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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여행에세이] 아름다운 항구, 통영에 자리한 아픈 역사의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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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으로 ‘여행’의 가능성이 차단된 시대, <결>은 이에 대한 갈증을 글로나마 풀며 여행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는 일제 침탈과 일본군‘위안부’관련 흔적이 남아있는 지역을 살펴보고 그 안에 담겨있는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서울, 통영, 천안, 대구, 제주 등 ‘위안부’ 역사와 관련된 다섯 지역을 따라가며, 꼭 기억해야 하지만 쉬이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 1. 서울편 - “기억의 길”을 걷다 – 일본군‘위안부’ 기억의 터와 기림비 2. 통영편 - 아름다운 항구, 통영에 자리한 아픈 역사의 길을 걷다 3. 천안편 - 하늘아래 가장 편안한 곳에 잠든 당신들의 안식을 기원하며 4. 대구편 -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으로 떠나는 근대문화거리 투어 5. 제주편 - 총구는 늘 약자를 향한다: 전쟁과 일본군‘위안부’, 그리고 제주도 *통영 인권평화길 투어 추천코스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정의비(남망산조각공원 입구) ⇒ 강구안(거북선, 판옥선) ⇒ 충렬사 방향으로 이동(충렬로) ⇒ 서피랑 99계단 ⇒ 야마호텔 옛터(현재 도로로 정비) ⇒ 서포루(360도 통영항 전경) 남쪽 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는 아름다운 항구 통영. 통영은 따뜻한 기후와 풍부한 수산자원, 여기에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진 천혜의 자연경관이 더해져 예로부터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왔다. 동네 갯가에만 나가면 바지락, 굴, 파래, 톳, 청각, 미역 등이 지천으로 널려 있어 캐 와서 요리해 먹기만 하면 되었고, 집이 아닌 곳에서 대충 잠을 자도 얼어 죽지 않을 정도로 따뜻한 곳이었기에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시기 타지역의 가난한 문화예술인들이 통영을 찾은 것도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윤이상, 전혁림, 박경리 등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을 배출한 통영은 예향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또한 임진왜란 때 설치되었던 삼도수군통제영(현재의 해군본부)과 부속 12공방은 통영의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많은 유·무형 유산을 남겼다. 나전칠기, 소목장, 대발, 갓 등 수많은 무형문화재와 함께 독특한 음식문화까지 더해진 문화예술자원의 보고로 통영은 전국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도시가 되었다. 이렇듯 아름다운 예향의 도시 통영에도 아픈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1990년대 중반에서야 알려졌다. 그것은 바로 일본군‘위안부’의 존재였다. 1991년 8월 14일, 고 김학순 할머니의 일본군‘위안부’피해 최초 공개 증언으로 나라 안팎은 그야말로 충격에 휩싸였고, 뒤를 이어 터져 나온 또 다른 피해생존자들의 “나도 피해자다”라는 목소리는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 운동에 불을 지폈다. 1991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신고전화가 설치되고 이듬해부터는 전국 읍면동사무소에 정신대 피해 신고전화가 설치되면서 해방 후 반세기 동안 침묵을 강요받았던 피해생존자들과 유족들의 신고가 줄을 이었다. 신고자들은 정부의 심사에서 인정되어야 일본군‘위안부’피해자로 공식 등록될 수 있었다. 신고 이후 등록된 피해생존자들을 대상으로 한국정신대연구소(1990년 설립)는 전국을 돌며 이들의 구술을 채록하였고, 그 과정에서 통영을 방문한 연구원을 통해 통영에도 일본군‘위안부’의 아픈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세상 밖으로 나온 그들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이 언론에 보도되고 신고를 받는다는 이야기가 동네방네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간 후, 통영지역 피해생존자들이 가족이나 친지, 주변 지인 등으로부터 소식을 듣고 신고하기 시작한 때가 1993~1995년 무렵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살기가 어려워도, 정부가 보상을 해준다고 해도 신고하지 않은 피해자가 더 많았다는 사실은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연구원을 통해 알게 된 통영지역 등록피해자는 6명이었다. 이는 등록 당시 거주 지역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중일전쟁 이후인 1938~1939년 사이 동원됐다. 통영지역 피해자들의 특징은 대부분 일찍 동원되어 6~7년간 장기간에 걸쳐 피해를 입은 ‘위안부’피해자들로 연령대가 전국 최고령이라는 점이다. 1918년생 맏언니부터 1924년생 막내까지, 이들 모두 고무공장 등 좋은 공장에 취직된다거나 돈 많이 벌게 해주겠다는 말에 속아 상해, 대련,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버마 등지의 일본군 위안소로 동원됐다. 통영지역에 등록된 피해생존자들이 많은 관계로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구술채록을 위해 통영을 자주 드나들면서 자연스레 할머니들의 증언을 접하게 되었고, 이들 모두가 당시 해상교통 중심지였던 통영 강구안에서 배에 태워져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원의 출발지, 통영 강구안 통영 강구안 일대는 통영 관광의 중심지로 거북선과 판옥선 4대가 있어 관광객들이 필수코스로 들르는 장소이다. 강구안은 삼도수군통제영 당시 수군들의 배들이 정박해있던 천혜의 군사 요새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수탈에 대항하여 통영 최초의 항일 의거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인근에는 세병관과 충렬사, 동피랑, 서피랑, 남망산공원, 중앙시장 등이 있어 늘 관광객들로 붐비는 핫플레이스로 많이 알려져있는 곳이다. 한산도를 비롯한 통영 앞바다는 일제강점기 당시 세계 3대 어장으로 유명하여, 1910년 한일합방 이전에 이미 개항해 뱃길이 발달해 있었으며 합방 이후에는 상선과 무역선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던 항구였다. 또한 온난한 기후와 풍부한 어족 자원은 일본인들이 일찍이 대거 통영으로 들어와 거류민 부락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일본인 거류민이 있는 곳엔 언제나 공창 형태의 유곽이 형성됐는데, 통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곽이 들어섬에 따라 여성을 공급하는 소개소가 생겨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전선을 확대해감에 따라 수많은 일본 군인들이 전쟁터로 동원됐다. 오랜 전쟁을 수행해온 일본 군인들은 부대에서 자행되는 폭력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만 했고 그로 인한 불안과 불만은 난징대학살과 난징강간이라는 잔인한 폭력으로 귀결되었다. 군대에 만연했던 성병은 군의 사기를 더욱 떨어트렸으며, 일본군의 중국 현지 민간여성 강간 사건은 국제사회에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군은 군위안소를 설치하여 ‘위안부’를 모집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했던 것이다. 1938년 일제의 전시총동원령이 내려지면서 일본과 식민지 조선이 전시체제에 돌입함에 따라 전쟁 수행을 위한 대대적인 인적 동원이 시작되었고, 통영도 모든 시스템이 전시 동원 체제로 편입된다. 일본 거류민을 따라 생겨났던 소개소도 일본군‘위안부’ 동원의 말단조직으로 편입되면서 위안소에 여성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통영지역이 경남지역에서 피해자가 많은 지역 중 한 곳이 된 이유는 바로 이런 구조적인 결합과 해상교통의 발달로 ‘위안부’ 집결지였던 부산으로의 동원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통영, 거제 지역에서 모아온 여성들을 강구안에 있는 여관에 가둬놓고 목표치가 채워지면 배에 모두 태워 최종 집결지인 부산으로 수송해갔다. 통영 강구안은 통영, 거제 등 인근지역에서 동원해온 여성들의 1차 집결지였다. 강구안은 당시 대부분 15~16세의 어린 소녀들이 돈 많이 벌어서 부모님과 동생들을 호강시켜주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눈물을 흘리며 배를 타고 갔던 장소였다. 그들이 천지도 모르는 낯선 땅 중국, 대만, 필리핀, 버마, 인도네시아 등지의 위안소로 갈 줄 꿈엔들 생각했으랴. 도착할 곳이 공장이 아니라 일본군 위안소일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10대에 끌려가 해방 이후 20대가 되어서야 겨우 배를 타고 또 타고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에게 아름다운 고향 통영의 강구안은 가슴에 맺힌 한 많은 장소로 자리하게 되었다. 남망산공원에 자리한 정의비 강구안에서 바다 쪽을 바라보면 앞에 얕은 남망산이 보인다. 통영시민문화회관과 통영조각공원이 있는 남망산공원은 도심 시민휴식공원으로 통영시민의 삶이 깃든 곳이며 시민과 관광객이 즐겨 찾는 전망이 아름다운 곳 중 하나다. 강구안 해안을 따라가다 보면 남망산공원 입구가 나오는데, 오르막길을 걸어 오르면 제일 먼저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조각상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일본군‘위안부’피해자 명예와 인권을 위한 정의비다. 두 팔을 벌린 채 서 있는 정의비는 2013년 4월 6일 민간이 주체가 되어 세운 기림비다. 아픔이 서린 통영 강구안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정의비는 할머니들과 함께 동고동락해온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통영거제시민모임(2002년 설립, 이하 시민모임)이 2012년 하반기부터 통영지역일본군‘위안부’추모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모금 운동을 전개하여, 통영시민, 학생, 경남도민 등 시민 모금에 통영시의 건립비 보조금, 부지제공, 경상남도의 건립비 보조금 지원이 보태져 세워졌다. 