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의 존엄 회복을 위해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 문화
  • 조슈아 D. 필저(Joshua D. Pilzer)
  • 2026-02-25
‘위안부’의 존엄 회복을 위해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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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의 존엄 회복을 위해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은 오늘날 여성인권운동의 상징이자, 전시 성폭력의 잔혹함을 증언하는 살아 있는 증거로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진 지금, 우리는 과연 한 개인으로서 그들의 삶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그들이 어떻게 폭력을 견디고, 전후 수십 년 시간을 긴 침묵으로 버텼으며, 여성으로서 자신의 경험을 되돌아보는지를 충분히 알고 있을까? 노래는 때로 말로는 다 전할 수 없는 경험의 차원을 드러낸다. 이 글은 독자에게 생존자들의 ‘노래’와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권한다. 민속음악학자 조슈아 D. 필저는 이들의 노래를 단순한 ‘위안부 제도’의 역사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자들이 자신의 기억과 슬픔, 회복력, 그리고 일상에 대한 사유를 표현하는 장으로서 기록했다. 이 글에서는 노래를 통해 만난 피해 생존자들의 모습을 따라가며, ‘듣기’라는 행위를 새로운 기억의 방식으로 제안한다.

 

지나간 옛일을 돌이켜보면서 
오늘도 애타는 한숨만 쉬누나
- 김순덕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 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인생은 일장춘몽이라
- 박두리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노래와 목소리를 듣는 일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2001년 초, 나는 미국 시카고대학교 대학원 도서관을 정처 없이 헤매던 박사과정 학생이었다. 한국 여성들의 음악문화를 연구하는 중 우연히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한국정신대 이야기 – 지울 수 없는 상처』 (1993)라는 제목의 책이었다.[1] 1993년에 한국어로 처음 출간되었고, 몇 년 뒤 영어 번역판도 나온 이 책은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한국인 피해 생존자들이 직접 증언한 내용을 엮은 최초의 증언집이었다.

그 시기 언론에 비친 ‘위안부’의 이미지는 매우 광범위했다. 전시 중의 소녀들과 여성들을 담은 흑백 사진, 그리고 피해 생존자들의 당시 모습을 담은 동시대의 사진—역시 대개 흑백으로 인쇄된—들이 신문과 책 속에 등장했다. 여성들의 현재를 보여주는 사진은 주로 제국의 변두리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모습이나, 자신이 겪은 불의를 규탄하는 시위 장면에서 포착된 모습이었다. 어디서도 그들의 전후 삶, 즉 거의 60년에 달하는 인생의 궤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후 출판된 한국어, 일본어, 영어 증언집에도 비슷한 상징적 이미지들이 반복적으로 담겼다. 우리는 기록된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말을 ‘읽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운좋게 실제 생존자들을 만나거나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직접 목소리를 들을 기회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접촉은 침묵 속의 만남이었다. 그 가운데 유일하게 여성들을 살아 있는 존재로, 즉 숨 쉬고, 움직이며, 말하고, 노래하는 인간으로 조명한 매체는 변영주 감독의 다큐멘터리 3부작 <낮은 목소리>(1995), <낮은 목소리 2>(1996), <숨결>(1999) 뿐이었다. 대부분의 여타 매체는 과거에 초점을 맞추었고, 생존자들을 식민지 역사에 남겨진 잔여물처럼 묘사했다. 그러나 이후 수십 년 동안 ‘위안부’ 생존자들의 형상은 점차 변화해, 이제는 한 인간이자, 활동가이자, 교육자로서의 더 풍부한 초상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한국정신대 이야기 –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읽으면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책에 증언한 거의 모든 여성들이 누구의 요청도 없이 증언 도중에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왜 그렇게 많은 이들이 노래를 불렀을까?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그 노래들과 목소리를 직접 채록해 보기로, 그리고 그것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쓰기로 결심했다. 이후의 10년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시간이었다.

 

 

왜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목소리와 노래에 귀 기울여야 하는가

솔직히 처음에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나와 생존자들 사이에는 정체성과 경험의 간극이 너무도 넓고 깊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2002년, 처음으로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에 참석한 때로 시간이동을 해야 한다. 정오 무렵 시위가 끝난 뒤, 나는 일곱 분의 피해 생존자들과 함께 ‘나눔의 집’으로 향하는 승합차에 타게 되었다. 그곳은 생존자들의 생활 공간이자, ‘위안부’ 운동의 중심지였다. 나는 그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물론 먼저 내가 한 곡을 불렀다. 그러자 마치 수도꼭지를 튼 듯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과거에 대한 질문만 받던 그들에게, 그 물음은 반가운 변화였던 것이다.

