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검색
-
- 2019년 좌담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위헌 결정, ‘위안부’ 문제의 흐름을 바꾸다
-
[좌담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쟁점과 방향 1부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위헌 결정, '위안부' 문제의 흐름을 바꾸다 현재 한일 외교 관계는 갈등 상황에 놓여 있다.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 정부의 경제 보복 조치에 대하여, 최근 한국 정부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GSOMIA)을 종료하기로 결정하였다. 외교 갈등 국면이 이어지는 한편,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 인정과 배상 등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쟁점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한일 간의 외교 문제는 비단 지금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쟁점은 과거에도 존재했고 앞으로도 숙제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위안부' 문제 진실 규명을 위한 한일 간의 책임있는 대화가 이어지기 위해 어떤 움직임을 보여야 할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은 이러한 고민을 담아 지난 2019년 6월 5일 좌담회를 진행했다. 본 좌담회는 지금의 한일 외교 갈등이 일어나기 전 시점에 이루어진 것으로 최근의 이슈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지는 못하지만,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쟁점과 맥락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1부 :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위헌 결정, '위안부' 문제의 흐름을 바꾸다 2부 : 2015년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법적 구속력은 어디까지인가 3부 : 진실 규명을 위한 양국간의 책임있는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좌담회 일자 : 2019년 6월 5일 사회 :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패널 : 남기정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 조양현 (외교안보연구소) /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본 좌담회에 참여한 패널의 입장은 각 소속 기관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의 외교적 현안과 국제적 맥락 Q.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익숙한 이슈죠. 하지만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의 외교적 현안과 지금까지의 진행 과정은 따라가기가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뉴스에서도 자주 다루어지지만, 아무래도 어려운 용어가 많고 워낙 다양한 사건들이 있었잖아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사건과 맥락을 웹진 <결> 독자분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정리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남기정 90년대 초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증언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이 문제와 관련된 한일 간의 외교적인 문제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은 일본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은 일본 쪽에 맡긴다는 것이었어요. 일본 내에서 자발적인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일본 정부도 이를 수용해서 외무성에서 직원들을 파견하여 '위안부' 문제를 조사했어요. 일본 정부의 조사 결과,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가 일정한 대응을 하는 것이 맞다고 인식을 했고, 그 입장을 정리한 결과가 1993년의 고노담화입니다. 일본 정부가 처음으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입장을 정리한 것이었죠. 이어서 일본 정부는 민간기금의 형식으로 아시아여성기금을 만듭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입장은 '법적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이미) 해결된 것이고, 이는 도의적인 책임에 따라서 하는 것이다'라는 것이었어요.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해결 노력이라기보다는 일본 국민의 성의라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내에서는 일본이 제대로 된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왔죠. 그래서 한국 내에서 '위안부' 문제에 관련해 일본 정부에 제대로 된 해결과 법적인 책임을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양상이 결정적으로 변하게 된 사건은 2011년 헌법재판소 부작위 위헌 결정이었습니다. 대법원의 결정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정식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한일 간의 외교 현안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죠.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 일본에 한일 청구권협정 3조에 따른 협의 요청을 하기도 했는데, 일본 정부에서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박근혜 정부 때 한국 내에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외교 문제로 풀어야 한다는 요구가 줄곧 제기되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한일 외교에 대해 소위 말하는 원 트랙 방식*을 취하고 있었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한일 외교에 걸림돌이 되는, 치워야 하는 현안이었죠. 그 결과 우리로서는 굉장히 미흡한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합의(이하 12.28 합의)가 나오게 된 거죠. *편집자 주 원 트랙 방식 : 과거사 문제와 한일 관계 정상화를 하나의 외교적 사안으로 바라보는 방식 투 트랙 방식 : 과거사 문제와 한일 관계 정상화를 다른 사안으로 분리하여 대응하는 방식 Q.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결정과 2015년의 12.28 합의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 현안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건인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뒤에 본격적으로 나누어보도록 하고요. 외교적, 법적 문제를 잘 모르는 입장에서 보면 일본군'위안부'를 둘러싼 정부의 방침들이 엎치락뒤치락하는 느낌이 들 것 같습니다. 외교적 현안을 이해할 때 어떤 맥락으로 이해하면 좋을지 포인트를 짚어주실 수 있을까요. 조양현 12.28 합의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포인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 포인트는 각 정권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김영삼 정부 이후 대체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대응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강했어요. 물론, 이명박 정부와 같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보다는 한일 신뢰관계를 우선으로 하는 방침도 있기는 했습니다. 일본의 경우,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제기된 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역사문제에 있어서 ( 고노담화에서 볼 수 있듯이) 저자세를 취했는데요, 2006년 아베 정부가 들어오면서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 부인 등 고노담화를 재검증하려고 하는 듯한 보수적인 모습을 보였어요. 역사수정주의 담론이 나오기 시작한 거죠.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약 30년 가까이 되다 보니까 (한일 양국의) 정권, 그리고 그 정권을 담당하는 최고 지도자의 개인의 이념이 이 문제를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2011년 헌법재판소 부작위 위헌 결정이었다고 봅니다. 대법원의 결정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대한민국의 방침을 실질적으로 변경시킨 효과가 있었어요. 이 결정이 나오기 전, 이명박 정부 초기에는 일본과 실리위주의 관계를 우선으로 하고 과거사에 관한 것은 외교부의 아젠다로 삼지 않겠다고 표명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 부작위위헌 결정이 나오니까 입장을 바꿉니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일본과의 공식 외교 아젠다로 제기합니다. 2011년 12월 교토회담이 이렇게 이루어지죠. 약 1시간 정도의 회담 내용 중 약 80%가 일본군'위안부' 문제, 과거사 문제에 대한 논의였다고 합니다. 2005년 노무현 정부 때 민관공동위원회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된 것이 아니며,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다"는 입장을 냈지만, 일본의 미온적인 대응으로 자칫 이 문제가 묻히기 쉬운 상황까지 갔었습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의 부작위위헌 결정이 이러한 흐름을 역전시키는 모멘텀이 되었던 것이죠. 이것은 대단히 획기적인 것이라고 봅니다. 