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의 재현 <3부> - 재현물로서 <허스토리>의 성공과 실패

웹진 <결> 편집팀

  • 게시일2019.03.19
  • 최종수정일2019.11.20

재현물로서 <허스토리>의 성공과 실패

허윤(부산외대 만오교양대학 교수) / 권은선(중부대 연극영화과, 영화평론가) / 오혜진(한예종, 문학평론가) / 김청강(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교수)

허윤

<허스토리>가 그래서 여러 가지 문제 지점을 낳았죠. 다큐멘터리 장면들을 그대로 영화 안에 포함하고, 살짝살짝 비틀면서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다 소거하고,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안해룡, 2009)에서 여러 장면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는데, 한국어로 노래를 부르잖아요. 송신도 님은 일본어로 노래 부르는데요. 이것이 다큐멘터리에 등장했던 실제 상황이라는 정보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영화적 연출로 해석될 수밖에 없고, 대중들에게는 신선한 재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떤 식으로 그런 이미지들을 가져와서 유통하는지 모르게 되고요. 

김청강

지금은 다큐멘터리 푸티지나 사진, 이미지가 많잖아요. 그걸 이용해서 어떤 사실로서의 증명처럼 중간중간 넣어주는 방식. 그러니까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극화된 식민지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도 그래요. 요즘에 보면 식민지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너무 많이 나오고 있잖아요. 극화된 서사에 사실로서의 이미지를 던져주면서 이게 전체적으로 굉장히 진실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재현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오혜진

<허스토리>는 좀 나쁜 의미에서 충격적이었어요. 김희애 씨를 띄우는 것 외에 이 영화는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하는…….

김청강 

김희애가 사투리를 쓸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영화인 것처럼. (웃음)

허윤 

너무 못 쓰지 않아요? 부산 사람들이 못 알아듣겠다고 하던데. (웃음)

오혜진

그 영화에서 여성단체의 역할이 재현된 방식도 매우 제한적이었고요. ‘증언하는 여성’의 힘을 보여주기에는 ‘배정길(김해숙 분)’과 다른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비중이 너무 작았죠. 무엇보다 그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한일 연대 법정투쟁을 다루는데, 재일조선인 변호사 ‘이상일(김준한 분)’ 외에는 일본 시민운동의 동향이 거의 나오지 않았어요. 한일 연대 법정투쟁의 의미를 되새겨보기에는 많은 것들이 삭제됐고, ‘부산’이라는 지역성을 내세웠지만, 그것이 서사에서 충분히 의미화되지는 않은 듯해요. 마지막 장면은 ‘위안부’ 역사기념관의 전시물들을 비추며 끝나는데, 마치 ‘위안부’ 문제는 이제 박물관에 가야 하는 완결된 문제라고 말하는 듯했어요.

김청강

그러니까 그거는 성찰이 끝난 것 같은 느낌인 거죠.

권은선 

그런데 어떤 것은 흥미로워요. <아이 캔 스피크>랑 <허스토리> 같은 경우에 보면 타이틀이 공통점이 있잖아요. 소문자 i에서 대문자 I로 바뀌고. 히스토리에서 허스토리로 바뀌고. 어떤 담론을 대중적인 문법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를 자명하게 밝히고 시작한다는 부분이, 뻔하기는 한데, 재밌었어요. 그리고 상업 영화에서 ‘안경 쓴 여자’는 절대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불문율이 있거든요. 그러면 어떤 순간에만 안경 쓴 여자가 등장하느냐. 신데렐라 스토리에서 여주인공이 변신하기 이전 단계에서만 안경을 쓰고 등장하죠. 그런데 이 영화에서 여행사 사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안경을 쓰고 나오죠. 분명 이런 부분은 여성주의적 재현을 의식했습니다. 

(정면) 허윤, 오혜진

 

오혜진

<허스토리>에서 ‘허(her)’는 누굴까요? 문정숙?

권은선

이 영화의 시선 자체가 남성 중심적인 재현 방식과는 좀 다릅니다. 처음부터 김희애 씨가 옷 갈아입는 장면부터 기존의 재현 방식이랑은 많이 다르거든요. 전혀 관음증적이지 않고요. 그리고 여성들을 집단으로 잡는 풀샷이 되게 많아요. 지금까지는 두 ‘위안부’ 간의 관계가 주로 프레임 됐었다면, <허스토리>에서는 나름대로 집단으로서의 '위안부' 전체를 담아내는 쇼트를 자의식적으로 많이 넣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다큐멘터리를 차용한 결과이기도 하지만요.

