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내일 - 나눔의 집 김대월 학예실장 인터뷰

김대월나눔의집 학예실장

  • 게시일2019.10.08
  • 최종수정일2024.04.09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고자 만들어진 <나눔의 집>은 1992년 개소 이래 ‘위안부’ 문제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정부에 등록된 생존 ‘위안부’ 피해 할머니는 총 스무 분. <나눔의 집>에 거주하고 계신 할머니는 여섯 분. 안타깝지만 우리는 피해자 할머니들이 한 분도 남지 않은 날을 준비해야만 한다. <나눔의 집> 역시 마찬가지다. <나눔의 집>이 앞으로도 후손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는 데 앞장서는 기관으로 자리하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나눔의 집> 김대월 학예실장은 젊은 연구자임과 동시에 활동가다. 그를 만나 일을 통해 만났던 할머니들의 일상과 연구자 및 활동가로서 개인적인 목표, 그리고 <나눔의 집>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들어보았다.

 

나눔의 집 김대월 학예실장(오른쪽) ©김대월

 


고대사 전공자,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다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나눔의 집에서 학예실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대월이라고 합니다. 박물관 전시 총괄, 할머니들 유품 보존관리 등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할머니의 내일 展> 전시 기획 총괄을 맡고 있고요, 국민대학교 국사학과에서 박사과정 중입니다. 


Q. 나눔의 집에서 일하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원래 전공은 고대사예요. 고대사를 주제로 석사까지 마치고 학원 쪽 일을 했었어요. 학원에서 7, 8년 정도 일을 하다 보니 강사라는 직업에 회의가 들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공부하려고 박사과정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일본군‘위안부’ 관련 수업을 듣게 되었어요. 사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대략적인 것만 알고 있었지, 깊이 알지는 못했거든요. 공부를 하다 보니 박사 논문 주제를 여성독립운동가 혹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생각을 할 때쯤 정말 우연히 <나눔의 집> 채용공고를 본 거예요. 그래서 혹시나 하고 넣어봤는데 면접을 보러 오라 하더라고요. 그리고 일사천리로 이렇게 됐어요. 


Q. <나눔의 집>은 활동의 성격이 강한 곳이잖아요. 김대월 선생님 같은 연구자가 <나눔의 집>에서 일하게 된 경위가 궁금합니다.  

저도 합격하고 되게 의아했어요. 이 분야에서 활동한 경력이 거의 없잖아요. 그런데 들어와 보니까 그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나눔의 집>에 있으면 돈을 쓸 일이 없어요. 돈을 쓸 수 있는 곳이 없으니까요. 그만큼 외진 곳에 있어요. 차가 없으면 출퇴근도 어렵죠. 그리고 <나눔의 집> 특성상 주말에 일해야 해요. 월급은 적고요. 그러니까 많은 사람이 굳이 오려고 하지 않죠. 면접 봤을 때 제 역량에 관한 질문보다 주말에 일을 할 수 있는지, 출퇴근은 잘 할 수 있는지를 먼저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근처에 방 하나 얻겠다고 했죠. (웃음) 


Q. 어려운 결정일 수도 있는데 비교적 쉽게 생각하셨네요? 

저한텐 전혀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어요. 시골에서 사는 것도 좋아하고 낚시도 좋아하고 그래서요. 



<할머니의 내일 展>
‘퇴근’ 후 할머니의 일상을 보여주다 

Q. <나눔의 집>에 입사하신 지 1년 남짓 만에 학예실장이 되어 전시총괄을 맡게 되셨는데요, 일하실 때 특별히 중점을 두는 부분이 있나요? 

저는 전시와 진열은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전시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메시지 없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단순히 펼쳐놓는 것은 진열에 불과하죠. 기존 <나눔의 집>은 진열 위주였어요. 그래서 여러 번 건의를 했더니, ‘그럼 네가 해라’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하나둘 맡다 보니 이렇게 되었지요. 


