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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자료해제 인도네시아 일본군성노예제도 피해자에 관한 조사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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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일본군성노예제도 피해자에 관한 조사와 자료 인도네시아에서는 1990년대 이후 개인과 민간단체 주도로 일본군'위안부'피해자에 관한 구술조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약 18,0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 전 지역을 포괄할 정도의 조직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현재 인도네시아에는 두 개의 지원단체가 있으며, 피해자에 관한 정보는 우선 이들 단체가 수집해왔다. 또한 인도네시아 일본군성노예제도 피해자 중에는 특이하게도 네덜란드 출신 백인 여성들도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1942년, 일본은 당시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를 점령하면서 현지에 거주하고 있던 네덜란드 여성까지도 '위안부'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네덜란드 쪽에서 발간된 피해자 관련 기록들이 있다. 아래에서는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채록한 구술조사 보고서를 비롯해 네덜란드에서 발표된 피해자의 기록 등 현재까지 발표된 인도네시아 일본군성노예제도 피해자에 관한 자료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까지의 조사자료 먼저 일본어로 정리해 출판한 인도네시아 일본군'위안부'피해자에 관한 구술조사 보고서로 가와타 후미코(川田文子)의 『인도네시아의 「위안부」』(『インドネシアの「慰安婦」』、明石書店、1997)가 있다. 이 보고서는 일본의 전후보상실현시민기금(戦後補償実現市民基金) 조사팀이 1995년부터 1996년까지 세 차례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피해자에 대한 구술조사를 시행하고, 그 결과를 정리한 것이다. 해당 조사는 인도네시아에서 약자에 대한 법률상담 등의 원조 활동을 하는 법률구조재단(Lembaga Hukum Bantuan, LBH) 욕야카르타 지부와 인도네시아 전 헤이호(Heiho, 兵補) 중앙연락협의회(Forum Komunikasi Ex-Heiho Indonesia, 兵補協会)의 도움을 받았다. 전 헤이호 중앙연락협의회는 이후 종군위안부를 덧붙여 인도네시아 전 헤이호 종군위안부연락협의회가 되었다. 조사지역은 욕야카르타(Yogyakarta), 수카부미(Sukabumi), 반둥(Bandung)으로 모두 자바섬(Java)에 있는 지역이다. 이에 따라 법률구조재단(LBH) 욕야카르타 지부에 등록한 피해자가 3백여 명[1], 전 헤이호 중앙연락협의회에 등록한 피해자가 2만 2천여명(1996년 3월 기준)이었다.[2] 가와타 후미코의 보고서 말미에는 전 헤이호 중앙연락협의회에 등록한 피해자 중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앙케이트 조사(응답자 760명)가 실려 있다. 다음으로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 인도네시아팀이 제출한 기소장과 증거 서류가 있다. 여성국제전범법정의 기록은 전6권 시리즈, 『일본군 성노예제도를 심판한다-2000년 여성국제전범법정의 기록』[3]으로 출판되었다. 그 중 인도네시아에 관한 자료는 제5권 『여성국제전범법정의 전기록[I]』[4]에 인도네시아 측의 기소장이, 그리고 제4권 『'위안부'전시성폭력의 실태[Ⅱ]』[5]에 기무라 고이치(木村公一 )가 작성한 「제4장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6]가 실려 있다. 기무라 등은 법률구조재단(LBH) 욕야카르타 지부와 인도네시아 전 헤이호 종군위안부협회의 도움을 받아 피해자 30명에 대한 구술조사를 진행했다. 한편, 소설가 프라무디아 아난타 토르(Pramoedya Ananta Toer)는 굉장히 독특한 조사를 진행했다. 프라무디아는 공산당계 단체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1969년부터 10년간 부루섬(Pulau Buru)이라는 감옥 섬에 갇혀 유배 생활을 보냈다. 거기서 그는 옛날 이 섬에 '위안부'가 된 자바인 여성이 살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사를 시작했다. 그 결과 2001년 조사 내용을 문학작품의 형식으로 작성해 출판했다.[7] 일본어로는 『일본군에게 버려진 소녀들-인도네시아의 「위안부」의 비화』[8]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9] 가와타 후미코(川田文子) 『인도네시아의 「위안부」』(『インドネシアの「慰安婦」』、明石書店、1997) 표지 2. 네덜란드 자료조사 제2차세계대전 중이었던 1942년 일본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즉 현재의 인도네시아를 점령했다. 일본은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인을 수용소에 억류하고 포로로 삼았는데, 이곳에서 일본군에 의해 '위안소'로 끌려간 여성들이 있다. 전쟁이 끝난 후, 바타비아(Batavia, 현재의 자카르타)에서 열린 네덜란드군 임시군법회의에서는 이러한 네덜란드인 여성을 상대로 한 '강제매춘'에 대한 재판을 진행했다. 4건의 재판이 진행되어 2건에 대해서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이들 재판 문서 중 일부가 일본어로 번역되었다. 가지무라 다이치로(梶村太一郎 )∙ 무라오카 다카미츠(村岡崇光)∙ 가스야 고이치로(糟谷廣一郎)의 『'위안부'강제연행 [사료] 네덜란드 군법회의자료 x [르포] 나는 "왜놈"의 자식』[10]에 수록된 것으로, 「선서심문조서(宣誓尋問調書)」가 피해여성들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다. 또한, 네덜란드인 피해여성의 경험을 다룬 책들이 있다. 마르게리타 하메르 모노 드 프로이드빌의 『꺾인 꽃』(Geknakte Bloem, Marguerite Hamer-Monod de Froideville , 2013)과 얀 루프 오헤른의 『50년의 침묵』(50 Years of Silence, Jan Ruff-O'Herne, 1994) , 그리고 엘렌 반 델 플루흐(Ellen van der Ploeg)의 경험을 담은 『명령엔 감정이 없다』(Gevoelloos op bevel: Ervaringen in Jappenkampen van Ellen van der Ploeg, Jos Goos, 1995)가 있다. 앞의 두 권은 일본에서 『꺾인 꽃: 일본군 '위안부'가 된 네덜란드 여성들의 목소리』[11]와 『네덜란드인 '위안부' 얀의 이야기』로 각각 출판되었다.[12] 얀 루프의 책은 작년에 한국어로도 출판되었다.[13] 피해자 구술조사는 아니지만, 네덜란드정부소장문서를 조사한 자료로 다음의 자료가 있으며 일본어로도 번역되었다. 먼저, 바르트 판 프루헤스트(Bart van Poelgeest)가 작성한 「일본 점령하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의 네덜란드인 여성 강제매춘에 관한 네덜란드 정부소장문서 조사보고」[14][15]는 앞에서 언급한 가지무라 다이치로∙ 무라오카 다카미츠 ∙ 가스야 고이치로의 책에 수록되어 있다. 나아가서 네덜란드 공문서관을 조사한 야마모토 마유미(山本まゆみ)∙윌리암 브래들리 홀튼( William Bradley Horton)의 「일본 점령하 인도네시아의 위안부-네덜란드 공문서관 조사보고-」[16] 가 있다. 이 보고서는 재단법인・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위안부'관계자료위원회 편[17], 『'위안부'문제조사보고('慰安婦'問題調査報告)』(1999)에 수록되어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네덜란드공문서(번호 RIOD 016410)에 여성 희생자 다수를 포함한 발리사람들의 증언을 발췌한 내용이 있다고 한다. 한편, 네덜란드 저널리스트 힐데 얀센(Hilde Janssen)과 사진가 얀 반닝(Jan Banning)은 2007년 6월부터 2009년 7월까지 인도네시아에서 약 50명의 피해자를 찾아다니며 면담하고, 그 결과를 2010년 책과 사진집으로 출간했다. 『치욕과 무고: 인도네시아 위안부의 억압된 전쟁의 과거』(Schaamte en Onschuld: Het Verdrongen Oorlogsverleden van Troostmeisjes in Indonesie. Nieuw Amsterdam)와, 사진집 『위안부』(Comfort Women - Troostmeisjes. Utrecht: Ipso Facto)가 그것이다. 또한, 힐데 얀센은 자신의 홈페이지[18]에서 네덜란드어, 영어, 인도네시아어 3개 국어로 인터뷰했던 여성들의 증언 요지를 소개하고 있다. 3. 최근의 조사와 자료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은 2016년 제13회 특별전(인도네시아)을 개최하면서 자료집 『'아시아 해방'의 미명 하에 인도네시아・일본군 점령하에서의 성폭력』[19]을 간행했다. 이 자료집은 당시까지 알려진 문헌과 피해자 증언을 집대성한 것인데, 그중 남술라웨시주(州) 조사를 통해 밝혀진 피해자 여성들에 관한 내용이 새롭게 추가되었다. 남술라웨시주 조사는 앞서 소개한 인도네시아 전 헤이호 종군위안부연락협의회가 자바주에서 남술라웨시주 에네깡현(県)으로 본부를 옮기면서 가능해졌다. 인도네시아 전 헤이호 종군위안부연락협의회가 그곳의 회원 네트워크를 이용해 1천 6백여 명에 대한 증언조사를 실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조사는 합계 4천 6백 페이지가 넘는 총 4권의 자료 『추모 인도네시아∙남술라웨시주의 제2차 세계대전 잔학행위 피해여성(전종군위안부)』(In Memory: Wanita Korban Kejahatan Perang Dunia II di Sulawesi Selatan (Ex. Jugun Ianfu))(2005)로 정리되었다. 제목에는 '추모'라고 표현했지만, 아직 생존자가 많이 있다. 당시 조사를 진두지휘한 사람은 지금은 고인이 된 연락협의회 회장 무하매드 달마위(Mohammad Darmawi)였다. 그의 호소에 부응하여 이후 일본측도 마츠노 아키히사(松野明久)를 대표로 팀을 편성하고 현지 조사를 진행하여 지금까지 약 90명의 피해여성을 면담했다. 그리고 조사 성과의 일부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발표했다.[20] 한편 인도네시아에서 현지 조사와 지원을 계속하고 있는 에카 힌드라(Eka Hindra)와 기무라 고이치(木村公一)가 마르디엠(Mardiyem)씨에 대해 쓴 책 『모모에-그들은 나를 그렇게 불렀다』(Momoe: Mereka Memanggilku. Essensi, 2007)는 일본에서 번역 출판되었으며,[21] 마르디엠씨의 증언은 그 후 다큐멘터리로 제작되기도 하였다.