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이라크 북부의 작은 마을 코초(Kocho)에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이슬람국가(IS)가 들이닥쳤다. 남성들 대부분이 살해되었고, 여성과 아이들은 트럭에 실려 끌려갔다. 그중에 나디아 무라드 (Nadia Murad)가 있었다. 나디아는 성노예로 지내다가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탈출했다. 이후 나디아는 자신처럼 고통을 겪은 야지디족(Yazidi) 여성들의 실상을 증언하고 성폭력에 맞서 인권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세계 곳곳의 전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지원하는 드니 무퀘게(Denis Mukwege)의 인권활동도 있다. 최근 러시아 군인들을 성폭력 가해자 리스트에 올린 우크라이나 여성들의 활동에는 글로벌 네트워크 세마(SEMA)의 지원이 있었는데, 그는 이 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산부인과 의사인 드니 무퀘게는 콩고 내전이 격화하는 중에 무장 세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가 급증하자 피해자 치료와 재활에 헌신했다. 나아가 정치적·신체적 위협에도 국제사회에 전시 성폭력 실태를 알리고 전쟁 종식과 가해자 처벌을 위해 앞장서 왔다.
2018년 노벨위원회는 이 두 사람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했다. ‘성폭력이 무력 분쟁의 무기로 사용되는 현실을 종식하려 노력한 그들의 활동’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국제적으로 ‘미투 해시태그(#me too)’ 운동이 주목을 받으며 성폭력에 대한 관심과 환기가 팽창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노벨평화상이 전시 성폭력을 포착할 정도로 이제 분쟁 관련 성폭력은 전쟁범죄이자 평화 문제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전시 성폭력에 대한 인식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르완다 무력 분쟁에서 발생한 집단 강간으로 촉발돼 2000년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이하 유엔안보리) 결의 1325’의 채택으로 영글어졌다. 1970~1990년대를 지나면서 여성운동과 평화운동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성폭력과 분쟁 관련 성폭력이 결코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는 감각을 확산시켰다. 동시에 여성에 대한 폭력을 군사주의의 문제로 읽어내는 이론적 논의도 발전시켜 왔다. 이러한 오랜 실천과 연구의 축적 위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평화의 의제’라는 인식이 국제 규범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후 이러한 흐름은 조금씩 더 구체화됐다. 2008년 ‘유엔안보리 결의 1820’은 안보리 차원에서 처음으로 성폭력 사용을 ‘전쟁의 전략(tactic)’으로 명시했다. 무력 분쟁에서 발생한 성폭력을 평화와 안보를 위협하는 요소로 규정한 것이다. 성폭력을 전쟁의 수단(tactic)이자 안보를 위협하는 요소로 규정한 것이다. 2009년에는 분쟁 성폭력 특별대표직을 신설하고 전문가 팀을 배치했으며(유엔안보리 결의 1888), 2010년에는 분쟁 당사자 명단을 등록하고 모니터링 시스템을 마련해 가해자 감시 체계를(유엔안보리 결의 1960) 도입했다. 2013년에는 사법적 처벌과 책임을 강조하는(유엔안보리 결의 2106) 등 실질적 이행을 뒷받침하는 후속 결의를 채택했고, 2019년 UN안보리 결의 2467에 이르러서는 피해자 중심 접근을 원칙으로 명시했다. 국제사회가 성폭력을 ‘어쩔 수 없는 피해’가 아니라 명백한 전쟁 범죄로 인식해온 궤적이다.
2026 4월, 유엔이 발표한 ‘2026 유엔 분쟁 관련 성폭력 보고서(이하 보고서)’는 이처럼 국제사회가 합의하고 발전시켜온 국제 규범이 현실에서 얼마나 이행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다. 이번 보고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성폭력의 증가이다. 2025년 한 해 동안 공식적으로 ‘검증’된 성폭력은 9,788건으로, 전년 대비 2배 이상 급증했다. 이에 대해 유엔 분쟁성폭력 특별대표 프라밀라 패튼(Pramila Patten)은 분쟁이 그만큼 잔혹해지고 장기화되고 있음을 뜻한다고 짚었다. 또 전쟁이 길어질수록 무기 생산에 자원이 몰리고, 피해자 지원과 예방 프로그램은 가파르게 축소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보고서는 또 성을 매개로 한 폭력이 점점 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한다. 특히 이스라엘과 하마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등 최근 분쟁 지역의 성폭력 가해 의혹 행위자 명단이 새롭게 추가되었다는 점도 함께 밝히고 있다. 보고서에 담긴 주요 특징을 통해 이 숫자와 사실들 너머에 있는 현실과 구조에 좀 더 천착해보자.