그런데 <허스토리>가 단점들이 좀 있죠. 장르 영화로서 재미가 좀 없지요. 법정 드라마로 볼 때. 그런데 저는 이 영화가 <귀향>만큼, 혹은 <아이 캔 스피크>만큼 흥행을 하지 못한 것은 이게, 한 명의 영웅 이야기로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여요. 오혜진 선생님이 아까 김희애 씨가 약간 너무 영웅 같다고 하셨는데, 오히려 이 영화는 영웅을 만들지 않아서, 배제적 동일시 지점을 만들지 않아서 실패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거든요.

오혜진

저는 너무 심한 영웅주의라고 생각했어요. 헤아려보니 한 씬 빼고 모든 씬에 김희애 씨가 나오더라고요. 그 한 씬이 뭐냐면, 법정에서 증언하는 장면이 끝나고, 배정길이 아들과 대기실에서 화해하는 장면. 그때 문정숙이 ‘난 나가 있을 테니 두 분이 얘기 나누세요’ 하며 자리를 마련해주죠.   

권은선

그럼 영웅 맞네요. (웃음)

오혜진

게다가 법정에서 문정숙은 변호사, 통역사, 증언자, 목격자 등 모든 역할을 하며 원맨쇼를 구사하죠. <허스토리>는 명백하게 ‘위안부’ 피해생존자보다 그들을 돕는 존재에게 재현의 초점이 이동한 사례라 흥미로운데, 이건 ‘위안부’의 증언을 ‘돕는’ 수준이 아니라, 서사에서 ‘위안부’의 자리를 빼앗는 수준이었달까요? <아이 캔 스피크>는 그렇게 하지 않았거든요.

권은선

그렇죠. <아이 캔 스피크>에서 나문희 씨가 맡은 주인공이 완전한 영웅이었죠. 문정숙 캐릭터는 사실은 굉장히 신자유주의적인 주체죠.

허윤

이왕 재판을 시작했으면 이겨야 한다.

권은선

‘나 돈 있어’ 같은 식으로 너무나 신자유주의적인 주체로 묘사되는 게 재밌더라구요.

오혜진

실제로 GV에서 김희애 씨가 돈 뿌리는 기계로 지폐를 뿌리는 장면이 화제였어요.

허윤

팬덤이 붙은 거예요. 이 영화로. 근데 이 영화는 관객이 30만밖에 안 들었거든요.

오혜진

‘문정숙’이 영화에서 모순적인 존재로 묘사되죠. 자기 여행사가 기생관광으로 돈을 벌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그걸로 ‘도의적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 있는지 확언할 수 없지만)을 보여주기도 하고, ‘위안소’에서 ‘엄마’라고 불리며 일종의 ‘중간관리인’ 역할을 한 여성을 타자화하다가 곧 그녀 역시 피해자임을 깨닫고 사죄하는 모습도 보여주죠. 그런 반성의 제스쳐와 거대한 자본력으로 인해 문정숙은 ‘위안부’ 운동을 주도할 자격을 가진 이로써 서사적으로 승인됩니다. 특히 문정숙이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주체로서 여성파워의 상징이 된다는 게 흥미로워요. ‘위안부’ 운동을 논할 때 가장 강고한 프레임은 민족주의나 민족주의 비판론, 여성주의였는데, 이 영화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주체’를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에 가장 적합한 주체로 내세우죠.

허윤

첫 장면에서 돈 얘기하면서 시작하잖아요. 문정숙(김희애)이 부산여성경제인 연합에서 이제 여자들이 나서서 회장 해야 된다, 라고 하는데 그 장면을 보고 이 영화가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 관객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혜진

문정숙이 ‘부자’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정체성으로 재현돼요. ‘위안부’ 시민운동에 있어서 ‘경제력’을 가장 강력한 요인으로 내세우는 건 어떤 ‘위안부’ 서사도 하지 않은 거죠. 그런 점에서 참 놀라운 영화였습니다.

