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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의 재현 〈3부〉 - 재현물로서 〈허스토리〉의 성공과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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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물로서 <허스토리>의 성공과 실패 허윤(부산외대 만오교양대학 교수) / 권은선(중부대 연극영화과, 영화평론가) / 오혜진(한예종, 문학평론가) / 김청강(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교수) <1부> - <여명의 눈동자>부터 <허스토리>까지,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재현전략 <2부> - '위안부'를 둘러싼 재현의 윤리, 어디까지 묘사하고 재현할 것인가 <3부> - 재현물로서 <허스토리>의 성공과 실패 허윤 <허스토리>가 그래서 여러 가지 문제 지점을 낳았죠. 다큐멘터리 장면들을 그대로 영화 안에 포함하고, 살짝살짝 비틀면서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다 소거하고,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안해룡, 2009)에서 여러 장면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는데, 한국어로 노래를 부르잖아요. 송신도 님은 일본어로 노래 부르는데요. 이것이 다큐멘터리에 등장했던 실제 상황이라는 정보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영화적 연출로 해석될 수밖에 없고, 대중들에게는 신선한 재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떤 식으로 그런 이미지들을 가져와서 유통하는지 모르게 되고요. 김청강 지금은 다큐멘터리 푸티지나 사진, 이미지가 많잖아요. 그걸 이용해서 어떤 사실로서의 증명처럼 중간중간 넣어주는 방식. 그러니까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극화된 식민지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도 그래요. 요즘에 보면 식민지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너무 많이 나오고 있잖아요. 극화된 서사에 사실로서의 이미지를 던져주면서 이게 전체적으로 굉장히 진실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재현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오혜진 <허스토리>는 좀 나쁜 의미에서 충격적이었어요. 김희애 씨를 띄우는 것 외에 이 영화는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하는……. 김청강 김희애가 사투리를 쓸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영화인 것처럼. (웃음) 허윤 너무 못 쓰지 않아요? 부산 사람들이 못 알아듣겠다고 하던데. (웃음) 오혜진 그 영화에서 여성단체의 역할이 재현된 방식도 매우 제한적이었고요. '증언하는 여성'의 힘을 보여주기에는 '배정길(김해숙 분)'과 다른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비중이 너무 작았죠. 무엇보다 그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한일 연대 법정투쟁을 다루는데, 재일조선인 변호사 '이상일(김준한 분)' 외에는 일본 시민운동의 동향이 거의 나오지 않았어요. 한일 연대 법정투쟁의 의미를 되새겨보기에는 많은 것들이 삭제됐고, '부산'이라는 지역성을 내세웠지만, 그것이 서사에서 충분히 의미화되지는 않은 듯해요. 마지막 장면은 '위안부' 역사기념관의 전시물들을 비추며 끝나는데, 마치 '위안부' 문제는 이제 박물관에 가야 하는 완결된 문제라고 말하는 듯했어요. 김청강 그러니까 그거는 성찰이 끝난 것 같은 느낌인 거죠. 권은선 그런데 어떤 것은 흥미로워요. <아이 캔 스피크>랑 <허스토리> 같은 경우에 보면 타이틀이 공통점이 있잖아요. 소문자 i에서 대문자 I로 바뀌고. 히스토리에서 허스토리로 바뀌고. 어떤 담론을 대중적인 문법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를 자명하게 밝히고 시작한다는 부분이, 뻔하기는 한데, 재밌었어요. 그리고 상업 영화에서 '안경 쓴 여자'는 절대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불문율이 있거든요. 그러면 어떤 순간에만 안경 쓴 여자가 등장하느냐. 신데렐라 스토리에서 여주인공이 변신하기 이전 단계에서만 안경을 쓰고 등장하죠. 그런데 이 영화에서 여행사 사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안경을 쓰고 나오죠. 분명 이런 부분은 여성주의적 재현을 의식했습니다. 오혜진 <허스토리>에서 '허(her)'는 누굴까요? 문정숙? 권은선 이 영화의 시선 자체가 남성 중심적인 재현 방식과는 좀 다릅니다. 처음부터 김희애 씨가 옷 갈아입는 장면부터 기존의 재현 방식이랑은 많이 다르거든요. 전혀 관음증적이지 않고요. 그리고 여성들을 집단으로 잡는 풀샷이 되게 많아요. 지금까지는 두 '위안부' 간의 관계가 주로 프레임 됐었다면, <허스토리>에서는 나름대로 집단으로서의 '위안부' 전체를 담아내는 쇼트를 자의식적으로 많이 넣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다큐멘터리를 차용한 결과이기도 하지만요. 그런데 <허스토리>가 단점들이 좀 있죠. 장르 영화로서 재미가 좀 없지요. 법정 드라마로 볼 때. 그런데 저는 이 영화가 <귀향>만큼, 혹은 <아이 캔 스피크>만큼 흥행을 하지 못한 것은 이게, 한 명의 영웅 이야기로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여요. 오혜진 선생님이 아까 김희애 씨가 약간 너무 영웅 같다고 하셨는데, 오히려 이 영화는 영웅을 만들지 않아서, 배제적 동일시 지점을 만들지 않아서 실패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거든요. 오혜진 저는 너무 심한 영웅주의라고 생각했어요. 헤아려보니 한 신 빼고 모든 신에 김희애 씨가 나오더라고요. 그 한 신이 뭐냐면, 법정에서 증언하는 장면이 끝나고, 배정길이 아들과 대기실에서 화해하는 장면. 그때 문정숙이 '난 나가 있을 테니 두 분이 얘기 나누세요' 하며 자리를 마련해주죠. 권은선 그럼 영웅 맞네요. (웃음) 오혜진 게다가 법정에서 문정숙은 변호사, 통역사, 증언자, 목격자 등 모든 역할을 하며 원맨쇼를 구사하죠. <허스토리>는 명백하게 '위안부' 피해생존자보다 그들을 돕는 존재에게 재현의 초점이 이동한 사례라 흥미로운데, 이건 '위안부'의 증언을 '돕는' 수준이 아니라, 서사에서 '위안부'의 자리를 빼앗는 수준이었달까요? <아이 캔 스피크>는 그렇게 하지 않았거든요. 권은선 그렇죠. <아이 캔 스피크>에서 나문희 씨가 맡은 주인공이 완전한 영웅이었죠. 문정숙 캐릭터는 사실은 굉장히 신자유주의적인 주체죠. 허윤 이왕 재판을 시작했으면 이겨야 한다. 권은선 '나 돈 있어' 같은 식으로 너무나 신자유주의적인 주체로 묘사되는 게 재밌더라고요. 오혜진 실제로 GV에서 김희애 씨가 돈 뿌리는 기계로 지폐를 뿌리는 장면이 화제였어요. 허윤 팬덤이 붙은 거예요. 이 영화로. 근데 이 영화는 관객이 30만밖에 안 들었거든요. 오혜진 '문정숙'이 영화에서 모순적인 존재로 묘사되죠. 자기 여행사가 기생관광으로 돈을 벌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그걸로 '도의적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 있는지 확언할 수 없지만)을 보여주기도 하고, '위안소'에서 '엄마'라고 불리며 일종의 '중간관리인' 역할을 한 여성을 타자화하다가 곧 그녀 역시 피해자임을 깨닫고 사죄하는 모습도 보여주죠. 그런 반성의 제스쳐와 거대한 자본력으로 인해 문정숙은 '위안부' 운동을 주도할 자격을 가진 이로서 서사적으로 승인됩니다. 특히 문정숙이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주체로서 여성파워의 상징이 된다는 게 흥미로워요. '위안부' 운동을 논할 때 가장 강고한 프레임은 민족주의나 민족주의 비판론, 여성주의였는데, 이 영화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주체'를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에 가장 적합한 주체로 내세우죠. 허윤 첫 장면에서 돈 얘기하면서 시작하잖아요. 문정숙(김희애)이 부산여성경제인 연합에서 이제 여자들이 나서서 회장 해야 된다, 라고 하는데 그 장면을 보고 이 영화가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 관객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혜진 문정숙이 '부자'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정체성으로 재현돼요. '위안부' 시민운동에 있어서 '경제력'을 가장 강력한 요인으로 내세우는 건 어떤 '위안부' 서사도 하지 않은 거죠. 그런 점에서 참 놀라운 영화였습니다. 최근 '위안부' 관련 학술대회가 휘황찬란한 규모로 열리는 걸 볼 때, 신자유주의적 역사 인식이 '위안부' 역사를 사유하는 데 점점 강력한 벡터로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호화로운 학술대회 장소의 대형화면에는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이 얼마나 가난하고 고독하게 살았는지를 호소하는 자료화면이 나오는데, 정작 학술대회는 대규모의 물량을 동원해 화려하기 그지없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논의를 어서 '영어 논문'으로 작성해서 전 세계적 공인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들려올 때, (그 중요성을 모를 바 아니지만) 조금 위화감을 느꼈어요. 제게 '위안부'의 역사는 탈식민의 문제이기도 했는데, 어쩌면 지금 우리는 식민화된 방식으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허윤 그 지점이 <허스토리>가 실패한 지점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분위기는 1980년대고 실제 배경은 1990년대고, 담론은 2000년대인 거죠. 그런데 그 안에서 재현하는 일본은 2000년대 일본인 거예요. 관부재판이나 송신도 님의 재판이 벌어졌던 1990년대의 일본 사회의 분위기와 2000년대 이후 일본 사회의 분위기는 다르기도 한데, 영화에서 일본은 굉장히 평면적이죠. 재판을 배척하고,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서 타락한 여자들이라고 말하는 프레임을 그대로 갖다 비추느라고 거기서 일본사람들이 계속 악마화하잖아요. 