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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편집회의 1부 - '위안부' 문제를 통해 무엇을 사유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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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의 발행을 앞두고 10인의 편집위원이 모여 웹진의 앞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2019년 1월 31일, 2월 25일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편집위원 좌담회는 지금껏 '위안부' 문제가 논의되어온 방식과 한계, 그리고 앞으로 웹진 <결>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자리였다. 권명아 (동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김헌주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 소현숙(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연구팀장) / 여순주 ((전) 한국정신대연구소 연구원) / 윤명숙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조사팀장) / 이선이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 임경화 (중앙대 중앙사학연구소 연구교수) / 조경희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 / 정용숙 (중앙대 독일유럽연구센터 연구교수) / 허윤 (부산외대 만오교양대학 교수) 편집회의 1부 - '위안부' 문제를 통해 무엇을 사유할 것인가 편집회의 2부 - '위안부' 문제로 대중을 어떻게 만나야 할까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 소현숙 본 좌담회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웹진이 앞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어떤 역할을 해나갈지를 모색하기 위한 자리다. 우선 웹진 편집위원님들께서 각자 어떻게 '위안부' 문제와 접속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위안부' 문제에 관한 문제의식이나 고민은 무엇인지 말씀해달라. 먼저 저부터 이야기하자면, 2000년대 초반 석사과정 때 '위안부' 생존자들의 구술증언 작업에 참여하면서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접하기 시작했다. 저는 여성/젠더사 전공자로서 어떻게 이 여성들의 삶과 경험을 역사 속에 기재할 것인가에 관심이 많다. 사실 식민지시기 여성의 삶을 말할 때, '위안부' 경험이란 것은 일반 여성들의 경험과는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저는 그런 경계를 허물고 식민지하에서 평범한 여성들의 일상과 위안소로 동원된 여성들의 경험, 평시와 전시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 극단적인 경험에 녹아 있는 평범함이라 할까, 또는 평범한 일상 속에 감춰져 있는 극단성이랄까, 그런 연결성에 관심이 있다. 식민지하 여성들이 경험해야 했던 전반적인 차별과 억압의 맥락 속에서 '위안부'로 동원되었던 여성들의 경험을 역사적 언어로 풀어내고 싶다. 허윤 저는 여성 문학 연구자의 관점에서 민족 문학 담론의 젠더를 질문하는 작업을 해왔다. 민족 문학 속에서 주체가 되는 여성은 주로 피해자로서의 여성인 경우가 많다. '위안부' 서사 역시 (마찬가지 목적으로) 동원되는 방식으로 등장하는 경향이 있어서 늘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저의 세대적 경험상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위안부'의 표상은 <여명의 눈동자>였던 것 같다. 뭔가 가련하고 비장한, 하얀 한복을 입은 사람의 이미지가 박혀있어서,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위안부' 이미지를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된 것은 박사 논문을 쓰면서부터다. 1950년대 한국문학에서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서술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정신대'를 기억하는 사람, 소문으로 들어본 사람이 오히려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정신대' 여자들을 재현하지 않았다. 당시는 '위안부'라고 하면 미군 '위안부'를 지칭하는 시기였는데, 미군 '위안부'를 타락한 여자로 재현하면서 "저런 여자들이 민족을 더럽히고 있다"라는 방식으로 담론을 재생산하곤 했다. 일본군'위안부'가 부재한 기억 장에 관심을 가졌던 셈이다. 이선이 '위안부' 문제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딩링이라고 하는 중국 문학가의 작품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딩링이 1941년에 쓴 『내가 노을마을에 있었을 때』는 일본군'위안부'가 되어야만 했던 중국 여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소설 속 주인공은 일본군에 의해 성폭력을 당하고 '위안부'가 되어, 이후 공산당에 의해 스파이로 활용된다. 그런데 그 여성을 바라보는 중국사회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고 이에 대한 작가의 위화감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딩링의 작품을 접한 이후 '위안부' 피해자 구술집을 통해 중국의 피해자들을 만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딩링이 문제를 제기 했던 방식처럼 지금의 내가 '피해자'의 시점에서 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용숙 서양 현대사, 독일사 연구자다. '위안부' 문제 관련 전공자가 아니어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일반인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는 뭔가 복잡하고 다가가기 어려운 주제라는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한국의 서양사 연구자는 한국 사회의 어떤 필요나 요청에 부응할 수밖에 없는 면이 있다. 2015년에 열린 여성 인권과 전시 성폭력을 주제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해외 사례 발표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위안부 문제'와 간접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이 문제에 대한 지식도 인식도 부족한 상태에서 유럽 사례를 가지고 발표를 했고, 이후 내용을 더 보강하여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유럽의 전시 성폭력과 독일군과 친위대가 기획하고 실행한 강제성매매에 대한 논문을 썼다. 논문을 준비하면서 “과거사 청산의 모범국”으로 알려진 독일에서도 전시 성폭력에 대한 문제는 반세기 넘게 침묵 되었고, 그 기억 자체가 억압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후에도 공론화되는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여전히 제대로 된 피해자 인정이나 배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문제들을 보면서 서양에서 전시폭력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동아시아와 비교할 지점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순주 한국 정신대연구소 활동을 20년 넘게 했다. 주로 증언집 작업을 해왔다. 한국 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뿐 아니라 중국 등에 계시는 할머니까지. 굉장히 다양한 분들을 만났다. 최근에 과거에 진행했던 피해자의 구술 인터뷰 내용이 담긴 녹음테이프를 디지털로 변환하고 녹취록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했는데, 이 작업을 하면서 관련 활동을 꾸준하게 해온 입장에서 반성을 많이 했다. 어떤 경우에는 연구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위안부' 피해자를 만나면서 준비라 너무 부족해서 인터뷰 내용에 지장을 주기까지 했더라. 할머니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해서 똑같은 질문을 만날 때마다 계속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연구자라는 사람들의 준비가 부족한 부분이 있었구나 하고 새삼 반성하는 기회가 되었다. 윤명숙 일본 유학생 시절, 대학원 석사 때부터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일본에서 유학할 당시,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님께서 한국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개 증언을 하셨고, 그 직후에 인터뷰할 기회를 가졌다. 당시만 해도 나 역시 일본군'위안부'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몰랐다. 그런데 얘기를 들으면서 이 문제가 계급문제구나 하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석사과정 연구 주제도 여성사회주의자 독립운동에서 '위안소·조선인 위안부 실태'로 바꾸었다. 이때는 '위안부'는 군인이 총검을 앞세워서 처녀의 머리채를 잡아채 트럭에 싣고 끌고간다는 식의 강제연행 문제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대학원 세미나 수업에서 '위안부' 동원을 계급문제로 접근하는 시각으로 처음 발표했을 때, 엄청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런 시각으로 박사논문도 썼는데, '여성주의 시각이 부족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 문제를 여성차별 문제로 바라보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나는 '위안부' 문제가 식민 정책에 의한 일상적 폭력이나 계급차별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민족차별 문제에 더 중점을 두었다. 여성주의 시각과 관련해서는 최근 공부중인데,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깊게 사유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위안소·위안부 문제'를 천착하다보면 국가라는 것을 깊게 사유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위안소·위안부 문제'를 연구한다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힘든 주제이긴 하다. 아마도 처음에 이 문제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후회하지는 않는다. 김헌주 7년 전부터 한국사연구소에서 '위안부' 관련한 자료들을 정리 및 해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원래 기존의 연구 분야는 근대사회사 쪽이었는데,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위안부'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위안부' 자료를 정리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자료는 엉뚱하게도 아주 일상적이고 건조한 내용이 담긴 문서였다. 장교는 '위안소'를 몇 시부터 몇 시까지 활용하고, 사병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활용하는지, 그리고 각 계급마다 돈을 얼마를 내는지, 위생검사는 어떻게 하는지 등이 적혀있는 문서들이 많았다. 이 건조한 문서들을 보면서 약간 묘한 느낌이 들었다. 끔찍한 일을 겪었던 '위안부' 피해자들이 상대했던 사람은 그냥 평범한 일본(군)인들이었다. 이들은 군인이지만 동시에 전쟁터에 나와서 본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편지 보내면서 눈물 흘렸던 일본인들이었던 것이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이 떠오른 대목이었다.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제 '위안부' 문제를 기존에 논의되었던 민족주의적인 문제의식과 방식을 넘어 그 수준과 범위를 더 확장해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임경화 일본학 전공자로 전공은 달라도, 연구대상으로서의 일본을 생각할 때,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나에게 회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그래서 일본에서 전개되어 온 논의들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수년 동안 지속해 왔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연구가 일본 연구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 수정주의 주장이 나올 때마다 그에 논박하고 대중적으로 설득하는 작업도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고 나는 그것을 한국어로 옮기고 있기만 하다는 사실을 자주 느끼게 되었다. 나에게 그 이유는 일본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일본학계에 지나치게 종속적이라는 사실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한국에는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적인 논리를 내면화한 '일본학'이 존재하지만, 그에 맞서는 학문으로서의 다른 '일본학'을 구상하고자 한다면, 나 스스로 주체적으로 이 문제를 파고들어 고민하고 행동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경희 일본의 식민주의와 근대성, 통치성 등에 관심이 많다. 일본에서 나고 자라서 재일조선인 문제에 관해서도 쓰거나 강의를 해왔다. 90년대 초중반에 재일조선인 대학생들끼리 민족적인 활동을 하면서 조선인 강제동원(당시는 강제연행) 문제의 일환으로 '위안부' 문제를 알게 되었다. 공부 모임도 했고 당시 헌책방에서 센다 가코 책을 찾아서 읽었지만, 제대로 알지는 못했다. 2000년에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 개최되었고, 정치압력에 의한 NHK의 영상개편 문제가 있었다. 히로히토의 유죄를 선고한 법정은 확실히 천황제 국가 일본의 근간을 흔드는 사건이었는데, 이에 대해 너무나 노골적인 억압이 일어났다. 