정의비는 포천석으로 된 석상으로 두 팔을 벌린 채 반추상적인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는 전신상으로,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중에는 10대 소녀를 비롯해 20대 여성도 있었기에 피해 여성 모두를 상징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두 팔을 벌리고 있는 형상은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의 정의와 당당함을 나타내고,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죄를 바라며 무언의 미소로 평화의 손짓을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이 지구상에서 자행되고 있는 전시 성폭력 범죄의 피해 여성들을 감싸 안으며 전쟁과 폭력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뜻도 담고 있다. 전신상 아래에는 원형 기단석이 놓여있고, 기단석 표면에는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에 대한 강제 동원과 피해실태를 나타내는 공문서와 사진, 그림 작품들이 시대순으로 새겨져 있다. 기단석 정면 중앙에는 비문을 새겨 정의비의 건립 취지와 의미를 방문객들에게 알리고 있다. 방문객들이 자유롭게 앉아서 감상할 수 있는 데크에는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반인도적 범죄를 설명해놓은 설명판이 있어 피해역사를 쉽게 알 수 있다. 시민모임은 매년 4월 7일 정의비 건립일과 8월 14일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기림의 날에 기념식과 추모제, 세계연대집회를 정의비 앞에서 개최해오고 있으며, 정의비 위쪽에 있는 통영시민문화회관 소극장과 대전시실에서도 영화제와 다양한 전시를 매년 이어오고 있다. 서피랑 언덕에도 아픔이 정의비에서 다시 강구안 쪽으로 내려와 시내 중앙로를 따라 충렬대로(충렬사) 방향으로 가다 보면 중간 즈음에 서피랑 언덕이 보인다. 벽화마을로 유명한 동피랑과 반대쪽에 있는 서피랑은 꼭대기에 서포루가 자리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마을 만들기 사업으로 통영 전경이 360도로 보이는 전망 좋은 장소로 정비되면서 관광객의 발길이 점차 늘고 있는 곳이다. 정비 이전 서피랑은 동피랑처럼 언덕에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던 달동네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 ‘야마호텔’이라 불리는 집창촌이 있었다. 야마호텔은 산(山)의 일본 발음인 야마와 영어인 호텔이 조합된 단어로 집창촌의 이름이었으며 ‘야마골’이라고도 했다. 어린 시절 서피랑 언덕에 줄줄이 빨간불이 켜진 집이 무서웠고, 밤만 되면 귀신이 나올까 봐 그곳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야마호텔이 형성된 시기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해방 이후라고 전해진다. 당시 통영은 수산업이 매우 활발하던 때라 원양어선 등의 선원들이 주로 이용했고 일반 남성들도 많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야마호텔은 1990년대 이후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2004년 성매매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정비되었으나 낡은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가 2013년부터 서피랑 마을만들기 사업이 추진되면서 해당 건물들이 철거돼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해방 후 돌아온 일본군‘위안부’피해 여성들은 대부분이 20대 나이였다. 차마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객지를 떠돌았던 여성들, 그리운 집으로 돌아왔으나 말도 못 하고 눈물로 세월을 보냈을 여성들, 부모와 자신을 원망하며 술로 담배로 고통의 나날을 보냈을 여성들, 감당할 수 없는 상처로 자신의 머리를 대청마루에 찍으며 몸부림쳤던 여성, 살아내기도 죽기도 힘든 처지를 비관하며 자포자기 상태에서 요정으로, 선술집으로, 집창촌으로 향했던 여성들…. 그렇게 통영에서도 야마호텔로, 선술집으로, 요정으로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흘러 들어갔다. 식민지의 여성으로 태어나 일본군‘위안부’로 동원되어 멀리 이국땅에서 일본군 성노예로 살아야만 했던 여성들은 고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가부장제 하에서 남성들의 구타와 폭력에 시달리며 살아야만 했다. 비단 ‘위안부’ 피해자만이 아니라 집창촌에 있던 모든 여성들이 가부장제의 폭력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 스러져갔으리라. 서피랑을 찾을 때면 99계단 맨 위쪽에 야마호텔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라도 기억하자. 수많은 여성들이 폭력에 신음하며 스러져간 자리, 20대가 되어 돌아온 ‘위안부’ 피해자의 피맺힌 울음이 배여 있는 자리인 야마호텔은 부끄럽고 창피해서 숨기고 묻어야 할 역사가 아니라 드러내어 알려야 할 곳이다. 여성 차별에 기반한 성폭력이 이 지구상에서 더 이상 자행되지 않도록 젠더폭력이 없어지는 그 날까지 새기고 새겨야 할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들의 아픔을 기리고 위로하는 표지석이라도 세워야 하지 않을까. 내가 바라는 것 한 가지 서피랑을 내려오면서 통영지역 피해 여성들의 삶을 되돌아본다. 남자라면 치가 떨려 조카를 키우며 평생 홀로 사셨던 할머니, 해방 후 고향에 돌아와서도 남성들에 속아 힘겨운 삶을 사셨던 할머니, 아버지뻘 되는 남성에게 후처로 들어가 말 못 할 서러움을 안고 살아야 했던 할머니, 할머니들…. 그들 바람은 오직 하나였다. ‘나 너무 억울해.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야, 일본이 나를 속여서 위안소로 데려가 내 청춘을 이렇게 망가트려 놓았으니 책임져야지. 잘못했다고 해야지. 참말로 사죄해야지.’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서피랑을 내려오는 내내 귓가를 맴돌았다. 열네 분밖에 남지 않은 할머니들이 몇 년 후 다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일본의 사죄를 받아낼 것인가. 어떻게 할머니들의 외침을 기억하며 이어갈 것인가. 바로 앞에 던져진 우리 모두의 숙제가 아닐까.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통영거제시민모임 단체소개 전시성폭력범죄인 일본군위안부제의 진실과 정의를 올바르게 자리매김하여 피해여성의 인권과 명예 회복을 실현하고 나아가 성차별, 성폭력 없는 평등하고 평화로운 시민사회를 만들고자 2002년 설립, 주로 경남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활동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치유사업 : 정서적 안정 및 심리치유 사업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인권명예회복사업: 범시민탄원엽서보내기운동, 평화인권문화제, 피해자 소송지원 사업, 국제공조사업 -교육사업: 온오프 대중강연 사업, 심포지엄, 청소년공모사업, 온오프 전시회, 다크투어 -기록사업: 경남지역 피해전수조사사업, 경남지역 피해자료 아카이브 구축사업, 경남지역 해결운동사 기록사업, 경남지역일본군‘위안부’역사관 건립사업 기사 게재일: 2021.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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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인터뷰 ‘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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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같은 이슈를 이야기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지금과 같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뉴스들이 넘쳐나고 정치적으로 쟁점화된 상황에서는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온전한 해결을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컴필레이션 앨범 <이야기해주세요 – 세 번째 노래들>에 참여한 뮤지션들이다. 이들은 어떤 생각으로 ‘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할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말과 글로도 어려운 이야기를 어떻게 음악으로 풀어냈을까. <이야기해주세요> 세 번째 앨범에 참여한 뮤지션들을 만나 ‘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 1부 - 김목인, 백정현, 김율희, 한받 2부 - 이정아, 최고은, 황푸하, 김해원 김목인 할머니의 산책 Q. <할머니의 산책>은 어떻게 만들어진 곡인가요? 안녕하세요, 싱어송라이터 김목인입니다. 어느 날 길을 잃어버린 할머니 한 분을 만난 적이 있어요. 그래서 그 할머니의 따님이 오실 때까지 잠시 할머니 곁에 있게 되었어요. 따님을 기다리는 동안 분위기가 어색해서 휴대폰으로 뉴스를 봤는데, 김복동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기사를 보게 됐어요. 왠지 이 할머니로부터 곡 작업을 시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젊은 사람들의 시간을 뺏을까 걱정하시는 그 할머니의 모습이 묘하게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상황과 겹쳐 보였어요. <할머니의 산책>은 그렇게 출발하게 된 노래입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싱어송라이터는 보통 자신의 이야기, 혹은 관심사 안에서 촉발된 이야기로 작업을 하게 되는데, <이야기해주세요>와 같이 특정 주제를 다루는 컴필레이션 앨범의 곡 작업을 할 때는 평소 하던 방식과 달라서 어려움이 있어요. ‘한번 해보겠습니다’ 하고 시작을 하긴 했지만 일본군‘위안부’ 피해 당사자가 아니고, 가까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보니까 더 어려웠어요. 