그래서 여관에서도 못 자게 하고, 식당에 테러하고 이런 식의 그런 장면들이 사실상 2000년대에 벌어진 일인 거죠. 제가 일본군 '위안부' 관련 다큐멘터리를 처음 봤을 때 제일 놀라웠던 부분이 1990년대 일본 사회 분위기였어요. 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이 일본에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피해 증언을 하잖아요.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일본의 중고등 학생들과 전쟁과 평화에 대해서 질의응답을 하는 장면들이 제가 몰랐던 부분이었던 거예요. 제가 담론적으로는 일본군 '위안부' 투쟁이 한일의 국경과 민족을 넘어선 연대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어떤 방식으로 실제 사회에서 적용되는가는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더라고요. 그랬는데 그 다큐멘터리들에서는 이 피해생존자들이 계속 일본에서 재판이나 시위를 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극영화가 되면서 그 부분들을 완전히 다 소거시키고, 일본인 지원단체도 배경으로 처리하는 식으로 위치성을 다 제거하더라고요. 아까 말씀하신 프레임을 뜯어내고 사진만 보여주는 방식이죠. <허스토리>가 트위터나 SNS에서 여성영화로서 굉장히 호평 일색이었어요.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고. 꼭 봐야 할 영화로 추천하고, 여성들의 임파워링을 도와주는 새로운 시대의 '위안부' 영화처럼 프레임이 됐었는데, 누구의 임파워링인가를 계속 되묻게 되더라고요. 김청강 영화에 재일 동포가 주로 도와주는 사람으로 나오는 게 일본 사회에 있었던 움직임을 살짝 보여줬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런데 진짜 일본의 맥락을 잘 보여주지는 못한 거잖아요. '위안부' 문제가 처음 막 공론화되기 시작한 건 1980년대에 역사 왜곡 문제가 나오면서, 그 당시에는 정신대 문제로 나왔었고. 그런데 그랬을 때 그 충격이 사실은 우리에게만 있었던 건 아니고, 일본 사회에도 굉장한 충격을 줬고, 일본 사회에서 지식층들이 분노하고 그랬죠. 1980년대에 <오키나와의 할머니>(야마타니 테츠오, 1979)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진 것도 그 당시의 맥락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사실 일본을 단순화하는 그런 측면들도 굉장히 문제가 되는 것이죠. <허스토리>처럼 가지고 오면 그 맥락을 상실해버리는 거죠. 일본에서 있었던 맥락들이 오히려 우리 스토리에 편입되는 방식으로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저는 박수남 감독의 <침묵>(2016)이 너무 좋았고 감동적이었어요. 일본 쪽에서 있었던 운동의 맥락과 그 운동이 지속해왔던 세월도 보여주고요. 허윤 그리고 한국에서는 사실 여러 명의 피해생존자가 직접 일본에 가서 투쟁했다는 걸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침묵>은 그 부분을 다뤄주고 있어서 좋았습니다. 근데 이런 다큐멘터리는 많은 관객을 만나는 게 쉽지 않으니까 너무 아쉽죠. 오혜진 허윤 선생님 말씀대로 <허스토리>에는 서로 다른 역사적 시간대가 엉클어져 있고, 한국 사회는 '위안부'가 '증언의 주체'로 나설 만큼 변화했는데 일본 사회는 여전히 정체된 모습으로 묘사되죠. 이건 '위안부' 역사뿐 아니라 '위안부'의 역사를 재역사화해온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허스토리>나 <귀향>은 결국 역사적 주제를 탈역사적이고 초역사적인 방식으로 다룬 거죠. '위안부' 역사에 대한 재현이 시작된 게 1950년대, 김학순 님의 증언이 1991년, '위안부' 증언자들의 법정투쟁이 2000년. 즉 '위안부' 문제는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프레임들을 이동하며 논의돼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알고 있죠. 같은 '위안부'라도 다양한 사례들이 있다는 것. 조선인 부모나 다른 이들에 의한 인신매매 혹은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으로 '위안부'가 된 경우도 있고, '창기'의 신분으로 '위안부'가 된 경우도 있다는 것. 중국에서 '위안부'를 경험한 이들도 있고, 오키나와 혹은 미얀마나 다른 '남양군도'에서 '위안부' 생활을 한 이들도 있다는 것. 전쟁이 끝나고 조선(북한/남한)으로 돌아온 사람도 있지만, 돌아오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 '위안부'의 역사가 민족주의 프레임에서 논해지다가, 여성주의, 전시 성폭력 등의 프레임으로 이동하면서 국제 법정투쟁 등이 중요해진 과정 등. 그리고 이 과정에서 딜레마로 남아 있는 문제들. 이를테면, '위안부' 문제를 남성화된 민족 서사에서 구출해 가부장제 일반의 문제로 말할 때 식민지배의 문제가 사상될 수도 있다는 점, '위안부' 문제를 '전시 성폭력'으로 표준화해 전 세계적으로 논의 가능한 '보편적 문제'로 만들고자 할 때, 그 '보편성'의 언어와 논리로 '위안부'의 문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곤경들. 그런데 이제 꽤 많은 '위안부' 재현물들이 축적됐는데도, 이 같은 '위안부' 역사와 운동에 대한 여러 초점과 전략의 역사적 변화들이 대중에게 충분히 학습되고 있지 않은 것 같아요. ''위안부' 이야기, 할머니들의 고통, 연대의 중요성' 같은 뭉툭하고 당위적인 주제들만 반복되기 때문이죠. 이 화소들로만 '위안부' 역사에 대한 상상력을 구성하니, 일종의 '지체'가 있는 듯합니다. 만약 '위안부'였다가 전쟁이 끝난 후 일본에서 쭉 살았던 사람, 즉 일본 시민들과 협동해 '일본어'로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증언하는 '위안부' 모델을 영화로 만든다면 어떨까요? 그 영화도 <허스토리>처럼 설날 특집으로 TV에서 방영될 수 있을까요? 김청강 그런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허윤 TV 드라마 같은 데서 일본어가 많이 나오면 시청자게시판에 항의 글이 올라올 거예요. 김청강 충격을 받겠죠. 사실은 굉장히 그게 재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역사화하는 과정에서 삭제되고 했던 부분들이 재현으로 드러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2000년대 도쿄 법정(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법정) 때도 중국은 '위안부' 보낼 때 원래 직업이 매춘부였던 사람은 삭제하고 보냈거든요. 그러니까 너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죠. 어떤 피해자 상만이 우리 사회에서 얘기될 수 있다는 것을, 삭제했던 역사의 과정들이 사실은 어떻게 보면 재현에서도 그런 식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좀 들어요. 허윤 오늘 굉장히 여러 가지 고민과 질문을 던지면서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요. 마지막으로 논의해볼 만한 좋은 텍스트는 어떤 것인지, 선생님들께 추천을 받고자 합니다. 이 질문은 우리 웹진을 읽으시는 많은 독자분이, "그렇다면 어떤 작품을 보란 말이냐!"라는 질문을 하실 듯해서요. 혹시 추천할 만한 텍스트, 영화 소설 뭐든 상관없을 것 같아요. 한 가지 정도씩 얘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청강 근데 이게 사실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서 굉장히 선별되어야 하는 측면이 있어요.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위안부'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는 <아이 캔 스피크>나 <허스토리>를 보여줘도 사실 굉장히 충격을 받고, 또 거기에 대해서 알게 되는 측면이 있지만, 사실 어느 정도 알고 있고 한 사람들에게는 이것은 조금 너무 약한 거죠. 추천해주기에. 허윤 그런데 저는 그 지식의 격차라는 것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대중 운동의 폭은 넓어졌는데 대중 담론은 여전히 여러 '결'을 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부담 없이 얘기하셔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오혜진 저는 1999년에 발표된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 이창래의 『A Gesture Life』를 추천하고 싶어요. 한국에는 『척하는 삶』(정영목 역, 알에이치코리아, 2014)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됐습니다. 이 소설은 꼭 '위안부'를 재현한 소설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위안부'를 비롯해 식민의 유산의 문제가 현재 자신의 정체성을 사유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라는 깨달음을 서사화한 작품입니다. 자신을 일본계로 알고 있는 미국인 남성 엘리트의 이야기인데요. 나중에 그는 자신이 조선인의 자식임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조선인의 후예라는 걸 부정하고 싶은 마음, 지배자에게 동일시하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그것에 거리 두려는 욕망, 자신을 미국 주류 사회에 동일시할 수 있는 성공한 아시아 남성 엘리트로 정체화하려는 자기의식에 대한 성찰, 그 모든 고민과 갈등의 과정이 '후기 식민국가'의 일원으로서 겪는 역사적 경험임을 인상적으로 설득해냅니다. 두껍지만 추천하고 싶습니다. 김청강 사실은 저는 극영화는 추천하고 싶은 게 없고요. 박수남 감독님의 <침묵>, 아까 말씀드렸던. '위안부' 문제의 운동적인 측면이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의 맥락을 잘 보여주는 것 같고. 사실 다큐멘터리들은 대부분 그래도 훨씬 낫고, 그리고 저는 여전히 <낮은 목소리>를 학생들에게 보여줍니다. <낮은 목소리>를 수업 시간에 계속 보여줬기 때문에 한 20번도 더 봤을 거예요. 저는 1995년도에 캠퍼스 상영할 때 처음 봤었는데, 그 당시에 마지막 그 시퀀스가 너무나 정말 충격이었어요. 침묵 가운데 할머니의 그 배가 보이는 장면이, 저 개인적으로 너무 잊을 수 없는 장면이기도 하고. 