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공적 기억으로 부상한 중요한 전환점은 1991년이다. 같은 해 11월 28일자 『로동신문』은 11월 25일부터 30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를 보도했다. 북한 대표단은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이자 독립운동가 여운형의 딸로 알려진 려연구가 이끌었다. 기사는 일본 정치인 시미즈 스미코(清水澄子)가 일본 정부를 대신해 군 성노예 범죄에 대해 사과한 발언을 소개했다. 또 약 17만~20만 명의 젊은 여성들이 ‘정신대’라는 이름 아래 일본군에 동원되어 ‘위안부’가 되었다고 언급했다.[1] 구체적 서술은 제한적이지만, 이 보도는 북한이 ‘위안부’ 문제를 공식 매체에서 언급한 최초 사례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해 5월 일본에서 열린 제1회 토론회는 보도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해 8월 14일 한국에서 김학순의 공개 증언이라는 중대한 사건이 벌어진 직후 북한이 이 문제를 대내적으로 공개했다는 점은 중요하다. 1991년 11월 기사 이후 두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인 1992년 1월 16일자 『로동신문』은 당시 새롭게 드러난 여러 사실을 상세히 다뤘다. 여기에는 1991년 12월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한국 피해 생존자들의 소송, 1992년 1월 10일 주오대학 역사학자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가 일본 방위연구소에서 발견한 ‘위안부’ 관련 문서, 그리고 일본군의 위안소 설치·운영에 대한 직접적 관여 사실, 1월 14일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일본 총리의 사과 등이 포함되었다.[2] 이때를 기점으로 북한 언론은 일본 정부의 책임을 직접적으로 묻고 정의 실현을 요구하는 논조로 꾸준하게 보도와 논평을 이어갔다. 보도량 자체는 남한에 비해 적었지만, 일본을 향한 강한 비판은 국제 정세가 민감한 시기에도 흔들리지 않았다.[3]
북한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공적 기억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이지만, 식민지 시기 성노예 범죄에 대한 인식의 단초는 그보다 약 30년 앞서 발견된다. 1964년, 한국과 일본 간 국교 정상화가 임박하자 북한은 이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제국 일본의 전시 성노예 문제를 제한적으로 다루었다. 대중잡지 『조선녀성』에 실린 ‘일제의 야만성을 잊지 말자(Let Us Not Forget the Barbarity of Imperial Japan)’라는 글에서 필자 김옥선은 평안남도 안주에서 벌어진 ‘대만관’의 참상을 회상한다. 그는 전국 각지에서 끌려온 수많은 조선 여성들이 이곳에 감금된 뒤 남중국, 홍콩, 마닐라, 싱가포르 등 “일본 제국주의의 마수가 뻗친 곳이라면 어디든지”로 실려 갔다고 기록했다.[4] 김옥선의 회고는 미약한 속삭임에 가깝지만,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임신한 ‘위안부’ 사진의 주인공이자 북한의 대표적 생존자‧활동가였던 박영심이 동일한 평안남도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평안남도가 조선인 여성들이 구금·이송되던 주요 거점 가운데 하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북한의 담론에서 즉각 눈에 띄는 부분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공적 기억 속에서 일관되게 김일성의 권위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위안부’ 역사를 문제화하고 피해자에 대한 정의를 요구하는 과정 전체가 김일성의 발언을 통해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북한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성노예 범죄를 언급한 최초의 발언으로 자주 인용되는 것도 김일성이 1946년 5월 9일 여성동맹 책임자들에게 한 연설이다. 그는 이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동아전쟁 기간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조선의 젊은 여성들을 강제로 끌어다가 범죄자처럼 굴동과 우리 안에 가두어 놓고, 짐승처럼 부려 전쟁 물자 생산에 종사하게 하였다. 또한 전선에까지 끌고 다니며 갖은 야수적 만행을 감행하였다.일제 파쑈놈들의 비인간적 압박과 착취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인신적 모욕행위로 말미암아 꽃다운 청춘과 목숨을 빼앗긴 조선녀성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5]
