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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인터뷰 분노로 그치지 말고, 현재의 내 문제로 바라봐 주세요 -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활동가 백선행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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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경상감영길, 근대와 현대가 뒤섞인 거리에 하얀색 2층 건물이 있다. 1920년대 일본식 목조건물의 형태의 외관, 문 옆에는 “NO 아베” 네 글자가 작지만 선명하게 걸려있다. “내가 죽어도 나를 잊지 말아 달라”는 고(故) 김순악 할머니의 유언과 유산에서 시작되어 수많은 시민의 힘으로 완성된 희움일본군‘위안부’ 역사관(이하 ‘희움역사관’)이다. 대구·경북 지역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과 피해자들의 복지 지원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사단법인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의 부설 역사관으로 2015년 개관해 지금까지 쉼 없이 다양한 전시로 시민들을 만나고 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올바르게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만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전시’라는 형태가 되면 고민은 더 깊고 섬세해질 수밖에 없다. 이곳에도 문옥주와 심달연과 김순악의 제각기 달랐던 삶의 궤적이자, 동시에 과거와 현재, 우리나라와 전 세계 모든 여성이 공유하는 현실인 이 문제를 계속해서 ‘전시’하고 ‘이야기’하기 위해 고민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서늘한 가을비가 쏟아지던 날, 희움역사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백선행 팀장을 만났다. 희움역사관이 전시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 일본군‘위안부’ 문제 활동가의 삶과 고민까지 이야기가 빗줄기처럼 쏟아졌다. 대학생 자원활동가에서 ‘위안부’ 역사관을 책임지는 상근활동가가 되기까지 Q. 안녕하세요. 먼저 웹진<결> 독자 여러분께 짧은 소개 부탁드려요. 네, 저는 희움일본군‘위안부’ 역사관에서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 백선행입니다. Q. 대학생 때부터 시민모임에서 자원 활동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계기는 정말 사소한데요, 한·중·일 청년이 모여 템플스테이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신청했어요. 중국어 전공이거든요. 근데 가서 보니 일본군‘위안부’ 생존자와 함께 하는 평화 인권 캠프였어요. 2007년에 시민모임이 주최한 행사였는데, 중국 청년은 한 명도 없는 게 반전이었죠. (웃음) 돌이켜 보면 어릴 때부터 관심은 있었던 것 같아요. 17살 때 도서관에 갔다가 『천황의 군대와 성노예』(미네기시 겐타로, 박옥순 옮김, 당대, 2001)라는 책을 봤어요. 제목이 자극적이잖아요. 그걸 읽고 엄청나게 놀랐던 기억이 또렷이 나요. 학교에서‘위안부’ 문제를 배우긴 했지만, 그 책을 읽고 나서야 이것이 제도적, 계획적으로 저질러진 전쟁범죄라는 생각을 처음 했죠. 그러고 나서 잊고 살다가 캠프로 시민모임을 만나면서 그때부터 자원 활동을 쭉 하고, 아르바이트 시작하면서 후원도 시작하고, 졸업하고 다른 일 조금 하다가 다시 일을 찾을 때 여기서 활동 제안을 해주셔서 상근을 시작했어요. Q. 자원 활동을 꾸준히 이어간다는 게 사실 쉽지 않잖아요. 또래 자원활동가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 사람들과 모여서 무언가를 하는 게 좋았어요. 할머니들 재가방문도 함께 하고, 행사나 집회도 같이하면서 친밀해지는 게 즐거웠어요. 그런데 할머니들의 존재가 처음부터 와닿았던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재가방문도 열심히 즐겁게 다녔지만, 생존자를 아주 살갑게 대하지는 못했던 것 같고요, 시민모임에서 하는 조직사업이 더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Q. 상근활동가로 커리어를 시작하는 것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사실 저도 고민은 많았어요. 이쪽을 커리어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인연이 닿아서 시작하게 됐는데, 조직에 들어와 활동하면서 제 몸에 맞는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2015년 7월 말부터 일하기 시작했는데, 역사관 개관 직전이라 닥치는 대로 업무를 하게 됐죠. 전시를 만들고 홍보하고 교육하면서 역사관의 모든 활동이 내 일이구나, 재밌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쭉 역사관 업무를 맡고 있죠.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2 김순악 Q. 지금 기획전시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2 김순악> 전을 진행하고 계시는데요,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준비하셨나요? ‘저희가 할 수 있는 이야기’에 집중하려고 했어요. 저희는 대구와 경북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생존자들과 굉장히 밀접하게 관계를 맺어왔고, 이 부분이 차별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만났던 생존자들 한 분 한 분의 이야기를 전하려고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시리즈를 기획했어요. 2년에 한 번씩 진행할 계획으로 2016년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1 옥주씨,>전을 했는데, 2019년이 되어서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2. 김순악> 전을 열게 됐어요. 왜 김순악인가, 많이들 물어보세요.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이라 근현대를 조망하는 계기가 됐잖아요. 그런데 저희가 알아 온 대구 경북 할매들 중에서 김순악이라는 사람의 삶이 일본군‘위안부’, 여순 항쟁, 기지촌, 한국전쟁, 베트남전까지 역사의 큰 흐름에 휩쓸리지 않은 적이 없더라고요. 전체 기획은 올해 서울시와 서울대 정진성 연구팀에서 했던 <기록 기억 :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다 듣지 못한 말들> 전시 총괄하신 문호경 님이 맡아 주셨는데, 저희는 김순악의 그 파란만장하고 울퉁불퉁하고 매끈하지 않은 일생을 전하고 싶었어요. 할머니는 일대기 『일본군 ‘위안부’ 김순악 : 내 속은 아무도 모른다카이』(김선님, 일일사, 2008)도 발간하셨지만, 정작 당신은 글자를 모르잖아요. 그래서 김순악이 돌아와도 이해할 수 있는 전시를 만들자, 울퉁불퉁한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주자고 기획했어요. 설령 그게 관람객에게는 가닥이 안 잡히고 난해하게 느껴지더라도요. Q. 전시장의 모습이 조금 독특합니다. 벽에 꽃무늬도 있고요. 시민모임이 찾아갔던 김순악의 방이에요. 할머니는 일흔이 넘어서 알코올 중독 같은 상태로 쓰러져 있다가 이웃 주민에게 발견돼 영구임대 아파트로 들어가셨어요. 그런데 처음 입주했을 때 그곳이 너무 좋아서 그대로 누우셨대요. 이런 네모반듯하고 따뜻한 방을 생전 처음 가져봤다면서. 그 방 그대로는 아니지만, 정서적으로 느껴볼 수 있도록 재현하려고 했어요. 그때 그 벽지와 김순악이 남긴 물건들, 남긴 말이 있고 멀리서 김순악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장소죠. Q. 전시는 어떻게 구성하셨나요?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는데, 첫 번째 <우째 살았는가 싶으고> 파트는 김순악이 그의 방에서 저희 활동가들을 처음 만난 순간이에요. 그래서 피해 당시부터 순서대로 이야기가 가는 게 아니라 말하지 못했던 당신의 심정, 너무나 하고 싶었던 말들부터 시작돼요. 두 번째 섹션 <난 너거캉 지금 얘기하는 게 막 재미가 나서 죽겠다>는 해방 이후 복잡하고 험난했던 귀향의 과정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결코 재미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할머니는 사람과 만나서 말씀하시는 걸 굉장히 기뻐하셨어요. 그리고 ‘위안부’ 피해에 대한 부분은 굳이 또 재현할 필요가 있나 생각해 전시하지 않았어요. 마지막 <순악할매 어떻게 지내세요> 섹션은 김순악이 시민모임을 만난 이후, 시민모임의 활동가, 회원들이 할머니에 대해 남긴 기록들과 김순악의 공적 활동들을 엮었어요. Q. 전시 해설을 직접 하고 계시죠. 어떤 분들이 오시는지, 반응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청소년 단체 관람객이 가장 많고, 최근에는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을 통해서 어르신 팀들도 오고 계세요. 10인 이상 단체는 누구나 해설을 신청하실 수 있는데요, 해설을 듣고 관람하는 분들이랑 그냥 보시는 분들이랑 확실히 반응은 조금 달라요. 아무래도 저희가 전문 학예 팀이 갖춰지지 않아서 객관성이나 전문성 같은 것들은 신경 쓰여요. 그래도 이곳의 전시는 해결 운동의 맥락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할머니를 직접 만나 왔고 문제를 늘 고민하는 활동가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듣는다는 점에서 관람하는 분들이 남다른 느낌을 받으시는 것 같아요. 그저 속을 털어 놓을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야기를 풀어내고는 그나마 속이 조금 시원하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리고 할머니를 직접 만나고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은 기억하고 전해야 하는 책임감도 함께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2 김순악 展> 전시 소개 문구 중 부족하더라도, 활동가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고 Q. 기획전시는 계속 새롭게 준비하실 계획인가요? 지금 두 가지 시리즈를 가져가고 있어요. 하나는 대구 경북 생존자 중에서 한 명을 선정해서 그 삶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는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시리즈, 또 하나는 2017년 동티모르로 시작한 <아시아의 일본군 성노예 생존자들>이에요. 교대로 하고 있는데요, 둘 다 이야기하고픈 것은 인식의 확장이에요. 이 문제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로 많이 인식되고 있잖아요. 근데 사실은 한국과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고, 아시아 각국에 피해자가 있고, 양상은 다 다르지만 그럼에도 해결 운동은 연대해야 한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아시아> 시리즈에서 하고 싶어요. <당신> 시리즈에서는 생존자 한 분 한 분이 모두 다 다른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한 사람의 삶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 저희가 만나왔던 ‘당신들’을 추모하는 방식이에요. 그리고 삶은 모두 달랐지만, 그 안에서 겪었던 문제는 여성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구조적 폭력이라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Q. 1층에서 상설 전시를 운영하고 계시는데요, 함께 소개해 주시겠어요. 역시 외부에서 아트 디렉터와 큐레이터 팀을 모셔서 기획했고, 개관을 세 번이나 연기할 정도로 고민 많이 하면서 준비했어요. 시민모임의 소장자료를 통해 전시가 만들어지는데, 객관적으로 일본군‘위안부’ 역사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고, 동시에 ‘시민모임’이라는 단체가 가진 역사, 생존자를 만나면서 남긴 고유한 기록도 설명되어야 하니까요. 