이미 90년대 후반부터 우파진영에서는 일본군'위안부'나 난징대학살을 부정하는 역사 수정주의가 시작했었고 리버럴 진영에서도 국민기금을 통한 민간협상을 시도하는 등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위안부' 문제는 늘 일본 사회의 반동적 움직임의 중심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해오지 않았다는 점에 늘 부채의식이 있다. 열심히 활동하는 재일 선배 연구자들을 보면서 “내가 아니어도…”라는 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수준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삼으려고 한다. 권명아 전시동원체제의 연장에서 '위안부 문제'를 고민해왔다. 증언 문제뿐 아니라 좁게는 일제 말기 전시동원체제만 이야기하더라도 '위안부' 동원이라는 건 전시동원체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와 뗄 수 없는 문제다. 그래서 전시동원체제를 젠더정치의 맥락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이것은 여성사와 좀 다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젠더 연구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기존의 지배적인 학문 체제와는 다른 역사상을 구축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위안부 문제' 역시 그룹화되어 있거나, 혹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정립하기 위해서는 전시동원체제 역사상을 젠더적 관점에서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위안부' 문제 연구를 하게 되었다. 또 전쟁과 폭력의 경험과 증언, 국가 주도 기념의 한계와 대안적인 기념 정치 등의 맥락에서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게 되었다. (왼쪽부터) 김헌주, 소현숙, 허윤, 이선이, 정용숙, 여순주, 윤명숙, 권명아 민족주의적 접근은 왜 보완이 필요하나 이선이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분들의 삶을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민족주의'가 피해자분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족주의적인 접근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들이 삶의 터전인 국가 안에서 자신의 지위와 장소를 부여받을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중요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윤명숙 그렇다. 하지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민족주의적 시각만으로 바라보게 되면 일본군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일을 했는가와 같은, 민족 차별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그러나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민족 차별의 문제도 있지만, 여성차별, 성(性) 문제, 계급의 문제, 식민 지배 청산 등 다양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는 이슈다. 특히, 미투 운동으로 대표되는 현재의 여성 인권에 관한 이야기와도 연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동안 '위안부' 문제를 민족주의적 시각으로만 바라보던 경향이 있어서인지 상대적으로 이런 부분들이 거의 이야기되지 않았던 면이 있다. 김헌주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식민지 전시체제의 강제동원이라는 구조, 즉 민족문제가 우선으로 거론되지만, 여성들이 '위안부'로 동원된ᅠ맥락에는ᅠ조선ᅠ사회ᅠ내부의 가부장제도ᅠ한몫했다. '위안부' 동원에 조선인ᅠ업자들이ᅠ개입한ᅠ부분, 한국전쟁기의 위안소 운영, 그리고 '위안부' 피해자를 바라보는 같은 민족의 불편한 시선 등 다양한 측면들이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가려지는 면이 많았다. 윤명숙 1990년대 일본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여성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국은 민족주의 관점을 중심으로 운동을 진행해갔다. 동시에 수용되어야 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주의와 민족주의 관점이 대결 구도로 이야기되었다. 90년대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ᅠ해결ᅠ운동이ᅠ처음ᅠ불 붙었을ᅠ때는 식민지ᅠ문제와ᅠ강력하게 결부되어ᅠ있었기ᅠ때문에ᅠ민족주의ᅠ색채가ᅠ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지금까지 정도로 점화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조경희 현재는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민족주의적인 시각으로만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려고 하는 경향이) 어느 정도 극복이ᅠ되었다고ᅠ생각한다. 실제로는 지난 20년 동안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식민주의의 문제, 전시 성폭력의 문제 등 다양한 시각으로 다루고자 하는 담론이 많이 형성되었다. '민족주의 시각으로만ᅠ바라보면ᅠ안ᅠ된다'는 비판 자체가 한국 사회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담론이라 생각한다. 물론, 여전히 많은 사람이 '네 딸이나 여동생이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해봐라'라는 식으로 문제를 접근하는 것을 보면 보편적인 여성주의 시각이 여전히 많이 부족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소현숙 최근에 민족주의적 해석을 넘어서 한국의 가부장성이라던가, 피해자들의 해방 이후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존의 연구에 문제를 제기하고 새로운 사실들이 발굴되고 있다. 예를 들면 해방 직후 미군정시기, 열차에서 미군에 의한 한국 여성의 성추행이 일어났다. 이례적으로 이 사건이 신문에 보도가 되었는데, 당시 사회적 명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서 논의를 했다. 거기서 한다는 이야기가 '미군들의 성욕이라는 어쩔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일반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일제강점기 때처럼 위안소를 만드는 게 좋겠다' 이런 이야기를 버젓이 한다. 한국 사회의 가부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런 사료들은 그동안 역사적 사료로서 포착되지 않았던 것이다. 최근에 '위안부' 문제를 다양하게 바라보는 문제의식이 생기니까 이런 역사적 사실들이 새로 발굴되기 시작한 거다. 윤명숙 실제로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지와는 별개로, 민족주의 관점으로 바라보려는 시각이 강하거나 강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국내 미디어가 주로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을 중심으로 뉴스나 이슈를 전하게 되고, 이때 대중들은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묻는 기사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여전히 이 문제를 민족주의적인 시각으로 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김학순의 공개증언이 있은 지 28년이나 지났다. 우리 사회도 해결 운동과는 별도로 '위안부'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역사의 교훈으로 남기 위해서는 현재 한국 사회의 우리들, 즉 바로 나의 문제로 더 많이 사유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왼쪽부터) 김헌주, 권명아, 소현숙 '위안부' 문제를 통해 무엇을 사유할 것인가 윤명숙 한가지 문제를 제기해보자면, 우리가 '위안부'ᅠ문제ᅠ해결이라고ᅠ얘기했을ᅠ때ᅠ'해결'을ᅠ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도 사실은 공적인 장에서 논의된 바가 없다. 1990년대 초부터 '위안부' 피해자들이 계속 커밍아웃을 했고, 약 28년 동안 굉장히 다양한 얘기들을 하셨는데, 이 사회는 누구의 관점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해결'인지에 대해서 논의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권명아 할머니들의 '사과를 원한다'라는 이야기에 대해 누군가는 “할머니들은 왜 사과를 요구할까. 그럼 사과는 누가 해야 하는가. '위안부' 문제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 당시 지도자? 일본군? 일본 국민? 한 때 일본에서 있었던 일억총참회(一億総懺悔)[1] 설처럼 일본 전 국민이 사과를 하면 되는 일일까? 만약 그렇게 한다고 해서 과거가 바뀌나?”라는 말들을 한다. 물론 과거는 바꿀 수 없다. 백만 번을 사과하고, 일본의 일억 총 인구가 참회를 한다고 해도 과거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미래는 바뀔 수 있다는 거다. 사과를 요구한다는 것은 바로 그 의미다. 예를 들어 일본의 '위안부' 문제 관련하여 시민사회 운동하시는 분들에게 “어쩌다 이런 활동을 하시게 되었느냐”고 물으면, 거의 공통적으로 “'위안부' 문제를 알게 된 순간 이전처럼 살 수 없었다”라고 말을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되니까 개인의 미래가 바뀐 것이다. 이처럼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역사적인 잘못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다. 임경화 해결이라고ᅠ했을ᅠ때,ᅠ공식 사죄, 피해배상, 추모와 기념, 역사교육, 재발 방지와 같이 큰 틀 안에서 공유되고 있는 것들은 있다. 이렇게 공유되어있는 틀 말고, 우리가 해결이라고 했을 때, 과연 그것만이 해결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하게 논의할 필요는 있는 것 같다. 해결의 방식은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운동을 해야 한다는 관점을 웹진에서 제시해주면 좋을 것 같다. 이선이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가ᅠ제기된 이후,ᅠ일본ᅠ사회의ᅠ많은ᅠ양심적인ᅠ지식인들이ᅠ이 문제를 통해 일본 사회를ᅠ바꾸려는ᅠ노력을ᅠ함께 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ᅠ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엄청난 시간, 노력, 비용이라는 자원이 들어가는 것에 비해 이 논의가 한국 사회를 그만큼 성숙시키고, 한국 사회의 (여성)인권이 성장하도록 하는 데 얼마나 기여했는가 냉철하게 생각해보면 그다지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운 것 같다. '위안부' 문제를 일본 제국과 일본군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에서 더 나아가 앞으로 한국 사회가 보다 더 나은 사회가 되기 위한 지렛대로 이문제를 생각했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볼 지점이다. 소현숙 한국 사회가 아예 진전이ᅠ없었다고ᅠ생각하지는ᅠ않는다.ᅠ예를ᅠ들면ᅠ2014년 미군ᅠ‘위안부’,ᅠ기지촌ᅠ여성들이 대한민국 정부를 피고로 하여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ᅠ제기했다. 여성의 성을 국가가 동원한 것에 대해 정부의 책임을 묻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부만 승소하는 다소 미흡한 판결이 나왔지만, 그럼에도 한국 사회가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피해자들이 스스로 피해자임을 자각하고 문제제기를 할 수 있었던 과정에는 '위안부' 문제에 관한 운동과 연구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을 한다. 이선이 지난 편집회의 때 임경화 선생님께서 이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가져가기로 마음을 먹어서 이곳에 왔다는 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아까 김헌주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내용(건조한 문서로부터 보이는 악의 평범성)도 이 문제를 나의 문제로 가져가는 사유가 되는 것 같다. 웹진 안에서 '위안부' 문제가 '나'에게는 어떤 의미인지 계속 물을 수 있다면, 이 문제가 일본제국의 전쟁범죄를 넘어서 보다 더 확장된 사유를 가능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김헌주 한국에서 여성을 대상화한 유흥문화는 일반적이며, 남성들은 그 문화의 소비자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제쳐둔 채로, '위안부' 문제를 대면하는 것이 한국 사회의 모습이다. 그런 차원에서 건조하게 이용하는 일본군 남성의 모습과 평범한 '위안부 문제'에 분노하는 한국 남성 사이에 괴리라는 게 생각보다 크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ᅠ군대ᅠ문화에서ᅠ'위안부' 문화의ᅠ연속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소현숙 선생님께서 관련된 사례를 잠깐ᅠ말씀하셨지만, 한국전쟁기 특수 위안대가 설치될 당시에 그 목적이 군의 사기 증진이었다. 일본군'위안부'를 만든 맥락과 똑같은 것이다. 또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2월 30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휴가를 나와서 귀향해 있는 장병들을 위해서 국가 차원에서 보상을 해주기 위해 각 지역마다 위안소를 만들어서 장병들을 위로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연장선상에서 1960~70년대의 양공주 문제 즉 미군 ‘위안부’ 동원이 가능했던 것이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각주 ^ (편집자 주) 1945년 8월 28일 기자 회견에서 패전 처리 내각의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東久邇宮稔彦) 수상이 ‘1억 국민이 모두 참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한 발언. 