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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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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3 온라인 대담의 마지막 날입니다. 편집팀의 부족한 진행에도 불구하고 두 분께서 매우 훌륭하게 답변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은 서로가 서로에게 묻고 답을 하는 날입니다. 어제 정영환 선생님께서는 '탈분단적 시각'이라는 본래 주제에서 더욱 확장하여 박노자 선생님께 질문을 해주셨는데요. 이와 같이 오늘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서로에게 폭넓은 질문을 드리고, 이에 대한 답변을 듣고자 합니다. 1.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1 2.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2 3.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3 Q. 박노자가 정영환에게 묻다 정영환 선생님, 저로서 한 가지 큰 고민이 되는 부분을 공유하면서 같이 생각해보실 것을 제안드립니다. 일본군 성노예 제도 문제와 한국이라는 국가가 70여 년간 범해온 각종 국가적 성범죄, 성폭력들을 우리가 어떻게 같이 묶어서 분석해볼 수 있을지, 그리고 일본군과 한국이라는 국가의 국가적 성범죄의 관련성에 대해 운동사회가 어떤 시각을 가지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위안부'라는 명칭을 한국 '국군'이 한국전쟁 때도 계속 사용해왔습니다. 그때 주로 미군과 '국군'을 상대로 해온 '위안소'들은 수십 개 있었고, 그 여성 피해자들 중에서는 예컨대 한국군에 의해 납치, 감금당한 북조선 측 여성 활동가 등도 있었지만, 피해자 구성은 상당히 다양했습니다. 기존의 인신매매 피해자들이 상당수를 이루는 걸로 이해합니다. 그 뒤로는 기지촌 성매매에 대해 한국 국가는 일종의 거대한 '포주' 노릇을 해왔고 그 성매매를 국가적으로 관리해왔다고 봐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위안부' 성노예 제도에 대한 일본군과 일본국가의 책임을 상대화해서는 안 되고 물타서는 안 되지만, 성폭력, 성매매 문제에 있어서의 한국이라는 국가의 범죄성을 일본 국가/군대 범죄성과 같이 연동시켜 분석할 수 있는 틀도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이 부분에 대한 고견을 여쭈어보려 합니다. 예컨대 식민지 시대 일제에 부역해온 조선인 엘리트, 그리고 식민지적 통치기구 등 상당 부분을 그대로 살리고 계승한 '대한민국'을 일제의 사실상의 하나의 후계 국가체로 파악한다면, 성폭력/성매매 문제에 있어서의 그 범죄성과 일제의 범죄성 사이의 연관관계도 논리적으로 더욱더 명확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운동론적 측면에서 본다면 '대한민국'의 이와 같은 역사적 성격 등을 감안해서 '위안부' 성노예 피해자 정의 구현 운동은 되도록이면 좀 초국가적인, 그야말로 세계시민적인 기조로 나아가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라는 부분은 제 생각인데 어떻게 보시는지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A. 정영환이 박노자의 질문에 답하다 오늘 제기해주신 질문에 답장을 드립니다. 저도 한국과 일본 국가의 범죄성을 연동시켜서 분석할 틀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일본군 성노예제도와 한국의 국가적 성범죄를 묶어서 분석할 구체적인 방법에 관해서는 저도 많이 고민을 합니다. 일본의 수정주의자들은 일본군의 가해책임을 희석시키기 위해서 한국군의 만행, 특히 베트남 전쟁시의 민간인 학살이나 성폭력 사실을 자주 거론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절대로 언급하지 않는 것은 당시 일본 정부도 북폭을 비롯한 미군의 베트남 정책을 적극적으로, 누구보다도 빨리 지지하여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1967년에 이루어진 베트남에서의 전쟁범죄에 관한 국제법정, 소위 러셀법정은 미국의 베트남 침략의 죄와 관련하여 일본정부의 공범성을 인정하여 유죄를 선고했던 것입니다. 수정주의자는 가해책임의 상살을 위한 '비교'에만 집중하고 베트남 전쟁시 한미일의 '관계'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시하는데 저는 이 '관계'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관계라고 할 때 저는 시간적인/통시적인 관계와 공간적인/동시대적인 관계의 두 측면을 통합적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조선전쟁시 한국군'위안소'는 일본군, 만주국군 장교의 계보가 국군으로 계승되었던 사실을 제외해서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즉 일본군/한국군의 인적 연속성으로 인해 일본군국주의의 제도화 성폭력이 반공주의와 결합하여 재현되었던 것이지요. 이런 측면이 파시즘과 반공주의에 유래되는 것인지, 혹은 근대의 군대에 공통된 일반적 특징인지를 검토하는 것-사회주의국가의 사례도 보면서-이 다음 단계의 문제일 것 같습니다만 저로서는 역사연구자로서 이런 폭력의 사실들을 발굴하는 것과 동시에 다양한 형태로 폭력을 고발하여 왔던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 배우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절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언급한 러셀법정이나 Q1에서 거론한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의 경험은 더욱 공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본 온라인 대담은 팀과 커뮤니티를 위한 민주주의 플랫폼 '빠띠'에서 이루어졌다 Q. 정영환이 박노자에게 묻다 관련해서 박노자 선생님께 질문을 드리고 싶은 주제는 일본군'위안부'문제를 포함한 일본의 과거사청산과 현재 천황의 역할에 관한 문제입니다. 지난 2월10일 문희상 국회의장이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해 천황이 사과해야 한다는 취지를 발언을 해서 논란이 되었습니다. 일본 언론은 일제히 보도를 해서 반발하였는데 이 문제는 좀 더 다각적으로 검토를 해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는 선대 천황이었던 히로히토에게 분명히 전쟁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황이란 지위를 계승한 현 천황은 이와 관련한 정치적 책임을 면할 수 없고 그런 의미에서 문희상 의장의 발언 중의 '전쟁범죄 주범 아들'인 현재 천황이 사과해야 한다는 부분에는 공감합니다. 그런데 제가 우려하는 것은 혹시 천황 방한이 실현되면-퇴위 후에 갈 수도 있는데-이것은 하나의 정치적인 '화해'의 쇼로 연출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재 일본에서 천황이 맡은 이데올로기적 기능은 여전히 강력합니다. 천황은 자연재해 등으로 고통을 받은 사람들을 '위로'하여 전쟁의 '희생자'를 '위로'합니다. 이런 행동을 천황은 책임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책임이나 권리/의무 관계를 넘어선 그야말로 초연한 위치에서 수행하면서 사회적 모순을 은폐하며 '국민 통합'의 환상을 연출합니다. 현재 천황은 아마 의식적으로 이런 기능을 맡아왔고 어느 정도는 '성공'하였다고 봅니다. 일본 NHK의 여론조사 결과 79%의 일본국민이 헤이세이(平成) 시대의 이미지를 '전쟁이 없고 평화로웠던 시대'라고 본다고 대답을 했답니다. 실은 1989년이후의 헤이세이 시대는 헌법제9조가 금지한 해외파병을 일본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기지국가'로부터 '파병국가'로 전환을 했던 새로운 전쟁의 시대였는데 말입니다. 천황은 2001년의 9.11사건 직후에 주일미국대사에 조의를 전하거나 2004년에는 당시 체이니 미 부통령에게 자위대가 이라 사람들의 행복에 공헌할 것을 원한다는 취지의 메시지를 전하며 미국주도하의 일련의 '파병국가'로서의 일본의 군사행동을 지지 장식하여 왔습니다. 일본의 리버럴 지식인들도 이런 천황의 기능을 비판을 하지 않고 오히려 천황을 아베 총리와 대항하는 '평화의 상징'으로 간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황의 이데올러기적 '통합'기능은 패전 후의 그 어느 때보다도 깊어지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의 천황의 방한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식민지지배의 최고 책임자였던 천황의 범죄를 면제할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닌가 우려됩니다. 박노자 선생님께서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지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A. 박노자가 정영환의 질문에 답하다 정영환 선생님,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여러 가지 중요한 시사점들을 던지는 질문입니다. 일단 히로히토가 전범이라는 점은 분명히 역사적 사실임에 틀림없습니다. 히로히토의 유명한 평전을 쓴 Herbert P. Bix 선생과 같은 원로 연구자들의 일치된 의견이기도 하고, 전쟁 직후에 미군 쪽에서도 다수가 사실상 생각했던 부분입니다. 천황에 대한 전쟁 책임 면탈은 어디까지나 오로지 정치적 판단 (일본 보수 세력과의 새로운 유착의 시초)에 불과했으며 법률적인 판단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전쟁 주범의 아들'은 틀린 이야기가 아니고 그저 팩트에 불과합니다. 네, 정영환 선생님의 우려를, 저도 공유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천황의 보수적 '국민 통합' 기능은 여전히 강하고, 거기에다가 한국에서 정치적 '한일 화해 쇼'를 연출하려 하는 정객들이 여전히 적지 않게 있다는 겁니다. 일본과 약간 다르지만, 한국의 지배층은 외교 문제에 대해 상당한 분열상을 보입니다. 지금 집권 중인 자유주의자들은 남북 화해, 협력에 집중하면서 과거 오바마 정권이 강조했던 '미-일-한 삼각 동맹 관계"에는 다소 소극적입니다. 