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전후 ‘위안부’ 피해의 규모와 실태를 규명하는 데 한인들에 의해 작성된 명부들은 중요한 단서이다. 이 명부들은 단순한 이름의 나열이 아니라, 위안소에서 고통받았던 여성들의 흔적을 생생히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 기록이다. 2018년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기증된 『광주시한교협회회원명부(廣州市韓僑協會會員名簿)』와 『광주시대한교민회회원명부(廣州市大韓僑民會會員名簿)』 역시 해방 전‧후 중국 광저우 지역의 ‘위안부’ 실태를 살펴볼 수 있는 새로운 자료이다. 이 명부에는 해방 직후 광저우 지역에 남아 있던 한인 약 1,058명(중복 포함)의 이름, 본적, 나이, 성별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이중 여성은 약 600여 명에 달한다. 일제강점기 여성들의 강제동원 규모에 비해 남아 있는 명부가 매우 적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명부의 발견은 더욱 큰 의미를 지닌다.
중국 광저우는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1919년 이후 중국 호법정부[1]와 교류를 이어가던 임시정부는 1921년 공식적인 승인과 지원을 받아냈다. 이후 1924년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와 중산학교(中山學校)가 설립되고, 한인들에 대한 지원이 이루어지자 광저우에는 독립운동 계열의 한인 인구가 점차 증가하였다. 한인들이 늘어나면서 광저우에는 ‘유월한인회(留粤韓人會)’, ‘한인광복회(韓人光復會)’와 같은 한인단체들이 설립되었고, 이를 배경으로 김원봉과 같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되었다. 하지만 1938년 10월, 일본군이 광저우를 점령하면서 독립운동 계열의 한인들은 대부분 이곳을 떠나게 되었다.
광저우를 점령한 일본군은 곧바로 ‘위안소’ 설치에 나섰다. 일본군은 위안업자와 피해자 모집을 위해 내무성에 ‘위안부’ 도항에 대한 협조를 구했고, 내무성은 후쿠오카, 야마구치, 교토 등 일본 본토와 대만에서 각각 약 400여 명과 300여 명의 여성들을 광저우에 동원하기로 결정했다.[2] 그리고 이 과정에서 “현지에서 군위안소를 경영할 자로 신원이 확실한 인솔자(포주)를 선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여성들을 “은밀하게” 인솔케 하였고, 여성의 모집, 도항 과정에는 내무성과 지방청 등이 편의를 제공하는 등 군, 경찰, 관 등이 긴밀히 협력하였다.[3]
이에 1938년 이후 광저우에는 위안소가 급증하게 되었는데, 이 중에는 대만에서 위안소를 운영하던 한인 위안업자들과 ‘위안부’ 피해자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위안소와 관련된 한인 이외에도 각종 노동자와 기술자 등이 모여들면서 광저우에는 다시 ‘조선인회’, ‘광동계림회’ 와 같은 한인단체들이 속속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를 주도한 한인들은 모두 일본군과 협력 관계를 맺은 친일적 인물들이었으며, 그 중심에는 한인 위안업자들이 있었다. 예컨대, 광동계림회 설립을 주도한 9명 중 6명은 한인 위안업자였다.
[표 1] 1938년 이후 광저우 지역 거주 한인의 직업[5]
일제강점기 광저우 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한인 위안업자로는 김명근(金明根)이 있다. 그는 대만에서 위안소(요리점)를 운영하다 1938년 광저우로 이주해 ‘화월(花月)’이라는 군위안소를 운영하였고, 이후 일본군을 상대로 정미소까지 운영하며 사업을 확장하였다. 여기에 그는 조선인회와 광동계림회의 회장 및 임원을 역임하며 해방 이전 광저우 한인사회의 주도적 인물로 활동했다. 김명근 이외에도 대만에서 위안소(요리점)를 운영하다 광저우에서 ‘일지월(日之月)’이라는 군위안소를 운영한 박승기(朴承基), 그리고 같은 위안업자인 홍승호(洪承鎬), 김정섭(金鼎燮) 등도 있었다. 한때 항일운동의 거점이었던 광저우 한인사회는 일본군 점령 이후 이러한 친일적 한인들, 특히 위안소 업자들에 의해 새롭게 재편되었던 것이다.
