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성 업무일지 적록」(이하 「적록」)은 총 35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기록이다. 이 일지를 작성한 긴바라 세츠조(金原節三, 1901~1976)는 도쿄제국대학 의학부와 육군군의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일본 육군성 의무국 의사(醫事)과원, 1941년 의사(醫事)과장을 거치며 1943년까지 육군성에서 근무했다. 이후 수마트라와 버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등지에서 각 군의 의무부장으로 근무하였고, 전후에는 공직에서 추방되었다가 다시 1955년 육상자위대 준장으로 임명되어 1961년 퇴역하기까지 대부분을 군에서 활동하였다. 「적록」의 전편(1939.3.12~1941.11.19)은 육군성 의사과원 시절에, 후편 (1941.11.20~1943.9.11)은 의사과장 시절에 작성되었다. 이 일지에는 육군성 국장회보, 과장회보, 의무국회보 등 각종 회보에서의 육군성 간부들의 보고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다른 자료에서는 볼 수 없는 귀중한 내용이다.
「적록」에는 육군 당국이 ‘위안부’를 배치하고 ‘위안소’ 설치를 지시했던 경위들이 자세히 담겨 있다. 이는 관련 내용을 면밀히 따라가다 보면 ‘위안부’ 정책에 대한 육군 당국의 직접적 관여를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중일전쟁 시기 일본 육군 당국은 군기·풍기 위반과 성병 확산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했다. 이는 당시 ‘위안소’ 설치의 주요 동기와 목적이 일본 군인의 강간 방지, 군인에 대한 성적 ‘위안’ 제공, 성병 예방이었던 점과 직결되어 있다.
먼저 일군의 군기 위반 문제를 보자. 「적록」에 따르면 1939년 육군성 국장회보에서 병무국장은 “북중남지군(北中南支軍)에서는 여전히 군기 사범이 끊이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어 1941년 8월에는 법무국장 역시 상반기 범죄 상황을 언급하며 도망, 군용물자 유기, 근무 이탈, 약탈, 절도, 문서 위조, 사기, 횡령, 뇌물수수, 강간 등 군법회의에 회부된 상반기 취급 건수가 1,900여 건에 달한다고 보고하였다. 그는 이러한 수치를 근거로 군인의 불법행위가 끊이지 않고 있음을 우려하였다. 실제 발생한 규모에 비해 군법회의에 회부되는 건수가 적잖이 축소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할 때, 군인들의 불법행위에 대한 군 당국의 우려는 상당히 심각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위안소는 이러한 군기 위반 상황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로 고려되었다. 1940년 중국 동북지역을 시찰한 미키 요시히데 육군성 의무국장은 당시 일선 부대에서 군인들의 도망, 폭행이 잇따르는 것은 정신적 안정이 없기 때문이라고 파악하고, 그 대책으로 ‘위안단’ 파견을 요구한 정황을 기록하고 있다.
군기, 풍기 위반 사건에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빈번하게 발생한 강간사건이다. 「적록」은 개전 후 강간사건이 빈번했음을 보여준다. 1942년 2월 법무국 보고에 따르면 말레이시아를 담당한 제25군에서 강간 사례가 보고되었고, 필리핀 방면에서도 다수의 강간이 발생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나 필리핀의 상황이 “지나사변에 비하면 적다”고 언급하고 있어, 군 당국도 중국 전선에서 얼마나 많은 범죄가 일어났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1942년 8월 12일 국장회보에서의 오야마 법무국장 보고
남방의 범죄 610건. 강간죄 많음. 지나로부터 전용된 부대에서 많음. 위안 설비 불충분. 감시 감독의 불충분에 기인함. 구금소에는 어디서나 200명을 수용하고 있는데 모두 3, 4명의 법무관이 처리하고 있음.
오야마 법무국장 보고에서 드러나듯이 군 당국은 빈번한 군기 위반, 강간사건 등이 발생하는 원인으로 충분하지 않은 위안 설비를 지목하고 있는데, 이러한 인식에서 ‘군위안소’가 그 대책으로 점점 적극적으로 고려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1939년 4월 15일 육군성 의무국 과장회보에서 제21군 군의부장이 보고한 내용은, 육군 당국이 성병 예방을 위해 ‘위안소’라는 발상을 떠올렸던 정황을 보여준다.
성병 예방을 위해 병사 100명당 1명의 비율로 위안대를 수입한다.
1,400~1,600명. 치료는 하쿠아이(博愛)병원에서 하고
그 비용은 기루 주인이 부담함. 매독 검사는 주 2회.
이는 당시 광동에 주류하고 있던 제21군이 병사를 증원하는 과정에서 ‘위안부’를 중국 외 다른 지역에서 ‘수입’하려 했던 것과, 그 동기가 ‘성병 예방’이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당시 성병이 얼마나 만연했기에 ‘위안부’ 도입이 필요하다고 하였을까? 1940년 2월 「군의부장회의 상황보고」에 따르면 북지나방면군은 전문병원이 필요할 정도로 성병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제19·20사단에서 발생한 성병 환자는 985명으로, 각기병이나 전염병, 말라리아와 비슷한 수준으로 많은 수를 기록했다. 성병은 입원에서 완치까지 긴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군으로서는 위협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적록」의 기록을 통해 일본군 당국이 내부의 기강 해이와 만연한 성병에 대항해 ‘군위안소’의 설치를 그 해결책으로 삼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중일전쟁 기간 4년 5개월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 육군 당국은 아시아태평양 각지에 ‘위안소’를 설치하는 방침을 수립해 나갔다. 1941년 7월 26일의 기록이 이를 잘 드러낸다.
