지 않기 위해 끝까지 버텨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발언을 편집해서 없애버리는 대신, 독자가 스스로의 듣는 태도를 거듭 질문하게 하는 데에 집중했어요.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상황적인 요인도 있었어요. 이미 기지촌 여성들의 사법운동이 상당히 진척된 상태에서 저희가 구술작업을 시작했거든요. 법정 싸움은 당시의 법령들, 여러 공문서가 오간 정황 등 문서 자료들을 활용해서 이루어지고 있었고, 피해자는 직접 법정에서 증언할 필요가 없었죠. 그래서 저희의 구술집은 사법운동에 기여해야 한다는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웠고, 운동의 한계를 지적하고 당사자 말하기를 둘러싼 고민을 전진시킬 수 있었어요. 이재임 서울대 정진성 연구팀에 있을 때 ‘기록 기억: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다 듣지 못한 말들’이라는 전시를 한 적이 있어요. 총 4개 섹션으로 구성됐고, 그중 하나가 태평양 트럭섬에 다녀오신 이복순 할머니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할머니가 93년도에 정부에 신고할 때부터 “나는 도라쿠도에 다녀왔다”고 말씀하셨대요. ‘위안부’로 도라쿠도에 끌려갔었다고요. 그런데 그때는 도라쿠도를 지명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따뜻하고 바나나를 먹는 곳이었다니까 인도네시아였겠지’라고 단순하게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연합군이 트럭섬을 점령했을 때 귀환을 위해 짐을 챙기고 있는 이들을 찍은 사진에서 이복순 할머니와 닮은 얼굴을 연구팀이 발견했죠. 그때는 이미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라 대구에 있는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의 이인순 관장님께 확인을 부탁드렸고, 이복순 할머니라는 걸 확인했어요.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에 보관돼있던 트럭섬 귀환선 승선 명부에서 히토가와 후쿠준이라는 이름을 발견했죠. 할머니의 아버지 호적을 통해 이복순이라는 이름을 히토가와 후쿠준이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했다는 것까지 알게 됐습니다. 그제서야 할머니가 계속해서 말씀하셨던 ‘도라쿠’가 트럭의 일본식 발음이었구나, 할머니는 트럭섬에 다녀왔다는 말을 계속하셨던 거구나 알게 됐어요. 그걸 알아내기까지는 아주 많은 자료의 교차가 필요했습니다. 전시 포스터를 보면 ‘기록’과 ‘기억’ 사이에 글자들이 부서지고 있어요. 기억과 기록이 교차되면서 일본군‘위안부’에 대해 우리가 아직 다 듣지 못한 이야기들을 듣고자 하는 시도들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자료의 위계를 없애고 모든 자료를 함께 볼 때 풍성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증언이든 연합군 자료든 ‘생산 맥락’을 보는 것이 연구자의 기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최성용 증언과 관련하여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위치성에 대한 얘기예요. 예컨대 나이 든 어른들을 대하는 태도가 훈련된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하는 것은 굉장히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죠. 저는 후자에 속하는 편이라 연구팀과 함께 어르신들을 인터뷰할 때면 뒤에서 이야기를 듣는 편이었는데, 그 경험을 하며 위치성이란 무엇일까 고민했습니다. 이것은 생산 맥락에 대한 강조와도 연결되는 것이에요. 최근에 어떤 활동가분들을 인터뷰하면서 죄송했던 기억이 있어요. 더 좋은 질문들을 던지고 그들의 이야기들을 더 두껍게 들어야 했는데 그분들의 맥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그러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들어 괴로웠습니다. 