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의 재현 <2부> - '위안부'를 둘러싼 재현의 윤리, 어디까지 묘사하고 재현할 것인가

웹진 <결> 편집팀

  • 게시일2019.03.19
  • 최종수정일2019.11.20

‘위안부'를 둘러싼 재현의 윤리,
어디까지  묘사하고 재현할 것인가

허윤(부산외대 만오교양대학 교수) / 권은선(중부대 연극영화과, 영화평론가) / 오혜진(한예종, 문학평론가) / 김청강(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교수)

 

오혜진 

‘위안부’ 역사를 재현하고 비평하는 데 무엇이 핵심이어야 할까요? 강간 장면을 얼마나 자세하게 묘사했는가?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을 얼마나 ‘절절하게’ 담았는가? ‘위안부’인 존재에 ‘빙의’해야만 진정성 있는 고통을 재현할 수 있는가? ‘위안부’ 역사와 고통을 그런 방식으로 상상하는 게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빙의’의 상상력은 ‘내가 만약 '위안부'였다면’, 즉 ‘나’를 역사의 피해자로 상상하는 거죠. 그런데 ‘위안부’의 ‘역사’를 사유한다는 건, ‘나도 피해자일 수 있었음’을 주장하자는 게 아닙니다. 어떤 지배의 체제와 정서 구조에서 그런 ‘폭력’이 발생할 수 있는가를 사유하는 거죠. 그렇게 보면, ‘나도 피해자일 수 있었다’라는 가정에 머물 게 아니라, ‘위안부’라는 역사적 폭력의 연원인 ‘식민지 가부장제’라는 역사와 시스템을 사유해야겠죠. 그렇게 사유의 초점을 이동하면, ‘식민지 가부장제’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 잔존하며, 현재의 나 역시 그 체제의 효과의 자장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최근 서강대학교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연구소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공동주최한 전시 <이웃하지 않은 이웃─홀로코스트 ‘집시’ 희생자와 타자의 초상>(KF 갤러리, 2019. 1. 24~2019. 2. 28)의 소개말은 흥미로웠어요. 나치 시대에 억압당했던 ‘집시’들의 모습이 담긴 독일인 한스 벨첼의 사진을 전시한 것인데요. 한스 벨첼은 ‘집시’를 ‘매력적인 친구들’이라고 생각해서 그들을 카메라에 담았지만, 결국 그 ‘집시’ 친구들을 홀로코스트로 보내는 데 일조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전시의 서문은 ‘우리도 언제든지 홀로코스트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가 아니라, ‘평범한 이웃이었던 우리도 언제든지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역사적 성찰의 초점을 바꿔보기를 요청해요. 가해자에 이입하라는 뜻이 아니라,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선량한 이웃’은 역사의 가해자가 될 수 있는지 사유하자는 것이죠.

권은선

그와 관련해서, 저는 미약하게나마 조금씩 변화가 느껴지긴 합니다. 조금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귀향> 같은 경우에는 정말 ‘고통의 전이’의 관객성을 구축합니다, 즉 관객이 정민의 몸을 빌려서, 완전히 그 몸을 통과하면서, 과거의 고통의 현장으로 가게 되는 구조입니다. 정민이라는 몸이 동일시-몸이 됩니다. “사실 그대로”의 고통의 재현과 대리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영화적 주된 장치는 플래시백이죠. 그런데 최근 <아이 캔 스피크>나 <허스토리>를 보면 플래시백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요. <아이 캔 스피크> 같은 경우에는 아주 부분적으로만 플래시백이 나오고, <허스토리> 같은 경우에는 전혀 없어요. <허스토리>는 주인공 시점의 플래시백을 사용하는 대신, 지금은 폐허가 된 위안소 터를 찾아 역사적 거리를 두고 현장을 바라보는, 증인의 자리에 일본군 ‘위안부’를 위치시키는, 다큐멘터리 관습을 차용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고통과 트라우마를 둘러싼 재현에 있어서 미세하게나마 변화된 지점이 아닌가 합니다.

