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신숙옥은 기업과 공공 기관 등의 인재 육성과 인권 교육을 담당하는 사업가이자 작가로 활약하며 1990년대부터 재일조선인과 여성 인권에 목소리를 내 왔고, 2000년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의 혐오 발언을 계기로 차별 반대 및 인권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일본군‘위안부’, 오키나와 및 아이누 민족, 장애인, 난민 등 다양한 소수자,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며 활동 범위를 넓혀왔다. 이를 인정받아 2003년 ‘다다 요코 반권력 인권상’을 수상하지만, 동시에 일본 극우 진영의 극심한 공격에 노출되었고, 특히 2017년 TV 프로그램 〈뉴스 여자〉의 날조 선동이 촉발한 법정 투쟁으로 2023년 일본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가 확정되기까지 매우 힘겨운 시간을 버텨야 했다. 웹진 <결>은 지난 6월 ‘김복동상’ 수상을 위해 서울을 찾은 신숙옥을 만나 전후 일본의 운동사에서 드물게 기억되는 ‘승리의 역사’를 일궈낸 그의 거침없고 당당한 목소리를 들었다.
다양한 활동과 글로 재일조선인뿐 아니라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 오키나와 주민, 여성 등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목소리를 높여 온 신숙옥은 2013년 ‘헤이트스피치(혐오 발언)’와 인종주의에 맞서는 시민단체 ‘노리코에넷(のりこえねっと)’의 공동대표로 전면에 서면서 일본 우익에 주요 공격 대상이 됐다. 그러다 2017년 화장품으로 지명도가 있던 DHC의 방송 자회사에서 제작한 프로그램 <뉴스 여자(ニュース女子)>가 오키나와 미군 기지 반대 집회를 다루며 ‘신숙옥이 일당을 지급해 폭력 시위를 조종하고 있다’는 가짜 뉴스를 날조·방영하면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극우 세력의 살해 협박과 혐오 공격으로 이후 독일로 피신해야 할 만큼 극심한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신숙옥은 굴하지 않고 2018년 DHC 측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약 7년간 이어진 치열한 법정 공방 끝에 2023년 일본 대법원으로부터 사죄문 게시와 손해배상금 550만엔 지급이라는 최종 승소 판결을 이끌어냈다.
Q : <뉴스 여자>로 촉발된 법정 투쟁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일본 방송윤리프로그램향상기구(放送倫理·番組向上機構, 약칭 BPO)로부터 ‘인권 침해’를 인정받았고, 방송국도 일단의 ‘반성’과 ‘사죄’를 했음에도 굳이 소송을 택하신 까닭이 궁금합니다. 송신도 할머니의 소송을 비롯해 전후 일본에서 있었던 소수자, 사회적 약자와 관련한 다양한 투쟁이 패배로 기억되면서 ‘어차피 진다’든가 ‘바뀌지 않는다’는 식의 분위기가 팽배했던 것으로 아는데 겁나지 않으셨는지요?
신숙옥 : 저 혼자만의 싸움이었다면 그렇게까지 못했을지 몰라요. 제소를 했을지조차 의문이에요. 그런데 당시 저를 이용해 오키나와를 공격했잖아요. 그 더러운 수법에는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죠. 재판 당사자로 나설 수 있는 게 저밖에 없기도 했고요. 먼저 BPO에 고발하고 받아들여졌지만, 재판에서 다룬 사안까지 논의되지는 못했어요. 게다가 제작사인 DHC 측은 TV 방송이 막히자 아랑곳하지 않고 인터넷 방송을 이어갔어요. 사죄도 전혀 없었고요. 그래서 방송국의 사죄를 받은 바로 다음 날 제소를 했죠. 애초부터 대충 끝낼 생각은 없었어요. 그래도 최고재판소(일본 대법원)까지 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끝날 때까지 7년 가까이 걸렸잖아요. 7년간 계속 괴롭힘을 당하며 많이 힘들었어요.