정동이나 침묵, 감각, 미묘한 기류 등으로 증언을 읽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일종의 맥락을 두텁게 읽어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증언도 그렇지만 사료도 굉장히 구성적이잖아요. 예를 들어 포로심문보고서의 경우, 누가 포로심문을 하고 자료를 작성했느냐, 일본계 2세냐 혹은 조선인 광복군이냐 등 여러 상황에 따라 내용도 완전히 달라지고, 그렇게 생산된 자료가 어떻게 쓰이고 유통됐는지 등 맥락도 굉장히 다양하잖아요. 아주 구조적인 차원의 힘부터 개별 행위자들 수준의 목적과 욕망이 뒤얽히면서 사료라는 것이 만들어지죠. 공부하면서 이처럼 두터운 맥락들을 읽어낼 역량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계속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시대적인 성격 전환과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안부’문제에 대한 세대교체는 무엇을 뜻한다고 생각하는지, 또 연구하며 비슷한 고민을 한 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은진 ‘미래 세대’는 어느 분야에서든 비판하고 있는 용어예요. 문제를 현재의 것으로 바라보지 않고 청소년 등의 주체를 미성숙한 존재로 여기는 인식이 내포돼있기 때문이죠. 이것은 신진 연구자들을 호명할 때도 사용되는데, 미래 세대를 초청하는 동시에 타자화한다고 생각해요. 최성용 연구보다는 운동 차원의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한국의 진보적인 시민사회 운동의 상당수가 문재인 정부,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거치면서 제도 속으로 포섭되어 갔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운동이라는 게 제도화될 수밖에 없는데, 제도화된다는 건 일정한 기득권을 갖게 되는 것이죠. 마이너리티에서 특권을 가진 집단으로 위치가 변해가면서 ‘위안부’ 운동도 진영 담론의 논리 속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게 된 것 같아요. ‘위안부’ 운동과 문제를 어떻게 진영 담론으로부터 구출해낼 것이냐, 혹은 재맥락화와 재의미화를 할 것이냐, 이것은 연구 차원뿐만 아니라 운동 차원과도 겹쳐 있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그 지점에서는 세대교체라는 말이 맞아떨어지는 지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청년 세대 등과 관련하여 민주노총 내에서 작년부터 연구를 하고 있어요.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받아들여 노조 집행부 자리의 일정 부분을 청년에게 내줬는데, 정작 의사결정 권한은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청년세대와 기성세대 간에 의견이 대립되고, 세대 갈등이 작동하는 맥락들이 있었죠. 기성세대는 ‘요즘 청년 노동자 조합원들은 집회 나오라고 하면 안 나온다. 이기적이다’라고 말하고, 청년세대는 ‘우리가 얘기를 하면 안 듣는다. 그러니까 안 나가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런 구도가 한국 사회 곳곳에서 보이고, ‘위안부’ 연구에서도 어느 정도 유사한 결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후속 세대가 등장해야 하는데 잘 나타나지 않고, 그렇게 되니 오기만 해도 고마워하며 소위 말해 ‘우쭈쭈’하게 되는 것이죠. 기존의 ‘위안부’ 연구 혹은 운동에 대해 비판했을 때 기성세대들이 어떤 태도를 보여줄까 싶고, 노동조합의 예시처럼 청년들이 튕겨 나가거나 없는 사람처럼 무시되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는데요. 그러한 권력관계 지형 속에 이 문제도 놓여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은진 저는 엄밀히 말하면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에요. 논문도 낙태죄 관련으로 썼고, 스스로를 재생산정의 활동가로 정체화하기도 하고요. 이런 입장에서는 일본군‘위안부’ 의제와 다른 의제의 연결성 차원으로 세대 전환이나 교체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운동이나 의제도 일종의 생애 주기가 있으니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하는 건 한계가 있겠죠. 