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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까맣게 굳은 소독약과 파편들… 할머니는 왜 그렇게 오래 간직하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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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맣게 굳은 소독약과 파편들… 할머니는 왜 그렇게 오래 간직하고 있었을까 《상하이 중국'위안부'역사박물관》 1931년 일어난 만주사변, 1937년부터 중국 전국토에서 전개된 중일전쟁,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벌어진 아시아・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의 광범위한 침탈 현장이었던 중국은 당시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운영한 위안소의 역사가 녹아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지난 6월 19일부터 21일까지 사흘 동안 아시아 지역 일본군'위안부' 문제 연구와 함께 일본군'위안부' 관련 기억의 전승을 위한 중국의 노력 등을 살펴보기 위해 가장 치열했던 전장인 난징과 상하이를 찾았다. 현지 일본군'위안부' 유적지 및 박물관 탐방기를 3회에 걸쳐 싣는다. (1) 중국 위안소 유적지·박물관 탐방기 1부 - 난징 리지샹위안소 유적전시관 (2) 중국 위안소 유적지·박물관 탐방기 2부 - 상하이 중국'위안부'역사박물관 (3) 중국 위안소 유적지·박물관 탐방기 3부 - 상하이 훙커우구 일본군 위안소 유적지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기 전인 6월 중순이었지만 중국 상하이는 매우 습하고 무더웠다. 간간이 내리는 부슬비 덕분에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를 그나마 피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상하이 남역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가기를 10여 분, 도착한 곳은 상하이사범대학교 앞이었다. 이곳에 우리가 방문하려는 '중국'위안부'역사박물관'이 있다. 정문 앞에서 박물관의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해 지도를 보니, 공교롭게도 근처에 중일우호공원(中日友好园)이 있다. 중국과 일본의 우호관계를 다지며 세운 공원 옆에 '위안부' 박물관이라니… 진정한 우호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두웠던 과거의 역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지가 담겨 있기를 바라며 학교 안으로 들어섰다. 상하이, 자료상으로 발견되는 최초의 위안소가 지정된 곳 중국 문화와 경제의 중심지이자, 서구식 건물들이 즐비한 와이탄과 예원노가(豫园老街)의 전통 상가들이 조화를 이루는 곳 상하이. 서울 면적의 10배가 넘는 이 거대한 도시는 오늘날 중국을 넘어서 아시아의 상업과 금융 거점이자, 동서양의 문화가 융합된 매력적인 도시로 꼽힌다. 그러나 이 화려한 도시 상하이는 불과 한세기 전 참혹한 전쟁의 그늘을 피하지 못한 곳이기도 하다. 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가 벌인 침략전쟁의 주요 전장이었던 상하이는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발상지이자, 위안소가 가장 오래 존재한 곳이라는 참혹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932년 상하이 사변을 기점으로 상하이에 주둔한 일본 해군 육전대는 군인들에게 소위 '위생적' 성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해군 특별위안소를 지정했다. 이것이 자료상으로 발견되는 최초의 위안소이다. 이를 기점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위안소는 1937년 일본의 전면적인 중국 침략 과정에서 급격히 증가해,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상하이 안에서만 무려 180곳이 넘는 위안소가 존재했다. 순간 이렇게 가파르게 늘어난 위안소의 규모가 수많은 여성이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었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어두운 역사를 품고 있는 상하이에 중국'위안부'역사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진 순간이었다. 상하이사범대학 안에 중국'위안부'역사박물관이 설립된 것은 이 학교의 교수로 재직해 온 쑤즈량(蘇智良) 교수의 역할이 컸다. 1990년대 일본에 방문 학자로 갔던 쑤즈량 교수는 이를 계기로 '위안부'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그리고 1999년 상하이사범대학교에 '중국'위안부'문제연구센터'를 설립하고 이 문제와 관련된 연구에 매진했다. 대표적인 활동이 약 50명의 특별연구원과 함께 중국 전역을 조사해 피해 생존자들을 찾고 그들로부터 증언을 듣고 자료를 모은 것이었다.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2007년 소규모 자료관이 설립됐고, 2016년 오늘날과 같은 역사박물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박물관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중국 정부가 운영하는 난징의 대도살기념관(侵华日军南京大屠杀遇难同胞纪念馆)이나 난징 리지샹위안소 유적전시관과 비교하면 소박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 작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이 약 2만 점에 달한다. 전시된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하니 전시장 공간만 보고 과소평가할 수 없는 곳이다. 더구나 지금도 중국 곳곳에서 '위안부'와 관련된 유물들이 기증되고 있다고 한다. 쑤즈량 교수는 특히 중국에 거주하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육성을 담은 궈커 감독의 다큐멘터리 <22>가 2017년 중국에서 개봉해 크게 흥행하면서 이 문제에 관한 중국인들의 관심이 커진 후 많은 성금과 함께 관련 자료를 발굴해 제보하는 사례가 늘었다고 전했다. 앞으로 어떤 자료와 유물이 새롭게 발굴돼 공개될까, 미래를 기대하게 하는 설명이었다. 차분한 분위기의 전시장 입구에서 가까운 벽에 붙은 패널에는 '위안부' 동원의 역사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과 더불어 상하이의 대표적 위안소를 안내하고 있었다. 그리고 피해 생존자들의 사연, 증언과 함께 콘돔, 성병약 등 위안소에서 사용된 물품들과 전쟁 시기의 사진과 지도, 그릇, 화장품, 호구부 등 다양한 유물들이 당시의 상황을 증거하고 있었다. 그중 중국인 위안부 피해자 레이꾸이잉(雷桂英) 할머니가 위안소에서 가지고 나온 소독약품 과망간산칼륨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위안소에서 소독약으로 쓰던 것을 할머니가 들고나와 전후에도 계속 보관하고 있다가 기증한 것이라 한다. 까맣게 굳어버린 소독약에 세월이 켜켜이 쌓여있다. 할머니는 왜 이 소독약을 들고나와 그렇게 오래 간직하고 있었던 걸까. 콘돔 두 개의 파편이 담긴 병도 눈에 띄었다. 도쿄 나가노에 살던 전 일본 해병대 장교가 소유하던 것으로, 그는 전쟁 중 상하이에서 해군 위안소를 관리했다고 한다. 까맣게 말라버린 파편을 오래 바라봤다. 저 작은 도구가 얼마나 많은 여성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도구로 쓰였을까, 보고 있지만 그 사실은 실감나지 않았다.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의 호구부가 전하는 먹먹한 사연 유물 중에는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의 것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 1922년생으로 전라북도 출신 모은매(毛銀梅) 할머니의 호구부가 있다. 그녀의 원래 이름은 박차순이었다. 