최근 ‘위안부’ 관련 학술대회가 휘황찬란한 규모로 열리는 걸 볼 때, 신자유주의적 역사 인식이 ‘위안부’ 역사를 사유하는 데 점점 강력한 벡터로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호화로운 학술대회 장소의 대형화면에는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이 얼마나 가난하고 고독하게 살았는지를 호소하는 자료화면이 나오는데, 정작 학술대회는 대규모의 물량을 동원해 화려하기 그지없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논의를 어서 ‘영어 논문’으로 작성해서 전 세계적 공인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들려올 때, (그 중요성을 모를 바 아니지만) 조금 위화감을 느꼈어요. 제게 ‘위안부’의 역사는 탈식민의 문제이기도 했는데, 어쩌면 지금 우리는 식민화된 방식으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허윤

그 지점이 <허스토리>가 실패한 지점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분위기는 1980년대고 실제 배경은 1990년대고, 담론은 2000년대인 거죠. 그런데 그 안에서 재현하는 일본은 2000년대 일본인 거예요. 관부재판이나 송신도 님의 재판이 벌어졌던 1990년대의 일본 사회의 분위기와 2000년대 이후 일본 사회의 분위기는 다르기도 한데, 영화에서 일본은 굉장히 평면적이죠. 재판을 배척하고,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서 타락한 여자들이라고 말하는 프레임을 그대로 갖다 비추느라고 거기서 일본사람들이 계속 악마화하잖아요. 그래서 여관에서도 못 자게 하고, 식당에 테러하고 이런 식의 그런 장면들이 사실상 2000년대에 벌어진 일인 거죠.

제가 일본군 ‘위안부’ 관련 다큐멘터리를 처음 봤을 때 제일 놀라웠던 부분이 1990년대 일본 사회 분위기였어요. 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이 일본에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피해 증언을 하잖아요.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일본의 중고등 학생들과 전쟁과 평화에 대해서 질의응답을 하는 장면들이 제가 몰랐던 부분이었던 거예요. 제가 담론적으로는 일본군 ‘위안부’ 투쟁이 한일의 국경과 민족을 넘어선 연대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어떤 방식으로 실제 사회에서 적용되는가는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더라고요. 그랬는데 그 다큐멘터리들에서는 이 피해생존자들이 계속 일본에서 재판이나 시위를 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극영화가 되면서 그 부분들을 완전히 다 소거시키고, 일본인 지원단체도 배경으로 처리하는 식으로 위치성을 다 제거하더라고요. 아까 말씀하신 프레임을 뜯어내고 사진만 보여주는 방식이죠.

<허스토리>가 트위터나 SNS에서 여성영화로서 굉장히 호평 일색이었어요.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고. 꼭 봐야 할 영화로 추천하고, 여성들의 임파워링을 도와주는 새로운 시대의 '위안부' 영화처럼 프레임이 됐었는데, 누구의 임파워링인가를 계속 되묻게 되더라고요.

김청강

영화에 재일 동포가 주로 도와주는 사람으로 나오는 게 일본 사회에 있었던 움직임을 살짝 보여줬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런데 진짜 일본의 맥락을 잘 보여주지는 못한 거잖아요. '위안부' 문제가 처음 막 공론화되기 시작한 건 1980년대에 역사 왜곡 문제가 나오면서, 그 당시에는 정신대 문제로 나왔었고. 그런데 그랬을 때 그 충격이 사실은 우리에게만 있었던 건 아니고, 일본 사회에도 굉장한 충격을 줬고, 일본 사회에서 지식층들이 분노하고 그랬죠. 1980년대에 <오키나와의 할머니>(야마타니 테츠오, 1979)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진 것도 그 당시의 맥락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사실 일본을 단순화하는 그런 측면들도 굉장히 문제가 되는 것이죠. <허스토리>처럼 가지고 오면 그 맥락을 상실해버리는 거죠. 일본에서 있었던 맥락들이 오히려 우리 스토리에 편입되는 방식으로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저는 박수남 감독의 <침묵>이 너무 좋았고 감동적이었어요. 일본 쪽에서 있었던 운동의 맥락과 그 운동이 지속해왔던 세월도 보여주고요.

허윤

그리고 한국에서는 사실 여러 명의 피해생존자가 직접 일본에 가서 투쟁했다는 걸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침묵>은 그 부분을 다뤄주고 있어서 좋았습니다. 근데 이런 다큐멘터리는 많은 관객을 만나는 게 쉽지 않으니까 너무 아쉽죠.

오혜진

허윤 선생님 말씀대로 <허스토리>에는 서로 다른 역사적 시간대가 엉클어져 있고, 한국 사회는 ‘위안부’가 ‘증언의 주체’로 나설 만큼 변화했는데 일본 사회는 여전히 정체된 모습으로 묘사되죠. 이건 ‘위안부’ 역사뿐 아니라 ‘위안부’의 역사를 재역사화해온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허스토리>나 <귀향>은 결국 역사적 주제를 탈역사적이고 초역사적인 방식으로 다룬 거죠.