동맹이라면 한-미 동맹 정도만 생각하고 '삼각' 동맹까지는 그렇게까지 원하지 않는 듯합니다. '삼각' 동맹이 남북화해 사업에 핵심적 역할을 할 중국에 그다지 반갑지 않기도 하고, 또 자유주의자들에게 투표하는 사람들의 상당수에게 그 이미지가 전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민주당이 대표하는 자유주의자들은 한국 정계의 한 분파에 불과합니다. 이외에는 자한당 등이 대표하는 극우적 경향의 여러 계파들이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특히 군대나 특수국가기관(첩보기관 등)에서 상당한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자유주의자들도 극우들의 의중을 전혀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컨대 극우파가 절대 반대하는 이석기 전 의원의 사면 등을, 자유주의 정권은 하지 못하고 있는 거죠. 극우파 같은 경우에는 미-일-한 삼각 동맹의 지지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극우파가 다시 집권하거나, 레임덕에 빠진 자유주의 정권이 극우파의 눈치를 심하게 보게 되면 '천황 반한' 쇼와 거기에 따르는 '화해' 쇼를 얼마든지 연출해볼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쇼는 무엇보다 피해자들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것입니다. 아직 배상도, 제대로 된 국가적 레벨의 사과도, 재발 방지 보장도 받지 못한 피해자들에게는 '화해' 쇼는 그제 서경식 선생님의 표현대로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에 불과합니다. 이러 가능성을 한국 사회 운동 진영이 염두에 두고, 미리 그 반대에 대한 확연한 의사를 정계와 사회에 정확히 전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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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논평 묻기에서 듣기로 / 단수에서 복수로, ‘위안부’ 서사 규범의 변화가능성 - 증언소설로서의 김숨의 『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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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작가 특집: 역사, 증언, 그리고 문학 1991년 김학순의 증언 이후 30년.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을 ‘듣는’ 우리는 어디까지 와있을까. 낯선 땅으로 ‘끌려간 소녀’, 고통의 기억을 몸에 새긴 ‘할머니’, 문제해결을 위해 국제적으로 목소리를 높인 ‘여성인권 운동가’에 이르기까지, 그저 ‘피해생존자’로 한정하고 손쉬운 프레임 안에 가둬온 것은 아닌지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2016년 이후 또렷해진 페미니즘 담론과 ‘미투’ 운동의 흐름 속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할 것인지 질문은 계속되어 왔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복수의 구술증언을 토대로 쓰여진 김숨의 장편소설 『한 명』(2016,현대문학)은 발표 이후 꾸준히 이 ‘재현’의 문제를 논하기 위한 재료로 이야기되어 왔으나, 이 의제가 갖는 중요성과 무게에 비해 충분히 논의되었는지 의문이다. 2021년 9월, 동명의 소설이 연극으로 재탄생하여 무대에 올랐고, 이 소설이 전제하고 있는 극중 상황과 마찬가지로 정부 등록 일본군’위안부’ 생존자의 수는 계속해서 줄어가고 있다. 웹진 <결>은 피해 당사자이자 목격자, 증언자이자 기록자로서의 ‘한 명’들의 기억이 현재 한국 문학에서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지, 이 패러다임의 전환은 어떤 차원에서 고민되어야 할지 진지한 논의의 장을 제안하고자 한다. 소설 『한 명』을 포함한 김숨 작가의 글을 중심으로 네 명의 필진이 ‘위안부’ 문제의 재현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져 줄 것이다. 이 각각의 질문이 앞으로 더 발전적인 논의를 위한 출발점이 되기를 희망한다. 01. 소설 『한 명』이 연극 <한 명>이 되기까지 | 국민성 02. 묻기에서 듣기로 단수에서 복수로, ‘위안부’ 서사 규범의 변화가능성 - 증언소설로서의 김숨의 『한 명』 | 권김현영 03. ‘한 명’이 마지막이 되지 않으려면 | 강희정 04. 저문 증언의 시대에서 | 박혜진 * 이 글은 2019년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콜로키움에서 발표한 소영현 선생님의 글에 대한 토론문 [피해자-되기 주체-서사의 곤경과 재현의 문제]를 바탕으로 수정 및 개고한 것임을 밝힙니다. 문학이 증언이 될 수 있을까 문학은 증언이 될 수 있을까. 아니, 문학이 증언이 되어야 한다면 왜 그래야 할까. 문학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증언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성립하려면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첫째는 (문학이라는 형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말해질 수 없는가이다. 나는 몇 년 동안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의 여성인권 문제를 기회가 닿을 때마다 취재하고 있는데, 당사자들은 모두 인터뷰를 연구목적으로 이용하는 걸 거부했다. 인터뷰 내용은 드라마나 소설과 같은 픽션으로 만드는 것만 가능했고 그것 역시 사전에 충분히 익명처리가 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는 각서를 썼다. 성과 관련된 폭력 문제가 사회적인 문제가 좀처럼 되기 어려운 이유는 피해자가 이렇게 나서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성폭력 범죄의 별칭은 한때 ‘피해자 없는 범죄’였다. 그런데 ‘위안부’ 문제는 다르다. 당사자의 증언은 증언집과 인터뷰, 국제법정에서의 발언 등으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말해지지 않은 게 아니라 들려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따라서 두 번째 전제는 이미 말해진 이야기를 다시 문학을 통해서 전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이다. 가장 게으른 답변은 “더 많은 사람에게 이 문제를 알리고 싶었어요” 같은 대중성을 핑계 대는 것일 것이고, 가장 무책임한 답은 역사적으로 실재한 폭력의 재현 불/가능성을 고민하며 답을 끊임없이 미루는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증언문학은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재현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한 자기만의 답이 있어야 한다. 김숨의 소설 『한 명』(현대문학, 2016)이 찾은 답은 무엇이었을까. 김숨의 소설 『한 명』과 ‘위안부’ 증언문학의 위치 김숨의 소설 『한 명』은 생존해 있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단 한 명 남은 날이라는 시점을 가장 중요한 서사 장치로 가져와 구체적 기억과 대화들을 ‘위안부’ 증언집에서 직접 인용하고 있다. 왜 이런 장치가 필요했을까. 작가는 독자가 이 소설을 단지 허구로 생각할까봐 각주를 넣었고 상상력을 더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허윤은 이런 태도는 실화에 기반해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진정성을 내세움으로써 일본군‘위안부’ 재현을 둘러싼 쟁점을 회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1] 한국문학에서 태평양전쟁에서 귀환한 학병들이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하는 소위 ‘학병 서사’를 만들어낸 것과는 달리, ‘위안부’ 문제는 증언 이후 30여 년 동안 서사적 내용과 형식을 모두 만들어내는데 실패했고 그 빈자리를 증언문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특유의 형식이 차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증언문학이라고 해서 실화라는 점에 기대어 폭력의 재현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증언문학으로 알려진 『이것이 인간인가』(프리모레비, 돌베개, 2007)에서 아우슈비츠 생존자 프리모 레비는 당사자로서의 자기 경험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객관적 관찰자의 시선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했고, 이런 점이 이 작품의 가치를 더욱 높였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문학적 성취일지는 몰라도 스스로를 해방시켰는지는 의문이다. 스스로 목숨을 거둔 프리모 레비나 빅터 프랭클 등을 보면 트라우마화된 경험을 계속 활성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정신건강의 위기를 초래하는지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다. 당사자에 국한되지 않은 조건이라는 점, 그리고 실화 여부에 대한 강박적 증명에 답하지 않으면서도 규범화된 서사의 결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참조할만한 작품은 역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문학동네, 2015)이다. 이 작품은 증언문학이 아니라 ‘목소리 소설’이라고도 불리는데, 작가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여성들의 경험이 어디에도 제대로 기록되어있지 않다는 데에서 출발해 이 적극적인 망각은 여자의 몸으로 전쟁에 참전한 경험은 가부장제와 군사주의의 자장 속에서 그 어느 쪽도 만족시킬 수 없는 데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이를 보면 증언문학의 형식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증언될 수 없는 혹은 증언되어도 기억될 수 없는, 혹은 특정한 방식으로만 재현 가능하게 하도록 규범화된 서사에 대해 증언문학은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단일한 서사규범과 타자화의 문제 소영현[2]은 실제 증언을 소설 속으로 가져오는 것은 ‘진정성’의 알리바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증언자이자 기록자의 위치를 드러내는 ‘사회적 맥락화 작업’의 일부라고 분석한다. 