전쟁의 책임을 일왕에게만 물어서는 안 되며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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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논평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기억을 위한 세계시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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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기림의 날 특집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하여 <1부> 2015년 최종적으로 7개국 14개 단체가 참여해 결성한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한 국제연대위원회>는 일본군'위안부'의 역사가 여성 인권 회복의 진행형, 나아가 인류 보편의 인권 신장과 항구적 평화에 기여하는 '세계의 기억'이 되어야 한다는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공격적인 외교로 그 의의가 왜곡되어 가고 있다. '2024 기림의 날'을 기념해 웹진 <결>은 조속한 해결을 기대하며 10여 년 가까이 추진되어 온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 활동을 3회에 걸쳐 조망해 본다. (1)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하여_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기억을 위한 세계시민운동 (2)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하여_ '유일하고 대체불가능한'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3)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하여_ 현재사(現在史)로서의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일본군'위안부' 문제 관련 활동은 대한민국과 아시아를 넘어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행보를 이어왔다. 1991년 김학순 씨가 최초로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한 이후 많은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토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피해를 극복해가면서 세계 분쟁 지역에서 고통받은 여성 인권 피해자를 위해 활동하는 인권운동가로 성장했다. 피해자와 공감하며 펼친 이들의 지원 활동은 국가를 뛰어넘은 국제연대 활동이었다. 최초의 증언으로부터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피해를 뛰어넘어, 전시 하 보편적 여성 인권 문제를 각인시키며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의 여성 인권 신장과 평화 운동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부유하는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이러한 일본군'위안부' 문제 활동 과정에서 위안소의 존재부터 강제 동원 사실 등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기록물이 발굴됐다. 피해자들의 증언 기록도 광범위하게 생산됐다. 정부와 시민사회단체의 활동 기록도 상당했다. 20여년 동안 축적되어온 이 기록물에 주목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 MOW)으로 등재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이가 있었다. 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회(International Advisory Committee, IAC) 위원을 지낸 서경호 교수였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사업은 1990년대 초반 유고슬라비아 내전 중에 13세기부터 집적되어 온 역사적인 소장 도서가 고스란히 소실되는 안타까운 사건을 경험한 세계가 기록유산 보존 대책이 시급하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출발했다. 1995년 유네스코는 인류의 다양한 기억을 보호하고 세계인이 공유하자는 취지를 밝히며 '세계의 기억(Memory of the World)'이라는 이름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기록유산 등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기록물 자체의 '세계적 중요성(World Significance)'이다. 여기서 '세계적 중요성'은 기록유산에 담긴 역사적 의미나 일괄적 내용 해석에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유네스코는 해당 기록유산이 지니고 있는 인류 전체의 보편적 가치와 보존 필요성을 중시한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와 인권 회복 운동을 지켜봐온 서경호 교수는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있어 핵심 요소인 '세계적 중요성'을 충족한다고 판단했다. 서 교수는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전문가들에게 등재 추진을 제안했다. 곧바로 수용되지는 못했지만 서 교수의 제안을 한국 정부가 받아들이면서 실체화되었다. 한일 간의 역사문제가 아니라 보편적 여성 인권의 문제로 변화시켜 간 것은 시민사회의 노력으로, 2016년 7개국 14개의 시민단체로 구성된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 위한 국제연대위원회(이하, 국제연대위원회)가 영국 왕립 전쟁박물관과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Voices of 'Comfort Women')'이라는 제목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공동등재를 신청했다. 그러나 세계시민사회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노력은 곧 일본의 공격에 가로막혔다. 일본이 "유네스코를 정치화(politicization)한다"고 호도하면서 한국과의 갈등 사안으로 비틀어버린 것이다. 일본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권 회복 운동에 대한 세계사적 의의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사료의 지엽적인 문제에 집착해 쟁점기록물(contested/questioned nomination)로 분류하고 논쟁화 했다. 또 이에 발맞춰 일본의 일부 시민단체가 '위안부와 일본군 규율에 관한 문서'라는 제목으로 세계기록유산 등재신청까지 했다. 2017년 유네스코 사무국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의 장을 정치의 문제로 만든 것은 일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일본측 신청자와 공동등재를 전제로 한 '대화'가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결정 후 지금까지도 본격적인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등재가 허락된 것도, 거절된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은 부유하고 있다.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 위한 국제연대위원회 결성되다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활동은 초기에는 한국정부가 주도했다. 2012년 한국과 일본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로 첨예하게 갈등할 때 한국 국회에서 논의가 시작되었고, 2014년 여성가족부가 이어받아 추진했다. 여성가족부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문화재청 등과 공동으로 ''위안부'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정책토론회'를 개최하고, 2017년에는 등재를 목표로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안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지원 및 기념 사업단(이하 사업단)을 구성했다. 이같은 움직임은 당시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추진된 측면도 없지 않아 일본이 '정치적 목적'이라고 비판할 개연성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2015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 및 국제협력위원장, 유엔여성차별철폐위원회 위원, 유엔경제사회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한 신혜수가 단장을 맡으면서 방침을 바꾸었다. 시작은 한국정부가 주도했지만 등재 주체와 이후 등재 활동은 시민사회가 이끌어가기로 한 것이다. 등재 방식도 한국 단독이 아닌 관련 국가들과 함께 공동등재 하기로 결정했다. 또 등재 주체는 일본군'위안부' 관련 운동으로 세계적인 평가를 받았던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이하 '2000년 법정')'의 틀을 복원하기로 했다. 사업단은 한국 내 일본군'위안부' 관련 박물관 및 단체인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일본군'위안부'역사관(나눔의집),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대구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민족과여성역사관(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 마창진시민모임,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 통영거제시민모임 등의 동의를 얻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한 한국위원회(이하 한국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국제적 연대체를 구성하기 위해 '2000년 법정'에 참가했던 국가 및 단체와 중국에 연락했다. 일본은 액티브 뮤지엄,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과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전국행동 등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유네스코 등재를 위한 활동은 단체 차원의 참여가 아니라 기록물을 소유하고 관리할 수 있는 사람들의 느슨한 연대체로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한 일본위원회(이하 일본위원회)>를 구성해 참가했다. 필리핀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지원 단체인 <릴라필리피나 로라스 센터>가, 타이완은 <타이페이시 부녀구원기금회>가 참여했다. 인도네시아, 동티모르는 일본의 네트워크에 힘입었다. 일본에서 인도네시아 피해자 지원과 운동을 함께 해온 시민운동가와 인도네시아 운동가가 연대, <인도네시아 일본군'위안부'네크워크>를 만들어 참여했다. 동티모르는 일본동티모르전국협회 대표인 마츠노 아키히사(松野明久) 교수가 협력자로 합류한 동티모르 HAK협회(동티모르 인권협회)가 참여했다. 네덜란드는 <일본의 도의적 책임을 묻는 재단(Foundation of Japanese Honorary Debts)>이, 중국에서는 상하이사범대학 내에 있는 <일본군'위안부'연구소>와 전중국변호사협회 대일배상청구위원회 소속 변호사의 법률사무소 <팡위안법률사무소>가 합류했다. 북한측과도 협의하였다. 2015년 당시에는 공동등재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던 북한은 이후 2016년 등재신청서를 제출할 때까지 확정적 답신을 하지 않아 아쉽게도 참여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결국 2015년 5월 21일, 합류가 결정된 한국, 일본, 중국, 타이완,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네덜란드 등 총 8개국의 14개 단체[1]가 모여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한 국제연대위원회(이하 국제연대위원회)>를 결성했다. 논의를 거듭하며 합의를 도출한 국제연대위원회는 결성식에서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 합의문'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등재 활동에 들어갔다. 합의 내용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공동 인식을 바탕으로 기록물의 공동등재를 목표로 설정한 다음 등재 주체는 국제연대위원회로 할 것, 전반적인 준비 업무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지원 및 기념 사업단이 담당할 것, 등재 신청 자료로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과 함께 관련 기록물, 세계적으로 진행되어 온 지원 운동 자료를 포함할 것, 그리고 각 단체가 소장하고 있는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이 등재 기준에 적합하도록 주의 깊게 선정하고 목록화할 것 등이었다.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 합의문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 협의를 위한 국제회의에서 채택됨 2015년 5월 21일, 서울, 대한민국 일본군'위안부' 피해로 알려진 일본군 성노예 제도로 인한 인권 유린은 20세기에 일어난 가장 비극적인 전쟁 범죄 중 하나이다. 일본군'위안부' 생존자들과 여성 인권 운동 단체들은 오늘날까지 오랜 기간 동안 역사적 피해의 진실을 규명하고, 전쟁으로 인해 처참히 짓밟혀버린 여성 인권에 대한 참상을 알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목격과 증언, 관련 기록들과 세계적으로 진행되어온 지원 운동들을 담은 자료는 역사적 유산으로서 기록화하고 보관되어져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비극적인 역사가 또다시 반복되는 것을 방지하며 미래세대에게 교훈을 줄 수 있다. 아래에 서명한 우리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련된 기록물들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공동등재하기 위하여 협력할 것을 동의한다. 우리는 공동등재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 전적으로 협력할 것을 결의하며, 아래의 조항들에 합의한다. 1. 우리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 국제연대위원회를 결성하여,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하여 협력한다. 2.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 국제연대위원회의 사무국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지원 및 기념 사업단(한국여성인권진흥원 내)이 맡아 공동등재를 위한 전체적 준비 과정을 추진한다. 3. 