<귀향>이 나왔을 때, “이 이미지, 이 고통의 이미지 앞에서 한없이 너의 무기력함을 받아들여라”- 이런 비평적 태도가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러한 비평적 태도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 무력한 위치로 관객의 위치를 한정시켜야 하느냐는 것이죠. <눈길>에서 제가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지점은 ‘내포 청자’의 위치입니다. 내포 독자가 아니라요. 영화 서사 장치 안에 ‘헬조선’의 소녀가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을 듣는 후속세대의 좋은 청자(good listener)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관객이 동일시 할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 줍니다. <귀향>이 피해자에게 ‘빙의-되기’를 통한 죄책감의 정치였다면, 잘 듣고 반응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한 ‘청자-되기’는 책임감의 정치를 촉구합니다.

최근의 영화들을 보면 어떤 조바심이 보입니다. 오혜진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등록된 피해생존자의 수가 계속 줄어드는 상황에 대한 영화적 반응으로요, <22> 라는 중국 다큐멘터리도 있듯이요. 제가 아까 일본군 ‘위안부’들 간, 그리고 할머니와 후속 세대 간의 자매애 혹은 우정을 이야기했는데요, 거기에 흥미로운 부분이 하나 있어요. 꼭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머니가 한 명은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신을 잃어가는 것, 기억을 잃어가는 것이 하나의 역사적 망각에 대한 메타포로 작동하면서, 관객에게 “잃어버리면, 잊으면 안 돼”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아이 캔 스피크>나 <허스토리>는 재현에 있어서 ‘말하는 주체’로서의 위상을 강조했는데, 부분적으로 아쉬움이 있습니다. <아이 캔 스피크>는 오혜진 선생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유사 가족’의 형태를 빌어온 것, 그리고 판타지 같은 결말이요. <허스토리>는 사실 장점이 될 만한 요소들을 많이 내장하고 있었어요. 우리가 '위안부' 운동을 떠올릴 때, 소녀상, 나눔의 집, 광화문과 같은 공간적 특성을 떠올린다는 거죠. 그런데 <허스토리>는 부산이라는 지역을 다루고 있다는 지점이요. 그리고 ‘법정 드라마’이기 때문에 펼쳐질 수 있는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가령 “법적 책임 vs. 도덕적 책임”의 문제라든지, 그런 배상과 책임을 둘러싼 (국제)법, 법리적인 것들이요.

오혜진 

제가 아까 소개한 ‘감방 죄수의 무력함’에 대한 이야기는, 고통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너무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재현을 포기하고 역사적 성찰을 방기하는 상황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는 맥락에서 인용된 것이었어요.

다른 얘기를 해보자면, 김숨의 소설 『한 명』을 읽고 제가 깨달은 것은, ‘위안부’ 피해생존자가 ‘말하는 주체’가 됐다는 점이 다시 한번 물신화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 소설은 마치 보고서처럼 300여 개의 각주가 달려 있는데, 그것들은 ‘위안부’가 당한 폭력을 서술하는 서술자의 증언에 신빙성을 보완하기 위해서 동원돼요. 그 ‘폭력 묘사’의 내용은 <귀향>과 이전 ‘위안부’ 서사들이 즐겨 한 자극적인 묘사와 거의 같습니다. ‘강간’을 비롯한 폭력이 매우 선정적이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서술되는데요. 여기 달린 각주들은 ‘이건 서술자가 일부러 그 고통을 외설적으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할머니’들이 직접 한 말이니 ‘재현의 윤리’ 따위로 문제 삼지 말라’라는 뜻으로 읽히더라고요.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증언을 페티시적인 방식으로 활용하는 거죠. ‘위안부’의 역사적 맥락을 사상시킨 채 ‘위안부’의 섹슈얼리티를 재현하고 소비하는 것에 경종을 울리고자 ‘위안부’ 피해생존자의 ‘증언’이 등장한 것인데, 그 ‘증언’을 다시 한번 물화하는 것이 대중서사의 강력한 전략이 됐다는 건 문제적이죠. 

김청강  

초반에 진실성의 문제가 굉장히 큰 이슈였잖아요. 말하자면 일본에서 역사적 부인을 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우리는 사실로 증명을 해야 한다는 그런 강박 내지는 필요성에 의해서 계속 사실이었다고 말한다거나. 그리고 그게 단순히 증언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증언이 신빙성이 없다는 말 때문에 자료를 통해서 증빙해야 하고. 이런 강박이 사실은 지금 말씀하신 소설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일본은 계속해서 역사를 부인하고,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반응하는, 그런 방식으로. 그런데 약간 그런 제로섬 게임 안에서는 거기서 더 나갈 수가 없는 방식이 없는 거죠. 그러니까 이쪽에서 부인하면 '아니야, 사실이야.' 이렇게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는 그런 모습으로밖에 갈 수가 없는.