할머니는 1945년 초 취업을 알선해준다는 일본인에게 속아 중국 우한으로 끌려왔고, 곧 한커우의 위안소로 보내져 '위안부'가 되었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허베이 샤오간으로 탈출한 그녀는 이후 중국식으로 이름을 바꾸고 현지에 남는 길을 선택했다. 어린 나이에 타지로 끌려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후에도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박 할머니의 사연과 유품을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박물관에는 피해자의 유품이나 가해 군인들이 쓰던 물건들 외에 위안소 모습을 재현해 둔 공간도 있었다. 특히 재현된 위안소에 달린 문짝은 실제 하이나이자(海內家) 위안소에 있던 것을 그대로 가져와 복원한 것이었다. 1939년 설립된 하이나이자 위안소는 일본 해군이 사카시타 쿠마조라는 일본인에게 전권을 위임해 운영하게 한 위안소였다. 당시 사카시타 쿠마조는 상하이에서 콩자반 가게를 하던 이였는데, 아내의 반대를 물리치고 '국가'를 위해 힘을 기울여달라는 해군의 요구에 부응해 합작으로 위안소를 만들었다. 물론 이 위안소에도 조선인 '위안부'들이 있었다. 아주 좁은 방에 침상과 몸을 씻기 위한 양동이 몇 개가 덩그러니 놓인 위안소의 모습에 마음이 점점 착잡해졌다. 중국'위안부'역사박물관의 가장 큰 특징은 연구자가 중심이 되어 만든 박물관인만큼 연구를 거쳐 새롭게 발굴된 내용을 그대로 전시에 녹여낸 부분이었다. 쑤즈량 교수는 현지 조사를 통해 피해 생존자를 찾고 자료를 모은 지 30년이 되어가지만 아직도 조사가 끝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연구가 계속될 것이라 강조했다. 후세대 연구자들에 의해 지역별 연구가 이어지고 있는 만큼 중국'위안부'역사박물관의 아카이브는 물론 전시 또한 꾸준히 보완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언제든 나타날 피해자를 위해 비워 둔 의자 하나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자 안내자가 교정에서 들어오는 길에 소녀상을 보지 않았냐고 묻는다. 아, 교정에 소녀상이 있구나! 미처 몰랐다는 표정이 보였는지 안내자는 소녀상을 보여주겠다면서 친절히 건물 밖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따라가보니 건물 왼쪽의 잔디밭에 아담한 소녀상 두 개가 나란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하나는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인 '위안부'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 전통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빈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언제든 나타날 수 있는, 아직 만나지 못한 피해자를 위한 자리였다. 이미 많은 분들이 돌아가셔서 새로 나타날 피해 생존자가 얼마나 있을지 낙관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 우리에게 비어 있는 의자가 조용히 전하고 있었다. '포스트 피해자의 시대'를 예비해야 하는 오늘날 후세대들이 함께 배우고, 연대하기 위한 자리로 만들어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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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일본의 미투 운동과 ‘위안부’ 문제 1부 – 역사수정주의, 백래시, 그리고 ‘위안부’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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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여성문학연구』 47호(2019)에 실린 「일본의 #MeToo 운동과 포스트페미니즘: 무력화하는 힘, 접속하는 마음」의 내용을 요약‧수정한 것이다. 일본의 미투 운동과 ‘위안부’ 문제 1부. 역사수정주의, 백래시, 그리고 ‘위안부’ 문제 2부. 역사의 교차, 문화의 번역 일본에는 ‘미투’가 없다? 작년 미투 운동이 한창이었을 때 일본학을 배우는 학생들한테 몇 번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일본에서는 왜 미투 운동이 안 나와요? 언론에 잘 나오지 않는데요?” 이 질문에 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래에서 보는 것처럼 일본에서 미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디어와 사회적 공감이라는 점에서 한국과의 온도 차는 부정할 수 없었다. 왜 그들은 비가시화되는가. 그 배경에는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는가. 저널리스트 이토 시오리(伊藤詩織)는 2015년 당시 TBS 방송국 워싱턴 지국장이던 야마구치 노리유키(山口敬之)를 준강간 용의로 고발하였고 2016년 불기소처분을 내린 검찰에 이의신청을 했다. 2017년 5월에는 기자회견을 열어 야마구치에 의한 강간 피해를 세상에 알렸고, 그 후 책을 간행하여 성폭력 피해뿐만 아니라 일본 경찰의 2차 가해와 사법제도의 문제점 등을 고발했다. 이토의 고발은 일본 미투 운동의 선구적 사례로 해외에서도 널리 알려졌지만, 한편에서는 세련된 외모에 유창한 영어를 구사한다는, 전형적인 ‘피해자성’을 벗어난다는 이유로 일본 사회에서 비난과 협박의 대상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그는 일본을 떠나게 되었다. 영국에서 살기 시작한 이토는 BBC의 특집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등 해외에서 인지도를 높였고, 사건을 계기로 성폭력에 대처하는 선진국의 법 제도나 지원체제를 연구하는 전문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현재 이토가 야마구치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 대해 야마구치가 반소(反訴)하는 등 그의 투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토의 뒤를 이어 모델 카오리(KaoRi)가 사진가 아라키 노부요시(荒木経惟)의 ‘사적인 사진(私写真)’이라는 작업이 모델 여성에 대한 성 착취를 통해 이뤄져 왔음을 고발했다. 어느 여성 기자는 재무성 사무관 후쿠다 준이치(福田淳一)의 저열한 성희롱을 밝혀 그의 사임을 이끌었다. 인권 저널리스트 히로카와 류이치(広河隆一)의 권력을 남용한 상습적 성폭력과 정신적 폭력은 8명이 넘는 제자들에 의해 적나라하게 밝혀졌다. 2018년 8월에는 도쿄 의과대학이 “결혼, 출산 등으로 장시간 근무가 어려운 여성들은 의사로서의 가동력이 저하된다”라는 이유로 여학생들의 입시 합격률을 조작해왔던 사실이 밝혀졌다. 너무나 시대착오적인 여성차별에 경악하고 분노한 여성들이 거리에 나오기 시작했다. 이때 매스미디어와 의료 관계자들의 냉담한 반응은 오히려 이것이 빙산에 일각이라는 현실을 널리 세상에 알렸다. 일본에서 미투 고발이 없었던 것도 아니며 그 차별과 폭력의 강도가 약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에 대한 지지와 공감이 확산되지 못한 요인은 무엇일까. 이와 같은 현실을 단지 일본 미투운동의 실패나 불가능으로 보기 전에, 탈냉전 신자유주의 시대 페미니즘의 맥락과 그 반응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 일본의 미투 운동을 둘러싼 상대적으로 냉담한 반응은 포스트 냉전기 페미니즘을 비롯한 인권운동의 제도화와 그들의 인정 투쟁에 대한 광범위한 백래시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여기에는 일본군‘위안부’ 문제 부정론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사진) 강간 피해를 알리고 일본 경찰의 2차 가해와 사법제도의 문제점을 고발한 이토 시오리의 책 『Black Box』의 표지 젠더 백래시와 역사수정주의의 결합 일본 페미니즘 운동의 발전은 일반적으로 1970년대 우먼리브 운동의 시작, 1980년대 여성학의 창설, 1990년대 젠더 연구의 성립 등으로 특징된다. 제도적으로는 1985년 여성차별철폐조약 비준을 계기로 국적법 개정(1984)과 남녀고용기회균등법(이하 균등법) 제정(1985)이 실현되었고, 1990년대는 베이징세계여성회의(1995)에서 제시된 행동강령이 남녀공동참획사회기본법 제정(1999)으로 결실을 보았다. 물론 이와 같은 정리는 너무나 일면적이다. 