솔직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건 아닐까, 어느 지점에 서서 노래를 만들어야 할까 하는 고민을 했습니다. Q. <이야기해주세요> 프로젝트 이후 달라진 점이 있나요? 이렇게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나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더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죠. 예전 같았으면 뉴스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기사가 나왔을 때 그저 사회의 복잡한 여러 가지 일들 중 하나라고 받아들였겠지만, 지금은 개인적으로 더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컴필레이션 앨범에 참여하고 나면 주변에서 부담스러운 작업을 하는 건 아니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하지만 수요시위에 참석하는 것처럼 많은 분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에 동참하고 있잖아요. 저처럼 음악을 통해서 참여하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을 매개로 하기 때문에 좀 더 거리를 두고 작업할 수 있기도 하고요.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에게 곡을 들려주거나 참여한 팀들과 함께 공연할 기회가 많이 없었다는 거예요. 언젠가 공연을 통해 <할머니의 산책>을 들려드릴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 집에 오는 길 안개비가 내리던 날 우산도 없이 산책을 나온 할머니 이곳 주소가 어떻게 되오? 우리 딸이 데리러 온다는데 주소를 아는 우리 집 앞에 서서 아무 말 없이 먼 곳을 바라보네 뉴스에는 93세로 떠난 한 많았던 인생이 남긴 긴 이야기들 하나의 아픔이 영원해지고 하나의 인생이 결국 지나가도록 열리지 않는 입들에 대해 가만히 서서 곰곰이 생각할 때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찾고 있는 딸 "아니 바쁜데 이래도 되오?" "아니 전혀 바쁘지 않습니다." 주소를 아는 우리 집 앞에 서서 주소가 없었던 이들을 생각하네 백정현, 김율희 무정세월 Q. 간단한 자기소개와 노래에 대한 설명을 해주세요. 김율희 : 저는 소리꾼 김율희라고 합니다. 전통 창작 국악팀 ‘바라지’, 그리고 레게밴드 ‘소울소스 meets 김율희’에서 판소리 보컬로 활동하고 있어요. 백정현 : 백정현이라고 합니다. 작곡과 프로듀싱을 하고 건반 연주자이기도 합니다. Beck&Fontenot 이라는 이름의 팀으로 활동하고 있고, 싱잉볼 연주도 하고 있습니다. 지난 6년간은 제주도에서 요가를 하며 지냈어요. 지금은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음악을 하고 있습니다. <무정세월>은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 연습실에서 즉흥으로 맞춰봤던 곡이에요. 서로 어떻게 해달라고 말 한마디 하지 않았는데 마음에 드는 합이 나왔죠. 김율희 : 노래 가사 중 ‘달이 뜨고 지고, 꽃이 피고 지고, 해가 또 넘어가네. 이 내 청춘이 아차 한번 늙어지니 다시 청춘이 어려워라’는 단가 <사철가>에서 영감을 받아 썼습니다. 제가 할머니들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냐마는, 만약 ‘내가 그때의 할머니였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고 더듬고 아파하며 쓴 부분이에요. Q.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은 없었나요? 김율희 : 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지만, 슬프고 안타까운 감정을 가진 상태이기는 했어요. 하지만 당사자의 슬픔에는 전부 공감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내가 감히 이렇게 접근해도 되나?’ 하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소리꾼은 관객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웃길 수도, 울릴 수도 있잖아요. ‘소리꾼 김율희’로서 이 주제를 어떻게 노래에 담을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작업을 하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워서 시작하기 전까지도 확신이 없었어요. 백정현 : 맞아요. 우리가 진짜 이해를 했는지도 모르겠는데, ‘이 상태에서 해도 되나?’ 하는 마음이 있었죠. 어떤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드니까 아예 이야기도 하려 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Q. <이야기해주세요> 앨범에 참여하고 느낀 점을 말씀해주세요. 김율희 : 저는 이전보다 피해자 할머니들에 대한 마음과 관심이 더 깊어진 것 같아요. 20년 가까이 판소리를 해오면서 전통 소리를 기반으로 작업을 해왔어요. 이렇게 실제로 존재하는 누군가를 생각하며 주체적으로 작업한 일이 드물었죠. 이번 작업을 통해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명확해진 것 같아요. 할머니들께서 정말 건강하게, 오래오래 더는 아프지 않게 사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더 이상 그분들을 상처 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백정현 : 앨범 제목이 <이야기해주세요>인 것이 참 좋아요. 어렵더라도 사람들이 계속 이야기했으면 좋겠어요. 할머니들이 돌아가시고 나서도 사람들이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저희가 이 음악을 만든다고 이 문제가 해결되거나, 할머니의 마음을 완전히 치유해주지는 못하겠죠.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걸 같이 느껴보는 것이잖아요. 그렇게 헤아려보는 기회들이 계속되면 좋겠어요. 몸의 어떤 부분이 아프면 전신의 모든 세포들이 전부 그 부분을 치유하기 위해서 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사회의 어딘가가 아픈 상태라면 모두가 힘을 합쳐 여길 어루만지고 치유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달이 뜨고 지고 꽃이 피고 지고 해가 또 넘어가네 이내 청춘이 아차 한 번 늙어지니 다시 청춘이 어려워라 한받 우린 리우데자네이루 언덕에서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았지.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엄마에 대해서 생각해 봤어 Q. 독특한 곡 제목과 곡의 분위기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저는 한받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자립음악가입니다. ‘야마가타 트윅스터’라는 이름으로 공연을 하기도 합니다. 서울 중구 만리동에서 작은 책방을 운영하고 있어요. 제가 참여한 곡 <우린 리우데자네이루 언덕에서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았지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엄마에 대해서 생각해봤어>는 제목과 스타일 모두 독특한 곡이죠. 예전에 실험적인 거리극을 다원 예술 퍼포먼스로 연출한 적이 있어요. 이 거리극에 <이야기해주세요> 기획팀 송은지 님이 출연진으로 함께 했거든요. 은지 님이 거리극에 사용한 배경음악을 모티브로 <이야기해주세요> 수록곡을 작업해보자고 제안하셔서 그 음악을 편곡한 곡이 바로 이 곡입니다. 음악에서 계속 반복되는 멜로디는 철거 예정인 지역의 지도에 있는 선들을 음계로 표현한 것이에요. 재개발로 철거민들이 쫓겨난 동네들을 선율로 표현해보려고 했어요. 이걸 듣고 송은지 님이 다시 멜로디 라인을 만들었고, 우리 아이들이 함께 부르면서 새로운 곡이 되었죠. 노래에 가사가 없기 때문에, 제목에서 하나의 서사를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제목은 리우데자네이루에 갔던 꿈 속 장면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어요. 휘황찬란한 풍경과 빈민들의 뒷골목이 공존하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언덕에서 바다와 하늘을 바라봤던 꿈이요. 그 꿈 속 세상에서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그리워하던 아이들의 감정을 떠올렸어요. 상실을 음악에 담아낼 때 정말 우울하고 처절하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 다른 방식으로도 풀어내고 싶었어요. 아이들의 멜로디와 스캣 선율처럼 가사 이외의 다른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느껴지기를 바랐어요. Q. 다양한 감정과 생각이 곡에 녹아있는 것 같아요. 다른 음악가들보다는 간접적인 접근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살던 곳에서 강제로 쫓겨난 사람들이 원곡의 모티브인데, 이것이 ‘위안부’ 피해자의 아픔과 통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만약 수요시위에서 공연하기 위한 곡 작업이었다면 분명히 다른 스타일의 노래를 만들었을 거예요. 시위 현장에서는 연대의 퍼포먼스로 ‘야마가타 트윅스터’ 스타일의 음악을 했을 거예요. Q. <이야기해주세요> 프로젝트로부터 받은 영향이 있나요? <이야기해주세요> 곡 작업을 하면서 제가 남자로서 누려왔던 일상적인 권위에 대해 반성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번 곡은 저의 기존 작업과는 다른, 이질적인 부분이 있긴 하지만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만든 곡입니다. 음악에 아이들의 목소리가 담겼다는 점이 특히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다음 세대 아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과거의 아픔을 잊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요. 