Q : 괜찮으시면 7년 동안의 상황에 대해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신숙옥 : 일단은 인터넷이죠. ‘5채널(5ch)’이라는 익명 커뮤니티가 있는데, 거기가 발화점이 되었죠. 방송 이후 당시 구글에서 손꼽히는 순위를 기록할 정도로, 몇천만이나 되는 글이 쏟아졌어요. 그게 발화점이 되었죠. 저는 공격해도 되는 사람이 돼 버렸어요. 공격이 용인된 거죠. 정치가도 같이 공격을 하니까요.
그 영향이 일상생활에까지 미쳐요. 욕설과 비방은 말할 것도 없고, 가장 간단한 예로 주문하지도 않은 온갖 택배가 몰려왔어요. 건강식품부터 성인용품에 이르기까지요. 양파 200kg이라든가. 그걸 하나하나 반송하지 않으면 안 됐어요. 주문 사기라고 경찰에 신고해도 피해자는 제가 아니라 물품의 판매자였으니까요. 그다음으로 분뇨가 날아와요. 우편함에 정액이 묻은 휴지가 들어가 있기도 하고, 제가 사망했다며 장지 안내도 왔죠. 그리고 집 앞으로 사람들이 어슬렁거려요. 감시도 하고 계속 촬영도 해요. 하지 말래도 소용없어요. 미행은 말할 것도 없죠. 평소에 차도 잘 안 다니는 집 앞 좁은 길에 혐오 발언을 하는 가두선전 차량이 매주 토요일마다 왔어요. 선거철에는 그 길에 선거 차량을 세우고 제 이름을 불러 가며 연설을 하기도 했죠. 어마어마한 음량으로요. 그 탓에 근처 이웃분들이 저와 접촉을 피하게 돼요. 같은 날 쓰레기를 버리는 것도 신경 쓰이니까 이사를 가 달라고도 하고요. 동네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됐죠. 그리고 한밤중에 초인종 누르기, 이게 또 엄청나요. 혼자 살았으니까 이런 걸 다 혼자 감당해야 했어요. 요컨대 생활의 모든 것이 스톱, 멈춰 버렸어요. 한번은 초로의 남성이 부르길래 도움이 필요한가 싶어 가까이 갔더니 여성의 성기를 언급하며 ‘더럽다’고 하더군요. YWCA의 체육관에 다녔는데 샤워실에서 ‘당신 같은 사람이 올 데가 아니’라는 소리도 들었고, 온천 같은 데에서는 ‘허벅지 안쪽을 더 깨끗이 닦으라’는 소리도 들었어요.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그런 거구나 싶었죠. 저를 타깃으로 하는 집회도 열렸어요. ‘반일 비국민 신숙옥을 규탄하는 국민 집회’라나…
Q : 그런 집회가 가능한가요?
신숙옥 : 물론이죠. 거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지… 그걸 우파 미디어가 또 보도해요. 지하철을 타면 우파 언론의 광고판에 제 이름이 나오고요. 인터넷에서도, 미디어에서도, 일상생활에서도 계속 공격이 이어져요. 성적인 모욕부터 신체적인 폭력까지요. 길에서 누군가가 가방을 휘두르며 저를 때린 적도 있었죠. 우리와 혐오 발언으로 대치하던 어떤 중년 남자는 재일조선인 단체에 총을 쏘기도 했어요. 그 일로 체포되긴 했는데, 어제까지 내 앞에 서 있던 사람이잖아요. 나를 향해 쏘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죠. 한번은 또 ‘높은’ 곳에서 연락이 왔어요. (당시 총리였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씨가 내 이름을 언급하며 철저하게 공격해야 한다고 했다며 조심하래요. 그런데 어떻게 조심해요? 조심하라는 말 자체가 협박이나 마찬가지죠. ‘높은’ 자기들이 뭔가 조치하면 되잖아요? 그런 일이 수두룩했어요. 언제 무슨 일을 당해도 신숙옥이라면 그럴 만하다는 상황에 처해 있었죠.
그러자 쓸데없는 일을 벌이니까 이렇게 됐다는 식으로, ‘나는 신숙옥과 다르다’며 저쪽 편을 들면서 저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나왔어요. 자기들은 일본인과 잘 지내는데 내가 말을 심하게 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그들도 무서우니까요. 그리고 이전부터 여자가 나댄다고 짜증내는 남자들이 많았어요. 그런 남자들이 이때다 싶어 또 공격을 해요. 쓰레기 같은 남자들 투성이었죠.