페미니스트들이 1985년을 ‘여성빈곤 원년’ 혹은 ‘여성분단 원년’이라 부른 것처럼 균등법 제정은 한편에서 고용 규제 완화를 촉진하는 노동자파견법, 그리고 여성의 낮은 임금을 장려하는 새로운 연금제도의 도입과 함께 여성들의 비정규직화를 가속화했다. 즉, 당시 본격적으로 시작된 신자유주의 개혁과정에서 여성들이 간편한 노동력으로 재편된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신자유주의 개혁을 부추긴 새로운 보수 세력은 이제 여성들에게 "가정으로 돌아가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사회진출과 가정에서의 역할을 동시에 담당할 수 있는 '유연한(flexible)' 노동력이 되기를 요청한 것이다. '남녀공동참획'이라는 아젠다 아래 정부와 지방행정 내부에도 여성들이 진입하기 시작했다. 각 지자체에서 남녀공동참획 센터와 젠더 관련 조례가 만들어졌고, 학술‧교육 분야에서도 젠더론 강의나 시민 강좌, 젠더 관련 출판물 등이 활발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전국각지의 여성단체가 발간하는 간행물이나 교육용 소책자에는 '젠더프리'라는 말이 종종 등장하였다. 그런데 같은 시기, '젠더프리'를 "프리섹스를 장려하는 과격한 성교육"으로 호도하고 공격하는 백래시의 물결이 전국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백래시의 대표적 논자인 심리학자 하야시 미치요시(林道義)는 1990년대 후반부터 부성과 모성, 주부의 복권을 제창하기 시작했고, 기본법이 제정된 1999년 이후 페미니즘을 "정권의 중심을 차지하여 가족을 파괴하는 해악"으로 보고 반격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이때 '젠더프리' 담론과 함께 백래시의 계기를 제공한 것은 바로 일본군‘위안부’ 문제였다. 1990년대 후반은 일본에서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나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의 만화 『전쟁론』 등 역사수정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이며, 그 주된 논객들이 젠더 백래시에도 가담하고 있었다. 예컨대 역사를 "과학이 아닌" "민족의 로망"이라 부른 새역모 회장 니시오 칸지(西尾幹二) 및 핵심멤버인 다카하시 시로(高橋史郎), 야기 히데츠쿠(八木秀次) 등은 일본군‘위안부’의 교과서 기술을 부정하는 한편에서 젠더 백래시의 주역으로도 활약했다. 그들은 '모성의 복권'을 내걸고 여성들의 자율적 영역을 부정하며 ‘위안부’를 매춘부로 불러 피해자들과 성 노동자들을 동시에 모욕하는 담론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해왔다. 90년대 후반 이후 젠더 백래시와 역사수정주의는 세력을 키웠고, 그들 동력의 핵심에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있었다. ‘위안부’ 부정을 동력으로 삼은 두 보수 세력 90년대 역사수정주의 담론은 2000년대에 들어 차원이 다른 두 보수 세력의 발전을 가져왔다. 하나는 보수 정치인들과의 연합을 통해 형성된 광범위한 극우세력이다. 그들은 '일본회의'와 '신토정치연맹' 등 일본 최대급의 극우 정치‧종교단체를 기반으로 삼았고 『산케이신문(産経新聞)』, 『세이론(正論)』, 『쇼쿤(諸君!)』, 『SAPIO』 등의 보수언론을 주요 무대로 활약했다. 이들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젠더프리 교육'은 애국심과 전통적 질서를 파괴한다는 점에서 서로 연결되었다. 2005년 5월에는 당시 내각 관방장관이던 아베신조(安倍晋三)를 좌장으로 내세운 '과격한 성교육‧젠더프리교육 실태조사 프로젝트팀'을 발족했던 것처럼 젠더 백래시는 시민사회 내 반페미니즘 운동이라는 한 파트를 벗어나, 자민당 극우정치인들 스스로가 견인하는 대보수연합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다른 하나는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나타난 광범위한 넷우익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급성장한 넷우익의 존재는 '혐한류' '재일 특권' 등의 담론을 거쳐 '행동하는 보수'를 자임하는 '재특회(재일 코리안의 특권을 용서하지 않는 모임)'의 헤이트 스피치로까지 발전했다. 이들은 기존 리버럴 세력과 재일조선인, 페미니스트 등을 '반일'이라는 잣대로 공격함으로써 일본 시민사회의 대항 담론을 빈곤한 정치적 상상력 속에 가둬놓았다. 2002년 '2채널'에 생긴 '페미나치를 감시하는 게시판'은 2016년에 '페미‧반일책동을 감시하는 게시판'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오늘까지 꾸준히 이어지고 있으며, 현재 광범위한 '혐오 비즈니스'로 확대되었다. 시리아 난민을 조롱하는 일러스트를 그린 만화가 하스미 도시코(はすみとしこ)는 그 후 재일조선인, 페미니스트, 오키나와 등 대상을 바꿔가면서 그가 '위장 약자'로 부르는 사람들을 공격해왔다. 미투 이후 그가 "증거는 없어도 내 몸이 기억한다"는 문구와 함께 이토 시오리와 '위안부' 피해자의 일러스트를 나란히 배치해 조롱한 것은 이 흐름의 핵심을 보여준다.[1] 이처럼 1990년대 반페미・역사수정주의자들은 대연합을 형성하여 한국보다 비교적 빠른 시기에 백래시의 물결을 만들었고 그 중심에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있었다. 즉 새역모가 일본인의 긍지와 애국심을 훼손하는 '자학적' 역사 교과서를 비난할 때도, 또 재특회가 거리에서 혐한시위를 벌일 때도 그 중심에는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모욕과 비난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역사수정주의의 대중화가 가져온 현재 상황은 역사적 전문성보다는 만화가, 유튜버, 연예인과 같은 비전문가들의 실감을 바탕으로 한 반지성주의 현상으로 이는 일본 사회 소수자나 피해자에 대한 전체적인 백래시 과정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남자들이 만든 ‘위안부’ 문제에 여성들이 나선다"? 최근에 나타난 새로운 움직임은 ‘위안부’ 부정론과 반페미니즘 활동을 여성 정치인과 활동가들이 적극적으로 담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2001년 9월에는 '일본회의' 계열의 '일본여성모임'이 결성되어 젠더 백래시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위안부 문제를 끝장내기 위해" 2011년에 설립한 나데시코 액션(なでしこアクション)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정부 의견과 다른 결의안을 낸 지방의회에 대한 항의, 해외 '위안부' 소녀상 설치에 대한 항의 등 국내외 반일활동 저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시민단체다. 단체대표 야마모토 유미코(山本優美子)는 원래 재특회에 운영진으로 참여하다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나데시코 액션을 결성했다. 그는 자민당 극우정치인 스기타 미오(杉田水脈)와 함께 유엔에서 ‘위안부’가 역사 왜곡임을 주장하였고, "남자들이 만든 ‘위안부’ 문제에 여성들이 나선다"는 문구와 함께 『여성이니까 해결할 수 있는 위안부 문제』라는 공저도 출간했다. 소위 '아베 칠드런'으로 정치권에 들어간 스기타는 페미니즘만이 아니라 LGBT, 난민, 재일조선인 등 모든 소수자 인권 문제에 대해 자극적인 혐오 발언을 통해 넷우익들의 인기를 얻은 정치인인데, 특히 유엔에서의 로비활동과 세계 각지에서의 소녀상 건립반대 운동 등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국제적 '역사전'에 앞장서고 있다. 남녀평등을 '반도덕적'이라고 말하는 스기타가 미투를 '현대의 마녀사냥'으로 불러 공격한 것은 안티페미니즘의 극단적 사례를 보여준다. 그들의 민낯은 영화 〈주전장〉(미키 데자키, 2019)에서 잘 드러난다. 그런데 이토에게 고발당한 야마구치 또한 아베의 인물 평전을 낼 정도로 현 정권과의 유착관계가 깊은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이토는 저서 『Black Box』에서 성폭행 후 야마구치의 태도, 약물 혼입의 가능성, 야마구치를 기소하는 과정에서 겪은 경찰과 검찰의 2차 가해, 그리고 예정된 체포의 갑작스러운 취소 등 악몽같은 경험을 자세하게 적었다. 이토는 수사과정에서 "고소하면 저널리스트로서의 인생은 끝난다"는 협박을 들었고 결과적으로 야마구치의 체포는 돌연 취소되었다. 