하지만 여성, 인권 운동의 계보 속에서 다른 의제들과 연결되며 현재화되는 방식으로 현재성을 얻게 된다고 생각해요, 다만 일본군‘위안부’ 운동이나 문제가 게토화되면서 그런 방식의 현재성을 얻는 일이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현재화하기 위한 몇 안 되는 시도들이 있지만, 그마저도 단선적인 상상에서 그치는 것 같아요. 가령 일본군‘위안부’에서 미군 ‘위안부’, 한국군 ‘위안부’, 성매매 여성으로 이어진다는 식으로요. 저는 좀 더 복잡한 연결망 속에 일본군‘위안부’ 이슈를 놓아보고 싶어요. 셰어에서 ‘몸이 선언이 될 때’라는 전시에 참여해 저도 함께했던 적이 있는데요, 그때 연표를 만들었어요. 임신중지 관련 사건이나 개념들을 비롯해 몸과 재생산에 대한 수많은 억압들을 연표로 정리하면서 장애인 등 시설화된 삶과 이것이 어떻게 교차되고 얽혀있는지 드러내고, 존재가 곧 범죄였던 트랜스젠더 등의 삶과도 연결했습니다. 그러면서 ‘위안부’ 이슈도 이런 연결망 위에 놓을 수 있지 않을까, 꼭 성매매와 연결되는 의제로만 상상해야 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최성용 민주화 운동 서사를 볼 때 느끼는 불편함이 있어요. 정형화된 서사들을 보면 교과서나 박물관에 박제된 이야기처럼 느껴지고, 내가 들어갈 틈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 봐도 현재와 연결시킬 수 있는 이야기들이 굉장히 많고, 기존의 정형화된 서사는 담아낼 수 없는 개인 및 집단의 이야기가 다양하게 있는데, 그런 것들은 계속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요. 9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의 과거사 운동이 제도화되고 국가의 공식 기억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들이 사장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우리의 역사적 자원으로 삼고 새로운 질문이 나오게끔 하는 촉매제로 삼으려면 국가의 공식 기억과는 별개로 사회적 기억이 두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은진 발언 참고 https://www.ildaro.com/8525 https://view.pong.pub/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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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주민 거주 공간으로 활용돼 살아남은 위안소의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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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거주 공간으로 활용돼 살아남은 위안소의 '아이러니' 《훙커우구 일본군 위안소 유적지》 1931년 일어난 만주사변, 1937년부터 중국 전국토에서 전개된 중일전쟁,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벌어진 아시아・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의 광범위한 침탈 현장이었던 중국은 당시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운영한 위안소의 역사가 녹아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지난 6월 19일부터 21일까지 사흘 동안 아시아 지역 일본군'위안부' 문제 연구와 함께 일본군'위안부' 관련 기억의 전승을 위한 중국의 노력 등을 살펴보기 위해 가장 치열했던 전장인 난징과 상하이를 찾았다. 현지 일본군'위안부' 유적지 및 박물관 탐방기를 3회에 걸쳐 싣는다. (1) 중국 위안소 유적지·박물관 탐방기 1부 - 난징 리지샹위안소 유적전시관 (2) 중국 위안소 유적지·박물관 탐방기 2부 - 상하이 중국'위안부'역사박물관 (3) 중국 위안소 유적지·박물관 탐방기 3부 - 상하이 훙커우구 일본군 위안소 유적지 한국인이 인식하는 역사 속 중국 상하이는 우리 독립운동의 장(場)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프랑스조계령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상하이는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20년에는 흥사단 원동위원부(興士團 遠東委員部)가 상하이 쉬후이구(徐汇区)에 설치돼 활동 기반이 되었고,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역사적인 의거 현장인 훙커우 공원(現 루쉰공원)도 상하이에 있다. 