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야 할 첫 발걸음, 1세대 연구자를 만나다 - (2) 송연옥

웹진 <결> 편집팀

  • 게시일2019.03.16
  • 최종수정일2022.11.28

​​일본군‘위안부’ 문제 연구자 송연옥

송연옥 (문화센터 아리랑 관장 / 아오야마가쿠인대학교 명예교수)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 명예교수. 재일조선인으로서 일본에서 식민지 역사와 여성사의 기틀을 마련한 연구자로서 일본군‘위안부’문제의 진상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주요 저서로 『군대와 성폭력』, 『동아시아 일본군 위안부 연구(공저)』, 『한국 여성사 연구 70년(공저)』, 『식민주의, 전쟁, 군 ‘위안부’(공저)』, 『동아시아의 전쟁과 사회(공저)』 등이 있다.

 

Q. 송연옥 선생님에 대해 잘 모르는 웹진 결 독자분들을 위해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1947년에 태어난 재일조선인 2세입니다. 국적은 한국이지만 교육은 일본 교육기관에서만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국의 언어인 일본어가 저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모어가 되겠지요. 식민주의가 신체화된 일상을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대학교를 졸업했을 시절, 민족 차별 때문에 재일조선인은 사회적으로 배제되어 있었어요. 그런 역사적인 배경을 알고자 한국에 민족사를 배우러 갔는데, 당시 조국의 정치적인 계절은 겨울이었습니다. 서울에서 대학원 석사과정을 다 마치지 못한 채 일본으로 돌아왔고, 다시 한국에 가게 된 건 1992년부터입니다. 역사 연구를 단념한 시기도 있었으나, 50세 때 도쿄에 있는 아오야마가쿠인대학교 교수로 채용되어 그 후에는 제대로 연구할 수 있게 되었어요.

 

Q. 처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대학교를 졸업한 몇 년 후에 센다 카코(千田夏光)의 『종군위안부(従軍慰安婦)』(双葉社, 1973)를 읽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읽고서 큰 충격을 받았으나, 센다의 책에는 여성주의적인 시각은 약했어요. 그래서 언젠가 ‘위안부’ 피해자의 한을 푸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막연한 바람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러나 그 당시는 피해를 당한 당사자가 한국에 살아 계시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고 대부분이 전쟁터에서 죽거나 버려졌을 걸로 생각했었습니다.

 

Q. 선생님께서 그동안 진행하셨던 일본군‘위안부’와 관련한 연구들을 소개해주세요.

『개벽』77호(1948년 2,3월호)에 최정석이란 사람이 쓴 ‘해방되는 창기 5천명’이란 글이 있는데 그걸 보고 일제시대에 대한 인식을 달리했습니다.  글의 앞부분에 ‘일제가 여성에 관해서 이 땅에 남긴 해독이 두 가지 있으니 하나는 공창제도(公娼制度)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봉건적인 노예여성관을 유지, 연장시킨 것이다’란 구절이 있었습니다. 물론 최정석은 ‘위안부’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포함해서 공창제를 ‘日帝(일제)의 搾取(착취)와 이 땅의 社会悪(사회악)을 가장 醜悪(추악)한 가운데 가장 端的(단적)으로 나타내는 実証(실증)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본군‘위안부’제도가 1932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일제가 조선 여성의 성적인 신체를 유린·착취하고, 가난한 여성들을 인신매매한 것은 훨씬 이전부터 진행된 거잖아요. 개항 이후의 일제 침략 과정을 보고, 최정석의 글을 해독한 후 일제가 식민지지배 정책으로 이용한 공창제를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연구를 하다 보니 식민지 조선에 적용된 공창제는 일본에서의 공창제와 같은 명칭이 쓰이지만, 그 내용은 일본 공창제보다 업자들에게 더 유리하게, 여성들에게는 더 불리하게 만들어졌더라고요. 이러한 식민지 공창제가 ‘위안부’제도의 전제가 되었다는 연구를 해왔습니다.

