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번역통역부 심문회보 제2호, 기존 보고서에 근거한 2차 보고서

황병주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 게시일2019.10.31
  • 최종수정일2020.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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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포로심문보고서에 근거한
2차 보고서


이 자료는 1944년 11월 30일 생산된 문서로 일본군에 대한 연합군 선전 효과, 포로 수기, 포로의 군인신문 평가, 악명 높은 마루야마 대좌, 일본군 장교들의 사병 복지 문제 무시, 병력 증강 상의 고충, 버마 지역 일본군 보충 병력의 평균 연령, 일본군 내 반전주의자, 일본군 전방지역 위안소 등 총 9개 항목으로 이루어진 13쪽 분량의 문서이다. 이 중 ‘위안부’와 관련된 부분은 4번의 악명높은 마루아마 대좌, 9번의 일본군의 전방 지역 위안소 등 두 개 항목이다. 

이 문서를 생산한 동남아시아 번역통역부는 남서태평양 사령부의 연합군 번역통역부(ATIS)와 유사한 조직이다. 즉 연합군은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명칭의 심리전, 포로심문 전담 조직을 만들어 활용했다. SEATIC 문서 중 ‘위안부’ 관련으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이 심문회보 제2호이다. 

무엇보다 이 문서를 생산한 주체는 동남아시아 번역통역부(SEATIC)의 심리전팀이다. 심리전팀의 기본적 목적은 심리전을 위한 각종 정보의 수집과 분석이기에 이 문서의 목표 역시 포로 심문자료에 근거해 심리전에 필요한 정보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문서는 직접 포로 심문을 한 기록은 아니다. 즉 이미 확보된 포로심문 보고서에 근거해 작성된 2차 보고서의 성격을 가진다. 다시 말해 미 전시정보국(OWI)가 작성한 49번 보고서가 조선인 ‘위안부’ 20명을 직접 심문해 작성된 문서라면, 동남아시아 번역통역부(SEATIC) 심문회보 2호는 49번 보고서를 비롯해 여러 자료를 종합해 만들어진 문서다.

이 문서가 생산된 기본 맥락은 미치나 전투로부터 나온다. 버마 전선은 크게 보아 임팔 전투가 가장 중요했지만, 북부의 미치나 전투도 상당히 중요했다. 1943년 3월부터 시작된 임팔 전투에서 일본군이 궤멸적 타격을 입고 후퇴하면서 연합군의 반격이 본격화된다. 영국은 버마 북부로의 전선 확대를 반대했지만, 미군의 스틸웰 장군의 생각은 달랐다. 중국-버마-인도 전구(CBI theater)를 책임지고 있던 스틸웰은 연합국의 중국 지원을 위해 미치나 지역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미치나 전투는 중국군과 미군 특수부대에 의해 주도되었다. 특히 미국은 미군 특수부대의 원조로 꼽히는 ‘메릴의 약탈자들’(Merill's Marauders)을 투입해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요컨대 영국이 주도하던 버마 전선에서 미국이 일정한 역할을 했던 전투는 사실상 미치나 전투밖에 없었다고 하겠다. 미군으로서는 버마지역에서 자신들이 참여한 전투의 경험과 정보를 종합해 정리할 필요가 있었고 심리전에 활용하고자 했다. 