여전히 그만큼의 재현을 잘 못하고 있다는 생각도 드는 거예요. 그래서 사실 아직도 <낮은 목소리>를 추천합니다. 권은선 저는 앞으로의 '재현의 향방'은 사실 잘 모르겠어요. 다만 제가 최근에 관심을 좀 가지는 것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그동안은 계속 말하는 주체를 강조했잖아요.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부터. 그런데 요즘에는 '누구에게 말하는가' '누가 듣는가'라는 게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됩니다. 영화 안에서의 동일시의 자리, 아까 얘기했던 좋은 청자의 자리, 누굴 향해서 이야기할 것인가. <아이 캔 스피크>나 <허스토리>가 한계에도 불구하고 듣는 자의 자리를 여러 가지로 바꾸잖아요. 등록된 생존자의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것에 대한,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조바심 같은 것들이 최근 영화에 드러난다고 했을 때, 듣는 자와 관련된 '텍스트를 통한 상속'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귀향>처럼 거리감을 없애는 방식이 아니라, 상속에 필요한 어떤 성찰과 거리감을 만들어 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추천 작품 관련해서, 저는 개인적으로는 노라 옥자 켈러의 『종군위안부』(박은미 역, 밀알, 1997)를 너무 오래전 어렸을 때 읽은 텍스트라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그런데 절판이 되어 구하기가 어렵더라고요. 흥미로운 서술 구조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라 다시 꼼꼼히 읽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영화 텍스트를 추천하자면 저 역시 <낮은 목소리>입니다. 마치 김학순 님의 증언 순간처럼, 이 영화는 한국영화사에 있어 중요한 모멘트였습니다. 허윤 저도 『척하는 삶』과 짝으로 『종군위안부』를 읽으면 재밌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어요. 그런데 제가 예전에 대학원, 국문학 전공이 아닌 다른 전공 친구들이랑 그 소설을 읽었었는데, 조금 어렵다고 하긴 하더라고요. 저는 송신도 님을 다룬 다큐멘터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를 추천하고 싶어요. 지금도 종종 공동체 상영을 하는 작품인데요, 일본에 사는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인 송신도 님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10년간 소송을 하는 과정을 다룬 작품입니다. “사람은 믿지 않는다”라고 단호하게 접근을 거부하던 송신도 '할머니'가 양징자 씨를 비롯한 지원단체 사람들과 소통하는 과정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김청강 어떻게 보면 비평이 더 활성화되어야 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은 창작물로서의 공급과잉이 너무 심한 것에 비해서 거기에 대한 비평 자체가 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비평이 더 활성화되어야 앞으로 나올 재현물도 조금 영향을 더 받지 않을까요. 허윤 지금까지 긴 시간 다양하고, 흥미롭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대중매체로 바라본 일본군 '위안부' 재현' 좌담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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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좌담 지금, 여기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란 무엇인가 〈2부〉 - ‘위안부’ 문제의 세대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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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문제를 다룬 학술의 장이 마련될 때면 청년·미래 세션이 빠지지 않는다. 피해 생존자와 연결된 실질적 감각이 부재한 포스트 메모리(후-기억) 세대에 대한 우려와 기대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기실 여성학, 법학, 외교학, 사회학, 역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신진 연구자들의 연구성과는 축적되고 있다. 일본군‘위안부’문제 공론화 이후로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지금, 이곳에서 젊은 연구자들이 던지고 있는 질문은 무엇일까. 웹진 <결>은 이들의 관점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어떻게 의미화되고 있는지 알아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좌담회 일자: 2022년 6월 22일 -사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이헌미, 황진경, 이안, 장소정 -대담: 백재예(University of Massachusetts-Amherst 정치학과 박사과정), 송혜림(연세대 비교문학 협동과정 박사과정), 전소현(성공회대 국제문화연구학과 석사과정), 정희윤(University of Massachusetts-Amherst 사학과 박사과정) Q. 증언을 생존자에게 직접 듣지 못하게 된 시대가 도래한 만큼 남겨진 연구자들의 몫이 분명히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위안부’ 문제에 있어 세대교체에 대해서도 계속 이야기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있으신지요. 정희윤 포스트 메모리 시대라고 무엇이 달라질까 싶습니다. 재현의 문제, 실증주의적 이해의 폭력, 증언자가 증언자일 수 있게 하는 언어의 부재 등 현재 제기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있는데요. 이는 ‘위안부’ 생존자들이 모두 돌아가신 이후에도 동일하게 잔존하는 문제 아닐까요. 그런데 이제는 다른 전장이 펼쳐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생존자들의 증언에 AI 기술을 결합하여 만든 작품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이 가치중립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으나, 그러한 증언의 전시가 정세나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이루어질 경우, 폭력적이고 위험한 작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증언 이후의 재현물들이 특정한 구성과 배치의 결과이고 어떤 면에선 의도된 것인 만큼, 그 재현들에 어떻게 개입하고 증언이 증언일 수 있게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송혜림 정희윤 선생님이 말씀하신 ‘인터랙티브 전시’에 다녀왔는데, 진화된 기술력과 이를 흡수하는 적극적인 시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형태로 기록되느냐에 따라 기록물의 성격과 파급력이 달라지기 때문에 시도 자체는 좋았지만,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전시 내용 중 하나를 예로 들면, 제가 할머니에게 ‘무슨 음식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나는 ‘위안부’로 있을 때 계속 굶었어’라는 엉뚱한 대답으로 이어졌어요. 현재보다는 과거에 대한 질문과 답이 더 많았죠. 우리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삶을 재현하거나 표상을 만들 때 여전히 과거의 경험에만 고착돼있고, ‘위안부’라는 경험 안에서만 이들을 보여주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것을 진지하게 문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위안부’ 운동을 포함해 증언을 다루는 사회적인 담론 자체가 과거 경험에 고착돼있고, 그들을 증언자로 호명하는 경험에만 천착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를 붕괴시키는 새로운 방식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전환의 이름으로 되어야지, 세대교체라는 말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전소현 증언을 해석하고, 다시 말하고, 듣고, 쓰는 과정은 계속해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할머님들이 돌아가신 후에도 계속되는 과정이라면, 왜 미래 세대의 문제로만 이야기되어야 하는가 의구심이 들어요. ‘내가 왜 위안부 문제를 계속해서 고민하지? 이것이 내 삶과 무슨 관련이 있지?’라는 의문에 도움이 됐던 게 영화 <보드랍게>(박문칠, 2022)였어요. 김순악 할머니의 이야기와 증언을 2010년대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통해 다시 들려주는 작품인데요, 할머니의 이름은 김순악이기도 하지만 마마상, 요시코, 위안부, 미친개, 순악씨, 깡패 할매, 술쟁이, 개잡년, 기생, 엄마, 사다코 등 굉장히 다양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보드랍게 아우르는 목소리들이 감동적이었어요. 개인 안에서 폭력의 경험이라는 게 매끄럽게 설명되기 어렵잖아요. 