아직 녹음을 시작하진 않았던 때지만, 기억이 맞다면 김순덕 할머니—‘못다 핀 꽃’을 그린 화가로 알려진—께서 일제강점기의 명곡인 ‘목포의 눈물’을 불렀다. 박옥선 할머니도 노래하셨다. 아마 그녀가 좋아하던 ‘비 내리는 가을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배춘희 할머니는 전쟁 이후 오랜 세월 가수로 생계를 이어오신 분으로, 나눔의 집 직원들이 “프로 가수예요”라고 소개해 주었다. 그녀는 수백 곡의 레퍼토리 가운데 한 곡을 불렀는데, 그 노래가 어떤 노래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부터 나는 1년 반 동안 피해 생존자 약 마흔 명이 부른 400곡 가까운 노래를 녹음했다. 이후에도 10년간 매년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나눔의 집과 전국 여러 지역을 찾아 그 기록을 보완해 나갔다. 생존자들은 젊은 시절에 부르던 한국어와 일본어 노래, 전시 동안 퍼졌던 일본 군가나 유행가, 그리고 전통민요나 신민요를 불렀다. 어떤 노래는 그들 스스로 가사를 바꿔 부르기도 했다. 또 중국, 일본, 한국 등지에서 보낸 전후 세월 속에서 익힌 수많은 노래들이 그들의 방대한 레퍼토리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노래들을 기록물로 들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은 피해 생존자들이 실제 ‘위안소’에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역사적 증거로 여겨질 수 있다. 이용수 할머니는 자신이 머문 ‘위안소’가 있던 일본 가미카제 기지의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는 지금도 이 웹사이트에서 들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피해 생존자들의 노래는 ‘위안부’ 제도가 실제로 존재했고 여성들이 착취당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로써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노래를 오직 기록으로만 다룬다면, 우리는 생존자들을 역사의 경험을 담는 그릇이나 기록물 같은 존재로 축소시키게 될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비인간화다. 이는 과거 ‘위안부’ 이미지의 전형적인 도식과도 유사하다. 피해의 흔적을 ‘운동의 도구’로만 사용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평생 동안 비인간화에 맞서 싸워 온 여성들의 존엄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진 1] 왼쪽부터 필자와 황금주 할머니, 이용수 할머니, 김순덕 할머니이다.(사진 제공: 야지마 쓰카사)

 


 

 

노래는 삶을 지탱해온 생명력과 현재의 지혜를 증명하는 울림

2002년 어느 여름 밤, 나는 나눔의 집 거실에서 큰 원을 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 자리에 이옥선, 박두리, 김순덕 할머니를 비롯해 여러 피해 생존자들과 직원, 방문객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박두리 할머니 방 근처의 큰 거실이었다. 맥주와 안주가 놓인 테이블이 즐비했고, 모두가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작은 잔치 분위기였다. 이옥선 할머니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열다섯 살 때 중국으로 끌려갈 때 말이에요, 두만강을 건넜어요. 알겠어요? 그땐 그게 두만강인지도 모르고 건넜죠. 나중에야 알았어요, 두만강을 건넜다는 걸. 그래서 그 ‘두만강’ 노래 말이에요, 잊으려 해도 잃어버리지 않을 거예요. 죽어도 잊지 않을 거예요. 일본놈들한테 끌려가면서 그 강을 건넜으니까요…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사람들은 그녀가 1절만 부르고 멈출 거라 생각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런 ‘노래 잔치’에서는 보통 그렇게 끝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옥선 할머니는 멈추지 않고 2절까지 이어 불렀다.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어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쉬니
떠나간 그 님이 보고 싶구나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눈물 젖은 두만강’은 작곡가 이시우가 1930년대 후반, 조선 국경 근처의 만주 남서부 지역을 순회하며 극단 활동을 하던 중 만든 노래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그가 두만강 남쪽 기슭에서 한 여인을 만났는데, 그녀는 만주로 건너가 항일유격대에 합류했다가 전사한 연인을 그리며 통곡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옥선 할머니가 그날 밤 이 노래를 부르며 들려준 이야기도 바로 자신이 열다섯 살 때 끌려가 두만강을 건넜던 기억이었다. 그 순간 노래는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자, 끌려간 소녀를 추모하는 비가(悲歌)가 되었다.

아마 이 노래는 그녀에게 또 다른 의미도 지녔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녀는 중국 동북부 조선족 자치구에 남아 10년 동안 중국 내전에서 싸운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이옥선 할머니는 고국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그곳에서 이 노래를 부르며, 자신이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를 묻곤 했다. 그녀가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2000년의 일이었다.