여기서 사건 직전에 야마구치가 썼던 기사가 "한국군에 베트남인 위안부가 있었다!"는 내용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기사 내용의 사실 여부를 둘러싸고 보수언론 내부에서도 날조와 가로채기 의혹이 제기되어 TBS 내부에서 징계처분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결과적으로 TBS가 철회한 기사를 독자적으로 보수잡지 『주간분슌(週刊文春)』에 발표한 것을 이유로 워싱턴 지국장에서 해임되었다. 기사를 발표하는 과정에서 아베 정권 측근과의 소통이 있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전제로 할 때 역시 일본 미투 운동에는 개개인의 앞을 가로막는 커다란 벽이 존재한다. 그것은 90년대부터 이어지는 정치적 사회적 백래시와 무관하지 않다. 2부에서는 이에 대항하는 움직임들을 드러낼 것이다. 각주 ^ 하스미토시코의 트위터 계정, https://twitter.com/hasumi29430098/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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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그녀들의 법정 2부 - 합의 이후, 양국 정상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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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8 한일합의' 이후, 그녀들의 법정 1부. 단 800자의 기자합의문이 해결을 담을 수 있는가 2부. 합의 이후, 양국 정상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가 3부. 12.28 합의는 헌법소원청구 대상이 아니다? '적정선의 합의'로 '위안부'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원하는 것은 일본이 '법적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법적 책임을 진다는 것은 첫째, ‘위안부’를 모집하고 위안소를 운영하는 데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를 명확하게 하고(사실의 인정) 둘째, 과거의 일들은 국제법과 국내법에 비추어 불법행위라는 사실과 그것을 자행한 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고(책임의 인정), 마지막으로 그 책임자가 과거의 불법행위에 상응하는 배상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손해의 배상). '과거의 불법행위책임에 상응하는 배상책임'은 '경제적 배상'을 의미하는 것이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이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피해자 할머니들은 경제적 배상으로 '위안부' 문제의 '사실과 책임인정' 단계가 흐지부지되어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손해의 배상에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사죄와 미래세대에 대한 교육까지 포함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해왔습니다. 경제적 배상이 손해배상의 전부였다면, 그리고 경제적 배상이 법적 책임을 지는 것이었다면 '적정선의 합의'로 '위안부' 문제는 종결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들이 요구하는 '책임 있는 자의 사죄와 미래세대에 대한 교육'은 역사적 사실을 숨기고 책임 인정 단계를 건너뛴 상태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여러 차례 민간기금 등을 통하여 '위안부' 문제를 마무리하고자 했으나 이를 거부해 왔던 것입니다. 합의 이후, 양국 정상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가 일본 정부는 아베 총리의 발언을 빌어 외무성의 홈페이지에 공식적으로 '12.28 위안부 합의'는 '위안부' 문제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최종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해결하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이라고 태도를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는 김학순 할머니와 같은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증언이 나타나기 시작한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으로, 1965년의 한일청구권협정이 이루어질 당시 ‘위안부’ 문제는 피해보상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한일청구권협정이 이 문제에 대한 일본의 법적 책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겠지요. 일본이 역사적 사실과 법적 책임을 회피하는 데 가장 큰 방어막이 되는 것이 한일청구권협정이었기 때문에, 일본에 법적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넘어야 할 장벽도 한일청구권협정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2015년에 이르러 이루어진 '위안부' 합의가 한일청구권협정이라는 장애를 넘어 일본이 회피하려 애써왔던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법적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 것인지가 12.28 위안부 합의의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외교장관들의 기자회견문만으로는 이 부분을 명확하게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부분을 기자회견 직후에 양국 정상이 나눈 전화 회담을 통해 파악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한일간의 전화 정상회담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거의 보도되지 않았지만, 일본에서는 양국 정상의 전화 회담의 내용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있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아베총리는 박근혜 전대통령에게 ”'위안부'문제를 포함한 한일 간의 재산‧청구권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경제협력 협정으로 최종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우리의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고 했다고 합니다. 2016년 1월 18일, 피해자 할머니들을 대리하고 있던 민변 변호인단은 대통령 비서실장을 상대로 '2015. 12. 28. 오후 5시 48분부터 15분간 진행된 한일 정상 회담의 전화 회의록 중 일부'의 정보 공개를 청구했습니다. 아베 총리가 “'위안부' 문제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된 것이다”라고 발언했는지, 박근혜 대통령이 어떻게 답하였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2016년 1월 27일 박근혜 정부의 대통령 비서실은 양국 정상의 전화회의록은 외교문서이자 대통령기록물이라는 이유로 비공개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에 3월 17일 변호인단은 대통령 비서실을 상대로 양국 정상 간의 전화 회의록 비공개 결정을 취소하라는 정보공개청구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송 중에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당하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에 생산된 문서는 모두 대통령 기록물 관리법에 따라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되었습니다. 문서의 비공개여부를 따져보기도 전에 기록물의 존재 자체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죠. 