 

Q.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조선인으로서 일본군‘위안부’를 연구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는 ‘위안부’문제를 연구과제로 하면 일본인이라도 대학 교수로 채용되기가 어렵다고 해요. 반일 사상의 소유자란 낙인이 찍히는 거지요. 제가 1993년에 조선사연구회 대회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국가적 관리매춘’이란 제목으로 발표를 한 적이 있어요. 연구한 결과, 중일전쟁 시기에 조선인의 성매매업 종사율이 높아진 결론을 얻었어요. 그것은 조선인이 전쟁 체제에 휘말려 들어 간 것을 증명한 건데, 제 발표를 들은 한국 남자 유학생이 저에게 막 비난하는 말을 퍼부었어요. 제가 하고자 하는 취지를 단순하게 오해한 거였지만, 그런 식의 민족주의에 회의를 느낀 것도 사실입니다. 해방 후에도 일본에 사는 재일조선인은 민족 차별 속에서 3D 노동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면 그런 반응은 이해하기가 어렵네요.

 

Q. 연구하시면서 만났던 ‘위안부’피해자 중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이 계신가요?  

1992년 8월 말, 한중국교가 체결되기 직전에 중국 목단강까지 가서 김순옥 할머니(1922~2018)를 만났어요. 김순옥 할머니의 존재는 우연히 알게 됐어요.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있는 시민단체 사람들이 조사차 러시아 국경에서 가까운 둥닝(東寧)까지 간 적이 있었어요. 예전에 일본 병사였던 사람이 안내를 해줬죠. 조사 마지막 날에 마을 노인이 ‘카이코’라는 여자가 옛날에 ‘위안부’였다고 가르쳐줬어요. 그런데 그때만 해도 중국 여행이 어려울 때라 귀국 날짜를 연기할 수가 없어서 당시 일행은 숙제를 남긴 채 그냥 돌아왔어요.

이후, 저와 김영희씨가 연변대학 임희준 교수님의 도움을 받고 둥닝까지 조사하러 갔는데, 옌지(吉林)에서 둥닝까지 가기도 쉽지 않았어요. 10시간이나 택시를 달려서 저녁에 간신히 도착했죠. 그런데 할머니는 집에 안 계시고 목단강에 있는 딸 집에 갔다는 거예요. 할 수 없이 그날은 둥닝에서 숙박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목단강으로 출발했어요. 중국이 얼마나 넓은지 실감했어요. 도로가 포장되어 있지 않아서 장거리 이동만으로도 너무 지쳤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김순옥 할머니를 만났을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할머니한테도 저희들이 외부에서 처음으로 찾아온 동포였는지라 정말 기뻐하시고 오랜만에 만난 친척처럼 대해주셨어요. 딸한테도 얘기 못 했던 아프고 쓰라린 경험을 한꺼번에 쏟아내듯이 얘기 해주셨던 추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만나 뵈니까 ‘카이코’의 수수께끼도 풀렸어요. ‘카이코’는 카요코란 일본 이름으로 위안소에서 붙여진 것이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할머니를 그렇게 불렀답니다. 동네 사람들이 ‘카이코’라고 부를 때마다 할머니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하니 착잡하기만 합니다.

 

Q.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조선인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분단국가인 대한민국 연구자의 시각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일본 교육기관에서만 배운 재일조선인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일본을 평가하는 눈이 냉철하다는 겁니다. 일본 역사학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일찍 지적해왔습니다. 일본에선 1931년부터 1945년까지 15년간의 전쟁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만,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제가 15년 전쟁이 아니라 50년 전쟁이라고 주장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입니다. 그리고 분단된 현실에서 어쩔 수 없으나 북한을 바라보는 시선이 과소평가에서 과대평가까지 눈높이가 안정되지 못하고 있으며 ‘위안부’ 연구에서도 그것을 느낍니다.