저희 소장자료 중 “돌격 1번[1]” 을 전시할지 말지, 정말 마지막까지 고민했는데 결국 전시하지 않았다고 해요. 그것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선정적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고, 그 하나로 인해 나머지 전시품이 매몰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을 거예요. 물품 자체로 분명히 의미가 있더라도 충분히 잘 해석해서 기획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다면 전시하지 않는 것도 맞다고 생각해요. 이런 전시 방향에 대한 평가는 나뉠 수 있을 거예요. 좋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고, 조금 더 직접적으로 피해 사실에 관해 구체적인 자료를 보여달라는 피드백도 계속 있어요. 하지만 저희는 활동가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해요. 그게 가장 진정성 있고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귀한 이야기라는 걸 전시를 준비하고 관람객을 만나면서 저희도 깨닫게 됐거든요. 준비하다 보면 잘 될 때도 있고 되게 아쉬울 때도 있어요. 자료가 부족할 때도 많고 디자인이 아쉬울 때도 있고요. 그래도 있는 것은 있는 대로 없는 것은 없는 대로 꾸준히 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가고 있습니다. 준비할 때 고민은 많지만, 막상 펼쳐 놓으면 전시를 채워주시는 건 관람객이더라고요. 예상 못 한 반응도 많고, 좋다고 생각했는데 반응이 없는 경우도 있고요. 몇 번의 전시 후에 ‘결국 모든 의미를 부여해 주시는 건 관람객 여러분이구나, 자신감을 좀 가지고 이야기를 해 봐도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자신만의 이야기를 완성해가는 관람객 Q. 이곳에서 전시를 관람한 어느 고등학교 동아리에서 자발적으로 기금을 모아 다시 찾아왔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런 경우가 종종 있나요? 대부분은 일회성으로 관람하시지만, 적극적으로 해결 운동에 참여하시는 팀들도 꽤 있어요. 준비를 많이 하는 팀들은 사전에 영화 <아이 캔 스피크>(김현석, 2017), <귀향>(조정래, 2016), <허스토리>(민규동, 2018)나 책 『꽃할머니』(권윤덕, 사계절, 2010) 등을 먼저 보고 그다음에 여기 오셔서 관람하면서 해설 듣고, 외부 강연까지 요청하셔서 듣고, 그리고 희움 브랜드 제품을 구매해 가셔서 다시 판매하거나, 아예 직접 물품을 제작해서 판매 수익을 모아 여기에 기부금 전달식까지 하러 오세요. 청소년들이 해결 운동에 스스로 참여하는 과정에 저희는 교육 공간으로 끼워져 있더라고요. 정말 놀랐어요. 예전에는 문제 해결 운동이 단체 주도였다면, 최근에는 양상이 많이 바뀌고 있잖아요. 평화의 소녀상 건립도 시민이 주체가 되었고, 지금은 더 나아가서 청소년이 스스로 계획해서 실천해요. 그 가운데서 이제 저희는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껴요. Q. 유독 마음에 남았던 사례가 있나요? 사실 여러 팀이 기억나서, 한 팀만 언급하기 어렵네요. 전교생이 몇 명 안 되는 작은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온 적이 있어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플리마켓을 열어서 스스로 기부금을 모으고 저희한테 와서 그동안의 활동을 다 설명해 주더라고요. 동전으로 한가득이었는데 다 세어서 기부금 영수증을 드렸었죠. 고등학생들이 기금을 모아오는 경우는 좀 있었는데 어린이들이어서 놀랐어요. 한 번은 어느 학교에서 6학년이 다섯 개 반인데 다 같이 오겠다고 신청해서 놀라기도 했어요. 어느 반에서 일본군‘위안부’ 관련 수업을 하고 『꽃할머니』 책을 같이 읽었는데, 한 학생이 교장 선생님께 희움역사관 견학을 하러 가고 싶다고 제안을 해서 허락을 받았대요. 그 소식을 다른 반 학생이 듣고 서로서로 ‘우리도 가자’ 해서 결국 학년 전체가 오게 됐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럴 땐 현장에서는 좀 힘들긴 하지만,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굉장히 많구나, 새삼 깨달아요. Q. 시민이 스스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시겠어요. 같이 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죠. 여기서 전시해설 할 때 항상 ‘희망‘을 얘기해요. 아직 이 문제를 이야기하면 공감과 분노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지만, 해결 운동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이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느껴온 것은 희망이라고요. 성폭력 문제에서 희망을 얘기하면 되게 낭만적인 얘기로 들릴 수 있는데, 가난하고 불쌍하고 병든 것처럼 묘사된 이 ‘위안부’ 피해자들이 생각해보면 전쟁과 성폭력을 뚫고 살아남은 생존자잖아요. 자기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증언자고, 인권 운동가고, 어떤 분들은 예술가가 되셨고요. 해결 운동도 당사자가 힘있게 앞서서 견인해왔기 때문에 시민들도 함께 해 온 거고요.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게 굉장히 큰 희망이죠. 그래서 항상 희망을 가지고 동참해 달라고 이야기해요. 여기 이름도 ‘희움‘, ‘희망을 모아 피움‘이잖아요. 제발 분노로 그치지 말아 달라고요. 연민이나 동정, 분노도 타자화잖아요. 같이 주체로 행동해 달라는 이야기를 계속하는데 이미 주체가 된 분들도 많은 거예요. 그게 너무 좋아요. 저는 이 문제가 여전히 ‘민족의 딸들이 당한 고난과 수치‘로 묘사되는 것에 매우 큰 의문을 품고 있어요. 이걸 현재화하려면 결국 여성 인권, 여성 폭력에 대한 문제로 확장해야 해요. 그러려면 역사관이 관람객에게 이 문제를 다양한 형태로 접근하고 해석하고 자기화할 기회를 주는 역할을 해야겠죠. 그래서 이곳의 재현 방식도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이지 않게, 분노에 갇히지 말고, 너무 비관에 젖지 않게, 들어왔을 때부터 나갈 때까지 밝은 느낌을 받을 수 있게, 이런 합의를 가지고 있어요. 그걸 관람객들이 다양하게 받아들이고 계셔서 너무 멋지다고 생각해요. Q. 외국인 관람객도 계신가요? 몇 달 전부터 통계를 내 보고 있는데 7~8% 정도로 계속 오고 계세요. 절반 정도는 영어를 사용하시고, 절반은 일본어를 사용해요. 일본어 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해결 운동이나 인권운동을 해 오던 분들이라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데, 지금 외국어 서비스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아서 그걸 많이 고민하고 있어요. 적극적인 분들은 검색해 가면서 보고 질문하실 때도 있지만, 저희는 아주 아쉬운 부분이죠. Q. 외국인 관람객의 반응은 어떤가요? 문화권, 언어권별로 인식의 토대가 다르다는 게 느껴져요. 사실 깊게 이야기를 나눠보지는 못했지만, 일본에서 오신 분들은 한국 분들이랑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영어를 쓰시는 분들은 문제 인식의 기반이 분명히 달라요. 일본 분들은 스스로 가해 역사라고 인정하거나, 긴가민가하지만 보면서 물어보시는 편이고 다른 언어권 분들은 인식이 명백하게 인권 문제에서 시작되는 것 같아요. 손성숙 선생님도 인터뷰에서 미국 교육 현장에서는 이 문제를 한국과 일본의 갈등이 아니라 인권 문제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잖아요. 딱 그게 느껴져요. 또 중국 내륙에서 온 관람객과 대만에서 온 관람객의 결이 달라요. 중국에서 온 분들은 확실히 이 문제를 민족주의, 국가 관계에서 바라보시다가 중일 관계로 연결하면서 화를 내시기도 해요.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 바로가기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2 김순악> 전 단체관람 신청하기 당사자를 만나는 마지막 세대, 이후를 고민하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 활동가로 산다는 건 어떤가요? 사실 어떤 시민사회 이슈보다도 전국민적인 지지를 받는 이슈라는 걸 많이 느껴요. 그게 정말 대단한 것 같고, 무엇보다 생존자들이 스스로 운동을 견인해 오셨기 때문에 이 운동이 이만큼 성장했다는 점에서 생존자들과 함께 온 것이 너무나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이제 저희가 당사자를 만나는 마지막 세대라고 받아들이는 순간이 많아지고 있어요. 이후에 ‘포스트 당사자’라고 명명되는 사람들은 활동가이고 연구자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시시콜콜 기록을 남기려고 노력하고 있고, 기록의 역할이 뭔지, 사람들이 뭘 기대하는지도 계속 고민하고 있어요. Q. 활동가로 일하는 게 몸에 맞는 느낌이라고 하셨지만 고민도 많으시네요. 생존자가 없을 때에도 이 운동이 이전만큼 주목받을 수 있을까, 지금만큼의 물적인 토대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 고민을 굉장히 많이 하게 되죠.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고 재현할지, 그 재현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지금만큼 많을지… 지금이 ‘위안부’ 운동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고,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고민도 많고 두려움도 커요. 또 현실적으로 활동가들은 항상 부족한 자원을 가지고 활동을 하는데, 역량 강화의 기회에 대한 갈증과 아쉬움도 있고요. Q. 앞으로 어떤 활동가로 살고 싶으세요? 저는 사실 긴 미래를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이 현장에서는 계획을 세우는 게 무의미하다는 걸 매일 느껴요. 할머니가 갑자기 편찮으실 수도 있고… 다만 기념 사업의 비중이 커지고 있으니 일본군 ‘위안부’ 문제, 성노예 문제에 대한 인식을 조금 더 확장하기 위해 만들 수 있는 콘텐츠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더 깊이 이해할까, 하루하루 생각하면서 시간이 흘러가는 것 같아요. 그렇게 달리다가 소진될 때 같이 공감하고 고민하는 활동가들, 연구소처럼 이 분야에 매진하고 계신 분들을 만나면 보람을 느끼면서 또 에너지를 받아서 다시 힘을 내게 돼요. 지금 나의 문제로, 순악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Q. 저희 웹진 <결>에 기대하시는 점이 있나요? 우리 사회에 바라는 점도 궁금합니다. 처음 <결>을 봤을 때 “너무 읽을 맛 난다” 이런 느낌이었어요. 기존 매체나 미디어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것보다 훨씬 넓고 다양한 분야를 깊이 있게, 심지어 세련되게 써주셔서. 쭉 계속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더 넓은 분야에서 더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를 전달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결>이 있다는 게 많이 알려지면 좋겠어요.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든 없으신 분이든, 이것을 자신의 문제로 바라봐 주시면 좋겠어요. 100년 전에 나랑 상관없었던 여성들, 할머니가 겪었던 일이 아니라 지금도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라는 문제에서 바라보면 우리 책임이 좀 더 명확해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한국 정부에서는 기념 사업과 할머님들에 대한 지원 사업 정말 너무 감사하지만, 법적인 해결을 위해서도 더 노력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Q.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씀 남겨주세요. 희움 일본군‘위안부’ 역사관의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 두번째 이야기 김순악> 전시는 2020년까지 이어져요. 오셔서 순악 씨를 만나주세요. 