변호인단은 여러 경로로 전화 회의록을 찾을 수 있는지 문의하고, 다른 기록에 내용이 남아 있는지 확인해보려 했지만 구체적인 정보는 얻지 못했습니다. 결국 대통령 기록물이라는 장벽에 막혀, 피해자 할머니들의 변호인단이 대통령 비서실을 상대로 제기한 정보공개청구는 2019년 2월 22일, 기각되었습니다. 12. 28. 위안부 합의가 초래한 '위안부' 문제의 벽 '위안부' 한일합의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이 합의가 어떤 의미인지를 제대로 해석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은 이를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을 부인하는 근거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베 총리는 국내 참의원과 중의원들 앞에서 '위안부' 문제는 “전쟁범죄가 아니었다.” “12.28 '위안부' 합의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확인한 것이다”라고 발언했습니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 참석한 일본 정부 대표는, “'위안부'에 관한 연구는 조작되었으며 성노예는 잘못된 개념”이라는 발언까지 했습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증언과 사료들로 인해 차마 '위안부' 문제를 당당히 부인할 수는 없었던 일본 정부가 12.28 합의 이후에는 어떠한 제어도 받지 않고 회피하고 부인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12.28 ‘위안부’ 합의는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에 법적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길을 아예 막아 버릴 수 있는 심각한 장애를 초래하였습니다. 3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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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좌담 밝은 미래: 20대의 감각과 생각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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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기 일본군‘위안소’ 성노예 제도가 전쟁범죄로 공론화된 지 30여 년이 지났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생존자 증언과 법정 투쟁, 한일 외교 공방을 거쳐 역사 대중화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 사회의 20대 대학생들에게 이 문제는 어떻게 와 닿을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서울 소재 대학생 6명에게 넓은 의미에서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나눠달라고 요청하였다. 수요시위와 소녀상 지킴이, SNS 해시태그로 운동하는 세대, 피해자 증언을 직접 들은 적이 없이 영화와 소설로 ‘할머니’를 만난 사람들, 나비 배지와 추모 팔찌를 사고 모금과 기부를 하는 기념 산업의 자연스러운 소비자. 사회적 기억과 기념의 미래 주역으로 종종 호명되는 ‘청년’은 집합적 주체로 존재하는가? 그들을 만나보자. -좌담 일시: 2023년 8월 16일 -사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 이헌미, 황진경, 정나라 -대담: 강대현, 김도경, 김민정, 김희연, 심현희, 이혜주 -정리: 퍼플레이컴퍼니 Q. 연구소에서 주최하는 학술 콜로키움, 북토크, 전문가포럼을 견학한 소감이 어떠셨는지요. 심현희 학술 콜로키움과 전문가포럼에 참석했는데, 전문가분들의 토론을 지켜보며 보다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었고 다양한 관점을 접하며 지식을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혜주 〈벌새〉 북토크가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대학 입학 후 첫 전공 과제가 영화 〈벌새〉를 보고 리포트를 쓰는 것이었어요.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흐른 뒤 북토크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김보라 감독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영화를 보던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이야기를 현대 여성과 결부시켜 말씀해주신 것도 좋았고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 가져야 할 자생력은 무엇인가, 무너지지 않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에 대해 생각하곤 하는데 감독님이 그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해주셔서 큰 힘을 얻었습니다. 김도경 학술 콜로키움을 온라인으로 들었는데 ‘위안부’ 문제를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놀랐어요. 사회적 인식 자체가 연구의 주제가 되는 것도 흥미로웠고요. ‘위안부’ 문제를 단순히 역사의 일부 또는 감정적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콜로키움에 참여하면서 보다 넓은 시야를 갖게 됐습니다. 김민정 ‘위안부’ 문제에 대해선 막연히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분노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학술 콜로키움에 참석한 후, 민족주의적인 시각으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면 피해 당사자들을 정치적으로 대상화하여 문제 해결 과정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정말 유익하고 큰 도움이 됐어요. Q.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50년도 더 된 오래된 일일 뿐이며 이제는 과거를 잊고 미래를 위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혹시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성과 인권이라는 좀 더 넓고 보편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위안부’ 문제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어떤 연관성(접점)이 있을까요? 이혜주 피해자분들이 인정할 만한 사과와 보상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가해자를 용서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건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가 아닌가 싶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성착취 문제를 보면 N번방 등의 디지털 성폭력을 예로 들 수 있을 텐데요, 이러한 범죄의 핵심은 여성의 힘을 무력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여성들을 노예화하는 방식인 거죠. 그렇다면 우리는 피해자에게 어떤 지원을 해줄 수 있는지 고민해보고, 이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와 연결 지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대현 결국 하나의 통일된 의제를 만들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최소한 일본군‘위안부’ 문제만큼은 초당적인 논의가 이뤄져야죠. 김희연 과거를 덮어두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지금의 여성혐오 범죄와 개별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고 생각해요. 여성에 대한 범죄, 성착취에 대해서는 국가적으로 통용되는 확고한 상식이 필요합니다. 