베렛떼 뿌다부바 베렛빠바 데렛데 라라랄랄라 라랄랄랄라 랄랄라 음- 나난나나나 나난난나나 나나나 Credit 기획/진행/인터뷰/글 : 현승인 편집 : 금혜지 사진 : 팝콘(popcon) 일시 : 2020년 6월 10일 수요일 장소 : 서울시 마포구 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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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진실 규명을 위한 양국 간의 책임 있는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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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쟁점과 방향 3부 진실 규명을 위한 양국간의 책임있는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1부 :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 위헌 결정, ‘위안부’ 문제의 흐름을 바꾸다 2부 : 2015년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법적 구속력은 어디까지인가 3부 : 진실 규명을 위한 양국간의 책임 있는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좌담회 일자 : 2019년 6월 5일 사회 :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패널 : 남기정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 조양현 (외교안보연구소) /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본 좌담회에 참여한 패널의 입장은 각 소속 기관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관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Q. 2018년 1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위안부 피해자분들의 명예·존엄 회복 및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일을 해나가는데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면서도 “2015년 합의가 양국 간 공식합의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음을 감안해 일본 정부에 대해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화해치유재단의 해산 절차에 돌입했지만, 12.28 합의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간 것은 아닌 듯 합니다. 그렇다면 이 합의를 둘러싼 한일 간의 ‘위안부’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 걸까요. 조시현 문재인 정부가 12.28 합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일합의의 존재는 인정하되, 이것이 효력이 없도록 해야 하는 거죠. 지금까지는 현실적인 결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한 채, 합의의 결과물을 해체하는 것에 불과했어요. 앞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안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고요. 조양현 가장 이상적인 안을 실현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한 분이라도 더 살아계시는 동안 수준을 조정해서 해결하자는 이야기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절차상으로나 일본의 무성의함 등으로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면 그 대안은 무엇인가 하는 건데, 이 부분이 아쉽거든요. 일본의 협력이 어려운 상황이라면 우리 스스로 도덕적인 이념을 가지고 우리 자금으로 지원하겠다는 김영삼 정부 때의 방식을 택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봅니다. 물론, 문제는 많이 있지만, 방침을 그렇게 보여주면 ‘아, 이게 정부의 입장이구나’ 하고 와닿는 게 있어요.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한 그림이 좀 애매해요. 12.28 합의를 부정한다면 대안은 무엇이냐는 비판이 나오는 거죠. 조시현 대안 부분과 관련해서 합의가 피해자들에게 주는 함의, 영향 정도는 국제 인권의 메커니즘에서 다뤄지고 있는데요. 국제인권기준에 따르면 피해자의 권리에 관한 기준이 잘 정립되어 있고, 또 과거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한 특별보고관이나 기구들이 있단 말이죠. 그래서 피해자들이 권리를 갖는데, 진실에 대한 권리, 정의에 대한 권리, 배상을 받을 권리, 재발방지에 관한 권리, 네 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위안부’문제야말로, 문제 발생 처음부터 UN에서 논의돼왔고 그 이후 전 세계 인권상황에 보편타당하게 적용이 가능한 기준으로 확립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는 UN의 기준에 따라 한국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안을 마련하고 정책을 세워 나가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또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입장을 설득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기정 논의를 좀 확장하자면, 제3의 방법으로 합의를 완성으로 이끌어가는 방향이 있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합의가 나오긴 했지만, 미완성이라는 거죠. 그런데 그것을 완성해 나가는 방법도 사실 합의 안에 있다고 봐요. 진실, 정의, 배상, 재발방지의 권리를 말씀하셨는데, 합의에 보면 명예회복과 상처 치유라는 말이 나와요. 그것을 위해서 노력한다는 말이 나오고요. 그래서 저는 문건을 우리가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진실, 정의, 배상, 재발방지를 위한 노력을 일본에 계속 요구해야 합니다. 10억 엔밖에 잃은 것이 없다는 식의 발언이 나올 때마다 이게 과연 무슨 의미냐고 계속 물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런 발언은 피해자의 명예회복이나 상처치유를 위해 노력한다는 약속에 위배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일본에 계속 합의의 완성을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합의를 의미 있도록 만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못된 합의를 제대로 된 합의로 만들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거죠. 아까 조시현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바로 이 지점이 청구권 협정을 깨는 지점이거든요. 저는 이 지점을 이용해서 청구권 협정의 약점을 물고 늘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우리가 전적으로 1965년 체제의 한계를 깨나가는 작업이라고 생각되거든요. 합의는 이 작업에 지렛대로 삼을 만한 내용이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러한 내용을 합의에 포함한 것은 박근혜 정부의 공로가 아니고요, 그동안 원칙을 견지하며 줄곧 운동을 해왔던 피해자 할머니들과 운동단체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쓸데없는 것들을 뒤에 붙인 게 잘못된 것이지, 앞에 부분은 우리 시민운동 단체가 여태까지 만들어낸 부분이기 때문에 이걸 우리는 확인하고 이후 운동의 발판으로 삼자는 게 저의 입장입니다. 조양현 언론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당시 언론보도를 보면서 제가 느꼈던 것은 언론은 ‘위안부’ 합의에 부족한 부분, 부정적인 부분에 대해 (한국 내부에) 문제 제기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일본은 우리보다 신중한 톤으로 접근한 것 같아요. 이념성향을 떠나서 국익 대 국익 싸움이라는 외교적 접근이 필요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에서 이 문제를 (내부적인) 정치 쟁점으로 삼으면서 일본이 느끼는 압력이 약해졌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진실 규명을 위한 양국 간의 책임 있는 대화가 이어지길 조시현 ‘따고 배짱, 딴 놈이 배짱을 부린다’라는 말이 있어요. 일본은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불가능한 것을 이야기했어요. 해결이라는 것은 운동 차원에서 해결을 위한 행동의 요구이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결은 ‘과정’입니다. 100년 후에도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배우는 사람들이 있을 거란 말이죠. 그런 면에서 불가능한 것을 해결했다고 한 합의이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말이 안 되는데, 일본 정부는 피해자를 대변하는 (한국) 정부의 입에서 ‘끝났다’ 라는 말을 끌어냈기 때문에 이 유리한 입장을 쉽게 포기하고 싶어 하진 않을 거라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대통령을 잘 뽑아야 합니다. 함부로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평생 국가가 구속당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해요. 아베 정부에서는 한국을 보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라는 악담을 퍼붓고 있는데, 한국 정부는 좀 더 적극적인 변론을 펼쳐야 합니다. 그리고 일본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대화를 응하지 않으니 그 책임은 일본에 있다는 식으로 외교를 유연하게 가져갈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동시에 국제 기준, 원칙에 입각하면서 끈기 있게 기다릴 필요도 있습니다. 합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두 나라가 공동의 행동을 하겠다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문제의 인식이 일치해야 하는데 지금 과연 그런가. 한국, 일본 꿍꿍이가 다른데, 청구권 협정 자체도 그랬고요. 각자 입맛에 맞게 해석해 왔고 국민을 호도해온 측면이 있거든요. 마찬가지로 12.28 ‘위안부’ 합의도 그런 측면이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한일 간의 인식 차이를 어떻게 좁혀 나갈 것인가. 그 부분에 대한 양국 간의 책임 있는 대화가 시급히 재개되어야 합니다. 남기정 저도 큰 틀에서는 동의하면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지도자를 잘 뽑아야죠. 지도자를 잘 뽑아야 하지만 실수할 때가 있어요. 지도자를 제대로 못 뽑을 때가 있죠. 