[22] 또한 에카 힌드라는 2009년 다큐멘터리 작가 아디 위디아르타(Ady Widyarta)와 손을 잡고 부루섬에 남은 자바인 전 '위안부'를 다룬 「마타올리-『위안부』 이야기」(Mataoli:Kisah para "Ianfu")를 제작했다. 4. 조사의 과제 아직까지 인도네시아의 '위안부'에 대한 전체적인 조사가 충분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약 18,0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넓은 인도네시아에서 전체조사는 불가능에 가깝다. 조사 방법에서도 피해자가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점(点)'을 찍어가는 방식만으로는 상황을 입체적으로 그려 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피해자뿐 아니라 주위의 관계자, 목격증언자의 목소리를 청취하는 것도 중요하다. 또한, 일본측 자료를 이용하면서 당시 그 지역의 상황을 '면(面)'으로 그려나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남술라웨시주의 조사는 좋은 모델이다. 하지만 이 조사 역시 남술라웨시주 일부 지역에 한정되어 진행되고 있으며 그것조차 몇 년째 걸리고 있다. 조사에 필요한 인력도 자금도 부족한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성노예제를 논증하기 위해서는 군의 조직적 관여와 강제성을 밝혀내는 것이 중요하다. 구술조사를 통해 나온 증언은 성노예제를 뒷받침하기 충분한 자료이지만, 문서자료나 물적 증거가 부족하다. 한편으로, 피해자가 그 후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상황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위안부'의 고통을 다룬 소설, 영화, TV 드라마가 나오는 것을 보면, 인도네시아 사회 일반이 이들에게 동정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피해자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고, 때로는 가족, 친족으로부터 외면받기도 한다. 남술라웨시주를 조사하면서 그런 사례가 많다고 느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조사는 피해자의 구제에 공헌하고, 그녀들의 괴로움을 덜어내는 데 도움이 되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조사뿐만 아니라, 위안부 피해사실을 널리 알리고,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운동을 이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각주 ^ 구라사와 아이코, 「인도네시아의 위안부조사보고」재단법인・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위안부」관련자료위원회편 『「위안부」문제조사보고・1999』(倉沢愛子「インドネシアにおける慰安婦調査報告」財団法人・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国民基金「慰安婦」関係資料委員会編『「慰安婦」問題調査報告・1999』, pp. 89-105)에는 욕야카르타 지부에 317명이 등록했다는 기술이 있다. 이 「보고」는 전「위안부」의 증언을 수집한 것이라기 보다는 인도네시아의 「위안부」 문제 현황을 개관한 자료로 볼 수 있다. ^ 역자주: 당시 일본정부주도로 만들어진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 민간모금을 개시한 직후부터 헤이호협회가 일본군성폭력피해자 등록 작업을 시작했고, 그 등록마감이 96년 3월이었다. ^ 『日本軍性奴隷制を裁く——2000年女性国際戦犯法廷の記録』、VAWW-NET Japan編, 緑風出版 ^ 女性国際戦犯法廷の全記録[Ⅰ] ^ 『「慰安婦」戦時性暴力の実態[Ⅱ] ^ 「第4章 インドネシア『慰安婦』問題」 ^ Perawan Remeja dalam Cengkeraman Militer. Gramedia Populer. ^ 山田道隆訳、『日本軍に棄てられた少女たち——インドネシアの「慰安婦」悲話』コモンズ、 2004 ^ 최근 한국에서도 『인도네시아의 '위안부' 이야기』(김영수 역, 2019) 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 『「慰安婦」強制連行 [史料]オランダ軍法会議資料x[ルポ]私は"日本鬼子"の子』、金曜日、2008 ^ 村岡崇光訳 『折られた花 日本軍「慰安婦」とされたオランダ人女性たちの声』、新教出版社、2014 ^ 渡辺洋美・倉沢愛子訳、『オランダ人「慰安婦」ジャンの物語』、木犀社、1999 ^ 최재인 역,『나는 일본군의 성노예였다:네덜란드 여성이 증언하는 일본군위안소』, 삼천리, 2018 ^ 「日本占領下オランダ領東印度におけるオランダ人女性に対する強制売春に関するオランダ政府所蔵文書調査報告」 ^ 본 보고의 비공식적 영어번역은 다음과 같다. Bart van Poelgeest, Report of a Study of Dutch Government Documents on the Forced Prostitution of Dutch Women in the Dutch East Indies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Unofficial Translation. 24th January 1994. ^ 「日本占領下インドネシアにおける慰安婦—オランダ公文書館調査報告—」 ^ 財団法人・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国民基金「慰安婦」関係資料委員会編 ^ http://www.hildejanssen.nl/ ^ 『「アジア解放」の美名のもとに インドネシア・日本軍占領下での性暴力』 ^ 마츠노 아키히사∙ 스즈키 다카시(鈴木隆史)∙ 미즈노 코스케(水野広祐)∙「인도네시아에서의 군 성노예제 패턴과 피해」『일본군「위안부」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종합연구(Ⅱ)』, 한국여성개발연구소, 2016 ^ 『モモエ—-彼らは私をそう呼んだ』, 2007 ^ 가나 도모코((海南友子) 감독, 『Mardiyem 그녀의 인생에서 일어난 일』『Mardiyem 彼女の人生に起きたこと』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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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좌담 일본군‘위안부’ 투쟁 영역의 확장 〈3부〉 - 다르게 선택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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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운동은 제국과 식민지, 남성과 여성, 국가와 인민 사이의 차별적 권력 구조에 맞서 소수자와 인간, 여성의 몫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와 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청년좌담에서는 젊은 연구자이자 활동가인 이은진, 이재임, 최성용과 만나 이들의 삶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어떤 의미와 동인이 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동세대인 신진 연구자들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원들과의 문답을 통해, 기지촌 여성들의 생애 구술 채록, ‘피해’와 ‘피해자’를 둘러싼 법적 담론 분석, 한국 사회의 일본군‘위안부’운동과 담론에 대한 탈식민적 비판 작업 등을 만나 보시죠. -좌담 일시: 2022년 9월 6일 -사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 이헌미, 황진경, 장소정, 이안 -대담: 이은진(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이재임(서울대학교 여성학협동과정), 최성용(성공회대학교 국제문화연구학과) -정리: 퍼플레이컴퍼니 Q. 평택 기지촌 여성 구술집 『영미 지니 윤선: 양공주, 민족의 딸, 국가 폭력 피해자를 넘어서』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기지촌 여성 구술집에 대한 감상으로 ‘재밌다’는 표현을 쓰기 어려울 텐데요, 그만큼 구술자와 채록자 여섯 분이 역할에 구애받지 않고 그저 ‘이야기’를 나누셨던 것 같습니다. 더 많은 독자들에게 그 재미를 알려드리고 싶은데요, 작업에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부분,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설명 부탁드립니다. 이은진 저희가 구술집 작업을 하면서 일방적인 인터뷰보다는 대화 형식을 취했어요. 라포가 어느 정도 형성된 상태에서 진행했기 때문에 구술자분들도 저희에게 궁금한 게 많으셨죠. 저희가 가면 이모들이 질문을 던졌고, 주 관심사 중 하나가 연애사였어요. 그래서 제 연애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고, 책 중반부 <데뷔>라는 영상 작업에도 “꿀이 뚝뚝 떨어진다”고 자랑하는 것이 나오는데, 작업을 마치고 출판하는 사이에 사귀던 사람과 헤어지게 됐지 뭐예요. 책에 들어간 저의 이야기를 정말 편집하고 싶더라고요. 그런데 출판물에 실리는 그분들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지난 연애의 흑역사 정도가 아니잖아요. 본인의 근간을 흔들었던 문제에 대한 증언이고, 기록의 형태로 오랫동안 남게 되고, 그것이 보여질 사람들의 범위를 조정할 수도 없죠. 그런 것들을 어렴풋이나마 체감하게 됐던 것 같아요. Q. 『낙태죄의 의미 구성에 대한 역사사회학적 고찰 - 포스트식민 한국 사회의 법제, 정책, 담론 검토』 논문 말미에 “그 시기를 지나온 여성들의 체험이 어떠했는지 이야기되지 않아 왔다”고 쓰셨는데, 이것은 앞서 언급한 ‘평택 기지촌 여성 구술집’과도 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의 말하기와 그것을 듣고 기록하는 것에 대한 생각, 그리고 앞으로 어떤 형태로든 이러한 작업을 할 계획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이은진 그동안 말해지지 못했던 목소리를 발굴해서 알린다는 자의식을 경계하는 편이에요. 아카데미나 사회운동의 담론 지형에서의 뒤틀림을 지적하고 바로잡는 데 기여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렇게 하면 목소리를 내고 싶은 분들은 스스로 말하게 되지 않을까요? 목소리들이 더 들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작업해나가긴 할 테지만 그 형태를 구술작업에 국한할 생각은 없어요. 연구가 될 수도 있고, 법률 작업이 될 수도 있고, 예술과의 협업이 될 수도 있겠죠. 형태에 구애받지 않고 제가 기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어요. Q. 『‘정의연 사태’의 중층적 성격과 운동의 질문들』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를 탈역사적·탈정치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가진 한계를 짚어주셨습니다. 