우리는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이 등재 기준에 적합하도록 주의 깊게 선정하고 목록화하여 등재신청서를 작성하기에 알맞은 형태가 되어야 함을 숙지하고 있으며, 기록물들이 유네스코 등재 기준인 진정성·희귀성·원본성을 충족할 수 있도록 한다. 4.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본부에 공동등재를 하기 위해 각 기관이나 단체가 보유하고 있는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의 사본을 공동등재 국제연대위원회 사무국에게 2015년 하반기까지 제출한다. 5. 국제연대위원회의 각 단체나 개인은 기록물의 사본을 제출할 때 등재 기준의 하나인 기록물 관리·보존 계획을 작성하여 같이 제출한다. 관리·보존 계획은 사실에 근거하며 실현 가능한 계획이어야 한다. 기록물은 각국이 소장하여 관리·보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나, 각 국의 상황상 기록물 관리 및 보존이 어려울 경우 국제연대위원회에서 협의하여 관리·보존한다. 6.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을 보유한 다른 기관이나 개인이 공동등재 국제연대위원회를 통해 등재를 하고자 할 때에는 공동등재 국제연대위원회의 인가를 받아 추가로 참여할 수 있다. 또한 국제연대위원회 참가단체나 개인은 국제연대위원회의 합의를 거쳐 공동등재 이후에도 추가적으로 기록물들을 올릴 수 있다. 7. 우리는 공동등재에 관한 사항이나 관련 정보를 공동등재 국제연대위원회의 합의 없이 외부로 유출하지 않을 것을 합의한다. 서명 대한민국 |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 한국위원회 중국 | 상하이사범대학교 '위안부'문제연구소 수즈량(Su Zhiliang) 일본 | 유네스코 공동등재를 위한 일본위원회 대만 | 타이페이시 부녀구원기금회(또는 대만위원회) 강슈아(Kang Shu-hua) 네덜란드 | 일본의 도의적 책임을 묻는 재단 브리지뜨 밴 할더(Brigitte van Halder) 필리핀 | 릴라필리피나(또는 필리핀위원회) 레칠다 엑스트라마두라(Rechilda A. Extremadura) 세계 전문가들과 공조… 세계기록유산 경향성에 부합한다 인정 사업단은 등재 주체로 국제연대위원회를 결성하고, 외부 협력자로 일본군'위안부' 문제 및 여성 인권 관련 전문가들을 섭외했다. 관련 전문가들의 추천서는 일본군'위안부'기록물과 같이 공문서로만 구성되지 않는 기록물의 등재에 필요 요소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유엔인권위원회 산하 <차별방지 및 소수자보호에 관한 소위원회(Sub-Commission on Prevention of Discrimination and Protection of Minorities)>에서 '전쟁 중 조직적 강간, 성노예제 및 그와 유사한 관행' 등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한 게이 맥두걸(Gay McDougall. 전시 상황에서의 조직적 강간, 성노예제 및 그와 유사한 형태 특별보고관)을 비롯해 일본군'위안부' 연구의 권위자인 일본의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주오대 교수, 한국의 정진성 서울대 교수, 타이완의 전문가 쥬더란(朱德蘭) 등 세계의 일본군'위안부' 전문가들이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추천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또 1993년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해 조사하고, 1994년에 보고서를 발간해 유엔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한 국제사법재판소(ICJ.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에 찾아가 사무총장의 추천서도 받기로 했다. 국제연대위원회는 이와 같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저명한 세계적 인사들과의 공조를 통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데 유리한 고지를 만들어 갔다. 일본군'위안부'기록물 등재를 위한 기록물 군의 제목에 대한 논의도 주요 결정사항 중 하나였다. 제목에서 기록물의 의미를 압축적으로 담아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사업단은 먼저 '일본군'위안부': 정의와 평화를 향한 긴 여정('Comfort Women': A Long Journey Seeking Justice and Peace)'을 제안하고, 여러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했다.[2] 태국의 전문가가 '정의(Justice)'라는 표현이 배상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어 정치적인 오해를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정치적 논쟁의 여지를 피하고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술한 제목으로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Voices of 'Comfort Women')'를 제안했다. '피해자'도 해석적 언어이기에 일본군'위안부'만을 쓰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도 덧붙였다. 사업단은 태국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국제연대위원회의 동의를 구해 등재신청 기록물군의 최종 제목을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Voices of 'Comfort Women')'로 정했다. 세계기록유산 등재 과정에서 신청 기록물 종류의 경향은 종이로 된 단순한 문서뿐 아니라 시각적 자료, 비디오 같은 전자적 자료 등을 포함하는 추세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여러 매체로 된 통일적 기록물이라면 좋은 기록물로 평가될 수 있다는 조언이었다. 특히 지금까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적이 없는 여성들의 피해에 대한 기록군이라는 점도 부각해야 할 부분이었다. 피해 여성들이 직접 증언한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은 최근의 세계기록유산의 경향성에 가장 부합하는 소중한 기록물군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또 등재 주체인 국제연대위원회 구성과 관련해 공동등재일 경우 참가국이 많을수록 좋으며, 무엇보다 세계기록유산이 아직 하나도 없는 북한[3]과 기록물 보존 환경이 열악한 동티모르 등이 함께 한다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추구하는 방향과 매우 적합하다고 평가했다. 등재 자료 구성에 대해서는 국제연대위원회 관련국 이외 미국, 영국, 호주 등 타국의 국가 기록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자료도 공동등재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만일 공동등재가 안 될 경우 등재 동의를 받고 자료를 포함할 수 있다는 조언을 받았다. 여러 전문가의 설명과 조언을 종합한 결과, 준비하고 있는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이 '세계적 중요성' 요소를 갖추고 있고, 등재 신청 주체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추구하는 가치와 원칙에 잘 조응한다고 판단한 사업단과 국제연대위원회는 곧 어떤 기록물을 선별하고 어떻게 구성할 지, 등재를 위한 실무 작업으로 활동의 무게중심을 옮겼다. 각주 ^ 타이완을 하나의 국가로 취급하여 8개국으로 했으나, 이후 타이완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는 것에 대한 중국의 항의와 타이완 단체 수용으로 등재신청서 및 신문 등 인터뷰에서는 국제연대위원회 7개국 14개 단체로 하기로 했다. ^ 사업단은 2015년 8월 22일,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자메이카에서 주최하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관련 가이드 - 등재지침서 설명, 케이스 스터디>회의에 참석하여, 관련 전문가들의 실제적 조언을 들었다. ^ 2015년 초 접촉할 당시 북한측이 긍정적 답변을 하였기에 국제연대위원회의 잠정적인 구성원이었다. 자메이카 회의가 열리고 있던 2015년 8월까지도 별다른 변화가 없어 사업단은 북한이 참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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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위안부피해자법에 대한 역사적 검토: 보호·지원을 넘어 인권의 문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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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필자의 2021년 석사논문 「일본군‘위안부’ 피해와 피해자의 의미: 한일청구권협정 부작위 위헌소송을 중심으로」의 2장의 2절과 3절을 수정, 보완하여 작성한 것이다. 2023년은 「일제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이하 위안부피해자법, 법률 제4565호)이 제정된 지 30년이 되는 해이다. 1993년, 위안부피해자법은 “국가가 인도주의정신에 입각하여” “일본군위안부로서의 생활을 강요당한 자”를 “보호하고 지원”할 것을 명시했다(제1조 목적). 현재 이 법은 여러 차례 개정되어 피해자들의 생활 안정과 복지뿐만 아니라 국민의 역사관 정립과 인권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로 변모했다. 30년의 세월 동안 위안부피해자법은 한국 사회의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그 피해자들을 보는 시각의 변화를 반영하며 바뀌었고, 또 그것을 바꿔온 기제이기도 했다. 가령, 현재로선 당연해 보이지만, 국가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보호와 지원의 대상으로 인정하는 변화는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이 글에서는 법 제정 30주년을 맞이하여 위안부피해자법의 제정 경위와 내용의 변화, 그 의미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1. 위안부피해자법의 제정 경위 위안부피해자법은 1993년 3월 13일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정부 의안으로 제출되어 같은 해 4월 국회에서 통과되고, 6월에 제정되었다. 이러한 법안은 일본 정부에 법적 배상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한일 간 도덕적 우위는 가져가되 피해자는 우리 정부가 구제하겠다는 방침에서 나온 것이었다.[1] 외무부는 법 제정이 당시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에 제기한 손해배상소송,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유엔 인권위 제소와는 별개의 조치라고 밝혔다.[2] 이러한 조치에 일본 정부는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다고 언론들은 보도했다.[3] 법에 따른 지원으로는 피해를 신고한 생존자에게 생활보호기본금 500만 원 및 생활지원금 15만 원 지급, 영구임대주택 입주, 의료 무료 혜택 등이 결정되었다. 외무부에 따르면 이러한 금액은 법규나 제도상의 제한, 다른 국가지원대상자와의 형평성을 고려하여 정한 것이었다. 외무부는 근로정신대나 강제징용자 등 다른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해선 장기적 대책을 마련할 것이지만, “종군위안부 보호 조처를 먼저 다룬 것은 가장 반인륜적이고 해결이 시급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4] 이러한 조치는 단순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경제적 상황이 열악하다는 실상이 알려졌기 때문은 아니다. 국가 차원의 보호·지원을 요구하는 일본군‘위안부’ 운동[5]의 목소리와 그것을 추진하려고 했던 외무부의 시도는 이전 정권부터 있었다. 그렇다면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기점으로 한, 굴욕적인 대일 외교를 청산하라는 운동의 지속적인 요구가 한국 정부의 일견 급진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움직임을 만들어낸 것일까? 먼저 한국 정부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떤 시각에서 보고 있었는지를 알아야 ‘급진적’이었다거나 그렇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일본군‘위안부’ 문제화를 둘러싼 운동의 흐름과 한국 정부의 대처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1990년대 냉전의 붕괴는 뒤늦게 2차 세계대전의 ‘전후(戰後)’를 불러왔고, 1987년 민주화와 함께 한국 사회는 되돌아온 식민지기와 전쟁의 기억, 그것에서 비롯된 고통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두고 들끓었다.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원폭 피해 및 강제동원 피해자 운동, 한일 여성 연대를 기반으로 한 기생관광 반대 운동의 교차점에서 등장했다. 1990년 10월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외 여성단체들은 한일 정부에 일본 정부의 ‘정신대 문제’에 대한 사실인정, 공식사죄, 보상, 역사교육 등을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냈으나 거듭된 부인과 책임회피가 이어졌다.[6] 이에 맞선 1991년 8월 김학순의 기자회견에서의 공개 증언, 그리고 12월 일본 정부에 대한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 청구소송’ 제소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한일 양국 간 현안 과제”로 ‘격상’시켰다.[7] 1992년 1월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가 위안소 제도에 대한 일본군의 관여를 보여주는 자료를 발표하자, 가토 내각 관방장관은 정부의 관여를 인정하고, 관계성청 자료조사 방침을 발표했다. 곧이어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한국 정부는 선 진상규명, 후 보상 또는 배상 방침을 세우고, 자체 진상규명 작업을 맡을 ‘정신대문제실무대책반’ 구성 계획을 밝혔다. 이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는 한국 정부의 “피해 여성에 대한 응급생활보호조치”를 요구했으나 묵살되었다.