뉴델리에 본부를 둔 동남아시아 번역통역부(SEATIC)는 영국이 주도하는 조직이었지만, 미군이 부사령관을 맡기도 하는 등 일종의 연합조직이기도 했다. 버마 전선은 미군 심리전 부대의 역할이 상당히 크게 나타난다. 미군은 일본어에 능통한 일본인 2세(Nisei)들을 대거 확보할 수 있기도 했고 영국군과 비교해 전투병력이 별로 없었기에 심리전에 집중하는 측면도 강했다. 어쨌든 미치나 전투 경험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동남아시아 번역통역부(SEATIC)심문회보 제2호가 작성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이 자료가 주목되는 것은 ‘위안부’와 위안소 관련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지만, 그 외에도 흥미로운 부분도 제법 있다. 바로 조선인 군속 관련 내용이다. M.494로 표기된 이 조선인 군속은 영어와 우르두어 임시 통역사로 일본군 15사단 사령부에 배속된 사람이었다. 그는 영어가 능통해 직접 진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진술서 내용을 보면 일본군에 대한 선전에 있어 특별히 강조해야 할 점을 전방과 후방으로 나누어 서술했다. 전방지역에서는 연합군의 공세와 유리한 전황 관련 소식을 강조할 것이며 독일의 패배가 시간문제이니 일본은 홀로 남아 싸우게 될 것이란 사실도 강조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연합군은 절대 포로를 죽이지 않으며 매우 관대한 정책을 펴고 있으니 헛된 죽음을 피하라는 내용을 주문했다.

후방 지역과 일본 본토에 대해서는 영국과 미국이 80년간 일본에 항해술, 조선술, 철도, 화학산업 등 과학기술을 전수해주었음을 상기시킬 것을 강조했다. 이어 전쟁이 전적으로 일본의 책임이며 천황 대신 군벌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음을 알려야 한다고 했다. 군부에 대한 그의 반감은 “쇼와 막부”를 타도하고 “쇼와 유신”(Showa Restoration)을 이룩해야 한다는 서술에 잘 나타난다. 그가 마지막으로 강조한 것은 연합국은 일본을 과학기술 면에서 압도하고 있으며 단합되어 있기에 절대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할 전망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는 또한 선전에 있어 피해야 할 점도 적시했다. 천황과 일본의 영웅으로 취급받는 도고 제독, 노기 장군 등에 대한 비판, 일본의 국체, 관습과 종교 그리고 여성에 대한 비판을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연합군이 심리전을 위해 일본군에게 살포하던 군인신문 내용에 대한 코멘트도 포함된다. 한자를 너무 많이 사용하지 말 것을 주문했는데, 그것은 신문 제작이 중국인이 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 이유였다. 연합군과 협력하고 있는 일본인이 신문을 만들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쉬운 한자를 사용할 것을 주문했다. 
 



마루야마 대좌에 관한 
‘위안부'들의 증언 

마루야마(丸山房安) 대좌는 미치나의 일본군 수비대장이었다. 그래서 미치나 위안소 역시 그의 통제 속에 있었다. 마루야마 대좌는 1943년 3월 27일 자로 버마 미치나에 주둔하던 일본군 제18사단 예하 114연대의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시작된 연합군의 미치나 작전 당시 소수 병력을 이끌고 간신히 탈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루야마 대좌는 일본군 포로들로부터 한결같이 부정적 평가를 받았다. 이 문서에서도 악명 높은 마루야마 대좌(The notorious Col. MARUYAMA)라는 독립 항목으로 다룰 정도로 그는 악명이 자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수시로 부하들을 구타했고 심지어 장교들조차 부하들 앞에서 마루야마로부터 뺨을 맞는 등 구타에 시달렸다. 또한 골짜기의 두꺼비라는 뜻의 ‘타니와쿠도’로 불릴 정도로 비겁한 행동을 반복하여 부하들의 신망을 잃었다. 부하들이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을 때 홀로 호의호식하는 모습도 보였고 위안소의 단골이기도 했다. ‘위안부’들 사이에서도 마루야마 대좌는 술주정뱅이로 유명했다.