자기 안에 수많은 분열이 있을 것이고, 수많은 ‘나’가 충돌하는 경험을 하게 될 텐데, 그러한 경험들을 뒷세대 여성들이 다시 한번 이야기해주고 자기 삶과 공명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분열시키는 목소리에 맞서 스스로를 수용하고 말해내는 과정이 지금의 페미니즘 활동가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백재예 세대교체라는 것이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세대교체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앞서 말했을 땐 내부적 해체라고 표현했는데요, 운동과 학계를 구성하는 구심점, 가령 고착화된 논의나 주장, 접근 방식들이 분화되고 해체되는 방식으로 세대교체가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수정주의자들은 곡해와 오독을 통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왜곡하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내부적 해체를 통한 세대교체가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동안 축적된 증언과 자료들을 성실하고 면밀히 독해하는 것을 통해 이 운동을 왜 시작했고, 어디로 가고자 했는지, 즉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움직임이 지닌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열린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 그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할 수도 있고, 혹은 기존에 해왔던 것을 폐기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이야기를 종합하여 듣다 보니 ‘위안부’ 문제를 사회가 큐레이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대 전환 혹은 세대교체라는 말이 들려올 때 큐레이팅된 ‘위안부’ 문제를 해석/해체하는 과정이 필요해 보여요. 그렇다면 결국 진정한 전환이란 생물학적인 미래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시각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모두 학술 활동 외에도 다양한 외부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 문제의식이 어떻게 확장·연결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백재예 그동안 외부 활동을 따로 하지 않아서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해봤습니다. 그간 유학 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 중 하나가 ‘위안부’ 문제를 통해 동아시아의 역사와 인종·민족 문제 등의 교차 지점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일본군‘위안부’ 제도는 전시 성폭력이라는 보편적 카테고리나 일본의 특수한 식민지배와 같은 특수성에 집중한 용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층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적은 서구 학계에 이 문제를 설명할 때면 늘 파편화시키지 않고 전달하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보다 광범위한 대중이나 학계를 대상으로 ‘위안부’ 문제의 복잡한 고민거리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 토대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전소현 ‘위안부’ 문제를 공부하면서 화성외국인보호소 피해자 연대 시위에도 다녀오고, 장애 인권에 대해서도 많이 고민하게 됐어요. 외국인보호소 문제에서도 “한국이나 보호소 사람들은 보호라고 하지만 그건 보호가 아니라 감금이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걸 보면서 “‘위안부’들을 보호했다”고 하는 부정론자들의 말이 떠올랐어요. 장애인의 삶을 시설화시키는 언어들이 장애인을 자기 의사 결정이 없는 무력한 존재로 재현하곤 하는데, 그런 부분에서 ‘위안부’ 피해자나 젠더 폭력 피해 여성들을 무력한 존재로 바라보려고 하는 시각이 오버랩됩니다. 그런 점에서 ‘위안부’ 문제는 여러 사안이 겹쳐있는 문제이고, 다른 사회운동과 연계‧확장될 수 있는 지점이 많다고 생각해요. 송혜림 저는 스스로를 학술장에 있는 활동가로 정체화하고 싶어요. 현장에서 순간순간을 함께하고 물리적인 도움을 주는 것도 연대의 한 방식이지만, 책상 앞에서 필요한 말들을 계속해서 전달하고 외치려는 노력도 넓게 보면 외부적인 활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재는 사회적으로 재현되는 재료들로 만들어지는 증언자의 표상을 문제 삼는 조사를 하고 있어요. 영화나 문학, 언론 보도에서 증언이나 증언 과정이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고, 또 그 과정에서 내가 취해야 하는 자세는 무엇인지 분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법정을 자주 가게 돼요.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언어로서 증언의 기능을 가장 충실하게 강요하는 공간이 법정이기도 하고, 증언이 최종적으로 인정받는 곳이잖아요. 그래서 그 중요한 의미를 모두 가진 공간에서 증언자가 얼마나 잘 말할 수 있고 그들의 언어가 어떻게 들리는지에 대한 현장 조사를 하며 책상 앞과 법정을 오가고 있습니다. 정희윤 저도 외부 활동을 하지 못하는 아쉬움, 반성, 죄책감이 있지만 송혜림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책상머리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골과 관련된 인권 및 인종주의 담론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문제의식을 갖게 됐고, 과거청산 활동을 하며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우연한 계기로 조선인 강제동원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단체에서 일을 하게 됐는데, 희생자들을 서울로 봉환하는 일을 하며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강제동원의 문제는 노동착취의 문제이기도 하고 현재로 끌어올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은데 ‘일본 놈들 나쁜 놈들’로 귀결되는 비극적인 현상과 사회의 묘한 큐레이션에 대해 고민하게 됐습니다. 뼈가 갖는 강력한 의미가 있고, 모두가 뼈를 보면 외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뼈는 끊임없이 불화를 낳거든요. 어떤 곳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윤리적인 문제를 불러일으키고요. 뼈는 사람인가, 이것에 오늘날의 국적을 부여하는 방식이 가능한가, 망자에 대한 인권은 어떻게 고민할 것인가 등의 문제를 야기하면서 우리 사회의 윤리를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뼈라는 기억장치-매개에 관심을 갖게 됐고, 그러면서 ‘위안부’ 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어요. ‘위안부’ 문제는 늘 논란과 윤리적 불화의 최전선에 있기 때문인데요.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와 같은 문제를 보며 실증에 갇히지 않으려면 해석 싸움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게 됐고, 뼈를 통해 오늘날 이 사회에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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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자료해제 미 전시정보국 49번 보고서, 작성자의 주관적 편견이 투영된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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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에 관한 미국보고서 자료해제 1부. 연합군번역통역부(ATIS) 조사보고서 제120호 2부. 연합군번역통역부(ATIS)가 생산한 포로 심문보고서 3부. 미 전시정보국(OWI) 49번 보고서 4부. 동남아시아 번역통역부(SEATIC) 심문회보 제2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서 일본군'위안부' 전쟁범죄 자료집 전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링크이동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일본군'위안부' 전쟁범죄 자료집 미 전시정보국(OWI) 49번 보고서의 특이성 이 보고서는 미 전시정보국(OWI, Office of War Information) 심리전 팀이 생산한 심문 보고서로 연합군 번역통역부(ATIS)의 제120호 조사보고서와 함께 연합군의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이다. 보고서는 버마(현재 미얀마) 북부의 미치나(Myitkyina) 지역에서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 20명의 심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20명이나 되는 ‘위안부’가 한 번에 포로가 되어 심문 보고서까지 남긴 경우로는 유일한 사례이다. 연합군 측에서도 최일선 전장에서 정체불명의 젊은 여성 20명이 포로로 잡힌 상황을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따라서 전담 심문관을 배치하여 20여 일에 걸쳐 자세한 심문 보고서를 작성하게 한 것이다. 이 문서가 유명해진 이유는 문서 자체의 희귀성과 특이함에만 있지 않다. 이 문서는 ‘위안부’들의 삶과 존재에 대해 주관성이 강한 평가를 하고 있다. ‘위안부’들에 대해 ‘일본인과 백인의 관점에서 예쁘지 않다’고 한다거나 ‘유치하고 이기적’이라고 하는 등 지극히 주관적으로 평가한 대목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 또한, ‘위안부’들의 삶이 비교적 풍족했고 버마 다른 지역에 비해 사치스러울 정도(near-luxury)였다고까지 했다. 이러한 내용은 ‘위안부’ 문제에 적대적인 세력과 개인에게 매력적인 요소로 여겨졌고, 일본의 극우세력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이 자료를 근거로 ‘위안부’ 문제를 공격해왔다. 그러나 이 문서는 상당히 조심스럽게 이해해야 한다. 내용만 피상적으로 검토해서는 이 문서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문서를 생산하는 과정은 물론이고 생산자, 즉 조선인 ‘위안부’ 20명을 심문한 인물의 특성 등을 세심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 문서는 다른 여타 심문 보고서와 달리 문서 작성자의 주관적 편견과 느낌이 과도하게 투영되어 있다. 