정말이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질릴 것 같아요. 이 모든 일이 단시간에 벌어졌어요. 생활권 어디를 가도 힘든 현실로 가득했어요. 스트레스 때문에 정말이지 머리가 어떻게 될 것만 같았어요. 그랬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미각이 없어져 버렸어요. 그래서 독일에 가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어요. 인터넷 시대니까 세계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었죠. 부모형제에게까지 여파가 미쳤어요. 부모님과는 30년간 떨어져 살았는데, 어느 날 어머니에게 ‘따님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하더래요. 뭔가 공격을 하겠다는 의미였죠. 그래서 어머니를 독일로 모셔 갔어요. 형제들의 일터에도 비난하는 우편물이 오고 그랬어요. 제가 있던 연구소에도 왜 이런 사람을 고용했느냐는 메일이 쇄도했어요. ‘반일 과격파’를 강사로 쓰지 말라고요. 독일에서 받은 공격도 놀랄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Q : 한 사람을 괴롭히는 데 어쩜 그렇게 열중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신숙옥 : 재미있는 거예요. 오락이죠. 그리고 그들은 그게 ‘정의’라고 생각하니까요. 나는 ‘반일’, ‘국가의 적’이에요. 일본인의 적을 처벌하는 거잖아요. 요컨대 사회의 쓰레기를 싹 쓸어버린다는 정의감. 절대적으로, 누구에게도 비난받을 일 없는 싸움이잖아요. 그러니 즐거워 죽을 지경이었을 거예요. 남녀노소 가리지 않았어요. 모두가 그걸 즐겼어요. 건방진 여자를 처벌한다면서요.
인터넷에서 제 이름을 발견하면 소름이 돋아요. 제가 뭔가 발언하면 이런저런 비판이 쇄도하잖아요. 그걸 본 주변에서 ‘이번에 이런 심한 말을 하더라’라고 하는데, 그런 거 전하지 말고 알아서 반론해 주면 좋겠어요. 정말이지 여러 의미에서 숨 쉬기조차 어려운 상태가 이어졌죠.
Q : 그래도 결국은 버티고 극복하셨어요. 어떻게 그러실 수 있었는지 대단하다는 생각뿐입니다.
신숙옥 : 저는 내가 이상해졌다는 것을 잘 감지해요. 흔히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된다고들 하지만 거짓말이에요. 저는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약을 먹어요. 예컨대 수면제 같은 거요. 그래서 우선 잠을 자요.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데, 못 먹는 건 괜찮아요. 하지만 잠을 못 자면 작업 효율이 떨어져 간단한 일에도 실수를 하게 돼요. 그렇게 일을 제대로 못하면 더 침울해지죠. 언제든 가능하던 일이 불가능해지니까요. 그래서 힘들 때, 이상하다 싶을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요. 그러면서 어찌어찌 몸 상태를 회복해요. 또 필요할 때는 항우울제도 처방받아요. 그렇게 해서 물리적으로라도 제 몸을 속이는 거죠. 기합과 근성만으로 끝까지 싸울 수는 없잖아요. 정신과 의사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가 없었다면 역시 끝까지 싸우지 못했을 것 같아요.
사실 2004년이었나, 북한의 일본인 납치와 관련해서 난리가 났을 때도 그랬어요. 저 역시 엄청난 공격을 받았죠. 그때 처음으로 병원에 갔어요. 몸을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로 여기저기가 이상해서 일단 입원하고 검사를 받았는데, 어디에도 이상이 없었어요. 그러면 머리가 문제잖아요. 자진해서 정신과를 찾아갔죠. 정신과 의사 친구가 있으니까, 그다음부터는 어딘가 균형이 무너지면 바로 정신과에 가요. 그렇게 제대로 습관을 들인 덕분에 이겨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런 태도는 미국을 다녀온 뒤부터 생겼어요. 미국에서는 정신과가 일종의 상담으로, 예컨대 회사에서 간부로 승진하면 반드시 정신과 진료를 병행하잖아요. 그만큼 정신과 진료에 대한 장벽이 낮아요. 그런 식으로 제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었어요. 이것이 물리적으로 힘든 상황을 극복하는 데 엄청 도움이 되었다고 봐요.