김민정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잊는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한 국가의 전쟁범죄를 잊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에요. 전쟁에서 자행됐던 여성에 대한 심각한 성적 학대와 집단 폭력을 더 이상 거론하지 말자는 것이고, 그것은 절대로 미래를 위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새로운 합의를 계속해서 도출해 나가야 하고, 제2의 ‘위안부’ 피해가 발생하지 않으려면 국제법규와 같은 근본적인 해결책과 인식 전환이 뒷받침되어야 해요. 김도경 현재도 수많은 성범죄가 일어나고 있고 여성혐오가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는 것이 성숙한 시각을 갖도록 도와준다고 생각합니다. 심현희 ‘위안부’ 문제는 여성의 인권과 성평등을 논하는 중요한 주제예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과거를 묻는다는 것은 인권과 정의를 배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더 공정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다루고 해결해야 합니다. Q. 현재도 진행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군인들에 의한 성폭력 범죄 이야기가 뉴스에 종종 나오기도 하는데요. 1960~70년대에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한국군 또한 민간인 학살과 성폭력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국내에서도 주한 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기지촌이 만들어졌고 여성들이 강제 성병 검사를 받거나 구타, 살해 등 폭력적인 상황에 내몰렸습니다. 이러한 이슈들과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가진 특이성이나 차별성이 있을까요? 혹은 공통점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이혜주 정부가 개입한 구조적 성범죄라는 것이 ‘위안부’ 문제가 지닌 특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피해자들의 삶과 인권이 파괴됐다는 점에 분노하기보다는 한국 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는 점에 분노하는 것 같아요. 그러한 점에서도 차별성을 갖는 것 같고요. 김민정 국가 자체가 가부장제 프레임과 남성주의적 관점에서 여성을 자산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일본에 민족의 자산을 빼앗기고 유린당했다는 점에서 분노하는 거죠. 미군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관점 또한 마찬가지예요. ‘우리의 자산을 이용해 이익을 창출했는데,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거죠.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일들은, 우리의 치부를 들춰내는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인식이 있어 공론장에 오르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김도경 일본군‘위안부’는 일제강점기의 지배구조하에서 이뤄진 폭력이고, 공장 취업이나 국가, 가족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속아서 간 분들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도 특이성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범죄를 처음 알았을 땐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위안부’ 피해의 경우와 달리 한국이 가해국이 된 거잖아요. 우리가 가해를 저지른 역사적 과거도 동등한 관심을 갖고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심현희 ‘위안부’ 문제와 다른 전쟁에서의 성폭력 문제는 각각의 맥락과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고통과 인권 침해는 공통적으로 주목해야 할 중요한 쟁점이죠. 따라서 정확한 진상규명과 피해자 지원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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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영화 「아이 캔 스피크」와 ‘서발턴’의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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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속 일본군'위안부' 깊이 읽기 <1부> 우리 일상과 접촉면이 넓은 미디어, 그만큼 상호 영향의 진폭이 크고 깊다. 미디어 속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다시 새롭게 읽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시작을 영화 「아이 캔 스피크」로 연다. 개봉 후 328만 명이 볼 정도로 상업적으로 성공했고, '울림을 주는 좋은 영화'라는 평까지 받은 「아이 캔 스피크」는 '생존자'인 동시에 '목격자'로 증언하는 '위안부' 피해자이자 서발턴의 말하기, 피해자를 제외한 가해국 간 사죄와 사면이라는 불편한 퍼포먼스 등 '위안부'문제를 '세계화'하는 현재의 담론과 운동의 방향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자극한다. <1부> 영화 「아이 캔 스피크」와 '서발턴'의 말하기 <2부> 전장 없는 '주전장'과 정쟁화된 '위안부' 문제 김현석 감독이 연출해 2017년 개봉한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2007년 '미국 연방회의 일본군'위안부' 사죄 결의안(HR121)'이 통과된 실제 사건을 극화했다. '위안부' 피해 사실을 숨기고 살던 주인공 '옥분(나문희 분)'이 미 하원 의회에서 증언해 '위안부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에서 시장 상가에서 수선집을 하는 옥분은 동네에서 벌어지는 온갖 불편, 불법 사항을 신고하는 '도깨비 할매'. 아무리 동네를 위한 일이라도 그녀가 넣은 민원만 8,000여 건에 이르다 보니 구청 직원들에겐 '블랙리스트'요, 한 번이라도 신고를 당해 본 상인에겐 껄끄러운 이웃이다. 한편,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민재(이제훈 분)'는 옥분이 넣은 수많은 민원을 처리하는 구청 공무원이다. 영화 전반부는 공동체의 문제를 법(민원)으로 해결하려는 옥분과 권력의 편에서 법의 허점을 악용하는 구청 공무원 민재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영어'로 증언하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그러나 옥분이 '위안부' 피해자임이 알려지고, 갑작스레 건강이 악화된 친구 '정심(손숙 분)' 대신 미 의회 증언에 나서게 되자 민재는 누구보다 든든한 옥분의 서포터가 된다. 옥분은 민재와 함께 '영어로' 증언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하는데, 문제는 다른 데서 발생한다. 옥분이 국가에 '피해자 등록'을 하지 않은 탓에 일본군의 전쟁 범죄 증언에 앞서 '자기 증명'부터 해야 하는 곤경에 처한 것이다. 다행히 민재의 도움으로 급하게 피해자 등록을 마친 옥분은 '위안부' 피해 당시 정심과 찍은 사진을 들고 미 의회에 도착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사람들을 설득한 것은 국가의 보증(='위안부' 피해자 등록)도 물적 증거(=사진)도 아니다. 청중의 주목을 이끌어 낸 것은 옥분의 몸에 남아있는 폭력의 흔적, 즉 흉터였다. 옥분이 '살아있는 증거'로서 자기 신체를 드러내 보이자 장내는 숙연해진다. 마침내 옥분은 마이크 앞으로 가서 말하기 시작한다. 옥분: 일본군들이 내 몸에 새겨놓은 칼자국과 낙서요. 내 몸엔 이런 흉터들이 수도 없이 있습니다. 이 흉터들을 볼 때마다 그 지옥 같은 고통이 한없이 되살아납니다. 증거가 없다구요? 내가 바로 증거예요. 