마루야마 대좌는 병사들의 식량 배급을 늘려달라는 부하 장교들의 요구는 무시하면서도, ‘위안부’들에게 음식과 편의를 제공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대피할 때에도 자신이 가장 아끼는 ‘위안부’를 항상 대동하여 대피소에서 몇 시간이고 함께 지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나 그가 가장 아꼈다고 알려진 조선인 ‘위안부’ 가와하라 스미코(하돈예)는 이 사실을 부인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아끼는 ‘위안부’에게 각종 편의를 봐주었지만, 전체적으로 마루야마는 위안소 운영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위안소 요금을 깎았을 뿐만 아니라 ‘위안부’가 받는 수익 할당률을 60%에서 50%로 삭감했다. ‘위안부’들은 마루야마의 부하들처럼 그를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인간으로 설명했고 스미코조차 술주정뱅이에다 호색한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마루야마 대좌에 대한 포로들이나 ‘위안부’들의 진술은 한결같이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마루야마가 위안소와 ‘위안부’들에 상당한 편의를 제공한 흔적도 나타난다. 위에 언급한 사실들 말고도 위안소 업주였던 기타무라가 포로가 될 당시 입고 있었던 바지가 마루야마의 승마바지였다는 진술도 나온다. 또한 스미코 역시 마루야마의 검대를 허리띠 대신으로 착용하고 있었다고도 했다.

실제 마루야마 대좌가 어떠한 인물이었고 또 위안소 운영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 ‘위안부’들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판단을 내리는 것은 섣부를 것이다. 좀 더 많은 자료를 통해 보완될 필요가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이 자료가 마루야마에 대한 가장 자세한 설명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요컨대 위안소 운영과 일본군 부대장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흔치 않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49번 보고서만으로는 
알 수 없던 정보들  

‘위안부’ 관련으로 이 자료의 핵심은 9번 항목의 전방의 일본군 위안소이다. 이 항목의 서술은 전적으로 두 개의 자료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는 위안소 업주였으며 M. 739로 지칭된 기타무라 에이분(Kitamura Eibun)의 심문 보고서이고 다른 하나는 지난번에 소개했던 미 전시정보국(OWI)의 유명한 49번 보고서이다. 49번 보고서야 널리 알려졌지만 안타깝게도 현재까지 기타무라의 심문보고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정보 출처를 밝히고 있는 서두의 서술내용을 보면 M.739의 포로 심문은 영국군의 합동집중심문센터(CSDIC, Combined Services Detailed Interrogation Centre)에서 진행되었다고 밝힌 점이다. 즉 조선인 ‘위안부’ 20명의 심문은 인도-버마 접경 지역의 레도(Ledo) 기지였음에 반해 기타무라의 심문은 뉴델리에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합동집중심문센터는 영국에 본부가 있고 인도에는 그 지부격인 CSDIC(I)가 설치되었다. 문서 맨 마지막에는 이 자료가 CSDIC(I)에서 SEATIC을 위해 준비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즉 CSDIC(I)가 SEATIC의 요청으로 자료를 작성했음을 의미한다고 보인다.

시점도 흥미로운데 49번 보고서는 9월 21일 보고되었지만, 이 자료는 11월 30일 생산되어 12월 7일 통상적 배포를 위해 준비된 것으로 나타난다. 8월에 포로가 되어 9월에 보고서가 나왔음에도 두 달가량 뒤에 다시 한번 기타무라에 대한 심문이 진행되었고 심문회보 2호가 작성된 것이다. 이는 그만큼 미치나 전투와 그 결과로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가 연합군에게 상당히 의미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문서의 미치나 위안소 관련 서술은 큰 틀에서 49번 보고서와 다르지 않다. 분량은 심문회보 2호가 4쪽가량이고, 49번 보고서는 6쪽이다. 차이가 있는 부분을 보면 먼저 심문회보 2호에는 위안소별 ‘위안부’ 숫자와 국적이 포함된다. 교에이 위안소에는 조선인 22명, 긴수이에는 조선인 20명이었고 모모야에는 중국인 21명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정보는 49번 보고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또한, 중국인 ‘위안부’들이 광둥 지역에서 팔려 왔으며 일본인 ‘위안부’는 전방에는 전혀 없었고 후방지역에만 있었다는 내용도 있다. 이러한 정보 역시 49번 보고서에 없는 것들인데, 업주인 기타무라에게서 나온 진술로 보인다. ‘위안부’만 심문한 49번 보고서에 이러한 정보가 없었던 것은 그만큼 ‘위안부’들이 인근 지역 위안소에 대한 소식과 정보에 어두웠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으로 ‘위안부’들의 귀국에 대한 서술에서 차이가 난다. 49번 보고서는 1943년 후반 군의 명령으로 일부 ‘위안부’들이 귀향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심문회보 2호에서는 선불금을 다 갚으면 돌아갈 수 있기는 하지만 전쟁상황으로 인해 M.739가 운영하고 있던 위안소에서 실제로 돌아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1943년 6월 일본군 15군 사령부가 귀향을 허락하는 명령을 내려 조건이 충족된 ‘위안부’ 한 명이 돌아가고자 했으나 남으라는 설득에 쉽게 굴복했다는 것이다. 