[8] 이에 비하면 김영삼 정권의 위안부피해자법 제정은 한발 나아간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여전히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한일 외교 관계의 장애물로서 해소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고, 진상규명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일본 정부의 배보상을 정부 차원에서 요구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1993년 8월 진상조사 발표와 함께 설치, 관리 및 이송에 관해 구 일본군의 관여를 인정한 고노 내각 관방장관 담화에 한국 정부가 만족하며 이 문제를 더는 한일 외교 현안으로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9] 정대협은 위안부피해자법 제정을 환영하긴 했으나 이것이 일본 정부를 대신한 “물질적 보상”인지, “민족 수난의 희생자에 대한 동포적 차원의 위로와 생활 지원”인지 질의했다. 또한, 중대한 인권침해[10]를 입은 피해자는 배상의 권리를 갖는 주체이며 이들을 대신해 정부가 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11] 주지하듯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일본 정부의 민간을 경유한 금전적 보상이 법적 책임에 따른 것이 아닌 시혜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닌지, 그럼으로써 피해자들을 단순 수혜자로 만드는 것이 아닌지를 경계해왔다. 운동이 1996년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하 국민기금), 2015년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이하 2015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을 통한 의료·복지 사업에 반대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1996년 정대협은 국민기금에 반대하는 한편, 피해자를 위해 생활안정지원금을 증액해달라고 요청했다.[12] 이러한 일본 정부의 조치를 두고 법적 책임과 정부의 향후 대책을 고려해야 한다는 김대중 대통령과 한일 관계가 경색되어선 안 된다는 외무부가 갈등을 빚었지만, 1998년 5월, 한국 정부가 2차 지원금을 지급하되, 민간의 배상 요구에는 개입하거나 공식적으로 일본 정부에 요구하진 않는 것으로 국민기금 사태는 일단락되었다.[13] 종합하자면, 1990년대 위안부피해자법과 그에 따른 지원은 정부가 민족의 자존심과 도덕적 우위, 한일 관계를 둘러싸고 내린 타협책이자 (그래서 다른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보다 신속하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보호와 지원의 대상으로 상정한 출발점이었다. 2. 위안부피해자법의 내용과 그 변화 먼저, 명칭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이 법의 정식 약칭은 위안부피해자법이지만,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받은 피해자의 입장을 반영”하기 위해 제명과 조항에 ‘피해자’가 들어간 것은 2002년 일부 개정된 「일제하일본군위안부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 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법률 제6771호)에서부터이다.[14] 민주화 이후 과거사 청산 운동과 반성폭력 운동의 전개가 ‘피해자’ 용어를 일상화했다는 점도 고려할 수 있겠으나 이러한 변화는 무엇보다 후술할 노무현 정권의 대일 과거사 청산 작업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법 개정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라는 명명을 제도화한 것이라는 데서 의의가 있다. 관련해서는 다음 절에서 다루고자 한다. 현재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관련 명칭(특히 가족주의적 호칭)과 관련해 열띤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는 점은 명명하는 작업이 갖는 정치성을 잘 보여준다. 주지하듯 일본군‘위안부’, 정신대, 종군위안부, 일본군 성노예와 같은 각 호칭은 주로 사용된 시기, 맥락이 다르며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함의를 갖는다. 위안부피해자법 제정 당시에도 위안부라는 명칭이 적절한지에 관한 논란이 있었다. 당사자의 자존심(또는 ‘프라이버시’ 침해)과 인권 문제가 있으니 성적 피해 여성과 같은 표현이 어떠냐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외무부가 당시 실제로 사용된 용어로서 그 역사성을 살리는 게 일본 정부의 책임을 부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 받아들여졌다고 한다.[15] 전술했듯 1993년 위안부피해자법은 “일제에 의하여 강제동원되어 일본군위안부 생활을 한 자” 중 “생존자로 법 적용대상자로 결정·등록된 자”를 대상으로 “국가가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이들을 보호·지원”하기 위한 목적에서 제정됐다. 지원 내용으로는 “생활보호”, “의료보호”, “생활안정지원금의 지급”이 있었고, “임대주택의 우선임대”도 명시됐다. 이후 위안부피해자법은 여러 번 개정되었으나 중요한 변화만 정리해보고자 한다. 2002년 개정 법안에서는 “국가가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한다는 어구는 삭제되고 피해자를 보호·지원해 “이들의 생활안정을 기”할 뿐 아니라 “기념사업을 수행”해 “국민의 올바른 역사관 정립과 인권증진에 이바지”한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이어 2005년 개정 법안(법률 제7637호)에서는 기념사업이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한 것임을 명시하게 되었고, 생활안정과 “복지증진을 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게 되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수행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념사업 등의 사업내용도 획정되고 다양해졌다. 지원 내용 역시 점차 확장되었다. 이처럼 피해자뿐만 아니라 국민을 대상으로 한 기억/기념 조치의 제도화, 피해 회복을 인권이라는 중대한 가치와 연관 짓는 법문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보는 시각의 전환이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사회공동체의 과거, 현재, 미래를 재해석하고 재구성해야 할, 공적 역사/기억의 일부로 삼게 된 것이다.[16] 이러한 2000년대 법 개정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의 국제인권레짐의 정착과 과거사 청산작업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노무현 정권은 과거사 피해자들의 고통의 치유 및 해소가 사회 재통합과 화해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보았고, 이를 위해 과거사청산 메커니즘을 이행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17] 피해자 보호·지원에서 나아가 이들의 명예회복, 진상규명, 기념사업, 역사교육을 법에 명시하게 된 것은 200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요구해온 바가 그 법적 기반을 다지게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2005년 개정 법안이 제2조의2(국가의 의무)를 추가해 “진상규명”과 “역사교육”에 대한 적극적 노력, 그리고 피해자 “발굴”과 생활 안정을 위한 조치 강구를 국가의 의무로 명시한 데 이어 2017년 개정 법안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법률 제15207호)은 “피해자의 권리·의무와 관련된 정책” 수립에 있어 피해자 등의 의견 청취, 국민에 “정책의 주요내용”의 “적극 공개”를 규정했다. 이러한 2010년대 후반의 법 개정은 2015 위안부 합의가 “피해자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국민과 같이 호흡하는 민주적 절차와 과정”이 없었음을 문제화한 문재인 정권에서 이뤄졌다.[18] 2015 위안부 합의가 고위급 외교 인사들의 비밀협상으로 진행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처음으로 피해자 중심적 접근이 한국 사회의 화두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위안부피해자법의 제·개정에 따른 변화> 제명 일제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제·개정 시기 1993년 제정, 시행 2002년 일부개정, 2003년 시행 2005년 일부개정, 2006년 시행 2017년 일부개정, 2018년 시행 정의 일제에 의하여 강제동원되어 일본군위안부로서의 생활을 강요당한 자 일제에 의하여 강제동원되어 성적학대를 받으며 위안부로서의 생활을 강요당한 피해자 좌동 좌동 대상 일군위안부 중 생존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생활안전지원대상자 등), 국민 좌동 좌동 담당 부처 보건사회부 여성부 여성가족부 좌동 목적 국가가 인도주의정신에 입각하여 이들을 보호하고 지원함 피해자를 보호·지원하고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기념사업을 수행함으로써 이들의 생활안정을 기하고 국민의 올바른 역사관 정립과 인권증진에 기여함 피해자를 보호·지원하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한 기념사업을 수행함으로써 이들의 생활안정과 복지증진을 기하고 국민의 올바른 역사관 정립과 인권증진에 기여함 좌동 지원 내용 생활보호, 의료보호, 생활안정지원금 지급, 임대주택 우선임대 생계급여, 의료급여, 생활안정지원금 지급, 임대주택 우선임대 생계급여, 의료급여, 생활안정지원금 지급, 간병인 지원, 임대주택 우선임대, 국적회복 등의 지원 생계급여, 의료급여, 생활안정지원금 지급, 간병인 지원, 장제비 지원, 임대주택 우선임대, 국적회복 등의 지원, 법률상담 등의 지원 사업 내용 X 기념사업, 역사적 자료의 수집·보존·관리·전시 및 조사·연구, 교육·홍보 및 학예활동 기념사업, 역사적 자료의 수집·보존·관리·전시 및 조사·연구, 교육·홍보 및 학예활동, 국제교류 및 공동조사 기념사업, 역사적 자료의 수집·보존·관리·전시 및 조사·연구, 교육·홍보 및 학예활동, 피해자의 명예회복 위한 국제교류 및 공동조사 등 국내외활동, 위령사업 국가의 의무 X X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인권증진을 위하여 진상규명·올바른 역사교육 등에 대한 적극적 노력, 피해자의 적극적 발굴과 안정적 생활유지 위해 필요한 조치 강구 피해자의 명예 회복과 인권 증진 및 이와 관련한 진상 규명, 올바른 역사교육 등을 위한 국내외적 적극 노력과 필요한 조직과 예산 확보, 피해자의 적극적 발굴과 안정적 생활유지 위해 필요한 조치 강구, 피해자 권리·의무 관련 정책 수립시 피해자(그 대리인 포함) 의견 청취 및 정책 주요 내용 국민에 적극 공개 3. 위안부피해자법의 제·개정의 사회적 의미 첫째로, 위안부피해자법이 최초 법이 제정될 때처럼 “인도주의정신에 입각하여” 보호·지원을 하는 데서 나아가 “복지증진” 등 복합적인 목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인도주의적 대응은 자연재해, 전쟁 등으로 인해 기본적인 인간적 삶의 수준을 영위하는 데 어려운 이들의 긴급한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것을 의미한다.[19] 국가의 지원이 30년 동안 이어진 현재, 피해자들에게 필요한 바가 인도주의적 대응이 아니라는 점은 쉽게 동의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법적 책임에 의거한 배상을 일본 정부에 요구해왔고, 국가가 외교행위를 통해 피해자의 이해관계를 대리해주길 정부에 요구해왔다. 일본군‘위안부’ 피해는 누락되었으나 개인의 청구권을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한다고 선언한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은 일본 정부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에 대한 법적 책임은 없다는 단언, 그리고 한국 정부의 수세적인 태도의 배경이 되었다. (남성으로 재현되곤 하는) 징용·징병 피해자의 청구권에 대해 체결한 협정과 그에 따른 보상으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청구권 역시 변제됐다고 여겨지게 된 점은 전쟁 피해 여성들이 마주하게 된 모순적 상황, 즉, 체계적으로 참여가 박탈된 계약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종속되는 상황을 드러낸다. 그러나 2005년 개정법의 의안이 발의되었을 당시 국가의 의무 조항에 포함되어 있던 “배상(에 대한 적극적 노력)”은 법 목적이 생활 안정과 복지증진에 있다는 사유로 삭제되었다.[20] 또한, 한일청구권협정 제2조 1항에 따라 개인 배상청구권이 소멸되었는지에 관한 해석상 분쟁이 존재하기에 제3조의 해석상의 분쟁 해결조치를 취할 의무를 다하라는, 즉,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배보상 문제를 우선 외교적으로 해결하라는 2011년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21]에도 불구하고, 졸속으로 이뤄진 2015 위안부 합의는 또다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의 피해자 지원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둘째로, 위안부피해자법이 ‘피해자’로 그 대상을 호명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전술했듯 1990년대 한국 정부의 방침이나 현실주의적 국가 외교정책의 관점에서 피해자는 잔여적 복지 지원으로 고통이 해소되어야 할 존재로 여겨졌다. 반면, 2000년대와 그 이후 과거사청산 흐름에서의 법 개정에서 ‘피해자’는 적절하고, 실효적이고, 신속한 방식으로 마땅히 피해가 구제되어야 하는 인권 주체이자, 또 그러해야 한다고 요구를 하는 정치적 주체로 여겨지게 되었다. 법의 ‘피해자’라는 호명 자체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와 피해자를 통해 우리 사회가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지, 피해자의 상처와 고통에 대한 응답을 요청하는 것이 사회에 환기하는 과제는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일부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남지 않은 고령의 피해 생존자들의 고통 경감, 즉, 개개인에 대한 인도주의적 조치로 문제의 해결방식과 목적을 한정하는 것은 2015 위안부 합의 이후 강력한 흐름이 되어왔다. 전술했듯 국가의 의무 조항에 피해자 중심적 접근이 반영되었으나 누가 피해자인지, 무엇이 피해자를 위한 것인지, 피해자의 입장은 무엇인지는 계속해서 논의되어야 할 열린 문제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이라는 정의의 ‘내용’을 정하는 데 있어 우리가 계속해서 ‘피해자’ 기표를 통해 ‘당사자’를 설정할지, 법과 외교를 통한 ‘방법’을 어떻게 민주주의적인 것으로 가져갈 수 있을지와 같은 질문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글쓴이는 양국 정부 간의 대화가 동북아안보체제의 강화를 위한 것이 아닌, 여성의 경험과 젠더 관점을 바탕으로 평화구축 메커니즘의 일부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각주 ^ 정부 의안. 