이것을 상징폭력과 지적 식민성으로 명명하면서 아시아 지평과 탈식민 사회 역사에 대한 인식 두께를 확보하자고 제안 주셨는데요. 특히나 신진 연구자일수록 말씀하신 지평과 인식을 확보하기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은데, 이러한 현실적 한계들을 건너왔던(건너는 중인) 경험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최성용 앞서 말한 것처럼, 미국의 흑인운동은 자신들이 경험한 억압과 차별, 혐오를 얘기하면서 인종주의 역사를 말해요. ‘위안부’ 문제도 당사자분들이 겪었던 것을 설명하기 위해, 또 우리가 대항하고 바꿔야 하는 게 무엇인지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얘기해야 하죠. 그 역사는 가부장제, 식민주의, 계급 등 여러 가지가 착종되어 있는데, 민족주의적으로만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면 젠더를 지우게 되는 것처럼, 오늘날 역사 부정은 식민주의 역사를 지운다고 생각해요. 식민주의 청산론이 식민 경험 없는 민족의 근대화라는 본질주의적인 환상을 노정한다면, 그 반대편에 역사 정의에 대한 요구를 민족주의로 환원해 그것만 도려내면 평화로워진다는 또 다른 본질주의가 있는 것 같아요. 식민주의는 단순하게 청산할 수 없는 한국 사회의 지반이자 지층이죠. 그렇다면 그 역사를 딛고서 무엇을 할 것인가, 식민주의 역사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질문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일본의 사죄와 법적 보상, 천황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식민주의와 냉전을 거치며 한국 사회에서 ‘위안부’가 어떻게 은폐되고 굴절되어 왔는가에 대한 두터운 맥락을 인지하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단순히 ‘민족주의적인 것’ 혹은 ‘진영 논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만 규정해버리면 ‘위안부’ 문제는 탈역사화되고 탈정치화된다고 생각해요. 탈역사화하려는 시도는 너무 쉽게 이 문제를 이른바 화해론으로만 덮어버리려는 것 같아요. 계속 시끄럽게 굴지 말고, 한일 관계도 어느 정도 타협하고 미래지향적으로 접근하자는 이야기를 하는데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정의로운 것인가 질문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 같아요. ‘위안부’ 운동이 가진 고유한 급진적 정치성을 표백시켜 ‘위험하지 않은 무언가’로 순치시키려는 것 아닌가, 그것이 역사 부정이 의도하는 바 아닌가 생각합니다. Q. 『‘20대 남성’ 담론을 질문한다』와 『청년이 말하는 청년세대론, 이번엔 다를까?』 등 청년에 대한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내고 계십니다. 단일하고 매끄럽게 범주화함으로써 작동하는 오류들에 대해 다각도에서 문제제기를 하고 계신데,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해서도 피해자의 호명 방식, 운동의 몰역사적 이해를 문제 삼으신 점이 연결될 듯합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연구 분야에서도 청년이 종종 호명되는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납작한 호명을 탈피하기 위한 방법이 있을까요? 최성용 일종의 진보적인 청년 학생에 대한 상, 이미지, 재현 등이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강고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 같아요. 4‧19혁명을 시작으로 90년대 중반까지 진보적인 학생운동이 전체 사회운동을 주도해왔다는 서사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위안부’ 운동에서도 진보적인 청년, 학생을 호명하며 그 이미지를 활용, 소비한다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페미니즘의 위대한 역설』을 쓴 페미니스트 역사학자 조앤 월라치 스콧이 여성 범주를 다룬 방식이 청년 범주에도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요. 청년은 스스로가 아닌 외부에서 호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부정하기도 긍정하기도 하면서 그 범주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평화나비 내에서 그런 분들을 많이 봤어요. 처음에는 청년 학생 이미지에 갇혀 있었지만 ‘위안부’ 문제를 접하고 페미니즘 리부트를 거치면서 자기 고민을 해나가고 서사를 변주시키며 고정된 상으로부터 멀리 나아갔죠. 청년에 대한 호명 방식과 담론을 깨뜨리기 위해선 개인의 다양한 서사가 더 많이 이야기되어야 해요. 동시에 그 개인들도 청년 범주를 대할 때 나에게 도움이 될 땐 취하기도 하고 혹은 부정하기도 하는 부단한 과정에 있는 것 같습니다. Q. 석사논문 『일본군‘위안부’피해와 피해자의 의미: 한일청구권협정 부작위 위헌소송을 중심으로』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문제화하는 방식을 다시 물으면서 이것을 페미니스트 이행기 정의 관점에서 풀어내셨습니다. 기존의 문제의식에서 미끄러지고 누락된 것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특히 위헌소송을 살펴보겠다고 결심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이재임 ‘위안부’ 문제를 두고 굉장히 많은 싸움이 일어나잖아요. 그것은 일본 정부를 향하기도 하고, 한국 정부를 향하기도 하죠. 램지어처럼 학술적 연구라는 외피를 쓰고 운동을 공격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고 있고요. 그런데 그것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기보다는 분석적인 거리를 두고 각각이 만들어내는 정치적 담론들의 모순이나 긴장을 발견하는 것이 논문의 취지였어요. 위헌소송에서 생산된 문서들을 봤던 이유는, 피청구인인 외교부 측과 청구인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일본군‘위안부’ 운동 측이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 국익, 정치적 해결, 동북아 안보 등을 두고 싸우는 장이 되었기 때문이었어요.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이 전시 성폭력 피해자의 권리 회복이 아니라 인도주의적인 조치로 빠지게 되는 것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위안부’ 운동이 가진 여러 측면 중 충분한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건 그것이 여성평화운동으로서 한일 외교관계를 적극적 평화와 여성 인권을 중심으로 재구축해가려고 했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안부’ 운동의 피해자 정치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잖아요. 운동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피해자로 만듦으로써 그들의 행위성을 빼앗고 수동적인 위치에 놓이게 해 피해 발화를 반복하게 만들었다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이 있었는데요, 저는 그것에 동의할 수 없어요. 여느 페미니즘 운동이 그러했듯 남성중심적인 법체계와 섹슈얼리티 규범하에서 무엇이 피해(자)인지 정의하는 과정도 굉장히 지난한 투쟁이었단 말이죠. 운동이, 그리고 함께해 온 우리가 피해자들의 고통과 원한, 슬픔을 말하면서 의도했던 것은 이들을 피해자로 고착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를 변혁해나가기 위한 것이었는데 왜 자꾸 그런 식으로 비판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위안부’ 운동을 페미니스트 이행기 정의라는 관점에서 다시 보고 싶었어요. 어떻게 보면 이미 선행 연구에서 많이 이야기된 지점이기도 하지만, 이 시점에서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Q. 생활지원법안부터 헌법재판소 조서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법 문서를 상세하게 분석하셨습니다. 이 자료들 사이에서 ‘피해’와 ‘피해자’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어떤 고민들이 있었을까요? 이재임 물론 법정에서의 싸움에는 그것이 갖는 한계가 있어요. 청구인은 개인이고 위헌소송은 피해자 개인의 권리 회복을 위해 제기됐던 것이니 개인의 문제로 돌아가게 된다는 쉬운 비판을 할 수도 있는데, 어찌 됐든 법정의 언어들을 보며 읽으려고 했던 것은 두터운 맥락이에요. 전시 성노예제 담론, 국제 인권법 담론을 통해 피해자들이 구제와 배상의 주체인 중대한 인권침해 피해자라고 말하기까지 얼마나 어려웠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 정부의 부작위를 묻는 위헌소송이 열리게 되기까지 얼마나 어려웠는지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요구에 따라 2000년대 초반 이후 한국 정부가 과거사를 청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그때 했던,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추궁하겠다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위헌소송이 제기되었고요. 그래서 그런 언어와 두터운 맥락들을 읽어내고 싶었어요. 그것이 작업의 최우선이었습니다. 논문에서 몇 가지 말씀드리면, 먼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냈던 청원서를 보면 스스로를 ‘우리’라는 표현으로 지칭하고 계세요. 김학순 님을 이어 나온 ‘우리’가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증언의 집합성, 연속성을 읽었어요. 그리고 논문에 일본군‘위안부’지원법의 변화를 정리하며 표를 만든 게 있는데요, 초반에는 법 목적을 인도주의적인 보호, 지원 조치로 명시했던 것을 2000년대 이후에는 ‘피해자’의 명예 회복, 진상규명, 인권회복으로 명시했어요. 