그리고 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아까 그 이전의 재현 방식에서 나타나는, 1990년대 이전에 재현의 방식에서 성인 여성으로 주로 나타났다는 그런 측면이 현재는 사라진 건데, 그 의미도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왜 그 부분이 삭제되느냐, 피해를 입었던 기간보다 한국에 돌아온 ‘위안부’ 생존자들은 한국에서 숨죽이고 견뎌왔던 세월이 굉장히 많이 삭제되는 거거든요. 물론, 최근에 영화들에서는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성찰해야 한다는 시각들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소녀와 할머니로 재현되었을 때 그 사이에서 쭉 견뎌온 세월과 그사이 한국 사회의 책임에 대한 문제들이 사실은 굉장히 많이 삭제되고 있다는 것이거든요. '위안부' 문제를 얘기할 때 1990년대 이후의 서사들에 대해서 굉장히 집중하는데, 사실 이전의 맥락들을 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한국 사회가 떠안아야 할, 이게 단순히 일본의 폭력으로만 회수되지 않을 지점들을, 우리 사회가 받아 안아야 할 부분들을 조금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위안부'를 그동안 잊어왔는가. 이전의 디테일한 방식들에 대해서 조금 더 성찰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 생각도 조금 듭니다.

(정면) 권은선, 김청강

 

허윤

'위안부'가 항상 늘 대중 소설의 장르 속에 등장하는 성애화된 성인 여성이었죠. 김성종 소설도 그렇고요. 저는 재현의 기점이 바뀌게 된 것은 ‘이승연 씨 화보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이승연 씨가 모바일 미디어 산업과 결합한 성인 화보 시리즈의 연장 선상에서 화보를 내겠다고 하면서 엄청난 이슈가 되고, 사람들이 분노했었죠. 이후에 성인 여성으로 재현하는 것이 굉장히 위험하다는 감각이 생긴 거죠. 그런데 그때 무릎 꿇고 사죄하고 필름 태우고 하는 식으로 사죄를 했지만, 그게 왜 문제인지인가, 혹은 어떻게 이런 작업을 생각할 수 있었는가를 더 묻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도 제작자는 '역사적 책임을 가지고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하겠다'라는 말을 했었거든요. 일본군이 주둔했던 팔라우까지 가서 화보를 찍은 것인데, 그런 화보가 받아들여지리라 생각했던 데 대해서 한국 사회는 심문해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혜진

이승연 씨의 화보 사건은 그 자체로 새롭다기보다는, 그 이전까지 ‘위안부’ 섹슈얼리티를 소비하던 방식의 연장 선상에서 발생한 일이죠. 식민지의 ‘위안부’로 동원된 여성 섹슈얼리티가 남성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성애화된 여성 섹슈얼리티의 한 종류로서 간주되어온 전통. 다만 이승연 씨의 화보 사건은 그것을 ‘모바일 화보’라는 형식을 통해 매우 노골적으로 상품화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후폭풍을 맞은 거죠. 그 이전에도 이미 스포츠신문 연재소설 등에서 ‘성애화된 여성 섹슈얼리티’로서 ‘위안부’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었으니까요. ‘위안부’ 여성을 성애화된 방식으로 소비해온 구조와 역사에 대한 질문 없이, 그저 ‘위안부’ 여성이 성애화되는 건 ‘위안부’를 ‘성인 여성’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라고 믿으며, 그걸 피하고자 손쉽게 ‘어리고 순결한’(그럴 것이라고 상상되는) ‘소녀’ 형상을 택한 게 최근의 일인 듯합니다. 하지만 <귀향>이나 ‘소녀상’에 대한 성희롱에서 보듯 ‘소녀’ 역시 성애화의 대상이 될 수 있죠. ‘소녀’ 역시 섹슈얼리티의 주체니까요.

