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위안부’ 영화의 안과 밖 2부 - 다른 상상은 가능하다

손희정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 게시일2019.03.16
  • 최종수정일2023.09.21

다른 상상은 가능하다

이 글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요청에 따라 『페미니즘 리부트』(손희정, 나무연필, 2017)에 수록되어 있는 「기억의 젠더 정치와 대중성의 재구성: 대중 ‘위안부’ 서사를 중심으로」를 요약하고 수정한 글입니다.

 

‘위안부’에 대한 다른 재현: <눈길>의 경우

<눈길>은 그 ‘반복과 차이’ 때문에 <귀향>과 자주 비교되었다. 두 작품 다 위안소에 끌려가는 소녀들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어 그 소녀들 사이의 우정, 죽음과 생존, 그리고 노년에 다다라 벌어지는 일들을 담는다. 이렇게 비슷한 서사구조를 공유하는 이유는, 두 작품 다 증언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증언 안에서도 두 작품은 서로 다른 재현을 선보이고 있다.

<눈길>은 <귀향>과 달리 발가벗겨진 채로 두들겨 맞는 여성의 몸을 날것으로 우리 앞에 던져놓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그렇게 한낱 ‘몸뚱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하루하루와 그 일상을 버텨내는 마음이다. 예컨대 <귀향>이 강간당하는 ‘처녀’의 비명을 담아낼 때, <눈길>은 매일 반복해야 했던 콘돔 세탁의 비루함과 그 안에서 묻어나오는 한탄을 보여준다. <눈길>에서 여성은 그저 ‘유린당한 몸’으로 이미지화되지 않는다. 주인공 스스로 자신을 ‘짓밟힌 짐승’으로 여길 때에도, 카메라는 그를 그렇게 대하지 않는 것이다. 폭력을 스펙터클로 만드는 것이 피해자의 고통을 묘사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폭력을 볼거리로 만들지 않기 위해 우회로를 택하는 것이 피해자를 또다시 대상화하고 물신화하지 않을 방법이기도 하다. 미카엘 하네케(Michael Haneke) 감독의 말처럼, 폭력의 재현은 폭력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눈길>이 ‘여성들의 읽고 쓰기’에 공을 들이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영애(김새론)는 종분(김향기)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삶의 이유를 찾고, 종분에게는 글을 배운다는 것이 삶의 동기가 된다. 한 평론가는 이것이 가르칠 수 있는 자와 배워야 하는 자라는 계급적 위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판했으나, ‘가르친다’와 ‘배운다’라는 행위가 결과적으로 가지는 의미에 주목한다면 그렇게 단순하게만 해석될 수 없다. 영애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이유를 되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을 잘 아는 종분이 영애에게 ‘글을 가르칠 기회’를 준다. 읽는 법을 알려달라며 책을 먼저 내미는 것은 종분이다. 그리하여 “너 착각하지 마라, 너나 나나 똑같애!”라는 종분의 외침은 성노예화가 어떻게 피식민자의 계급과 무관하게 진행되었는가를 폭로한다.

이후에 종분에게 있어 글을 안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로 쓰이게 된다. 글을 알게 됨으로써 그는 비로소 이 국가 시스템에 시민으로서 다시 기입된다. 영애 덕분에 『소공녀』를 읽게 된 그는 귀향하여 ‘강영애’라는 이름으로 국가 시스템에 등록하고, 국가보훈처가 보낸 고지를 읽으며, 첫사랑에게 편지를 쓴다. 종분에게 “쓴다”는 것은 더 이상 이 사회에 ‘없는 자’가 아니라 ‘등록된 자’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동시에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 자, 기록할 수 있는 자가 된다. 그렇게 ‘들리는 자’, ‘읽힐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영화 <눈길>(2017) 포스터 ©엣나인필름

 

증언의 힘: “아이 캔 스피크”

우리는 왜 “비명과 울부짖음”만이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일까? 결국 ‘위안부’ 피해자 여성이 역사의 주체로서 자신의 피해를 증언하고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어떤 형태였든 간에 자신의 언어로 말을 했기 때문이 아닌가.