사법판단이 외교정책에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세 번째 포인트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시각의 변화입니다. 초기의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한일) 양자 간의 문제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일본이 식민지배라는 불법적인 행위를 했고, 거기에 대해서 한국은 배상·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 과거 일본의 식민침략과 관련된 진실 규명을 해야한다는 거죠. 그런데 이것이 2000년대 들어가면서 (이미 국제 사회에서는 냉전 이후 90년대 중반부터 활성화됩니다만,) 전시 여성 성범죄 문제의 일환으로써 다루어져야 한다는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과거사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닌 현재 살아있는 이슈가 되는 거죠. 국제 사회에서의 여성 인권의 문제로 제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조시현 2004년에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가 특별법에 따라 활동을 개시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최근, 작년이죠. 2018년 10월 30일, 한국대법원에서 (일본 정부와 기업의) 강제동원으로 정신적인 피해를 받은 피해자들의 위자료청구권을 인정하고, 이에 따라서 일본 가해 기업들에게 배상을 명하는 판결(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했습니다. 강제동원피해라는 것은 아시다시피 일본군'위안부' 문제도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강제동원의 문제가 연관되어 있다고 보고, 이러한 측면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풀어가는 방향을 점검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국제사회에서 다루어 지고 있다는 것도 중요한 지점입니다. 아시다시피 1991년 김학순 피해자의 증언 직후 당시 UN인권위원회의 인권소위원회에서 이 문제가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로 다뤄지면서 국제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한국과 일본이 가입한 각종 인권 조약 하에서 한국과 일본의 인권 상황을 심의하는 절차들에서도 문제가 됩니다. 자유권위원회, 여성차별철폐위원회, 인종차별철폐위원회, 고문방지위원회 등 UN차원에서 일본 정부의 책임이행을 촉구하는 권고들이 지속적, 주기적으로 채택이 되어왔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2015년의 일본군'위안부' 문제 합의 자체에 대해서도 UN의 각종 인권 보장 기구들이 이런저런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뚜렷한 국제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소녀상 설립운동을 펼치기도 했고요. 이런 국제적인 흐름들이 계속되어 왔던 것이죠.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위헌 결정의 배경과 쟁점 Q.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 결정은 국민이 가장 의미 있다고 뽑은 헌재 결정이기도 하죠. 조양현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요. 그렇다면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어떤 맥락에서 나올 수 있었을까요. 조시현 2000년에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 '위안부'에 대한 가해는 국제법상 범죄이고 일본의 국가책임이 성립한다는 판결을 내립니다. 민간법정이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죠. 한국에서는 국회 법률에 따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보상하는 생활안정지원법이 있었지만, 이는 (일본이 아닌) 한국 정부의 대응이고, 더군다나 일시금을 지급했지만 인도적인 지원금일 뿐 제대로 된 보상이 아니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이밖에도 강제동원에 대한 진상규명 노력들이 있긴 했지만, 일본 정부의 책임을 추궁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국가 대 국가 차원의 외교현안으로 만들기 위해서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 이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시민사회 측에서 나오게 됩니다. '국가는 외교적으로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지는데, 그런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은 부작위이다, 국민을 위해서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운동단체의 요구가 있었던 겁니다. 재판이 굉장히 오래 걸렸죠. 판결이 5년 만에 나왔는데, 다행히 훌륭한 결정이었습니다. 한일 양국이 청구권협정을 놓고 다투고 있으니까, 한국 정부는 그러한 분쟁을 외교적인 노력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데, 현재는 그러지 않고 있다고 질책하는 결정이 나온 거죠. 이명박 정부도 이를 받아들이고 바로 일본 정부에 협의요청을 합니다. 2011년 8월 30일 헌재 결정이 났고 9월 15일 일본 정부에 대해 협의요청을 했으니까 보름 만에 행동을 취한 거죠. 어쨌든 아베 1차 내각의 설립 이후 '위안부' 강제동원 부정 등 부정적인 움직임 속에서 헌법 소원이 좋은 결과를 맺었습니다. 헌법 재판의 결과는 2012년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판결, 즉 신일본제철과 미쓰비시 중공업에 배상책임을 묻는 첫 번째 대법원 판결에서도 그 논리가 그대로 인정이 되었다고 보입니다. 일본의 식민지배는 불법적인 강점이고 그것을 전제로 한 강제동원은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이다. 따라서 거기에 대해서 일본기업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판결이었지요. 헌법재판소는 청구권협정에 강제동원 문제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협정 바깥에 있는 문제라고 봤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가 외교적 보호권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논리, 즉 한국 정부가 문제해결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논리와 외교적 보호권이 살아있다는 논리가 사실은 같은 이야기예요. 남기정 2005년도 한국대법원의 입장은 '1965년 청구권협정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 중에서 특히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 정부에 대응을 요구했던 것으로 기억하거든요. 굉장히 복잡한 문제지만, 청구권협정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를 이제까지 한국 정부가 손 놓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해결하라는 걸로 저는 이해를 했었어요. 청구권협정에 관한 해석의 문제가 아니고요. 청구권협정의 바깥에 있는 문제들을 이제는 구체적으로 한국 정부의 노력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판단을 여기서 처음 내렸다고 하는 것이죠. 1965년도에 우리가 포기하지 않았던 외교적 보호권도 있지만, 우리가 발휘하지 않은 외교적 보호권도 있다는거죠. 그것을 이행하라는 것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조시현 외교적 보호권이 요구하는 것과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궁극적으로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국제법상 외교적 보호권은 자국민이 해외에서 권리침해를 당했을 때 국가가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무를 뜻합니다. 외교적 보호권의 대상이 되는 사항들은 대게 해외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그 나라의 주권이 문제가 되고 내정간섭의 소지가 있지만, 자국민의 보호를 위해서는 본국이 개입해서 권리구제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차원에서 외교적 보호제도가 있는 것이죠. 구체적인 형태를 보면 협의 요청, 즉 대화입니다. 외교적 교섭이 있을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중재와 같은 국제재판을 통해서 해결안이 모색될 수도 있고요. 다양한 형태의 외교적 노력을 지칭하는 용어가 외교적 보호권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물론 정부가 아무것도 안 해온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헌법재판소는 정부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문을 한 거죠. 헌법재판소 홈페이지에서는 주요 결정 25선을 만화로 쉽게 표현하여 설명하고 있다. 25선 중에는 정부의 '위안부' 피해 외교적 방치 위헌 결정도 포함되어 있다. https://www.ccourt.go.kr/cckhome/kor/ccourt/maindecision/maindecision.do 2부에서 계속됩니다.
-
- 2023년 좌담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듣다 I
-