이처럼 피해(자)를 사회적으로 읽어내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 피해자의 고통과 부정의를 이야기하고 사회 공동체를 재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되묻고 싶습니다. ‧이은진 발언 참고 https://www.ildaro.com/8525 https://view.pong.pub/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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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위안부’ 문제와 일본 국회 입법운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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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3년 고노담화까지 필자가 오랫동안 인권옹호 활동의 지도자로서 존경하고 의지했던 모토오카 쇼지(本岡昭次) 전 참의원 부의장이 2017년 4월 10일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모토오카 의원의 국회운동 제1단계는 1980년대 초반 국제인권법 정책 활동에서 비롯되었다. 필자의 국제인권법 실천 활동과 더불어 이미 협력관계가 구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역사1를 빼놓고는 모토오카 의원의 그 뒤 국회 활동을 이해하기 어렵다. 모토오카 의원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접근은 다음과 같은 계기로 시작되었다. 모토오카 의원은 1990년 6월 6일 참의원예산위원회에서 사회당을 대표해 질문에 나섰고, 조선인 강제연행문제를 자세히 따져 묻는 가운데 “강제연행 중에 종군위안부라는 형태로 연행됐다는 사실도 있습니다만, 맞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2 그런데 답변에 나선 시미즈(清水) 노동성 직업안정국장은 “종군위안부라는 것에 대해서는 옛날 사람들 얘기 등도 종합해 들어보자면 역시 민간업자가 그런 분들을 군대와 함께 데리고 다녔다든가 하는 상황인 것 같은데, 이러한 실태에 대해 조사해서 결과를 내는 것은 솔직히 말씀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며, 그것은 민간업자 문제이지 국가가 관여한 일이 아니므로 조사할 수 없다고 일축했다. 모토오카 의원은 이 사태를 규명하지 않고 과연 일본과 한국의 신뢰 관계가 구축되겠느냐며 가이후(海部) 총리에게 일침을 가했다. 결국 ‘정부는 조속히 보고하겠다’는 가이후 총리의 답변을 얻어 조사 결과를 기다리게 되었다. 이때의 국회 질의 내용을 알게 된 한국 여성단체는 “일본 정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 군대의 관여로 이뤄진 일이다”라며 격렬하게 항의의 목소리를 높였다. 강제로 ‘위안부’가 된 김학순 씨는 이대로는 죽어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없다며 1991년 8월 '위안부' 였던 과거를 스스로 밝히고, 명예 회복과 일본 정부의 보상을 요구하며 그 해 12월 법원에 제소했다. 그런 흐름 속에서 1992년 1월에는 미야자와 기이치(宮沢喜一) 총리가 한국 국회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군의 관여를 인정하고 사죄했다. 모토오카 의원의 매서운 추궁에 내각외정심의실은 1993년 8월 4일 ‘이른바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고, 이 조사 결과를 토대로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내각관방장관 담화가 발표되기에 이른다.3 고노 관방장관은 위안소 설치에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점, ‘위안부’ 모집에 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담당했는데, 그 경우에도 감언이설이나 강압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많았으며, 나아가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적도 있었던 점, 위안소 생활은 강제적인 상황에서 고통스러운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사죄했다. 2. 격동기 모토오카 의원의 입법운동: 1994년부터 2000년 모토오카 의원은 사회당의 ‘위안부’ 문제 책임자로서 국회 보상을 통한 입법 해결을 요구했지만, 일본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며 ‘국회 보상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국가의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재단법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을 설립하고, 국가를 대신해 국민 모금을 통한 보상금을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사업을 추진하는 민간기금정책을 추진했다. 국제법률가위원회(ICJ)4와 일본변호사연합회5도 이와 같은 일본 정부의 조약 항변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다하도록 권고했다. 모토오카 의원은 국민기금을 진정한 사죄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피해자의 목소리를 지지하며, 이를 기본적인 잘못이라 판단했다. 이제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 방침을 변경하지 않는 한 해결 행보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피해자가 성의 있는 사죄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촉진해 나갈 새로운 법률안을 국회에서 심의하고, 이를 통과시키는 것 외에는 길이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모토오카 의원은 의원입법안으로 ‘전시 성적강제피해자 문제 해결 촉진에 관한 법률안’을 입안하고, 한국을 포함한 각국 피해자들로부터 만약 입법이 성사되면 사죄로서 환영하겠다는 뜻을 사전에 확인하는 절차를 세심하게 거쳤다.6 게다가 2000년 민주당(대표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의 그림자 내각을 설득해 야당 공동 법안으로 연달아 제출되는 상황을 만들어 냈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위안부’ 문제 해결이 촉진될 것이 분명했다. ‘모토오카 법안’이라고 불린 이 법안은 야당 공동으로 10차례에 걸쳐 국회에 상정되었다. 이는 일본 다수의 국회의원들이 사죄를 위해 성실히 활동했다는 중요한 사실을 역사에 남겼다. 이 법안이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자민당과 공민당의 반대를 돌파하지 못해 법률로 통과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김학순 씨는 모토오카 의원에게 직접 “모토오카 씨, 당신은 국회의원이잖아요. 일본의 국회의원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니 우리가 작심하고 재판에 호소한 겁니다”라고 울먹이며 호소했다. 2004년 정계에서 은퇴한 뒤에도 ‘국제인권법 정책연구소’를 창설해 이 법안의 추진 등을 위해 계속 노력했고, ‘위안부’ 문제의 국가 책임에 의한 법적 해결에 집념을 불태우며 투쟁을 이어간 모토오카 의원의 원점은 김학순 씨의 호소에서 비롯된 것이다. 3. 유엔 권고를 무시한 일본 정부 필자는 모토오카 의원의 ‘위안부’ 문제 국회운동을 지원하고자 유엔에서의 운동과 법적 연구를 거듭했다. 시작은 1992년 2월 17일 유엔 NGO 국제교육개발(IED)을 대표해 유엔인권위원회(CHR)에서 “일본군‘위안부’는 성노예”라고 발언하고, 유엔에 일본과 피해자 간의 조정을 요청한 일이었다.7 이는 필자의 자발적인 활동으로8 한국 사람들에게 의뢰를 받아 시작한 게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84년 이후 계속해 온 유엔헌장에 규정된 인권 관련 절차를 활용하는 활동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1992년 2월 유엔인권위원회에서의 발언은 필자의 지금까지의 유엔 발언 가운데 가장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유엔 활동의 단초가 되었다. 이후에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위해 일본 국내 법원을 대체할 실효적 구제의 길을 열기 위해 유엔헌장상의 절차를 활용해 노력했다. 그러한 유엔 심의 과정에서 두 가지 실효적인 구제의 길9을 열 수 있었다. 1994년 필자는 유엔의 현대형 노예제 실무회의에서 IFOR(International Fellowship of Reconciliation, 국제우화회)를 대표하여 상설중재재판소(PCA)에 관한 절차 등에 관한 정보를 제출하고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같은 국가와 피해자 개인 간의 국제분쟁 해결을 위해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를 이용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피해자가 요구하는 경우 상설중재재판소를 통한 분쟁 해결에 동의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10 1995년 1월 24일의 일이었다. 피해자를 대리해 ‘위안부’ 문제를 국제중재재판을 통해 해결할 것을 요구하는 변호단에게 일본 정부는 정식으로 그 요구를 거부한다고 회답했다. 거부 이유에는 ‘조약으로 해결됐다’는 말뿐, 어떠한 합리적 내용도 없었다. 조약으로 해결이 됐는지의 여부도 중재재판으로 해결해야 할 법률문제이기 때문에 거부 사유가 되지 않는다. 이미 파탄이 난 ‘조약의 항변’을 구실로 삼아 유엔 권고의 실현을 저지한 것은 일본 정부였다. 1995년 8월 유엔인권소위원회가 ‘위안부’ 문제(기타 노예유사행위를 포함)로 처음으로 일본을 지목해서 일본 정부가 출범시킨 민간 기금 중심의 대책을 ‘미흡’하다고 비판하며, 이 문제 해결을 위해 ‘행정심사기관’의 설치를 요구하고, 나아가 1994년 현대형 노예제 실무회의가 권고한 국제중재재판의 이용을 시사하며 해결 방식을 제안했다.11 ‘행정심사기관’ 설치를 요구한 유엔 권고를 실현하려면 입법이 필요했다. 그러나 아시아여성기금정책 이후 일본의 ‘위안부’ 피해 지원운동은 분열되었고, 입법운동은 약화되어 버렸다. 자민당, 사회당, 사키가케로 구성된 3당 연립 무라야마(村山) 정권은 ‘국가보상은 불가능하다’는 합의서에 서명했다. 그로 인해 무라야마 정권을 지지하던 전일본자치단체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연합계 노동조합은 입법해결 정책을 지지하지 않게 되었다. 필자는 연구를 통해 법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입법 해결은 조약 위반이고, 헌법에도 위배된다. 