김청강

저는 소녀상이 사실은 굉장히 좋은 재현의 방식의 하나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왜냐하면 어떤 커다란 동상을 세운 게 아니고, 굉장히 작고... 제가 영화에서 성인 여성들이 착취되는 어떤 그런 모습들을 쭉 보다가 소녀상을 봤을 때, 이게 당시에는 상당한 대항성을 가지고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가서 만져볼 수 있고 비가 오면 우산도 씌워 주고, 눈이 오면 모자도 씌워 줄 수 있는, 이런 만질 수 있고 동일시할 수 있는 대상으로써 재현했던 게 좋았는데, 지금은 사실은 소녀상이 굉장히 너무 과공급되면서 그 의미가 탈색됐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 대항적인 부분이 사라졌을 때, 어떤 식의 대안을 가지고 재현을 할 것인가. 이제 소녀로만 얘기하기도, 성인 여성으로만 얘기하기도, 할머니의 모습만으로 얘기하기도 굉장히 어려운 지점에 도달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권은선

돌이켜 보면, 이승연 씨 화보 사건은 일종의 해프닝이었습니다.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이전까지 '위안부'에 대한 포르노그래픽한 상상이 잔여적인 이미지 형식으로 계속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김학순 님의 증언 이후, '위안부' 재현과 관련해 가장 강력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가 1995년에 등장합니다. 이런 이미지들과 담론들이 경합하는 와중에서, 이미지 생산을 둘러싼 미디어 자본이 결합하면서 나온 아주 이상한 결과물이 이승연 씨 화보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 잔여적인 이미지 형식이 <귀향>에서까지도 남아 있는 것이죠.

김청강

<귀향>을 보고 저는 이게 왠지 성인 여성에서 소녀로 바뀌었을 뿐이지, (물론 성폭력 피해 여성과 겹쳐지는 공감의 부분을 넣긴 했지만) 피해자 입장에서 보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권은선 

 ‘소녀상’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사실은 소녀상의 무한증식으로 ‘소녀’가 일본군 '위안부'의 이미지를 과점유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많은 분이 반복해서 지적했던 것처럼, 일차적으로 ‘훼손당한 민족’을 순수하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이미지 재현이 소녀이기 때문이죠. <귀향>을 분석하면서 얻은 생각은, 이러한 순수한 민족적 피해자 소녀의 고통 재현이, 결국 ‘위안부’ 피해자를 추상화하고 종교화하고 신성화하는 방식이라는 점입니다. 즉 무력한 위치를 받아들이면서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라는. 그리고 그러한 감각을 강화하는 것은 이 <귀향>이 만들어진 크라우드 펀딩, 그리고 소녀상 만들기 모금 과정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이 이미지(동상)를 만든다”라는 주인의식이 과도한 죄책감의 공동체, 공통감각-이런 것들을 만들어 내고, 거기에 대해서 입을 틀어막는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죠. 일종의 ‘국민 프로듀스’ 감각이라 할 만한 것으로, “내가 프로듀서”, 마치 버라이어티 쇼의 대국민 투표에 참여하듯이, 내가 제공하는 것이라는 생각. 이런 것들이 역사적 성찰에 필요한 이미지에 대한 거리감이라든지, 유효한 정치적인 전략을 구성하는 데 저해가 된다고 봅니다. 이에 대한 성찰과 비평적 담론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김청강 

중요한 부분을 권 선생님께서 지적해주신 것 같은데요. 국민 프로듀스가 된다는 그런 감각? 오혜진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시민의식 같은 거. 그러니까 굉장히 시민의식을 갖는 손쉬운 방법으로 돼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조금 들거든요. 그러니까 조금 시민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일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여기에 적은 돈이지만 그만큼 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굉장히 손쉬운 시민의식 감각으로 만들어지는 경향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허윤

지금 ‘위안부’를 둘러싼 재현물이나 상품, 텀블벅과 같은 크라우드 펀딩이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죠.