그리고 가난이 두렵지 않은 것도 컸어요. 부모님 형편이 괜찮았고 저도 할 도리는 다 했다 싶었기 때문에, 저 혼자만이라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먹고는 살겠지 했어요. 좀 이상한 표현일지 모르겠는데, 잃을 게 없었달까, 최하층이 되더라도 일해서 올라가면 된다 싶었어요. 요컨대 밑바닥이어서 끝까지 싸울 수 있는 거죠. 괜찮다, 어찌어찌 될 거다 하는 식으로요.
Q : 영화 <호루몽>에서도 엿볼 수 있었는데, 역시 ‘긍정왕’이세요. 그럼 승소도 예상하셨나요?
신숙옥 : 다른 건 몰라도 재판만은 전혀 알 수가 없었어요. 아무리 정당하다고 해도 질 때가 있잖아요. 운에 좌우되는 것 같기도 하고. 혹시 조금이라도 상대편에 유리한 결과가 나올까 봐 걱정이 컸죠. 그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웠어요. 마지막까지 그랬어요.
Q : 승소가 확정되었을 때의 심경은 어떠셨어요?
신숙옥 : 안심했어요. 정말이지 이기지 않으면 안 되는 재판이었으니까요. 만약 패소하면 저뿐만 아니라 오키나와 평화 운동에 대한 유언비어도 모두 허용돼 버리잖아요. 대법원에서 확정되면 법적으로 인정받는 거니까요. 그럴 거면 왜 재판을 했느냐는 이야기가 돼 버릴 테니까 너무 무서웠어요. 그리고 다시 다른 누군가가 같은 재판을 한다면 저보다 더 힘들게 싸워야 한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저 이상으로 싸워야 한다면 죽겠다 싶었어요. 그러니까 꼭 이겨야 하는 재판이었어요.
재판부도 제가 당했던 엄청난 피해를 인정해서, 통상적으로는 100만 엔 정도에 그칠 배상금을 재판 사상 두 번째인가 정도의 고액으로 선고해 줬죠. 그리고 판결문에 (피고 측이) ‘민족적 차별을 조장할 수 있다’는 문장이 포함됐어요. 이 한 문장을 받아내는 데 7년이 걸린 거예요. 무엇보다 이 문장을 토대로 이후 벌어진 여러 재판이 승소할 수 있었어요. 제 재판 결과를 근거로 승리할 수 있으니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죠.
Q : 말씀처럼 재판 결과는 선생님 한 사람의 승소를 넘어 일본 운동사에서 앞으로 기억하고 학습해 또 다른 승리의 축적으로 이어가야 할 텐데, 일본에서의 반향은 어땠는지요?
신숙옥 : 저 다음으로 재판 투쟁에 나선 건 재일조선인이 아니라 일본 출신자였어요. 일본인이 차별주의자를 상대로 제소하고, 제 판결문을 인용했어요. 뭐랄까, 사실 아무리 목소리를 높인다고 해도 마이너리티인 우리가 민의를 바꾸기는 정말 쉽지 않아요. 정치가들도 잘 움직여 주지 않고요.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남은 건 사법부 밖에 없어요. 사법부에서 더 많은 승리를 쟁취하고 축적하는 것이 지금 가능한 수단입니다. 예전에 ‘도쿄도 관리직 승진 재판(東京都管理職選考国籍差別訴訟)’이 있었어요. 정향균 씨가 무척 애를 썼는데, 결국 대법원에서 재일조선인은 해당 지자체나 공공단체에 채용될 수는 있어도 관리직, 그러니까 간부는 될 수 없다고 결정해 버렸죠. 이후 향균 씨가 무너져 버렸어요. 향균 씨가 죽기 전에 뭐라고 그랬는지 알아요? 암으로 죽게 돼서 다행이래요. 자살할 수는 없으니까요. 마이너리티의 재판은 그렇게 패소가 확정돼 버리면 이후의 벽이라는 게 정말이지 높다, 어떻다 하는 수준이 아니에요. 그야말로 인생을 걸어야만 하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제 재판은 역시 중대했다고 생각해요. 중압감이 컸는데 변호사들도 애를 많이 써 줬죠.