2023년 기림의 날 특집 : 일본군‘위안부’ 역사, 우리 모두의 삶 오키나와의 할머니, 배봉기 님이 돌아가시고 7년이 흐른 뒤, 그 반평생을 취재하여 기사로 엮어낸 일본인 기자가 있습니다. 매 학기 대학 강의실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다양한 논점을 학생들과 토론하는 서울의 교수님들이 있습니다. 미국 내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역사를 알리고 소수자 혐오범죄 및 성폭력 방지 교육활동을 하는 샌프란시스코의 시민단체가 있습니다. 이처럼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교훈은 저마다의 공동체와 시민적 삶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변화를 촉구합니다. 2023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그 작지만 큰 실천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1. 배봉기 씨가 오키나와에서 걸어온 전후(戦後) 2. 샌프란시스코 시민운동과 미국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이 가지는 의미 3.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듣다 I 4.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듣다 II Q. 안녕하세요, 선생님들. 간단히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김신현경 여성학을 전공하고 현재 서울여대 교양대학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여성학 관련 교양 강의를 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김성운 일본 현대사를 전공했고, 덕성여대 사학과에서 동양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박사 논문을 쓸 땐 일본 대중문화사에 관심을 두고 공부했고, 냉전 체제의 시각에서 일본의 TV 방송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살폈습니다. 이것을 기반으로 연구 영역을 확장해나가고 있어요. 일본의 대중문화를 들여다보면서 <일본 TV의 ‘위안부’ 문제 재현>을 주제로 연구 계획서를 쓴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일본 현대사 영역을 가르치면서 한국 학생들에게 무엇을 전해줘야 할까라는 문제의식이 생겼고, 작년부터 한일 관계사를 강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학기의 절반 이상을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할애하게 되더라고요. 아무래도 심도 있는 문제이니까요. 장휘 연세대 통일연구원의 연구원으로 있고, 동아시아 민족주의를 전공했습니다. 박사 논문은 <'위안부’ 운동이 한국 민족주의 담론에 미친 영향>을 주제로 썼습니다. 지난해에는 덕성여대에서, 지금은 전북대와 연세대에서 강의하고 있어요. 제가 하는 수업들이 주로 동아시아 민족주의와 관련된 강의라 ‘위안부’ 문제를 일부분 다루고 있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 역사라고 해도 역사학, 문화연구, 국제관계학, 비판적 동아시아 연구, 여성학 등 각자 전공과 학문 분야에 따라 주목하는 측면이 다를 것 같습니다. 선생님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강의에서 어떤 커리큘럼으로 이 문제를 다루거나 가르치고 계신지요. 김신현경 저는 여성학 세부 전공 중에서 섹슈얼리티를 전공했습니다. 성적인 것이 어떻게 사회문화적, 젠더적으로 구성되는가를 공부했고, ‘한국의 연예산업에서 젠더화된 섹슈얼리티 이미지가 어떻게 상품이 되어가는가’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습니다. 한국의 연예산업을 통해 여성의 성과 몸이 동원되어온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죠. 현재 대학에서 ‘여성과 역사’, ‘젠더와 문화’라는 제목의 교양 강의를 하고 있는데, ‘여성과 역사’에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여성사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 중요한 이슈로 다루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위안부’ 문제를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해당 이슈를 여성사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생각은 대부분 하지 못해요. ‘젠더와 문화’에서는 ‘위안부’ 문제의 기억과 문화 재현이라는 관점에서 학생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장휘 2007~8년 즈음 박사과정을 밟을 때 한국의 ‘위안부’ 문제 관련 운동과 민족주의 담론이 어떻게 진행되고 구축되어 왔는지 살펴보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 있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논문을 쓰면서 ‘위안부’ 운동을 하는 분들을 인터뷰했고, 덕분에 이 문제에 깊숙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제 수업에는 외국인 학생이 많아요. 전북대 수강생의 3분의 2에서 절반은 한국 학생이고, 나머지 중 70%가 우즈베키스탄, 20% 정도가 방글라데시 학생입니다. 인도네시아, 독일 교환 학생을 비롯해 몰도바, 러시아, 베트남 등 다양한 국적의 학생이 있고요. 연세대에서는 국제학대학원과 언더우드 국제대학(UIC)에서 수업을 했는데 3년 전까지는 UIC 입학생들이 많았어요. 80%가 한국 학생이었고, 교포 혹은 외국 생활을 오래 한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나머지 20%가 외국인인데 유럽, 미국 학생이 많았죠. 가끔 중국이나 몽골 학생들이 있고요. 그런데 지금은 교환 학생으로 많이들 오고 있어요. 그중 미국 학생이 90%, 유럽, 남미 학생이 10%, 아시아 학생이 5~10% 정도 됩니다. 한국 학생만을 가르치는 것과는 분위기가 다를 수밖에 없죠. 미국,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에서 온 친구들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거의 모르니까요. 신기한 건 UIC의 한국 학생 중 ‘위안부’ 관련 운동을 하거나 단체에 있는 친구들이 꽤 많았다는 거예요. 보통 2개 국어가 되니까 관련 행사에서 통역을 하기도 하고요.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저보다 ‘위안부’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잘 모르긴 하지만, 그래도 몇몇 친구들은 심도 있는 논의를 하기도 하고요. 최근에는 아주 일부지만 한국 학생들보다 ‘위안부’를 더 깊이 이해하고 있는 외국 학생도 옛날보다는 많아진 것 같습니다. 이번 학기 수업을 하면서 놀랐던 것이, 미국 학교 중 아시아 관련 수업으로 ‘위안부’ 주제가 특화돼있는 수업도 있다는 점이었어요. 강의 제목 자체가 ‘위안부’인 경우도 있고요. Q. 일본군‘위안부’ 운동도 대중화되었고, 30년 세월 속에서 이슈 자체가 국제화되다 보니 관심 있는 학생들은 굉장히 잘 알고, 관심 없는 학생들은 아예 모르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든 없든, 일종의 시대적 흐름이었기 때문에 선생님들께서는 1991년 국내 생존자로 처음 공개 증언을 하신 김학순 님을 잘 아실 테지요. 반면 요즘 학부생들은 김학순 님의 이름을 모르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러한 차이를 실감하시나요? 김성운 수업하면서 그런 어려움을 느낀 적은 없습니다. 제 수업이 전공수업이라 주로 사학과 전공생들이 들어오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역사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이죠. 다만 동양사 전공 교수로서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반일, 반중 감정입니다. 대체로 일본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접근하는 것 같아요. 저는 그러한 감정적인 접근이 아니라 역사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양국의 외교 문제는 냉전이라는 지정학적인 상황에서 불거졌음을 이야기해주고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라든지, 최근 강제동원 해법과 관련해선 1965년의 청구권 협정이 문제가 되고 있잖아요. 그러한 것들을 가르치면서 ‘위안부’ 문제를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볼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김신현경 여학생들은 대체로 중고등학생 때 ‘위안부’ 관련 굿즈를 사본 경험이 있어요. ‘젠더와 문화’ 수업에서 기억과 재현 문제를 다루며 학생들에게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알게 됐는지 물어보면 대부분 굿즈를 사본 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선생님들이 ‘위안부’ 교육을 하면서 소개해주셨던 것 같고, 그래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위안부’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조금만 파고들어도 아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아주 사소하게는 피해자가 조선인뿐만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아시아 위안소 지도를 보여주면 소스라치게 놀라거든요. 제 수업에서는 한일 시민연대, 아시아 시민연대를 강조하면서 2000년 여성법정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곤 하는데 학생들은 이것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한국에서조차 강조하지 않으니 반일 감정을 갖고 ‘위안부’ 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다가 그게 옳은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을 겪게 되죠. 서울여대에는 일본, 베트남, 중국인 교환 학생도 있지만 유학생도 많아요. 일본 학생들의 경우 ‘위안부’에 대해 들어는 봤지만 관심이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고, 베트남 학생들은 대부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하고, 중국 학생들은 들어는 봤다고 해요. 베트남 친구들의 경우에는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 성폭력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위안부’를 비롯한 전시 성폭력에 대해 앞으로 더 많이 알고 기억해야겠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위안부’ 문제를 역사적 사실로서 아는 것에서 나아가 우리 사회가 어떻게 기억하고, 또 교육적으로 접근해야 할지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장휘 선생님이 여러 국적의 학생들 사이의 편차를 말씀해주셨는데, 서울여대 오기 전 독일에서 4년 정도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다양한 배경의 학생들이 한국학에 관심을 갖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한국 학생들보다 ‘위안부’에 대해 훨씬 많이 아는 경우도 있고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전쟁이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 또는 나치에 의한 성노예 상황 등과 ‘위안부’를 연결 짓는 깊이 있는 지식을 가진 외국인 학생들도 점점 늘고 있는 추세이기 때문에 일본군‘위안부’ 이슈는 한국 사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시민 사회에서 중요한 역사적 토픽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Q.