김숨의 소설은 증언이라는 발화행위가 주는 대체불가능성을 환기하고, 개별 피해서사의 반복이 아니라 증언에 나서지 않았던 ‘위안부’ 피해자를 구심으로 삼아 복수의 기억을 소환하며, 일부 생존자들에게 집중된 방식이라는 오해를 넘어 현재의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은 여성들의 문제와 연동된다는 것이다. 허윤과 소영현 모두가 공히 공유하고 있는 문제의식은 일본군‘위안부’를 둘러싼 서사규범이 지나치게 단일하다는 데 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담론이 교착된 이유는 우리 사회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해가 “식민지에 사는 미성년의 조선 소녀들이 일본 제국의 군대에 의해서 강제로 끌려갔다”는 단일한 서사규범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안부’의 문화적 재현을 둘러싼 본격적인 논쟁은 사실상 <귀향>(조정래, 2016)부터였다. 영화 <귀향>은 피해 재현의 윤리에 대한 저간의 진척된 고민들을 뒤로 한 채, “이것이 (증언을 통해 확보된)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에 기대어 위안소를 부감 숏으로 찍고 성폭력 피해 장면을 성애적인 앵글로 찍었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IP TV로 출시된 <귀향>이 사용자의 검색에 따라 실시간 자동완성 검색어가 만들어지는 환경에서 (성폭력을 조금 거친 에로물의 성애적 재현 장면으로 소비하는 시청자들을 위해 만들어져, 개봉되지 않고 IP TV로 유통되는 19금 영화로 목록이 가득 차 있는 곳에서) ‘성폭력 영화’라는 장르로 분류되었던 바를 비추어보면, 이러한 비판은 조금도 과도하지 않다. 다시 강조하자면 문학이 증언이 되려면 그것이 사실에 기반해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는 오히려 당사자의 말하기를 다시 착취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문학이 증언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껏 말해졌던 이야기가 왜 들리지 않았는지, 한국에서 ‘위안부’에 대한 재현이 어떤 서사규범으로 통용되어 왔는지라는 문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러므로 외려 여기서 필요한 것은 피해사실을 확증하기 위한 증거로서의 증언이 아니라, 증언 서사의 ‘문학적’인 전회일 것이다. 나도 피해자요 ⓒ백정미 묻기에서 듣기로, 단수에서 복수로 과연 김숨의 『한 명』을 통해 몇몇 피해자의 경험에 한정되어있는 기존의 ‘위안부’ 서사규범이 증언집과 공식기록에서 채취한 300여개의 각주를 통해 단수에서 복수로 바뀌는 맥락이 구성되었을까. 316개의 숫자보다도 중요한 것은 작가가 어떤 증언을 왜 선택했느냐에 있다. 이 각주가 피해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에게 피해사실의 진정성을 증명하게 하는 용도에 집중되어 있다면, 다시 말해 증언 문학이 생존자의 증언에 기대어 ‘위안부’의 피해서사에만 집중한다면, 그리고 그 몸에서 일어난 흘러내리는 몸의 기억을 묘사하는 데에만 몰두해 있다면, 공감을 위해 순도 높은 피해자성을 요청하는 상상적 동일시에 기반한 (타자 배제적) 재현 이상이 되기는 어렵다. 과거가 아니라 보다 현재적인 차원의 사회적 맥락을 구성해내는 점에 재현이 가진 힘이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증언 문학은 사회적인 맥락을 구성하는 게 아니라 그에 의존하는 형태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위안부’ 증언을 재현할 때는 반드시 말할 수 없었음이라는 사회적 맥락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말해왔음, 반복해서 말했지만 들을 수 없었다는 맥락의 역사가 재현되어야 한다. 김숨의 소설 『한 명』이 가진 문학적인 성취는 당사자의 증언으로 채워진 각주 316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 등록되지 못하고 아직 말하지 못한 당사자가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이라는 매우 현실적인 상상력으로 시작했다는 데 있다. 당사자가 직접 나서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기존 ‘위안부’ 운동은 당사자의 소멸이라는 시간을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단 한 명이 남았을 때라는 가정 자체가 이 소설이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사회적 맥락이다. 한 명이 남은 것이 아니다. “나도 피해자요..”라는 물결에 들어갈 수 없었을지언정, 당사자의 경험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미투운동’의 핵심은 나도 피해자라는 피해자임을 증명하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도’라는 ‘위드 유’의 응답에 있었다. 이 운동에서 피해자는 ‘당한’ 존재가 아니라, 미투를 ‘하는’ 능동태의 존재로 주체성의 형식이 변했다.[3] 나‘도’라는 조사에 붙여진 스타카토가 이 운동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고 피해자를 타자화시키거나 문제를 개별화시키지 않으면서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일본군‘위안부’의 서사규범은 어떠했는가. 원래 처음부터 “강제로 끌려간”, “소녀”라는 점에 방점이 찍힌 것이 아니었다. 김학순이 “내가 피해자요”라고 말하고, 그 뒤로 이어진 “나도 피해자요”의 연쇄가 있었고,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거리가 가까워진 순간, 각각의 경험들이 따로 또 같이 귀에 ‘들려지는 순간’이 있었다. 미투운동은 서로의 경험에 대해 묻지 않는 대신에 자신의 경험을 종으로 횡으로 이어간다. 그리하여 미투운동이 드러낸 사회적 맥락은,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의 시간성과 공간성 그 자체였다. 지금까지 ‘위안부’ 서사규범은 국가주의적 대결과 국제법적 접근을 통해 부인주의자들의 선동에 맞서기 위해 사실관계를 증명하는 데 집중되어왔었다. 이런 상황에서 문학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은 증언의 반복을 통한 사실의 증명이 아니라 트라우마가 된 경험을 끌어안고 생존의 과업을 수행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서사적 상상력 그 자체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위안부’ 서사규범의 사회적 맥락은 재구성될 수 있다. 각주 ^ 허윤, 「일본군 ‘위안부’ 재현과 진정성의 곤경– 소녀와 할머니 표상을 중심으로」 , 『여성과 역사』 29호, 2018. ^ 소영현, 「목격-증언의 자리와 공진하는 ‘위안부’의 몸」 , 『구보학보』 22호, 2019. ^ 권김현영, “4장. 미투운동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 능동태의 페미니즘이 해낸 윤리적 정치적 전환”, 『늘 그랬듯이 길을 찾아낼 것이다』, 휴머니스트,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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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좌담 포스트 피해자 시대, 세대를 넘어 기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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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를 통해 보는 재현과 기억의 전승 <2부> 포스트 피해자 시대, 세대를 넘어 기억하기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지난 2024년 9월 26일 <다큐를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트라우마의 재현과 세대를 넘는 기억의 전승>을 주제로 학술 콜로키움을 개최했다. 다큐멘터리는 피해자의 현존과 목소리를 영상으로 전달함으로써 역사부정세력에 대항하며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고 후세대에 전달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콜로키움에서는 <22>의 궈 커 감독, <내게서 출발한 배(A Boat Departed From Me Taking Me Away)>의 세실리아 강 감독, <보드랍게>의 박문칠 감독을 초청해 작품에 담아낸 문제의식과 제작 과정을 듣고, 일본군‘위안부’문제에 천착해 온 학자들과 각 작품이 이룬 성취와 향후 과제에 관해 논의하였다. 웹진 <결>은 주요 토론 내용을 2회로 나누어 공유한다. 다큐를 통해 보는 재현과 기억의 전승 <1부> - '위안부' 피해와 트라우마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다큐를 통해 보는 재현과 기억의 전승 <2부> - 포스트 피해자 시대, 세대를 넘어 기억하기 <22> 감독 궈 커 | 98분 | 2018 (▶보러가기) 제2차 세계대전 중 중국에서 많은 여성이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로 동원되었다. 촬영 당시인 2014년 피해 생존자 수를 의미하는 제목처럼, 중국의 궈 커 감독은 다큐멘터리 <22>에서 피해생존자 22명의 일상을 과장 없이 따라가며 ‘위안부’로 동원되어 받았던 고통과 그 이후의 지난한 삶이 새겨진 주름 가득한 얼굴을 스크린 가득 담아낸다. 이 영화는 2017년 중국 개봉 이후 한국과 일본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상영되며 소셜미디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수많은 관객을 만나고 있다. <내게서 출발한 배> 감독 세실리아 강 | 120분 | 2023 아르헨티나 한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세실리아 강 감독은 한국 방문 중 우연히 ‘위안부’피해자 고 김복동의 강연을 듣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처음 접한다. <내게서 출발한 배>는 피해자들의 고통스러운 경험에 대한 깊은 공감과 디아스포라로서 이를 어떻게 영화적으로 재현할 것인가라는 감독의 고민이 담긴 결과물이다. 