오혜진

 

오혜진 

100피트 운동부터 <귀향> 보기 운동까지 면면히 이어지는 시민참여 방식 자체를 비판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걸 ‘자본주의에 침윤된 소비자운동’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폄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위안부’ 역사 재현의 새로운 쟁점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언제든 성애화되기 십상이니, ‘위안부’를 ‘소녀’, ‘성인여성’, ‘할머니’ 중 무엇으로 재현할 것인가가 핵심적인 질문이라고 생각되지는 않고요. 결국 ‘위안부’ 역사를 재현한다는 것은 ‘위안부’ 문제를 역사화하면서 우리가 얻은 ‘성찰’을 재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재현의 윤리’에 대한 두 가지 경향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하나는, 지대한 고통은 ‘재현하지 않는 것’이 곧 윤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죠. 어떤 고통은 ‘재현 불가능성’의 영역에 있다고 규정하고, 그것을 재현하는 것은 곧 ‘재현의 폭력’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는 ‘쇼아[1]는 재현될 수 없다’라는, 재현에 대한 오랜 논쟁의 연장이기도 합니다. ‘위안부’ 재현 서사뿐 아니라, 최근에는 (성)폭력이 등장하는 재현물 자체를 금지와 말소의 대상으로 여기는 경향까지 있죠. 하지만 ‘재현 없는 사유’가 가능할까요? 문제는 폭력을 ‘재현’했다는 것 자체에 있지 않을 겁니다. 어떤 관점과 방식으로 폭력을 재현하는가의 문제겠죠. 어떤 대상이 절대로 재현 불가능하다거나 재현돼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오히려 재현된 ‘이미지’에 대한 물신화에 기인한다고 생각해요. 재현된 이미지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불가변적인 것으로 사유하는 거죠. 하지만, ‘재현된 이미지’는 대상에 대한 특정 시대와 인간의 ‘역사적’ 관점과 이해를 보여주는 한 사례일 뿐입니다. 특정 대상을 ‘재현 불가’의 영역에 두는 건 그 대상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는 것에 가까워요. 오히려 재현된 결과물에 대해 논쟁을 하는 게 더 생산적이죠. 이건 ‘표현의 자유’ 등을 내세워 모든 재현은 용납돼야 한다는 식의 나이브한 주장과는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경향은, 특정 대상을 비평할 때 ‘재현의 윤리’ 등을 문제 삼는 것을 매우 전통적이고 엘리트적인 작품론에 속한다고 보는 의견에서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귀향>을 비평할 때, ‘재현의 윤리’를 문제 삼아 영화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이 영화의 제작과 수용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역사와 정치에 개입하는, 작품 자체보다 ‘더 큰’ 대중운동의 정치성을 간과하는 고식적인 비평으로 간주하는 식입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시도한 재현전략을 비평적으로 사유하는 것과 영화를 둘러싼 수용의 정치를 사유하는 것은 서로 배치되지 않아요. 둘 다 필요하죠. ‘재현의 윤리’는 작품을 창작한 개인의 정치적・미학적 수준이나 취향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특정 재현이 대중적 공감을 얻고 선호되는 건 그 자체로 그 주제에 대해 한국 사회에 축적된 지식과 이해의 문제고, 이는 매우 정치적인 문제죠.

여기서 잠깐 영화 <사울의 아들>(라즐로 네메스, 2015)과 관련된 논쟁을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이 영화는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 수용자들을 가스실로 이끌고 시체를 처리하는 또 다른 유대인 수용자들인 ‘존더코만도’의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존더코만도’ 일원 중 한 명이 나치의 감시망을 피해 어두운 소각로에서 몰래 아우슈비츠의 모습을 찍은 사진 4장이 이 영화의 기반이 된 거죠. 저는 이 영화 초반부를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이 영화가 정말 나를 아우슈비츠로 끌고 간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영화에서 카메라는 언제나 주인공의 어깨 뒤에 위치합니다. 딱 그 위치에서 보이는 것만 볼 수 있는 거죠. 아주 한정된 시야로 현재 주인공이 있는 위치를 조망하기 때문에 관객은 지금 여기가 어딘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려워요. 마치 광장에서 키 큰 앞사람들의 어깨 사이로 보이는 것을 통해서만 현재 광장 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파악해야 할 때의 답답함처럼요. 이런 촬영기법들이 저한테 일종의 임장감臨場感이랄까요, 내가 정말 그곳에 임하고 있다는 느낌을 줬어요. 그리고 또 영화는 바로 그 한정된 시야를 통해, 떼 지어 기차에 오르는 유대인들이나, 벌거벗은 수용자들의 시체더미 등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장면들은 마치 포커스 아웃, 혹은 블러 처리를 한 것처럼 희미하게 나와요. 이런 연출을 통해 관객은 아우슈비츠의 시스템 전모를 절대 파악할 수 없고, 죽음에 이르는 수용자들의 표정이나 정동 같은 것도 결코 포착할 수 없죠. 아우슈비츠라는 장소나 피해자들의 모습이 ‘스펙터클’로 제시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특성들 때문에 혹자는 이 영화가 재현의 윤리에 매우 충실하다고 평했죠.