Q. 전시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셨나요? 

할머니를 피해자로만 보지 말자는 거예요. 인터넷에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이름을 검색하면 할머니가 수요집회에 나온 모습, 힘차게 팔 휘두르는 모습, 그리고 할머니에게 망언했던 사람들… 그런 이미지들만 나와요. ‘출근’하셨을 때의 모습만 나오는 거죠. 그런데 저는 주로 ‘퇴근’했을 때의 모습을 보거든요. 제가 아는  할머니의 모습과 언론에 나오는 모습이 너무 다른 거죠. 그래서 ‘퇴근’했을 때의 할머니 모습도 사람들이 알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할머니들을 피해자로만 보지 말고 하나의 인간으로 봐달라는 거죠. 지금 전시하고 있는 <할머니의 내일 展>에서는 이런 점들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평범하지 않은 아픔을 가지고 있을 뿐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다’ 그게 전시의 모토예요. 

Q. 할머니들의 활동을 ‘출근’이라고 표현하셨는데,  특별히 그렇게 표현하시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수요집회를 나가시고, 인터뷰하는 등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인권활동가라는 직업으로서의 활동이 ‘출근’이라면, 그 밖의 모든 활동은 ‘퇴근’ 후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 일상을 보내세요. ‘출근’했을 때의 모습은 보통 할머니의 24시간 중에 30분도 안 되는 시간이에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출근’했을 때의 모습만 보고 ‘퇴근’ 후의 모습은 보지 않죠.  

‘퇴근’ 후의 할머니들의 일상은 다른 보통 할머니들과 똑같아요. 평소에는 저랑 고스톱도 치시고요, 과자 선물이 들어오면 서로 시샘도 하고 그래요. 어떤 할머니는 커스터드가 먹고 싶은데, 다른 할머니에게 드리면 화도 내시고 그러죠. 자기는 왜 안 주냐면서요. (웃음) ‘월’ 자 발음을 잘 못 하셔서 저를 “대열이~” 이렇게 부르시는데, 찾아가면 “아이스크림 좀 먹자” 그래요. 그럼 저는 “그래? 할머니, 그러면 한두 시쯤 나갈까?” 하고요. 저는 할머니들과 이런 일상을 보내고 있는데, ‘출근’하는 모습만 본 사람들이 <나눔의 집>에 방문하면, ‘할머니 어떻게 그런 고생을 버티셨어요’ 하면서 펑펑 울고 가세요. 그러면 할머니도 의아해하죠. ‘쟤는 왜 울지?’ 


Q. <할머니의 내일 展>에서는 주로 ‘퇴근’ 후의 할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겠군요?

그렇죠. 할머니들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만 기억되기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하나의 이웃으로, 사람으로 봐주길 원했어요. 다행히도 서울에서 전시했을 때 깜짝 놀랄 정도로 반응이 좋았어요. 전시에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할머니들을 피해자로만 기억해서 죄송해요’ 이런 말들이 쓰여 있더라고요. 블로그에도 전시 내용에 공감한다는 이야기도 많이 올라왔어요. 


Q. 현재 독일에서도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어요. 

네. 독일 베를린에서 전시를 하고 있어요.  코리아협의회라고 <나눔의 집>과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독일의 시민단체가 있어요. 그 단체의 도움으로 독일에서 전시를 하게 되었는데, 국내 전시 내용과는 조금 달라요. 독일에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방향으로 전시를 구성했죠. 나치와는 어떤 점이 같고 또 다른지를 보여주고, 할머니들이 해방 이후 어떻게 생활하셨는지 그런 것들이요. 작은 전시장이라 사람이 별로 안 올 줄 알았는데 오프닝 때 100명 가까이 오셨어요. 전시장이 꽉 차서 밖에 줄을 설 정도였어요. 독일 사람들이 인권에 참 관심이 많다는 걸 느끼게 되었죠. 