제가 활동가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이 너무나 재미있었고, 우습지만 순악 씨를 생각하면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생각해보면 제가 처음 갔던 평화 인권 캠프에서 처음 만난 ‘위안부’ 생존자가 김순악이었어요. 그때 템플스테이 했던 곳도 지금 김순악 할머니를 모신 영천 은해사고요. 저희처럼 순악 씨를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우리 순악 씨 좀 만나러 와주세요. 각주 ^ 도쓰게키이치반(突擊一番). 당시 ‘삿쿠’라고 불렸다. 일본제국 군인에게 군수품으로 지급된 군용 콘돔으로 위안소에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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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으로부터 20년을 되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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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여성법정 20주년 특집] 1부 - 20년을 되돌아보다 1. [논평] 정의를 위해 앞장선 이름 없는 영웅, '위안부' 피해자들 2. [자료해제] 기록물로 보는 2000년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3. [에세이]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으로부터 20년을 되돌아보다 4. [에세이] NHK의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상) 5. [에세이] NHK의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하)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으로부터 20년을 되돌아보다 2000년 12월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하 '2000년 여성법정')은 전시 성폭력을 처벌하지 않는 역사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실태를 세상에 알리고, 이 제도에 대해 일본군 상부층과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물으며, 이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민중 법정이었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 중 일본군은 아시아 전역에 위안소를 설치했다. 하지만 일본은 군의 위안소 설치에 관해 국내 언론이 보도하는 것을 금지했고, 일본군이 패전 당시 '위안부' 제도, 위안소 설치 및 운영과 관련된 자료를 소각했기 때문에 그 실태는 계속 은폐되어 왔다. 전쟁이 끝난 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몇몇 증거가 제출되었지만, BC급 전범 재판에서 그 가운데 극히 일부만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식민지였던 조선이나 대만 여성들의 피해는 다뤄지지 않았으며,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일본 정부와 군의 법적 책임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실태가 드러나고 일본 정부의 책임론이 제기될 수 있었던 것은 1991년 8월 14일,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씨가 공개 증언을 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아시아 각국의 피해 여성이 잇따라 증언을 하였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제소한 10건 중 8건에 대해 사실이 인정되었지만, 국가무답책(国家無答責) 법리나 제소 기간, 양국 간 평화조약 등으로 인해 이미 해결되었다는 판결이 내려져 원고의 청구는 모두 기각되고 말았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많은 증언과 자료가 모였고 '위안부' 제도가 성노예 제도이며 여성의 인권을 침해하는 중대한 전쟁 범죄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일본 정부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아시아 해방을 위한 성전(聖戦)'으로 포장하며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고 일본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고, 도리어 '위안부' 문제를 다시금 은폐·봉쇄하려고 했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교육'과 '언론보도'에 개입해 국민의 의식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또한 역사수정주의자와 우익 단체는 '위안부' 지원 활동을 반대하는 로비와 공격을 계속하고 피해자에 대한 비방과 함께 거짓 정보를 지속적으로 퍼뜨리고 있다. 이러한 '기억의 암살자'들에게 분연히 맞서기 시작한 사람들은 각국의 '위안부' 피해자들, 그리고 그들을 지원하며 전시 성폭력의 근절과 책임자에 대한 처벌을 호소해온 일본과 아시아 각국의 여성들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있고 대다수가 고령이 된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남은 수명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나는 저널리스트로서 '위안부' 문제를 취재하다가 결국은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위안부' 피해자 지원활동까지 하게 되었다. 이 과정을 짚어가면서 '위안부' 문제의 해결과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자 한다. 이케다 에리코(사진 제공 이케다 에리코).jpeg NHK PD로서 다루었던 '위안부' 문제 나는 정년퇴직을 하기까지 NHK에서 37년간 PD로서 프로그램을 제작해왔다.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에 베트남 반전운동과 일본의 전공투(全學共鬪會議, 1968~1969년에 걸쳐 일본의 각 대학에서 학부와 당파를 뛰어넘어 결성된 연합체-옮긴이)운동, 여성해방운동 등을 경험하면서 미디어가 권력을 가진 이들의 관점에서 시민과 학생, 여성들의 운동을 보도하고 있다는 데 의문과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미디어를 내부에서부터 바꾸고 싶다는 생각으로 NHK에 입사해 전쟁, 여성, 인권을 주제로 여러 편의 프로그램을 제작하였다. 같은 전쟁을 다룬 프로그램이라 하더라도 미군의 오키나와 대공습이나 원폭 피해, 전쟁 이후 중국에 잔류한 고아들의 문제 등 일본인이 입은 피해에 대하여 제작할 때는 취재 활동이 고달픈 것 외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지만, 일본군에 의한 강제 연행이나 주민 학살 등 일본의 가해 사실에 초점을 맞췄을 때는 방송이 되기까지 많은 방해에 부딪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했던 것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었을 때였다. 나는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NHK에서 1991년 6월부터 1996년 12월까지 《ETV 2001 시리즈》를 비롯해 8편의 일본군'위안부' 문제 관련 방송을 제작했다. 하지만 우익의 반대가 커지면서 1997년 이후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프로그램의 기획은 전부 무산되었다. 결국 '위안부' 문제는 '난징대학살', '히로히토 천황의 전쟁 책임'과 함께 NHK에서는 암묵적인 '3대 금기' 아이템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는 NHK의 PD로서 방송용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한편 시민 활동의 일환으로 '위안부' 피해자와 전 일본 군인들의 증언 등을 동영상으로 기록하는 시민단체 '비디오 학교'를 조직했고, 중국 산시성(山西省) 출신 성폭력 피해자의 재판을 지원하는 단체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여러 활동을 하던 중 여성 선배 저널리스트로서 존경해 왔던 전 아사히신문 기자이자 여성 인권 활동가 마쓰이 야요리 씨로부터 2000년 여성법정의 주최 단체인 바우넷 재팬(VAWW-NET Japan) 활동에 함께 하자는 권유를 받았다. 그래서 시민 활동의 일환으로 1998년부터는 2000년 여성법정의 국제 실행 위원으로도 활동하게 되었다. 2000년 여성법정, 제안부터 실현까지 각국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제기한 재판에서 연이어 패소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가해국인 일본의 여성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 마쓰이 야요리 씨가 여성들이 모여 민중법정을 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 아이디어는 일본 여성들, 각국의 피해자와 이들을 지원하는 이들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법정은 2000년 12월에 개최되었지만 법정을 준비하는 과정은 1998년부터 시작되었다. 2000년 여성법정 국제 실행 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국제 실행 위원회에서는 수석 검사와 판사단을 선출하는 한편 '법정 헌장'의 초안도 마련했다. 또한 각국 검사단은 기소장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일본 실행 위원회는 각국의 기소장 작성을 위한 조사와 영상 기록, 번역 등의 작업을 진행했고 일본군 관련 자료 수집과 전문가 증인 선정에 나섰다. 동영상 기록 팀의 일원이었던 나는 법정에 증거로 제출할 증언 영상을 제작하거나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전 일본군 병사를 찾는 등 NHK에서의 근무 시간 이외의 대부분을 2000년 여성법정 준비에 바쳤다. 법정 실행 위원들은 끼니도 잠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혼신을 다해 2년 반 동안 법정을 준비했다. 하지만 직장생활과 2000년 여성법정 활동이라는 성격이 다른 두 가지 일에 동시에 매달리면서 쌓인 과로 탓일까, 나는 법정 개정을 2개월 앞두고 지주막하 출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곧바로 병가를 썼고 다행히도 3개월 후에는 후유증 없이 직장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나는 병가 기간 중 시작된 2000년 여성법정에 비디오 학교의 멤버로 참가하여 12월 8일~10일의 본 법정과 12일의 예비 판결을 인터넷으로 전 세계에 중계했다. 2000년 12월 7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8일에 본 법정이 개정했다. 8개국의 '위안부' 피해자 64명을 비롯해 세계 30개국에서 연일 1,000여 명의 방청객이 모여들었다. 증언대에서 몸소 겪은 처참한 피해를 증언한 각국의 피해자들은 성폭력이 얼마나 여성의 존엄을 짓밟고 인생 자체를 파괴했는지에 대해 호소했다. 피해자 64명의 증언은 한결같이 가슴 찢어지는 이야기들이었다. 또한 직접 법정에 나와 자신이 전장에서 강간을 저지른 사실과 위안소에 드나들었던 사실을 증언한 두 명의 전 일본군 병사에게는 방청석으로부터 감사의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여성법정에서는 각국의 검사단이 제출한 기소장과 방대한 양의 증거 자료, 전문가 증인에 의한 히로히토 천황과 일본 정부의 책임론 등을 토대로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책임자 10명이 기소되었다. 그리고 2000년 12월 12일 '히로히토 천황 유죄', '일본 정부는 일본군 성노예 제도로 인해 가해진 피해에 대해 책임이 있다'라는 판결 개요가 내려졌을 때 법정 전체가 큰 감동에 휩싸였다. 피해 여성들은 "정의는 우리들을 버리지 않았다"면서 손을 맞잡고 기뻐했다. 법정 개최 준비로 인해 기진맥진한 상태였던 실행위원회 멤버들도 '세계사에 남을 역사적인 순간이다'라는 벅찬 감격과 자랑스러움이 가슴 가득히 차올라 법정을 준비하며 쌓인 피로가 한 방에 날아가 버렸다. 2000년 여성법정 언론보도에 정치권이 개입하다 2000년 여성법정의 성공적 마무리 이후 우리는 법정에 관한 말도 안 되는 언론보도라는 문제에 맞닥뜨렸다. 2000년 여성법정을 취재하러 온 해외 미디어는 95개사로, 취재 신청자 수는 200여 명에 달했고 법정 소식은 연일 대서특필되었다. 