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지식이 양극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민족주의적 정서에 혐오가 결합되는 양상도 보이고, 어떤 학생들은 보편적인 전시 성폭력과 연계해서 이 문제에 대한 균형감 있는 성찰적 지식을 갖고 있는가 하면, 어떤 학생들은 관련 지식이 거의 없는 느낌인데요, 국적이 다양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가르치고 계시는지요. 장휘 대부분의 학생들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잘 모르니 강의 수준을 높게 맞출 수 없어요. 전북대에서는 한국 근현대사를 가르치면서 여러 파트 중 하나로 ‘위안부’ 문제를 소화하고 있습니다. 지역학 수업에서는 한국학을 가르치는데, 일단 교재의 선정 자체가 어려워요. 동아시아 민족주의가 어떻게 변화·발전하고 그 속에서 ‘위안부’ 문제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그 맥락을 이해하길 바라면서 다양한 책을 읽힙니다. 가능하면 한국의 민족주의적 시각이 드러나지 않거나 그에 대해 비판적인 자료를 읽히는데도, 외국 학생들조차 ‘위안부’ 문제를 알게 되면 대부분 반일 감정을 갖게 되는 현상은 놀랍습니다. ‘위안부’ 문제 안에 존재하는 복합성을 이해시키고 국가와 시민, 피해자와 가해자 등 다양한 위치에 있는 이들의 입장에 대해서도 논해보고 싶지만 어려움이 있어요. ‘위안부’ 운동/연구를 하는 친구들과 그렇지 않은 친구들 사이의 지식 격차가 상당히 크거든요. 그래서 강의의 난이도를 가장 쉬운 수준에 맞추고, 관심 있는 학생들에겐 추가로 관련 자료나 도서를 추천하긴 하지만, 대부분은 아주 기초적인 수준에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 대중화 시대에 학생들이 노출되면서 고정된 선입견을 장착하거나 성찰적 지식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외국인 학생들을 가르치기에 마땅한 텍스트북이 없다는 것도 문제고요. 전쟁 일반, 군사주의, 성 정치경제 등에 대한 보편적인 비판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인종주의적인 혐오로 귀결되는 상황도 있는 것 같은데요, 일본군‘위안부’ 문제나 역사에 대한 반응에서 학생들 사이의 대결적인 양상이 보이기도 하나요? 김신현경 제 강의실의 경우에는 지식의 편차가 있을 순 있지만 갈등적인 요소가 등장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그런 상황이 펼쳐지고 있지 않습니까. ‘위안부’ 문제를 한일 관계의 문제로 다루면서 민족주의적 정서를 기반으로 바라보는 흐름이 있었다가 최근에는 그것과는 다른(부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잖아요. 소녀상 앞에서 한국인들이 일본인 극우와 같은 행태를 보인다거나, 엄마부대 대표가 베를린 소녀상 앞에서 항의한다든지요. 학생들 말에 따르면, 온라인상에서도 이와 유사한 갈등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고 해요. 예컨대 ‘한국 여성들이 그때 강제로 끌려갔다지만 사실이 아니고 돈 벌려고 간 거다’라는 식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의 흐름으로서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집단 또는 세력이 등장하고 있다는 거죠. ‘위안부’ 문제를 여성 문제가 아니라 한일 관계의 문제, 민족주의적 정서로 바라볼 땐 ‘여성들을 지켜주지 못한 남성으로서의 고뇌’를 이야기하거나 민족의 수치로서 여성들을 비난했는데 현재 그런 이야기들은 아예 사라진 것 같다고 합니다. 학생들이 보기에 지금의 남성들은 ‘여성들이 사실은 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즉 여성들의 ‘미투’에 무고가 있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이 문제에까지 투사하고 있는 거예요. 김성운 저희 교실에서도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학생은 한 명도 없습니다. 다만 저는 그렇게 가르쳐요. 대학 졸업 후 사회에 나가면 부정론자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싸울 것이냐. 그런 상황에 맞닥뜨릴 학생들을 위해 학문적인 무기를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 수업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부분이에요. 그래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얼마나 현재적인 문제인지 강조하죠. 피해자들이 돌아가시고 나서도 계속해서 제기되어야 하는 문제이고, 1년에 한 번 혹은 분기에 한 번씩은 불거지는 문제이기 때문에 잘 알고 있지 않으면 이상한 의견에 휩쓸리기 쉽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여러 역사적인 요소와 사실들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임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Q. 일본군‘위안부’ 이슈가 90년대와 2000년대, 그리고 지금 쟁점이 달라졌습니다. 90년대에는 전시 강간이 여성의 수치가 아니라 일본 군대의 전쟁범죄라는 여성인권 규범이 새로 등장했고, 2000년대에는 법적 배상과 외교 문제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지금은 램지어 교수 논문 파동이 드러낸 역사부정론, 또한 시민운동단체와 피해자 간의 괴리 등이 한창 문제가 되었지요. 이것은 사실 확정의 차원을 넘어 옳고 그름의 윤리적 가치 논쟁과 결합된 ‘현대사’, 그중에서도 ‘과거청산’ 이슈의 공통된 특징인데요, 강의실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어떻게 소화하고 계신지요. 이것이 강의실에서의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논쟁이나 난처함으로 연결될까요? 장휘 이번 학기에서 인상적인 외국인 학생이 한 명 있었어요. 에티오피아계 이탈리아인으로, 캐나다인가 영국에서 태어나고 이탈리아에서 자라다 미국에 가서 일하던 중 공부를 해야겠다 싶어 연세대로 유학을 온 학생이었죠. 그런데 그 친구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피해자들은 나이가 들었고 보상을 받고 다 끝났는데 왜 자꾸 얘기하냐. 이제 앞으로 나아갈 때 아니냐”고요. 새로운 형태의 극우가 등장했구나 싶었는데 얘기를 하다 보니 단순히 그런 것 같진 않더라고요. 그 친구처럼 다양한 배경과 맥락에 놓이면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들이 다르게 이해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위안부’ 문제를 민족주의화된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고, 또 여성에 대한 폭력 및 국가 폭력의 관점에서 볼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이외에 새롭게 건드릴 수 있는 공간은 무엇이 있을까, 현재 우리는 나올 이야기가 다 나온 상태에서 머무르고 있는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
- 2019년 논평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와 소송 2부 - 중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있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
-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와 소송 1부. 하나의 논문으로 시작된 대일배상청구소송 2부. 중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있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있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 ‘위안부’ 피해자를 비롯한 중국 내 일본 침략전쟁 피해자들의 대일손해배상소송 움직임이 가속화되자, 1995년 3월 중국 외교부부장 첸치천(钱其琛)은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중국이 포기한 것은 국가의 배상청구권이며, 민간 개인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라고 배상 문제에 대한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의 배상 문제가 제기된 후 중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하는 정도에 그치는 등 ‘위안부’ 문제에 대해 비교적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처럼 중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있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중국이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 당시 국가 배상 청구권 및 외교 보호권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전후 미국의 주도하에서 국제사회가 대만을 중국 전체를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면서 중국은 국가 통일을 이루지 못했고, 외교정책에서도 많은 제약을 받아왔다. 중국은 국제사회에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하게 함으로써 중국대표성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국교 정상화를 통해 일본에 대만과의 단교를 요구하고, 대만의 외교적 고립을 가속하고자 했다. 이처럼 국교정상화 당시 중국대표성 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의 배상청구권을 스스로 포기했던 중국은 정부차원에서 배상 문제를 일본에 다시 제기하기 어려웠다. 또한 경제, 안보 등 일본과의 우 협력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정부 입장에서 ‘위안부’ 문제가 국가 관계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도 우려해야 했다. 그런데 중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있어 적극적으로 대응한 사례도 있다. 첫 번째는 2005년 3월 18일 산시 ‘위안부’ 피해자의 제2차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 판결 내용에 관해서였다. 