역시 한인 2세인 주인공 멜라니 정은 영화 속에서 ‘위안부’ 피해자 고 황금주의 증언을 낭독함으로써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는 과정을 몸으로 보여준다. 실제 배우이자 연기 학교에 다니는 멜라니가 가정폭력이라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의 토대 위에서 ‘위안부’ 문제와 접속하는 모습을 카메라가 따라가는 액자식 구조인 이 영화는 포스트 메모리 세대가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을 담아낸다. 2023년 11월 마르델플라타 국제영화제에 출품되어 심사위원 특별상과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포함해 4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보드랍게> 감독 박문칠 | 73분 | 2022 어떻게 하면 ‘위안부’ 문제를 현재의 우리의 삶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 하는 박문칠 감독의 고민이 담긴 영화 <보드랍게>에는 피해자 고 김순악의 증언과 그 주변 활동가들의 인터뷰를 담았다. “김순악, 김순옥, 왈패, 사다코, 데루코, 요시코, 마츠 다케, 위안부, 기생, 마마상, 식모, 엄마, 할매, 미친개. 술쟁이, 개잡년, 깡패 할매, 순악씨….” 등 김순악을 지칭하는 다양한 호칭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위안부’ 피해가 종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이어진 사실을 보여주면서도, 그녀를 피해자 프레임에 가두기보다 자신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한 여성이었음을 조명한다. 여러 여성의 목소리가 모여 ‘n개의 김순악’을 만들어가는 방식을 통해 영화는 현재의 젠더 폭력과 ‘위안부’ 역사 사이의 연결성과 차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세대와 지역을 넘어선 기억의 확장 🧶 김은경 : 저는 세 편의 다큐멘터리가 결국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 제기라고 보았습니다. 이른바 ‘포스트 피해자 시대’에 우리가 ‘위안부’ 기억을 어떤 방식으로 확장할 것인가, 어떤 기억과 연결해 나갈 것인가에 관한 질문이지요. 그런 관점에서 세 영화는 모두 흥미롭습니다. 🧶 조서연 : 미체험 세대가 과거의 폭력과 기억을 어떻게 자기의 것으로 표현하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데요. 오늘 콜로키움에서 다루는 세 편의 영화들은 ‘타자의 기억을 나눠 갖는 자들’을 다룬다는 점, 그리고 그 방법의 하나로 감정·감응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공통적입니다. ‘기억을 나누어 갖는다’는 점에서는 오카 마리가 제안한 동일화하지 않는 공감으로서의 ‘분유(分有)’가 떠오릅니다. 즉 과거의 폭력을 겪은 사람의 경험을 타자가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을 경험한 자의 기억은 이야기되어야 하고 전달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기억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공감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또 트라우마 사건을 체험하지 않은 이후 세대가 공감이라는 가치를 매개로 새로이 자신의 기억을 만든다는 점에서 마리안느 허쉬의 ‘포스트메모리’도 연상하게 합니다. 저는 지금 일본에서 한국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는데, 대부분 일본인 학생입니다. 그래서인지 <22>에서 젊은 일본인 유학생 코메다 마이가 등장하는 장면들이 특히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이후 세대의 관계, 즉 자신의 삶과 일본군‘위안부’의 기억을 얼른 연결하기 힘든 이들이 코메다의 고백 혹은 모습을 경유해 감정을 투사하고, 또 피해자들이 폭력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실제 인간임을 상상할 수 있게 돕습니다. 이처럼 <22>가 피해자들의 과거를 보는 동시에 현재를 담는 데 주력하는 것은 영화 속 장면들의 내용과도 관계되는 것 같습니다. <22>에 등장하신 분들은 대개 고향에서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들이고, 종전 후에도 중국 사회의 가부장성과 민족주의적·성적 낙인으로 2차 피해를 계속 당해 오신 것으로 드러납니다. 영화는 ‘위안부’ 문제를 여성에 대한 성폭력의 문제로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피해자가 살아가는 공동체와 사회가 지속시키고 재생산하는 문제로 바라보게 합니다. 🧶 김은경 : 피해자가 직면했던 냉혹한 현실은 <보드랍게>에서도 간접적으로 드러나는데요. 저는 <보드랍게>가 누구도 자신을 ‘보드랍게’ 대해주지 않았다는 김순악의 하소연을 제목으로 삼고, 그걸 ‘컴포트(comfort)’로 번역함으로써 위안소의 위안(comfort)과 귀국 후에 ‘보드랍지(comfort)’ 않았던 냉정한 현실의 간극을 매우 효과적으로 드러냈다고 봤습니다. 일본군‘위안부’의 폭력적인 ‘comfort’를 피해자의 맥락에 재배치해 전복적인 효과를 불러오는 겁니다. 그동안 ‘comfort’의 가해성, 즉 내가 그 가해에 가담하고 연루되어 있다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감독님께서 이 영화의 제목을 ‘comfort’로 설명하고 김순악의 삶에 재배치함으로써 할머니의 신산했던 삶, 누구도 정말 애먹었다고 얘기해 주지 않는 그 삶에, 그 고통에 나도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감독님께서 똑똑한 선택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 조서연 : 영화들에서 제가 눈여겨본 것은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둘러싼 새로운 기억이 지속적으로 생성될 가능성입니다. 포스트메모리가 바로 ‘역사’가 아닌 ‘기억’에 좀 더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과거와의 정서적인 연결, 즉 구체화된 살아 있는 연결을 발견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는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을 연관지어 생각함으로써 비극적 사건이 현재와 미래의 상상력을 압도하지 않도록 하면서도 과거를 대면하기 위한 연결적인 접근과 관계를 형성”해 포스트 피해자 시대에도 계속해서 기억해 나갈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 김은경 : 조금 더 욕심이 나는 부분도 있습니다. <내게서 출발한 배>도 그렇지만 <보드랍게>의 서사, 기획은 훌륭하고 그 자체로 완벽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영화라는 사회적 텍스트를 통해서 무슨 얘기를 더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차원에서 사실 미투 운동 당사자와의 연대를 전면에 내세우는 건 굉장히 훌륭한 기억하기 방식이 틀림없지만 좀 더 ‘comfort’의 맥락에 좀 집중했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군사화된 대한민국의 기지촌 이주 여성의 ‘dis/comfort’의 현실을 한국의 ‘위안부’ 기억 공간에 등장시켰더라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안전지대에서 이탈시켜서 다시 ‘위험한’ 대항 기억을 형성하는 데 일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없었다는 사정 또한 너무 잘 이해합니다. 또 <내게서 출발한 배>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 방식, 그리고 주인공 멜라니의 입을 통해 겹쳐지는 구조를 선택한 부분은 큰 미덕으로 보였고, 아르헨티나의 관객으로서는 굉장히 좋은 결말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한국 관객의 입장에서 좀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주 2세대 젊은 여성이 ‘위안부’ 증언을 낭독하면서 자신의 엄마의 삶을 돌아보고, 그것이 다시 한국 방문과 수요시위에 참여하는 서사로 이어지는 게 다소 관습적인 전개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니까 포스트 메모리 시대에 기억하기는 어떤 기억의 발원지에 대한 강박에서 좀 벗어나서 그 기억 행위자가 처한 문화와 경험 그리고 지역적 배경 속에서 상상적 재해석을 통해서 재탄생할 때 그 의미가 더 확장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아르헨티나 이주 2세대 여성이 기억하는 ‘위안부’ 역사가 초국적 이주민의 디아스포라 역사와 만나는 그런 결말이었으면 어땠을까, ‘위안부’ 기억이 지구 반대편의 로컬 기억과 만났다면 좀 더 두꺼운 기억으로 재탄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카메라-출연자-관람자 사이의 상호작용 🧶 조서연 : 맨 앞과 맨 뒤 장례식 장면을 제외하면 영화 <22>가 당사자성을 더 넓히는 텍스트라는 점, 그러니까 활동가들의 말하기로 시작하고 끝났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피해 생존자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활동가들이 자신의 삶 속에 일본군‘위안부’의 기억을 새겨 넣게 된 사연을 술회하는 장면들과 병렬됩니다. 🧶 소영현 : 저도 그런 점을 흥미롭게 보았는데요. 