의안번호 140239. 1993.5.7. 동아일보, “挺身隊(정신대) 보상 日(일)에 요구않겠다”, 1993.03.13. ^ 한겨레, “정부 구호조처 배경·의미 ‘종군위안부 피해’ 인도적 배려”, 1993.03.30. ^ 한겨레, “종군위안부 물적 보상 한국 불요구방침 호의”, 1993.03.15. ^ 한겨레, “정부 구호조처 배경·의미 ‘종군위안부 피해’ 인도적 배려”, 1993.03.30. ^ 이 글의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주도한 활동(1998~1990.11.16.)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1990.11.16. 결성, 현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의 활동을 가리킨다. ^ 한교여연 외 38개 여성단체, “공개서한: 내각총리대신 가이후 도시키 귀하”, 1990.10.17.; 한교여연 외 38개 여성단체, “공개서한: 노태우 대통령 귀하”, 1990.10.17. ^ 대한민국 국회사무처, 「제161회 국회 보건사회위원회회의록 제1호」, 1993.5.10., 76쪽. ^ 한국교회여성연합회(1992), 『정신대문제 자료집: 종군위안부 발자취를 따라서』, 96쪽. ^ 매일경제, “謝罪(사죄) 뜻 표명…誠意(성의) 보였다”, 1993.08.05. ^ ‘중대한(gross) 인권침해’란 국제법 규범을 위반하는, 피해자 숫자가 대규모이고 피해가 막대하며 장기적 영향을 미치는 피해를 의미한다.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1990년대 부상한 국제 전시 성폭력 이슈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며 국제인권법, 국제인도법에 근거해 그 불법성을 중대한 인권침해로 재정의하고 법적인 문제해결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해왔다. ^ 정대협,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김영삼 대통령의 3월 13일 자 지시에 대한 우리의 입장”, 1993.3.14. ^ 이효재·윤정옥·성봉희(정대협), “일본군위안부피해자에대한생활안정지원금증액”, 청원번호 150040, 1996.09.19. ^ 김수아(2000),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담론 구성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석사학위 논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20년사 편찬위원회(2014),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20년사』, 한울아카데미. ^ 이미경 의원 등 29인, 의안 번호 1393, 2001.12.31. 발의. ^ 대한민국 국회사무처, 「제161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록 제5호」, 1993.5.17.; 매일경제, “군대위안부法案(법안) 명칭논란”, 1993.04.30. ^ 2017년 개정법부터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지정하고 있다(제11조의2). ^ 대통령비서실편집부(2006), 『노무현 대통령 연설문집 제3권』, 대통령비서실, 306쪽. 2005년 한일회담 관련 문서의 전면공개와 ‘한일협정문서공개를위한민관공동위원회’ 구성과 후속 대책 발표, 그에 따른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법 제정과 변화한 대일기조방침의 표명은 이 지점을 잘 보여준다. ^ 한일일본군위안부피해자문제합의검토태스크포스,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2015.12.28.] 검토 결과 보고서」, 2017.12.27, 30-31쪽. 이 보고서에 따르면 ‘피해자 중심적 접근’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해결이 피해 여성의 존엄과 명예의 회복, 상처 치유에 있고, 피해 구제과정에서 피해자의 참여가 가장 중요하며, 정부는 피해자의 의사와 입장을 수렴해 외교협상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 조시현(2012),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인도주의 문제인가?: 한·일 정부의 최근 입장에 대하여」, 『민주주의 법학』 49, 165-193쪽. ^ 여성위원회 심사보고서, 2005.6, 14쪽. ^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제3조 부작위 위헌확인」 소송(2006헌마788, 2011.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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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위헌 결정, ‘위안부’ 문제의 흐름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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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쟁점과 방향 1부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위헌 결정, '위안부' 문제의 흐름을 바꾸다 현재 한일 외교 관계는 갈등 상황에 놓여 있다.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 정부의 경제 보복 조치에 대하여, 최근 한국 정부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GSOMIA)을 종료하기로 결정하였다. 외교 갈등 국면이 이어지는 한편,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 인정과 배상 등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쟁점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한일 간의 외교 문제는 비단 지금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쟁점은 과거에도 존재했고 앞으로도 숙제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위안부' 문제 진실 규명을 위한 한일 간의 책임있는 대화가 이어지기 위해 어떤 움직임을 보여야 할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은 이러한 고민을 담아 지난 2019년 6월 5일 좌담회를 진행했다. 본 좌담회는 지금의 한일 외교 갈등이 일어나기 전 시점에 이루어진 것으로 최근의 이슈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지는 못하지만,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쟁점과 맥락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1부 :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위헌 결정, '위안부' 문제의 흐름을 바꾸다 2부 : 2015년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법적 구속력은 어디까지인가 3부 : 진실 규명을 위한 양국간의 책임있는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좌담회 일자 : 2019년 6월 5일 사회 :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패널 : 남기정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 조양현 (외교안보연구소) /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본 좌담회에 참여한 패널의 입장은 각 소속 기관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의 외교적 현안과 국제적 맥락 Q.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익숙한 이슈죠. 하지만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의 외교적 현안과 지금까지의 진행 과정은 따라가기가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뉴스에서도 자주 다루어지지만, 아무래도 어려운 용어가 많고 워낙 다양한 사건들이 있었잖아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사건과 맥락을 웹진 <결> 독자분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정리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남기정 90년대 초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증언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이 문제와 관련된 한일 간의 외교적인 문제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은 일본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은 일본 쪽에 맡긴다는 것이었어요. 일본 내에서 자발적인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일본 정부도 이를 수용해서 외무성에서 직원들을 파견하여 '위안부' 문제를 조사했어요. 일본 정부의 조사 결과,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가 일정한 대응을 하는 것이 맞다고 인식을 했고, 그 입장을 정리한 결과가 1993년의 고노담화입니다. 일본 정부가 처음으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입장을 정리한 것이었죠. 이어서 일본 정부는 민간기금의 형식으로 아시아여성기금을 만듭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입장은 '법적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이미) 해결된 것이고, 이는 도의적인 책임에 따라서 하는 것이다'라는 것이었어요.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해결 노력이라기보다는 일본 국민의 성의라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내에서는 일본이 제대로 된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왔죠. 그래서 한국 내에서 '위안부' 문제에 관련해 일본 정부에 제대로 된 해결과 법적인 책임을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양상이 결정적으로 변하게 된 사건은 2011년 헌법재판소 부작위 위헌 결정이었습니다. 대법원의 결정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정식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한일 간의 외교 현안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죠.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 일본에 한일 청구권협정 3조에 따른 협의 요청을 하기도 했는데, 일본 정부에서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박근혜 정부 때 한국 내에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외교 문제로 풀어야 한다는 요구가 줄곧 제기되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한일 외교에 대해 소위 말하는 원 트랙 방식*을 취하고 있었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한일 외교에 걸림돌이 되는, 치워야 하는 현안이었죠. 그 결과 우리로서는 굉장히 미흡한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합의(이하 12.28 합의)가 나오게 된 거죠. *편집자 주 원 트랙 방식 : 과거사 문제와 한일 관계 정상화를 하나의 외교적 사안으로 바라보는 방식 투 트랙 방식 : 과거사 문제와 한일 관계 정상화를 다른 사안으로 분리하여 대응하는 방식 Q.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결정과 2015년의 12.28 합의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 현안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건인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뒤에 본격적으로 나누어보도록 하고요. 외교적, 법적 문제를 잘 모르는 입장에서 보면 일본군'위안부'를 둘러싼 정부의 방침들이 엎치락뒤치락하는 느낌이 들 것 같습니다. 외교적 현안을 이해할 때 어떤 맥락으로 이해하면 좋을지 포인트를 짚어주실 수 있을까요. 조양현 12.28 합의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포인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 포인트는 각 정권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김영삼 정부 이후 대체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대응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강했어요. 물론, 이명박 정부와 같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보다는 한일 신뢰관계를 우선으로 하는 방침도 있기는 했습니다. 일본의 경우,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제기된 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역사문제에 있어서 (고노담화에서 볼 수 있듯이) 저자세를 취했는데요, 2006년 아베 정부가 들어오면서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 부인 등 고노담화를 재검증하려고 하는 듯한 보수적인 모습을 보였어요. 역사수정주의 담론이 나오기 시작한 거죠.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약 30년 가까이 되다 보니까 (한일 양국의) 정권, 그리고 그 정권을 담당하는 최고 지도자의 개인의 이념이 이 문제를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2011년 헌법재판소 부작위 위헌 결정이었다고 봅니다. 대법원의 결정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대한민국의 방침을 실질적으로 변경시킨 효과가 있었어요. 이 결정이 나오기 전, 이명박 정부 초기에는 일본과 실리위주의 관계를 우선으로 하고 과거사에 관한 것은 외교부의 아젠다로 삼지 않겠다고 표명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 부작위위헌 결정이 나오니까 입장을 바꿉니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일본과의 공식 외교 아젠다로 제기합니다. 2011년 12월 교토회담이 이렇게 이루어지죠. 