그런 노래를 그날 밤 그녀가 우리에게 들려준 것이었다. 그 노래는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기억과 감정의 우물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생생히 살아 숨 쉬는 목소리로 불렀다. 그것은 그녀가 살아남았다는 증언이자, 삶을 지탱해온 강인한 생명력과 현재의 지혜를 증명하는 울림이었다.

 

 

단순한 기억의 매개가 아니라 자신을 복원해내는 행위

‘위안부’ 생존자들이 부른 노래 가운데는 이렇게 오래된 곡들—전시기나 그 이전에 만들어진 노래들—도 많다. 『한국정신대 이야기』와 같은 증언집이나 한국 대중문화 속에서 주로 조명된 노래들도 대부분 이런 과거의 노래들이다. 그러나 이런 노래들만 듣다 보면 우리는 그들을 과거에만 머물게 하는 위험을 감수하게 된다. 실제로 많은 생존자들이 부른 노래는 결코 오래된 것이 아니며, 1990년대 ‘위안부 운동’이 본격화되기 전후의 오랜 세월 동안,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남고 소속감을 지켜왔는지를 들려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나는 전후 각 시기를 대표하는 대중가요들을 채록했는데, 어떤 노래는 불과 몇 년 전에 만들어진 곡도 있었다.

문필기 할머니는 자신의 ‘계속 변해온 애창곡의 역사’를 들려주었다. 전후 초기에는 1938년 곡 ‘불효자는 웁니다’를, 이후에는 1957년 곡 ‘울어라 기타줄아’를, 그리고 2000년대 초에는 새로운 애창곡으로 태진아의 1980년 곡 ‘어차피 떠난 사람’으로 옮겨갔다고 했다. 때로는 과거와 현재의 좋아하는 노래들을 엮어 메들리로 부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한국으로 돌아온 문필기 할머니는 여러 곳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녀는 술집에서 손님에게 술을 따르고 노래와 춤을 선보이는 일로 생계를 꾸렸다. 트로트의 열렬한 팬이기도 했던 그녀는 라디오와 TV의 노래 경연 프로그램을 들으며 새로운 곡들을 익히고, 자신만의 레퍼토리를 늘려갔다. 이를 통해 그녀는 장르에 대한 이해를 유지하며 대중문화와 진화하는 연결고리를 이어나갔다. 트로트는 일제강점기의 ‘폭스트로트(foxtrot)’에서 유래한 대중음악 장르로, 1970년대까지 한국 대중음악의 중심을 이뤘다. 이런 음악은 문필기 할머니가 사회의 변두리에서 외롭게 살아가면서도,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서 정체성과 소속감을 유지할 수 있게 한 매개였다. 그녀는 자신과 다른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을 역사에서 지우려는 초국가적인 시도가 만들어낸 공허 속에서도, 노래를 통해 존재를 이어나갔다. “노래는 친구 같아요”. 그녀는 라디오를 켜둔 채 잠드는 날이 많았다고 했다.

이 노래들은 문필기 할머니의 인생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고, 각 노래는 그녀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의미 있는 ‘도구’였다. 그녀가 가장 아꼈던 오래된 노래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그린 곡이었는데, 이는 자신이 속아서 ‘위안부’로 끌려가며 겪은 극심한 상처, 그리고 어머니와 관계에 대한 후회와 그리움을 표현하는 통로였다. 반면, 비교적 최근의 애창곡들은 잃어버린 사랑을 노래했다.

문필기 할머니는 종종 “내 몸은 더럽혀졌지만 마음은 깨끗하다”고 말했다. 이는 ‘순수한 여성’과 ‘더럽혀진 여성’을 구분짓는 가부장적 이분법 속에서 자라난 세대의 사고방식이었다. 그녀는 잃어버린 연인을 향한 변치 않는 사랑을 다룬 노래를 통해 자신의 순수함을 거듭 확인하며, '마음을 다른 이를 위해 지켜왔다'고 말했다. 활동가들이 “잘못된 것은 당신의 몸이 아니라, 당신을 학대한 사람들”이라고 설득하곤 했지만,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트라우마를 대처하는 방식을 발전시켰고, 삶의 온전함을 다시 구성해온 셈이었다. 그 믿음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처럼 많은 생존자들이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통해 ‘자기 자신을 다시 조립하는’ 과정을 거쳤다. 박두리 할머니는 매일 민요를 부르며 삶의 연속성을 이어갔고, 배춘희 할머니는 수백 곡의 노래로 자신의 생애를 화려하고 영화 같은 음악과 생존의 대서사시로 다시 써 내려갔다. 그들의 노래는 단순한 기억의 매개가 아니라, 자신을 다시 살아 있는 존재로 복원해내는 행위였다.