그 외 인성학교(仁成學校), 영안공사(永安公司), 신규식(申奎植) 거처 등 독립운동의 흔적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일본군 직영, 거류민 위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된 위안소 다른 한편으로 상하이는 일본 제국주의 침탈의 현장이다. 상하이 전역에 산재한 일본군 위안소 터가 그러하다. 상하이는 일본군 위안소가 가장 먼저 만들어졌고, 가장 집중적으로 설치되었으며, 또 가장 오랫동안 존속한 곳이다. 1842년 난징조약(南京條約) 이후 개항한 상하이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각축장이면서도 일방적인 식민지와 차별성을 가진 국제적 도시로 변모하였다. 1871년 '청일수호조규(淸日修好條規, 일명 톈진 조약) 조인을 전후해 상하이에 진출한 일본은 1900년대 초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시기 상하이에 거류지를 조성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리고 1914년 상하이 거류 일본인들의 보호를 명목으로 일본 해군 특별육전대가 상주하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 중 서구 제국의 세력이 주춤해진 틈을 타 일본은 상하이 내 세력을 더욱 키워갔는데, 1932년 중국과 일본의 군사적 충돌인 '1차 상하이 사변' 시기 일본군을 위한 '위안' 시설을 본격적으로 구상하여, 위안소를 지정하고 관리, 통제하기 시작했다. 1932년 1월 일본 해군은 상하이에 최초의 해군위안소를 지정했고, 1932년 3월 1차 상하이 사변 전투가 종결된 후 일본 육군도 육군위안소를 개설하였다. 위안소는 특정 지역에 밀집돼 있었는데, 상하이의 관문인 우쑹(吳淞)과 쓰촨베이루(四川北路) 일대가 대표적인 지역이다. 일본군 주둔지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던 이 지역에서는 약 70여개의 위안소가 조사, 발굴됐다. 첫 해군위안소 지정 후 1년 만인 1933년 17곳으로 늘어난 위안소는 지속적으로 증가하다가 1937년 중일전쟁 및 2차 상하이 사변을 기점으로 급증했다. 위안소는 일본군이 직접 설치한 곳, 일본군이 감독하고 일본 거류민이 위탁해 운영한 곳, 소위 '한간(汉奸)'으로 불린 친일 중국인 또는 친일 한국인이 운영한 곳, 군 또는 민간인이 경영한 유동적 임시 위안소 등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일제는 1940년 2월 훙커우구(虹口区)와 자베이구(閘北区)에 위안조합회를 설립해 늘어나는 위안소를 관리하였다. 상하이사범대학교 쑤즈량(苏智良) 교수를 비롯, '중국'위안부'문제연구센터'를 중심으로 한 연구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당시 상하이 소재 위안소는 180여 곳 이상이었으며, 조사를 진행하면 더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상하이 위안소 유적지 답사는 상하이 사범대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장루이(張如意) 선생, 후왕신위(黃心宇) 선생의 안내와 설명으로 진행됐다. 상하이 훙커우구에 소재한 위안소를 답사하고, 다이살롱(大一沙龍), 수장(曙庄), 쓰촨리 52호, 어메이루(峨眉路) 400호 등 4곳을 확인했다. 다이살롱, 가장 오래 유지된 위안소 이른 아침 상하이사범대학교에서 첫 답사지인 다이살롱으로 출발했다. 다이살롱은 상하이 훙커우구(虹口区) 둥바오싱루(东宝兴路) 125농(弄)에 위치해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다이살롱은 일본 해군이 최초로 지정한 위안소 중 하나이다. 원래 이 주소지에는 광둥(廣東) 지역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광둥 사람들이 악화된 정세를 피해 거주지를 떠나며 빈 공간이 된 것을 일본인 이주자 곤도 미츠코(近藤美津子) 부부가 차지해 일본식 유흥업소, 이른바 '대좌부(大座敷)'를 운영하였다. 