그런데 민주주의를 이 정도로 성숙하게 만든 국가라면 시스템으로 지탱할 수 있고, 지도자와 정부가 실수할 때 국민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거든요. 그런 점에서는 국민의 힘으로 탄생시킨 이 정부에서, 과거의 잘못된 합의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당연히 ‘해결’이 안 되죠. 운동이 있는 한, 새로운 문제 제기는 늘 있고, 해결된 것으로 보였던 문제가 여전히 미결인 상황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문제 제기를 받아들이려는 정치가 있는 한 해결의 수위는 조금씩이라도 높아질 수밖에 없어요. 그것을 법으로 규정하여 해결의 수위를 확인하고 유지하게 되지만, 그게 어느 순간에 이르면 부족한 내용이 되고, 그래서 다시 운동이 전개되고, 정치가 이를 수용해 문제의 해결을 끌어가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문제의 완전한 ‘해결’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합의를 통해 해결의 수위가 어느 정도까지 이르렀는지 짚어주는 건 필요하다고 봐요. 합의 내용에서 ‘위안부’ 문제란 당시 ‘일본군의 관여 하’에 발생한 일이라는 규정이 나와요. 그런데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군의 관여 이상의 많은 문제를 담고 있거든요. 가령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과거 일본 정부가 직접 관여한 것이 확실해진다면 이 합의의 전제는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또 가령 ‘위안부’ 문제를 축소하거나 은폐하는 데 혹시라도 연합국의 관여가 확인된다면, 이 또한 합의의 전제를 흔드는 일입니다. 그러면 해결의 수위도 또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연구하고 진실을 규명해내서 ‘위안부’ 문제가 더 큰 틀에서 논의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더 나아간 해법이 필요하다고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과 연구가 필요한 겁니다. 조양현 방금 이야기를 받아서 의견을 나누어 본다면 대단히 아플 겁니다. 사실 ‘위안부’ 문제는 외교부가 담당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거든요. 정부 각 부서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많고 성격이 다양하니까요. 또 정부뿐만 아니라 사법부 판단도 있는 것이고, NGO단체, 피해자, 국민 정서를 모두 고려해야 하는 문제라서 외교부가 진두지휘할 수 있는 이슈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한일 외교 앞에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가 무겁게 있기 때문에, 그 외의 이슈가 쉽게 진전되지 않는 어려운 상황에 있는 거죠. 한국 외교에서 대일외교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 가장 큰 원인이 여기에 있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각 주체와 어떻게 해야 하느냐의 문제인데, 만약 제가 외교부 장관이어도 할 수 있는 부분이 별로 없어요. 그렇지만 아예 없지는 않을 것 같아요. 일단 12.28 ‘위안부’ 합의가 국민 정서를 대변하지 않았다면, 대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있어야 할 것 같고요. 앞으로의 대일정책, 일본 인식의 차원에서 확실한 입장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김대중 정부 때 한일파트너십 공동선언 이야기가 인용되고 그럽니다만, 그때 상황과 지금이 다른 부분은, 외교가 있었다고 봅니다. 일본뿐 아니라 미국, 중국과의 관계도 중요했죠. 그 관계를 잘 다지면서 대북 정책을 추구했기 때문에 과거사는 그 일환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전체가 연결되어 있지 않고 분절되어 있어요. 과거사는 과거사 분야에서만 보고, 북한 문제는 북한 문제에서만 보고, 미국과 중국 문제도 그 안에서만 보고 있고요. 이게 모두 연결되어있는데도요. 이런 문제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우리가 앞으로 일본을 어떻게 바라보고 우리에게 어떤 전략적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판단이 서야 한다고 봅니다. 이웃 국가잖아요. 그리고 당장 안보와 경제를 이야기하면 일본과의 관계가 아쉬워요. 일본도 아쉽고, 우리도 아쉬워요. 특수 관계라고 하는 부분에는 변화가 없거든요. 그렇다고 한다면 과거사에 대해 과도기적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판단이 있어야 외교 실무단이 움직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너무 센 비판일 수 있는데, 저는 그게 안 되면 한 발 더 못 나간다고 생각해요. 남기정 한일 관계는 굉장히 중요한 양자 관계죠. 그런데 지금까지와는 다른 한일 관계라는 것을 상상하고 구상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안보 문제만 가지고 한일 관계를 이야기하기에는 여러 가지 다른 상황들이 생겼다는 거죠. 이른바 한미일 안보 삼각형의 하위 동맹으로서 한일 관계를 이야기하고 개선한다, 또는 회복한다는건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작년 이후에,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개시되었고 대법원 판결이 나온 이상 그것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봐요. 그래서 목표로 설정할 것은 한일 관계 개선이 아닌 한일 관계 재건축인데, 이른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통해 이어진 남북 관계에 일본을 넣어서 남북일이라는 평화 삼각형을 만들고, 이를 지탱할 밑변으로서 한일 관계를 구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원 트랙일 땐 앞에 역사 문제가 딱 가로막으니까 뒤에 있는 열차가 못 가지 않습니까. 역사 트랙과 미래 트랙은 둘이 같이 가야 합니다. 과거처럼 역사를 팔아서 안보를 사는 한일 관계가 아니고, 평화를 만들고 평화 위에 역사를 싣는 외교를 구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남북한 관계를 정전상태에서 평화로 이끌어 나가는 것과 동시에 한일 사이에서 역사 문제를 풀어나가면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한일 관계 재구축을 동기화해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우리는 일본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야 할까 Q.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와 한일 관계에 관해서 우리 정부에게 아쉬운 점을 말씀해주셨는데요, 사실 더 갑갑한 것은 일본 정부잖아요. 현재 아베 정부는 과거사 문제를 부정하는 역사 수정주의의 노선을 밟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일본 내에는 아베와 같은 역사 수정주의자만 있는 것은 아닐 텐데요, 일본 안에서 대안적 흐름이 펼쳐질 가능성은 없는 걸까요? 남기정 저는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이 좀 정밀해졌으면 좋겠어요. 현재 일본을 움직이는 세력으로 평화주의 세력과 이른바 전통적 국가주의(자)들이 많이 보이기 때문에 평화주의에서 전통적 국가주의로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그 밑에는 자유주의적인 질서를 원하는 사람들과 정치적 현실주의자들이 있어요. 사실은 이들의 길항 작용을 통해 일본의 주류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일본의 정치적 현실주의자들은 헌법개정을 통해 권력정치의 세계에서 일본의 위상을 높여 나가고 싶어 하지만, 평화헌법 때문에 앞으로 못 가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정치 지형에서는 여전히 리버럴, 또는 제가 말하는 제도적 자유주의자들이 존재하고 일정한 힘을 유지하고 있어요. 일본은 평화헌법 때문에 군사력을 배경으로 일방주의적인 외교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제도와 레짐 같은 걸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약속을 중시하는 문화가 있는 건데, 이는 일본이 전통적으로 규칙이나 약속을 중시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전후에 일본이 처한 국제적 지위 때문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위안부’ 문제에도 적용된다고 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위안부’ 그 자체가 있느냐 없느냐는 축과 ‘위안부’ 합의를 어떻게 할 것이가 하는 축, 이렇게 두 개의 축을 가지고 매트릭스를 만들 수 있다고 봐요. 우리에게는 (1)‘위안부’ 문제는 존재하고, ‘위안부’ 합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일본의 시민그룹과, (2)‘위안부’ 문제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합의를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 하는 그룹, 이 두 그룹이 싸우는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이 두 그룹도 일본 안에서는 규모가 작습니다. 진짜 일본을 움직여 나가는 그룹은 (3)‘위안부’ 문제는 존재하지 않지만, 미국이 하라고도 하고, 한국이 완강히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니 한미일 안보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일단 합의를 해주자고 이야기합니다. 이게 아베나 이 주변 사람들인 거죠. 속으로는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기 때문에 계속 딴소리를 하는 거죠. 한편으로는 (4)‘위안부’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에 성의를 발휘해서 합의를 만들어 놓았다고 생각하는 그룹이 있습니다. 이게 제도적인 자유주의자들이에요. 이 사람들은 합의가 있으니까 좀 지켰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합의를 파기한다고 하면 이 제도적인 자유주의자들이 이에 반발해서, 오히려 아베를 편들어 주는 결과가 됩니다. 저는 이 점이 굉장히 아쉽고, 이러한 일본의 지형을 고려한 외교를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양현 일본사회의 과거사에 대한 인식이 퇴행적이다는 진단은 맞는 것 같아요. 