일본 내에서도 48개 언론사에서 105명의 기자가 취재차 왔으나 대부분의 기사 논조가 소극적이었고 법정 소식을 크게 다루지 않았다. 심지어 요미우리 신문은 법정 소식을 단 한 줄도 싣지 않았다. 일본 내에서 '히로히토 천황 유죄' 판결을 주요 기사로 다룬 곳은 아사히 신문과 홋카이도 신문 2개사뿐이었다. 특히 심각했던 것은 2000년 여성법정을 무참하게 날조해 보도한 'NHK 프로그램 개찬(改竄, 내용을 달리하기 위해 일부러 고침) 사건'이다. 2000년 여성법정을 준비단계에서부터 취재해 왔던 NHK의 프로그램 《ETV 2001》에서 2001년 1월 30일 〈다시 묻는 전시 성폭력>이라는 제목의 방송을 통해 여성법정을 소개했다. 하지만 이 방송에서는 법정 기소장의 내용도, 판결문의 내용도 전하지 않았을뿐더러 법정에 선 피해자들의 증언은 극히 일부만 소개되었다. 2000년 여성법정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를 취한 이 방송은 '지리멸렬'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내용이었다. 바우넷 재팬과 마쓰이 야요리 대표는 바로 NHK에 항의하며 질문지를 보냈지만, 이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진상을 밝히기 위해 NHK와 관련 회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나도 이 소송의 원고로 합류했었다. NHK를 상대로 한 소송의 도쿄 고등법원 제2심의 결심 전인 2005년 1월, NHK 소속직원의 내부고발이 있었다. 2000년 여성법정 당시《ETV 2001》 프로그램의 데스크였던 나가이 사토루가 방송 직전에 아베 신조 당시 관방부장관 등의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다시 묻는 전시 성폭력>이 날조되었다고 폭로한 것이다. 나가이 사토루의 내부고발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몰고 왔다. 도쿄 고등법원은 결심 기일을 늦췄고 NHK 관계자에 대한 증인 심문을 진행했다. 이를 통해 정치권이 방송에 개입한 실태가 차례차례 까발려졌다. 2007년에 도쿄 고등법원은 피고 NHK가 정치인의 의도를 헤아려 방송을 조작했다며 원고에게 200만 엔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그 다음 해인 2008년, 대법원은 방송에 대한 정치권의 개입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원고 패소라는 '부당한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NHK는 지금까지도 정치권의 방송 개입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검증 프로그램도 제작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NHK 프로그램 개찬 사건'의 전말이다. 일본군과 일본 정부가 '위안부' 제도를 운영했다는 사실과 전쟁 중 일본이 저지른 가해 사실을 묻으려는 정치인들, 그리고 정치인들의 압력에 굴복한 미디어의 민낯이 세상에 드러난, 일본 패전 이후의 방송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대사건이었다. 자율 규제와 자숙, '촌탁(남의 마음을 미루어 헤아린다는 뜻으로, '특별한 지시가 없어도 윗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행동한다'는 뜻의 일본어 표현, 편집자 주) 문화'가 만연한 작금의 일본 미디어의 쇠락을 암시하는 불길한 조짐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사건은 일본 사회와 언론뿐 아니라 2000년 여성법정을 준비한 사람들도 공포에 떨게 했다. 이처럼 자의적으로 날조된 가짜 프로그램에 의해 2000년 여성법정이 부당하게 낮은 평가를 받거나 오해를 받을 우려도 있었다. 나는 《ETV2001》방송을 본 후 2000년 여성법정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영상을 한시라도 빨리 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병가를 마치고 막 복귀한 직후였기 때문에 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고된 업무에서는 제외되어 있었다. 그래서 회사 근처에 방을 빌리고, 편집기를 구입하여 비디오 학교의 동료들과 합숙하며 2000년 여성법정을 알리는 다큐멘터리의 제작에 들어갔다. 2개월 후 《침묵의 역사를 찢고 – 여성 국제 전범 법정의 기록》이라는 제목의 64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완성했고 2000년 여성법정 보고 집회에서 이 다큐멘터리를 상영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영어판도 제작해 국내외 시청자를 늘려왔다. 이 다큐멘터리는 지금도 계몽 활동 현장이나 교육 현장에서 활용되고 있다. 도쿄에서 여성법정이 개최된 이듬해인 2001년 12월에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 2시간에 걸쳐 낭독된 최종 판결문에는 히로히토 천황을 비롯한 일본군 지도자 10명에 대한 유죄와 일본 정부의 국가 책임이 명기되었다. 이 판결문은 곧바로 일본 정부와 궁내청으로 전달되었지만, 일본 정부에서는 이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NHK와 미디어의 지금을 생각하는 모임'에서는, 도쿄 시부야에 있는 NHK방송센터 현관 앞에서 NHK에 대한 비판과 항의를 계속하고 있다.jpeg 전시 성폭력 근절을 향한 투쟁과 평화의 실현 2000년 여성법정이 국제 사회와 국제법에 끼친 영향은 컸고, UN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나 국제형사재판소(ICC)에도 그 영향을 미쳤다. 2000년 여성법정 이후 전시 성폭력 책임자를 재판정에 세우는 민중 법정의 시도가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다. 2010년 3월에는 과테말라와 미얀마에서 민중 법정이 열렸고, 구 유고슬라비아와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도 지속적으로 가해자 처벌 방안을 모색했다. 콩고에서 성폭력 피해자를 치료하고 지원해 온 의사 드니 무퀘게, 이라크에서 IS의 성노예로 착취당했던 당시의 피해 사실을 고발한 나디아 무라드가 2018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사실은 성폭력 근절을 위한 책임자 처벌의 움직임이 전세계로 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 2000년 여성법정은 세계 각국에서 전시 성폭력의 피해와 가해에 관한 기록을 보존하고 이를 공개하기 위한 박물관 건립이라는 새로운 바람 역시 불러일으켰다. "망각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의 저항이란, 기억하는 것이다", "기억이야말로 민중의 무기다". 이러한 말처럼 전시 성폭력에 대한 기억과 기록의 중요성을 의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전시 성폭력 피해와 가해 사실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작업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게 되었다. 일본에서 세워진 '액티브 뮤지엄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이하 WAM)'은 그 같은 성과 중 하나였다. 2000년 여성법정을 준비하는 동안 실행위원회 구성원들은 "언젠가 일본에 '위안부' 자료관을 만들고 싶다"라는 의견을 모았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위안부' 자료관 개설은 '꿈 같은 이야기'였으나, 엄청난 속도로 여성법정 이후 5년 만인 2005년에 WAM을 개관할 수 있었던 것은 여성법정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던 마쓰이 야요리 씨 덕분이었다. 마쓰이 씨는 2002년 여름에 담관암 선고를 받은 후 자신의 전 재산과 소장 자료를 '위안부' 자료관을 위해 써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해 12월에 별세했다. 마쓰이 씨의 유지를 받아 2000년 여성법정을 준비한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위안부' 자료관 건설 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아시아와 유럽 각지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을 시찰하면서 어떠한 박물관을 만들 것인지 의논하고, 자금을 모으고,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러 다녔다. 나는 건설 위원장을 맡아 또다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WAM은 2000년 여성법정의 사상과 정신을 계승해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과 '위안부' 제도 관련 자료를 수집, 공개, 보존하는 장소로서 2005년 8월에 도쿄에 개관했다. 그리고 매년 아시아 국가별로 개최하는 '위안부' 특별전을 거듭하면서 아시아 전역에 걸친 피해자들의 증언과 관련 자료, 일본군 측의 공문서, 전 일본군 병사의 증언 등을 대부분 수집할 수 있었다. 약 5년 전부터는 아카이브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으며 방대한 양의 자료를 정리하고 추가적인 자료를 수집하고 발굴하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현재 WAM과 같은 '위안부' 자료관은 한국 각지와 필리핀, 중국, 대만에 잇따라 세워지고 있다. 2016년 11월 7일 왐(WAM)을 방문한 이용수가 왐 사무국 직원과 운영위원들, 미국 CWJC('위안부'정의연대) 멤버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제공 이케다 에리코).jpeg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이야말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 2000년 여성법정으로부터 20년이 흐른 지금. '위안부' 피해생존자도, 가해 증언을 할 수 있는 전 일본군 병사도 극히 일부만 남아 있다. 우리는 일본 정부에 피해자가 원하는 사실의 인정과 공식적인 사죄, 개인에 대한 배상 등을 실현하도록 요구하고, 동시에 이러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의 기록과 기억을 다음 세대에 전할 책무가 있다. 따라서 일본군'위안부' 문제 자체를 부정하는 정치인과 미디어의 발언은 엄중하게 비판받아야 한다. 또한 장기간 집권한 아베 정권 하에서 '위안부' 문제가 한일의 내셔널리즘이 대립하는 정치 문제로 다뤄진 것도 큰 문제이다. '위안부' 문제를 얘기할 때 피해자들을 강제로 연행했는지 여부에만 초점을 두거나, 폭언과 거짓 정보로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 자체를 매장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의 이면에는 민족, 여성, 계급에 대한 차별이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일본 사회의 실상이 자리하고 있다. 일본에선 몇 세기동안 성매매문화가 만연해 있었다. 패전 이후 공창제도는 폐지되었으나 여전히 성매매 산업이 성행하고 있으며, 남성들의 성매매가 빈번히 발생하는 국가 중 하나가 일본이다. '위안부'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면, 자신의 성의식과 성행동을 돌아보지 않은 일본 남성과 그러한 남성들을 허용해온 일본 여성들 속에서 지속된 일본의 성 풍토 자체도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일본인들에게 던져진 과제는 크고 무겁다. 그러나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아시아 각국의 사람들과 신뢰의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이미 '위안부' 피해가 발생한지 반 세기가 지나 아시아의 여러 국가에서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사망하였고, 그 유지를 이은 다음 세대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음 세대와 연대하면서 '기억의 암살자'들의 공격에 대항하고 '위안부'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다. '위안부'를 부정하는 '기억의 암살자'들과의 투쟁은 곧, 전쟁으로 발걸음을 내딛고자 하는 파시즘 정권과 그에 동조하는 매스미디어와의 투쟁이기도 하다. 