세 영화 모두 카메라가 활동가와 멜라니처럼 피해 생존자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카메라의 눈이 ‘위안부’ 피해 생존자를 가시화하면서 동시에 돌보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까지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목소리로, 질문으로 변경 가능하지만 그 옆에 찍으려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같이 있으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런 것이 포착되고 함께 잡히는 것이 시각 매체로서 다큐멘터리의 굉장한 강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 조서연 : 낭독이라는 장치 또한 흥미로운데요. <내게서 출발한 배>에서 출연자로 하여금 고 황금주 님의 구술 기록을 읽게 하는 방식은 자료의 낭독이라기보다 연기자의 재연에 가까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내게서 출발한 배> 역시 일본군‘위안부’ 당사자가 살아온 ‘피해 이후의 삶’을 다루지만 이 영화의 주안점은 여러 정체성, 여러 경험을 가진 멜라니라는 사람이 자신과 시공간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일본군‘위안부’라는 문제에, 더 정확히는 황금주라는 한 사람의 삶에 어떤 식으로 빠져드는지, 그에 대해 무엇을 투사하고 생각하고 느끼며 새로운 시야를 구성해 가는지, 그 여정을 따라가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군‘위안부’ 재현의 장에서 이후 세대의 자리를 과정적으로 다루는 새로운 접근으로서 의미있게 보입니다. 특히 영화 후반부 수요집회 장면에서 멜라니의 발언은 자신의 삶도, 어머니의 삶도, 황금주의 삶도 모두 여성이 스스로의 경험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젠더 폭력의 구조 속에 있었다는 깨달음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참 좋았는데요, 귀여운데 잘 싸우는 여자아이를 팔뚝에 새기는 멜라니의 타투 장면입니다. <내게서 출발한 배>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당사자라는 타인의 삶을 자기화하는 이후 세대의 당사자 되기 과정에 대한 영화로 보입니다. 🧶 김한상 : 보이는 위치에 있는 자와 보는 자 사이의 상호작용 역시 중요합니다. <보드랍게>와 <내게서 출발한 배>는 모두 이미 세상을 뜬 피해 생존자의 증언을 후세대 인물들에게 ‘공연’하도록 조건을 던져주고 촬영하는 접근법을 취했는데요. 일종의 사회적 실험이 결합된 다큐멘터리의 양상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실험들이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효과는 ‘재현’이라는 기존의 목표를 넘어섭니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 김순악과 황금주라는 인물을 각각 ‘공연’하게 되는 두 작품에서 출연자들은 한쪽은 경북 지역의 미투 생존자이고, 다른 한쪽은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면서 가정폭력을 목격해 온 여성 연기 지망생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자신들과는 물리적이고 시공간적인 거리가 있는 상황 속에 놓였던 피해자들의 증언이지만 그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고 걸쳐봄으로써 특정 방식의 깨달음에 도달하는 모습을 우리는 카메라 앞에서 볼 수 있게 됩니다. 다큐멘터리에서 카메라 앞을 무대라고 했을 때 그 앞에 놓인 피사체로서의 출연자들 역시도 자신들의 상황과 공연해야 될 특정한 역할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놓인 사회적 맥락을 성찰해보게 되면서 급진적인 각성에 이릅니다. 이렇게 무대와 배우의 관계가 급진화되는 과정, 이것을 브레히트는 일종의 교육적 과정으로서의 교육극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저는 이런 측면이 많은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재현’이라는 접근만으로 머물 수는 없는 공공 기억의 측면에 있어 아주 중요한 모멘텀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들을 시사하는 두 작품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출연자와 카메라 사이의 급진화, 즉 상호작용을 넘어서 어떻게 출연자와 관람자의 상호작용, 다큐멘터리와 관람자의 상호작용을 끌어낼 것인가, 피해 기억의 공공화를 위해 어떻게 이 ‘재현하는 자와 관람하는 자’의 구도에 변화를 줄 것인가 하는 문제 역시 앞으로 탐구해 나갈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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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좌담 피, 땀, 눈물: 일본군‘위안부’ 풀뿌리 운동사의 흔적을 매만지며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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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5일, 창원대학교박물관에서 여성인권운동가 김문숙(1927-2021)의 생애와 관부재판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전시 〈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가 개관했다. 이번 전시는 김문숙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이사장이 설립한 부산의 ‘민족과 여성 역사관’(2004-2023)이 폐관하면서, 경상도 지역 일본군‘위안부’ 문제 민간기록물 조사정리 연구사업과 함께 이루어졌다. 5톤 트럭 2대 분량의 방대한 소장 자료가 뜻깊은 전시로 탄생하기까지는 이 연구팀에 참여한 세 명의 대학원생들의 보이지 않는 수고가 존재했다. ‘연구보조원’이나 ‘조교’라는 이름으로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자신의 삶과 연구자 정체성을 고민하는 대한민국의 대학원생 김효영, 민경택, 장찬영 씨를 청년좌담에서 만나 보았다. -좌담 일시: 2023년 5월 4일 -사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 이헌미, 황진경, 정나라 -대담: 김효영, 민경택, 장찬영 -정리: 퍼플레이컴퍼니 -사진: 오늘의 나 ‘앞으로’를 바라보며 Q. 민경택 씨는 노동/청년/인권 관련 연구사업에 다수 참여해 오셨는데요, 이러한 문제의식을 원래 가지고 계셨는지요. 그리고 2월 전시 개관기념 학술대회에서 “대한해협을 중심으로 본 고대 한일관계의 태동”을 발표 주제로 잡은 데에는, 대한해협을 바라보고 있는 창원의 비평지리적 위치성도 한몫했을까요? 민경택 제 고향이 창원이기에 노동/청년/인권에 더 강하게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창원이 제조업 중심의 도시이다 보니 많은 사고 소식을 지역 뉴스로 접하게 됩니다. 지역 청년으로 살다 보면 상실감을 느끼게 되는데 성인이 되고 나면 친구들이 없어요. 모두 서울로 가버렸기 때문이죠. 그런데 수도권으로 가서 잘 지내는 게 아니라 대부분 힘들어해요. 그래서 친구들에게 내려오라고 하면 거길 왜 다시 가냐고 합니다. 이를 통해 지역에 대한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됐고, 이 부분에 대해 공부해보면 재미있겠다 싶어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대한해협을 중심으로 본 고대 한일관계의 태동”이란 주제를 잡은 것은, 고대에 관한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에 더 다양한 해석이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일본과는 신석기 시대부터 교류의 흔적이 확인되고 지리적으로도 가깝죠. 관부재판이 전시의 주제였던 터라 고대에는 부산과 시모노세키가 어떻게 연결되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삼국사기에서 일본 관련 글이 등장하는 연대를 정리해보니 여름을 중심으로 교류했더라고요. 여름에는 쿠로시오 해류가 강해져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이어지는 해양 루트가 열렸거든요. 그래서 더 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일본의 토기도 한반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고대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관부재판을 바라볼 땐 민족적인 관점보다는 연대가 부각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민족적인 감정을 빼고 바라보기 위해 한국이나 일본이라는 개념보다는 그 사이에 놓여있는 대한해협을 봤습니다. Q. 김효영 씨는 관심분야가 정체성/젠더/네트워크/지역이라고 하셨는데요. 지난 2월의 전시 개관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하신 논문(“김문숙과 부산 <여성의 전화>: 여성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부산 여성의 전화 상담”) 내용을 지역 여성 운동사 연구 필요성이라는 관점에서 나눠 주실 수 있으신지요. 김효영 논문을 쓰기 위해 김문숙 이사장님에 대해 알아보려 했지만 제대로 된 자료가 많지 않았어요. 인터넷을 통해 접할 수 있는 건 영화 〈허스토리〉 말고는 거의 전무했고, 이사장님과 관련된 연혁도 제각기였습니다. 논문에는 제대로 나와 있겠지 싶어 찾아봤지만 관련 논문이 없을뿐더러 지역 여성사에 관한 논문 자체가 굉장히 적었습니다. 이게 왜 기록으로 남지 않았을까 싶은 활동이 정말 많아요. 서울에서의 반성폭력 의제 관련 운동이 지역에서는 다른 형태로 일어났는데 그런 것들이 전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지역 여성 운동사에 관한 연구를 보면서 지역마다 분절된 여성 운동사에 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Q. 장찬영 씨는 정체성/기억 및 트라우마, 재현의 정치에 관심이 있으시다고요. 발표논문 “영화 ‘허스토리’의 재현: 역사적 사실과 비역사적 내러티브의 경합”의 문제의식을 나눠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리고 논문을 준비하시면서 〈전후책임을 묻는다‧관부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의 사무국장 하나후사 도시오 님과 〈위안부 문제에 대처하는 후쿠오카 네트워크〉 총무 하나후사 에미코 님 인터뷰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떠셨는지 후일담을 듣고 싶습니다. 장찬영 영화를 보고 논문을 쓰면서 관부재판에 대해 알게 됐고, 그러면서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당사자에게 물어보자는 생각으로 하나후사 부부의 인터뷰를 진행했어요. 