<귀향>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국가의 완전한 부재’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스템의 완전한 부재’다. 여기서 ‘부재’란 영화가 그것을 재현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렇게 사라진 일본과 조선/남한은 ‘사악한 일본인’과 ‘무능한 조선/남한 남자’라는 정형으로 개인화된다. 오빠는 동생을 구하지 못하고, 아버지는 딸을 지키지 못한다. 그런 무능은 현재까지 계속된다. 그래서 여자들은 미친년이 되거나 불귀의 객이 되고, 접신을 통해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영매가 된다. 이는 가족 로망스 안에서만 정치가 상상되고 재현되고 설명되는 가부장제 사회의 인식론을 반영하면서 재생산된다.

물론 국가의 부재야말로 이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일본 정부는 물론이고 한국 정부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대처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영화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굿이라는 문화적 형식에 기대는 것이 설득력을 가지고 대중을 매혹시킨다. 이때 정민(강하나)의 혼을 ‘귀향’할 수 있도록 이끄는 영매 은경은 ‘위안부’ 여성들이 겪었던 그 성/폭력의 역사가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에 머물지 않으며 가부장제의 보편적인 폭력으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음을 폭로한다. 은경이 영매가 되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그래서 중요했을 것이다. 은경은 성폭행을 당하고 그 가해자가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까지 목격하면서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자, 이성의 언어를 넘어서는 자, 그 제도의 틈새에 존재하는 자, 영매가 된다.

과연 생존자에게 세상을 떠난 동무와 그로 상징되는 고통의 기억은 영매를 통해서만 불러올 수 있는 타자였을까. “몸은 돌아왔지만 마음만은 그곳에 있었다”는 영옥(손숙)의 말은 생존자들이 삶에서 언제나 죽은 자들의 혼과 함께였다는 것에 대한 고백이다. 그러니 도대체 왜 영매여야 하는가? 다시 <눈길>을 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살아가는 생존자 ‘할머니 종분’(김영옥)은 돌아오지 못한 소녀 영애의 영혼과 일상적으로 만나고 대화한다. 종분은 귀향 후 영애의 이름으로 살아왔다. 이는 종분을 ‘국가 시스템에 등록된 자’로 그려내는 전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종분에게 그 과거가 '귀신의 것’이 아니라 ‘사람의 것’으로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오랜 침묵을 깨고 이 사회에 ‘위안부’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리게 한 것이 ‘진혼’이 아니었음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살아가겠다’고 선언한 할머니들의 용기와 결기였다. 그리고 그 옆을 지켜온 살아 있는 운동들이었다. <귀향>에도 가슴을 두드리는 장면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나이 든 영옥이 ‘위안부’ 피해 신고를 하기 위해 동사무소를 찾았던 장면이다. 신고할까 말까 주저하던 영옥은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신고를 하겠느냐”는 동사무소 직원의 말에 되돌아가 외친다. “내가 그 미친년이다!” 이는 제도에 ‘미친년’의 목소리를 기입함으로써 제도의 성격 자체를 다시 쓰는 순간에 대한 묘사다.

‘위안부’ 피해자의 ‘소녀 시절’의 재현을 과감히(!) 삭제하고 말하는 자로서 “할머니”의 모습으로 점프한 <아이 캔 스피크>가 등장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아이 캔 스피크>는 <귀향>에서 할머니가 “그 미친년임”을 선언하는 순간, 그리고 <눈길>에서 상상하고 재현했던 ‘말하고 쓰고 기록하는 행위’에 주어졌던 의미를 살려낸 작품으로 ‘위안부’ 재현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영화는 “민원 왕” 옥분 할머니(나문희)와 원칙주의자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의 우정을 다룬 코미디를 표면적으로 내세웠지만, 영화가 실제로 집중하고 있는 것은 미국 연방회의 일본군‘위안부’ 사죄 결의안이 통과되었던 2007년 미 하원 의회 공개 청문회였다. 민원 왕 옥분은 이 청문회에서 공개 증언하기 위해 영어를 배워야 했고, 민재를 자신의 영어 선생으로 찍으면서 사건과 사고가 펼쳐진다. ‘위안부’ 피해자의 말하는 행위 그 자체가 영화를 추동하는 모티브이자 에너지이며 사건이고 주제인 셈이다. 영화는 한국 영화사상 가장 제목을 잘 지은 작품으로 꼽혀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영화 제목인 <아이 캔 스피크> 안에 줄거리뿐만 아니라 주제가 정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2017) 포스터 ©리틀빅픽처스

 

‘허스토리언’의 탄생과 남겨진 과제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에 걸쳐 진행된 관부재판 과정을 그리고 있는 <허스토리> 역시 제목을 통해 영화의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했다. 이 작품의 타이틀 크레딧은 <히스토리(History)>로 시작된다. 이어서 영화는 ‘그의(His)’를 지우고 그 자리에 ‘그녀의(Her)’를 다시 써넣으면서 남성 중심의 역사 서술을 바로잡아 여성 중심으로 재기술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여성들의 삶 속에서 쌓인 이야기가 어떻게 ‘역사’가 되는지 보여주고 싶었던 셈이다.