세계의 사람들과 연대하면서 평화를 실현하고, 전시 성폭력의 근절을 위해 노력하는 지속적인 투쟁이 오늘날의 일본을 변화의 길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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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좌담 밝은 미래: 20대의 감각과 생각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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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기 일본군‘위안소’ 성노예 제도가 전쟁범죄로 공론화된 지 30여 년이 지났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생존자 증언과 법정 투쟁, 한일 외교 공방을 거쳐 역사 대중화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 사회의 20대 대학생들에게 이 문제는 어떻게 와 닿을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서울 소재 대학생 6명에게 넓은 의미에서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나눠달라고 요청하였다. 수요시위와 소녀상 지킴이, SNS 해시태그로 운동하는 세대, 피해자 증언을 직접 들은 적이 없이 영화와 소설로 ‘할머니’를 만난 사람들, 나비 배지와 추모 팔찌를 사고 모금과 기부를 하는 기념 산업의 자연스러운 소비자. 사회적 기억과 기념의 미래 주역으로 종종 호명되는 ‘청년’은 집합적 주체로 존재하는가? 그들을 만나보자. -좌담 일시: 2023년 8월 16일 -사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 이헌미, 황진경, 정나라 -대담: 강대현, 김도경, 김민정, 김희연, 심현희, 이혜주 -정리: 퍼플레이컴퍼니 Q. 모두 반갑습니다. 간단하게 자기소개와 언제 어떻게 일본군‘위안부’문제를 접하게 되었는지 말씀해주세요. 강대현 서강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역사 시간에 처음 일본군‘위안부’문제를 접했어요. ‘위안부’ 할머니가 몇 분 생존해 계시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이 문제를 점점 더 인식하게 됐습니다. 이혜주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비즈니스커뮤니케이션, 디지털미디어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저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사회 전반적으로 ‘위안부’ 문제가 상식으로 통용되는 시대에 태어나 자연스럽게 알게 됐습니다. 김희연 덕성여자대학교에서 역사학, 문화인류학을 전공 중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역사 선생님이셨어요. 나눔의 집에 수요일마다 가서 활동하시는 걸 듣기도 했고요. 어렸을 때부터 일제강점기, 해방 등을 다룬 영화에 관심이 많아 그것들을 통해서도 접하게 됐습니다. 김도경 서강대 사회과학부에 재학 중입니다. 초등학생 때 『수요일의 눈물』이라는 책을 읽었어요. 수요일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분들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하는 요일이잖아요. 책 제목을 기억할 정도로 내용이 인상적이었고, 그때 처음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알게 됐습니다. 그 후로는 역사 수업이나 영화를 통해 우리가 기억하고 해결해나가야 할 역사이자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심현희 덕성여대 사학과 학생으로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도 중고등학교 시절 역사 수업에서 처음 접했습니다. 그 후 대학에 와서 학술적인 관점에서의 논의를 접하고 관련된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면서 이 문제를 더 깊이 이해하려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김민정 서울여대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경기도 광주에 살고 있어 어릴 때부터 나눔의 집에 관한 정보를 자주 접할 수 있었고, 학우들과 함께 전시관에 가기도 했습니다. 학교에서 나눠주는 교육 자료를 통해서도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접할 수 있었고요. 친숙하고도 늘 생각하게 되는 주제였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관련 영화나 책을 보았거나, 강의를 들었다거나, 활동에 참가한 이력이 있다면 나눠 주시기 바랍니다. 강대현 중일전쟁이나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대해 찾아보거나 여성 참정권, 미국 소수자 문제 등을 공부할 때 접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혜주 원래 ‘위안부’문제를 인식하고 있었고, 같은 여성이다 보니 민감하게 반응하며 늘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의 일로 느끼게 된 계기는 2016~17년도에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책을 읽은 후부터예요. 당시 고1이었는데 그 책이 굉장히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전쟁과 여성’ 하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분들이 가장 먼저 떠올랐는데, 인문학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던 터라 친구들에게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 가보자고 제안했어요. 전시를 통해 피해자분들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 그것이 책의 내용과 결부되면서 더욱 깊이 받아들이게 된 것 같습니다. 김민정 대학 입학 후 여성학 강의 시간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토론을 하면서 이 문제를 보다 깊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덕분에 처음으로 여러 학계 논문들을 찾아보고, 다양한 의견을 가진 학우들과 생각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지며 본격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됐어요. 김희연 고등학교 때부터 관심을 갖고 공부하면서 여성은 역사 안에서 배제돼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2016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을 접하고 난 뒤 여성 인권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는데, 마침 역사를 공부하면서 깨달았죠. 남성의 이야기는 많지만 여성의 이야기는 없다는 것을요. 심현희 개인적인 관심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과 억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생겼습니다. 관련 영화와 책을 통해 피해자들의 이야기와 역사적 맥락을 배우면서 이 문제의 심각성과 인권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됐어요. 고등학생 때 역사 동아리 부장으로 활동하며 담당 선생님의 추천으로 ‘위안부’ 문제를 알리기 위한 교내 행사를 진행한 기억이 납니다. 교내 신문에 기사를 작성하고 뱃지, 스티커 등을 제작해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활동을 했어요. 대학에 와서는 수요집회에 참석해 같은 생각을 가진 학생들을 만나볼 수 있었고, 수많은 기관과 사학 전공 학생들이 피해자와 연대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김도경 역사 시간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 중 하나로만 간단하게 다루잖아요. 그런 부분이 아쉬웠고 더 조명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 드라마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접한 것이 저에겐 관심을 유지하는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Q. 전국 곳곳의 소녀상이나 남산 일본군‘위안부’ 기억의 터, 마포의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대구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등에 직접 가본 적이 있나요? 그때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요? 강대현 단순히 ‘소녀상’이라고 인지하는 데서 끝난 것 같아요. 일본군이 자행했던 잔인한 폭력에 대한 참담함을 느끼기는 했지만요. 김희연 고등학교 때 역사 선생님이 내주신 수행평가로 전시를 보러 간 적이 있어요. 그 전시장 내에 있던 소녀상을 보고 울컥한 기억이 있습니다. 이혜주 앞에서도 말했듯, 고1 때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 갔어요. 피해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도 전시장에서 보니 느낌이 달랐습니다. 제 나이보다 더 어렸을 때 피해를 입은 분도 계셨고요. 울컥해서 한참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1층에는 기획 전시로, 한국군에게 성폭력을 당한 베트남 여성들의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 또한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참혹한 일이 많아서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심현희 ‘위안부’ 관련 기념관과 박물관을 방문한 경험이 있습니다. 피해자들의 이야기와 역사적 사실을 접하면서 깊은 감동과 존경심을 느꼈어요. 희생자를 기리고 역사를 기억하며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기념관이나 박물관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김민정 어릴 때부터 나눔의 집 앞에 설치된 소녀상을 자주 접할 수 있었어요.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 참담함을 느꼈습니다. 최근에는 독일 카셀대학교의 소녀상 철거 사건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는데요, 어느 날 새벽에 갑자기 소녀상이 사라졌고, 이후 학생들이 소녀상이 납치됐다는 내용의 포스터를 붙이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독일을 비롯한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소녀상을 되찾기 위한 활동을 하는 걸 보면서, 같은 전범국임에도 독일과 일본에서의 ‘위안부’ 피해자들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또한 우리는 피해국으로서 어떻게 하면 그러한 정서적 공감을 일본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김도경 소녀상 설치 반대나 철거 운동에 관한 뉴스를 많이 접하다 보니, 소녀상이 설치돼있는 모습을 보면 ‘그곳에 잘 있어줘’라는 마음으로 보게 되는 것 같아요. Q. 이번 청년좌담의 참가자 여러분은 피해자의 증언을 직접 접하거나 배보상을 위한 법정 투쟁이 뉴스에 오르내리던 때가 아니라,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대중화되면서 사회적 기념이 중요해지던 국면에 이슈를 접했을 것 같습니다. 소녀상에 목도리를 둘러 주고,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고, 해시태그를 거는 일, 나비 팔찌 등 모금 굿즈를 사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혜주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는 아직 이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측면에선 윤리적 욕망을 채워주는 부분이 있는 것 같고요. 