아베의 장기집권이 지속되면서 다원주의적인 가치가 굉장히 침식되고 있다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일본 정부의 프레임에 대항할 수 있는 키워드는 바로 ‘가치’ 입니다. 일본은 그동안 미국과의 ‘가치동맹’을 바탕으로 중국을 비난해왔거든요. 중국은 전체적인 사회이고 비민주적인 사회라면서요. 일본 정부가 중국 정부에게 요구하는 가치는 자유, 인권, 평화 뭐 그런 것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한국 정부도 일본 정부에 요구할 수 있는 거죠. 프레임 전쟁에서 우리가 유리한 구도로 가려면, 보편적 가치를 기반으로 동맹관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기정 조금 보완하자면, 저는 일본에 평화라는 보편적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봐요. 평화주의적인 발전 측면에서 전후 일본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 있거든요. 평화헌법도 있고, 1998년도 공동선언도 있고요. 그래서 ‘평화적인 측면에서 일본이 역할을 할 필요가 있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일본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관여할 필요가 있다’고 설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 과정에서 역사문제를 같이 풀자고 제안할 수도 있죠. 조양현 전폭적으로 공감합니다. 아베 정부의 프레임은 굉장히 이중적이에요. 북한에는 인권,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면서 한국 정부가 요구하는 가치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못하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잖아요. 얼마나 이중적인 이야기예요. 일관된 논리로 인권 이야기를 하려면, 전시 여성 성범죄 문제인 ‘위안부’ 문제 해결에 일본 정부가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죠. 그런데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자기가 쓰고 싶은 가치 체계를 바꾸고 있어요. 조금 더 보편적인 가치체계를 가지고 이야기를 했을 때 대단히 취약한 구도거든요. 한국과 일본이 가치 체계를 공유하지 못한다면, 일본이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국가는 어디인가요? 동남아입니까? 인도입니까? 아니잖아요. 결국은 일본이 한국만큼 가치체계를 가깝게 공유할 수 있는 나라가 없다고 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보편적인 가치를 거론하면서 민주주의, 인권, 평화, 경제 부분에서 아베 정부에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조시현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을 할수록 일본은 우경화하고 있어요. 역설적이죠. 그렇기 때문에 두 분께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더욱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더 세밀한 힘의 관계를 분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시민단체와 가까워서 그런 부분들은 적극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데, 두 분께서 잘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Q. 이제 정리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앞으로도 한국과 일본 내의 시민단체가 더 날카롭게 문제를 제기하고 목소리를 내야겠죠. 그리고 양국 정부는 그 힘을 받아서 정부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하고요. 그래야 한일 관계가 갈등을 넘어서 진전된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약 두 시간 동안 어려운 주제의 이야기를 심도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좌담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남기정 수고하셨습니다. 조양현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시현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자리가 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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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좌담 지금, 여기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란 무엇인가 〈3부〉 - 따옴표 옮기기: ‘위안부’에서 ‘문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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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문제를 다룬 학술의 장이 마련될 때면 청년·미래 세션이 빠지지 않는다. 피해 생존자와 연결된 실질적 감각이 부재한 포스트 메모리(후-기억) 세대에 대한 우려와 기대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기실 여성학, 법학, 외교학, 사회학, 역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신진 연구자들의 연구성과는 축적되고 있다. 일본군‘위안부’문제 공론화 이후로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지금, 이곳에서 젊은 연구자들이 던지고 있는 질문은 무엇일까. 웹진 <결>은 이들의 관점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어떻게 의미화되고 있는지 알아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좌담회 일자: 2022년 6월 22일 -사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이헌미, 황진경, 이안, 장소정 -대담: 백재예(University of Massachusetts-Amherst 정치학과 박사과정), 송혜림(연세대 비교문학 협동과정 박사과정), 전소현(성공회대 국제문화연구학과 석사과정), 정희윤(University of Massachusetts-Amherst 사학과 박사과정) Q. 정희윤 선생님의 논문 <21세기 식민주의 유골 반환의 딜레마>는 다양한 맥락이 있지만, 유골이 본국으로 반환되어야 한다는 사고 자체가 국가주의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논문 제목에서도 ‘딜레마’라고 표현하셨는데요, 식민주의 폭력 희생자의 유골은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작업 이후 ‘딜레마’ 해체에 더 다가간 부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정희윤 2014~2015년경 홋카이도에서 서울로, 베를린에서 나미비아 빈트후크로 봉환된 식민주의 폭력 희생자들의 유해가 소위 ‘본국’으로 반환되는 과정을 분석한 바 있습니다. 반환의 과정은 탈식민적인 활동이었고 윤리를 행하기 위한 노력이었을 텐데, 딜레마로 여겨지는 구간이 있었습니다. 제국의 인종주의, 노동문제, 인종차별 문제보다는 남한이나 나미비아 같은 국가적 상징이 더 강력하게 읽혔기 때문입니다. ‘위안부’가 “성노예다, 아니다”라는 언어에 갇혀 그 이름을 잃어버린 것이나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이 “빨갱이다, 아니다”라는 이분법에 갇혀버린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식민주의 유해 반환은 “본국인이다, 아니다”라는 미로 속에 갇혀 이름들을 잃어버리는 기분이 들어서 이러한 현상을 딜레마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이름들을 어떻게 되찾아줄 수 있을까 계속 고민하고 있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정세 판단이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어떤 유해는 반환되는 게 옳고, 또 어떤 유해는 그대로 두는 게 낫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럼 이와 같은 딜레마를 해체하기 위해 국가를 해체해야 할까요? 그것은 말이 안 되지요. 결국 일상에 잔존하는 폭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를 찾아야 하고,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기르기 위해 기념과 애도 작업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외의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결국 딜레마를 해체하기보다는 그대로 둬야 하고, 불화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불화의 과정이 애도의 가능성과 맞물리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Q. 송혜림 선생님의 <감정의 재의미화와 기억의 해방:4.3 피해자 증언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은 ‘감정기억’이라는 개념을 끌어왔다는 점에서 증언과 기억을 대하는 자세에 시사점을 주는 것 같습니다. 증언/기억에 감정을 개입시키는 것이 새로운 가능성이자 해방이라고 보셨는데, 이를 통해 증언/기억은 현재로 불려오게 됩니다. 분유(分有) 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하고 계신다고 하셨는데 그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송혜림 증언의 어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사건의 제삼자가 사건을 투명하게 진술하는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사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의 입장에서 말하는 진술이죠. 그렇기에 후자는 객관적이고 실증적일 수 없는 고통의 언어예요. 현재의 증언 담론은 전자에 치우쳐 성립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후자의 언어를 더 잘 듣기 위해서는 명료한 언어나 표현에 다 담기지 못해 잉여의 의미들이 잔존하는 정동의 언어로 들어야 해요. 