이 문구는 1995년 8월 출판된 북한 최초의 피해자 증언집 『짓밟힌 인생의 웨침』 서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북한에서 주민사회는 언제나 당-국가 체제를 반영하기 때문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메시지 역시 자연스럽게 국가의 목적과 결부된다. 실제로 북한의 대표적 ‘위안부’ 정의 추구 단체인 ‘조선일본군성노예 및 강제련행피해자문제 대책위원회’는 조선노동당 산하 기구이다. 참고로 이 단체는 시기별로 명칭이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1992년 창설 당시에는 ‘종군위안부및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로 불렸고, 이후 2000년부터 2014년까지는 ‘조선일본군위안부 및 강제련행피해자문제 대책위원회’로 바뀌었다가 현재의 명칭이 되었다. 이러한 명칭 변화는 북한이 선호하는 용어 사용이 ‘종군위안부’에서 ‘일본군 성노예’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당-국가와 주민사회의 밀착 관계는 남한의 상황과는 대조적이다. 한국에서는 정의기억연대(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정부와 독립적으로 활동해 왔고, 때로 정부와 지향이 달라 상충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당-국가의 강력한 영향력이 주민사회의 자율성을 제약해온 북한의 구조적 특성 속에서 당-국가와 주민사회는 지난 30여년 동안 일본군 성노예 전쟁 범죄에 대한 일본 정부의 직접적 책임을 요구하는 하나의 목소리를 유지해왔다. 국제정치 환경의 변화 속에서도 북한에서 ‘위안부’ 문제는 당-국가와 주민사회가 비판과 정의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일관되게 공유해 왔던 셈이다.
1990년대 내내 북한과 일본이 국교 정상화와 경제 협력을 두고 협상을 진행하던 시기에도 이런 기조는 유지됐다. 1991~1992년 첫 번째 국교 정상화 회담에서 일본이 식민지 지배와 관련된 모든 청구권 문제는 논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자, 북한은 이에 타협하기보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협상 테이블에 올리며 회담을 좌초시켰다.[6] 이어 1990년대 후반으로 넘어와 1997년 2월 요코타 메구미(横田 めぐみ) 납치 사건[7]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고, 1998년 8월 북한이 미사일로 인식된 로켓을 발사하면서, 1994년 제네바 합의 이후 개선되는 듯 보이던 양국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양보 대신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일본은 도덕적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이는 종군위안부및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의 다음 성명에서도 잘 나타난다.
“우리의 위성 발사 문제를 두고 일본의 우익 반동들이 벌이는 반공화국 책동이 극도에 달하고 있다. 우리는 일본과 국교가 정상화되지 않아도 괜찮다. 그러나 과거 죄악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받는 것은 우리 인민의 확고한 의사이며 권리이다.”[8]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조약(기본조약)체결[9] 당시, 박정희 정권이 식민 지배로 인한 피해에 대해 일체의 청구권 제기를 하지 않는 조건을 수용함으로써 협정이 가능해졌던 과거 남한 정부의 양보적 태도와 비교하면 이 차이는 두드러진다. 당시 일본이 남한에 제공한 3억 달러는 전쟁 범죄에 대한 배상이 아니라 경제협력 자금이었다. 2015년 12월의 한일 합의[10] 또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되었다”고 규정함으로써, 향후 비판의 대상에서 제외하려는 타협적 조항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 합의는 피해 생존자들이 의미 있게 참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부적절한 대응이라는 강한 비판에 직면했다. 이후 2017년 문재인 정부는 합의에 대한 공식 검토를 실시했고, 이 합의는 사실상 효력을 상실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요컨대 한국 정부는 외교 및 경제 관계가 일본과의 역사 정의 문제보다 우선시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반면 북한 정권은 주민사회와 단일한 목소리를 내며, 일본과의 관계가 과거사 해결을 전제로 구축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이러한 이유로 북한과 일본은 오늘날까지도 국교 정상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실제 활동 측면에서 보면 북한의 일본군‘위안부’ 정의 운동은 때로는 남한의 운동과 보조를 맞추고, 때로 다른 경로를 취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92년부터 2018년까지 총 15차례 개최된 ‘아시아연대회의’에 북한 활동가들이 참여한 바 있으나, 참가국으로서 직접 참석한 것은 1993년 10월 도쿄회의 한 번뿐이었다. 반면 비교적 짧은 기간-1991년 5월부터 1993년 4월까지 네 차례- 열린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에서는 훨씬 활발하게 활동했다. 북한 대표단은 네 차례 회의에 모두 참석했고, 1992년 9월 1일부터 6일까지는 평양에서 직접 회의를 주최하기도 했다.