강대현 코로나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SNS나 해시태그 등을 통해 정보를 나누고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것에 회의가 들더라고요. 본인이 직접 행동하는 것과 SNS를 통해 접하는 것에는 괴리가 있기 때문에 현실에서 직접 활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희연 바쁜 일상을 살다 보면 중요한 이슈를 놓치게 될 수도 있는데, SNS상에서 누군가의 글이 그것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개인의 글도 주변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요. 저도 지인들에게 ‘위안부’ 관련 책이나 영화, 전시를 함께 보자고 제안하곤 하는데 그러다 보니 그들도 점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더라고요. 김민정 일반 시민들은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 마련이나 소송 과정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죠. 그래서 굿즈를 사거나 소녀상과 함께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리면서 문제 해결에 동참했다는 감각을 느끼고 싶은 것도 있는 것 같아요. 김도경 SNS를 활용하면 보다 쉽게 사회적 연대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언론이 SNS 내의 움직임에 주목할 경우 더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요. 개인적인 경험을 인터넷상에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정서적 동요를 일으키거나 간접적인 경험을 가능하게 하니 긍정적인 효과를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심현희 시대의 흐름에 따라 홍보나 참여 방법도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를 통해 역사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출 수도 있고요. 따라서 말씀해주신 행위들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을 고취시키고, 희생자들에 대한 존중과 지지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Q. 그동안 일본군‘위안부’ 관련 영화나 드라마에서 종종 피해 상황을 선정적으로 묘사한다거나 피해자들을 성적인 이미지로 보여주는 경우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피해자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이런 끔찍한 일을 당했다는 것을 강조하며 나비나 소녀상처럼 순결한 이미지로만 ‘위안부’를 소비하는 경향도 있는데요. 이렇게 이분법적인 관점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희연 피해자분들을 ‘피해자화’한다고 생각해요. 피해자의 틀에 가둬놓고, 어린 나이에 순결을 빼앗겼으니 불쌍한 인생이라고 묘사하는 식의 영화를 너무 많이 봤어요. 가부장제 하에서 여성의 순결이 강조되다 보니, 피해를 당한 것이 그 사람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혜주 그런 이분법적인 관점이 대한민국이 성범죄 피해자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를 보여주는 것 같아요. 피해자분들이 순결을 빼앗기는 불쌍한 일을 당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성녀 프레임’ 안에 놓으려는 시도처럼 느껴져요. 피해자는 늘 피해자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식, 즉 피해자는 일상을 살아가서는 안 되고, 피해 안에서 계속 고통스러워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이분법적인 관점이 탄생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김민정 선정적인 장면을 통해 피해자분들을 그려내는 영화를 많이 접했어요. 제작자들은 그분들의 이야기에 오롯이 공감하지 못하고 제3자의 시선에서 평면적인 이미지만 취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실존하는 피해자에 대한 존중이 결여되어 있고, 소녀가 중년이 되고 노년 여성이 되었다는 사실도 쉽게 지워지는 것 같습니다. 소녀상에서도 볼 수 있듯 피해자를 소녀의 이미지, 무구한 피해자성 안에만 머무르게 하는 것 아닌가 싶어요. 김도경 그런 이분법적인 시선은 영화나 소설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을 극적으로 묘사하거나 캐릭터화하기 위해 제작자로서 쉽게 취할 수 있는 장치라고 생각해요. 피해자에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면서 가해국의 권력이나 시대적 상황에는 관심을 갖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심현희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분법적인 관점은 복잡한 문제인 것 같아요. 그러므로 피해자들의 이야기와 경험을 듣고 성차별과 인권 침해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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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어떻게 하이난도(海南島)에 위안소를 세우고 '위안부'를 동원하였나 현재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남아 있는 중요한 논쟁은 위안소 설치와 운영 및 '위안부' 동원에 일본 정부가 직접 관련되었는지와 강제성이 있었는지 여부이다. 일본 정부는 1992년 1월 12일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관방장관의 발표와 1993년 8월 4일의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의 발표를 통해 군과 정부의 직접 관련성 및 강제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일본의 우파들은 일본군이나 일본 정부가 직접 위안소 설치를 명령한 문서가 발견되지 않았으니 일본 정부의 직접 관련성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일본군이나 정부가 '위안부' 동원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민간업자들이 불법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위안부'를 모집하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을 수용한 아베 정부는 이전의 일본 정부가 인정한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타이완척식주식회사(이하 타이완척식)이 작성한 일본군'위안부' 관련 자료는 일본군이 하이난도(海南島)를 점령한 이후 타이완총독부와 민간업자를 활용하여 위안소를 설치하고 '위안부'를 모집하는 데에 관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들 자료는 1939년 3월 17일부터 1943년 8월 5일 사이에 작성된 60여 종류 328페이지 분량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관련 자료들은 타이완의 타이완성문헌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이번 글에서는 이 가운데 아래 자료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 業務部長, 「海南島バラック建築ノ件」,1939.3.29. 파일번호 J_tw_002. ● 「海南島海軍慰安所ノ件」, 1939.4.4, 파일번호 J_tw_005. ● 台拓社長, 「海南島調査隊用並ニ軍用資材供給ノ件」, 1939.4.21, 파일번호 J_tw_010. ● 台拓事業課長大西文一, 「人員並ニ物資輸送ノ件」, 1939.5.9, 파일번호 J_tw_015. ● 営業部調査課長, 「海南島慰安所営業資金貸付ノ件」, 1939.5.6. 파일번호 J_tw_014. ● 台拓事業課長, 「海南島建築事業ニ係ル件」, 1939.5.11, 파일번호 J_tw_016. ● 南支課長, 「建築事業進捗状況ニ関スル件」, 1939.8.16, 파일번호 J_tw_032. ● 海口事務所長, 「建築事業進捗状況ニ関スル件」, 1939.9.14, 파일번호 J_tw_034. 타이완척식이 작성한 일본군'위안부' 관련 문서는 다음의 2가지 측면에서 '위안부'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1939년 이후 일본군의 전선이 중국을 넘어 동남아시아, 태평양 등 남방으로 확대되면서 대륙의 위안소 설치 운영 방식을 섬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일본이 이들 지역에 어떻게 위안소를 설치하고 운영하였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는 점이다. 둘째, 이 문서들은 일본군, 일본의 정부 기관, 국책회사, 민간업자가 어떠한 관계를 맺으면서 위안소의 설치와 운영에 서로 관련되어 있는지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내용을 제공한다. 다른 지역으로 군부대가 이동하면 군인들의 수요를 대체할 수 있는 민간인들이 거의 없는 섬 지역에서는 위안소 운영의 수익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이런 곳에서 민간업자들이 위안소를 운영했다는 사실은 그것이 민간의 위안소 업자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경제행위가 아니라 군의 위탁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타이완척식이 작성한 '위안부' 관련 문서는 남방에서 이루어진 일본군 위안소의 설치와 운영에 국가 기관과 민간인 업자들이 긴밀한 유착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증거인 것이다. 1. 복대공사(福大公司)의 '위안부' 모집 1938년 10월 일본군이 광둥(廣東)을 침공하자 광둥의 정세 악화를 염려한 중국은 하이난도 주둔군을 광둥으로 이동시켜 일본군의 침략에 대응하였다. 그러자 1939년 2월 일본군은 중국에 대한 해상봉쇄를 강화하고 하이난도에 군 작전기지를 설치해 남진정책을 추진하기 위하여 방어력이 약해진 하이난도를 점령하였다. 일본군이 하이난도를 점령하고 여기에 주둔하면서 하이난도에 위안소를 설립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이 타이완척식의 업무부장이 타이완총독부의 나가세 촉탁에게 보낸 1939년 3월 29일 자 문서이다.[1] 여기에는 "군 정보부장이 이 지역 해군 무관실을 통해 우리 회사에" "요리점 및 위안대 관계자 각 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막사 건축 2동(건평 각 53평 반)"을 지어달라고 한 내용이 적시되어 있다. 이 문서의 수·발신 관계를 역으로 읽으면 하이난도를 점령한 일본군이 하이난도에 위안소 설치를 결정하고 그 구체적인 사항을 타이완총독부를 통해 타이완척식에 의뢰한 사실이 밝혀진다. 이 문서의 작성으로부터 약 1주일 정도가 지난 1939년 4월 4일 자 문서[2]에는 타이완총독부의 기하라 조사과장이 타이완척식의 다카야마 이사에게 "예기 10명, 예기 겸 창기 30명, 창기 50명을 공급"해달라고 의뢰한 내용이 있다. 타이완총독부의 이러한 요청에 따라 타이완척식은 기존의 예·창기업에 종사하고 있던 "가케츠(花月)와 다케노야(竹之家)란 업소를 통해" 우선 "예창기 10명을 파견하고" 여기에 필요한 자금 "3만 엔"까지 빌렸다. 동시에 타이완척식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업무를 자신들의 이름으로 직접 "취급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좋지 않으므로 우선 복대공사(福大公司)에 별도로 대부"하는 등 직접적인 관련성을 감추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처럼 타이완척식은 타이완총독부를 통해 전달된 군의 '위안부' 공급 의뢰에 대해 우선 급한 대로 10명의 예·창기를 파견하였고, 이후 1939년 4월 6일에는 복대공사와 하이난도에서의 위안소 운영에 관한 정식계약을 체결하였다. 타이완척식 사장이 작성한 문서[3]에 의하면, 이후 복대공사는 타이완 각지에서 '위안부'를 모집하여 1939년 4월 18일 기륭(基隆)항을 출발하는 타이완척식 소유의 긴레이마루(金令丸) 선박을 통해 예기 4명, 작부 7명, 관계자 8명을 하이난도로 데리고 온다. 타이완척식과 복대공사 간 정식계약 체결일이 1939년 4월 6일임을 고려하면, 계약 후 12일 만에 사람을 모집하고 도항 절차를 모두 마친 후 여성과 관계자를 배에 태워 이동시킨 것이다. 