다른 보고서들은 건조한 문투로 사실관계를 서술하는 것이 일반적인 데 반해 이 문서는 굳이 심문자의 느낌이나 견해가 곳곳에 들어가 있어 상당히 특이한 사례이다. 그렇기에 논란이 될만한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자료와의 교차 검토 등을 통한 충분한 검증이 필요하다. 특히, 이 문서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에 더욱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뒤틀리게 이해하고자 하는 세력들에 맞서 이 문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문서를 통해 위안소와 ‘위안부’에 대한 보다 정확하고 풍부한 사실관계를 규명하는 것이다. 49번 보고서의 특이성을 잘 이해하고 분석해야 하는 이유 이 문서는 버마 미치나 지역에서 조선인 ‘위안부’ 20명이 포로가 된 것을 계기로 생산됐다. 1944년 8월 10일 미치나 인근에서 포로가 된 ‘위안부’들은 미치나 비행장에 임시로 수용되었다가 8월 15일에 인도 레도(Ledo) 기지로 이송되었다. 본격적 포로 심문은 8월 20일부터 9월 10일까지 20여 일 간 진행되었다. 그런데 보고서가 완성된 날짜는 10월 1일이었다. 이는 심문이 끝난 다음에도 20일가량 추가적인 조사나 심문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40일 정도가 전체 조사 기간이었다고 하겠다. 이는 매우 이례적으로 긴 심문과 조사 기간이었음이 분명하다. 당시 심문관과 같은 부대에 근무했던 동료의 증언에 따르면 다른 부대원들이 매우 바쁜 와중에도 ‘위안부’ 심문 담당자는 20명의 여성만을 전담하고 있어 상당히 불쾌했다고 한다. 즉 당시 레도 기지의 미군 심리전 팀은 ‘위안부’ 심문과 조사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음을 알게 해준다. 49번 보고서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심문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이 문서는 조선인 ‘위안부’ 20명의 발언과 증언이 직접적으로 기록된 형식이 아니라 문서 작성자가 20명의 심문기록을 종합해 별도의 보고서를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심문보고서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한 명의 포로를 집중적으로 심문하여 기록한 경우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여러 사람의 심문기록을 종합하여 보고서가 작성되기도 한다. 어쨌든 포로들의 발언과 증언이 그대로 보고서에 실리는 경우는 드물다. 필요에 따라 직접 인용되는 문구가 있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고서는 심문관이나 문서 작성자의 분석과 판단을 거쳐 작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문서의 작성자는 알렉스 요리치(Alex Yorichi)다. 이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2차대전 시기 미 서부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 이주민들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 루스벨트 정권은 2차대전에 참전하면서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계 이주민을 강제 수용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동부의 독일과 이탈리아계 이주민에 대해서는 이주 기간도 오래되었고 동일한 코카시안 계열이라 분리해내기도 쉽지 않아 수용정책은 사실상 유야무야되었다. 그러나 서부지역 일본인 이주민은 대대적으로 강제 수용되었고 그 피해가 상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칭 니세이(Nisei)로 불리는 일본 이주민 2세들이 미군에 대규모로 자원입대하게 된다. 가족들이 강제수용되어있는 상황 속에서 미국의 시민임을 증명하기 위해 가장 확실한 방법이 곧 군인이 되어 참전하는 것이었다. 유럽 전선에는 니세이만으로 구성된 전투부대가 참전하여 상당한 전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아시아 태평양 전쟁은 일본을 상대로 한 것이었기에 독립적인 전투부대 편성은 없었다. 대신 니세이들은 심리전, 포로심문 등에 집중적으로 투입되었다. 알렉스 요리치는 이러한 니세이 중의 하나였다. 이들의 심리상태는 매우 복잡했다. 자신의 모국과 현 거주국 사이의 전쟁으로 가족들은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고 자신들은 모국과의 전쟁에 직접 참여해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이었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이 심문관들의 정체성을 일차적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이들이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미국 쪽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지향했던 것은 분명하다고 보인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 사이의 식민-피식민 관계에 대한 인식이나 입장은 분명치 않다. 코카시안과 일본인의 입장에서 ‘위안부’들을 평가하는 것을 보건대, 요리치가 자신을 일본인으로 인식하고 있었음도 분명해 보인다. 요컨대 요리치는 미국 군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함께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하겠다. 이러한 복합적 정체성이 요리치가 조선인 ‘위안부’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규정했을 것이다. 그 시선이 ‘위안부’들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음은 보고서 내용이 잘 보여준다. 요리치의 태도는 레도 기지 심리전 팀의 또 다른 아시아계 요원이었던 원 로이 챈(Won Loy Chan)과도 대비된다. 챈은 중국계 미군 대위로 스탠포드 대학을 나온 엘리트 장교였다. 그가 쓴『Burma: The Untold Story』에는 자신이 만났던 미치나의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깊은 연민이 잘 드러나 있다. 원 로이 챈과 니세이들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다고 한다. 원 로이 챈은 장교였고 니세이들은 대부분 사병이었다. 요리치는 나중에 장교가 되어 소령으로 전역하였지만 2차대전 당시에는 사병이었다. 이러한 계급 차이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이라는 모국의 차이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는 미군 속의 중국계와 일본계의 차이가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태도의 차이와 무관치 않다고 보인다. 49번 보고서의 내용을 이해할 때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보고서가 조선인 ‘위안부’들의 목소리를 직접 반영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언어 문제였다. 즉 요리치는 일본어와 영어는 가능했지만 한국어는 전혀 몰랐고 ‘위안부’들은 일본어에 서툴렀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19세에서 31세 사이의 조선인 ‘위안부’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고 무지하다고 했다. 또한 ‘위안부’들의 한국 이름이 영어로 채록되어 있는데, 소리 나는 대로 받아 적었다고 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보면 ‘위안부’들의 일본어가 유창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결국 심문은 마마상, 파파상으로 불렸던 위안소 업자들을 통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기타무라(Kitamura, 北村) 부부가 조선인 ‘위안부’들의 업주였는데, 이들이 통역 겸 대변인 역할을 했다고 보인다. 위안소 업주가 ‘위안부’들을 대변했다면 그 내용이 업주에게 유리한 것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렇게 심문관과 심문 과정의 특이성을 잘 이해하고 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분석해야 할 것이다. ‘위안부'에 대한 주관적 편견이 가득한 보고서 49번 보고서는 서문, 모집(recruiting), 성격(Personality), 생활 및 노동조건, 요금체계, 이용 일정, 보수와 생활 조건, 일본군에 대한 반응, 군인의 반응, 군사 상황에 관한 대응, 후퇴와 포획, 선전, 요청 등의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위안부’ 20명의 한국 성명 명단과 위안소 업주 부부의 이름이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다. 본문 6쪽과 부록 1쪽을 합쳐 총 7쪽 분량이다. 보고서 서문에서는 ‘위안부’를 병사들을 위해 일본군에 배속된 창기(prostitute)라고 단정했다. 모집 부분에서는 1942년 5월 초, 일본인 업자들이 동남아시아의 일본군 "위안 서비스"(comfort service)를 위해 조선인 여성들을 모집하기 시작했음을 설명했다. 업자들이 사용한 방식은 일종의 사기술에 가까웠다. 즉 업무는 병원에서 부상병들을 돌보는 일로 둘러댔고 싱가포르에서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고 설득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돈이었다. 가족의 빚을 청산하고 많은 돈을 벌 수 있음을 강조했다. 여성들 대부분은 무지하고 무학이라고 했으며 몇몇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의 종사자였음을 밝혔다. 그러나 대부분은 처음으로 ‘위안부’가 되었다고 했다. 전체 규모는 대략 800여명 정도였고 8월 20일 즈음에 랭군에 도착하였다. 도착 이후 8명에서 22명 사이 그룹으로 나뉘어 버마의 여러 곳으로 배치되었다. 이들 중 네 그룹이 미치나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쿄에이, 킨스이, 바쿠신로, 모모야가 그것이었다. 일부 편견과 주관적 평가 부분을 제외한다면 이 자료는 위안소 운영과 ‘위안부’들의 삶에 대해 비교적 많은 정보를 제공해준다. 