그러므로 입법 해결은 불가능하다”는 입법반대설이 틀렸음을 보여주었다.12 아무리 생각해도 일본은 국가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 운동을 재개하기 위해서는 입법 해결을 목표로 하는 시민운동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1996년 12월에 ‘‘위안부’ 문제의 입법 해결을 요구하는 모임’(회장 쓰치야 고켄(土屋公献) 변호사, 부회장 아라이 신이치(荒井信一) 스루가다이대학 교수, 사무국 연락담당 아리미쓰 겐(有光健))이 결성되었다. 각주 1. 本岡昭次=中大路為弘編著, 『世界がみつめる日本の人権 : これからは人権の時代です』, 新泉社, 1991. 참조. 2. 이 질문을 포함해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국회질문은 本岡昭次, 『「慰安婦」問題と私の国会審議』, 本岡昭次東京事務所, 2002. 참조. 3. 위안부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내각관방장관담화(1993년 8월 4일) 외무성HP에서 http://www.mofa.go.jp/mofaj/area/taisen/kono.html 2023년 6월 11일 열람. 4. 국제법률가위원회(ICJ) 조사단보고서 Dolgopol and Paranjape, “Comfort Women an unfinished ordeal: Report of a Mission”, ICJ, 1994, pp.1-205. 5. 日本弁護士連合会, 「「従軍慰安婦問題」に関する提言」, 同連合会編, 『問われる女性の人権』, こうち書房, 1996년, 97-134쪽. 6. 『国際人権法政策研究』 第3巻第4巻合併号(通算第4号) 2008년 게재 논문. 특히 本岡昭次 「「慰安婦」問題と私の国会追及13年」 및 戸塚悦朗 「市民が決める「慰安婦」問題の立法解決ーー戦時性的強制被害者問題解決促進法案の実現を求めてーー」를 참조. 7. 자유권규약위원회에 대한 개인통보권조약의 비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년 유엔인권 위원회에 일본과 관련된 중대한 인권침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스스로의 과제로 삼게 되었다. 1992년에는 그 문제가 일본군‘위안부’ 문제였다. 8. 木村幹, 「慰安婦問題の国際化の一側面:戸塚悦朗の回顧を中心に」, 国際協力研究29巻1号(2021.7), 111-147쪽 참조. 9. 이러한 해결을 위한 길을 유엔인권기관에 제안한 것은 국제법률가위원회(ICJ) 조사단보고서(Dolgopol and Paranjape, “Comfort Women an unfinished ordeal: Report of a Mission” ICJ, 1994, pp.1-205.)였지만, 자세한 설명은 戸塚悦朗 『普及版日本が知らない戦争責任』現代人文社, 2008년 등을 참고. 10. 앞의 책 『普及版』. 11. 앞의 책 『普及版』, 제5장, 141-148쪽. 12. 앞의 책 『普及版』 참조. ‘조약의 항변’이 파탄났다는 것은 ICJ 보고서, 일본변호사연합회 제언, 유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동 맥두걸 보고서 등으로 볼 때 분명하다. 필자의 연구는, 戸塚悦朗, 「国際法から見た日本軍性奴隷問題」, 『[岩波講座現代の法11]ジェンダーと法』 岩波書店, 1997년 8월, 313-337쪽. 최근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관한 국제공동연구의 성과로 2022년 한국에서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동아시아 냉전과 식민지·전쟁범죄의 청산』 (김영호 외 지음, 메디치미디어)이 출판되어 한겨레신문 올해의 책 10권에 선정되었다. [2022년 한겨레 ‘올해의 책’]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072853.html 2023년 5월 19일 열람. 같은 책 게재 도츠카 논문 참조.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아카이브814 컬렉션에서도 고노담화에 관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archive814.or.kr/collection/collectionDetail.do?collectionId=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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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여행에세이] “기억의 길”을 걷다 – 일본군‘위안부’ 기억의 터와 기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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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으로 ‘여행’의 가능성이 차단된 시대, <결>은 이에 대한 갈증을 글로나마 풀며 여행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는 일제 침탈과 일본군‘위안부’관련 흔적이 남아있는 지역을 살펴보고 그 안에 담겨있는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서울, 통영, 천안, 대구, 제주 등 ‘위안부’ 역사와 관련된 다섯 지역을 따라가며, 꼭 기억해야 하지만 쉬이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 1. 서울편 - “기억의 길”을 걷다 – 일본군‘위안부’ 기억의 터와 기림비 2. 통영편 - 아름다운 항구, 통영에 자리한 아픈 역사의 길을 걷다 3. 천안편 - 하늘아래 가장 편안한 곳에 잠든 당신들의 안식을 기원하며 4. 대구편 -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으로 떠나는 근대문화거리 투어 5. 제주편 - 총구는 늘 약자를 향한다–전쟁과 일본군‘위안부’, 그리고 제주도 추천코스 남산예장공원[이회영 기념관, 기억6전시관] → 남산인권숲 →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대지의 눈, 세상의 배꼽, 통감관저 터 표석, 거꾸로 세운 동상] → 국치길[통감관저 터 → 조선총독부 터 → 노기신사 터 → 경성신사터·일제갑오역기념비 → 한양공원 기념 비석 → ‘삼순이 계단’] → 서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기억의 터 남산 자락 ‘일본군‘위안부’ 기억의 터’로 가는 길목에는 ‘남산예장공원’이 있다. 공원은 세종호텔 건너편으로 남산 1호 터널과 남산으로 올라가는 도로 사이, 서울소방재난본부 아래쪽에 있는데 오랜 공사 끝에 2021년 6월 개장했다. 공원은 두 개 층으로 나뉜다. 들머리를 따라 친환경 버스 환승센터를 지나면 공원 아래층엔 ‘예장마당’과 ‘이회영 기념관’이 있다. 전 재산을 들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평생 조국 독립에 헌신한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과 여섯 형제를 기념하는 공간이다. 공원의 윗부분은 푸른 소나무 숲, 명동~남산을 보행으로 연결하는 진입광장, 샛자락 쉼터 등을 두어 시민들의 휴식처로 꾸며졌다. 하지만 여기서 더 눈에 띄는 것은 빨간색 우체통 모양의 ‘기억6전시관’이다. 전시관은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침해라는 아픈 역사를 돌아보는 공간으로 옛 중앙정보부의 지하 고문실을 재현해 두었다. 기억6전시관 앞에는 재생사업 과정에서 발굴된 조선 총독부 관사의 기초 일부분을 그대로 보존한 유구터를 비롯해 철거 당시의 콘크리트 잔해와 부서진 기둥을 활용한 벤치 등이 놓여 있다. 예장공원의 ‘남산위에 저 소나무 오솔길’을 지나면 서울소방재난본부에서 서울유스호스텔까지 이어지는 ‘남산인권숲’으로 들어선다. 이 일대가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중앙정보부(안전기획부) 자리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일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기억의 터도 여기에 있다. 바닥에 그려진 노란 나비가 기억의 터에 다 왔음을 알려준다. 기억의 터 오른쪽에는 키오스크가 설치되어 있다. 기억의 터 소개와 조성 과정, 작품 해설, 함께 만든 이들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되어 있고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도 볼 수 있다. 특히 “올해 나이 92세 이름은 김.복.동, 피해자입니다”로 시작되는 ‘위안부’피해자 김복동 님의 인터뷰는 이곳을 찾은 사람의 마음을 다잡게 한다. 기억의 터는 서로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두 가지 주제가 함께 하는 곳이다. 식민지 침탈의 중심이었던 ‘통감관저 터(총독관저 터)’와 그 피해를 가장 심하게 당한 ‘위안부’를 위한 장소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대지의 눈’과 ‘세상의 배꼽’ 사이에 ‘통감관저 터 표석’과 ‘거꾸로 세운 동상’이 있다. 그래서 이곳을 만든 임옥상 작가는 “포위하되 포용하고 꾸짖되 용서하는 모성으로 세상을 보듬는” 의미의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기억의 터는 직선의 통감관저 터 표석과 거꾸로 세운 동상을 부드러운 곡선의 대지와 조형물로 감싸고 있다. 대지의 눈은 등 뒤에 야트막한 둔덕을 얹은 반달 모양 벽으로 둘려 있다. 이 벽은 ‘통곡의 벽이자 화해와 치유의 벽’이다. 벽의 맨 위에는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이 아픈 역사가 잊혀지는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그다음 “이렇게 끌려갔다”, “너무 험한 악몽이다”, “해방 후 귀국·귀향”, “반세기의 침묵을 깨다”, “수요시위”, “소녀상”, “나비기금”, “인권평화운동” 순서로 피해자들과 관계자들의 증언이 새겨져 있다. 한 줄 한 줄 나지막이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간다. 눈으로 볼 때와 달리 소리를 내었을 때 점차 피해자들의 절절한 아픔과 절망과 눈물이 배어든다. 무엇보다 읽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 것은 첫 증언자 김학순 님의 “차라리 속이 후련하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나를 살려준 것은 이 문제를 위해 싸우라는 뜻이라 생각한다”라는 증언이다. 이용수 님은 “나는 여기 저와 함께 있는 이 여성들 때문에 이렇게 과거의 아픔을 이기고 여러분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었습니다”라고, 길원옥 님은 “우리 아이들은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야 해요…… 다시는 이런 전쟁을 하지 말라고 요구했습니다”라고 하셨다. 원망과 아픔에 온몸과 마음이 찔려 아물기 힘들 상처를 끌어안고서 증언하고, 당당하게 싸우고, 다른 이들을 위해 평화를 요구한다. 적당히 세상과 불의에 타협하고 사는 사람으로서 감히 엄두도 못 낼 용기에 먹먹해진다. ‘위안부’피해자들은 다만 ‘잊혀지는 것이 두렵다’고 했지만, 그들이 말한 것은 ‘잊지 말고’ ‘정의와 평화와 인권을 위해 함께 힘을 내야’ 한다는 다그침이리라. 