기타무라 심문으로부터 나온 정보가 포함되어 있기에 위안소 운영상황이 좀더 자세한데, 114연대가 위안소를 통제했고 담당 장교 이름도 확인된다. 연대 본보 마가수에(Magasue) 대위가 담당자였으며 위안소 이용자도 엄격하게 통제했다고 한다. 통상적으로 2명이 연대본부로부터 파견되어 위안소의 출입자를 통제했는데, 다른 부대 병사도 114연대 병사를 동행하면 출입할 수 있었다. 하루 이용자는 하사관 및 사병이 8~90명, 장교가 10~15명 선이었다고 한다. 또한 헌병이 주기적으로 순찰하며 싸움 등의 불상사를 통제했다.

49번 보고서에 없는 또 다른 정보는 성병 관련 내용이다. 기타무라에 따르면 그가 위안소를 운영하는 1년 반 동안 성병 감염 사례는 단 6건이었다고 한다. 일본군의 불만 사항에 대한 기술도 있는데, 주로 장교들에 대한 불만과 보급 부족 그리고 향수병이 주원인이었다. 

후퇴와 포로가 되는 과정에 대한 서술에서는 중국인 ‘위안부’들 20명이 중국군에 자수했다는 사실과 후퇴 과정에 피해를 입은 ‘위안부’ 상황도 나온다. 63명의 ‘위안부’ 중 4명이 이동 중 사망했고 2명은 일본군으로 오인되어 사살되었다고 한다. 

49번 보고서와 비교해 이 문서의 가장 큰 특징은 작성자의 주관적 평가나 편견이 섞인 서술내용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문서는 기타무라의 진술 내용과 49번 보고서 내용 중에서 사실관계에 해당하는 부분만 추려서 비교적 건조한 문체로 작성되었다. 작성자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대부분 낮은 직급으로 직접 심문을 담당했던 일본계 미군일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이를 통해 작성자에 따라 서술내용이 상당한 차이를 보일 수 있음이 확인된다.

예컨대 선불금을 갚는 등 조건이 충족되면 귀환 자격이 부여된다는 규정이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현지에서 어떻게 운용되는지는 또 다른 문제임이 확인된다. 49호 보고서에서는 일부 ‘위안부’가 돌아갈 수 있었다고 했지만 기타무라는 자신의 위안소에서는 한 명도 없다고 했다. 20명의 조선인 ‘위안부’들이 다른 위안소 상황에 대해 들은 내용을 진술한 것인지는 몰라도 기타무라가 운영하던 위안소에서는 한 명도 없었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이 문서는 그 자체로도 귀중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지만 또한 49번 보고서의 한계와 문제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남다르다. 다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M.739로 표기된 기타무라를 직접 심문한 보고서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기타무라 심문 보고서가 발견된다면 49호 보고서와 심문회보 제2호와 비교 대조하여 더욱 정확한 사실관계 확인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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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황병주

한국의 근대적 변화과정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으며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전쟁범죄 관련 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aviantibj@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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