Q : 그런데 선생님은 당사자로서만이 아니라 장애인, 오키나와 주민, 난민 등과도 함께 목소리를 내고 싸워 오셨잖아요. 최근에는 미성년자 성착취나 죠세이탄광(長生炭鉱) 희생자, 가자 문제와 관련해서도 활동하고 계십니다. 이를 고려하면 선생님은 배제되고 침묵을 강요받는 소수자, 약자와 연대하며 그들을 대리 내지 대변하신다는 생각도 듭니다. 누군가를 대신해서 혹은 위해서 목소리를 낸다는 의식이 있으신지요? 그 경우 당사자로서 말하고 투쟁할 때와 마음가짐이나 방법론에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신숙옥 : 그런 건 없어요. 단지 할 수 있는 걸 할 뿐입니다. 물론 이름이 알려진 사람으로서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게 있지만요. 나이를 먹으면서 젊은 사람들을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들을 대신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 끝까지 싸울 수 있도록 서포트하는 것뿐이죠. 그렇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 조력자가 되겠다는 발상은 아니에요. 그저 새로운 세대의 버팀목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은 정도예요.
그래서 이런저런 사안에 참여할 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하면 좋은지 물어봐요. 상대를 존중하면서요.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고요. 이만큼 오래 활동하다 보니 나름 여기를 도와주면 되겠다 하는 게 조금씩 보이기도 해요. 나이가 있잖아요.(웃음) 예컨대 고등학생들이 집회를 열겠다고 하면 신청서 쓰는 법이라든지, 무대에 필요한 것들을 구비하는 법이라든지 하는 것을 알려 주기도 해요. 집회 당일이 더우면 물을 가져가서 뿌리기도 하고요. 아이들은 제가 누군지 전혀 모르니까 그저 “아주머니 고마워요!”라고 하고, 저는 “아주머니도 열심히 할게!” 하는 식이에요.
Q : 연륜이 쌓인 여성으로서 투쟁이나 일상에서 느끼는 관점이나 태도상의 변화가 있으신지 조금 더 듣고 싶습니다.
신숙옥 : 젊을 때는 역시 ‘이렇게 옳은 일을 사람들이 왜 제대로 못 하는 걸까’ 싶었어요. 다른 재일조선인들은 왜 함께 싸우지 않느냐고, 특히나 힘 있는 남자들이 왜 전부 도망쳐 버리느냐고, 이렇게 바보 같으니 식민 지배를 당한 거라고 말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그냥 됐다 싶어요. 그들은 그들대로, 나는 나대로 할 일을 한다는 식이죠. 혼자 인생을 살아가는 게 즐거울 것 같으면 무슨 일이든 해나갈 수 있어요. 누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쓰거나 좋게 생각해 주길 바라지 않고, 뭐라든 나는 나대로 할 일을 하면 돼요. 역시 나이가 들면서 그렇게 바뀐 거 같기는 해요. 변화라기보다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고 할까요.
앞에서 잠깐 얘기한 과잉 적응해 가는 사람들의 애달픔 같은 것도 그렇죠. 사실 마이너리티 운동은 언제나 과잉 적응과의 싸움이기도 해요. 주류 쪽으로 넘어가 버리는 사람도 많고, 그중에는 이쪽을 공격하는 사람도 나와요. 예를 들면, 모 재일조선인 남성 학자가 일본인의 입장에 서서 계속 저와 리버럴 인사들을 공격했어요. 애초에는 그저 나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죠. 하지만 여러 상황을 보면서 그 사람도 그저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차별이 그런 일을 낳은 거예요. 차별이 과잉 적응을 발생시키고 마이너리티가 마이너리티를 공격하게 하죠. 여성이 여성을 공격하게 하는 식으로요. 그런 것들에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됐어요. 뒤통수를 맞아도 그러려니 하고요.