보고서가 반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강간과 성노예, 납치가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명백한 ‘전술’로 사용된다는 사실이다. 길게 이어지는 분쟁 속에서 성폭력은 주민에게 공포를 심어 마을을 떠나게 만들고, 지역사회의 결속을 무너뜨린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과 콩고민주공화국에는 성폭력이 천연자원이 풍부한 영토를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수단에서는 적대적 공동체를 처벌하는 수단으로 동원되어 강제 이주를 촉발한다. 부르키나파소, 말리, 모잠비크 북부에서는 납치와 성노예가 특정 집단을 향한 테러 전술로 쓰이고, 콜롬비아에서는 무장단체가 소형 무기 유통과 인신매매를 함께 벌여 자금을 조달하는 하나의 비즈니스로 기능하기도 한다.
문제는 폭력이 일시적 성적 착취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무엇보다 여성의 임신과 건강 문제로 이어지는데, 남수단의 경우처럼 성폭력 생존자와 자녀들이 지역 공동체의 사회경제적 관계망에서 배제되고 차별받는 사례도 있다. 성폭력 이후 피해자들은 생존마저 위협받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콩고와 미얀마에서는 피해자에 대한 즉결 처형이, 아프가니스탄과 미야마에서는 자살 사례도 보고된다.
이처럼 특정 마을이나 집단, 민족을 통제하거나 추방하고 말살시키는 분쟁 관련 성폭력은 단순히 전쟁 범죄로 그치지 않고 상대 집단이나 사회를 지배하는 통치 기술로 작동한다.. 여성의 몸을 통해 갈등 자체를 통치하려는 시도이다. 평시의 젠더 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여성의 몸을 가족의 명예나 국가의 도덕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기는 가부장적 인식은 평상시 성폭력을 통해 여성의 옷차림과 몸가짐, 자유로운 이동 등을 단속하고 일상의 활동 범위를 좁히는 방식으로 작동하다가 전시에는 성폭력을 통해 상대 집단의 남성들과 사회를 통제한다. 전시 성폭력과 일상의 성폭력은 뿌리에서부터 이어져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남성의 보호 아래 두는 가부장적 질서 유지 장치가 된다.
보고서가 강조하는 또 하나의 지점은 강간이 단일 사건에 그치지 않고, 납치와 강제결혼, 성노예, 인신매매, 심지어 여아의 병사화까지 서로 연결되는 복합적인 폭력의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 고리들은 전투원을 모집하고 자금을 확보하는 전쟁 경제와도 맞물려 있다. 이러한 연결망 안에서 이뤄지는 성폭력은 국가에 소속된 군인이나 경찰만이 아니라 저항군, 군소 무장집단, 갱단까지 다양한 행위자가 관여해 가해자를 하나로 특정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이 유엔의 지적이다.
눈여겨 볼 또 다른 대목은 여전히 여성과 여아가 압도적 다수의 피해자이지만 남성에 대한 성폭력 역시 보고되고 있다는 점이다. 주로 구금 시설에서 구타 등 물리적 폭력과 함께 발생하는데, 정작 많은 남성 생존자들은 자신이 겪은 일을 ‘성폭력’이 아니라 ‘고문’이라 말한다. 그 결과 이들은 성폭력 피해 지원 체계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다. 이스라엘 구금 시설에서는 남성과 소년을 겨냥한 고문 형태의 성폭력이 빈번히 보고되었고, 강간과 강간 미수, 생식기 폭력으로 인해 직장 출혈이나 부종 등의 신체적 후유증에도 의료 지원을 받지 못해 방치된 사실이 드러났다. 피해 사실을 신고하지 말라는 협박도 뒤따랐다.
우크라이나에서도 남성 구금자를 대상으로 한 성폭력이 52건 확인됐는데, 처벌이나 자백 강요, 모욕의 수단으로 쓰인 경우가 많았다. 보고서는 구금 시설에서 성소수자(LGBTQ+)가 처한 위험 역시 놓치지 않고 있다.