 <할머니의 내일 展> 리플렛 표지

어제 없는 오늘 없고, 오늘 없는 내일이 없듯이 ‘내일’은 과거 현재 미래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제를 통해 오늘을 보며 내일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나눔의 집>은 <할머니의 내일>을 통해 피해자가 아닌 인간으로서 할머니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하여 함께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할머니들은 항상 피해자라는 수식어와 함께 피해자로서의 모습만이 노출되어왔습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할머니는 안타까움과 연민의 대상으로 기억될 뿐 한 명의 인간으로서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지 못합니다. 

할머니는 우리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기쁜 일에는 웃고, 슬픈 일에는 눈물을 보이며, 작은 일에도 토라지고 샘을 내는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다만 평범하지 않은 아픔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20년 넘게 할머니들이 생활해 오신 <나눔의 집>에는 할머니의 喜怒哀樂(희로애락)과 수많은 추억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에 <나눔의 집>에서는 이번 전시를 통해 할머니들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아닌 우리와 똑같은 사람임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할머니의 내일 展> 리플렛 내용 중 

 

 

피해자로 박제될 수 없는
보통의 일상 


Q. <나눔의 집>에서 할머니들의 평소 스케줄은 어떻게 되나요? 

아침 식사하시고 직원들이랑 좀 노시고 프로그램도 하시고요. 외출 프로그램 있으신 할머니들은 외출하시고 병원 가실 할머니들은 병원 가시고 그래요. 점심시간 때 할머니 방에 가면 민원이 많으세요. 남대문시장에 가야 한다, 옷을 사야 한다, 그러면 체크해놨다가 스케줄 봐서 모시고 가요. 저는 사회복지를 전공하지 않아서 잘 몰랐는데 꽃꽂이, 마늘 까기, 멸치 똥 따기, 이런 소소한 활동들이 할머니들의 활력을 더해준다고 하더라고요. 얼마 전에 이옥선 할머니는 김치도 직접 담그셨어요. 93세이신데요. 배추를 배차라고 하시는데, ‘배차를 소금에 절여라.’ 해서 소금에 절여드렸더니 ‘고춧가루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고추가루 사다 드리고. ‘기름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참기름, 들기름 사다 드리고. 할머니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최대한 하려고 노력해요. 

그리고 저는 그걸 기록하는 일을 해요. 할머니가 남대문시장에 가면 옷 사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고 기록해서 서버에다가 ‘201X년 OO 할머니 남대문시장 나들이’ 폴더를 만들어서 저장하죠. 이런 일상의 모습들을 데이터베이스화 해놨다가 이번 <할머니의 내일 展> 전시에서 썼습니다.


Q. 지적해주셨듯 할머니들은 증언 이후 줄곧 ‘출근’의 모습만 언론에 비춰짐으로써 그들 또한 보통의 사람이란 사실이 가려진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본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이시나요?

받아들이시는 것 같아요.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의 개인적인 모습을 알리는 것을 내려놓으신 것 같기도 해요. 부산 이옥선 할머니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활동을 통해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으시는 것 같아요. 이옥선 할머니는 인터뷰를 하면 그다음 날에 컨디션이 좋아지세요. 반면에 속리산 할머니[1](대구 이옥선, 이하 ‘속리산 할머니’)같은 경우에는 나가서 쇼핑하셔야 힘이 나는 분이시고요.


Q. 일상에서의 말투나 화법이 언론에서 인터뷰할 때와 차이가 있을까요? 

똑같은 할머니도 있고요. 다른 할머니도 있고요. 이옥선 할머니가 두 분이 계시잖아요. 부산 출신 이옥선 할머니는 언론이 오면 좀 정제된 말투나 언어를 쓰시는데, 속리산 할머니는 평소랑 똑같이 말씀하세요.