이런 사연들 왼쪽에는 기억의 터를 조성하는 의미로 피해자 247명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오른쪽에는 피해자 김순덕 님의 ‘끌려감’이란 그림이 있다. 무궁화 가득 핀 한반도에 서 있는 한 여성의 팔목을 바다 건너 끌어당기는 손. 동그랗게 뜬 여성의 눈에서 당황스러움과 무서워 온몸이 얼어붙는 공포가 그대로 전해진다. 벽을 마주하고 서서 내용을 읽다가 문득 발밑을 보면 까맣고 둥근 동그라미 위에 내가 서 있고, 이 동그라미에 내 모습이 비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역사를 돌아보고 미래를 지켜보는 대지의 눈이다. 대지의 눈에서 돌길을 따라 세상의 배꼽으로 간다. 세상의 배꼽은 부드러운 언덕으로 둥글게 감싸져 있다. 언덕에는 여름에 빨갛게 꽃피는 백일홍나무와 아직은 감이 두세 개만 열리는 어린 감나무가 자라고 있다. ‘배꼽’ 안으로 통하는 작은 길은 양쪽으로 나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가운데에 보름달같이 둥글고 큰 돌이 있고, 그 주변에 80여 개의 크고 작은 돌들이 흩어져 있다. 둥근 돌에 앉으면 언덕 때문에 밖이 보이지 않아 포근하고 호젓한 기분으로 숲과 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 둥글고 큰 돌은 배꼽을 뜻한다. 어머니와 아기의 생명을 잇는 배꼽처럼 피해자들과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돌에는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라는 글귀가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적혀 있다. 마주 잡은 두 손을 그린 윤석남 작가의 작품도 새겨져 있다. “기억하지 않으면 되풀이될 것”이고, 기억하기 위해서는 혼자가 아니라 “서로 손을 맞잡고” 나서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둥근 돌에 앉아 몸에 힘주어 돌을 흔들어본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돌이 흔들흔들 묵직하게 흔들린다. 돌의 흔들림과 그 위에 앉은 우리의 흔들림이 함께 물결처럼 언덕을 넘어 저 바깥 멀리까지 퍼져나간다. 일본군‘위안부’피해자에 대한 기억과 공감의 물결이다. 배꼽 돌 옆에 여기저기 놓인 돌들은 전국 곳곳에서 가져온 돌로, 고향을 떠나온 피해자분들의 마음이라고 한다. 돌들을 가로지르는 길 끝에는 기억의 터를 만드는 과정에 함께해준 분들의 이름을 새긴 명패가 있다. 기억의 터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과 우리 민족의 치욕스러운 역사를 함께 품고 있다. 식민지 민중의 가슴 아픈 고난을 상징하는 일본군‘위안부’피해자를 기억한다는 것은 식민지 역사의 극복이고 미래를 향한 다짐이 될 것이다. 다시 세상의 배꼽을 되돌아 나오면 대지의 눈 사이에 두 가지 조형물이 있다. 서울 유스호스텔과 남산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는 통감관저 터 표석이 놓여 있다. 기억의 터는 2017년 8월 29일에, 이 표석은 2010년 8월 29일에 세워진 것이다. 기억의 터가 있기 이전에 이곳은 통감관저 터였다. 대한제국 시기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통감부가 설치됐는데, 지금의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자리다. 그리고 일본공사관이었던 이곳은 통감관저로, 1910년부터 1939년까지는 총독관저로 사용됐고 이후에는 시정기념관으로 이용됐다. 1960년대 남산 자락에 중앙정보부가 들어서고 1996년 이후에야 남산이 시민들에게 다시 공개됐을 때엔, 통감관저가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알 수 없게 됐다. 기록들과 당시 사진에서의 400년 넘은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그리고 하야시 곤스케(林権助)의 동상 좌대 판석이 발견되면서 이곳이 통감관저였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10년 국치 100주년을 기념해 통감관저 터라는 표석을 세우게 됐다. 1910년 8월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통감은 이 통감관저에서 한일강제병합 조약을 체결했다. 8월 29일 순종과 일왕의 조서가 정식으로 공포되면서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사는 끝을 맺게 됐다. 바로 ‘경술국치’이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역사의 현장이기에 여기에 표석을 세웠다. 울퉁불퉁한 대리석으로 된 거꾸로 세운 동상은 표석을 마주하고 있다. 이것은 하야시 곤스케라는 일본 외교관 동상을 받치는 받침석이었다. 하야시 곤스케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 공사(公使)였다. 그는 일제의 러일전쟁 승리를 위해서 대한제국을 압박해 한일의정서, 한일협약, 을사조약을 맺게 한 장본인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뛰어난 업적을 발휘한 외교관이었기에 남작 작위를 주고 1934년에는 아직 살아 있음에도 동상을 만들어 이곳(당시는 총독관저)에 세워주었다. 사진을 보면 거의 실물 크기 동상으로 좌대 판석까지 합치면 4m 이상은 될 것 같다. 이 동상도 해방 이후 어떻게 파괴됐는지 알 수 없지만 2006년 이곳에서 발견된 좌대 판석 3개를 활용하여 2015년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여기에 다시 세웠다. 하지만 곱게 세우지는 않았다. 거꾸로 그리고 뒤집어서 치욕스럽게 세웠다. 원래는 울퉁불퉁한 면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동상 뒤쪽으로 돌아가면 “男爵林林権助君像(남작하야시곤스케군상)”이란 글씨가 거꾸로 되어 있다. 이를 자세히 읽기 위해 허리를 꺾을 필요는 없다. 발아래 반짝이는 까만 돌에 글씨가 비쳐 제대로 읽을 수 있다. #국치길 서울시는 2018년 통감관저 터를 시작으로 하는 ‘국치길’을 조성했다. 국치길은 우리가 걷고자 하는 ‘기억의 길’이기도 하다. 국치길은 통감관저 터에서 시작해 남산으로 올라가는 도로를 따라간다. 첫 번째 만나는 곳이 ‘조선총독부 터’(지금의 서울애니메이션센터)이다. 버스 정류장 옆에 김익상 의사의 ‘조선총독부투탄의거(1921년)’를 기념하는 안내판도 함께 있었으나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재건축이 진행되면서 잠시 치워졌다. 조선총독부 터에서 다시 ‘소파로 길’을 따라 약 400m 남짓 올라가면 리라아트고등학교가 있고, 학교 안 남산원에는 ‘노기신사 터’가 있다. 노기신사는 일본인들이 러일전쟁의 영웅으로 여기는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신으로 삼아 1934년 세워졌다. 리라아트고등학교 옆 숭의여자대학교는 ‘경성신사 터’였다. 경성신사는 조선신궁이 세워지기 전까지 총독부가 제의를 관장했던 최고의 신사였다. 또 한편에는 일제의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전사자를 추모하는 ‘일제갑오역기념비’도 있다. 숭의여자대학교를 나와 남산케이블카를 100여m 지나면 남산 일대에 살던 일본인들을 위해 만든 ‘한양공원’의 기념 비석이 있다. 이제 길의 거의 끝에 왔다. 이른바 ‘삼순이 계단’이라는 계단이 남산을 향해 쭉 뻗어 있다. 친구들과 가위 바위 보하며 오르기도 했고 로맨스 드라마 주인공들이 아름다운 입맞춤을 했던 이 계단은 누가 언제 왜 만들었을까? 남산은 산 위에서 한양 시내가 모두 들여다보이기 때문에 조선 시대 내내 백성들은 함부로 오를 수 없는 산이었다. 또 국가 제사 시설인 국사당이 있던 신성한 산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국사당을 인왕산 아래로 쫓아버리고 한양 성곽도 무너뜨리면서 1925년 조선신궁을 지어 일본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메이지왕(메이지천황)의 신위를 안치했다. 조선신궁은 우리 민족에 대한 정신적, 종교적 수탈의 장소였다. 삼순이 계단은 바로 조선신궁으로 참배하러 가는 계단이었다. #기림비 계단을 다 오르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로 돌아 서울을 한 번 내려다보면서 시원한 바람을 맞는다. 그러고 나서야 몸을 돌려 남산공원을 둘러본다. 계단 끝 느티나무 한쪽에는 서울시교육청 교육정보연구원, 한쪽에는 ‘서울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기림비’가 있다. 남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몇십 년 전 기억으로 식물원과 분수대를 찾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자리에는 ‘조선신궁 배전 터’와 ‘분수대 터’, ‘한양도성유적전시관’이 복원되어 있고, 공원 끝에는 남산도서관과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입은 한국, 중국, 필리핀 등 미국 내 13개국 커뮤니티가 연합해 일본의 압박과 방해를 이겨내고, 2017년 샌프란시스코 세인트 메리 광장에 ‘위안부’ 기림비를 세웠다. 그리고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김진덕·정경식재단 등 샌프란시스코 교민들이 자발적으로 뜻을 모아 샌프란시스코 기림비와 같은 모양으로 서울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기림비를 서울시에 기증했고, 그것을 2019년 8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에 여기에 세웠다. 왜 남산에 세웠을까? 서울특별시, 서울특별시교육청, 정의기억연대는 시민들이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좀 더 가까이 접하고 기억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시민들이 많이 찾는 일상적 공간이자 일제 침탈의 아픔을 간직한 역사적 장소인 이곳에 평화와 인권의 상징물인 기림비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샌프란시스코 기림비는 높은 단 위에 서 있는 세 여성을 김학순 님이 올려다보는 모습이다. 반면, 서울의 기림비는 김학순 님과 세 여성 모두 평지에 나란히 서 있고 세 여성 사이에 한 사람이 더 들어가 함께 손잡을 수 있도록 자리가 비워져 있다. 누구든지, 몇 사람이든지 손을 이어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림비 옆에 있는 다섯 개의 앉음돌은 김학순 님이 태어난 중국 지린성, 돌아와 살았던 평양, ‘위안부’ 피해를 당했던 베이징, 도망친 후 살았던 상하이, 해방 후 돌아온 서울, 이렇게 다섯 장소와 거쳐 온 시간을 의미한다. 