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명부와 복원명부에서 발견한 조선인 여성들 -상-

강정숙

  • 게시일2020.07.10
  • 최종수정일2022.11.28

 

유수명부와 복원명부 들여다보기 

어느 나라건 군대는 체계적으로 운영됩니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일본군의 군대 관리에는 전쟁에 참여한 군인· 군속(군무원의 옛말)의 숫자와 이들의 상태(사망과 부상 여부, 귀국 일시 등)를 기록하는 것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래야 병력의 상황을 파악하고, 군인에게 월급이나 상벌을 주며, 군인· 군속이 전쟁터에서 사망했을 경우 가족에게 사망 통보를 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이러한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기록 중 하나가 유수명부입니다. 유수명부는 군인· 군속으로 동원되어 집을 떠나 전쟁터로 향한 이들의 명부입니다. 이때 '유수(留守)'는 일본어로 '부재중' 혹은 '집의 주인이나 가족이 외출한 사이에 그 집을 지키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조선인들도 일본의 군인· 군속으로 동원됨에 따라 이러한 명부에 기록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군은 유수명부 외에도 목적에 따라 다양한 명부를 만들었는데, 이 글에서 유수명부와 함께 살펴볼 복원명부 역시 그중 하나입니다. '복원(復員)명부'는 유수명부와 반대로 병역을 마치고 제대하여 귀향하는 이들을 기록한 명부입니다. 그렇기에 유수명부와 복원명부는 특정 인물이 전쟁 당시 군인· 군속 신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지요. 이 글에서는 일본군이 작성한 명부자료 중 인도네시아 남방 제5·9·10육군병원의 유수명부, 그리고 남방 제9육군병원의 복원명부에서 찾은 조선인 여성들을 중심으로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다루어보겠습니다.

 

한정수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유수명부 살펴보기

본격적으로 명부의 내용을 분석하기에 앞서 유수명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먼저 살펴볼까요? 아래 그림들은 국가기록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유수명부의 사본입니다. <그림 1>은 남방군 제7방면군 유수명부의 표지이고, <그림 2>는 남방 제5육군병원 유수명부 중 한정수라는 조선인 여성의 기록이 나와 있는 부분입니다. <그림 3>은 남방 제9육군병원 유수명부 중 안원남선의 부분, <그림 4>는 남방 제10육군병원 유수명부 중 김복동의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유수명부는 누가 어떻게 만든 것일까요? 유수명부는 후방에 남아 있는 명부를 만들고 이를 일선으로 파견된 부대에 전달하면, 일선의 각 부대가 현지에 편입되거나 소속 부대가 변경된 군인· 군속의 이름을 추가·삭제 등을 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일본군이  유수명부 작성 규정을 만들어 육군에 적용한 시기는 전쟁 말기인 1944년 11월 30일부터입니다.[1] 하지만 이 시기에 <그림 2>, <그림3>, <그림4>의 유수명부를 만든 육군병원들이 소속된 남방군 제7방면군은 이미 인도네시아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전쟁 말기였던 당시 전황상 인도네시아와 일본을 오고 가는 것이 불가능했고, 이 때문에 아래의 유수명부들은 현지 부대에서 직접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직접 유수명부를 만드느라 바빴다는 남방 제5육군병원 군인의 회고담이 있기도 합니다.[2]

<그림 1> 남방군 제7방면군 유수명부 표지

 

그럼 이제 유수명부를 좀더 꼼꼼히 살펴볼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 한정수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유수명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제가 한정수라는 인물을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2000년 즈음 명지대 홍종필 교수의 연구실을 방문했을 때, 홍종필 교수가 일본 오키나와에서 사망한 조선인들의 명단을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홍 교수는 당시 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에 전쟁 중에 사망한 조선인들의 이름을 새기는 작업을 지원하고 있었기에 이 명단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홍교수는 명단 속 한정수라는 인물을 이름만 보고 남성이라고 생각했는데, 유가족을 조사한 결과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홍 교수가 알려준 것 이상의 정보를 찾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림 2> 남방 제5육군병원 유수명부 중 한정수의 명부

 

제가 한정수라는 인물을 다시 만난 것은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게 제공한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3]에서였습니다. 남방 제5육군병원 간호부로 기록된 그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남방 제9육군병원, 제10육군병원 유수명부에 수록된 조선인 여성들의 이름을 추가로 발견했어요.  여기에서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김복동의 이름을 확인하면서, 한정수를 비롯한 명부 속 여성들이 일본군'위안부'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갖고 조사를 계속했지요.