위안소 운영 시간과 요금체계는 물론이고 ‘위안부’들의 수입에 대한 구체적 정보도 있다. 물론 ‘위안부’들의 수입은 업자와 분할해야 했고 자신들의 몫은 50~60% 정도였다. 위안소를 이용하는 일본군들의 반응도 나타난다. 일본군 중에는 줄 서서 위안소를 이용하는 것에 수치감을 표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작성자의 편견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이 보고서의 편견과 문제점은 다음에 소개할 동남아시아번역심문센터(SEATIC)가 작성한 심문회보 제2호의 내용과 비교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미치나의 조선인 ‘위안부’ 20명의 사례는 일본군 위안소 제도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였기에 다양한 문서들에서 다루어졌다. 요리치가 작성한 보고서와 달리 SEATIC 심문회보 2호는 사실관계 중심으로 건조하게 서술되었다. 어쨌든 요리치 보고서는 조선인 ‘위안부’가 “무학이며, 유치하고 이기적”임을 강조했는가 하면 “자기중심적”이며 "여자의 속임수를 알고" 있다고도 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심문관 요리치의 편견과 주관적 평가가 두드러진 대목이다. 편견은 ‘생활 및 노동조건’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요리치는 미치나의 조선인 ‘위안부’들이 다른 곳에 비해 호사스러운 수준으로 살았다고 했다. 특히 2년째 생활이 그러했다고 강조했다. 물건을 구매할 충분한 돈이 있었고 위문대를 받은 병사들로부터 선물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또한 ‘위안부’들이 체육대회나 각종 소풍, 오락, 사교 행사 등에 참가하여 즐겼다는 기록도 남겼다. 이러한 진술이 ‘위안부’들에게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위안소 업자들에게서 나온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어쨌든 요리치가 보기에 ‘위안부’들의 삶이 빈곤과 물자부족으로 고통을 겪는 수준은 아니었음을 강조한 셈이다. 그러나 이는 일면적인 파악이다. 일본군의 버마 점령 초기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미치나 지역을 점령한 일본군은 지역의 모든 물자와 설비를 매우 용이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것은 위안소로 사용되었던 학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위안소로 사용된 학교는 애초 미국 선교사가 운영하던 미션 스쿨이었으며 심지어 목사 사택까지 위안소로 사용하였다. 미션 스쿨을 징발해 위안소로 이용할 정도로 일본군의 위세는 거침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위안부’들에게 일정한 물질적 재화를 보장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것은 불과 1년 남짓한 기간이었고 1944년 중반부터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면서 ‘위안부’들의 삶과 운명은 급전직하했다. 후퇴하면서 ‘위안부’들은 3시간의 시차를 두고 일본군을 따라갈 것을 명령받았으며 그 와중에 전투에 휘말려 사망자가 나오기도 했고 전투가 치열한 상황에서도 ‘위안부’ 업무를 수행해야만 했다. 특히 ‘위안부’들은 포로가 된 이후 자신들이 생포된 사실을 일본군에 알리지 말 것을 요청했다. 그 이유는 다른 부대의 ‘위안부’들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항복과 생포되는 것을 극단적으로 부정했다. 따라서 전투원이 아닌 ‘위안부’들조차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매우 큰 위험에 노출될 수 있었다. ‘위안부’들이 일정 기간 물질적으로 열악하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거나 일본군의 각종 모임에 참여했다는 점 등은 사실 지엽적인 문제들이다. 주인의 재산인 노예들도 안정적인 노동력 확보를 위해 기본적인 의식주가 제공되었다. 즉 더 큰 이익과 욕망을 위해 노예들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이 주인에게는 바람직했다. 일본군의 성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설치된 위안소와 ‘위안부’들 역시 일본군의 만족을 극대화하기 위해 가급적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했을 뿐이다. ‘위안부’들이 항상적으로 기아선상에서 헤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위안소 제도의 비인간성과 ‘위안부’들의 고통을 부정하는 것이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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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인터뷰 기억해야 할 첫 발걸음, 1세대 연구자를 만나다 - (2) 송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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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연옥 (문화센터 아리랑 관장 / 아오야마가쿠인대학교 명예교수)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 명예교수. 재일조선인으로서 일본에서 식민지 역사와 여성사의 기틀을 마련한 연구자로서 일본군‘위안부’문제의 진상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주요 저서로 『군대와 성폭력』, 『동아시아 일본군 위안부 연구(공저)』, 『한국 여성사 연구 70년(공저)』, 『식민주의, 전쟁, 군 ‘위안부’(공저)』, 『동아시아의 전쟁과 사회(공저)』 등이 있다. Q. 송연옥 선생님에 대해 잘 모르는 웹진 결 독자분들을 위해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1947년에 태어난 재일조선인 2세입니다. 국적은 한국이지만 교육은 일본 교육기관에서만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국의 언어인 일본어가 저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모어가 되겠지요. 식민주의가 신체화된 일상을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대학교를 졸업했을 시절, 민족 차별 때문에 재일조선인은 사회적으로 배제되어 있었어요. 그런 역사적인 배경을 알고자 한국에 민족사를 배우러 갔는데, 당시 조국의 정치적인 계절은 겨울이었습니다. 서울에서 대학원 석사과정을 다 마치지 못한 채 일본으로 돌아왔고, 다시 한국에 가게 된 건 1992년부터입니다. 역사 연구를 단념한 시기도 있었으나, 50세 때 도쿄에 있는 아오야마가쿠인대학교 교수로 채용되어 그 후에는 제대로 연구할 수 있게 되었어요. Q. 처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대학교를 졸업한 몇 년 후에 센다 카코(千田夏光)의 『종군위안부(従軍慰安婦)』(双葉社, 1973)를 읽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읽고서 큰 충격을 받았으나, 센다의 책에는 여성주의적인 시각은 약했어요. 그래서 언젠가 ‘위안부’ 피해자의 한을 푸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막연한 바람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러나 그 당시는 피해를 당한 당사자가 한국에 살아 계시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고 대부분이 전쟁터에서 죽거나 버려졌을 걸로 생각했었습니다. Q. 선생님께서 그동안 진행하셨던 일본군‘위안부’와 관련한 연구들을 소개해주세요. 『개벽』77호(1948년 2,3월호)에 최정석이란 사람이 쓴 ‘해방되는 창기 5천명’이란 글이 있는데 그걸 보고 일제시대에 대한 인식을 달리했습니다. 글의 앞부분에 ‘일제가 여성에 관해서 이 땅에 남긴 해독이 두 가지 있으니 하나는 공창제도(公娼制度)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봉건적인 노예여성관을 유지, 연장시킨 것이다’란 구절이 있었습니다. 물론 최정석은 ‘위안부’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포함해서 공창제를 ‘日帝(일제)의 搾取(착취)와 이 땅의 社会悪(사회악)을 가장 醜悪(추악)한 가운데 가장 端的(단적)으로 나타내는 実証(실증)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본군‘위안부’제도가 1932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일제가 조선 여성의 성적인 신체를 유린·착취하고, 가난한 여성들을 인신매매한 것은 훨씬 이전부터 진행된 거잖아요. 개항 이후의 일제 침략 과정을 보고, 최정석의 글을 해독한 후 일제가 식민지지배 정책으로 이용한 공창제를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연구를 하다 보니 식민지 조선에 적용된 공창제는 일본에서의 공창제와 같은 명칭이 쓰이지만, 그 내용은 일본 공창제보다 업자들에게 더 유리하게, 여성들에게는 더 불리하게 만들어졌더라고요. 이러한 식민지 공창제가 ‘위안부’제도의 전제가 되었다는 연구를 해왔습니다. Q.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조선인으로서 일본군‘위안부’를 연구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는 ‘위안부’문제를 연구과제로 하면 일본인이라도 대학 교수로 채용되기가 어렵다고 해요. 반일 사상의 소유자란 낙인이 찍히는 거지요. 제가 1993년에 조선사연구회 대회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국가적 관리매춘’이란 제목으로 발표를 한 적이 있어요. 연구한 결과, 중일전쟁 시기에 조선인의 성매매업 종사율이 높아진 결론을 얻었어요. 그것은 조선인이 전쟁 체제에 휘말려 들어 간 것을 증명한 건데, 제 발표를 들은 한국 남자 유학생이 저에게 막 비난하는 말을 퍼부었어요. 제가 하고자 하는 취지를 단순하게 오해한 거였지만, 그런 식의 민족주의에 회의를 느낀 것도 사실입니다. 해방 후에도 일본에 사는 재일조선인은 민족 차별 속에서 3D 노동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면 그런 반응은 이해하기가 어렵네요. Q. 