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이었다. 한 달 뒤인 4월에 일본 오키나와 도카시키섬에서 한·일 전쟁 피해자를 함께 기리는 위령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민족과 젠더, 지역의 경계를 넘나들며, 역사적으로 존재를 부정당해온 ‘주변인'들의 목소리에 천착해온 재일조선인 2세 박수남 감독의〈되살아나는 목소리〉가 일본영화펜클럽 2025년 베스트 다큐멘터리 영화로 선정되어 시상식[1]에 참석했을 때 공동감독이자 박 감독의 딸인 박마의 감독을 통해서였다.
알려져 있다시피 오키나와는 박수남 감독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곳에 연행된 조선인 군속과 군‘위안부’의 한을 기록한 〈아리랑의 노래 ― 오키나와의 증언〉, 그리고 오키나와 전투 막바지에 발생한 집단 자결(옥쇄)의 비극과 그 피해자들의 증언을 담은〈누치가후 ― 옥쇄장으로부터의 증언〉을 만들고, 끝내 완성하지 못한 후속작까지 품었던 장소. 오키나와 위령제 소식을 접하고 잠깐 고민했다. 학생들과 수업이 있는 학기 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망설임은 오래지 않았다. 그곳이 오키나와이고, 더욱이 두 박 감독과 함께하는 위령제였다. 게다가 홀로 조선인 관련 전쟁 유적을 찾아 나서기가 쉬운가. 어디서도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만날 수 있는, 놓치기 어려운 기회였다.
배봉기 씨를 비롯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위령제와 이른바 ‘빨간 기와집’ 위안소 터 방문, 오키나와 집단 자결 현장 답사를 비롯해 미공개 오키나와 촬영 필름 상영과 간담회, 그리고 나하시 사쿠라자카 극장에서 열리는 〈되살아나는 목소리〉 오키나와 첫 상영과 토크 등으로 촘촘한 전체 일정에도 마음이 기울었다.
참가자는 한국에서 온 10명 남짓을 포함해 35명 안팎이었다. ‘전후책임을 묻는 관부재판 지원 모임’을 조직해 관부재판의 원고를 돕고 입법 활동을 했던 하나후사 부부, 오이와케 히데코 평론가, 무기쿠라 데쓰 교수, 문정현 감독과 푸른영상의 다큐멘터리 감독들, 이국언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 영화연구자 이유미 씨 등 박수남 감독이 작가 시절부터 교류해 온 활동가, 예술가, 학자부터 최근 〈되살아나는 목소리〉의 열성 관객이 된 이들까지 면면이 다양했다.
수업 일정 때문에 다른 참가자들보다 이틀 늦게 도카시키섬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기상 상황에 따라 자주 결항되는 페리 운항표를 들여다보며 마음을 졸였는데, 배를 타기 전날 오키나와 나하시에 도착해 보니 먼저 출발한 참가자들이 역시 날씨에 발이 묶여 항구 근처 호텔에서 머물고 있었다. 새벽, 흩뿌리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토록 변덕스러운 바다를 건너 작은 섬에까지 군대를 배치하고 위안소를 설치했던 그 광기와 잔학함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다행히 비와 바람이 잦아들고, 배가 떴다. 서로 얼굴이 익지 않은 데다, 위령제 당일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제사를 준비하고 수십 명이 섬 이곳 저곳으로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라 계속 긴장 상태였다. 제사상에 올릴 떡과 술은 ‘위안부’ 피해자 다수의 고향인 한국 남부 지역의 것들로 다양하게 준비하면 좋겠다 싶어 챙겨 온 아이스박스 두 개에 신경이 쓰여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막상 배에서 내린 뒤에는 짐을 거두고, 서로의 이동을 돕고, 제사상을 차리고 위령비 주변을 꾸미는 일들이 순조롭게 손에서 손으로 이어졌다. 저마다 오랜 활동 과정에서 쌓아 온 내공 위에 박수남·박마의 감독을 중심으로 엮인 신뢰 관계가 맞물려 펼쳐지던 그 순간들은 동행하는 내내 몇 번이고 다시 찾아왔다. 오키나와 주민들이 종이를 엮어 손으로 쓴 글씨로 만든 환영 플래카드도 선명하게 남은 기억이다.
도카시키섬에는 일곱 명의 여성이 거주한 위안소가 있었다. 1975년 일본군‘위안부’였음을 최초로 증언한 배봉기 씨가 생활한 위안소이기도 하다. 전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오키나와에 남았던 배봉기 씨는 1991년 10월, 나하시의 한 셋집에서 숨을 거둔 지 닷새가 지나서야 발견되었다. 1980년대 말, 박수남 감독은 오키나와 전투에 휘말려 들어간 조선인 피해자들과 옛 일본 병사들을 찾아 증언을 듣고 있었다. 그 작업이 1991년 〈아리랑의 노래 ― 오키나와의 증언〉으로 맺어졌고, 영화는 만년의 배봉기 씨 모습과 목소리를 담아냈다.