위안소를 경영하며 일제의 침략 전쟁에 협력했던 김명근을 비롯한 이 한인업자들은 해방이 되자 새로운 활로 모색에 나섰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으로 광저우에 있던 한인들의 귀환이 시작되자, 이들은 연합군과 국민당의 지침에 적극 협조하면서 광저우 지역 한인들의 규합에 나섰다. 그 결과 김명근을 비롯한 위안업자들을 중심으로 1945년 10월 ‘광주시한교협회’가 결성되었다. 한교협회는 결성 직후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1946년 그 명칭을 ‘광주시대한교민회’로 변경했다. 그리고 당시 한교협회의 회칙에는 ‘조국의 광복과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하고, 귀국 후에도 임시정부를 옹호하며 산업 발전에 힘쓸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과거 친일 부역자의 행적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위안소 업자들은 어느새 조국의 광복을 염원한 애국자로 둔갑하고 있었다.
한편, 광저우와 같이 위안소 업자들이 해방 후 한인단체를 설립한 사례는 중국 상해에서도 확인된다. 해방 전 상해에서 위안소를 운영하던 공돈(孔敦), 권후원(權厚源) 등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한국부녀공제회’라는 한인단체를 설립하고 ‘위안부’ 피해자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피해자들의 신상을 기록한 『수용인원명부』를 작성하고 이들의 귀환을 돕는다 홍보하였지만, 실상은 ‘위안소’ 업자들의 신분세탁 시도에 지나지 않았다.
[표 2] 광저우지역 한인 ‘위안소’ 업자와 한인단체와의 관계
해방 직후 광저우 한인사회에서 작성된 『광주시한교협회회원명부』와 『광주시대한교민회회원명부』에는 당시 광저우에 거주한 한인들의 신상이 기록되어 있다. 명부에는 남성과 여성이 각각 따로 기재되어 있었는데, 남성은 201명과 228명, 여성은 282명과 347명이다. 이들을 『유수명부』 및 『공탁서』 등의 다른 명부들과 비교한 결과 약 30%는 군인 및 군속으로 강제동원된 한인들이었다. 남성들은 이처럼 다른 자료와 대조를 통해 강제동원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여성들은 교차 검증할 자료가 부족해 남성들과 같은 방식으로는 강제동원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앞서 언급한 상해 ‘한국부녀공제회’의 사례와 같이 설립자에 의해 ‘위안부’ 피해자로 특정되지 않는 한, 명부 속 여성들의 실상을 확인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4] 그렇다면 광저우의 명부 속 여성들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들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해방 전‧후 광저우 한인사회의 특징과 이들의 연령을 함께 주목해야 된다.
위 그림과 같이 『광주시한교협회회원명부』와 『광주시대한교민회회원명부』 남성들의 연령은 20대, 30대, 40대 이상까지 비교적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반면 여성들은 『광주시한교협회회원명부』에는 85.4%, 『광주시대한교민회회원명부』에는 87%가 20대로, 젊은 여성들의 비중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같은 경향은 상해 『수용인원명부』와도 일치한다. 이는 해방 직후 광저우의 한인 여성 대부분이 매우 젊은 연령대였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당시 일본군의 ‘위안부’ 동원 대상이 젊은 여성층에 집중되었던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한다.
물론 명부에 기록된 여성 중에는 광저우에 체류한 한인 남성들의 가족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 모두를 ‘위안부’ 피해자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위안부’ 동원이 급증하였다는 점, 그리고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까지의 젊은 여성들이 주된 동원 대상이었다는 점, 일본군 점령지인 광저우 지역에 수백명의 한인 여성들이 갈 이유가 없었으며, 일본군의 허가나 도항증명서 없이는 진입도 불가능했다는 점, 수백 명의 젊은 한인 여성들이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위안부’ 외에는 거의 없었고 다른 기록도 없다는 점, 『광주시대한교민회회원명부』 속 여성들의 직업이 ‘여급’으로 기록되어 있었다는 점, 그리고 한인단체를 설립하고 명부 작성을 주도한 이들이 ‘위안소’ 업자들이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두 명부에 기록된 여성들의 상당수는 이들이 운영하던 ‘위안소’에 있었던 피해자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한인들에 의해 작성된 명부는 일제가 기록한 명부와 달리 ‘위안부’ 동원이 어떻게 현지와 결탁해 구조적으로 이루어졌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보다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명부 분석은 그동안 주목하지 못했던 ‘위안업자’들의 실체, 해방 직후 ‘위안부’ 피해자의 현실과 귀환 등을 살펴보는데 상당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에 앞으로 해방 전‧후 중국 지역에서 작성된 한인명부들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길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명부에 기록된 여성들의 실체를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는 향후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