1992년 9월 평양 회의에는 북한 ‘위안부’ 피해 생존자 4명이 포럼에 참여했다. 리경생(76), 리복녀(73), 김영실(69), 김대일(77)[11]이다. 이 가운데 리경생은 북한에서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선 생존자로, 남한의 김학순에 비견할 수 있다. 그는 1992년 5월 3일 조선중앙텔레비전 인터뷰에서 한 일본군 병사가 “위안부들이 군인들의 돈을 가로챘다”고 말했다는 기사를 읽고 분노해 증언에 나섰다.
리경생의 사례는 매우 주목할 만하다. 그녀는 1929년 열두 살의 나이에 경상남도 창원시의 일본 군수 공장으로 강제로 끌려갔다고 증언했다. 이후 1933년 탈출할 때까지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었다. 이 이야기는 5월 인터뷰에서 처음 공개되었고, 같은 해 9월 평양회의 첫날 종군위안부및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가 발표한 ‘고소장’에서도 반복되었다.[12] 보다 구체적인 서술은 1995년 출간된 증언집 『짓밟힌 인생의 웨침』에 수록되어 있다.[13] 리경생의 증언은 공식적인 ‘위안소’ 설치가 1931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음에도, 그 이전 1920년대부터 비공식적 ‘위안소’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는 군사기지뿐 아니라 산업시설 등 다양한 장소에서 이런 형태가 운영되었음을 확인시켜준다. 북한에서 ‘위안소’의 기원을 1920년대로 서술하는 것도 바로 리경생의 증언에 근거한 것이다(사진 3 참조).
아시아여성기금을 비판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북한과 남한의 입장이 일치한다. 이는 1995년 『로동신문』 기사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기사에 따르면 “일본 정부와 ‘종군위안부’들 사이에는 법적 관계가 존재한다. 전자는 가해자이며 후자는 피해자이다. 가해자인 일본 정부는 피해자인 ‘종군위안부’들에게 배상해야 한다. 이것이 법적 주체로서 일본 정부가 수행해야 할 책임과 의무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민간으로부터 돈을 모아 생존한 ‘종군위안부’들에게 자선금으로 나누어주는 기금을 만들었다. 이는 국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너절한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14] 일본 정부가 완전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점은 정의 운동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문제이다.
남북한이 공통 입장을 취하는 또 하나의 지점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글로벌 인권 의제로 다룬다는 점이다. 2018년 발간된 북한 형사 추리소설 『네 덩이의 얼음』(전인광)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복잡한 초국가적 성격을 갖춘 주제로 접근한다.[15] 제목 ‘네 덩이의 얼음’은 일본의 주요 4개 섬을 가리키는데, 북한과 한국, 일본, 태국, 필리핀, 중국 인물들이 아시아 전역을 무대로 등장한다. 일본과 태국의 경찰관 2명이 협력해 살인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정당하게 글로벌 인권 문제로 격상된다. 그리고 『네 덩이의 얼음』은 현재까지 북한에서 출간된 유일한 일본군‘위안부’ 관련 소설이다.
북한의 일본군‘위안부’ 정의 운동은 일관되고 흔들림 없는 비판과 요구를 통해 분명히 평가받아야 한다. 당-국가가 주민들과 긴밀히 연결된 구조가 그러한 강경한 태도를 가능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 하지만 바로 이 긴밀함 때문에 북한 내 담론적 진전이 더디게 이뤄진 면도 짚어져야 한다. 남한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심화되면서, 특히 보편적 사유와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급진적 페미니즘의 인식론적 지형 위에서 고도화된 연구와 담론 형성이 진행되어 왔다.[16] 동시에 오늘날 ‘위안부’ 논의가 가부장제 문제, 민족주의, 시장 지상주의, 국가 권력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한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는 부분이다. 말하자면 이 운동은 국가와 자본 모두가 자행하는 인신매매와 성매매 과정에서의 폭력과 억압, 착취가 ‘개인의 선택’과 맞물려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이속에서 ‘역량 강화’와 ‘착취’ 문제를 세계가 글로벌 문제로 공유하는 것과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분리될 수 없음을 날카롭게 인식하게 한다. 이런 질문은 오늘날 ‘위안부’ 운동에 필수적이지만 당-국가에 대한 비판이 제약되는 북한에서는 충분한 탐구가 이루어지기 쉽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