기림비는 김학순 님이 서로 손을 굳게 맞잡고 서 있는 한국·중국·필리핀의 세 여성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김학순 님은 자갈밭에, 여성들은 맨발로 거친 흙 위에 서 있지만, 굳은 의지로 가득 찬 눈동자와 꽉 다문 입, 당당하게 편 가슴, 서로 깍지 낀 손은 아주 단단해 보인다. “여성 강인함의 기둥”이라는 샌프란시스코 기림비의 제목이나 “정의를 위한 연대”라는 서울 기림비의 제목은 기림비가 지닌 의미를 그대로 전해준다. 전쟁 중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와 성폭력, 인신매매는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현재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이를 멈추게 하기 위한 여성들의 투쟁과 연대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기억의 터에서 시작한 기억의 길은 여기서 마무리된다. 나라를 잃고 일제의 침략 현장이었던 국치길과 함께하는 기억의 길은 왜, 무엇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를 되새기는 길이며, 기억이 왜곡되지 않고 정의와 인권과 평화를 향한 길을 잃지 않도록 되새기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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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인터뷰 힘없는 사람의 역사가 기억되는 인간적인 사회를 위해 - 사회정의교육재단 손성숙 대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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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역사-사회과학 교과과정 지침에 2015년 한일합의 내용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이 합의에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포함되지 않았는데, 그 뒤에는 일본 정부의 열성적인 로비 활동이 있었다. 역사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지우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에 맞서 올바른 역사를 알리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도 곳곳에 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에서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약자와 피해자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 뛰고 있는 사회정의교육재단(Education for Social Justice Foundation, ESJF)의 손성숙 대표를 만나 미국 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과 반응, 그리고 ‘위안부’ 역사 교육의 현황을 들어보았다. 샌프란시스코 교육위원회 발의안부터 교재 개발, 교사 워크숍까지 Q. 안녕하세요, 대표님. 웹진 결 독자 여러분께 사회정의교육재단을 간단히 소개 부탁드려요. 네, 저희는 과거 부당하게 외면당한 역사를 교육을 통해 알리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비영리 교육단체이고요, 2017년 다인종 멤버로 구성된 활동가와 현직교사들이 함께 모여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설립했습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저희가 다루는 프로젝트 중 첫 번째 주제이고요, 이외에 731부대 문제와 같은 의학 잔혹행위, 아시아인들의 초기 미국 이민 역사와 같이 크게 3개의 주제를 함께 고민하고 있어요. 모두 식민지 역사와 연결된 문제들이죠. Q. 2017년에 재단을 설립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교육에는 항상 관심이 많았어요. 제가 전직 샌프란시스코 공립학교 이중언어 교사거든요. 1994년에 샌프란시스코 통합교육구 교사로 한글 이중언어 프로그램을 개발하기도 했죠. 교육에 대한 관심이 ‘위안부’ 이슈로 연결된 계기는 세 가지예요. 우선 저희 할머니께서 김학순 할머니보다 2년 전에 태어나셨어요. 어려서 ‘위안부’ 역사를 처음 접했을 때, 우리 할머니도 피해자가 될 수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위안부’ 문제에 공감과 채무감을 항상 느껴왔습니다. 그러던 중에 2015년에 합의 아닌 합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고 정확한 ‘위안부’ 역사 교육의 필요성을 실감했어요. 사실 그 합의 직전 10월에 샌프란시스코 교육위원회에서 ‘위안부’ 역사를 공립학교 10학년 과정에서 가르칠 것을 제안하는 발의안이 상정되고 통과됐잖아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두 달 뒤에 말도 안 되는 그 합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잘못하면 이번에도 묻히는 게 아닌가 싶어 교육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들었어요. 그리고 이게 재단 설립을 서두른 이유가 될 텐데요. 2016년 12월에 일본 지바 시에 있는 조선초중급학교에서 학생 미술전이 있었어요. 학생 출품 작품 중에 2015 합의의 문제점을 지적한 작품이 두 개 있었는데요. 그걸 구마가이 지바 시장이 보고 이듬해 봄에 그 학교의 시 보조금을 삭감해버렸죠. 이 사건을 보고 지바 조선학교를 조금이라도 빨리 돕고 싶었어요.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말한 두 학생에게 그들의 용기있는 행동을 지지하고 싶었고, 그 두 학생이 부당하게 불이익을 당한 지바 조선학교에게 혹시라도 미안해할까 봐,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2017년에 조금 급하게 재단을 설립했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지바 조선학교에 작은 도움을 드리고 있어요. Q. ‘위안부’ 역사 교육을 위한 교재까지 직접 만드셨죠. 2015년 10월에 발의안이 통과되긴 했지만, 제안으로 끝나지 않고 적극적으로 샌프란시스코 교육시스템 안에서 실천이 되려면 부모님들의 지지가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2016년 1월에 학부모님들과 캠페인을 했어요. ‘발의안을 지지한다. 빨리 교실에서 가르쳐달라’는 내용으로 샌프란시스코 통합교육구에 편지를 보낸거죠.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샌프란시스코 통합교육구에서 ‘가르치겠다, 그런데 관련 자료가 너무 없으니 좀 구해달라’고 요청을 해왔죠. 그래서 저 나름대로 모아서 2016년 말에 제출했어요. 그런데 그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점검해서 학습안을 만들고 커리큘럼을 짜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는지 2017년 봄학기가 그냥 지나가더라고요. 통합교육구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과 ‘위안부’ 역사를 같이 가르치라고 제안했는데, 보통 샌프란시스코 교육 커리큘럼에서는 그걸 봄학기에 많이 가르치거든요. 발의안이 2015년에 통과되었는데 2016년 봄학기도 넘기고 2017년 봄학기까지 넘기게 되다 보니, 그냥 직접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2017년 말부터 자료를 모아서 만들기 시작해서 2018년 3월에 교재를 출간하게 된 거죠. Q. 교재는 어떻게 구성되었나요? 교사용과 학생용이 있어요. 교사용 지침서는 세 부분인데, 첫 부분은 ‘위안부’ 역사의 배경이에요. 한국에서 시작해서 다른 나라로 퍼져간 ‘위안부’ 운동사와 기림비 건립 및 제작 과정을 다룹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 사료, ‘위안부’ 관련 1차 문서를 소개하고, 세 번째 부분에 학습안과 활동지를 담았어요. 학습안은 샌프란시스코 현직 교사들이 직접 만들었고, 활동지는 학부모님들과 함께 만들었어요. 학생용 교재에는 교사가 보는 학습안 부분만 빠져있습니다. Q. 교재에 대한 현지 반응은 어땠을지 궁금해요. 참 좋아요. 작년 4월에 교육구에 교재를 가지고 가니, 담당자가 직접 샌프란시스코 18개 공립 고등학교에 전부 배포했어요. 지금은 고등학교, 대학교 특강과 워크숍 등에 활용되면서 교재가 다른 여러 도시로 퍼지고 있습니다. 두 달 전에는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대학교에서 특강을 했는데, 그 수업의 교수님이 저희 교재가 아주 잘 만들어졌다며 앞으로도 수업 시간에 활용하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고무적인 반응이죠. Q. 직접 워크숍도 열고 계시죠? 네, 캘리포니아의 교육제도는 교사들의 자율 영역이 굉장히 커서, 중앙에서 무엇을 가르치라고 해도 교사들이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제안으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위에서 아래로 전달은 됐으니, 이제 재단이 밑에서 위로도 일을 해야죠. 그래서 저희가 만든 교재로 직접 워크숍을 합니다. 교재를 그냥 드리는 것보다 워크숍을 하면서 몇 쪽에는 어떤 내용이 있고 몇 쪽에는 무슨 문서가 있다고 얘기하면, 교사분들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잖아요. 직접 워크숍을 열기도 하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강의를 나가기도 하는데, 워크숍에는 샌프란시스코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의 교사들도 많이 오세요. 난관과 도움, 잊을 수 없던 순간들 Q. 샌프란시스코 기림비 설립 과정에서도 어려움이 많았는데, 재단의 활동을 반대하거나 방해하는 움직임은 없나요? 저를, 저희 재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엽서는 받아요.(웃음) 확실히 미국에 있는 일부 역사수정주의자들이 손 놓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최근에는 어떤 단체가 프린스턴 대학교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 Princeton Institute for Asian Studies 라는 이름을 내걸고 ‘위안부’ 자료를 자기네 입맛에 맞추어 써서 캘리포니아 전역에 배포한다는 소식을 접했어요. 그런 말을 들으면 미국에서 저희가 할 일이 더 많아졌구나, 꾸준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죠. 그런데 참 역설적인 게 뭐냐면요, 일본 수정주의자들이 이러면 이럴수록 사람들 사이에서 ‘위안부’에 대한 문제의식이 점점 더 커져요. 