하지만, 피해자나 시체를 ‘희미하게’ 보여줌으로써 보장되는 윤리? 그렇다면 그 블러 처리가 조금 덜 희미했다면 덜 윤리적인 재현이 되는 걸까요? 저는 그 영화에 재현의 윤리가 있다면, 그런 정교하게 기획된 촬영기법에 있다기보다는 그 영화가 말하려고 했던바 그 자체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 영화는 주인공인 한 존더코만도 ‘사울’이 나치의 감시망을 피해서, 가스실에서 죽은 한 소년을 제대로 ‘매장’하고 애도하기 위한 분투를 서사화하거든요. 심지어 그 소년이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존재일지라도, 바로 그 분투를 함으로써만 겨우 스스로 감지하는 ‘존엄’의 문제를 말합니다. 마치, 소년의 매장을 위해 분투하듯, 결코 재현될 수 없는 고통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 고통을 사유하려는 영화의 ‘기투’ 자체에 윤리적인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보면, ‘위안부’의 역사를 비롯한 고통의 재현을 생각할 때 ‘재현의 윤리’에 대한 매우 협소한 이해가 고착되는 상황은 염려스럽습니다.

권은선

공감합니다. 사실 ‘재현의 윤리’ 혹은 ‘재현의 도덕’이라는 논리가 이상한 방식으로 고착되고 사유되고 있어서, 어느 순간 개인적으로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되더라구요. 단순히 촬영 기법 같은 것들이 즉각적으로, 기계적으로 어떤 윤리적인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지만, 시각화의 장치라는 것을 통해서만 그 어떤 이미지의 의미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저는 시각화 장치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쇼아>부터 ‘아우슈비츠’를 재현할 수 있느냐, 없느냐-재현 불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오래되었죠. 그런데,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저는 그것을 재현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을 사유하고 성찰하기 위해서 재현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재현의 방식이죠. 폭력의 재현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나쁘다면 그것이 폭력의 속성을 사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향>의 재현을 옹호한 언설 중의 하나가 실제 ‘위안소’에 대한 증언을 토대로 그린 그림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재현의 윤리에 관해 어떤 것도 담보할 수 없습니다. 위안소에서 벌어진 일이 정말 나쁜 것은, 그것이 인간성이라는 것을 말살하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을 어떤 방식으로 재현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한 것이죠.

 <사울의 아들> 같은 경우에는 초점 심도를 낮추는 촬영 방식 등을 주도적으로 사용하는데, 이는 수용소에 있는 수용자들에게는 초점이 명확하게 맞춰질 수 없는, 어떤 상황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사울의 아들>을 두고 디디 위베르만은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곳에서는 전체를 조망할 수 없다, 전체를 조망하는 시선은 감시자의 시선뿐이라는 거죠. 그런데 <귀항>에서 정말 문제적인 ‘지옥도’의 재현을 예를 들면, 그것은 그 사실이 얼마나 끔찍하고 정말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극 부감의 시점으로 전체를 조망합니다. <귀향>에서 성폭력이 남성 중심적인 가해자의 관음증적 시선으로 묘사되는 것도 문제지만, 감시자, 전체주의자의 시선을 채택하고 있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성이 탈각된 ‘스위트 홈’ 고향의 이미지가 놓여 있구요. <귀향>에서처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마치 지옥도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종교적으로 만들고. 추상화하고 신성화하는, 그런 탈역사적 재현 장치를 문제로 얘기하고 싶습니다. 