당시 2심 재판에서 도쿄고등법원은 처음으로 청구권 포기 논리를 원용하여 피해자의 청구를 기각했는데, 1952년 일화평화조약 체결로 중국인의 개인청구권이 소멸되었다고 판결한 것이다. 2005년 3월 25일 중국 정부는 일본 재판부의 결정에 강력하게 불만을 표명했다. 중국 외교부는 "일화평화조약은 불법적이고 유효성 없는 조약으로, 이는 1972년 중일 공동성명 서명과 동시에 폐기되는 것으로 양국 간 합의를 마쳤다. 그런데 일본재판부가 일화평화조약을 근거로 ‘위안부’ 피해자의 청구를 기각한 것은 중일 공동성명을 위반한 것이다. 중국 정부는 일본 지도자 및 사법당국이 중일 공동성명에 따라 대만문제에서 일본측이 약속했던 사항을 제대로 이행해 달라고 요구한다. 더불어 ‘위안부’ 문제에 있어 일본이 성실한 태도로 적절한 조처하길 바란다"[1]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두 번째 또한 제2차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 최종 재판 내용 때문이었는데, 2007년 4월 27일 일본 최고법원은 중일 공동성명으로 중국인의 개인 청구권은 이미 소멸되었다며 피해자의 상고를 기각했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중국은 중일 관계의 회복과 양국 인민들의 우호 관계를 위하여 중일 공동성명에서 국가의 배상청구권을 포기했다. 중일 공동성명에 대한 일본 최고법원의 해석은 잘못되었다"며 강하게 대응했다. 이처럼 비록 중국 정부는 일본 정부 및 사법기관이 중국의 핵심 국가이익인 대만 문제, 즉 '하나의 중국' 원칙과 관련된 부분을 침해할 경우,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중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전폭적인 외교적 지원이나 해결 방안 모색 등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중국 정부의 무관심한 태도는 ‘위안부’ 피해자의 법적 배상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 내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의 노력 국내 학자와 시민사회의 노력으로 ‘위안부’ 문제의 참상이 중국에 알려졌으나, 문제 해결을 위한 길은 순탄치 않았다. 중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무관심했고, 일본 정부 또한 피해자들의 요구에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았다. 통정은 배상 문제를 담당해줄 변호사를 찾아다녔지만, 변호 비용으로 10만 위안(약 한화 1700만 원)을 요구받는 등 적합한 인물을 구하기 힘들었다.[2] 중국의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된 일본의 오노데라 토시타카 변호사가 중국 ‘위안부’ 피해자의 소송대리인을 맡으면서, 배상 문제가 본격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1995년 중국 ‘위안부’ 피해자의 대일 손해배상청구소송이 제기된 이후로, 중국의 민간단체는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 및 법적 책임 이행을 끌어내기 위해 힘썼다. 2001년 5월 30일, 산시성 ‘위안부’ 피해자의 제1차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 1심 재판에서 일본재판부가 ‘위안부’ 제도의 운영 및 강제동원 사실을 부정하는 판결을 내리자 중화 전국변호사협회, 중화 전국부녀연합회, 중국 인권발전기금회는 강력히 반발하며 6월 19일 도쿄지방법원에 항의 성명을 보냈다. 또한, 피해 사실 입증을 위해 일본재판부에 피해자 할머니들의 정신적 피해에 대한 검사를 요청하였고, 제1차, 3차 소송의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정신감정이 이뤄졌다. 정신감정 결과를 통해 피해 사실을 입증할 수 있었고, 일본재판부로부터 공소 사실 인정이라는 판결을 끌어냈다. 또한 중화 전국변호사협회와 중국법률지원기금회(中国法律援助基金会)는 ‘위안부’ 피해자를 찾고, 위안소 유적 및 관련 당안들을 발굴하기 위하여 중국 ‘위안부’ 피해사실조사위원회(中国原"慰安妇"受害事实调查委员会)를 조직하였다. 2006년 9월부터 2009년까지 중국 산시성, 운남성, 하이난성, 랴오닝성, 길림성 등 중국 각지를 돌며 ‘위안부’ 피해 사실에 대한 전면 조사를 실시했다. 조사를 통해 새로운 피해자 19명 및 친족 2명을 발견했고, 위안소 유적 및 위안소 운영 관련 당안들을 발굴해냈다. 중국 유일의 ‘위안부’ 연구소인 상하이사범대학교 중국‘위안부’문제연구소는 2007년 연구소 내에 자료관을 열고,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 지원을 통해 대중들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알리고 있다. 또한, 2018년 10월에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생애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22(二十二)>(2018)의 감독 궈커(郭柯)와 함께 상하이사범대학 교육 발전기금회 내에 위안부 연구 및 지원이라는 이름의 특별조성금을 만들고 피해자 생활 지원 및 ‘위안부’ 사업 연구 발전에 힘쓰고 있다.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피해자들의 소송이 모두 패소하자, 중국‘위안부’문제연구소의 쑤즈량 교수는 2017년 12월 18일 91세의 ‘위안부’ 피해자 천리엔촌(陈连村), 화동정법대학교 국제학과 교수 지엔치앙(建强), 베이징시방원변호사사무소(北京市方元律师事务所律)의 캉지엔 변호사 및 지원자와 함께 중국 외교부에게 외교보호권을 요청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천리엔촌을 포함한 5명의 ‘위안부’ 피해자 및 12명의 친족들이 중국정부가 외교보호권을 행사하여, 일본 정부에게 피해자들에 대한 사죄 및 법적배상을 요구해달라는 내용의 공개서한을 외교부에 전달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피해자 및 민간단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는 현재까지 이에 대한 답변을 내놓고 있지 않다. 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 전개과정을 살펴본 결과, 소송이 제기된 이후 일본 정부를 향해 사죄 및 피해 배상을 강력히 요구해온 민간단체 및 피해자와는 달리, 중국 정부는 배상 문제에 있어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음을 알 수 있다.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최대 피해국으로서, 일본 정부에게 전쟁배상을 강력하게 요구할 수 있는 우위를 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에 있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배상문제가 국가 간 분쟁으로 쟁점화되었을 때,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교섭 과정에서 과거사 청산 작업을 철저히 하지 않았던 과거 정부의 과오가 드러나는 것이 우려되어 ‘위안부’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국 또한 ‘위안부’ 문제가 한일 양국 간 외교현안으로 발전하고, 문제에 대한 시민사회의 관심이 증가하면서 청구권문제 및 과거사 문제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았던 과거 정부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이와 같이 스스로를 인민을 위한 나라로 칭하는 공산당 정권이 국익이라는 이름 아래 중국 인민들의 인권을 침해한 사실이 국내에 알려진다면, 정부의 정당성 및 신뢰성에 타격이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이를 우려하여 또 다시 ‘위안부’ 피해자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피해자 및 민간단체는 정부에 외교보호권을 요청하는 등 ‘위안부’ 문제에 해결에 있어 정부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과오를 반성하고 외교적 또는 국내적 측면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중국 정부가 피해자 및 민간단체와의 지속적인 소통을 통해 정부와 시민사회가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위안부’ 문제 해결방안을 도출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각주 ^ 外交部发言人刘建超就日本法院判决"慰安妇"诉讼案中国原告败诉答记者问, (2005/03/25), https://www.fmprc.gov.cn/web/wjdt_674879/fyrbt_674889/t188947.shtml ^ 《环球》杂志:对日本索赔 几十年来一路是荆棘(2004/12/31), http://news.sohu.com/20041231/n223744137.shtml
-
- 2020년 에세이 교실에서 만난 일본군'위안부'
-
교실에서 만난 일본군 '위안부' - '위안부' 수업의 성찰적 진화 일본군'위안부' 문제(이하 '위안부' 문제)는 역사 교사들이 남달리 생각하는 수업 주제 중 하나다. 전쟁 범죄를 통해 인간성이 말살된 참혹한 사례라는 점은 '이 역사적 진실을 아이들과 꼭 나누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한다. 역사 교사들이 가지는 일종의 책무감이다. '위안부' 문제가 단지 참혹하고 비극적 사건이기 때문에 이를 아이들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이후 피해자들이 용기 있게 증언에 나섰고 보편적 인권을 위해 싸우는 감동적인 과정이 있었음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현재, 형식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위안부' 문제는 국가교육과정에 공식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특별 수업의 형태로 교육이 이뤄진 과거와 달리 지금은 교육과정과 교과서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고등학교만 해도 필수 과목인 『한국사』와 선택 과목인 『동아시아사』를 통해 학생들이 '위안부' 문제를 배운다. 교과 활동을 넘어 동아리 활동이나 창의적 체험활동을 통해 다양하게 교육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국가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 자체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교육이 충실하게 이행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위안부' 문제 교육을 둘러싼 성찰과, 그를 통한 교육의 진화에 있다. 역사 교사들과 교육 연구자들은 '위안부'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아이들과 함께 나눌 것인가에 대해 여러 가지 고민을 해왔다. 