‘위안부’ 역사에 대한 재현이 시작된 게 1950년대, 김학순 님의 증언이 1991년, ‘위안부’ 증언자들의 법정투쟁이 2000년. 즉 ‘위안부’ 문제는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프레임들을 이동하며 논의돼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알고 있죠. 같은 ‘위안부’라도 다양한 사례들이 있다는 것. 조선인 부모나 다른 이들에 의한 인신매매 혹은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으로 ‘위안부’가 된 경우도 있고, ‘창기’의 신분으로 ‘위안부’가 된 경우도 있다는 것. 중국에서 ‘위안부’를 경험한 이들도 있고, 오키나와 혹은 미얀마나 다른 ‘남양군도’에서 ‘위안부’ 생활을 한 이들도 있다는 것. 전쟁이 끝나고 조선(북한/남한)으로 돌아온 사람도 있지만, 돌아오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 ‘위안부’의 역사가 민족주의 프레임에서 논해지다가, 여성주의, 전시 성폭력 등의 프레임으로 이동하면서 국제 법정투쟁 등이 중요해진 과정 등. 그리고 이 과정에서 딜레마로 남아 있는 문제들. 이를테면, ‘위안부’ 문제를 남성화된 민족 서사에서 구출해 가부장제 일반의 문제로 말할 때 식민지배의 문제가 사상될 수도 있다는 점, ‘위안부’ 문제를 ‘전시 성폭력’으로 표준화해 전 세계적으로 논의 가능한 ‘보편적 문제’로 만들고자 할 때, 그 ‘보편성’의 언어와 논리로 ‘위안부’의 문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곤경들.

그런데 이제 꽤 많은 ‘위안부’ 재현물들이 축적됐는데도, 이 같은 ‘위안부’ 역사와 운동에 대한 여러 초점과 전략의 역사적 변화들이 대중에게 충분히 학습되고 있지 않은 것 같아요. ‘‘위안부’ 이야기, 할머니들의 고통, 연대의 중요성’ 같은 뭉툭하고 당위적인 주제들만 반복되기 때문이죠. 이 화소들로만 ‘위안부’ 역사에 대한 상상력을 구성하니, 일종의 ‘지체’가 있는 듯합니다. 만약 ‘위안부’였다가 전쟁이 끝난 후 일본에서 쭉 살았던 사람, 즉 일본 시민들과 협동해 ‘일본어’로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증언하는 ‘위안부’ 모델을 영화로 만든다면 어떨까요? 그 영화도 <허스토리>처럼 설날 특집으로 TV에서 방영될 수 있을까요?

김청강

그런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허윤

TV 드라마 같은 데서 일본어가 많이 나오면 시청자게시판에 항의 글이 올라올 거예요.

김청강

충격을 받겠죠. 사실은 굉장히 그게 재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역사화하는 과정에서 삭제되고 했던 부분들이 재현으로 드러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2000년대 도쿄 법정(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법정) 때도 중국은 ‘위안부’ 보낼 때 원래 직업이 매춘부였던 사람은 삭제하고 보냈거든요. 그러니까 너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죠. 어떤 피해자 상만이 우리 사회에서 얘기될 수 있다는 것을, 삭제했던 역사의 과정들이 사실은 어떻게 보면 재현에서도 그런 식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좀 들어요.

 

(왼쪽부터) 김청강, 허윤

허윤

오늘 굉장히 여러 가지 고민과 질문을 던지면서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요. 마지막으로 논의해볼 만한 좋은 텍스트는 어떤 것인지, 선생님들께 추천을 받고자 합니다. 이 질문은 우리 웹진을 읽으시는 많은 독자분이, "그렇다면 어떤 작품을 보란 말이냐!" 라는 질문을 하실 듯해서요. 혹시 추천할 만한 텍스트, 영화 소설 뭐든 상관없을 것 같아요. 한 가지 정도씩 얘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청강

근데 이게 사실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서 굉장히 선별되어야 하는 측면이 있어요.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위안부'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는 <아이 캔 스피크>나 <허스토리>를 보여줘도 사실 굉장히 충격을 받고, 또 거기에 대해서 알게 되는 측면이 있지만, 사실 어느 정도 알고 있고 한 사람들에게는 이것은 조금 너무 약한 거죠. 추천해주기에.