오혜진

아까 그 존더코만도가 찍은 사진 4장에 대해 프랑스 철학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이 2004년에 쓴 책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오윤성 역, 레베카, 2017)을 읽어봤어요. 그 사진들에는 화장 구덩이들과 숲에서 옷이 벗겨진 채로 호송되는 여성의 모습이 찍혔습니다. 하지만 그 사진은 나치의 감시를 피해 몰래 찍은 것이기 때문에 초점도 맞지 않고 이미지도 선명하지 않아요. 무엇보다 사진을 찍는 이가 있는 장소도 함께 찍혔죠. 예컨대 화장 구덩이와 그곳에서 일을 지시하는 나치들만 찍히는 게 아니라,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던 제 5소각로 가스실의 ‘어둠’이 시커멓게 찍혔습니다. 화장 구덩이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던 공간의 열린 문을 통해 간신히 보이는 장면이죠.

이 사진들에 대해 가장 빈번하게 시도된 조작의 내용이 흥미롭습니다. 사람들이 알고 싶은 건 ‘아우슈비츠는 어떻게 생겼고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나’이기 때문에, 사진 속 시커멓게 나온 ‘어둠’은 자르고 화장 구덩이들만 클로즈업하는 식이죠. 시커먼 부분은 아우슈비츠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데 별 도움이 안 되는 잔여적인 부분으로 간주해서 삭제하는 겁니다. 하지만 디디-위베르만은 그 시커먼 부분 역시 아우슈비츠의 이미지임을 강조합니다. 그 까만 부분은 그 사진들이 어떤 상황을 ‘무릅쓰고’ 탄생 가능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인데, 그것을 삭제한다는 것은 ‘증언/재현이 가능한 자리’를 비가시화하는 일이라는 거죠. 이 부분을 읽으면서 당연히 <귀향>의 소위 그 ‘지옥도’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위안소’ 전체를 ‘조감’하는 시선은 어떤 자리에서 가능한가 생각해보면, 그건 권은선 선생님 말씀대로 감시자 혹은 신의 시점이죠. 결국 우리는 왜 증언/재현을 물신화할 뿐, 그것을 가능케 한 역사적 조건을 사유하지 않는가. ‘위안부’의 고통을 존중한다면서, 왜 ‘위안부’의 고통을 재현하는 ‘위치’에 대해서는 성찰하지 않는가 질문하고 싶었습니다.

김청강

디디 위베르만 책에서 보니 여성 가슴도 조작했다고 하더라고요. 더 위로 이렇게 처진 가슴을 올리는 식으로요. 왜 굳이 그렇게 해야 했을까 생각하는데, 사실은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어떤 우리가 보고 싶은 이미지, 그러니까 초점을 두는 부분에 대한 조작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사실은 어떻게 보면 지금 굉장히 재현이 많이 있지만, 다 너무 초점이 그 목적에 맞게 그 재현들이 너무 클리어하게 맞춰져 있다는 게 문제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은 최근에 경향 중에서 가장 큰 변화는 극화된 것이 많다는 것이잖아요. 그랬을 때 기존에 다큐멘터리가 정말 많은 것을 숙고해서 재현했던 방식과 극영화로 만들었을 때 방식이 굉장히 다를 수밖에 없고, 특히 극영화로 만들었을 때 너무 단순화되는 경향이 있는 거예요. 초점이 너무 클리어해지는 거죠. 대중적 소통이라는 것에 공감을 얻고, 대중적으로 소통해야 한다는 의식과, 그다음에 그러기 위해서 동원해야 하는 수단이, 사실은 어떻게 보면 그 이슈 자체를 너무 단순화하게 만드는. 그러니까 의도는 좋잖아요. 이 이슈를 알리고 사람들이 책임감과 모든 것을 알게 해야 한다는 그건 좋지만, 사실 대중적 재현을 따랐을 때는 단순화될 수밖에 없는 그런 구도, 굉장히 클리어한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쭉 스토리를 끌어나가야 하는 그런 것 때문에 어떻게 보면 대중적인 서사 안에서 더 많이 재현된다는 건 사실 더 큰 우려를 낳는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오히려 정말 다양한 시도들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허윤

각주

  1. ^ 히브리어로 '홀로코스트'라는 뜻. 클로드 란츠만 감독의 영화 <쇼아>는 총 350시간에 이르는 촬영 필름을 가지고 9시간 반으로 편집된 대장편 다큐멘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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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웹진 <결>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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