Q. 최근에 한일 간의 외교적 갈등이 심화되었잖아요. 최근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요?

알고 계세요. 뉴스를 보니까요. 평상시에 뉴스를 보면서 부산 이옥선 할머니는 아베 집안의 역사가 안 좋다고 말을 하세요. 12.28 합의를 한 박근혜 대통령도 안 좋아하시고요. 속리산 할머니는 일본은 안 될 나라라고 하세요. 전쟁이 나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데, 갖가지 못된 방법으로 죽였다면서요. 그래서 그 죄가 있기 때문에 일본은 곧 망할 거다, 이런 식의 인식을 보이세요. 


Q.  최근에 소녀상을 테러한 한국 청년들이 <나눔의 집> 와서 반성도 하고 사죄도 하고 그랬는데, 화가 많이 나셨겠어요.  

그때 영상공개를 아주 일부분만 했거든요. 속리산 할머니가 너무 화를 내셔서요. 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앞으로 그러지 말라고 하면 되지, 뭐”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막상 그 사람들이 오니까 소리 지르시면서,  “일본한테 돈 받고 하는 거냐, 돈도 안 받으면서 거기서 천왕 만세까지 외치냐. 이놈의 새끼들”이라고 하면서 지팡이 집어 던지시고 엄청 화를 내시더라고요. 부산 이옥선 할머니도 화가 많이 나셨어요.  


Q. 사과하러 왔던 사람들이 반성하긴 했나요? 

네. 울기도 하고 자기도 할머니랑 자랐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면서 펑펑 울면서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그 중에 한 명은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었어요. 그래서 아버지랑 같이 왔어요. 아버지는 독립운동가 후손이시래요. 그러니까 더 속상해하시면서 무릎 꿇고 자신의 잘못이라며 싹싹 빌었죠. 

사과하러 오기 전에 확인 차원에서 제가 그 사람들을 따로 만났어요. 할머니들한테 무슨 위해를 가할지도 모르니까요. 이야기를 나눠보니까 이 사람들도 사회의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회 인식이라든지 좀 달라요. 어느 사회에서도 자기들을 받아주지 않는 거죠. 친구도 많지 않고요. 그런데 극우 집회에 가면 자기들을 대우해 준다는 거예요. 자기가 뭔가 투사가 되는 것 같고. 그곳에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자신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을 느끼는 거죠. 그러다 보니 인정받기 위해서 더 극한 발언과 행동을 하는 것 같다고 본인들이 이야기하더라고요. 우리 사회가 그들을 보듬어주지 않기 때문에 특정 세력이 그들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나눔의 집> 피해자 할머니 흉상

 

 

한국 사회의 2차 피해를
기록하고 싶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해서 연구자로서 개인적인 목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할머니들이 한국 사회로부터 당한 2차 피해를 기록해보고 싶어요. 증언집에는 ‘위안부’ 피해 이후의 삶에 대한 내용이 적어요. 아무래도 증언의 내용이 당시의 피해 상황에 집중되어 있으니까요. 아쉬운 부분이죠. 한국 사회 내에서 할머니들에게 가해진 2차 피해도 심각했는데 말이에요. 속리산 할머니 같은 경우에는 전쟁이 끝나고 고향인 대구에 돌아와서 보니까 그 동네에서 자기만 살아 돌아왔더래요.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이 와서 ‘왜 너만 살아서 돌아왔나, 내 딸은 어디 갔냐’ 물어보면서 매일 괴롭히더래요. 그렇게 돌아오고 싶었던 고향인데 6개월 만에 고향을 떠나셨어요. 아빠한테 말도 안 하고요. 걸어서 속리산까지 가서 그곳에서 평생을 사시다가 <나눔의 집>에 오셨어요. 할머니가 어렸을 적 국악을 배우신 적이 있었는데, 속리산에 관광객이 오면 장구를 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생계를 유지하셨대요. 할머니가 돈을 많이 버니까, 그때 스님이 그랬대요. ‘위안부가 무슨 돈이 필요하다고 저렇게 돈을 버냐’면서요. 