복대공사가 계약체결 이후 발 빠르게 움직였다고 하더라도 촉박한 시간이다. 이렇게 '신속한' 업무 진행이 가능했던 것은 '위안부'의 모집과 도항에 관한 사항은 군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으며 국가의 행정기관인 총독부를 통해 의뢰된 업무라 관련 기관이 긴밀하게 협조한 결과라 판단된다. 특히 기륭항을 통해 출발한 도항자 명부에는 1922년 11월 5일 생으로 1939년 당시 17세였던 우사미(宇佐美)라는 여성도 포함되어 있는데[4], 이처럼 미성년자를 풍속업(매춘업)에 종사시키기 위해 도항시키는 것은 당시 일본의 국내법으로도 불법이었다. 그럼에도 미성년자를 모집하고, 승선자 명부에 이를 기록하여 도항할 수 있었던 것은 경찰과 외무성 등 관련 기관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어서 타이완척식의 사업과장이 총독부 임시 남지조사국 이사장에게 보낸 1939년 5월 9일 자 문서[5]를 보자. 이 문서는 "해군 무관실이 타이완총독부를 통해 조회한 건에 관하여 별지대로 수배를 마치"고 "산야(三亞)방면으로 향하는 특요원 10인 1조(5월 23일 긴레이마루 선박으로 출항예정)"를 하이난도로 도항시킬 예정이라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문서의 뒤쪽에 산야방면행 특요원 명부가 붙어있는데 이 명부에는 작부 8명과 관련자 6명 등 총 14명의 이름, 본적, 현주소, 출생일이 기록되어 있다. 작부 가운데에는 1916년 9월 17일생으로 당시 23세였던 경상북도 안동군 출신의 조선인도 있다.[6] 이처럼 복대공사는 여러 행정기관의 협조를 통해 '위안부'를 하이난도로 도항시키는 일을 적극적으로 담당하였다. 2. 해남건물공사(海南建物公司)의 위안소 건설 타이완척식은 위안소 운영과 '위안부' 모집을 복대공사에 위임한 것과 동일하게 위안소 건설 업무 역시 별도의 회사를 설립하여 위임한다. 이를 위해 하이난도에 필요한 건축사업을 진척시키기 위한 대책 회의가 1939년 4월 25일과 26일 양일간 타이완척식의 사장 저택에서 이루어졌다. 이 회의에 타이완척식에서는 사장, 구사카(日下) 이사, 오니시(大西) 과장이, 총독부에서는 나가세 촉탁이 참가하였다. 회의를 통해 "하이난도에서의 건축사업은 해남건물공사의 이름 하에 독립회사로 영업한다. 단 법률상의 의미로 별도의 회사를 설립하는 것은 아니며 실제로 우리 회사의 사업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사업경영의 편의상 회사를 독립시켜 해남건물공사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 회의내용을 기록한 문서[7]에는 해남건물공사의 담당 업무가 나열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이미 다무라 구미(田村組)에 하청을 준 해군 위안대용 막사 및 해군조사대용 막사"는 "공사 완성 후 해군에서 대금을 받는다"는 내용이 적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 회의내용은 타이완척식의 도쿄지점장, 중국 광둥의 모리 참사, 하이커우(海口)에 있는 총독부 나가세 촉탁에게 보고되었다. 위안소 완공 이후 그 대금을 해군에서 받는다고 명시한 것으로 보아 위안소 건설업무의 원 발주처는 해군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해군이 총독부를 통해 위안소 건설을 위촉하자 총독부는 이를 다시 타이완척식에 위촉했고, 위안소 건설을 위촉받은 타이완척식은 해남건물공사를 설립하여 이 업무를 담당하게 한 것이다. 이후 해남건물공사를 통한 위안소 건설은 예정대로 진척되었고 타이완척식은 이러한 상황을 원래 사업 의뢰 기관인 타이완총독부와 해군에 보고했다. 1939년 5월 11일자로 타이완척식의 오니시(大西) 사업과장이 타이완총독부 남지조사국과 해군 무관실로 보낸 문서[8]에는 완성된 건축물에 대한 상세 정보와 함께 "해군 위안소 총건평 291평(대소) 5동 준공예정 5월 20일"이라는 준공 계획이 담겨 있다. 이 내용은 앞에서 살펴본 1939년 3월 29일 자 위안소 건축 관련 문서에 적시된 '요리점 및 위안대 관계자 각 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막사 건축 2동(건평 각 53평반)'과는 서로 다른 건물이라고 판단된다. 타이완척식에서 건축업무를 위임받은 해남건물공사는 다무라 구미에게 건축 실무를 담당하게 하여 위안소 건물을 완공하였다. 그러나 공사 진행 과정 중 회의를 통해 '공사 완성 후 해군에서 대금을' 지불하기로 결정했으나, 다무라 구미가 공사를 마친 후에도 공사대금은 지불되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1939년 8월 16일자로 타이완척식의 남지과장이 총독부의 하이커우 사무소장 앞으로 공사대금 미지급문제와 관련된 회신을 요청하는 문서[9]를 보낸다. 여기에 대하여 하이커우 사무소장은 "해군위안소 건물의 하명은 기술자가 없어" "다무라 구미의 기술자에게 설계 및 그 외의 것을 시행한 것으로" "당시 군의 예산이 없었기 때문에 해군 위안소로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을 타이완척식이 건설해주는(서비스의 의미) 의뢰를 받았기 때문에"[10] 등과 같은 답변을 하면서 해군이 대금을 주지 않으므로 위안소 건물을 타이완척식 소유로 하여 대금을 변제할 수밖에 없다는 대안을 제시한다. 위의 내용을 종합하여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즉, 타이완척식이 작성한 자료의 분석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본군이 위안소 건설과 운영 및 '위안부' 모집 업무를 타이완총독부에 의뢰하자 총독부는 이를 다시 타이완척식에게 의뢰했다. 타이완척식은 해남건물공사에게 위안소 건설업무를 담당시키고, 복대공사에게는 '위안부' 모집과 위안소 운영 업무를 맡겼다. 특히 타이완척식은 본인들이 '위안부' 모집과 관련된 업무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자회사인 복대공사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각주 ^ 業務部長, 「海南島バラック建築ノ件」,1939.3.29. 파일번호 J_tw_002. ^ 「海南島海軍慰安所ノ件」, 1939.4.4, 파일번호 J_tw_005. ^ 台拓社長, 「海南島調査隊用並ニ軍用資材供給ノ件」, 1939.4.21, 파일번호 J_tw_010 ^ 台拓社長, 「海南島調査隊用並ニ軍用資材供給ノ件」, 1939.4.21, 파일번호 J_tw_010. ^ 台拓事業課長大西文一, 「人員並ニ物資輸送ノ件」, 1939.5.9, 파일번호 J_tw_015. ^ 台拓事業課長大西文一, 「人員並ニ物資輸送ノ件」, 1939.5.9, 파일번호 J_tw_015. ^ 営業部調査課長, 「海南島慰安所営業資金貸付ノ件」, 1939.5.6. 파일번호 J_tw_014. ^ 台拓事業課長, 「海南島建築事業ニ係ル件」, 1939.5.11, 파일번호 J_tw_016. ^ 南支課長, 「建築事業進捗状況ニ関スル件」, 1939.8.16, 파일번호 J_tw_032. ^ 海口事務所長, 「建築事業進捗状況ニ関スル件」, 1939.9.14, 파일번호 J_tw_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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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인터뷰 ‘할머니’들이 이끄는 길을 따라 - 서혁수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대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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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에서 뻗어져 나온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이하 역사관)과 브랜드 희움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위안부’문제 해결과 피해자 관련 기록에 힘쓰고 있다. 또한 굿즈를 제작해 ‘위안부’문제 인식을 대중화하고, 쇼핑이 기부로 이어지는 일명 ‘착한 소비’에 대한 높은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냈다. 현재 세 개 조직의 대표를 겸임하고 있는 서혁수 대표를 지난 12월 3일, 대구의 희움 역사관에서 만났다. 11월부터 새롭게 선보이고 있는 전시 <일본군‘위안부’피해자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증언 展>(12월 31일 종료)뿐만 아니라 겸임 대표로서 맡은 바를 해내야 하는 만큼 그는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만큼 바빠 보였다. 그 모든 일들을 해낼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서 대표는 “(하늘에 계신) 할머니가 이끌어주시는 느낌이 든다. (…) 앞으로 계속 가다보면 또 새로운 길이 나오지 않을까”라며 웃어보였다. 2019년 10월부터 대표를 맡아 2년 여간 활동해온 소회는 어떠한지, 현재 ‘위안부’문제 해결에 있어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인지, 또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지 들어보았다. Q. 현재 여러 곳에서 대표를 맡고 계시는데 각 단체 및 사업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모태가 되는 건 시민모임입니다. 1997년 12월에 결성된 시민모임을 바탕으로 2015년에 역사관이 건립됐어요. 역사관이 들어서기 이전인 2012년에 브랜드 희움을 런칭했고요. Q. 시민모임의 시작이 궁금합니다. 저희가 세 가지 축이 있다고 말씀을 드려요. 제일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지역의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무료진찰권이 제공됐다는 것이죠. 1995년 8월부터 곽병원의 곽동협 원장님께서 생존자들을 무상으로 진찰해주셨는데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그러한 희생이 바탕이 됐고, 또 하나는 대구여성회에서 ‘위안부’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생존자들을 조사하고 증언 녹취 작업을 했어요. 당시 대학생들과 교수님들이 생존자 실태 파악도 진행했고요. 그런 활동이 맞물리면서 지역의 ‘위안부’ 피해자를 챙기자는 움직임이 본격화됐죠. 그러면서 시민모임 사무소가 개설됐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들이 한 분 한 분 돌아가시면서 그분들의 유품을 모으는 장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역사관을 건립하자는 목소리가 생겼어요. 하지만 쉽지 않았죠. 그러다 고려대의 사회적 공헌 동아리 인액터스(Enactus)와 함께 ‘위안부’ 관련 굿즈를 제작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의식 팔찌’를 만들게 됐습니다. 못다 핀 희망을 꽃피우자는 의미로 블루밍 프로젝트를 시작했죠. 이를 통해 얻은 수익금에 더해 김순악 님의 기부금 5000여만 원이 마중물이 돼서 역사관을 건립하게 됐어요. Q. 역사관은 정부 지원 없이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건가요? 역사관은 입장료, 희움 판매금액, 회원 정기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이외에는 외부 지원이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관람객이 한 해에 1만 명 정도 되는데 코로나 이후 1000명으로 대폭 줄었어요. 이전에는 단체에서도 많이들 오셔서 굿즈에도 관심 가져주시고 전시에 관한 다양한 의견을 주셨는데 지금은 그런 교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어 아쉽습니다. Q. 시민모임, 역사관, 브랜드 희움이 하는 일은 각각 어떻게 다른가요. 시민모임은 ‘위안부’문제 해결, 생존자 지원, 사업 추진, 후원회원과의 교류 등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역사관은 피해자 관련 중요 증언과 자료들을 많은 분에게 알릴 수 있는 전시를 기획하고 있고요. 브랜드 희움에서는 굿즈 개발을 하고 있어요. 요즘에는 유사한 굿즈가 여러 곳에서 많이 나오고 있다 보니 새롭게 바꿔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Q.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굿즈 제작에 나선 것은 희움이 최초이지 않나요? 맞습니다. 저희는 단순히 굿즈뿐만 아니라 할머니 관련 출판 사업도 함께하고 있고, 모든 이익은 피해자를 위한 사업에 환원한다는 목표가 있습니다. 그런데 디자인이나 기획, 제작 등이 만만치 않은 일이고 트렌드가 워낙 빨리 바뀌다 보니 어려운 지점이 있죠. 