이는 오늘날 다양한 방식으로 현장에서 실천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위안부' 문제는 지금까지도 '역사화'의 과정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많은 역사 교사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종의 당사자성을 스스로 부여하는 것은 아마도 그 '역사화'에 나름의 실천을 담당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현장의 사례들을 소개하고 '위안부' 교육을 둘러싼 고민 지점을 나누어 보고자 한다. 교육 현장에서 성찰한 지점을 '감수성', '삶과 만난 실천', '보편과 인권의 이름'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소개하려고 한다. 모둠 간에 ‘조각그림 그리기’ 활동을 통해 피해자 할머니들의 그림들을 재현해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제공: 문순창) 감수성 :수업에서 고통을 전시하기만 할 수는 없다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상을 도저히 끝까지 보기 힘들었어요. 속이 울렁거리고 힘드네요. 이전에 봤던 '위안부' 영화도 다 못 보고 나오고 말았어요” - '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한 공개 수업을 다 보지 못하고 뛰쳐나간 필자의 동료 교사 진실은 그 자체로 실천의 도구가 되고 변화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위안부' 문제는 공론화 과정 자체가 하나의 투쟁이었다. 피해 당사자들의 입에서 역사적 진실이 확인되었고 '할머니'들의 실천을 통해 진실이 역사화 되었다. '정의연(정의기억연대, 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과 같은 시민단체의 활동가와 학계에서 성실하게 채록해온 당사자들의 구술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역사 텍스트다. 이를 기반으로 한 영화 등의 영상 텍스트도 최근에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 정부가 애써, 일본 정부가 힘써 외면하던 진실을 가르치고 나누는 것 자체는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었다. 많은 역사 교사들은 자칫하면 '위안부' 문제 수업이 그들의 고통을 전시하고 끝나는 것이 아닐지 우려한다. “'위안부' 문제와 같이 끔찍한 사안은 초등학생이나 저학년을 대상으로 다룰만한 주제가 아니”라며 방어적으로 수업하는 경우도 많다. 박근혜 정부 당시 제작된 6학년 사회 교과서(국정)에서는 피해자들에 대해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간 젊은 여성들은 일본군에게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고 서술하여 큰 논란이 되기도 했다[1]. 논란에 대해 당시 교육부는 '어린이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서술을 할 순 없다'고 응수했다. 역사적 사건 서술에 대한 최소한의 구체성을 스스로 저버린 것이다. 최근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가 많이 제작되어 대중의 관심을 환기하거나 수업 자료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영화들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당한' 폭력을 묘사하는 것 자체가 진실을 추구하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심지어 그 묘사가 지나치게 자극적인 수준에 머무는 경우도 많다. 이는 영화적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 성찰적 태도가 아니라는 점에서 수업 자료로도 부적절하다. 앞서 제시한 나의 동료 교사의 거부감 또한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단순한 피해 전시에서 더 나아간 수업은 어떻게 가능할까? 일제강점기 이후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실천과 행위를 충실히 역사화하고 수업에 반영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최초 증언 이후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증언이 이어졌고,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현 정의기억연대)'과 같은 시민단체와 학계가 적극적으로 결합하여 연대했다. 이 문제가 한국 사회를 넘어 세계적인 보편의 문제로 다루어진 것은 이러한 역사적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역사 교사들은 1990년대 이후 '위안부' 피해자들이 인간의 존엄을 위해 싸워온 역사를 수업에서 다루려고 노력한다. 역사 교과서에 짤막하고 피상적으로 서술된 것에 아쉬움을 느끼면서 말이다. 할머니들은 자신의 불행과 고통을 마냥 전시하지 않았다. 이를 직면하고 나아가 용기를 내어 실천하는 삶을 택했다. 놀라운 실천이었던 수요시위, 베트남 전쟁 피해자와의 연대, '나비기금' 등도 충분히 역사 수업의 내용이 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할머니들을 악몽으로 몰아넣었던 부정적 경험만을 수업에서 다룰 필요는 없다. 이는 할머니들이 거대한 역사적 폭력에 수동적으로 당한 존재로 여겨지게 할뿐더러 그들의 비극을 단지 자극적으로 소비하게 만든다. 고통을 전시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역사의 주체로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다루기 위해 오늘도 많은 역사 교사들이 자신의 수업을 개편해나가고 있다. 삶과 만난 실천 : '위안부'를 주제로 '역사하기' 민주시민교육[2]은 최근 교육 현장에서 주목받는 화두 중 하나다. 민주시민교육의 강조와 더불어 학교 현장에서는 비교과 활동을 통해 사회 문제를 실천적인 교육으로 다뤄보고자 하는 교사와 학생들의 시도가 이어졌다. 초기 단계부터 지금까지 가장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유형이 '인권동아리'나 '역사실천동아리' 등이다. 시민사회, 사회 이슈와 직접적으로 만나는 동아리 활동을 기획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동아리들은 수요시위에 함께 참여하고 학내에 소녀상을 세우거나 관련 기념품을 판매하여 단체에 기부하는 등의 활동을 한다. 초창기만 해도 학생들을 데리고 '시위'에 나가거나 민감한(?) 이슈와 관련해 직접 실천하는 동아리 활동은 파격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활동은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고등학생들이 주도하는 수요시위나 문화 공연도 많다. 역사 교사와 학생들의 의지와 실천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이처럼 '위안부' 문제는 매우 실천적인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학생들을 아픈 역사와 직접 만나게 하고 나아가 스스로 역사적 주체로 서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많은 역사 교사들이 프로젝트 수업, 학생자치 프로그램, 동아리 등으로 이를 실천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의 원형으로는 최종순(전 누원초 교사, 퇴직)의 수업[3]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해당 교사는 90년대 후반부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교실로 초대하고 그들의 증언을 학생들이 직접 듣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업을 해왔다. 사회 이슈 자체를 모두 '민감한 것'으로 치부했던 당시 분위기에서 이러한 시도는 무척 파격적이었다. 이러한 수업 방식은 학생들이 '위안부' 피해자들의 삶에 주목하고 그들 개개인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게 하였다. 교실에서의 강렬한 경험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나아가 다양한 교과와 융합하여 '위안부' 문제를 다룬 프로젝트 수업을 진행했다. 이러한 시도들이 마중물이 되어 오늘날 실천적인 '위안부' 문제 수업의 기틀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최종순 교사(전 누원초)의 수업을 함께 나눈 당시 학생들이 피해자 할머니를 주제로 그린 만화 나도 초임 시절 첫 제자들과 함께 방학 때 서울로 올라와 수요시위에 참석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중 한 학생의 대표 연대 발언 장면은 뉴스에 보도되기도 했다. 당시에는 퍽 인상 깊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 학생은 고등학교에서 스스로 역사 동아리를 조직하여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을 했다. 나아가 지금은 대학에 진학해 역사 교사의 꿈을 키우고 있다. 이렇게 '위안부' 문제를 통해 '역사하기'를 체험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건 분명 흐뭇한 일이다. '경기도교육청 꿈의 학교'인 의정부 평화나비학교의 사례[4]는 이러한 실천형 '위안부' 문제 교육의 종합판이라고 할 수 있다. 교사, 대학생, 학부모, 중·고등학생 100여 명으로 구성된 '평화나비학교'는 '위안부' 문제를 알리고 실천하는 다양한 활동을 2년여간 이어왔다. 피해자 할머니를 모시고 증언을 듣는 자리를 시민들에게 제공하고 관련 영화 상영회를 개최하였으며, 의정부 시내에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하기 위한 모금 활동을 진행해 이를 현실로 만들었다(2015.11.07. 건립). 이 과정에서 '위안부' 문제를 함께 공부하고, 실천 방안을 고민하며, 활동을 조직한 것은 학생들이었다. 각 학교의 학생자치회와 연계하여 작은 소녀상을 세우는 사업도 전국적으로 성행했다[5]. 학생자치회 학생들이 직접 캠페인을 벌여 기금을 모금하고 학교 내 공간에 작은 평화의 소녀상을 설치하여 공공역사를 체험하려는 시도다. 이러한 활동들은 모두 역사를 삶의 문제로 가져오는 실천적 배움이 어떤 교육적 효용이 있는지 몸소 보여준 사례다. 보편과 인권의 이름 -보편지향의 '위안부' 문제 수업을 향하여 학생 K : 와, 일본놈들. 우리도 나중에 일본 여자들한테 어떻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학생 B : (피식 웃으며)'야동' 보는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일동 웃음) - '위안부' 문제 수업을 마친 후 학생들의 대화(2018) 특성화고에 근무하던 시절, '위안부' 문제 수업을 마치고 나가면서 들은 대화다. 스치는 대화였지만 찰나의 순간에 느낀 충격을 잊지 못한다. 