두 분께서 속 시원하게 이야기해주셔서 많은 부분이 해결됐던 것 같습니다. 논문의 주된 내용은 영화가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왜 사실이 아닌 내용을 담고 있는가에 대해 풀어내는 것이었습니다. 논문을 쓰고 발표까지 끝내고 난 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재현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성폭력 피해의 상징을 계속해서 보여주는 것은 피해자에게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될 것인가.’ 소녀상은 할머니들이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물이기도 한데, 할머니들은 이 소녀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 우리는 이 재현을 통해 무엇을 기억하고 또 어떤 담론을 만들어내고 싶은 것인가. 이러한 관점에서 영화를 보면서 ‘왜 영화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 것일까’를 고민했습니다. Q. 이번 좌담에 여러분을 모신 이유는 전시에 참여하셨다는 이력도 중요했지만, 대학원생이라는 위치도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각자 대학원 진학의 계기와 하루 일과를 귀띔해주실 수 있을지요. 또 대학원생으로 살아가는 것의 고통과 기쁨에 대한 이야기도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장찬영 뭐든 혼자 하는 것에 익숙한 성격이라 오늘도 좌담 끝난 후에 밥 먹고 운동하러 갈 것 같아요. 평균적인 일상을 말씀드리면, 최근에는 하루 종일 책 보고 논문을 쓰고 있어요. 공부를 계속하는 이유는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도 그랬고 그것 이외에도 ‘왜’를 던지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에 대한 답변을 찾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하죠. 알아야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공부를 통해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그것에 대해 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죠. 김효영 저는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홈스쿨링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시위에도 많이 참여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시위하러 나가면 어른들밖에 없더라고요. 그래서 ‘또래 친구를 만나보고 싶다. 대학에 가면 친구를 만날 수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대학 진학을 마음먹었습니다. 그때 일본군‘위안부’ 청년 교류 국제 프로그램에서 찬영 씨를 만나게 됐고, 학교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찬영 씨가 자신이 다니던 창원대 국제관계학과를 추천해줬어요. 그렇게 창원대에 오게 됐는데 공부가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제가 살아왔던 경험을 국제관계학적으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게 신기했어요. ‘이 나라 사람들은 이런 역사를 가지고 있구나, 내가 갔던 나라가 이렇게 생겼구나’ 싶어서 정말 재미있게 공부했습니다. 재미있다 보니 더 공부하고 싶어서 대학원까지 오게 됐어요. 요즘에는 졸업논문을 쓰고 있고, 논문을 위한 인터뷰를 준비 중입니다. 민경택 경남학이라는 큰 틀에서 내 고향을 한번 공부해보자 싶어서 대학원에 진학하게 됐습니다. 하루 일과는, 보통 일어나면 씻고 학교 와서 도서관에 갑니다. 요즘에는 논문을 쓰다가 막히면 나가서 걷곤 하는데 하루에 3~4시간씩 산책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하루가 갑니다. Q.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와 1세대 활동가분들이 세상을 떠나고 계십니다. 학문 후속 세대, 신진 연구자로서 앞으로 지역에서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해 어떤 연구와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요? 김효영 지금 지역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이 아직 계시기 때문에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때 듣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문숙 이사장님이 주도했던 지역 운동사에 직접 참여했던 활동가분들과 교류하며 운동사를 기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장찬영 저희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기억을 전달받은 사람들이고, 그 경험을 직접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달받은 기억만으로 그분들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기에, 기억을 토대로 하되 이분들에 대한 폭넓은 이해, 다각적인 접근이 필요해요. 다양한 방식과 분야, 학제들 속에서 문제를 너무 거시적으로 또는 1차원적으로만 보지 말고 다양한 방법으로 바라보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관부재판처럼 시민연대를 통해 문제 해결이 이뤄질 수도 있는 만큼 다양한 방법과 시도를 통해 문제에 접근하는 연구와 활동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민경택 구술채록 작업을 하면서 가장 궁금했던 게 할머니들께서 좋아하셨던 노래, 음식, 혹은 그분들의 일상이 담긴 이야기였습니다. 이것을 가장 가까이에서 접했던 건 지역 활동가들이죠. 그래서 그분들의 구술채록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피해자분들이 돌아가시는 상황에서 활동가분들의 기억이나 활동이 그려낼 수 있는 할머니들의 삶의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궁금해요. 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시민들 간의 소통, 이해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관부재판이란 좋은 사례가 있듯이 그런 식의 활동이나 연구가 이뤄지면 해결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 향후 연구하고 싶은 주제와 졸업 이후 진로 계획을 묻고 싶습니다. 김효영 옛날에는 하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확신이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어떤 것도 단언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하지만 계속 공부하고 싶은 욕심이 있고, 제가 계속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지역, 정체성, 젠더, 네트워크인데 그게 제가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모든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해 계속 공부하고 싶습니다. 장찬영 기억, 재현, 트라우마에 대해 더 깊게 연구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면 쓸수록 제가 많이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상태로 공부를 더 할 수 있는 게 맞나 고민됩니다. 현실적으로 경제적인 부분도 걱정되고요.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여러 가지로 고민이 돼서 추후 계획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민경택 연구를 하게 된다면 주제는 비화가야로 확정할 것 같습니다. 졸업 이후 진로 고민을 많이 했는데 학위논문을 쓰다 보니 졸업 이후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졸업 이후에 뭘 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지금은 논문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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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좌담 국제법적 맥락에서 보는 전범 재판과 전쟁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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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문제 <3부>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개최 20주년인 2020년, 다양한 전공의 연구자들이 국제법 관련 자료를 함께 읽으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젠더 기반 폭력을 새로운 시각으로 공부하는 모임인 '국제법×일본군'위안부'세미나팀'이 출발했다. 그동안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여러 보고서와 판결문, 의견서, 포로 심문서 등을 읽으며 무력 충돌 하 젠더 기반 폭력, 국제 전범 재판에서 보이는 젠더 기반 폭력에 대한 불처벌 문제, 범죄 행위로서 식민 지배와 이에 대한 불처벌 문제 등을 예민하게 들여다보며 논의를 발전시켜 왔다. 세미나팀이 최근 함께 읽고 토론한 자료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일본군 전범이 말하는 '위안부' 문제 Ⅱ: 중국 침략 일본군 전범 자필진술서 선집』(2023. 이하 선집)이다. 웹진 <결>은 이를 좌담으로 정리,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문제'라는 주제로 소개한다. 