컨셉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가 쉽지 않아서 디자이너들과의 협업 방식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Q. ‘위안부’문제 해결 운동에 동참해야겠다고 처음으로 결심하셨던 때는 언제였나요? A. 젊은 시절 제 주위에 ‘위안부’ 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많았어요. 그게 계기가 돼서 덕분에 할머니들을 만나게 됐고 개인적으로 몇 분하고는 친하게 지냈죠. 그러면서 그분들 옆에서 챙겨드리고 도와드리는 일을 했어요. Q. 시민모임 측과는 예전부터 인연을 쌓아 오셨던 건가요? A. 네. 행사에도 참여하고 한 번씩 글도 썼습니다. Q. 이번 대표직은 언제부터 맡게 되셨는지요. A. 2019년 10월부터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개인 사업을 따로 하고 있고 ‘위안부’ 관련 업무는 비상근으로 하고 있어요. Q. 대표 겸임을 하느라 힘에 부치실 때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모든 일들을 해낼 수 있는 동력은 무엇인지요. A. 이번에 처음으로 고민을 해봤는데요, 다른 건 모르겠고 한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2000년대 초에 시민모임 5년사를 발행할 때 모리카와[1] 씨가 투고한 글 중 일부분이에요. “문옥주 할머니에게 이끌려 시작된 이 조사를 앞으로도 할머니가 이끌어주시는 대로 계속해 나가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말처럼 저도 지금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할머니가 이끌어주시는 느낌이 들어요. 할머니가 곁에서 지켜보며 무언가 고갈될 때마다 하나씩 내려주시는 것 같아요. 저는 요즘 그걸 너무나 믿는 게 책을 하나 내니까 또 어디서 새로운 증언이 나오더라고요. 이것이 다음의 연구거리다, 하고 알려주시는 것 같아요. 이걸 하다 보면 또 새로운 길이 나오겠죠. Q. 현재 역사관에서 새로운 전시를 진행하고 있죠. 대표님이 총괄 기획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특히 역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지요. A. ‘할머니의 방’을 어떻게 담아낼지 고민했습니다. 그분들의 희노애락을 어떻게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또 개인 사생활을 공유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어떤 식으로 담아내는 것이 좋을까 걱정을 했죠. ‘얼굴의 계단’에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잘 담겨 나와서 흡족했고요. 모든 게 어려운 과정이었지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잘 실현된 것 같아서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문옥주 할머니와 관련해서는 강독회를 진행했는데 그분의 구술을 새롭게 읽어내는 과정이 보람 있었어요. 증언들을 일일이 뜯어보며 읽다 보니 저희가 적임자더라고요. 사투리 같은 표현들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이야기를 좀 더 입체적으로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Q. 강독회가 그렇게 시작된 모임이군요. A. 네. 올해 3월부터 모임을 가져왔고 『문옥주 지오그라피』라는 책도 냈습니다. 지오그라피라는 게 할머니가 다녔던 지역을 담아낸 의미도 있지만 그분은 어느 땅을 가든 이치를 아는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느 곳을 가든 최선을 다해 살아내셨다는 생각이 드는 일화들이 참 많거든요. 신문 한 장에서 시작해 자료집을 엮게 됐는데, 덕분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자료들을 모을 수 있었어요. 전문가들 의견도 더하고요. 이게 완전한 버전은 아니지만 이것으로부터 시작해 앞으로 할머니와 관련된 이야기를 계속 엮어보려고 합니다. 문옥주 증언집이 지금 미국에서 번역되고 있거든요. 그럼 그 책을 보고 나중에 외국에서도 찾아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Q. 모임에는 어떤 분들이 참여하셨나요? A. 지역의 향토 사학자, 일본 문학 전공자, 권번 판소리 전문가, 구술 전문가 등 많은 분들이 계세요. Q. 지금도 꾸준히 모임을 갖고 계시나요? A. 네. 7차까지 모임 진행한 후 시즌2는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1차로 펴낸 자료를 토대로 후속 연구에서는 더 많은 이야기가 오갈 수 있겠죠. 아직도 모을 자료가 많습니다. 모리카와 씨가 모은 자료도 일본에 많거든요. 그런 것들을 함께 합치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아직 못했어요. 모리카와 씨가 2019년에 돌아가신 이후 코로나 때문에 일본에 있는 자료도 아직 파악이 안 된 상황입니다. 현재 지오그라피에는 한국 관련 내용만 있지만 중국, 일본, 미얀마 길이 함께 이어져야 해요. 할머니가 어렴풋이 말한 장소를 저희가 다 알아냈는데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미얀마는 군부 쿠데타 때문에 더욱이 갈 수 없고, 중국도 코로나 이후 상황 때문에 직접 확인할 수 없어 안타깝죠. Q. 시민모임의 활동은 주민 운동적 성격도 일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강점 또는 난제라고 꼽을 만한 지점이 있다면 무엇일지요. A. 이제는 주민 운동의 차원은 벗어난 것 같아요. 회원도 전국적으로 분포해있고 희움 굿즈도 전국에서 구매하시거든요. 이런 단체와 역사관이 있다는 것을 인식해주시는 분들이 전국적으로 많아진 것 같아요. Q. 서울 중심적 구조 또는 중앙과 지방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기반으로 지역 운동을 주변화하는 인식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한데요. 이러한 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A. 지역들 간의 유기적인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진 않지만 생존자들이 계셨던 곳과 그분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다 지방이에요. 지방 사람들이 힘을 합쳐야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 있죠. 그런데 중앙 단위에 관심이 쏠리다 보면 아무래도 소외되는 게 많아요. 한계이자 극복해야 될 점이죠. Q. 한국에서의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운동과 사회적 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안타깝다고 느끼시는 점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A. 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런 것들이 잘 이뤄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현재 생존자분들이 어떻게 살고 계시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분들을 위해 뭘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많이 결여돼있죠. 피해자 지원이나 ‘위안부’ 관련 사업에 대한 청사진이 준비돼있지 않은 부분, 문제 해결에 있어 정부가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부분들이 가장 안타까워요. 현재 전 세계적으로 생존자들이 줄어들고 있거든요. 작년 3월에도 장례를 치르면서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창 코로나로 심각했을 때 쓸쓸하게 보내드렸거든요. 너무 안타까워요. 하루 빨리 문제 해결이 될 수 있도록 힘써야겠다는 조바심이 납니다. Q. ‘위안부’문제 해결운동 30년이라는 측면에서 성과라고 생각하시는 점이 있을까요. A. 오랜 시간 속에서 어떤 성과를 이뤘느냐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고, 어떤 목표를 가질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해진 타임라인 안에서 무엇을 해낼 것이냐를 생각하는 것이 지금으로선 시급한 문제인 것 같아요. Q. 혹시 현재 다른 지역 단체와의 협업이나 교류가 진행되고 있나요? A. 최근에 조금씩 진행하고 있는데 아직은 잘 정착된 느낌은 아니에요. 보다 적극적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국내 단체뿐 아니라 해외 단체들과도 지속적으로 교류가 필요하고요. 다른 피해국가의 단체, 학자 그룹, 역사관 등 교류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Q. ‘위안부’문제와 관련하여 정부와 민간의 역할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요. 각각에서 가장 시급하게 준비해야 할 과제는 무엇일까요. A. 민간에서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전해드리고, 정부에서는 그들의 바람이 담긴 정책이 실행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그동안 저희가 일본 정부에 계속 요구해온 게 7가지 원칙(일본 정부의 범죄사실 인정, 공식사죄, 법적 배상, 진상규명, 역사교육, 추모, 책임자 처벌이 포함된 법적 책임)인데 이를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가 관건이에요. 정부에서든 단체에서든 이 원칙을 실현시킬 수 있는 뚜렷한 방법을 내세우지 않고 있어요. 그래서 저희가 계속 이런 저런 제안을 하는 거죠. Q. 생존자분들이 돌아가셨을 때 문제 해결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운동 방향을 어떻게 바꿔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A. 직면해야 할 현실인데 지금까지는 생각을 못해봤어요. 현재 생존자 분들이 살아계심에도 문제 해결이 어려운데 안 계신다고 생각했을 땐 더 어려울 것 같거든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긴 하지만 지금은 그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Q. 대표 겸임을 하신 지 1년이 됐습니다. 그간 활동을 해오시며 행복과 보람을 느끼셨던 적은 언제인지 궁금합니다. A. 지난 몇 개월 정신없이 바쁘게 지냈는데 손에 잡힌 성과는 없는 듯해 안타깝기도 합니다. ‘위안부’문제 해결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 시민모임의 역할을 생각하고 추진해나가는 것이 숙제로 남아있죠.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바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스스로를 독려해야겠습니다. Q. 앞으로 염두에 두고 계신 활동이나 계획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직함이 많은 만큼 그 역할을 다 해야겠죠. 시민모임은 ‘위안부’문제 해결, 회원과의 교류, 생존자 지원, 추모 사업 등에 힘쓸 테고요. 역사관에서는 새로운 전시를 계속 준비할 예정입니다. 내년에는 역사관을 확장할 수 있도록 구체화하는 게 계획이자 목표이기도 합니다. 희움은 새로운 상품을 개발해서 어려움을 뚫고 다시 부활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도록 하고요. 개인적으로는 이용수 할머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정책을 내는 데 일조하는 게 바람입니다. 각주 ^ (편집자 주) 모리카와 마치코(森川万智子). 대구 출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옥주의 증언을 토대로 그의 일대기를 1996년에 책 『문옥주, 미얀마(버마)전선 방패사단의 위안부였던 나』(文玉珠 ビルマ戰線楯師團の慰安婦だった私)으로 써냈다. 이후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모리카와 마치코, 김정성 옮김, 아름다운사람들, 2005)라는 제목으로 한국어판이 발간됐다. Credit 인터뷰어: 강푸름 인터뷰이: 서혁수 대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브랜드 희움) 사진: 오늘의 나 기획/진행: 퍼플레이컴퍼니 일시: 2021년 12월 3일 금요일 장소: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