 

[사진 2] 마이크를 들고 노래하는 배춘희 할머니와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이용수 할머니(왼쪽), 박옥선 할머니(가운데), 김분순 할머니, 필자의 모습이다.(사진 제공: 야지마 쓰카사)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일에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잊지 않는 법’

나는 나의 책 『소나무의 마음: 세 명의 한국인 위안부 생존자들의 노래와 삶』 (Hearts of Pine: Songs in the Lives of Three Korean Survivors of the Japanese “Comfort Women”)에서 이러한 여성들과 그들이 노래를 통해 삶을 이어간 다양한 방식을 다루었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노래를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음악을 감상하는 일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실천해온 생존의 방식들, 자기표현과 자아 재구성의 행위들, 기억하고 잊으려는 몸짓들, 그리고 소속을 찾아 싸워온 여정을 듣는 일이다. 우리는 그들의 노래 속에서 통제할 수 없던 트라우마를 삶 속으로 끌어들여 다스려온 방법을 듣고, 훗날 정치적 발언으로 발전하게 될 목소리를 단련해온 장(場)을 듣는다. 이 노래들 속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귀 기울여 듣는다면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은 단지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의 지혜를 일구어 온 학자이자 교사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진 3] 『소나무의 마음』 (옥스퍼드대학교출판부, 2012)의 표지. 표지 그림은 강덕경의 회화 「한의 승화」(2004)로, 나눔의 집의 허가를 받아 사용되었다.

 


나는 2002년부터 한국의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과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제2차 세계대전과 파시즘의 국제적 기억이 아직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그 시대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이러한 문화적 기억은 점점 약해지고, 선택적으로만 남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끊임없는 정보 자극, 미디어와 선전의 조작 속에서 방향 감각을 잃은 채, 불안정, 소비, 공포가 뒤섞인 ‘영원한 현재’ 속에 살고 있다. 과거는 ‘가짜’로 치부되고, 미래는 불확실성의 블랙홀 혹은 불길, 홍수, 역병, 전쟁, 종말로만 그려진다.

세계를 독차지한 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권위주의적 자본주의는 우리의 혼란과 망각, 두려움을 먹고 자란다. 그것은 과거를 반복하기 위해 우리의 방향 감각을 잃게 만든다. 부유하고 권력 있는 자들은 여성 혐오와 배타적 민족주의를 조장해, 원래라면 탐욕스러운 지배층에 맞섰을 사람들을 서로 적으로 돌린다. 그 결과,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매일 ‘위안부’ 제도와 다르지 않은 성별화되고 인종화된 폭력의 희생자들이 새로이 만들어지고 있다(관련 논의로는 이동화의 최근 웹진 『결』의 기고문을 참조할 수 있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은 현재의 위험을 이해하는 데 있어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위안부’ 문제는 결코 고립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나 구조적으로, 근대의 군사화된 세계 속에서 여성의 성이 체계적으로 착취되고, 여성과 아동이 희생되어온 글로벌한 폭력의 패턴과 연결되어 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많은 생존자들은 미군, 한국군, 기타 동맹군의 기지촌 주변에 형성된 성산업으로 흘러들어 갔다. 이는 ‘위안부’ 제도가 단지 한 시대의 사건이 아니라 이어진 역사적 구조의 일부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을 여유가 없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은, 그리고 그 피해를 견뎌온 여성들은 결코 망각의 특권을 누려본 적이 없다. 그들의 과거는 정신과 몸에 새겨져 있으며, 평생에 걸쳐 되살아난다. 그렇기에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일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잊지 않는 법’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귀 기울인다면 그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또한 우리에게 가르쳐줄 것이다. 

“죽어도 잊지 않을 거예요.”
- 이옥선

 

 

각주

  1. ^Keith Howard, ed., True Stories of the Korean Comfort Women: Testimonies Compiled by the Korean Council for Women Drafted for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 and the Research Association on the Women Drafted for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 (London: Cassell), 1995.
  • 글쓴이 조슈아 D. 필저(Joshua D. Pilzer)
    토론토대학교 민속음악학 교수이자, 여성·젠더연구소 및 한국연구센터의 연구회원이다. 현대 한국과 일본의 음악 및 소리의 인류학, 목소리, 젠더, 트라우마, 그리고 일상생활 연구에 초점을 맞춘 연구와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두 번째 저서 『고요함: ‘한국의 히로시마’에 대한 음악인류학』 (Quietude: a Musical Anthropology of ‘Korea’s Hiroshima, 2022)은 한국인 원폭 생존자와 그 자녀들의 생존 예술을 다룬 민족지적 연구서다. 현재 그는 일본 현대사회에서 목소리가 예절과 권위의 교육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탐구하는 세 번째 저서 『거울 속의 목소리』 (Voices in the Mirror)를 집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