약 1시간 정도의 회담 내용 중 약 80%가 일본군'위안부' 문제, 과거사 문제에 대한 논의였다고 합니다. 2005년 노무현 정부 때 민관공동위원회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된 것이 아니며,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다"는 입장을 냈지만, 일본의 미온적인 대응으로 자칫 이 문제가 묻히기 쉬운 상황까지 갔었습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의 부작위위헌 결정이 이러한 흐름을 역전시키는 모멘텀이 되었던 것이죠. 이것은 대단히 획기적인 것이라고 봅니다. 사법판단이 외교정책에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세 번째 포인트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시각의 변화입니다. 초기의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한일) 양자 간의 문제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일본이 식민지배라는 불법적인 행위를 했고, 거기에 대해서 한국은 배상·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 과거 일본의 식민침략과 관련된 진실 규명을 해야한다는 거죠. 그런데 이것이 2000년대 들어가면서 (이미 국제 사회에서는 냉전 이후 90년대 중반부터 활성화됩니다만,) 전시 여성 성범죄 문제의 일환으로써 다루어져야 한다는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과거사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닌 현재 살아있는 이슈가 되는 거죠. 국제 사회에서의 여성 인권의 문제로 제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조시현 2004년에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가 특별법에 따라 활동을 개시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최근, 작년이죠. 2018년 10월 30일, 한국대법원에서 (일본 정부와 기업의) 강제동원으로 정신적인 피해를 받은 피해자들의 위자료청구권을 인정하고, 이에 따라서 일본 가해 기업들에게 배상을 명하는 판결(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했습니다. 강제동원피해라는 것은 아시다시피 일본군'위안부' 문제도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강제동원의 문제가 연관되어 있다고 보고, 이러한 측면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풀어가는 방향을 점검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국제사회에서 다루어 지고 있다는 것도 중요한 지점입니다. 아시다시피 1991년 김학순 피해자의 증언 직후 당시 UN인권위원회의 인권소위원회에서 이 문제가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로 다뤄지면서 국제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한국과 일본이 가입한 각종 인권 조약 하에서 한국과 일본의 인권 상황을 심의하는 절차들에서도 문제가 됩니다. 자유권위원회, 여성차별철폐위원회, 인종차별철폐위원회, 고문방지위원회 등 UN차원에서 일본 정부의 책임이행을 촉구하는 권고들이 지속적, 주기적으로 채택이 되어왔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2015년의 일본군'위안부' 문제 합의 자체에 대해서도 UN의 각종 인권 보장 기구들이 이런저런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뚜렷한 국제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소녀상 설립운동을 펼치기도 했고요. 이런 국제적인 흐름들이 계속되어 왔던 것이죠.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위헌 결정의 배경과 쟁점 Q.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 결정은 국민이 가장 의미 있다고 뽑은 헌재 결정이기도 하죠. 조양현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요. 그렇다면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어떤 맥락에서 나올 수 있었을까요. 조시현 2000년에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 '위안부'에 대한 가해는 국제법상 범죄이고 일본의 국가책임이 성립한다는 판결을 내립니다. 민간법정이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죠. 한국에서는 국회 법률에 따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보상하는 생활안정지원법이 있었지만, 이는 (일본이 아닌) 한국 정부의 대응이고, 더군다나 일시금을 지급했지만 인도적인 지원금일 뿐 제대로 된 보상이 아니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이밖에도 강제동원에 대한 진상규명 노력들이 있긴 했지만, 일본 정부의 책임을 추궁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국가 대 국가 차원의 외교현안으로 만들기 위해서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 이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시민사회 측에서 나오게 됩니다. '국가는 외교적으로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지는데, 그런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은 부작위이다, 국민을 위해서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운동단체의 요구가 있었던 겁니다. 재판이 굉장히 오래 걸렸죠. 판결이 5년 만에 나왔는데, 다행히 훌륭한 결정이었습니다. 한일 양국이 청구권협정을 놓고 다투고 있으니까, 한국 정부는 그러한 분쟁을 외교적인 노력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데, 현재는 그러지 않고 있다고 질책하는 결정이 나온 거죠. 이명박 정부도 이를 받아들이고 바로 일본 정부에 협의요청을 합니다. 2011년 8월 30일 헌재 결정이 났고 9월 15일 일본 정부에 대해 협의요청을 했으니까 보름 만에 행동을 취한 거죠. 어쨌든 아베 1차 내각의 설립 이후 '위안부' 강제동원 부정 등 부정적인 움직임 속에서 헌법 소원이 좋은 결과를 맺었습니다. 헌법 재판의 결과는 2012년 한국대법원의 강제동원 판결, 즉 신일본제철과 미쓰비시 중공업에 배상책임을 묻는 첫 번째 대법원 판결에서도 그 논리가 그대로 인정이 되었다고 보입니다. 일본의 식민지배는 불법적인 강점이고 그것을 전제로 한 강제동원은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이다. 따라서 거기에 대해서 일본기업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판결이었지요. 헌법재판소는 청구권협정에 강제동원 문제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협정 바깥에 있는 문제라고 봤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가 외교적 보호권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논리, 즉 한국 정부가 문제해결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논리와 외교적 보호권이 살아있다는 논리가 사실은 같은 이야기예요. 남기정 2005년도 한국대법원의 입장은 '1965년 청구권협정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 중에서 특히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 정부에 대응을 요구했던 것으로 기억하거든요. 굉장히 복잡한 문제지만, 청구권협정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를 이제까지 한국 정부가 손 놓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해결하라는 걸로 저는 이해를 했었어요. 청구권협정에 관한 해석의 문제가 아니고요. 청구권협정의 바깥에 있는 문제들을 이제는 구체적으로 한국 정부의 노력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판단을 여기서 처음 내렸다고 하는 것이죠. 1965년도에 우리가 포기하지 않았던 외교적 보호권도 있지만, 우리가 발휘하지 않은 외교적 보호권도 있다는거죠. 그것을 이행하라는 것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조시현 외교적 보호권이 요구하는 것과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궁극적으로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국제법상 외교적 보호권은 자국민이 해외에서 권리침해를 당했을 때 국가가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무를 뜻합니다. 외교적 보호권의 대상이 되는 사항들은 대게 해외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그 나라의 주권이 문제가 되고 내정간섭의 소지가 있지만, 자국민의 보호를 위해서는 본국이 개입해서 권리구제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차원에서 외교적 보호제도가 있는 것이죠. 구체적인 형태를 보면 협의 요청, 즉 대화입니다. 외교적 교섭이 있을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중재와 같은 국제재판을 통해서 해결안이 모색될 수도 있고요. 다양한 형태의 외교적 노력을 지칭하는 용어가 외교적 보호권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물론 정부가 아무것도 안 해온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헌법재판소는 정부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문을 한 거죠. 헌법재판소 홈페이지에서는 주요 결정 25선을 만화로 쉽게 표현하여 설명하고 있다. 25선 중에는 정부의 '위안부' 피해 외교적 방치 위헌 결정도 포함되어 있다. https://www.ccourt.go.kr/cckhome/kor/ccourt/maindecision/maindecision.do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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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학병의 사명과 '위안부'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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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병의 사명과 '위안부'의 운명 - 소설 「여명의 눈동자」를 통해 본 일제말기 청년들의 해방 이후 삶의 향방 1970년대 중반 신문에 연재된 김성종의 소설 「여명의 눈동자」는 이후 TV드라마와 연극 등으로 각색되며 큰 인기를 누렸다. 그 인기의 바탕에는 '위안부'를 성애화하여 관음증적 시선으로 보는 당대의 잘못된 인식이 작용하였음은 그간 많이 지적되었다. 이러한 한계에 더하여 국문학자 이지은은 이 소설을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된 식민지 청년들이 해방 이후 젠더에 따라 어떻게 다른 경험을 하였는지를 추적하면서, 한국사회에서 '위안부' 여성을 타자화하는 메커니즘을 분석한다. 전장(戰場)의 식민지 청년들 한국사회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한 윤정옥은 해방 이후 돌아오지 않는 여자들의 소식을 '학도병(학병)'을 통해 들었다고 한다.[1] 여기서 '학병'이란 '반도인학도특별지원병제'(1943.10 공포)로 인해 사실상 '강제' 입대한 학생들로, 이들은 조선인 '위안부'들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전장의 병사이자, 그녀들의 소식을 고국에 전해준 동포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학병과 '위안부'는 서로 다른 역사적 위치에 놓이게 된다. 많은 학병들이 전장에서 희생되었으나, 귀환한 학병들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 그룹으로서 새로운 국가 건설의 주역이 되었다. 귀환 학병들에겐 '국가 건설'이라는 역사적 과업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으며, 따라서 공동의 과업에 참여한 이들은 실제 학병 징집자든, 기피자든, 면제자든 할 것 없이 모두 '학병 세대'로 포괄될 수 있었다.[2] 반면, 귀환한 '위안부' 피해자들은 많은 경우 생활고를 면치 못하였으며, 심지어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위안소 생활을 전시 성폭력의 '피해'로 말할 수 있는 공론장도 제대로 가지지 못했다. 이들에겐 자신들의 경험을 공유할 사회적 계기도, 역사적 과업에 참여할 기회도 없었다. 김성종의 소설 「여명의 눈동자」(『일간스포츠』, 1975.10.1~1981.3.2.)[3]는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된 식민지 청년들, 즉 학병과 '위안부'가 해방 공간과 6·25전쟁을 거치며 어떻게 다른 역사적‧사회적 위치를 부여받는지 살피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인 텍스트다. TV드라마, 연극 등으로 각색되며 한국 사회에 '윤여옥'이라는 대표적인 '위안부' 상(像)을 남긴 「여명의 눈동자」는 연재 중에 단행본이 출간될 만큼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소설의 인기가 상당 부분 여성 섹슈얼리티를 외설적으로 소비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글은 소설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한 다음, 소설이 '위안부' 여성을 타자화하는 메커니즘을 분석하여 '위안부'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역사적 주체의 자리로부터 탈각되었는지 그 인식의 한 단면을 살펴본다. 제국의 폭력이 만든 '학병-위안부'의 연대 「여명의 눈동자」는 '위안부'로 차출된 여옥과 대학을 다니다가 학병으로 징집된 대치, 하림을 교차해 보여주면서 장구한 서사의 첫머리를 시작한다. 이들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은 부대를 따라 전선을 이동하면서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한다. 그런데 의미심장하게도 소설에서 '여옥-대치', '여옥-하림'은 모두 제국의 권력 장치 아래에서 성적 관계를 맺게 된다. 먼저, 대치의 경우 고참의 강요로 위안소를 찾았다가 '위안부'가 된 여옥을 만나게 되고, 서로에게 연민을 품은 두 사람은 위안소에서 관계를 맺게 된다. 한편, 여옥이 하림과 성적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일제의 감옥소 안이다. 사이판에서 포로로 붙잡힌 여옥과 하림은 미군 OSS 요원이 되고, 이후 미군의 지시 하에 조선 독립을 위한 공작을 전개해 나간다. 