시리즈는 전범 자필진술서의 등장 배경과 사료적 가치, 겹겹의 함의 등을 조목조목 들여다보는 토론으로 3회에 걸쳐 구성했다. <1부>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1) 전범 자필진술서 속 범죄 고백과 '위안부'의 자리를 찾아서 <2부>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2) '중국귀환자연락회' 활동이 던지는 질문들 <3부>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3) 국제법적 맥락에서 보는 전범 재판과 전쟁 책임 국제법의 맥락에서 중국의 전범 재판 읽기 🧶 심아정 : 국제법의 맥락에서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전범 재판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우리에게 익숙한 자료읽기 방식은 자본주의에서 만들어진 방식일텐데,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전범 재판 사례는 전쟁 범죄나 용서와 화해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 조시현 : 국제법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말씀드리면 일단 중국의 입장에서는 전쟁 포로를 귀환시켜줘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당시 국제사회에서 1949년 출범한 '신중국'을 국가로 승인하지 않는 국가들이 많았고, 연합국의 정식 일원도 아니었고, 또 일본과 정식의 평화조약을 체결한 것도 아닌 상황에서 일본군 포로들이 억류돼 있었거든요. 그래서 굉장한 압박이 있었는데, 당시 서구에서 얘기했던 국제법이나 인도주의를 중국 공산당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보면 군인들 대상 교육에 국제인권법, 인도주의법의 핵심이 다 담겨 있었고, 오히려 더 나아간 부분도 있어요. 그중 하나가 강간을 금지하는 것을 중시했던 점이에요. 아까 여성의 자리가 어디에 있냐고 말씀하셨지만 공산군들은 강간을 주목하고 있었어요. 저는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봐요. 흔히 서양에서는 제1차 대전부터 강간이 전쟁 범죄로 인정되었다지만 저는 대명률이나 당나라 법률에서와 같이 동아시아에서는 전근대 시대에 이미 강간을 중요 범죄로 취급하고 법률로 처벌해왔던 전통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이런 전통은 일본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위안부' 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강간 방지를 위해서라고 했지만 '강간=나쁜 행위'라는 규범 인식은 이미 있었고, 병사들한테도 다 주지가 된 사실이잖아요. 그런 법의식과 자기 행동과의 엄청난 괴리가 있는데 문제시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리고 죄의 인지 과정에서 과연 그런 괴리가 바뀌어 나갔는지도 의문입니다. 그런 면은 이 자료만을 가지고 판단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다음으로 김수용 선생님이 제기한 전범 재판을 할 수 있는 권한, 그리고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질문인데요. 저는 가장 직접적으로는 피해자에게 있고 그 다음에 피해자가 속한 공동체라고 생각해요. 그걸 인민(people)이라고 얘기해 볼 수 있을 텐데, 인민이 만든 게 나라니까 국민 주권적인 관점에 따르면 재판소에게 있는 거 아니겠어요? 국가가 만든 재판소에. 문제는 '공산 정권'이 갖고 있는 사법 체제에서 재판을 받은 거잖아요. 아직 국교가 회복되지 않는 단계에서. 어쨌든 일본이 봤을 때 중국은 국가로 승인 받지 못한 거죠. 국가가 아닌 사람들이 일본군을 전범으로 재판했고, 그 전범들이 일본으로 귀환해요. 당시 일본 정부는 귀환자들을 전범으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귀환은 중국이라는 국가를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고 자국민이니까 당연히 인도적으로 받았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전범 재판은 꼭 국가재판소만 하는 거냐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어요. 중국 인민 일부가 적어도 국가로서 인정을… 그들이 세운 정부와 법원이 다른 나라들, 특히 일본에 의해 국가 법원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재판을 했잖아요. 그것은 결국 인민들에 의한 처벌로 정당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굳이 정당화 근거를 찾는다면 그렇게 얘기해 볼 수 있겠죠. 중국도 전범 재판을 했다는 것은 국제법을 그들 나름대로 이해해서 실천에 옮긴 하나의 사례로 볼 수 있을 텐데, 전범을 교육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봐요. 국제법 법전 어디에도 전범 교육에 관한 내용은 없거든요. 사회주의 국가의 경우 교화형이라는 기본적인 형벌 사상을 갖고 있죠. 그걸 전범한테 투영하니 이런 작업들이 나올 수 있었던 거예요. 근데 국제법에서는 전쟁 포로를 붙잡아다가 '인독트리네이션(indoctrination)', 세뇌 교육을 해도 된다는 말은 없어요. 이건 오히려 심한 경우 전쟁법 위반이라고 지탄받을 수 있죠. 그러니까 중국 정부는 국제법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느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위반 혐의라고 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속에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는 어쩌면 국제법을 조금 더 발전시킨 부분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범자의 범죄행위를 처벌해야한다는 게 전쟁 범죄 처벌 사상인데 사람을 바꿔야 된다는 생각, 그야말로 용서와 화해의 대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면 엄청나게 새로운 철학인 거예요. 전쟁 범죄에 대한 접근 방식의 차이, 사죄의 의미나 용서 등 여러 가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는 면에서 엄청난 화두를 던지고 있죠. 🧶 김수용 : 중귀련 회원 대부분이 소련에서 5년간 있다가 중국으로 넘겨진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소련에서는 노동을 통한 교화였어요. 독일군 포로, 러시아 혁명에 반대했던 반혁명자, 일본군 포로들도 그 교화의 대상이었는데, 강제노동이 굉장히 힘들었다고 해요. 열악한 환경이나 추위에 의한 사망도 많았고요. 그래서 소련에서 시련을 겪다가 귀환한 사람들의 시베리아 억류는 일본의 대표적인 '피해서사' 중 하나로 소비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중국으로 이송된 일본인 전범들은 시베리아 억류자들과 동일한 생활을 하다가 중국에서의 6년간은 교육, 교화를 받은 거죠. 그런 이유로 중국에서 사상교육을 받고 돌아온 사람들과 시베리아 억류 경험만 있는 사람들의 귀환 이후 행보가 달라지는 것 같아요. 중귀련 사람들은 일본이 말하는 피해와 가해의 경험을 모두 가진 사람들이죠. 특징적인 것은 이들이 시베리아 경험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는 거예요.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들은 일소중립선언을 위반한 소련의 잘못이고, 피해자라고만 이야기해요. 그런데 중귀련 사람들은 일본이 '관동군특종연습' 같은 준비를 하며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했기에 일소중립선언 위반이 소련의 일방적인 잘못만은 아니라는 논리를 구사하면서 따라서 자신들을 완전한 피해자로만 볼 수 없다고 해요. 피해자 서사와 결이 다른 그 부분도 저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회주의적 인간으로의 개조와 사죄 🧶 이슬기 : 사회주의 인간상에서는 집단을 중시하고 인간을 개조할 수 있다고 봤는데, 그 까닭을 인간이 어떤 구조에 있기에 그런 행동을 한 것이라 본다고 가정한다면 전범들의 행위를 개인의 잘못으로 간주하지 않고 일본이라는 국가의 시스템 때문이라 파악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즉 개개인의 죄로 접근하지 않고, 각각의 전범은 일본이라는 사회 구조 속에서 전쟁 범죄를 저지른 것이니 개개인이 저지른 죄를 밝힘으로써 일본이라는 전범 국가가 저지른 죄를 드러내는 것, 그리고 계속해서 이들 전범에게 사상 교육을 시킴으로써 일본의 군국주의 문화가 아닌 중국의 공산주의 문화를 받아들이게 하고, 이 과정에서 전범들을 다른 인간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 거잖아요. 이들의 자필진술서를 볼 때 위화감을 느끼는 까닭은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과정에서 다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반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재의 나와 분리된 과거의 나에 대해 비판을 수행할 뿐 자신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싶어요. 그렇다고 할 때 사회주의 국가에서 이념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지만 많은 경우 실패했는데, 예외적으로 이번에 우리가 본 중국의 전범들의 경우 성공한 사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중귀련 활동을 보건대 인죄가 단순한 요식 행위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일본 귀환 후까지 지속적인 활동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어쨌든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났던 것은 아닌가 싶어요. 🧶 김수용 : 저도 흔치 않은 성공 사례라고 생각해요.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들로 다시 태어난 거죠. 그런데 한편으로 그것이 가능했던 원인을 생각해보면 수형 생활 이후 전범들이 중국을 떠났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해요. 일본이라는 시공간 속에서 수형 생활의 기억을 가지고 계속 살았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거죠. 