당시 영화 제작을 지원했던 오키나와 사람들은 배봉기 씨의 외로운 죽음에 충격을 받았고, 비참한 삶을 강요당한 여성들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자고 호소했다. 전국에서 답지한 자금, 건립지를 내어준 도카시키섬 주민들의 마음, 그리고 재일조선인 3세 도예가 이주인 마리코 씨의 손과 한국 조각가가 기증한 옥석(玉石)이 합쳐져 ‘아리랑 기념비’가 완공되었다. 1997년 가을이었다. 그해 10월, 배봉기 씨의 유골은 6년 만에 한국에서 온 유족의 손에 인계되었다.[2] 그가 살아있는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친족과 해후는 그렇게 사후에야 이뤄졌다. 박수남 감독이 ‘생명이 되살아남’이라는 뜻의 ‘환생’ 등을 담아 직접 작성한 아리랑 위령비 비문은 이렇게 끝난다.
“(…) 다시 침략 전쟁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진실을 말로 이어 가고, 생명의 찬가를 노래하는 광장이 되기를 기념하면서”.
박수남 감독이 위령비 앞 위령제에 참석한 것은 1997년 건립 이래 29년 만이었다. 박 감독은 위령제 내내 비문 앞 한 쪽에서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아흔이 넘어 건강이 예전 같지 않은 박 감독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위령제 후반, 헌화를 앞두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예처럼 이 섬에 끌려오게 된 젊은 여성들을, 일본군이 성폭력으로 인간이 아닌 것처럼 모독했다’고. ‘그 일본군의 범죄를, 그 역사를 우리는 잊을 수 없다'고. 그리고 덧붙였다. ‘그래도 여성들은 일어섰다’고. ‘울고만 있어서는 자신들의 명예가 회복되지 않기에,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되찾으려 상처를 입고도 생을 이어나가는 불가사리처럼 필사적으로 싸웠다’고. ‘지금의 여성들은 그 선배들의 싸움을 이어가야 한다’고. 평생을 식민주의와 군사주의의 틈새에서 누락된 목소리들을 기록해 온 박수남 감독이 위령제에서 91세의 몸으로 긴 침묵 끝에 꺼낸 말은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가 누구였는지를 에두르지 않고 또렷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위령제의 마지막은 〈봉선화〉를 함께 부르는 순서였다. 〈되살아나는 목소리〉영화 마지막에도 박수남 감독의 목소리로 흐르는 그 노래를, 참가자 모두 한국어 가사로 함께 불렀다. 3절까지 다 부르고 난 뒤에도 박 감독은 다시 1절로 돌아가 몇 번이고 거듭 불렀다. 노래가 끝나도 멈추지 않는 그 목소리를, 둘러선 사람들은 가만히 들었다.
위령제의 여운을 품고 배봉기 씨가 지낸 위안소 터, 이른바 '빨간 기와집'으로 향했다. 안내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홀연히 한 분이 나타나 위안소였던 기와집의 내력과 자신이 간직한 조선인 ‘위안부’들에 대한 기억, 그리고 오키나와 전투 중 미군의 포로가 되거나 능욕 당할 것이 두려워 집단적으로 죽음을 선택한 ‘집단 자결 사건’으로부터 생존한 경험을 들려주었다. 멀리서 온 우리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며, 마당을 열어 잘 익은 토마토와 파파야까지 따서 권한 그는 알고 보니 기와집의 예전 주인 조카로, 지금은 옆집에 살며 집을 관리하는 요시카와 요시카쓰(吉川嘉勝) 씨였다.
여섯 살 무렵이던 그가 집단 자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일부러 오키나와 방언으로 ‘수류탄을 버리고 도망치라’고 외친 어머니 덕분이었다. 이는 여러 주민들까지 살린 외침이기도 했다. 이 비극 후 손위 누나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시달렸지만 요시카와 씨는 또렷한 기억으로 전쟁 피해의 중요한 증언자가 되었다. 관광지처럼 ‘빨간 기와집’을 찾는 이들이 늘면서 마을 주민들이 예민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내심 긴장했는데, 뜻밖의 환대에 마음이 뭉클했다. 또 책으로 먼저 안 역사라 해도 당사자와 마주해 직접 듣는 일은 좀처럼 소화하기 어려운 무게라는 것을 실감한 순간이기도 했다.
다음 날 찾은 집단 자결 현장은 한 살 반의 나이에 그곳에서 미군에게 구조된 토미사토 츠네오(富里常男) 씨가 안내했다. 어른이 된 뒤 뉴욕타임스에 실린 구조 당시의 자기 사진을 우연히 발견한 그는 본격적으로 오키나와 집단 자결의 역사를 조사하고 알려 왔다. 영화에서는 집단 자결 장소인 절벽이나 가마(동굴)를 이미지화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찾은 곳은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깊은 계곡의 숲이었다. 그리 넓지 않았으나 몇 겹으로 포개진 듯, 숲의 깊이는 카메라의 눈으로는 영상으로도 사진으로도 좀처럼 담기지 않았다. 나는 몇 번이고 줌을 당겼다 밀었다를 반복했다.