제가 아무리 애를 써도 대지진 피해지 같은 곳을 가면 ‘자민당 만세!’라거나 극우주의 참정당을 지지자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 상황 자체가 저에게 일종의 시험이에요. 그런 사람들을 위해 온갖 애를 써서 먹을 걸 전하는 것 자체가 제 자신과의 싸움이죠. 싫은 사람이라고, 사상이 다르다고 전하지 않는다면 제가 지는 거예요. 아무리 상대가 그렇더라도 전하겠다고 마음먹고 실제로 할 수 있느냐, 끝까지 해낼 수 있느냐 하는 물음이 저에게 던져지는 거죠.
저는 제가 좋고 소중하니까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천 년 만 년 살 것도 아니잖아요. 고작 백 년을 살면서 돈에 집착하는 것도, 내 감정을 억누르며 사는 것도 싫어요. 내 인생이라고 납득할 수 있도록,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살아가고 싶어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하지만 그 모든 걸 통틀어서, 세상 사람 모두가 나를 싫어한다고 해도, 나는 나를 좋아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살아나가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Q : 선생님과 관련한 최근 영상에서 타자와 직접 만나 먹을 것을 나누고 서로 돌보는 것을 강조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방금 말씀처럼 주류나 기득권을 타도하자는 목소리가 컸던 때와 비교하면 현재의 방향성이 달라진 듯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활동이나 전망과 관련해 이 부분에 대한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신숙옥 : ‘반경 5m의 정치’예요. 역시 주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거니까 서로를 지탱하는 관계가 되지 않으면 사회를 구성해 갈 수 없어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8월 15일에 집 페인트칠을 했거든요. 좀 도와달라고 했더니 야쿠자며 누구며 다 와 줬어요. 그중에 오후에만 참여한 아이들이 있었는데, 양복 차림으로 온 거예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왔대요. 완전 우파 애들이었던 거죠. 하지만 상관없었어요. 페인트칠만 해준다면야.(웃음) 그렇게 일을 마치고 같이 식사를 하는데, 좌파 리버럴 애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가는 사람들이 와도 되느냐는 거예요. “너나 오지 마”라고 했어요.(웃음) 사상과 신조가 다르더라도, 함께 밥을 먹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해요.
Q : 말씀하신 방식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생활 정치 혹은 일상의 운동으로 이해되는데,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듯합니다. 한국에서도 일상적, 지역적 활동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조금 더 힌트를 주실 수 있을까요?
신숙옥 : 한국은 모든 게 권력 투쟁처럼 보이기는 해요.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한다든가 일종의 생활 투쟁 같은 것보다는 말이죠. 하지만 한국 문화 안에서 이런 게 아예 없지는 않았을 거예요. 이를테면 오지랖을 펼치는 것도 그렇잖아요. 반면, 가토 슈이치(加藤周一) 작가가 그러더군요. 일본의 시민운동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고요. 왜냐하면 일본에 3,000개 정도의 시민운동 단체가 있는데, 그 대부분은 한두 사람이 운영하는 데래요.(웃음) 그걸 다 무너뜨리려면 엄청난 탄압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일본의 시민운동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애요. 정말 그래요. 일본에는 확신을 가진 한두 사람이 줄곧 싸워나가는 단체가 아주 많아서, 그곳들이 최후의 보루가 돼 주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일본인과 함께 생활하다 보면 알게 될 텐데, 일본에서는 한국처럼 의견을 내놓고 교섭해 가지 않아요. 테이블 석상에서 의견을 내는 건 상대를 내치려는 때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그 전에 조금씩 무언가를 사부작사부작 정해 가요. 그런 문화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어떻게 할지가 관건인데, 지금 가능한 것이 반경 5m 이내 사람들의 삶을 서로 지탱하는 거죠. 제가 5m를 지탱할 수 있고, 그 안의 누군가가 자신의 장소에서 다시 1m라도 외부로 나아가 준다면 반경이 그만큼 넓어지잖아요. 예컨대 저희 ‘아기 여우의 집[1]’에 연간 500여 명이 찾아와요. 먹을 걸 전해 주는 일만 해도 상근자가 없어요. 모두 다른 일을 하면서 짬짬이 해요. 그런데도 아마 보통의 자치단체에 필적할 만큼의 서포트를 할 수 있어요. 모두 유대감이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죠. 그 바탕에 함께 밥을 먹는 게 있어요. 함께 밥을 먹는 건 역시 정말 좋은 일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