그러던 중 일제 경찰에 발각되고, 경찰은 고문의 강도를 높이다 급기야 여옥과 하림에게 그들이 보는 앞에서 성교를 강요한다. 이 에피소드는 「여명의 눈동자」의 관음증적 시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자, 동시에 학병과 '위안부'가 어떠한 조건 속에서 동류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치이다. 소설은 학병과 '위안부'가 위안소나 감옥과 같은 제국의 폭력장치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며 연대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국가 건설의 사명과 대결 구도의 재배치 그렇다면 제국이라는 적대항이 없어진 뒤에도 학병과 '위안부'는 연대할 수 있을까. 해방공간으로 접어들면서 「여명의 눈동자」는 독립국가 건설의 주역으로 학병 세대를 호명하고자 하는 욕망을 매우 강하게 드러낸다. 이들은 국민국가 건설을 주도해 나갈 만한 엘리트 집단이기도 했거니와, 친일 혐의로부터 자유로운 세대였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군에서 탈영한 학병들은 중국군이나 광복군 등에 합류해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독립 국가 건설의 주체로서 도덕적·정치적 우위를 확보하였다. 「여명의 눈동자」 또한 학병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하림과 대치의 항일 무장 투쟁 행적을 강조한다. 대치가 중국 국민당, 공산당 군대를 두루 거쳐 팔로군 내 조선인 병사들을 이끌고 귀환한다면, 하림은 미군 OSS 요원으로서 해방 직전 경성으로 침투한다. 이후 이들은 해방 공간의 주요 사건들, 이를 테면 각종 암살 사건,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1946), 9월총파업(1946), 4.3항쟁(1948), 여순사건(1948), 지리산 빨치산 투쟁(1951) 등에서 매번 대결하게 된다. 남한에서 벌어진 좌우 갈등에서 대치는 빨치산 수장으로, 하림은 진압군 대장으로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이때 국가건설의 주역으로 학병 세대를 호명하고자 하는 욕망은 해방 공간의 갈등과 대립을 '학병 vs 학병'의 구도로 재배치함으로써 달성된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 제주 4.3항쟁에서 대치와 하림의 대결이다. 소설은 무장대 총사령관과 진압 사령관의 협상, 토벌대 사령관의 피살사건 등 당대 알려진 4.3사건의 전개를 유사하게 따라가면서도, 일본군 출신의 토벌대 사령관들을 탈영 학병 출신의 하림으로 대체한다. 미군과 이승만 정부는 제주 4.3사건이 일어나자 만주에서 대유격전의 경험을 쌓은 일본군 출신 방공(防共) 전사들을 제주도와 지리산으로 파견했다.[4] 그러나 「여명의 눈동자」는 제주 4.3사건을 둘러싼 해방공간의 갈등 구도를 대치와 하림, 즉 '학병 vs. 학병'으로 재배치한다. 미소 군정과 남북 단독 정부의 수립,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동족상잔의 비극은 신제국의 점령지가 된 약소민족의 설움으로, 혹은 새로운 국민국가 건설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갈등으로 서사화될 수는 있지만, '해방' 공간에서조차 '일본군 출신의 군·경 vs 학병이 지휘하는 무장대'의 대결로 그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하림과 함께 남쪽의 편에 서 있는 「여명의 눈동자」의 입장에서 '학병이 이끄는 무장대'와 대결하는 남쪽 세력이 일본군 출신의 군부여서는 안 되었을 것이다. 요컨대, '제국-식민지/점령지'의 대결 구도가 재배치되고 국민국가 건설이 역사적 사명으로 주어지면서, 해방 공간에서는 '학병-위안부'의 연대 대신 정국을 주도하기 위한 학병 간의 갈등이 전면화된다. 이와 같은 서사 전략은 식민지 역사 및 친일 잔재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은 실현하지만, 남한 통치체제 내부에 존속한 식민의 잔재는 은폐하는 우를 범한다. 여자의 운명과 역사로부터의 배제 혹은 초월 해방 공간이 학병 사이의 대결로 재편되었다면, 여기에서 누락된 '위안부'의 역사적 위치는 어디일까. 학병과 '위안부'가 제국의 폭력 속에서 연대를 형성하였다면, 해방 공간에서 이들의 관계는 어떻게 변모하였을까. 해방 직후 대치는 여옥을 식민지 역사가 빚은 "대표적인 비운의 여성"이자 "치욕스런 역사의 잔영"이라 여기며, 안타깝지만 새 시대의 그늘에 "숨어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5] 반면, 하림이 보기에 일본군 '위안부'로 전선에 끌려갔다가 아이까지 낳아 살아 돌아온 여옥은 그야말로 "하나의 신화"이다.[6] 역경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와 생명력의 상징인 것이다. 얼핏 대치와 하림은 정반대의 시각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일본군 '위안부'를 수치로 여기는 쪽이나, 민족의 신화로 여기며 보호하려는 쪽이나, '위안부' 피해자를 새 시대의 역사적 주체로서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상통한다. '위안부'를 역사적 사명을 둘러싼 대결구도로부터 배제하든, 혹은 신화화하여 역사로부터 초월하게 하든, '위안부' 피해자는 지금-여기 역사적 주체의 자리에서 탈각된다. 이와 같은 타자화의 시선은 대치와 하림이 여옥과 맺는 섹슈얼한 장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소설 내내 모든 면에서 대조적으로 그려지는 대치와 하림이지만, 섹슈얼한 장면에서 이들의 태도는 놀랍도록 유사하다. 대치와 하림은 여옥과의 관계에서 항상 그녀의 벌거벗은 몸을 '바라보는 자'의 위치를 점한다. 제국의 폭력 아래에서 연대관계였던 학병과 '위안부'가 해방 공간에서는 시선의 주체와 보이는 대상으로 분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보는 주체-벌거벗겨진 몸'이라는 권력 구도는 식민지 시기 대치와 하림이 경험한 '일본군-조선인 학병(대치)', '미군-조선인 포로(하림)' 관계와 유사하다. 조선인 학병들을 괴롭히던 일본군의 오오에 오장은 대치에게 자신이 보는 데서 점령지 여성을 강간할 것을 명령하였다. 오오에는 대치를 벗게 만듦으로써 대치가 자신의 권력 아래에 놓여 있음을 확인시키고, 대치는 점령지 여성을 강간함으로써 오오에와 같은 '점령군'이 되었다. 하림의 경우 또한 이와 유사하다. 하림이 OSS 요원이 되기 위해 심사를 받으러 갔을 때, 미군 심판관은 하림에게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다. 미군 심판관은 '벌거벗겨진 몸'이 바라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 사이의 권력관계를 선명하게 가시화하고, 이를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는 것을 이용한다. 제국의 군대는 자신들의 권력을 과시하고, 식민지 청년들을 길들이기 위해 섹슈얼리티에 대한 폭력을 활용했다. 그렇다면 대치와 여옥, 하림과 여옥이 '보는 주체- 보이는 대상'의 관계를 맺는 장면은 단지 '학병-위안부'의 연대적 관계가 위계적 관계로 재편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그러한 권력적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이 제국의 폭력과 상당히 유사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제국의 억압 아래에서 '학병-위안부'는 식민지 민족으로서 연대관계를 맺었지만, 해방 공간에서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역사적 사명은 학병의 몫이 되었다. 학병들이 새로운 국가(건설) 세력이 되었다면, '위안부'는 또 다른 국가(건설) 세력에 의해 식민화된 셈이다. 해방 직후 하림이 독립국가 건설을 꿈꾸고, 대치가 공산국가 건설을 꿈꿀 때, 여옥 또한 "앞으로 나의 육체를 탐내는 남성들은 모두 나의 적"[7]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소설에서 여옥의 '여자의 길'은 '아내의 길'로 회수되고 만다. 문제는 '아내의 길'이 여옥의 정치적 주체성만을 박탈하는 게 아니라, 그녀에 대한 대치의 착취 또한 은폐한다는 점이다. 대치는 여옥에게 미군의 정보를 빼내 올 것을 요구했고, 여옥은 내키지 않음에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그의 말을 따랐다. 가부장제 규범은 대치가 여옥을 끊임없이 이용하게 하는 구실이 되어주면서, 동시에 그 착취를 착취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은폐 기제였다. 이러한 까닭에 여옥은 두 아들을 잃은 후에야 마침내 대치를 거절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대치가 6·25 전쟁 중에 빨치산이 되어 찾아오자, 여옥은 또 다시 그를 거절할 수 없게 된다. 여옥은 대치를 도와주기 위해 빨치산 무리를 토벌군 대장인 하림에게 알리지만, 이는 배신행위로 간주되어 결국 여옥은 대치 손에 죽게 된다. 이후 대치는 빨치산 동료들에게 버려지고, 곧이어 미쳐버린다. 하림은 대치에게 마지막 호의를 베풀어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게 한다. 이로써 「여명의 눈동자」는 남쪽 체제를 택한 하림만 남기고 모두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시킨다. 여옥의 무덤 위에서 살아가는 여자들 1975년 10월 1일부터 1981년 3월 2일까지 장장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연재된 대하소설 「여명의 눈동자」는 여옥의 묘비문을 마지막 문장으로 하여 끝을 맺는다. 여옥의 무덤은 눈 속에 들어 있었다. 얼마 전에 세워준 조그만 돌비도 눈 속에 서있었다. 그[하림-인용자]는 거기에 쌓인 눈을 손으로 쓸어냈다. 그리고 여옥의 얼굴을 어루만지듯 자꾸만 그 돌비를 어루만졌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있었다. 「윤여옥, 1928년3월5일~1951년8월9일」 - 「여명의 눈동자」(1661), 1981.3.2. "신화"라는 것이 본래 초월적 세계의 이야기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하림이 지키려고 했던 "신화"는 역설적으로 여옥의 죽음으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대치가 말했던 "역사의 잔영으로 그늘에 숨어"들어야 하는 '위안부'의 운명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림과 대치의 상반된 태도는 결국 여옥의 존재가 하나의 비석으로, 민족 수난사의 상징으로 물화(物化)됨으로써 합치된 셈이다. 물론 이는 여옥을 대상화·타자화했던 두 사람의 시선에서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위안부'는 하림과 대치의 은밀한 바람처럼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실제 역사에선 여옥이 사망한 바로 그 즈음 연합군/한국군 위안소가 세워졌다. "정부가 연합군 전용 위안소 설치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결정적 자료는 보건부가 1951년 10월 10일에 결재한 「청소 및 접객영업 위생사무 취급요령 추가지시에 관한 건」(保防 제1726호)이다."[8] 해방 이후 '위안부' 제도는 남한 정부에 의해 계승‧변형되었다. 소설은 조국이 지키지 못한 '단 한 명의 여자'의 죽음에 애달파 하였으나, 조국이 지키지 못한 여자는 '한 명'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결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하나는 해방 이후 '위안부' 제도의 변형과 계승이 애초 소설 속에 예견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군 '위안부' 제도가 존속된 것은 한국 군대가 미군정의 비호 아래 일본군, 일본 육사 출신의 병사와 간부를 다수로 하여 창설되었기 때문이다.[9] 실제로 6·25전쟁 당시 한 장교는 "군 '위안부'를 이용하도록 지시를 내렸던 연대장이 관동군 출신자였으므로 군 '위안부' 발상을 했다고 기억했다."[10] 그러나 「여명의 눈동자」는 새로운 국가 건설기의 '적자'로서 학병을 호명하기 위해 남한 군대에 이어져 내려온 식민주의의 연속성을 삭제해 버렸다. 국가 건설 시기 남한 군·경의 지휘부에 자리 잡았던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자 대신 탈영 학병 하림을 내세웠던 것이다. 식민주의의 잔재를 삭제하고자 했던 욕망은 그 의도와 별개로 오히려 식민주의의 연속성을 은폐하는 기능을 하고 만 셈이다. 이때 은폐된 존재란 바로 여옥의 무덤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신화도 역사도 되지 못했던 연합군/한국군 '위안부'들이다. 다른 하나는 「여명의 눈동자」에 '위안부' 피해자가 단 한 명만 등장한다는 점이다. 소설은 남한에 계속해서 존재했던 군 '위안부'만 은폐하는 게 아니라, 여옥 이외에 어떠한 일본군 '위안부'도 그리지 않는다. 위안소에서 다른 '위안부'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녀들 가운데 여옥 외에 귀환한 여자는 없다. 하림이 학병 기피자들과 함께 친일파를 처단하고, 대치가 귀환 학병들과 함께 제주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키지만, 여옥은 해방된 나라에서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지닌 여자를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한다. '위안부' 피해자는 오직 여옥 한 명만이 존재한다. 학병들에겐 그들을 모이게 하는 역사적 과업이 주어지지만, '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게 하는 역사적·사회적 계기는 없다. 대신 여옥에게 주어진 것은 '아내의 길'이었다. 학병이 역사적 '사명'을 통해 세대로 구성된다면, '위안부' 피해자는 탈역사적인 여자의 '운명'으로 귀속되었다. 그러나 '위안부'에겐 이러한 운명조차도 가부장제 규범과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왜곡된 인식으로 인해 비극으로 끝나버리고 만다. 대신 이 비극적 운명을 통해 '위안부'는 민족 수난사의 상징으로, 하나의 신화로 완성되고 만다. 각주 ^ 윤미향, 『25년간의 수요일』, 사이행성, 2016, pp. 121~122. ^ 김건우, 「운명과 원한」, 『서강인문논총』 52,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8 참조. ^ 이 글은 『일간스포츠』 연재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이하 작품명, 연재 횟수, 날짜만 표기함. ^ 허은, 『냉전과 새마을』, 창비, 2022, p. 85. ^ 「여명의 눈동자」(727), 1978.2.16. ^ 「여명의 눈동자」(1031), 1979.2.14. ^ 「여명의 눈동자」(1031), 1979.2.14. ^ 박정미, 「한국 성매매정책에 관한 연구 : '묵인-관리 체제'의 변동과 성판매여성의 역사적 구성, 1945∼2005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p. 99. ^ 김귀옥, 『그곳에 한국군'위안부'가 있었다』, 선인, 2019, pp. 167~168. ^ 김귀옥, 『그곳에 한국군'위안부'가 있었다』, 선인, 2019, p. 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