이처럼 남성 피해자나 성소수자 역시 젠더 규범에서 자유롭지 않다. 남성성이 훼손되었다는 수치심과 낙인은 이들이 피해를 고문으로만 명명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존재 자체가 통계와 지원 체계에서 지워진다. 여기에 더해 디지털 성폭력이라는 새로운 유형이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아이티와 남수단에서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협박하고 모욕하기 위해 성폭력 영상을 촬영해 저장했고, 콜롬비아에서는 영상 유포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사례도 있었다. 기술의 발전이 폭력의 형태까지 바꿔놓고 있다.
가해자 명단을 공개하고 감시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책임을 묻고 재발을 막기 위한 주요 조치이다. 그러나 현실의 성폭력 문제에서 정작 어려운 지점은 정작 가해자와 관련 국가가 이를 인정하거나 바로잡으려는 조치를 외면한다는 데 있다.
이는 최근 이스라엘과 하마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분쟁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2023년 10월 7일 발생한 공격과 관련해 하마스는 보고서에 등재되었으나 어떤 성폭력 사건도 인정하지 않았다. 2025년 유엔은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구 출신 31명에게 가해진 고문 형태의 성폭력을 검증했지만, 이스라엘 방위군과 특수부대, 대테러 경찰 등이 저지른 것으로 지목된 대다수 사건은 여전히 규명되지 않았다. 이스라엘 정부가 구금 시설이나 가자 지구에 대한 접근 자체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영토 내에 있는 검문소와 이스라엘 군사 작전 중에도 인권 침해 행위가 일어났으나 이스라엘 정부는 책임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2024년 7월, 스데 테이만(Sde Teiman) 군사 캠프에서는 예비역 병사 5명이 구금자를 성폭행했다는 증거가 있었지만 기소장에는 성폭력과 강간 혐의가 아예 포함되지 않았고, 2026년 3월 모든 혐의가 취하되었다. 그 외에도 피해자들의 성폭력 신고는 잇따르나 이스라엘 정부의 접근 거부로 유엔 관련 기구에서 신고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다. 2025년 러시아 역시 우크라이나 점령지와 러시아 연방 내에서 성폭력이 기록되고 있음에도 유엔 감시단의 접근을 차단했다. 국제사회가 정보는 커녕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확인하기 어렵다.
분쟁 관련 성폭력은 보편적 인권 문제이자 평화를 위한 중요한 의제다. 따라서 몇몇 가해자를 처벌하고 끝나는 일회적 사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진실을 규명하고 가해자가 자신의 행위를 인정하며 책임지는 것과 함께 피해자의 존엄과 안전을 보장하고, 사회적으로 차별이나 낙인, 경제적 곤궁에서 벗어나 다시 삶을 꾸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성폭력이 재발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는 사회적 회복, 즉 전환기 정의가 이뤄져야 한다. 전쟁이 끝나도 폭력의 구조가 그대로라면 평화에 다다랐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보고서는 피해자들에게 배상하고 사회적 회복을 위한 조치를 국가가 이행했는가도 살핀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코소보, 야지디 여성 생존자들의 사례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전환기 정의는 왜 자꾸 뒤로 밀리는 걸까. 그 원인 중 하나로 자원의 쏠림, 즉 국가안보와 군사화에 물질적 자원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반면 피해 생존자를 지원하는 여성단체와 국기기구의 인프라는 약하다. 실제로 2026 보고서는 국제사회의 물질적 지원이 축소되면서 피해자 쉼터가 축소되거나 병원이 폐쇄되고, 상담이 중단되는 현실을 확인하며 우려를 표한다. 여기에 온라인상의 여성 혐오 발언과 위협까지 더해지면서 인권활동가들의 활동 역시 위축되고 있다.
그래서 이제 국제사회가 물어야 할 것은 군사화가 전환기 정의를 이루기 위한 물질적 조건을 어떻게 잠식하는가이다. 신자유주의 경제 구조에서 발생하는 재정 긴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과정에서 누구의 삶이 더 취약해지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가해자 처벌은 어떠한가? 가해자는 단순히 개인이 아니라 군대, 경찰, 무장조직, 정치엘리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가해자 처벌은 그 조직의 정당성과 국가의 책임을 묻는 복잡한 과정을 동반하다. 말하자면 진실을 밝히고 책임을 묻는 일은 결국 권력에 대한 비평이자, 남성 중심으로 구축된 안보 질서를 다시 짜는 일이다.
이 때문에 평화협정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성폭력 문제는 자주 뒷전으로 밀린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진실 규명과 평화협정의 모든 과정에 여성과 사회적 소수자가 직접 개입하고 참여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 분명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