허윤

그런데 저는 그 지식의 격차라는 것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대중 운동의 폭은 넓어졌는데 대중 담론은 여전히 여러 ‘결’을 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부담 없이 얘기하셔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오혜진

저는 1999년에 발표된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 이창래의 『A Gesture Life』를 추천하고 싶어요. 한국에는 『척하는 삶』(정영목 역, 알에이치코리아, 2014)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됐습니다. 이 소설은 꼭 ‘위안부’를 재현한 소설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위안부’를 비롯해 식민의 유산의 문제가 현재 자신의 정체성을 사유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라는 깨달음을 서사화한 작품입니다. 자신을 일본계로 알고 있는 미국인 남성 엘리트의 이야기인데요. 나중에 그는 자신이 조선인의 자식임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조선인의 후예라는 걸 부정하고 싶은 마음, 지배자에게 동일시하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그것에 거리 두려는 욕망, 자신을 미국 주류 사회에 동일시할 수 있는 성공한 아시아 남성 엘리트로 정체화하려는 자기의식에 대한 성찰, 그 모든 고민과 갈등의 과정이 ‘후기 식민국가’의 일원으로서 겪는 역사적 경험임을 인상적으로 설득해냅니다. 두껍지만 추천하고 싶습니다.

김청강

사실은 저는 극영화는 추천하고 싶은 게 없고요. 박수남 감독님의 <침묵>, 아까 말씀드렸던.  '위안부' 문제의 운동적인 측면이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의 맥락을 잘 보여주는 것 같고. 사실 다큐멘터리들은 대부분 그래도 훨씬 낫고, 그리고 저는 여전히 <낮은 목소리>를 학생들에게 보여줍니다. <낮은 목소리>를 수업 시간에 계속 보여줬기 때문에 한 20번도 더 봤을 거예요. 저는 1995년도에 캠퍼스 상영할 때 처음 봤었는데, 그 당시에 마지막 그 시퀀스가 너무나 정말 충격이었어요. 침묵 가운데 할머니의 그 배가 보이는 장면이, 저 개인적으로 너무 잊을 수 없는 장면이기도 하고. 여전히 그만큼의 재현을 잘 못하고 있다는 생각도 드는 거예요. 그래서 사실 아직도 <낮은 목소리>를 추천합니다.

권은선

저는 앞으로의 ‘재현의 향방’은 사실 잘 모르겠어요. 다만 제가 최근에 관심을 좀 가지는 것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그동안은 계속 말하는 주체를 강조했잖아요.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부터. 그런데 요즘에는 ‘누구에게 말하는가’ ‘누가 듣는가’라는 게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됩니다. 영화 안에서의 동일시의 자리, 아까 얘기했던 좋은 청자의 자리, 누굴 향해서 이야기할 것인가. <아이 캔 스피크>나 <허스토리>가 한계에도 불구하고 듣는 자의 자리를 여러 가지로 바꾸잖아요. 등록된 생존자의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것에 대한,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조바심 같은 것들이 최근 영화에 드러난다고 했을 때, 듣는 자와 관련된 ‘텍스트를 통한 상속’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귀향>처럼 거리감을 없애는 방식이 아니라, 상속에 필요한 어떤 성찰과 거리감을 만들어 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추천 작품 관련해서, 저는 개인적으로는 노라 옥자 켈러의 『종군위안부』(박은미 역, 밀알, 1997)를 너무 오래전 어렸을 때 읽은 텍스트라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그런데 절판이 되어 구하기가 어렵더라구요. 흥미로운 서술 구조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라 다시 꼼꼼히 읽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영화 텍스트를 추천하자면 저 역시 <낮은 목소리>입니다. 마치 김학순 님의 증언 순간처럼, 이 영화는 한국영화사에 있어 중요한 모멘트였습니다.

허윤

저도 『척하는 삶』과 짝으로 『종군위안부』를 읽으면 재밌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어요. 그런데 제가 예전에 대학원, 국문학 전공이 아닌 다른 전공 친구들이랑 그 소설을 읽었었는데, 조금 어렵다고 하긴 하더라구요.

저는 송신도 님을 다룬 다큐멘터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를 추천하고 싶어요. 지금도 종종 공동체 상영을 하는 작품인데요, 일본에 사는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인 송신도 님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10년간 소송을 하는 과정을 다룬 작품입니다. “사람은 믿지 않는다”라고 단호하게 접근을 거부하던 송신도 ‘할머니’가 양징자 씨를 비롯한 지원단체 사람들과 소통하는 과정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김청강

어떻게 보면 비평이 더 활성화되어야 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은 창작물로서의 공급과잉이 너무 심한 것에 비해서 거기에 대한 비평 자체가 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비평이 더 활성화되어야 앞으로 나올 재현물도 조금 영향을 더 받지 않을까요.

허윤

지금까지 긴 시간 다양하고, 흥미롭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대중매체로 바라본 일본군 ’위안부‘ 재현’ 좌담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왼쪽부터) 권은선, 김청강, 허윤, 오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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