여기 계시는 미첼이 증거고, 살아있는 생존자들 모두가 증겁니다. 그 지옥 같은 고통을 당했을 때 내 나이 겨우 열세 살이었소, 열세 살. 나는 죽지 못해 살았소. 고향을 그리워하며, 내 가족을 만날 날을 기다리며. I'm standing here today for those young girls. Their childhood was stolen away by the crimes of the Japanese army. We must remember those girls and the pain that they lived through. Japan committed crimes against humanity. But there has been no sincere apology for the 'Comfort Women' issue. (중략) We are not asking for too much, just for you to acknowledge your wrong doings. We are giving you the chance to ask for our forgiveness, while we are still alive. “I am sorry.” Is that so hard? (자막: 나는 일본군의 만행으로 꿈이 짓밟힌 수많은 소녀들을 대신해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우리는 그 소녀들이 겪었던 고통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일본은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는 없었습니다. (중략) 우리는 당신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잘못을 인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들이 용서 받을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목숨이 붙어있을 때 'I am sorry' 그 한마디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강조-인용자, 「아이 캔 스피크」 1:43:43~1:47:46) 증언의 두 겹, '생존자'로서 말하기와 '목격자'로서 말하기 옥분의 증언은 둘로 구분된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바와 같이 한 번은 한국어로, 또 한 번은 영어로 발화된다. 그런데 여기엔 단순히 언어의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어로 말할 때 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는 증거', 곧 '생존자'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영어로 발화된 증언에서는 일본군의 범죄에 의해 유년을 빼앗긴 소녀들을 '대신'하고 있음을 밝히며 시작한다. 더하여 영어 증언에서는 옥분의 목소리에 병상의 정심이 오버랩되어 옥분이 정심을 '대신해' 말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킨다. 옥분은 위안소 범죄를 겪고 살아 돌아온 '생존자'로서 한 번, 다른 한 번은 돌아오지 못한 소녀들을 대신한 '목격자'로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라틴어에서 '증인'에 해당하는 말이 두 개 있음을 지적했다. 첫 번째는 'testis'로 영어의 'testimony(증언)'의 어원이 되는 말이다. 이는 두 당사자 간 재판이나 소송에서 제삼자의 위치에 있는 '목격자'를 가리킨다. 두 번째 말은 'superstes'로 어떤 일을 끝까지 겪어낸 사람, 어떤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경험했고 그래서 그 일에 대해 증언할 수 있는 사람, 즉 '생존자(survivor)'를 의미한다. 관련해 아감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프리모 레비'를 인용하면서 살아남은 자의 '증언 불가능성'이라는 역설을 말한다. 본디 살아남은 자의 증언은 중립성의 결여로 인해 재판을 위한 사실 입수와는 관련 없는 것으로 다루어져 왔거니와, 무엇보다 절멸 수용소의 폭력에 대해 온전히 증언할 수 있는 자는 그곳에서 죽은 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살아남은 자는 '온전한 증언자'가 되지 못한다.[1] 한편, 증인에 대한 아감벤의 고찰은 젠더-권력의 차원에서 한 번 더 해석될 필요가 있다. 라틴어 testis는 '목격자' 외에 '고환'이라는 의미를 지닌다.[2] 법적 용어로서 증언(testimony) 또한 여기에서 기인하는데, 남성만이 시민이 될 수 있었던 로마에서는 증언 선서를 할 때 고환에 손을 얹었다고 한다. '증언'은 객관적 사법 장치라 여겨지지만, 어원적으로 보건대 거기엔 이미 '남성' '시민'이라는 젠더-권력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증언의 자리에서 '위안부' 생존자는 이중의 곤경에 처한다. 절멸 수용소에서 폭력의 맨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이들은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거나 살아 왔더라도 온전히 말할 수 없게 된 자들이라 한 프리모 레비의 지적처럼, 살아남은 자로서 진정한 증인일 수 없다는 절대적인 윤리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다른 한편, '증언'이라는 말 자체에 기입된 젠더-권력을 염두에 두면 하위 주체인 '위안부' 생존자가 지배자의 언어를 구사해야 하는 난관에 놓여 있음을 깨닫게 된다. 더욱이 옥분은 의회라는 미국의 국가 장치에서 증언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이는 달리 말해 옥분의 증언이 '지배자'의 언어로, 즉 반공블럭 형성을 위해 일본군'위안부'문제의 전후 해결을 어렵게 한 미국의 개입을 은폐하는 한에서, 동시에 냉전 체제가 만든 '한국-미국-일본' 동맹이 허용하는 한에서 가능함을 의미한다. 옥분은 신체에 새겨진 상처로서, 즉 '생존자'로서 자기를 증명했지만 곧이어 “수많은 소녀들을 대신”할 것을 자처하였다. 이때 자기 증명을 위한 생존자로서 말하기는 피식민의 역사를 간직한 모국어를 통해 발화되지만, 목격자로서의 증언은 제국의 언어인 영어로 발화된다. 옥분은 '목격자(testis)'로서 자신을 위치 짓고, '지배 체제의 언어(=영어)'를 구사함으로써 '증언(testimony)'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내내 그려진 '위안부' 생존자의 영어 배우기는 '서발턴(subaltern)'의 지배 언어 배우기라는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영화의 제목인 '아이 캔 스피크'는 중층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옥분은 지배 체제의 언어로 말할 수 있게 되지만, 바로 그렇기에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지배 체제에 종속되거나 타협하게 된다. 서발턴 말하기의 전략·타협·종속 「아이 캔 스피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국내 정치의 역학 관계 안에서 부침을 겪고 있다는 사실 또한 놓치지 않는다. 민재가 옥분의 피해자 등록을 서두르기 위해 구청장을 설득한 논리는 '위안부'문제 범죄의 심각성이 아니라 구청장의 정치적 이익이었다. '위안부' 운동이 현실 정치와 관계 맺는 한, 정치 진영과 담론 자장 안에서 길항하고 타협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서발턴은 타협과 협상을 통해 말하기 장소를 확보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에 서발턴의 말하기는 언제든 지배 담론에 의해 포획되고 굴절될 위험에 노출된다. 문제는 이처럼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역학 관계들이 미국을 배경으로 한 장면에서는 소거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옥분이 하원 의회에 입장하는 장면에서부터 영화는 그녀의 양쪽에 늘어선 두 진영-정의를 연호하는 시민단체와 욱일기를 든 사람들-의 대결을 보여준다. 이분법적 적대관계는 옥분의 언어 구사 양상에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영화에서 한국어와 영어는 증언의 언어이지만, 일본어는 적국의 언어로 정확하게 나뉜다. 