이듬해 1월 일본 해군은 상하이 주둔 해군육전대 대원들을 위한 위안소를 지정하는데, 다이살롱이 그 중 하나였다. 이는 1차 상하이 사변 발발 시기와 맞물린다. 다이살롱 부근에 일본 해군육전대 집결지가 있었고 인근 쓰촨베이루는 일본 해군육전대 사령부 소재지였다. 1932년 당시 1호 건물에 일본인 '위안부' 7명으로 운영된 다이살롱은 일제의 침략 전쟁이 장기화되고 전선이 확대되어감에 따라 '번성'해 위안소를 5개 동까지 확장하고 '위안부' 수도 늘었다. 처음에는 민간 일본인들도 출입했는데, 1937년 8월 13일 일본군이 상하이를 침공한 이후, 즉 2차 상하이 사변 이후부터는 일본군만 출입이 가능해졌다. 다이살롱이 일제의 침략이 진행됨에 따라 병력이 증가하면서 그 성격과 규모가 더욱 강화된 것이다. 다이살롱에 있었던 '위안부'들에 대한 정보나 정확한 통계는 확인된 바 없다. 그러나 다이살롱이 위안소였음을 확인해 준 증언자들에 따르면 일본인뿐 아니라 중국인, 조선인 '위안부'들도 있었다. 증언자들은 당시 주변에서 거주하거나 다이살롱에 고용된 사람들로 '고려 여인들(조선인 여성)'과 일본인 주인을 도왔던 관리자 고려인(한인)을 기억하고 있었다. 종전 때까지 운영된 다이살롱 건물은 적산(敵産)으로 묶여 있다가 국공내전이 종결된 후 일반에 분배되어 지금까지 거주지로 활용되고 있다. 2018년까지 다이살롱에는 여러 거주자들이 생활했는데, 지금은 1가구만 남고 모두 퇴거한 상태이다. 거주자의 승낙으로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흔쾌히 생활공간을 개방해주는 '마지막' 거주자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연구를 진행하며 꾸준히 다이살롱 거주자들과 유대관계를 쌓아온 상하이사범대 중국'위안부'문제연구센터 연구자들의 노력 덕분으로 보였다. 서양식 2층 건축 양식을 지닌 총 5개 동으로 이뤄진 다이살롱 건물은 대체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구비되어 있었다는 일본군의 '위락'을 위한 노천 무도회장, 연못, 바(bar), 일본식 정원 등은 사라지고, 일본식 정원의 형태만 남아 그때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현재 다이살롱은 유적지화를 둘러싸고 여러 입장이 상충하고 있는 상황이다. 상하이 시는 보존에 무게를 두고 있으나 개발을 원하여 이를 반대하는 훙커우구로 인해 마지막 거주자가 건물을 떠나면 어떤 방향으로 결정될지는 알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퇴거를 거부하는 거주자의 개인적 이유로 이 위안소 건물은 여전히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수장 위안소∙쓰촨리 52호 위안소, 잘 구축된 시설로 종전 후 주민 거주 공간으로 활용 다음으로 쓰촨베이루 쓰촨리에 위치한 수장(曙庄) 위안소와 쓰촨리 52호 위안소 현장을 찾았다. 쓰촨베이루는 일본 해군육전대 사령부가 소재한 곳이었다. 쓰촨리 1604농 41호에 위치한 수장 위안소의 주소패가 걸려있는 철문 안으로 들어가면 3층 건물 두 동이 마주보고 서 있는데, 모두 위안소로 활용된 곳이었다. 수장 위안소 역시 원 거주민이 살고 있던 것을 1937년 2차 상하이 사변 이후 일본군이 무력으로 차지한 뒤 위안소로 사용되었다. 무도회장, 욕조, 서구식 화장실 등 각종 시설이 잘 구축돼 있었고, 건물 앞 공터에는 방공호도 구축되어 있었다고 한다. 양호한 시설 때문에 일본군 장교가 출입했던 위안소로 알려져 있으며, 종전 후 주민들이 곧바로 생활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건물 1층은 장교 전용 바였고, 2~3층에 '위안부'들의 방이 있었다. 일본군은 쓰촨베이루 일대 건물들을 강점한 뒤 개축해 사용하였고, 그 영향으로 수장에는 미닫이 창문과 같은 일본식 건축양식이 일부 남아 있다. 수장위안소는 1938년에 가장 번성하였다가 1944년부터 상하이 주둔 일본군 수가 줄어들게 되자 점차 쇠락했다. 수장 위안소에 동원된 '위안부'의 수는 파악하기 어려우나 수십 명의 일본인 '위안부'들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수장 위안소에서 도보로 1~2분 거리에 있는 쓰촨리 52호 건물 역시 일본군 위안소로 활용된 곳이다. 수장과 마찬가지로 3층 건물이며, 일본군 장교들이 주로 출입하였다. 