이튿날 도카시키 공민관에서는 오랫동안 필름통 안에 잠들어 있던 박수남 감독의 오키나와 필름이 상영되었다. 다큐 후반부, 여성 네 명이 한꺼번에 자결했던 숲을 담은 장면은 요시카와 씨나 토미사토 씨가 전하는 이야기와는 또 다른 방향에서 충격으로 다가왔다. 전날의 역사 안내가 대항역사(counter history)이긴 하지만 익숙한 언어의 ‘역사 서술’이었다면, 미공개 필름에 기록된 여성 생존자들의 언어는 좀처럼 역사화되지 않는, 지극히 내밀하고 ‘사적인’ 것이었다. 아버지가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자결을 강요했으며, 가족의 죽음 뒤에 홀로 살아남았다는, 서사로 엮이기를 끝내 거부하는 파편적인 기억과 회고. 힘겹게 새어 나오는 음성 자체가 어떤 기록의 물질화로 느껴졌다.
오키나와 여성사가 미야기 하루미(宮城晴美)의 연구는 이 차이를 정면으로 가리킨다. 자마미섬 집단 자결을 피한 생존자의 딸이기도 한 그는 50여 년의 청취 조사 끝에 “남성만으로 이루어진 가족에서는 집단 자결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집단 자결은 가부장제, 민족 차별과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희생자의 8할 이상은 여성과 아이였다. 미야기의 연구에 따르면 집단 자결은 단지 전장의 공포가 낳은 비극이 아니었다. 메이지 이후 일본이 오키나와 농촌에 이식한 가부장제, ‘미군에게 순결을 잃느니 죽는 편이 낫다’는 관념, 그리고 조선인 여성을 ‘위안부’로 차별함으로써 만들어낸 ‘저렇게 되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감각이 서로 얽혀 있었다.[3]
기억을 잃었거나 일관되게 말하지 못한다고 여겨진 누나들과 어머니들의 목소리, 나는 그 비어 있는 자리를 상상한다. 하루를 마치고 가진 조촐한 교류회에서 조심스럽게나마 연결되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본국으로부터 차별받는 내부 피식민자의 자리에 있던 오키나와 역시 '위안부'들에게 결코 너그럽지 않았다는 것, ‘제국’의 입장에 동일시해 ‘위안부’와 징용 피해자들을 판단하고 배척하는 문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박수남 감독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이 섬에 왔을 때도 공동체 우애와 별개로 그런 배타의 시선을 견뎌야 했다는 오래된 기억들이 조용히 오갔다.
도카시키섬 일정 뒤 참가자들은 나하로 이동해 <되살아나는 목소리> 오키나와 첫 상영과 토크에 참여했다. 토크의 주 패널은 두 분 감독과 한국 광주 소재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의 이국언 이사장이었다. 극장은 관객으로 가득 찼고, 영화가 끝나고 박수남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시민들의 줄이 길었다. 박마의 감독은 배봉기 씨 사후 총련과 민단계 사이 힘겨루기에서 유족과 연계하기 위해 애를 쓰다 오키나와 운동 단체들과도 갈등을 겪게 된 과거를 회상하며, 29년만에 어머니 박수남 감독의 명예가 회복된 것 같다는 감격을 나지막이 나누기도 했다.
이번 오키나와 여행에서 마음에 깊이 박힌 것이 하나 더 있다. 동행한 일본 시니어 여성들(과 일부 남성들)이다. 참가자 중에는 의미있는 운동 성과를 남겼거나 이름이 알려진 분들이 있었지만, 또 적지 않은 분들은 20대에 급진적인 운동―여성들의 경우 다수는 1970년대 초 학생운동과 반전운동 흐름 속에서 빠르게 팽창한 래디컬 페미니즘 운동인 ‘우먼 리브(ウーマン・リブ)’―에 몸담았다가, 이후 지역에서 평범한 직업인으로 살며 일본 사회의 진보적 의제와 운동에 활동가나 지원자, 후원자로 꾸준히 곁을 지켜 온 이들이었다.
지금 지닌 이름이 어떠하든 이들 모두 위령제에서 거동이 불편한 박수남 감독을 살피는 일부터 예기치 못한 상황을 수습하는 일까지, 마치 오래전부터 약속이라도 한 듯 착착 편안하게 해냈다. 공민관 간담회에서는 어디선가 나무 패널을 가져와 자료를 걸고 좌석을 마련했다. 또 금세 흩어지는가 싶더니 매트리스 여러 장과 파티션을 구해 왔다. 곧 무대 한 쪽의 큰 계단을 옮기고는 관객의 시야가 닿지 않는 자리에 박수남 감독이 쉴 수 있는 침상을 만들어 휴식할 수 있도록 도왔다. 동작이 어찌나 빠르고 군더더기가 없던지, 나는 한참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평생에 걸쳐 서로를 돕고 일으켜 세우는 일을 조용히 익혀 온 손들이었다. 내내 여행을 떠받치고 있던 이 손들의 아름다움을 여기에도 기록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