연구하시면서 만났던 ‘위안부’피해자 중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이 계신가요? 1992년 8월 말, 한중국교가 체결되기 직전에 중국 목단강까지 가서 김순옥 할머니(1922~2018)를 만났어요. 김순옥 할머니의 존재는 우연히 알게 됐어요.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있는 시민단체 사람들이 조사차 러시아 국경에서 가까운 둥닝(東寧)까지 간 적이 있었어요. 예전에 일본 병사였던 사람이 안내를 해줬죠. 조사 마지막 날에 마을 노인이 ‘카이코’라는 여자가 옛날에 ‘위안부’였다고 가르쳐줬어요. 그런데 그때만 해도 중국 여행이 어려울 때라 귀국 날짜를 연기할 수가 없어서 당시 일행은 숙제를 남긴 채 그냥 돌아왔어요. 이후, 저와 김영희씨가 연변대학 임희준 교수님의 도움을 받고 둥닝까지 조사하러 갔는데, 옌지(吉林)에서 둥닝까지 가기도 쉽지 않았어요. 10시간이나 택시를 달려서 저녁에 간신히 도착했죠. 그런데 할머니는 집에 안 계시고 목단강에 있는 딸 집에 갔다는 거예요. 할 수 없이 그날은 둥닝에서 숙박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목단강으로 출발했어요. 중국이 얼마나 넓은지 실감했어요. 도로가 포장되어 있지 않아서 장거리 이동만으로도 너무 지쳤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김순옥 할머니를 만났을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할머니한테도 저희들이 외부에서 처음으로 찾아온 동포였는지라 정말 기뻐하시고 오랜만에 만난 친척처럼 대해주셨어요. 딸한테도 얘기 못 했던 아프고 쓰라린 경험을 한꺼번에 쏟아내듯이 얘기 해주셨던 추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만나 뵈니까 ‘카이코’의 수수께끼도 풀렸어요. ‘카이코’는 카요코란 일본 이름으로 위안소에서 붙여진 것이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할머니를 그렇게 불렀답니다. 동네 사람들이 ‘카이코’라고 부를 때마다 할머니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하니 착잡하기만 합니다. Q.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조선인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분단국가인 대한민국 연구자의 시각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일본 교육기관에서만 배운 재일조선인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일본을 평가하는 눈이 냉철하다는 겁니다. 일본 역사학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일찍 지적해왔습니다. 일본에선 1931년부터 1945년까지 15년간의 전쟁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만,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제가 15년 전쟁이 아니라 50년 전쟁이라고 주장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입니다. 그리고 분단된 현실에서 어쩔 수 없으나 북한을 바라보는 시선이 과소평가에서 과대평가까지 눈높이가 안정되지 못하고 있으며 ‘위안부’ 연구에서도 그것을 느낍니다. Q. 일본군‘위안부’를 둘러싼 여러 문제 중에서도 선생님께서 주목 혹은 집중하고자 하셨던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제가 상해 위안소에 관한 연구를 한 결과 얻은 결론은 상해와 같이 전쟁터였다가 점령지가 된 지역은 위안소를 중심으로 다양한 성매매업이 확대·번창했다는 거예요. 성매매 요리점은 위안소를 보완하고 또 국가가 개설한 위안소가 있으므로 다른 성매매업도 대의명분을 얻어 서로가 번창하는 그런 전쟁 사회상을 더 밝혀야 해요. 공창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은 시기와 지역에 따른 실태를 파악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다고 봅니다. 또 지금 일본에서 ‘위안부’제도와 구별해서 공창제를 정의하는데 시민법, 평시, 폐창의 규정을 그 근거로 들지만, 과연 일제강점기 조선은 시민법이 적용된 평시였을까요? 그런 공창제 정의는 식민주의와 전쟁 사회사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Q. 연구자 혹은 개인으로서 선생님의 인생에서 ‘위안부’ 연구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일본군‘위안부’ 연구를 놓지 않고 끊임없이 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저는 재일조선인 여성으로서 살아오는 과정에서 성차별, 민족 차별, 계급차별을 복합적으로 경험했고 정신적인 상처도 깊이 입었습니다. 이런 복합적인 차별의 상징이 ‘위안부’문제라고 생각해요. 문제의 뿌리인 식민주의는 최근에 일본 사회에서 나타난 헤이트 스피치와도 상통합니다. 아직 해결되지 않고 저희를 일상적으로 괴롭히고 있으니 건전한 사회를 만들려는 희망으로 연구를 놓칠 수가 없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다양한 학문적, 사회적 이슈 중에서도 (대한민국 내에서) 가장 민감한 최전선의 이슈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후학들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방향으로 연구를 더 확장해가면 좋을까요? 연구하는 후학들을 위해서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위안부’문제는 많은 증언과 연구,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이 있었음에도 아직 낡은 담론과 틀 속에 갇혀있는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공창제와 ‘위안부’ 제도를 연결하여 보는 것을 꺼리는 사람이 많지만, 공창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공창제와 ‘위안부’ 제도를 시기와 장소에 따라 구체적인 실상을 밝힐 연구가 앞으로 많이 나와야 합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이 인식하고 있는 보편적 이슈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감정적 층위에만 머무르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데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위안부’ 문제에 한해서 말씀드린다면 민족적인 시각은 강해도 여성적, 계층적인 시각을 복합해서 보는 것은 아직도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국민 통합을 위한 해방 후에 만들어진 민족주의도 강하고요. 역사학계에선 친일이냐 항일이냐 하는 2항 대립적인 단계를 넘어선 연구가 많이 진척되었으나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대중적인 시선에 관해서는 그런 성과가 잘 반영되어있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일제강점기 사회사 연구가 더 다양하게 진전되어야 하고 일본의 침략전쟁 하에서 국내외에서 생활한 동포의 실상이 더 많이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은 아직까지 성매매에 대한 표리일체로 된 호기심과 멸시감, 혐오감이 강한 사회입니다. 공창제 운운할 때 나오는 거부감도 여기서 나옵니다. 그래서 여성주의적인 가치관을 더 일상화해야 하고 성적인 권리가 존중되는 사회여야 합니다. Q. 위와 같은 상황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 연구소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역사학을 전공하는 저로서는 ‘위안부’ 문제를 식민주의와 침략전쟁이 낳은 문제이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문제로 봐야 한다고 조언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위안부’ 제도를 낳은 배경, 즉 식민지 지배하 조선의 사회와 경제 상황을 지방마다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파고 들어가는 연구가 나와야 합니다. ‘위안부’ 문제만 보면 정치적인 담론의 영향을 받아서 오히려 실증적인 연구가 소외될 우려도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구조적으로 중첩적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선 중국에 있는 자료도 계속해서 발굴·수집해서 그 성과를 널리 공개해 젊은 연구자들을 양성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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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인터뷰 '위안부 역사관'은 역사 부정 세력 극복하는 장기 처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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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 이경희 대표 사기, 날조, 조작. 일본군'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부정하는 담론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2023년 9월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산창원진해시민모임이 개최한 국제토론회는 이러한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역사 부정 현상'에 맞설 수 있는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국제토론회 전 과정을 이끈 마창진시민모임 이경희 대표에게 토론회의 주요 내용을 들었다. “중등학교 역사 선생님 그룹과 친해요. 제대로 가르치려고 열심히 공부하는 교사들인데,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돼 함께 해온 시간이 꽤 쌓였어요. '위안부' 수업 지도안을 만들어 활용하고, 저희 단체 청소년교육프로그램 활동에도 적극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이분들이 놀라운 얘기를 해요. 