타이틀 크레딧에서 선언하고 있는 것처럼, 영화는 다른 어떤 ‘위안부’ 영화보다 여성의 관점에서, 그리고 페미니즘적 서사-이미지 구성을 통해 이 주제에 접근하려고 노력했다. 강간을 볼거리로 만들어버리는 재현을 피하고, 여성들의 주체성에 집중하며, 여성들 간의 관계를 구축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영화가 많은 부분을 재판정에서의 증언 장면에 할애하고 있는 것도 이런 문제의식 안에서였을 터다. 민규동 감독의 여러 인터뷰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허스토리>는 지금까지 페미니스트 비평이 ‘위안부’ 재현에 대해 고민해 온 내용을 세심하게 참조하면서 영화의 서사와 이미지를 쌓아 올렸다. 이 작품은 일종의 ‘교본’과도 같은 작품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교본이 정답은 아니고, 언제나 ‘좋은 작품’인 것도 아니다. <허스토리>는 아쉽게도 (그 자체로 이미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을) 페미니스트 비평이 그려놓은 서사-이미지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질문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어째서 여전히 ‘위안부’ 피해자의 재현은 소녀-할머니의 이분법 속에 갇혀있는가.” 잠시 <눈길>로 다시 돌아가 보자면,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문 성숙한 어른으로서의 종분이었다. 이런 평가에 대해 <눈길>의 유보라 작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애초에 <눈길>을 기획할 때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생존해 돌아온 여성들이 30~40대가 되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고, 결국 소녀-할머니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만약 처음부터 그냥 ‘할머니’ 캐릭터를 상상했다면, 나 역시 상처받거나 분노에 찬 캐릭터를 상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분들이 살아온 삶에 대해 리서치하고 생각하고 상상해 보니, 종분과 같은 두터운 맥락을 가진 캐릭터를 만들게 되었다.”

‘상상력’의 문제란 이런 것일 수 있다. 즉각적으로 손쉽게 주어진 익숙한 이야기가 아닌, 오랜 고민과 성찰 안에서 등장하는 ‘발견되지 않았던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것. 그런 ‘새로운 이야기’야말로 역사를 구성하는 또 다른 관점을 제공해 줄 터다. 그렇다면 문득 궁금해진다. ‘위안부’ 피해자의 30~40대를 재현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던 상황”이란 과연 무엇일까? 바로 그곳에 한국사회의 한계가 놓여있는 것은 아닐까.

<허스토리>는 영화와 여성 관객이 만나는 자리에서 매우 흥미로워졌다.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한국 영화의 남성 중심성에 지친 청년 여성 관객들은 새로운 영화를 찾아 헤맸다. 2018년에 <미쓰백> 팬덤 ‘쓰백러’와 <허스토리>의 팬덤 ‘허스토리언’의 등장은 이런 흐름 위에 있었다. 허스토리언은 단체관람과 티켓 구매 등을 통해 관객 운동을 펼쳤고, 이는 배우 김희애의 팬덤 형성으로도 이어졌다. 그들은 가부장제의 폭력을 예민하게 인식하면서 ‘파워하우스 여성 영웅’인 문정숙(김희애)에 열광했다. 이렇게 새로운 관객이 등장한 것이 새로운 상상력의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그 관객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장 안에서 대중 ‘위안부’ 서사는 무엇을 갱신해야 하고 갱신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언제나 형성 중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상상력의 여정에는 종착지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 <허스토리>(2018) 포스터 ©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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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손희정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연구원. <페미니즘 리부트>, <성평등> 저자. <여성괴물>, <호러 영화> 등을 번역했고, <그럼에도 페미니즘>, <페미니스트 모먼트>, <대한민국 넷페미사>, <그런 남자는 없다>, <지금 여기에서의 페미니즘X민주주의>, <을들의 당나귀 귀> 등을 함께 썼다.

jay.sohn@iclou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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