두 위안소 모두 일본인 업자들이 운영했는데, 쓰촨리 52호 건물도 현재까지 거주민들이 실제 생활하는 거주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어메이루 해군직영위안소, 한 향토사학자의 집요한 추적으로 확인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훙커우구 어메이루(峨眉路) 400호에 남아 있는 일본 해군 직영 위안소 건물이다. 凹 형태의 5층 건물로, 앞서 찾은 다른 위안소 건물처럼 거주민들의 실생활 터전이었다. 이 건물이 일본군 위안소였다는 사실을 밝혀낸 이는 향토사학자 저우신민(周新民)이었다. 엔지니어 출신인 저우신민은 은퇴 후 상하이 및 주변 도시사 연구에 몰두하던 중 본인이 졸업한 대공직업학교의 역사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2012년 9월, 기록보존소인 상하이 당안관에서 '사립대공직업학교 개황에 관한 보고'에 실린 대공직업학교 약사를 검토하던 중 "일본 해군구락부를 접수하여 학교 교사로 삼았다"는 문구를 발견한 것이 단초였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1여년 간 중국 내 남아 있거나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을 집요하게 추적했지만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다만 대공직업학교 교사 사치산 (沙啓善)선생으로부터 학교 건물이 '일본인이 남긴 낡은 집'이라는 사실 정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저우신민은 일본 쪽 자료에 시선을 돌렸다. 추적 결과 어메이루 400호 건물이 일본 해군육전대의 하사관병 집회소였고, 당시 위락시설을 잘 갖춘 3층 건물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 일본 해군구락부는 장교 위안소였고, 해군하사집회소는 하사관과 사병이 사용한 위안소였으며 둘 다 일본 해군육전대가 직영하였다는 것도 확인하였다. 어메이루 400호는 일본 해군육전대가 직영한 위안소였던 것이다. 저우신민은 문헌 검토에 이어 어메이루 400호에 거주한 주민들의 진술을 통해 교차 검증에 들어가 1980년대 원래 3층이던 건물이 5층으로 증축되었다는 사실도 확인하게 되었다. 어메이루 400호 건물은 증축이 되긴 했으나 1층에 있는 매표소 공간부터 계단의 모습 등 위안소로 활용되던 당시 모습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었다. 증언한 주민들에 따르면 지금은 없어진 건물 지하실에 당시 사용하던 집기들도 있었다고 한다. 철거되거나 잊힐 위기의 위안소, '역사기억공간'으로 전환되길 6월의 상하이 날씨는 체감상 한국의 여름과 비슷한데, 답사 당일은 아침부터 비도 내려 답사가 수월하지는 않았다. 또 우리가 찾아간 상하이 위안소 건물 모두 현재까지 주민들이 거주하며 생활 하고 있는 공간이어서 내부를 살펴보기도 쉽지 않았다. 방문한 위안소 건물에서 다소 생경한 감각을 느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위안소라는 역사적 특수성보다 일상생활 공간이라는 점이 더 직접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수많은 마천루들이 위용을 자랑하는 국제도시 상하이는 개항 후 조성된 근대 건축물도 즐비한 공간이다. 그 당시 지어진 건물 중 다수는 일제의 상하이 침략 이후 원래의 목적을 빼앗기고 일본군을 위한 위안소로 활용되었다. 종전 후 위안소 건물들은 원래의 성격을 되찾았으나 그 과정에서 역사성이 희미해지거나 감추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일상성으로 인해 상하이 위안소 건물들은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위안소라는 일본 제국주의가 빚어낸 인권 유린의 역사 위에 개인의, 일가족의 생활 터전이 수십 년간 덧입혀지면서 장소는 살아 남았고, 중국 내 일본군'위안부' 연구진들의 노력으로 그 역사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유지되어 온 건물들이 현실적 필요에 의해 철거되거나 잊힐 위기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남아 있는 위안소 건물들 중 대표적인 것들을 '역사기억공간'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쑤즈량 교수와 향토사학자 저우신민의 문제제기에 중국 사회가 귀를 기울여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