만약 중국에 계속 머물면서 문화대혁명을 겪고 중국인들처럼 어려움을 겪었다면 전범들의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 심아정 : 저는 아까 김수용 선생님의 발언 중에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일본 전범의 가해자성을 생각할 때 자필진술서를 쓰던 당시가 아니라 이들의 '전생애를 통해' 중귀련의 활동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었어요. 이 사람들이 처음 진술서를 작성할 때 '말 못할 살인'이 있었다는 부분이 나와요. 그러니까 용서해 줄 것 같지 않은 살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거예요. 그런 사실이 드러날까 봐 공포에 떨었던 명령권자들이 있었다고 해요. 『전쟁과 죄책』에 언급된 사례 중 전범들이 수감되어 있는 동안 미 점령 하의 일본에서 미군에 의해 일본 여성이 강간당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강간 피해자들이 '나를 강간한 미군 병사를 세상을 다 뒤져서라도 찾아낼 거다'라면서 원한을 토하는 것을 듣고 공포심을 느낀 명령권자들이 있었다는 거예요. 저는 이 지점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공포심을 느끼게 했던 것은 피해자의 목소리, 자기가 직접 가해를 하지 않았더라도 또 다른 피해자의 목소리, 그래서 이제까지는 나는 명령권자였고, 전쟁이라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고… 운운하며 자신을 방어하기 급급해서 피해자의 처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상처받은 사람의 원한에 찬 목소리를 들은 것을 계기로 탄백을 했다는 거죠. 그러면서 한편으로 그건 자신이 가진 죄의식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자백도 해요. 이렇게 서술이 달라지는 지점을 잘 들여다봐야 할 것 같아요. 우리가 진술서를 읽으면서 파악했듯이 처음에는 가해 사실을 그저 병렬적으로 나열하잖아요. 가해 사실을 단순히 병렬했을 때는 피해자의 원한에 대한 상상이 전혀 개입되지 않아요.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해야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만 했다는 거예요. 그랬던 사람들이 일본에 돌아간 뒤 심경의 변화를 느꼈던 계기로서 많이 언급하는 것이 중국 방문이에요. 그 대목에서 제게 시각적으로 남은 강렬한 장면이 있어요. 방파제 폭파를 명령한 고위급 관료가 있었고, 실제로 많은 사람이 폭파로 사망했어요. 그런데 그 고위급 관료가 폭파를 명령한 마을을 방문하게 됩니다. 갔더니 400~500명이 대기하고 있더래요. '우리를 죽인 일본 사람들이 온다' 이러면서요. 빨간 옷을 입고 모여 있는 중국인들이 멀리서 보이더래요. 그 광경을 보기 전까지는 자신이 죽였던, 혹은 죽이라고 명령했던 어린이나 여자들이 구체적인 이미지로 떠오른 적도 없었고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도 없었는데, 멀어서 얼굴 하나하나는 보이지 않지만 빨간 옷을 입은 어린 아이들과 여자들 몇 백 명이 와글와글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에는 엄청난 공포심을 느꼈다고 하더라고요. 그 '공포심'을 '죄책감'이라 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죄책감의 단서가 되는 어떤 감정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옛 침략 군대의 중위가 푸순 전범관리소에서 6년간 수용되어 있다가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서 돌아갔습니다. 이게 얼마나 어수룩한 변명인지 통렬히 느꼈습니다.”(『전쟁과 죄책』, 193쪽)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가 읽은 진술서만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것은 굉장히 한정적이라는 것, 인죄와 탄백의 과정을 거쳤다는 것만으로 성찰과 사죄와 책임의 시간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점, 이것을 단서로 더 많은 이야기를 계속 해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리고 진술서 이후의 시간대 속에서 병사들이 자기의 죄를 자각했을 지에 대해서는 그러한 자각이 뒤늦게 발현될 수도 있고 안 됐을 수도 있어요. 전쟁에 휩쓸린 개개인의 책임을 묻는 것이 가혹할 수 있지만 '죽일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죽이고 말았던' 그 행위가 무엇이었는지, 뒤늦게 알아차리게 되는 그런 계기들이 찾아올 수도,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지요. 전쟁 책임과 전후 책임 🧶 김수용 : 저는 이 텍스트를 통해서 '전쟁 책임'과 '전후 책임'에 관해서도 얘기해 보고 싶어요. 이분들이 진술서를 쓰고 전범 재판을 받은 것이 전쟁 책임, 이를테면 법적 책임을 진 것이라면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의 행보는 전후 책임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중귀련 활동을 통해 평생에 걸쳐 전후 책임을 지고, 그것을 이어받은 다음 세대가 등장하는 방식으로 계속해서 용서받지 못할 책임을 갚아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현재로서는 그런 책임 있는 모습을 보기 어렵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중귀련 활동을 전후 책임의 선례로서 평가해보고 싶어요. 그랬을 때 우리가 원하는 책임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라는 반성적 질문을 해보게 됩니다. 🧶 조시현 : '전쟁 범죄'와 '인도에 반한 죄'를 19세기 표현으로 바꿔 말하면 '인류의 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랬을 때 법의 관점에서 '죄'의 문제를 이야기해 보면 먼저 '인류애', 영어로 휴머니티(humanity)를 '인도'로 번역한 거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진술서 전체를 놓고 볼 때 아주 한정된 표현 속에서만 인류적인 장면이 잠깐씩 드러날 뿐이에요.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까닭이 팩트 위주의 서술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성찰과 반성은 없고 사실만 나열하는 진술서 형식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에 거리두기를 하게 만들고, 그 때문에 자신의 범죄 행위로부터 오히려 소외되는 측면이 야기되는 거죠. 저는 이 부분이 문제적이라고 생각해요. 만약에 자필진술서가 김수용 선생님이 이야기한 맥락에서 의미가 있으려면 중귀련 사람들의 증언이나 수기 같은 다른 자료를 같이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 심아정 : 저는 이 자료의 핵심이 '위안부' 문제가 아닌 것 같아서 오히려 김수용 선생님이 관심가지고 있는 부분들, 그리고 가해자성이라든가 인죄라든가 조금 더 철학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 장원아 : 초반에 이 자료집이 왜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에서 나왔을까 궁금했는데 이 이야기와 연결되는 거였어요. 처음에는 ''위안부' 관련 부분이 왜 이렇게 적지?' 했다가 '대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찾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하는 생각에 닿았어요. '위안부' 문제가 사실 딱 '위안부', 위안소만 끄집어내서 그것만 다루는 게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얼마나 넓게 퍼져 있는가, 이런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문제라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본 진술서에 작성 시점, 1950년대의 어떤 가치관이나 국가관, 국제법 인식 같은 것들이 반영돼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강간이 '문제'로서 서술되고 방식도 그런 시대적 맥락이 반영되어 있는데, 이 진술서를 읽고 해석하는 우리는 현재의 인식과 감각 속에서 위안소나 일본군'위안부' 제도와 관련된 내용들을 찾으려 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이 텍스트를 읽고 의미를 도출할 때 적어도 세 시기를 고려해야 정확한 독해가 가능할 것 같아요. 즉 이 텍스트에 전쟁 시기, 전범관리소에서 진술서를 쓴 시기, 그리고 우리가 읽는 현재가 중첩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각각의 시기를 구분하며 읽어야 이 자료를 좀 더 잘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단순하게 일본군'위안소'라는 단어가 나오는 대목만 주목하는 방식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의식 구조가 어떤 방식으로 겹쳐서 문제화되고 있는지를 읽어낼 필요가 있는 거예요. 🧶 심아정 : 김수용 선생님이 일전에 논문에서 언급한 '당사자성'이 떠오릅니다. 전후 세대가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경험자와 기억을 나눠 가지는 공동 작업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직접 겪지 않은 경험을 수용해 자신의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당사자성'으로 볼 수 있다고 하셨어요. 이걸 일본군 포로들의 자필진술서 작성과 이후 일본에서의 중귀련 활동까지 연결해 보면, 전범들이 진술한 증언에서 시작해 그걸 공유한 사람들이 뜻을 이어가고, 그 과정에서 전후 일본에서 여러 기념관을 세우고 반전평화 운동도 전개하면서 당사자성이 점차 확장되었던 셈이죠. 그렇다면 지금 진술서를 읽는 우리가 선 위치는 '그때-그들'과 또 다르기에 일본인들이 전쟁을 기억하고 반성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을 통해 '당사자/비당사자', '가해자/피해자'의 자리를 이분화하지 않는 방식을 모색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