물론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그들이 오히려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오사카 시장이 샌프란시스코 시에 ‘위안부’ 기림비가 세워지는 것을 적극 반대하더니 작년에 결국 1957년에 맺은 샌프란시스코-오사카 자매 도시 결연을 파기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위안부’ 문제를 더 많은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죠. 또 한 가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생각보다 많은 일본인들이 이 운동을 지지하고 도와주신다는 겁니다. 생각해보면 음으로 양으로 다들 도와주시는 것 같아요. 반대를 해도 결국은 도움이 되고, 도와주시는 것도 도움이 되는 거고.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Q. 워크숍을 하시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 재미난 에피소드는 아니고, 좀 마음에 남는 일이 있었어요. 작년 가을이었죠. 한 일본인 교사가 워크숍이 끝난 후 질의응답 시간에 손을 번쩍 들고 하시는 말씀이, 본인이 일본 사람이라 약간 걱정을 하셨대요. 일본의 전범 책임이라든가 일본인 혐오라든가 한일 양국의 대립 같은 것이 언급될까 걱정했는데, 막상 와서 들어보니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교육을 통해서 인권을 보장하고 전쟁 없는 세상에서 평화롭게 다 같이 잘 살 수 있을지, 우리 교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하는 자리여서 너무 좋았다고요. ‘위안부’ 문제를 좀 더 폭 넓게 이해하게 되었고, 이제는 본인도 가르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Q. 그 때 정말 보람이 크셨겠네요. 이 일을 하면서 감사와 보람을 느낄 때가 참 많아요. 지난 6월 19일에 세계 전시성폭력 추방의 날을 맞아 정의기억연대에서 주최한 교사워크숍과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했는데, 그곳에 콩고, 우간다 그리고 코소보 성폭력 피해자와 활동가들이 오셨어요. 저희 발제가 끝난 다음에 그분들이 오셔서 교재를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귀국해서 지침서처럼 쓰시겠다고 하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교재를 쓰신 교사 중에 크리스티나 탱이라는 분이 계신데요. 탱 선생님은 고등학생 때 우연히 ‘위안부’ 역사에 대해 알게 돼서, 만약 나중에 교사가 된다면 이 문제에 대해 가르치겠다고 자신과 약속하셨대요. 그런데 진짜 고등학교 역사 교사가 되셔서, 그 약속을 지키고 계셨어요. 제가 만나기 몇 년 전부터. 이런 분들과 함께 일하다 보니 정말 감동을 많이 받고 큰 힘을 얻습니다. 가부장제, 전시 성폭력, 미투 운동 - ‘위안부’ 문제는 현재의 현실이다 Q. 미국 학생들에게 ‘위안부’ 문제가 낯설 듯도 한데, 수업 후의 반응은 어떤가요? 고등학교 수업에 가서 직접 강의를 해보면, 아이들이 굉장히 세심하게 잘 들어요. ‘위안부’ 피해자들의 당시 연령이 학생들과 비슷해서 더 잘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 같아요. 수업에서 현재 벌어지는 여러 전시 성폭력 문제도 함께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한국과 일본의 정치에 국한된 문제로 학생들이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위안부’ 문제는 연결되는 주제가 많은 것 같아요. 가부장제라든가, 식민지라든가, 제국주의라든가, 여성혐오라든가.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러한 문제가 너무나 많은 나라에서 아직 진행 중이다 보니, 우간다나 콩고에서는 전시 성폭력 문제에 접목을 시킬 수 있을 것 같고, 다른 나라에서도 현재의 문제에 ‘위안부’ 문제를 접목시켜서 교육하는 게 효과적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제2차 세계대전과 함께 가르치라고 제안하죠. 샌프란시스코 교육위원회에서는 여성 인권 문제와 관련하여 가르치도록 제안하고요. 실제로 둘 다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지만, 막상 저희에게 강의 요청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 요새는 미투 운동 그리고 성폭력, 그 다음에 샌프란시스코의 ‘위안부’ 운동 역사, 이런 것이 제일 많아요. 그러면 저희도 그분들이 알고 싶어 하는 이슈부터 시작해서, ‘위안부’ 문제 관련 사료처럼 기본적인 부분까지 함께 알려드리고 있죠. Q. 미국 내에서는 미투 운동(Me Too Movement)과 같은 맥락에서 할머니들의 피해생존자로서의 증언, 고발과 그 이후 인권운동가로서의 면모에 관심을 두고 있군요. 맞아요. 저는 미투 운동에 대해 이야기할 때, 1990년대에는 미투라는 용어가 쓰이지 않았지만, 피해자 할머님들을 미투 운동의 선구자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해요. 너무나도 불행하게 1990년대에도 고발을 했는데, 지금까지도 고발을 해야 하고 운동을 하고 있으니,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분발해야 되지 않겠느냐, 이런 이야기를 하죠. 성폭력을 이야기할 때에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겪은 성폭력, 다른 나라 다른 상황에서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의 이야기도 함께 하고요. 미국은 다인종이 모인 나라이다 보니, 다른 나라 피해자들도 얘기하는 게 너무나 당연해요. 자칫하면 한국 피해자한테만 관심이 있고 다른 사람들 인권에는 관심이 없는 걸로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도 안되고요. 피해자가 스스로 바로잡아가는 역사, 그 어마어마한 움직임과 함께 Q. 계속 활동을 이어가는 힘을 어디서 얻으시나요? 원동력이요?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의미 있는 일을 같이 하면서 느끼는 보람, 감동이라고 할까요. 2017년 말에 갑자기 교재를 쓰게 되었는데, 너무나 많은 분들이 열정적으로 도와주셨어요. 샌프란시스코 기림비 건립 발의안을 상정하고 통과시킨 에릭 마 시의원, 기림비 작가 스티븐 화이트, 엘렌 위슨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기고를 해주셨고, 교재 디자인해주신 분들은 제가 부탁하지 않아도 스스로 개선점을 찾아 작업해주시기까지 했어요. 너무 감사하더라고요. 저희가 비영리단체이다 보니 사례금을 아주 작게 드릴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 두 분이 함께 학습안을 쓰셨어요. 나중에 이분들께 작은 사례를 하는데 정말 안 받으시려는 걸 우겨서 드렸어요. 많은 분들이 개인적인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교육을 위해서 열성적으로 동참해 주셨어요. 저희 홈페이지에도 교재 안에 있는 나비 그림이 있는데요. 학습안을 쓰신 페이 콴이라는 교사분이 직접 그려주신 거예요. 정말 이 프로젝트는 완전히 집단의 노력이에요. 저는 협업의 중요성을 진짜 믿습니다. Q. 앞으로 교육 이외의 활동도 더 확대하실 계획인가요? 저는 교육이면 돼요. 다른 것은 많이 부족하고요. 교육은 해왔던 것이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는 거죠. 할 수 있는데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이번에 교사들과 한국에 와서 느낀 것인데, 미국 교사들이 한국에 대해 아는 지식이 좀 협소한 것 같아요. 교사뿐만이 아니겠죠, 일본에 의해 강점당한 것, 한국전쟁이 있었던 것. 요 두 가지로만 많이 생각하는 것 같아요. 사실 우리나라가 굉장히 멋진 나라인데 말이죠. 그래서 기회가 닿는 대로 한국 역사, 문화, 사회, 국제사회에서의 역할, 그런 것도 교사들한테 같이 알리고 싶어요. Q. 마지막으로 한국 독자들께 전하고 싶은 말씀 남겨주시겠어요. 우선, 저희를 지지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는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이중언어교사였고 언어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몰라도, 모든 언어가 동등하게 중요하고 존중받아야 하듯이 모든 사람들의 역사는 중요하고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힘없는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기억되어서, 가진 자들만의 역사가 아닌 모든 이들의 역사가 교육될 수 있게, 좀 더 정의롭고 평화롭고 조금 더 인간적인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저희 재단은 계속 전진하겠습니다. 그리고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위안부’ 운동 역사는 한국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잖아요. 그게 운동사의 맥락에서 보면 상당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죠. 제가 한국인이다 보니, ‘위안부’ 문제를 중심으로 한 국제 이슈에서 한국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전시 성폭력의 피해자가 주도해서 가해자 중심으로 서술되는 역사를 바로잡았다는 게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외에 사는 교포로서 이 움직임이 한국에서 시작되고 한국에서 이끌고 있다는 걸 국제적으로 알릴 수 있다는 게 기분이 좋고, 참 뿌듯합니다. 사회정의교육재단(Education for Social Justice Foundation, ESJF)은, 미국 학교 역사 교육과정에서 여러 이유로 등한시되고 있는 소수의 역사를, 교육을 통해 학생∙교사∙교수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탄생한 비영리 교육단체이다. 손성숙 대표는 15살에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간 1.5세대로, 언어학과 국문학을 공부한 후 샌프란시스코 교육구에서 한글 이중언어 교육프로그램을 최초로 실시했다. 범아시아계 ‘위안부정의연대’(CWJC·2015년 10월 결성) 교육위 공동의장으로 ‘위안부’ 교육 교재 만들기를 주도했고, 아시아계를 넘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소수의 역사’, ‘잊혀진 역사’를 다시 써 나가고자 사회정의교육재단을 출범시켰다. 사회정의교육재단 홈페이지 http://www.e4sjf.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