1. 후카다[深田] 군의 소좌, 난인(蘭印: 네덜란드령 동인도) 위생상황 시찰보고.
(1) 난인작전에 따른 위생상의 착안점
(중략)
6. 현지 거주 토착민(土人)은 애무하여 성실성 있게 우리 쪽에 신뢰감을 갖게 하도록 언동에 유의를 요함. 회교도가 많아 일부다처라는 점도 있지만 정조의식도 강함. 행여나 강간 등을 행하여 일본 군기에 대해 불신을 하는 일이 없도록 엄중 주의를 요함. 한편 원주민은 생활난으로 인해 매음하는 자도 많음. 하지만 반둥(Bandung) 기타에 성병이 많으므로 촌장에게 할당해 엄중한 매독검사를 행하고 위안소를 설치할 필요가 있음.
기록에 따르면 후카다 소좌는 1940년 9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바타비아(현 자카르타)에서 개최된 제2차 일난협상에 참가했고,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점령하기 위해 필요한 위생 시찰을 은밀하게 진행했다. 시찰 후 그가 내린 결론은 점령 후 일본 군인에 의한 강간과 성병을 방지하기 위해 현지에 이른바 ‘매춘부’가 아닌 여성을 모아 위안소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촌장에게 할당해”라는 말을 통해 사실상 강제로 여성을 모으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육군 당국은 강간사건이 계속되자 특별휴가나 결혼 알선, 가족 동반 등의 도입을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책들이 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실제로 육군 당국이 적극적으로 실행에 옮긴 것은 위안소 설치였다. 1942년 9월 과장회의에서는 “장교 이하의 위안시설”을 만들겠다는 발언이 등장한다. 이미 1937년 이후 중국에서 ‘위안소’가 대량 설치되었고 동남아시아 각지에도 마찬가지였던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러한 발언은 군 당국에 의한 위안소 추가 설치 계획으로 읽을 수 있다. 즉 그동안 파견군에게 맡겼던 위안소 설치를 1942년 8월 이후부터는 육군성이 스스로, 직접 하기로 했다는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는 이 시점부터 ‘위안부’가 파견군이 아닌 군 당국의 직접 통제 시기로 접어들게 된다고 분석하였다.
그러나 육군성이 ‘위안소’를 만들기 시작한 이후에도 군기·풍기나 성병 문제는 여전히 악화일로였다. 1942년 12월 의무국회보에 따르면 남방군의 성병 환자가 증가하고 있어 위안소를 확장해야 한다고 전하고 있다. 간부의 ‘자숙자계’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보고 또한 군기·풍기가 계속 악화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듬해 2월과 4월에 진행된 회보에서도 “강간, 도망 등의 증가 외에 장교의 범행 증가”나 “남방에 5,000명의 성병 환자가 있는 실정”이 보고되고 있다. 이처럼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위안소는 늘어났고, ‘위안부’의 수도 그에 비례했다.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는 「적록」에 대한 분석을 통해 다음 몇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밝힌다.
첫째, 아시아태평양전쟁 개시 이후 출전 현지의 파견군뿐만 아니라 육군 당국까지도 위안소 설치에 직접 나섰고, 그 지도와 통제에 의해 위안소가 아시아태평양 각지에 다수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둘째, 위안소가 만들어진 핵심 배경에 일군에 의한 다수의 강간 사건과 군인들 사이에 만연했던 성병, 그리고 약탈과 폭력이 난무했던 열악한 전장 생활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위안소 설치와 운영은 일본 군인의 강간방지, 성병 예방과 군기 해이를 무마하기 위한, 즉 일본 군인에 대한 성적 ‘위안’ 제공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네덜란드령 인도(인도네시아)에서 현지 여성을 강제 징집하려는 육군성의 계획이 있었다는 점 등이 자료를 통해 명확해졌다는 사실이다.
오랫동안 업무일지 「적록」은 비공개 자료였다. 한 군인이 남긴 업무일지만으로도 위안소와 ‘위안부’ 동원에 관하여 이렇게 많은 사실을 담고 있다면,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 남아 있는 수천 권의 업무일지·종군일지를 통해서는 얼마나 더 많은 사실을 규명할 수 있을까.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은 이런 일지류를 조사한다면, 일본군’위안부’문제의 진상 규명은 빠르게 진전될 것이다. 이와 함께 방위연구소 도서관 외 방위청 소관 자료를 비롯해 경찰 자료, 조선총독부·타이완총독부 등에 관한 척무성·내무성 자료, 노동성·후생성·대장성 등에서 소장하고 있는 비공개 자료의 조사·공개가 중요하다. 이들 기록의 전면적 공개와 충분한 조사연구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일본군‘위안부’문제의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었다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