저는 이런 기록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논문 쓰려고 하는 주제도 한국 사회의 2차 가해예요. 1945년에 해방이 되었잖아요. 1946년까지는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등장해요. 그런데 1990년에 윤정옥 교수님이 한겨레 신문에 ‘위안부’에 관한 글[2]을 쓰기 전까지 약 45년 동안 일본군‘위안부’를 말하는 우리 사회의 목소리가 없었어요. 그럼 약 45년 동안 한국 사회가 이 문제를 몰랐냐는 거죠. ‘위안부’가 무슨 돈이 필요하냐고 말했던 그 스님도 ‘위안부’를 알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모른 척을 했다는 거죠.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에 증언을 하고 난 후에서야 갑자기 몰랐던 사실을 알았던 냥 되게 들끓었잖아요. 알고 있었으면서 침묵했다는 것도 2차 가해라고 생각해요. 

1991년 이후 한국 사회도 크게 다르진 않았어요. 그때만 해도 아직 할머니들이 젊으셨을 때니까 심리치료 등을 통해 피해자들을 신경 쓰고 살폈어야 했는데, 정부는 계속 돈 문제에만 집중했어요. 그리고 ‘위안부’ 문제를 한일 관계에서의 외교적 카드로만 이용하고요. 이렇게 할머니들은 개인이 아니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서만 대상화된 거죠. 이외에도 수많은 2차 가해가 있는데, 일본이 아닌 한국 사회의 내부 비판이 되어버려서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Q. <할머니의 내일 展>도 비슷한 맥락에서 기획된 거군요.

네, 맞아요. 학교 폭력 피해자, 성폭력 피해자 등을 피해자로서만 대상화해서 바라보면 안 되잖아요. 이런 인식들이 할머니들의 문제로 인해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인권 의식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있어요. 그들을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한 명의 인간으로 바라보아야 피해자들도 아픔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Q.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사례를 통해 한국 사회의 인권 의식이 좀 더 성숙해지시길 바라시는 거군요. 

뭐랄까. 한국에서 피해자라는 수식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잖아요. 그러니까 이 문제를 통해 성숙한 인권 의식을 바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은 거죠. 만약 한국 사회의 인권 의식이 충분히 성숙했다면, 애초에 <나눔의 집>은 필요하지 않았을 거예요. 굳이 이렇게 모여 살지 않고 각자의 영역에서 보통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계셨겠죠. 

Q. 언젠가는 <나눔의 집>에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한 분도 계시지 않을 때가 찾아올 텐데요. 앞으로 <나눔의 집>은 어떤 공간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개인적으로 <나눔의 퓨집>은 할머니들이 다 돌아가셔도 계속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위해서만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눔의 집>은 단순 요양 시설이 아니니까요. 현재 할머니들이 생활하시고 있는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박물관이에요. 할머니들 사진, 소품 등 모든 것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게 제 주장이에요. 2차 세계대전 피해자들이 공동생활하는 사례도 유례가 없을 뿐더러 그분들이 생활했던 공간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도 없거든요. 이런 부분에서 역사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각주

  1. ^ 편집자 주 : 나눔의 집에서는 두 분의 이옥선 할머니가 거주하고 있다. 언론을 통해 자주 소개된 부산 출신의 이옥선 할머니와 비교적 언론 노출이 적은 대구 출신의 이옥선 할머니다. 대구 출신의 이옥선 할머니는 본인을 속리산 할머니로 불리기를 좋아한다. 본 인터뷰에서는 할머니의 희망에 따라 속리산 할머니로 표기했다. 
  2. ^ 한겨례신문 1990년 1월 4일자. 윤정옥 교수의 ‘정신대 취재기’는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0010400289113001&editNo=4&printCount=1&publishDate=1990-01-04&officeId=00028&pageNo=13&printNo=507&publishType=0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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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대월

<나눔의집> 학예실장. 현재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할머니의 내일 展>의 총괄 기획을 맡았으며,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가운데 틈틈이 본인의 경험을 살려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특강을 하고 있다.

corea8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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