이는 증언자에게서 언어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고, 증언의 그러한 한계를 적극적으로 의미화할 청자의 책임을 요청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점에서는 기억 분유와 연결될 텐데, 증언을 매개할 때 독자 혹은 관객을 정동적으로 연루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증언을 들을 때마다 인지적 이해보다는 감정적인 동요가 먼저 일어나는데요, 증언의 순간에 함께 있던 연구자나 활동가의 서사를 통해서도 그들이 현장에서 느꼈던 감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증언을 듣고 ‘정말 고통스럽고 힘들었겠구나,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듣고 기억하여 전달하는 것이겠구나’라는 책임을 나눠 갖는 것 자체가 기억 분유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위치는 학술적인 영역에 있지만 저는 기억 분유를 절대 학술적인 전형성 안에서만 반복되는 방식이 아닌, 더 많은 이들이 증언을 만날 수 있도록 확장된 영역으로 키우고 싶습니다. Q. 백재예 선생님은 <체계적으로 관리된 성폭력, 일본군‘위안부’제도>라는 논문에서 “연합군의 자료를 통해 인식을 살펴보는 것은 일본군‘위안부’ 제도가 가진 분쟁하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서의 보편적 측면의 인식을 확장하는 것이다. 이에 연합군 자료가 축적되어 연합군의 인식을 포착하고, 그것이 어떻게 전후 전범재판에 반영되었는지를 규명하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박사과정에서 국제법을 전공하고 계신 만큼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어떤 언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사태와 같이 현시점에도 이어지고 있는 전시 성폭력 문제를 방지할 수 있는 기틀을 국제사회가 앞으로 어떻게 마련해갈 수 있을까요. 백재예 그 두 가지 질문이 논문 주제를 설정하고 계속되었던 고민입니다. 기존에 주어져 있는 법 제도에 미뤄봤을 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없느냐, 만약 가능하다면 어떤 법을 적용할 수 있는가’와 같은 법학 연구가 현재는 주를 이룹니다. 그런데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국제법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 것인가를 다양한 학제에서 연구하고 제시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이유로 법을 사회적 구성물로 바라보는 법사회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관심을 확장시키면 일본군‘위안부’ 제도와 운동은 전시 성폭력에 대한 정의 실현이라는 보편적 질문에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다고 봐요. 우크라이나 사태에도 적용될 수 있고요. 침략국이 전시 성폭력을 반성하지 않고 군인들을 처벌할 의지가 없는 상황에서는 ‘피해 생존자들이 어떻게 법을 동원하고 자신들의 피해를 구제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남을 텐데, 30년간 축적된 ‘위안부’ 운동의 경험과 노하우를 비롯해 우리 사회가 맞닥뜨렸던 한계가 그 문제에 실존적 함의를 던져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시 성폭력 재발 방지에 있어서 가장 크게 느꼈던 문제점은, 국제법이나 법 자체가 형사법 체제하에 있기 때문에 가해자 처벌에 집중돼있다는 것이에요. 반면에 생존자가 자신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민사법적 접근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결국 모든 책임이나 권한은 국제형사재판소의 검사나 판사에게 있는 것이죠. 따라서 국제법 자체도 형사법적 정의뿐만 아니라 피해자가 주체로서 자신의 피해 구제와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방향으로 확장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불어 국제법의 유효성을 살펴볼 때도 가해자 처벌 여부에만 치중하거나 국가별 법안 입법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국제법이 생존자들의 요구에 얼마나 기여하는지를 살펴보는 등 지표가 확장돼야 합니다. 그 지점에서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경험이 시사하는 점이 많을 것 같습니다. Q. 전소현 선생님의 <장애인의 시설화되는 삶을 교차적으로 읽기>를 읽고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돌봄 구조에 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상 및 지원에 대한 논의는 많았지만, 그 과정에서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돌봄은 주요 의제가 되지 못하고 연구 또한 미비해 아쉬운데요. 앞으로 연구자들은 ‘위안부’ 피해자 관련 시설 안팎의 돌봄을 어떻게 기록하고 해석할 수 있을까요. 전소현 “돌봄은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고, 돌봄을 받는 사람과 하는 사람의 위치는 고정돼있지 않다”는 말이 있지요. 그런데 저에게 돌봄은 굉장히 일방적인 억압의 경험으로 기억되고 있었어요. 소논문 발표 후 한 토론자분께서 해주셨던 말이 기억납니다. “돌봄을 억압의 과정으로만 생각하게 되면, 돌봄의 상호적인 과정이나 사람들의 행위자성을 개념화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말이었죠. 옳은 지적이라고 생각했어요.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돌보고 있다는 생각에는 개인의 능력, 역량, 독립성, 자율성에 대한 기존의 주류적 관점이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주류적인 방식으로 생각했을 때 돌봄을 제도화한다는 것도 관료적이거나 일방적인 방식이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국가의 돌봄 정책이나 보상이 어떤 정책적 개입이나 비개입을 통해 이뤄지고, 사각지대가 활동가들에게 어떠한 노동으로 전가되는지 함께 짚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나눔의 집 활동가분들이 수행했던 돌봄 노동에 대한 재조명도 필요하다고 봐요. 돌봄을 억압적인 방식으로만 생각하면 그분들이 오랜 시간 피해자들의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한 이유에 답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피해자의 문제를 조력자들이 자신의 문제로 주체화하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힘들어도 함께해올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당사자와 조력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해나갔는지 그 과정을 제대로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까요. 앞으로는 그런 관점에서 기록이나 연구가 진행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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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인터뷰 기억해야 할 첫 발걸음, 1세대 연구자를 만나다 - (1) 윤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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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옥(1925년~ / 영문학자, 인권운동가)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일찍부터 ‘위안부’피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1980년부터 ‘위안부’ 피해자를 찾아다니며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1988년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주최 ‘국제 관광문화와 여성(일명 기생관광) 세미나’에서 정신대 답사 보고를 하고 1990년 한겨레신문에 정신대 취재기를 연재하면서 이 문제가 세상에 적극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0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결성, 공동 대표를 역임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세상에 알리고 그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해 온 선구자. 저서로 『平和を希求して : 「慰安婦」被害者の尊嚴回復へのあゆみ』 『朝鮮人女性がみに 「慰安婦問題」 : 明日をともに創るために』 등이 있다. “지금도 내가 느끼는 거는.. 남의 일같이 생각하는 사람, 위안부 이렇게 떠들어도 관심 없는 사람들 아직도 많아. 내가 안 당했고, 내 딸이 아니니까. 근데, 혼자 공부 잘 해가지고 PhD 되고 월급 많이 받고 이게 아니라, 나 혼자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해. 다른 사람이 있어서 내가 있는 거야.” 지난 2월 14일, 웹진 <결> 편집팀은 서울 등촌동의 한 실버타운을 찾았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웹진의 시작점에서 가장 먼저 찾아뵙고 소식을 알리고 말씀을 듣고 싶은 사람을 꼽으라면 누구라도 주저 없이 떠올릴 분.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한 선구자, 윤정옥 전 이화여대 교수를 만나기 위해서다. 기대감과 떨림을 안고 찾아간 노학자의 집은 조용하고 정갈하면서도 온화한 느낌으로 가득했다. 아흔을 넘긴 연세로 왕성히 활동하던 시절보다는 쇠약해진 모습이었지만, 또랑또랑한 목소리에서 치열했던 평생의 여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인터뷰는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연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와 후학에게 전하는 메시지 중심으로 짧게 진행되었다. 같은 시대, 같은 여성의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를 차마 지나칠 수 없었다 영문학자로, 대학교수로 편안히 살 수도 있었던 그를 평생 뜨겁게 움직이도록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난 소설 전공이었거든. 