일제 강점기 역사를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위안부'나 강제동원을 주제로 자료 조사 과제를 내곤 하는데, 완전히 왜곡된 사실을 발표하는 학생이 많다는 거예요. 역사 부정 세력들이 유포해온 오염된 정보가 인터넷에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는 현실이 정말 심각합니다.” 왜곡 정보 발표하는 학생들, 역사 부정 대응 국제토론회 경남여성단체연합 대표로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 지원 활동을 시작한 때가 2004년, 햇수로 20년 넘게 현장의 여성인권활동가로 활동해온 이경희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산창원진해 시민모임(이하 마창진시민모임) 대표의 얼굴 가득 걱정과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교사들의 '고발'처럼 '위안부'의 피해 자체를 거짓이나 조작으로 몰고가는 잘못된 정보가 일상에 넘쳐나는데 반해 최근 몇 년 사이 우리 사회의 대응은 눈에 띄게 소극적으로 바뀐 것이 사실이다. “코로나사태로 교류는 줄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위안부' 문제 해결에 앞장서 온 시민사회계에 대한 의혹과 갈등이 불거지고 '마녀사냥식' 언론 보도가 쏟아지다보니 '위안부' 해결 운동이 뿌리부터 흔들렸어요. 이를 계기로 '위안부' 문제와 그 해결 운동의 역사를 뒤집으려는 세력들의 움직임은 점점 노골적으로 바뀌고 있고요. 수요맞불집회는 멈출 기미가 없고, 토론회 며칠 전에는 서울 한복판에서 한일 극우 인사들이 '위안부는 사기극'이라며 심포지엄까지 열었잖아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 함께 머리를 맞대는 자리가 절실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고민이 구체화된 자리가 지난해 9월 20일 마창진시민모임이 개최한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부정 현상에 대한 대응방안 모색' 국제토론회였다. 기획부터 섭외, 실행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아우른 이 대표는 토론회에서 접한 역사 부정 행태가 '세계적'이고 매우 치밀하게 이뤄지고 있어 놀랐다고 설명했다. 일본의 방해로 '망명 신청자' 상태인 소녀상 “일본의 집요한 방해는 상상 이상이에요. 기시다 총리, 나고야 시장 등 일본 고위 관료들의 항의부터 지역 영사관이나 대사의 직접적인 로비, 여기에 대학 교수와 학자들, 각국 현지에 나가 있는 일본 기업과 시민단체까지 개입해 다각도로 압력을 행사해요. 국경을 초월해 전시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과 인권의 상징이 된 '평화의 소녀상'을 설치한 독일 베를린 미테구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초기에도 일본의 항의로 철거 위기에 내몰렸다가 베를린코리아협의회 등 재독 시민단체와 지역사회, 전문가들이 반발하고 철거 명령 효력 정지 가처분신청을 제출하는 등 강한 대응으로 존치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오는 9월 다시 철거 압박이 예상돼요. 줌(zoom)을 통해 독일 상황을 전해주신 한정화 베를린코리아협의회 대표이사는 소녀상이 체류 허가가 발급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관용되는 '망명 신청자' 상태라 표현하며 서글퍼하셨어요.” 일본 내 역사 부정 분위기는 1991년 당시 김학순 할머니의 역사적인 증언을 아사히 신문에 특종 보도했던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에 대한 우익의 공격에서 잘 드러난다. 현재 '주간금요일' 발행인인 우에무라 씨는 아베 신조 정권 시절인 2014년 1월 역사수정주의자들로부터 날조라는 공격을 받았고, 이후 딸을 해치겠다는 협박까지 받는 등 곤욕을 치러왔다. 글렌데일시 소녀상 영구 설치, 필라델피아엔 새 소녀상 토론회에서는 인권과 존엄성을 믿으며 연대해온 글로벌 시민들이 값진 결실을 맺고 있는 사례도 소개됐다. 대표적인 곳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쪽에 위치한 글렌데일시. 2012년 '미국 연방회의 일본군'위안부' 사죄 결의안(HR121)'이 통과된 날을 기념해 7월 30일을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제정한 글렌데일시는 2013년에는 글레데일 중앙도서관 공원에 '평화의 소녀상'도 세웠다. 이듬해 철수 소송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글렌데일시가 3년 동안 적극적으로 대응해 소녀상을 영구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글렌데일 소녀상은 여러 차례 훼손을 당했으나 2020년 12월 보수작업을 마쳤고, '소녀상 지킴이' 시민 모임도 만들어져 잘 보호되고 있다. 필라델피아에는 8년여 노력 끝에 새로운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질 예정이다. 필라델피아 평화플라자위원회가 주축이 돼 추진한 소녀상 건립 계획은 2021년 필라델피아 예술위원회로부터 승인받은 데 이어 2022년에는 두 차례 타운홀 공청회를 거쳐 확정됐다. 이어 2023년 7월에는 필라델피아 예술위원회가 기림비 문구까지 정해 기대를 모으고 있다. 또 남부 도시인 텍사스 달라스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 알리기 활동을 펴고 있는 박신민 '잊혀지지 않는 나비들' 대표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보수적인 분위기가 강한 달라스에서 박 대표는 2015년부터 일상적으로 '귀향', '주전장' 등의 영화 상영회를 개최하고 소녀상을 재현하거나 나비팔찌 등을 만들어 나누는가 하면 2019년부터는 '세계 위안부 기념일' 행사도 이끌고 있다. 기록과 기억, 교육이 어우러지는 '위안부 역사관' 이후 토론회는 자연스레 대안 찾기로 연결됐고, 이경희 대표가 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제기해온 '일본군'위안부' 역사관' 건립은 공감의 폭이 가장 컸던 주제였다. “경상국립대 김명희 교수님도 기조 강연에서 강조하셨는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부인하는 담론이 일본 정부와 우파의 외교 전략을 통해 전세계로 확장되는 양상이잖아요. 그래서 피해자들의 피해와 상처를 오롯이 기록하는 일, 인권과 역사적 교훈을 계속 기억하고 교육하는 작업은 문제 해결 노력의 출발점이자 궁극적인 지향점입니다. 답답한 건 이를 제대로 가르치고 소통할 수 있는 공식적인 체계가 없는 현실이에요.” 경남 지역 시민사회계가 위안부 역사관을 지속가능한 대안으로 추진해온 배경이다. 물론 이 대표는 지난 4~5년 동안 누구보다 격렬한 부침의 중심에 있었기에 역사관 건립사업이 녹록치 않은 목표임을 잘 안다. 애초 경남도 차원에서 추진 계획이 마련됐다가 타당성 조사가 다시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미뤄지더니 조사 결과 '경제성이 부족하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현재 역사관 건립 계획은 좌초된 상태. 그런데 이 대표는 의외의 대상으로부터 '힘'을 얻었다. 토론회에 참여한 일본 참가자들이 보낸 연대의 목소리였다. “2005년 일본 시민들의 지원과 참여로 개관한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 이하 WAM)'은 '위안부' 문제에 집중하는 일본의 유일한 박물관이에요. 와타나베 미나 사무국장이 토론회에 참석해 특별 전시를 비롯해 위안소 지도 등의 다양한 데이터베이스를 꾸준히 업로드하고, 1990년대 중·고등학교 역사 및 사회과학 수업에서 사용된 500여 종의 교과서를 대상으로 한 연구 등을 공개하는 등 활동 반경을 넓혀온 WAM의 경험을 전했습니다. 일제 치하 '위안부'와 관련된 기억과 기록을 보존하고 알리는 공동의 목표를 언급한 와타나베 사무국장은 또 고개를 드는 역사 수정주의와 부정주의에 대해 정보 공유와 연대를 통해 맞설 때라고 강조하면서 어떻게 하면 '마창진 '위안부' 역사관' 건립에 도움이 되겠느냐고 진지하게 물어 왔어요. 우에무라 전 기자께서도 모금운동을 해주겠다고 하시고요. '위안부' 해결 운동이 더 어려운 지역사회에 정말 기운 나는 말씀이었습니다.” '위안부' 역사 교육 조례 제정도 과제 국제토론회 이후 마창진시민모임과 경남 지역 시민사회계는 곤경에 처한 일본군'위안부' 역사관의 미래를 다시 차근차근 살펴보고 현실적인 추진 방향을 논의하고 있는 중이다. 이 과정에서 이 대표가 비중 있게 고민하는 대안으로는 체계적인 일본군'위안부' 역사 교육도 포함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성평등 사회와 안전한 근로 환경 조성을 위해 연 1회 이상 전 직원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성희롱 예방교육'처럼 공교육 영역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배울 수 있도록 자치단체 차원의 조례를 제정하는 일이다. 또 지역의 시민단체가 감당하기엔 적잖이 버거운 행사지만 특별한 경험을 선물했던 '국제청소년캠프'를 재개하는 일도 과제 중 하나이다. 필리핀, 미국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온 청소년들과 경남 지역의 교사와 학생이 인권과 평화를 주제로 어우러진 캠프는 코로나사태로 오도가도 못한 2021년과 2022년에 온라인 캠페인으로만 진행돼 아쉬움이 컸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요즘도 언제 다시 캠프를 여느냐 문의를 해온다. 요즘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난 경남 지역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의 만남을 기록화할 방법도 고민하고 있다는 이 대표는 현장을 떠나는 순간까지 '소리 내는 일'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며 웃음을 지었다. “피해 할머니 대부분이 돌아가신 '포스트 할머니 시대', 역사 주체로서 우리는 여전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피해의 연장선상에 있잖아요.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위안부' 문제를 발화하는 것, 후속 세대가 계속 기억할 수 있는 기반이라도 만들어놓는 게 저의 소명입니다.” Credit 인터뷰어: 손정미 인터뷰이: 이경희 마창진시민모임 대표 글/정리: 손정미 사진 : 팝콘(popcon) 인터뷰 일시: 2024년 5월 3일 금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