 

Q. 일본군‘위안부’를 둘러싼 여러 문제 중에서도 선생님께서 주목 혹은 집중하고자 하셨던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제가 상해 위안소에 관한 연구를 한 결과 얻은 결론은 상해와 같이 전쟁터였다가 점령지가 된 지역은 위안소를 중심으로 다양한 성매매업이 확대·번창했다는 거예요. 성매매 요리점은 위안소를 보완하고 또 국가가 개설한 위안소가 있으므로 다른 성매매업도 대의명분을 얻어 서로가 번창하는 그런 전쟁 사회상을 더 밝혀야 해요. 공창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은 시기와 지역에 따른 실태를 파악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다고 봅니다. 또 지금 일본에서 ‘위안부’제도와 구별해서 공창제를 정의하는데 시민법, 평시, 폐창의 규정을 그 근거로 들지만, 과연 일제강점기 조선은 시민법이 적용된 평시였을까요? 그런 공창제 정의는 식민주의와 전쟁 사회사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Q. 연구자 혹은 개인으로서 선생님의 인생에서 ‘위안부’ 연구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일본군‘위안부’ 연구를 놓지 않고 끊임없이 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저는 재일조선인 여성으로서 살아오는 과정에서 성차별, 민족 차별, 계급차별을 복합적으로 경험했고 정신적인 상처도 깊이 입었습니다. 이런 복합적인 차별의 상징이 ‘위안부’문제라고 생각해요. 문제의 뿌리인 식민주의는 최근에 일본 사회에서 나타난 헤이트 스피치와도 상통합니다. 아직 해결되지 않고 저희를 일상적으로 괴롭히고 있으니 건전한 사회를 만들려는 희망으로 연구를 놓칠 수가 없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다양한 학문적, 사회적 이슈 중에서도 (대한민국 내에서) 가장 민감한 최전선의 이슈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후학들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방향으로 연구를 더 확장해가면 좋을까요? 연구하는 후학들을 위해서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위안부’문제는 많은 증언과 연구,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이 있었음에도 아직 낡은 담론과 틀 속에 갇혀있는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공창제와 ‘위안부’ 제도를 연결하여 보는 것을 꺼리는 사람이 많지만, 공창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공창제와 ‘위안부’ 제도를 시기와 장소에 따라 구체적인 실상을 밝힐 연구가 앞으로 많이 나와야 합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이 인식하고 있는 보편적 이슈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감정적 층위에만 머무르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데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위안부’ 문제에 한해서 말씀드린다면 민족적인 시각은 강해도 여성적, 계층적인 시각을 복합해서 보는 것은 아직도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국민 통합을 위한 해방 후에 만들어진 민족주의도 강하고요. 역사학계에선 친일이냐 항일이냐 하는 2항 대립적인 단계를 넘어선 연구가 많이 진척되었으나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대중적인 시선에 관해서는 그런 성과가 잘 반영되어있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일제강점기 사회사 연구가 더 다양하게 진전되어야 하고 일본의 침략전쟁 하에서 국내외에서 생활한 동포의 실상이 더 많이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은 아직까지 성매매에 대한 표리일체로 된 호기심과 멸시감, 혐오감이 강한 사회입니다. 공창제 운운할 때 나오는 거부감도 여기서 나옵니다. 그래서 여성주의적인 가치관을 더 일상화해야 하고 성적인 권리가 존중되는 사회여야 합니다.

 

Q. 위와 같은 상황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 연구소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역사학을 전공하는 저로서는 ‘위안부’ 문제를 식민주의와 침략전쟁이 낳은 문제이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문제로 봐야 한다고 조언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위안부’ 제도를 낳은 배경, 즉 식민지 지배하 조선의 사회와 경제 상황을 지방마다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파고 들어가는 연구가 나와야 합니다. ‘위안부’ 문제만 보면 정치적인 담론의 영향을 받아서 오히려 실증적인 연구가 소외될 우려도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구조적으로 중첩적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선 중국에 있는 자료도 계속해서 발굴·수집해서 그 성과를 널리 공개해 젊은 연구자들을 양성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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