19세기 전공이었는데, 문학에 관심 많았기 때문에 단체 일이나 사회사업 같은 건 관심도 없었어. 그런데 개인 개인을 만나게 되잖아. 만나고 보면 그렇게 기가 막히고, 생각도 못 할 이야기들이…... 이건 내가 아는 소설, 소설 아무것도 아니야.” 해방 직후, 윤정옥은 정신대로 떠났다던 여성들이 도무지 돌아오지 않는 것에 의문을 품고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돌아오지 않는 여성들에 대해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던 1970년대, 『분노의 계절』이라는 책이 도화선이 되어 스스로 이 문제를 파헤쳐 보기로 했다. 길도 없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지만, 사방으로 수소문하며 ‘위안부’ 피해 여성을 찾아다니던 중, 1980년 오키나와에서 배봉기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수년간 답사를 하고, 증언과 자료를 모으며 개인적으로 연구를 진행해 1988년 4월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주최한 국제세미나 ‘여성과 관광문화’에서 <정신대와 우리의 임무>라는 제목으로 일본군‘위안부’ 피해 실태를 발표했고, 그 자리에 있던 여성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진상조사를 위해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산하에 정신대연구위원회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소설 속에서 삶의 속살과 진실을 발견하는 데에 매료되었던 영문학자였지만, 그 어떤 소설보다도 ‘소설 같은’ 이야기를 쏟아내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며 윤정옥은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참담하기도 했지만, 이 문제가 벌어지게 된 배경에 복잡하고 끈끈하게 얽힌 전쟁, 계급, 빈곤, 사회 구조와 여성 차별의 고리들을 생생히 발견하면서 은퇴 이후에 인간사에 대해 다시 눈을 떴다고 회고하는 그의 목소리는 조용하지만 솔직한, 학자로서의 고백이었다. “내가 미안하잖아……” 1925년에 태어난 윤정옥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와 같은 시대를 살아왔다. 이화여자전문학교(현재의 이화여자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3년, 정신대 소집장이 어김없이 날아왔지만, 문제가 있음을 직감한 아버지의 판단으로 바로 학교를 자퇴하고 온 가족이 피난을 떠나 겨우 고난을 면했다. 전쟁이 끝나고, 끌려간 남자들은 돌아왔지만 끌려간 여자들은 소식조차 알 수 없이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 내가 피해간 어떤 문제를 나와 같은 이들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무게감, 학자로서 이 문제에 대해 알아내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양심과 책임감,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외면할 수 없는 공감이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일을 당했다더라, 그런 얘기가 귀에 들어오면 깜짝 놀라서 알아보고 말이지. 그 얘기 들으면 어떡할 수가 없어. 안 찾아다닐 수가 있어? 찾아다니지.”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그에게 “내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그 마음이 원동력이 되어 교수 재임 동안에는 틈틈이 방학 기간에 사비를 털어 답사와 연구를 이어 갔고, 은퇴 후에도 멈추지 않고 본격적으로 이 문제에 뛰어들게 되었다. 윤정옥은 김신실, 김혜원과 함께 현장답사 조사위원을 꾸려 일본, 타이완, 파푸아뉴기니 등을 답사하고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례를 수집했다. 생생하고 절절한 조사 내용은 1990년 1월, 한겨레에 <정신대 발자취 취재기>라는 제목으로 한 달 동안 연재되었고, 우리 사회에 폭넓은 반향을 일으켰다. 같은 해 7월 윤정옥은 그의 서재에 정신대연구회(한국정신대연구소)를 설립했다. 당시 이화여대에서 여성학을 전공하던 학생(여순주, 야마시다 영애, 이상화, 조최혜란)을 중심으로, 실천적인 문제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서는 진상 규명이 우선이라는 공감대 위에서 거침없이 내디딘 발걸음이었다. 정신대연구회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 면담을 통해 구술 채록을 진행하고 구술집(증언집)을 간행하는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렇게 피해자 증언 녹취와 피해 실태 조사를 주도하는 한편 국외 거주 피해자 발굴과 국적회복 사업에도 힘썼다. 그는 한국정신대연구소 활동과 함께 1990년 11월 37개의 여성단체가 모여 설립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의 공동대표로서 운동을 활발히 주도했다.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면, 본능적으로 다가가는 것 아무도 거론하지 않고 수십 년간 묻어왔던 문제를 처음으로 드러내고, 국제 사회에서 이슈화하고, 피해자의 인권과 존엄을 되찾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온 길이 절대 쉽지 않았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데 내가 어려운 게 어딨느냐’며 그는 오히려 “내가 창피하고 미안하다”고 손사래를 쳤다. “글쎄……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그런 얘기 들으면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거 같아. 누가 그렇게 힘들다고 하면 말이지. 본능적, 거의 본능적으로 뛰어드는 거야. 의지가 아니라.”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민족의 문제, 증오와 대립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의 문제, 공감의 문제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윤정옥은 우리와 같은 아픔을 겪은 베트남전 성폭행 피해자 문제 또한 결코 외면할 수 없었다. 그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할 한국이 도리어 가해국이 되었다는 점이 더욱더 무거운 마음의 짐이 되었다. 정대협 공동대표직을 내려놓은 이후 2006년, 개인 자격으로 베트남으로 향했다. 베트남전 성폭행 피해자와 그 가족, 2세들을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으로 사죄의 말을 전했다.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를 향했던 십수 년간의 외침,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나고 연대하게 된 일본의 연구자와 시민단체들의 활동이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마주한 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다시 한번 새로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1990년 책상 하나에 전화기 한 대로 정대협의 막연한 여정을 시작했듯이, 이번에는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시민연대 출범을 제안한 것이다. 그 목소리에 호응한 국내와 베트남 현지의 많은 단체는 2000년대 이후 지속해서 베트남전 성폭력 피해자와 그들의 2, 3세들을 돕기 위한 활동을 이어가며 전쟁으로 침해된 여성 인권 회복을 위해 달리고 있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에 인권과 평화가 회복되기를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그는 베트남전 성폭행 피해자 2세 가족을 한국으로 초청해 “당분간 내 집에서 머물더라도” 한국에서 아버지를 만나도록 돕고 싶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그들의 아픔에 크게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부의 입장과 외교적 관계, 정치의 논리가 아니라 여성 인권과 평화의 차원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베트남전 피해자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할 것을 외쳐온 윤정옥의 노력은 최근 들어 느리나마 결실을 보고 있다. 그와 뜻을 함께하는 사람과 단체들이 십수 년간 활동을 이어온 결과, 지난 2018년 4월 서울에서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 법정’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도, 베트남전 민간인학살과 성폭행 문제도 아직은 풀어야 할 단단한 매듭이 많이 남아있다.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연구자들과 현장에서 포기하지 않는 활동가들, 그리고 이들에게 관심과 지원을 보내는 시민들이 계속 뒤를 이어나가기를 기원하고 기대해 본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발견과 공감 “내가 아무리 공부 잘 해가지고 에이플러스 받아서 하버드 나오고 런던대 나오더라도, 나 혼자 살 수 없는 거야. 꼭 내 주위에는 같은 사람이 있어. 나 혼자만 잘된다는 생각, 그건 버려야 할 거 같아. 내가 있으면 누가 있지. 남자와 여자가 있는 것 같이, 동서남북이 있는 것 같이. 동이라는 것은 서가 있어야 동이야. 남이라는 건 북이 있어야 남이야. 혼자 절대로 있을 수 없어. 우리가 그거 알아야 할 거 같아.” 연구자로서 평생을 살아왔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성취나 성공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산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윤정옥.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눈을 열고, 공감하고, 서로가 있음에 내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말은 조용했지만 뜨거운 여운을 남겼다. Interviewer : 소현숙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연구팀장) Interviewee : 윤정옥 정리 : 슬로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