대화를 들으면서 '내 수업은 아이들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아직 경력이 많지 않던 시절, 진실을 알린다는 명목하에 할머니들의 고통을 전시하기만 한 수업의 처참한 결과였다. 학생들이 소속된 '남초 집단'이라는 특성을 고려하더라도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어디서부터가 문제였던 걸까? 당시 나의 수업 내용과 디자인에 문제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우선, '위안부'라는 소재가 보편적 인권의 문제이자 젠더 이슈라는 점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지 못했다. 증오라는 감정이 곧잘 남에게 전이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교실에서 교사의 분노는 학생들에게 쉽게 전파된다. 그 분노의 진원지는 어떤 것이었나. 민족과 국가라는 시각에서만 수치심과 분노를 드러냈던 것이 잘못이었다. '위안부 교육'은 보편적 인권에 입각해 젠더적 접근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해 더욱 다층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야 교육적 효과와 함의가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 2017년 1월, 일본 삿포로를 방문하여 일교조(일본 교직원노동조합)의 교사들과 만났다. 동아시아 평화교육과 관련된 수업 사례를 발표하고 공유하는 자리에서 '히라이 아스코' 선생님의 수업 사례를 들었다. 히라이 선생님의 발표 중 다음과 같은 대목이 가슴 깊이 남았다. '위안부' 문제는 여성의 상품화 문제일 뿐 아니라 남성의 인권도 침해하는 문제라는 점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해요.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국가에서) 남자라는 존재는 국가가 보낸 빨간 봉투(입영통지서)를 받으면 무조건 전쟁터로 가야 했습니다. 전쟁터에서 나라를 위해 죽을 수도 있고, 여성과 동침시켜주면 그렇게 해야 하는 존재로 취급되었던 것 아닌가요? 그것 자체가 남성이란 존재에 대한 비하이며 인권침해에요. '위안부' 문제는 여성만이 분노할 문제가 아닌 거죠. - 히라이 아스코(삿포로 마코마니아 중학교 교사) 히라이 아스코 선생님은 '위안부' 문제가 단지 여성 인권에만 국한된 주제가 아니라 남성들 역시 구조적 폭력의 피해자라는 점을 짚었다. 아이들과도 그 점에 관해서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 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보편인권의 문제로 확장해서 접근하여 큰 교육적 영감을 남긴 사례였다. 아무리 좋은 수업과 교육적 실천이라도 계속 고민의 수준을 확장하지 않는다면 생명력을 잃고 낡은 것이 되고 만다. '위안부' 문제 수업의 생명력도 마찬가지다. 그 생명력은 성찰에서 나온다. '위안부' 문제 수업의 정신을 살려 세계사 속의 한국사를 성찰적으로 수업한 사례들도 있다. 맹수용(경기 의정부고) 선생님의 수업 사례[6]가 대표적인 경우다. 냉전과 전쟁에 대한 세계사 수업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당시 지역 사회의 이슈였던 기지촌 여성 문제를 연계한 것이다. 한국 정부의 관리와 통제 하에 미군을 상대해야 했던 기지촌 여성에 대한 고민은 강제동원의 고통에 시달린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와 연계하여 인권 감수성을 벼를 수 있는 사안이다. '기지촌 여성'을 국가폭력의 관점에서 성찰하고 여성의 존엄과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보게 했다는 것에서 맹 선생님의 수업은 또 다른 '위안부' 문제 수업이 아닐 수 없다. '본인이 원해서 했다면 괜찮은 거 아닐까요?'라고 무심하게 말을 던졌던 일부 학생들은 스스로 자신이 일본 극우의 논리를 대변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성찰하고 더 깊은 고민에 빠진다. 국가폭력과 여성 인권 그리고 개인의 삶이 역사 수업을 통해 교차한 순간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일 양국 간의 역사문제에 그치지 않는 전시 여성 성폭력의 문제, 인류 보편적 여성 인권의 문제입니다.” 2018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은 대통령의 발언이다. 역사 교사들의 '위안부' 문제 수업이 한일 갈등과 반일주의의 좁은 폭에 갇힌다면 할머니들의 실천을 제대로 학생들과 나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역사 교사들은 스스로의 수업에 물음을 던지며 '위안부' 문제 수업을 고민하고 있다. 보편적 인권을 아이들과 나누고 이야기할 수 있는 '위안부' 문제 수업을 위해서. '용감한 할머니들'의 삶을 이어가기 위하여 '용감한 할머니 이야기'. 전국역사교사모임이 30주년을 맞이하여 출간한 역사 수업 책에서 김선옥(현 호치민한국국제학교 교감, 역사교사)이 '위안부' 문제 수업 관련 원고[7]를 쓰며 붙인 제목이다. 여기에서 어떤 의지 같은 것을 느꼈다. 피해자 할머니들의 삶을 민족 서사에 가두거나 여성의 순결주의와 같은 헛된 관념의 포로로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용감한 할머니'라는 호명은 그들 자신과 연대자들의 삶을 그 자체로 존중하겠다는 생각일 테다. '윤회'라는 것이 물리적 신체의 재생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과 업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고 이어지는 개념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역사는 많은 사람의 삶에 '윤회' 되기에 충분하다. 그 길에 역사 수업이 공헌할 바는 없을까. '정의연' 논란으로 많은 이들이 참담함을 느낀다. 해당 논란 자체를 가슴 아파하는 사람, 논란이 확대되고 오인되는 과정에 고통을 느꼈던 사람, '위안부' 문제가 역사화되는 치열한 과정을 알기에 더욱 상처받은 사람 등…. 많은 역사 교사들은 “아이들을 수요시위에 마음 편히 데려갈 수 없게 될까?”, “할머니들과 헌신적인 활동가들이 오욕과 상처를 받게 될까” 우려하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역사 교사들은 그만큼 이 문제에 대한 당사자로 살아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역할을 자임할 것이다. 주체적 의식 속에 만들어가는 '위안부' 문제 수업을 기대해보자. 더불어 이러한 수업을 통해 동료 시민으로 성장할 아이들을 함께 떠올려보자. 각주 ^ 2015년 당시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가 이루어져 격론이 일어났던 때다. 공교롭게도 2016년 초등 6학년 사회교과서(사회 6-1 교과서)에서 일본군 '위안부'라는 용어 자체가 제외되어 크게 논란이 되었다. 교육부는 '초등 학생의 발달수준을 고려해 위안부라는 표현을 뺐다'고 해명했다. 2018년 초등 6학년 사회교과서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관련 사진과 설명이 다시 추가되었다. (남지원 기자, 「초등 사회교과서에 "일본군 위안부" 설명 되살아났다」, 경향신문, 2018) ^ 민주주의 가치를 존중하고 상생할 수 있는 시민으로서의 역량을 키우는 교육이다. 민주주의, 인권, 평등, 평화, 환경, 미디어 리터러시 등 다양한 주제가 민주시민교육의 내용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주제별 교육의 지식을 습득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민적 가치와 태도, 역량을 높이고 참여와 실천으로 확장하는 포괄적인 교육을 뜻한다. ^ 최종순, 「나는 아이들과 무엇을 했는가?」, <역사와 교육 18호>, 2019. ^ 우현주 외, 「평화나비학교: '평화나비학교'가 꿈꾸는 마을 학교」, <역사교육> 110호, 전국역사 교사모임. ^ 이화여고 학생 동아리 '주먹도끼'와 지도교사 성환철 교사로부터 시작된 운동이다. '작은 소녀상 건립운동'이라고도 부른다. 2015년 졸속적으로 진행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반대하고 아픈 역사를 기억하자는 취지로 학내에 가로30cm 세로 30cm 크기의 '평화의 소녀상'의 축소판 구조물을 건립하는 운동이다. 2017년 기준 전국 100곳 이상의 학교에 건립되어 화제를 모았다. ^ 맹수용, 「지역사를 활용한 세계사 수업-냉전과 미군기지, 그리고 기지촌 문제를 중심으로」, <역사교육> 126호, 2019. ^ 김선옥, 「용감한 내 이웃 할머니의 이야기」, <역사교실:역사에서 배우고 삶으로 가르치는>, 비아북, 2018.
-
- 2019년 논평 ‘위안부’ 문제의 초국가성과 기억의 글로컬화 2부
-
‘위안부’ 문제를 새롭게 사유한다 ‘위안부’ 문제의 초국가성과 기억의 글로컬화 3. ‘위안부’ 문제는 「아시아연대회의」를 비롯한 국제적 시민연대가 주체가 되어 해결을 요구해왔다. ‘위안부’ 문제의 피해가 아시아·태평양지역에 걸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존자들을 지원하는 여성·시민단체도 아시아·태평양지역의 각 국가의 시민들이 중심이 되었다. ‘위안부’ 문제가 처음 부상했을 때부터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한일의 시민들이었다. 특히 일본 시민들은 한국 및 아시아 각국 국내에서 ‘위안부’ 문제가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던 초기부터 가장 진지하게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앞장섰다. ‘위안부’ 문제의 전모를 알 수 없던 1990년대 초부터 아시아 각국의 피해상황에 대한 조사, 피해자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 수많은 생존자 증언회 개최를 비롯하여, 특히 각국의 생존자들이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시작하자 재판 지원을 위해 시민단체를 조직하고 각국단체들과 생존자들을 지원하였다. 그 중에서도 재일교포여성들은 독자적인 네트워크를 만들어 재일조선인 생존자를 지원하고 한일단체의 가교 역할도 하였다. 아시아의 지원단체들은 생존자에 대한 정보공유와 공동의 활동을 위해 「아시아연대회의」라는 네트워크를 결성하여 정기적인 만남을 가지면서 공동행동을 취해 왔다. 1992년 서울에서 제1차 회의를 시작한 이래 가장 큰 성과는 2000년의 도쿄여성법정의 개최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정부에 대한 책임 인정과 생존자 구제에 대한 요구가 계속적으로 묵살되자 시민들의 손으로 민중법정을 연 것이었다. 이 도쿄여성법정에는 1990년대 초 구 유고 및 르완다 내전을 재판한 국제전범법정에서 활약했던 국제법과 전시 성폭력 전문가 및 재판관들이 참여하여 3일간에 걸친 재판을 진행했다. 아시아 국가와 네덜란드 등 9개국에서 64명의 피해자가 원고로 참여하여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 천황을 비롯한 일본군 책임자들을 기소하였다. 