<그림 2>는 자바섬 자카르타에 있던 남방 제5육군병원 유수명부 중 한정수가 기록된 부분입니다. 최상단 여백에 복원(復員, 병역해제) 여부를 확인한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최상단 우측의 '21.4.24' 문구는 쇼와 21년(1946년) 4월 24일에 이 사람의 병역이 해제되었음을 뜻합니다. '21.4.24' 문구의 아래 칸에는 한정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병역이 같은 시기에 해제되었다고 쓰여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한정수가 남방제5육군병원의 군속으로 편입된 시기가 적혀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편입 시기가 1945년 8월 1일로 되어 있는 것과 달리 한정수는 7월 30일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 아래 칸의 한자를 볼 때 이는 한정수의 사망일과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래 칸에는 본적지, 주소, 유수 담당자 등이 적혀 있는데 주소 자리에 도장으로 '合祀 濟(합사 제)'라는 문구가 찍혀 있습니다. 이것은 한정수의 유골이 야스쿠니(靖國)신사에 합사되어 있음을 표시한 것입니다. 한정수 명부의 최하단에는 '除(제)', '死(사)'라는 글씨가 도장으로 찍혀 있습니다. 이것은 한정수의 병역이 해제되었음과 한정수가 사망했음을 기록한 것입니다. 명부의 중앙 하단에 '供(공)', '供号(공호)'라는 도장과 함께 숫자가 적힌 것은 공탁금 번호로 추정됩니다. 공탁금은 일제시기에 동원된 민간인들에게 주어야 할 임금 등을 미지급하고 공탁한 금액을 말합니다. 일본정부는 1965년 한일 기본조약 이전까지 공탁금을 일제징용 노무자들에게 주지 않고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명부에 찍힌 도장들은 모두 동일한 시기에 기재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공탁금 도장은 후생성에서, '합사 제' 도장은 야스쿠니신사에서 합사 작업이 끝난 시점에 찍은 도장입니다. 다른 문구들도 각 목적에 따라 명부 위에 더해진 것이겠지요. 유수명부에 담긴 여러 가지 기호와 정보들은 아직도 연구 대상입니다. 명부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 앞으로 연구자들에게 남겨진 과제겠지요.

 

<그림 3> 남방 제9육군병원 유수명부 중 안원남선의 부분

<그림4> 남방 제10육군병원 유수명부 중 김복동의 부분

 

위에서 살펴본 <그림 2>와 함께 <그림 3>, <그림 4>도 살펴보죠. 남방 제9육군병원 유수명부에는 77명의 조선인 여성이 1945년 8월 22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남부 팔렘방에 있던 제9육군병원에 편입되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남방 제10육군병원 유수명부에는 142명의 조선인 여성이 1945년 8월 30일과 31일에 수마트라섬 북부 메단의 제10육군병원에 편입되었다고 나와 있고요[4]. 각기 다른 육군병원에서 작성한 이들 명부에 실린 여성들의 직업은 간호부, 임간(臨看, 임시간호부), 용인(傭人, 최하급의 군속)등 저마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명부의 형식은 비슷합니다. 일본군 유수명부의 공통 형식이 이미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인 여성들이 기록된
복원명부를 발굴하다

저는 2015년 12월,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자진상규명위원회 재직 당시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 도서관을 조사하면서 남방 제9육군병원의 조선인 여성들이 기록된 복원명부를 발굴했습니다. 그때 찾은 복원명부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그림 5> 남방 제9육군병원 복원명부

 

명부의 여백에 조선인 여성들이 남방 제9육군병원에 편입된 시기가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행선지가 조선의 어느 지역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본적지, 귀국할 곳의 역 이름, 병종, 관등급, 씨명, 생년월일 등의 칸이 있습니다.

위의 복원명부에서 주목할 부분은 조선인 여성들이 남방 제9육군병원의 임간(임시간호사) 신분에서 해용(解傭, 고용계약의 해지)된 시점이 1946년 5월 24일이라는 점입니다. 1946년 5월 24일은 이들이 조선으로 돌아오는 귀국선을 탄 날짜이기도 합니다. 팔렘방조선인회명부를 정리한 강석재의 수첩 자료에 따르면 당시 인도네시아의 조선인 여성들은 대부분 원래 있던 자바섬이나 수마트라섬에서 싱가포르로 이동한 뒤 1946년 5월 24일, 귀국선을 타고 조선으로 향했지요. 위의 복원명부를 통해 조선인 여성들이 배를 타고 귀향하는 시기에 맞춰 현지의 일본군 사령관이 이들을 해용 처리했음을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Credit

편집 : 현승인, 변지은
감수 : 윤명숙, 김소라 
일러스트 : 백정미 

각주

  1. ^ 일본군이 유수명부를 작성하고 관리하게 된 이유는 「육군유수업무부령」, 「유수업무규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육군유수업무부령」(칙령 제313호)과 「유수업무규정」 자료는 일본 국립공문서관 소장 자료와 홈페이지(http://www.jacar.go.jp/)에서 참고할 수 있다 
  2. ^  浜田國雄, 「一 兵卒の綴った‘ジャワの 想い出’から」 , 『南五戰史』, 199쪽.
  3. ^ 국가기록원에서는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를 위해 1990년대 초 일본 정부에서 받은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를 전산화하였고, 2004년 3월부터 온라인으로 이 명단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4. ^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자진상규명위원회, 『인도네시아 동원여성명부에 관한 진상조사』(이하 진상조사보고서), 2009. 12,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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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강정숙

일제하 안동지역 농민운동사로 학문세계에 입문한 이후 젠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여성사를 연구하여 『한국여성사(근대편)』(공저, 풀빛, 1992)를 썼다. 1992년 한국정신대연구회(소)에 가입한 이후 일본군‘위안부’문제 조사와 연구에 집중하였고 <일본군‘위안부’제의 식민성 연구>로 박사학위(2010년)를 . 『일본군‘위안부’, 알고 있나요?』(2015,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등 여러 논문과 책을 냈다. 지금은 여태까지의 연구성과를 모아 출판 준비 중이다.

wumrigh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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