또 하나 흥미로운 지점은 미 하원에 위안부 결의안을 제기한 실존 인물 '마이클 혼다' 의원이 영화에서는 '마이클 리'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위안부'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공론화한 마이클 혼다 의원에게서 '혼다'라는 일본계 정체성을 지움으로써 '위안부'문제를 '한국-일본' 양국의 적대적 관계로 단순화한다. 이 구도에서 불완전한 전후 처리를 주도한 미국의 행위성은 누락되고, 오히려 '심판관'의 위치를 또다시 부여받게 된다. 가장 문제적인 '타협'은 옥분이 '법적 배상'을 명시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옥분은 일본 정부에 '단지 잘못을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생존자들이 살아있을 때 'I am sorry' 그 한마디를 건네는 것이 그렇게 어렵냐'고 묻는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운동 단체가 초기부터 일관되게 요구한 것은 단순한 사과가 아니라 법적 배상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실 2007년 미 하원 결의안은 강제성이 없고, 보상 규정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가 분명하다. 물론 결의안은 '위안부' 제도가 “20세기 최대 인신매매 사건 중 하나”임을 인정함으로써 당시 일본 관헌의 '직접 개입'을 부정하던 아베 내각의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결의안은 또 “일본 황군이 '위안부 여성'으로 알려진 젊은 여성들을 성노예화한 것에 대해 명백하고도 모호하지 않은 방식으로 공식 인정하고, 사죄하며, 역사적 책임을 수용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동아시아 전후 질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세하고 있는 미국 의회의 입장 표명은 일본 정부를 압박하는 수단이 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의의에도 불구하고 결의안은 피해자들이 일관되게 요구한 '법적 배상'을 누락한 한계 또한 분명하게 지닌다. 미 하원 결의안이 통과됐을 때 국제 관계와 현실 정치의 입장에서 "법률적 차원보다는 인류 보편적 가치인 여성인권의 추구라는 윤리적 차원에서 '위안부'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유리"[3]할 것이라는 분석이 제출되기도 했다. 이는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과연 '인류 보편적 가치'라는 윤리적 차원이 법적 배상 없이 달성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아감벤의 말을 빌리자면 “책임을 감수하겠다는 제스처는 순전히 사법적인 것이지 윤리(학)적인 것이 아니”[4][5]다. 즉 '위안부'문제를 법률적 층위가 아니라 윤리적 층위에서 논의하자는 주장은 결과적으로 '윤리'의 이름으로 법적 책임을 '사면'하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옥분의 실제 모델인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가 '결의안 통과에 관한 성명서'에서 다시금 일본 정부에 “공식 사과와 법적 배상(formal apologies and legal reparation)”을 촉구한 것은 매우 적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윤리가 사법적 책임을 상쇄하는 기묘한 굴절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어떤 지점에서는 공모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영화 전반부 내내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법에 호소했던 옥분이 정작 '위안부' 피해를 증언하는 자리에서는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촉구하지 않는다. 영화의 더 결정적인 문제는 피해자의 핵심 요구를 누락하였음에도 그 호소에 미국이, 그리고 전세계가 '공식 인정'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옥분은 지배 체제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그러니까 미-일 우방이라는 국제 관계를 해치지 않는, '사법'이 아닌 '윤리'의 영역 안에서 증언하고 있으며, 영화는 이것이 '위안부' 피해자의 요구를 국제사회에 성공적으로 전달한 것처럼 재현해 착시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증언을 마친 옥순은 마침내 위인들의 동상으로 둘러싸인 의회 건물에서 미국 의원들에게 사과와 경의를 받는다. 「아이 캔 스피크」는 역사적 진실과 피해자의 복권이라는 보편 가치가 '미국 정신'에 둘러싸여 실현되고 있는 장면을 연출하고 마는 것이다. 가해자를 사면하는 '보편 윤리'를 넘어 2007년 4월 말, 미국을 방문한 일본 아베 총리는 대통령 부시에게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사죄를 표명한 바 있다. 이 사과는 일본과 미국 양쪽 언론 모두의 비판을 받았는데, 당시 계류 중이던 '위안부' 결의안에 대한 정치적 대응이라는 점도 문제였지만 사과 대상이 '위안부' 피해자가 아니라 미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이를 '수락'한다는 미국 대통령의 답변이었다. 피해자를 제외한 채 '미-일' 양국 수반이 사죄와 수락을 주고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현실 정치의 모순적인 장면은 「아이 캔 스피크」의 마지막 장면과 겹쳐진다. 증언을 마친 후 옥분은 청중에게 인사를 받고, 더하여 자신을 의심했던 이들로부터도 사과를 받는다. 그러나 한 아시아계 인사는 끝까지 옥분을 모독하고, 이에 옥분은 일본어로 일갈한다. 옥분의 응수로 인해 그 아시아계 인사는 일본인으로 특정된다. 앞서 아베와 부시의 '사과와 수락'이 피해자를 제외한 채 이루어졌다면, 「아이 캔 스피크」의 마지막 장면은 가해자를 제외한 채 피해자의 명예회복으로 나아가려는 듯하다. 두 장면을 함부로 등치시킬 수는 없지만, 이들은 공히 일본군'위안부'문제의 '미국화'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 가해자는 피해자 대신 미국에 사과를 하며, 피해자는 가해자 대신 미국에 호소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미국은 '가해-피해' 갈등 구도 바깥의 '심판관'으로서 혹은 '보편자'로서 존재하게 된다. 거듭 강조하지만 미국은 일본군'위안부'문제에 책임이 있는 하나의 주체이지, 결코 이 문제 바깥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과 일본 양국이 연출한 영화/정치적 퍼포먼스는 정반대 편에서 미국을 특권화하며 역사적 책임으로부터 사면한다. 뿐만 아니라 '보편 윤리'라는 허울을 통해 일본의 사법적 책임을 더 이상 촉구하지 못하는/않는 효과까지 발생시킨다. 중요한 점은 이와 같은 한계가 「아이 캔 스피크」만의 것이 아니라 오늘날 미국에서 공론화되는 '위안부'문제를 인식하는 우리의 시각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통해 우리가 도달해야 할 지점은 미국을 매개로 하여 일본군'위안부'문제를 '세계화'하는 현재의 담론과 운동의 방향에 대한 비판적 고찰일 것이다. 각주 ^ 조르조 아감벤, 정문영 역,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새물결, 2012, p. 22, 51. ^ Robert K. Barnhart Ed., The Barnhart Dictionary of Etymology, H.W. New York: Wilson Co., 1988, p. 1129. ^ 조양현, 「아베정권의 역사인식과 대외관계」, <한일군사문화연구> 6, 2008, 한일군사문화학회, p. 73. ^ 아감벤, 앞의 책, p. 30. ^ 아감벤은 예루살렘의 전범 재판 동안 아이히만의 변론에서 일관되게 나타난 논법, 곧 '아이히만은 하느님 앞에서는 죄책감을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라는 주장을 예시로 들면서 사법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 도덕적 책임 감수는 사실상 법률적 유죄를 상쇄하는 시도라고 비판한다. 오히려 아감벤은 “유죄나 책임을 떠맡는다는 것은 (때로 필요한 일일 수 있지만) 윤리(학)의 영토를 떠나 법의 영토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