이 재판 과정을 통해 아시아 각국의 피해자들이 겪은 다양한 피해 상황이 상세히 드러났고, 여성법정은 이러한 증언들을 사실로 인정하여 국제법에 따라 기소된 책임자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가해자 처벌만이 정의를 회복하는 수단은 아니지만 피해자의 인권회복과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가해자의 범죄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재판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인식에 기반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중대 인권침해 사건들을 다루면서 형성된 국제규범이었다. 사실 인정, 사죄, 배상, 진상규명, 역사교육, 추도사업, 책임자 처벌과 같이 한국의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및 아시아의 지원단체들이 제시한 해결 조건은 그와 같은 인권규범의 축적에 기반한 것이었다. 아시아연대회의는 이후에도 일본 정부에 해결책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다. 특히 2014년 5월 31일에서 6월3일까지 동경에서 열린 제12차 회의에서는 ‘위안부’ 문제의 후퇴를 막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많은 생존자들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가는 와중에 일본의 우익 정치가들이 이미 일본 정부가 인정한 고노담화마저 부정하고 ‘위안부’ 문제를 폄훼하는 발언을 일삼는 데 대한 대처를 강구한 것이다. 연대회의 참석자들은 “피해자가 원하는 해결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는 사죄는 누가 어떻게 가해행위를 했는가를 가해국이 정확하게 인식하여 책임을 인정하고 이를 애매하지 않은 명확한 표현으로 국내에서도 국제적으로도 표명하고 그러한 사죄가 진지한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후속 조치가 수반할 때 비로소 진정한 사죄로 피해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제시했다. 그리고 일본 정부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과 책임인정 및 해결책을 요구하였다. 1) 사실과 책임을 인정. - 일본 정부 및 일본군이 군 시설로 위안소를 입안, 설치하고 관리, 통제했다는 점 - 여성들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위안부’·성노예’가 되었고, 위안소 등에서 강제적인 상황에 놓였었다는 점 - 일본군에게 성폭력을 당한 식민지, 점령지, 일본 여성들의 피해는 각각 다른 양태이며, 그 피해가 막대했고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는 점 - 일본군‘위안부’ 제도는 당시의 국내법 및 국제법에 위반되는 중대한 인권침해였다는 점 2) 위의 인정에 기반하여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할 것. - 번복할 수 없는 명확하고 공식적인 방식으로 사죄: 사죄의 증거로 피해자에게 배상할 것 - 진상규명: 일본 정부의 보유자료를 전면공개하고 일본 국내외에서의 새로운 자료조사, 국내외의 피해자와 관계자의 증언조사를 실시할 것. - 재발방지 조치: 의무교육 과정의 교과서 기술을 포함한 학교교육, 사회교육, 추모사업 실시. 잘못된 역사인식에 근거한 공인의 발언금지 및 공인의 발언에 대해서는 명확하고 공식적으로 반박할 것 등.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를 무시했고 제12차 아시아연대회의가 일본 정부에 대해 요구했던 번복할 수 없는 명확하고 공식적인 사죄는 2015년 한일합의에서 ‘위안부’ 문제의 합의를 불가역적인 것으로 한다는 의미로 역이용되고 말았다. 4. ‘위안부’ 문제는 국제기구의 권고 및 다국적 의회의 결의안을 통해 국제적인 승인을 확대하였다. 일본은 다양한 국제인권조약의 체약국이다. 예를 들면, 1985년에 여성차별철폐조약에 가입하여 체약국이 되었고 이에 따라 체약국의 의무인 조약이행에 대한 정기보고서를 제출하고 심사를 받아왔다. 여성차별철폐조약 이외에도 인종차별철폐조약, 자유권규약, 사회권규약, 고문금지조약, 아동권리조약, 장애인권리조약, 강제실종자조약을 비준했다. ‘위안부’ 문제가 대두한 이래, 여성단체들은 이들 인권조약위원회에 ‘위안부’ 문제를 개진했다. 조약위원회는 일본에 대한 심사보고서에서 거의 모두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권고를 지속적으로 해왔다. 이 중에서도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일본 및 한국의 단체들이 가장 집중적으로 활동한 위원회로, 1994년 1월의 2,3차 통합심사 소견에서 가장 먼저 ‘위안부’ 문제를 언급하였다. 국제인권조약위원회들이 일본 정부에 ‘위안부’ 문제의 해결과 조치를 촉구하는 권고는 2015년 외교장관 합의 직후에도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영구적인 해결을 선언한 일본 정부의 주장과는 달리 국제인권기구들은 이 문제를 해결되었다고 보지 않은 것이다. 다만, 1990년대의 탈냉전기에 유엔 기구와 인권규범에 대해 기대했던 역할은 사실상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국제기구는 특히 일본과 같은 선진국 정부를 움직일 수 있는 강제력과 규범적 정당성이 없어 아직도 일본 정부의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글로벌 인권기구의 지속적인 권고로 인해 2000년대 후반에는 캐나다, 미국 및 유럽의회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새로운 종류의 결의안이 채택되는 등 국제사회의 인식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5. ‘위안부’ 문제는 기림비 건립 및 문화 활동을 통해 자발적 지역운동으로 세계로 확대되고 있다. ‘위안부’ 문제는 많은 생존자가 돌아가심에 따라 “해결”에서 “기억”으로 활동의 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현 일본 정부는 생존자에 대한 해결에는 소극적이면서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기 위한 시민들의 활동에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특히 소녀상 철거를 강압적으로 요구하여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국면이 오히려 시민들의 위기감을 고조시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과 지역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후세를 교육하고 기억하는 일이 중대인권침해의 재발을 위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면 기림비와 박물관은 기억을 위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위안부’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최초의 기림비인 평화비(일명 소녀상)는 수요집회 1000회를 맞이하여 제작되어 서울주재 일본대사관의 맞은 편에 설치되었다. 이 소녀상은 「수요집회」라는 상징적인 시민들의 집합 장소와 시간의 제약성을 무한정으로 확대하였다. 평화비는 이를 보는 개인들 각자가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는 매개체가 되어 지역주민들이 건립한 새로운 기림비가 전국으로, 그리고 세계로 확대되었다. 그 크기도 형태도 다양하여 그 지역이나 설립자에 따라 지역화된 기림비가 건립되고 있다. 사진에서 보듯 나비형태나 다양한 모습의 여성은 모두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기억이 로컬화(지역화)된 형태이다. 처음 서울에 평화비가 건립되었을 때만 해도 소녀상이 ‘위안부’ 문제를 특정 이미지로 고정할 것이라는 염려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보편적인 인권”이나 “‘위안부’ 문제” 그 자체가 지역성과 시간성을 초월하는 고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세계 시민들은 각자의 역사와 경험 속에서 ‘위안부’ 문제에 공감하고 그 의미를 재사유한다. 이렇게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는 주체, 기억하는 방식, 그 기억의 내용은 모두가 무한한 가능성에 열려 있다. 6. ‘위안부’ 문제는 글로벌 #미투시대에 성폭력에 대한 이해를 역사적으로 확대하였다. 2017년 말부터 미투운동(MeToo·성폭력 고발 운동)이 세계적으로 확대되면서 ‘위안부’ 문제는 다시 한번 새롭게 사유되고 있다. 오늘날까지 강건하게 유지되고 있는 성폭력의 사회적 구조를 깨우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전쟁 후에도 수십 년간 ‘위안부’ 문제를 왜곡하고 생존자들이 침묵시켰던 가부장적 사회구조는 수많은 일상적 성폭력을 재생산하면서 아직도 피해자들을 침묵시키고 있다. 미투에서 드러난 여성의 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피해자 비난, 그리고 여성의 성을 도구로 사용하는 젠더 권력 구조는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현실을 잘 설명한다. 이런 의미에서 ‘위안부’ 생존자들을 지원해 온 이들이 ‘위안부’ 생존자들이야말로 최초의 미투운동가라고 평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미투의 상징적 존재인 이토 시오리(프리랜서 저널리스트)는 작년에 한국을 방문하여 ‘위안부’ 생존자들을 만났다. 그녀 자신이 가해자에 대한 재판을 힘들게 진행하면서도 전세계의 성폭력 피해자들을 취재하고 기록하여 성폭력의 실태와 구제방안, 그리고 생존자들의 용기에 대해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위안부’ 생존자들의 삶과 투쟁은 이토와 같이 미투를 외친 21세기의 생존자들에게도 용기와 위안을 부여하고 있다. 이처럼 ‘위안부’ 문제는 이제 생존자들의 피해와 해결로 축약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느 한 국가의 정부가 종결을 선언할 수 있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위안부’ 문제는 1990년대 여성인권의 세계사적인 발전과 더불어 처음부터 국제적인 이슈로 부각되었으며 그들을 지원한 아시아 여성들의 연대에 의해 세계화되었다. 이제 생존자들이 세상을 떠나고 그들을 수십 년간 지원해 온 시민들은 기억과 교육을 위해 또 다른 긴 여정을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유네스코 인류기억 유산 제정을 위한 국제연대의 노력이나 한국에서 뒤늦게 발족한 정부지원의 연구소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세계 시민들이 그들의 지역에서 펼치고 있는 창조적이고 로컬화된 기억과 교육활동일 것이다. ‘위안부’ 문제는 그러한 자발적인 지역활동의 세계적인 확산에 의해 앞으로도 유지되고 계승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