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위안부’문제 관련 한국 정부가 취해 온 조치와 미결 과제의 대응 방향에 대한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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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eated at2019.07.12
  • Updated at2022.11.28

일본군‘위안부’문제 관련 한국 정부가 취해 온 조치와 미결 과제의 대응 방향에 대한 전망  

 

2015년 12월 28일 한·일 양국 간에 극적으로 타결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이하 12.28 합의)가, 한국 정부의 일련의 조치를 거쳐 사실상 무용화(無用化)되었다. 이제 한국 정부는 일본과의 재협상을 거치지 않고 자체적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글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이어 강제동원피해배상문제로 한·일 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상황 속에서, 앞으로 한국 정부가 어떠한 방안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을지를 살펴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외교 현안으로 대두된 1991년부터 12.28 합의에 이르기까지 한국 정부가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취해온 제반 조치들과 12.28 합의 및 합의에 대한 국내의 비판 내용을 사실관계 위주로 정리해보고, 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12.28 합의에 이르기까지,
한국 정부의 조치사항 

1991년 8월 14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의 기자회견으로 그 이전까지 큰 관심을 끌지 못하였던 일본군‘위안부’ 피해문제가 한·일 양국에서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었다. 같은 해 12월 김학순 등 피해자 3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피해배상소송을 제기하면서(2004년 12월 일본최고재판소에서 원고 패소 확정) 이 문제는 한·일 외교당국간의 실무 회담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여, 결국 정상회담의 의제에도 포함되었다. 한국 정부는 1992년 1월부터 일본 정부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이에 따른 후속조치를 강구해줄 것을 촉구하는 한편, 자체진상조사를 거쳐 7월에 「일제하 일본군‘위안부’실태조사 중간보고서」를 발표하였다. 

1993년 3월 한국의 김영삼 정부는 도덕적 우위의 관점에서 일본 정부에 물질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스스로 구제한다는 방침에 따라 피해자 1인당 500만 원을 지원하였다. 그해 6월에는 ‘생활안정지원법’을 제정하고 피해자들에게 매월 일정액의 생활안정지원금과 의료비를 지급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일본 정부는 1992년 7월과 1993년 8월 두 차례에 걸쳐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하였으며, 1993년 8월 4일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의 담화(이하 고노담화)를 통해 구 일본군의 관여와 강제성을 인정하고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반성의 뜻을 표명했다. 그러나 담화내용에 피해자 배상문제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한 법적 책임은 이미 종결되었다는 입장이었다.[1]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1994년 6월 일본 총리에 취임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는 8월,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반성의 뜻을 나타내는 조치로서 민간 기금을 통한 ‘위로금’(償い金, 한국에서는 통상 위로금으로 번역하나 기금의 홈페이지 한글판에는 ‘사과금(atonement money)’으로 되어 있음) 지급 구상이 담긴 「평화우호교류계획」을 발표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1995년 6월 14일 이가라시 고조(五十嵐広三) 관방장관의 사업내용 발표에 이어, 1995년 7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약칭 ‘아시아여성기금’)이 설립되었다. 기금은 1년 간 모금활동을 펼친 후 1996년 8월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에게 일본 총리의 사과서한과 1인당 위로금 200만엔 및 300만엔 범위내의 의료·복지 지원금(일본 정부 예산)을 전달하는 해결방안을 제시하였다. 

한국 정부는 처음에는 일본 측이 자발적으로 마련한 이 제안에 대해, “당사자들의 요구가 어느 정도 반영된 성의 있는 조치”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2] 그러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의 강력한 반발과 뒤이은 국내 언론들의 비판으로 곧 입장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정대협과 다수의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 ▲책임자 처벌 ▲정부 배상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제안에 반대하였다. 외교부는 일본 외무성에 한국의 피해자 지원단체와 대화를 통해 이들의 요구가 수용된 새로운 해결방안을 모색할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1998년 3월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회피한 채 기금 방식의 문제해결을 고집하자 앞선 정부와 마찬가지로 일본 정부에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방침 하에, 피해자들에게 아시아여성기금 측이 제시한 위로금(200만엔)보다 많은 액수의 지원금을 자체적으로 지원하기로 하였다. 외교부는 정대협과의 협의를 거쳐 피해자들이 기금의 위로금을 받지 않겠다는 각서를 제출토록 한 뒤, 그 해 5월 피해자들에게 1인당 3,800만원을 지급하였다. 3,800만원은 정부예산 3,150만원과 정대협 모금 650만원이 합쳐진 금액이다. 기금 측 돈을 이미 받았거나(7명) 돈을 받기 위해 각서 제출을 거부한(4명) 피해자들은 지급 대상에서 제외되었다(추후 일본의 기금 측 인사는 총 61명의 한국 측 피해자에게 위로금을 전달하였다고 주장하였으나(이중 1명은 ‘배달사고’로 돈을 수령하지 못해 실제로는 60명에게 전달), 이를 확인할 방도는 없다). 

피해자들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자체지원이 이루어진 후에도 피해자들과 지원단체는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 등 자신들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게 피해자들이 수용할 수 있는 해결방안을 마련할 것을 지속적으로 촉구하였으나, 일본 측은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반복하면서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2005년 8월 한국 정부가 한일회담 문서를 전면 공개하였다. 문서공개에 따른 후속대책 논의를 위한 민관공동위원회(공동위원장 이해찬 국무총리, 이용훈 변호사)가 개최되었으며, 위원회는 회의 종료 후 배포된 보도 자료를 통해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 일본 정부, 군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일 양국 정부 간에 청구권협정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었는지에 관한 해석의 차이가 발생하자, 2006년 7월 일본군‘위안부’피해자 109명은 시민단체의 지원을 받아 “피해자의 배상청구권 소멸 여부와 관련해 외교통상부장관이 청구권 협정상의 양국 간 분쟁 해결을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기본권이 침해되었다”면서 헌법소원을 제기하였다. 

2011년 8월 30일  헌법재판소는 외교통상부장관의 행정 부작위가 위배된다는 결정(헌법재판소 부작위 위헌 결정)을 내림(2006헌마788)으로써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헌재 판결 후 외교부는 2011년 9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외무성에 일본군‘위안부’문제와 관련한 한일청구권협정 제3조상의 분쟁해결을 위한 외교협의를 요청하였다. 일본 측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2013년 2월 25일 취임한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식에 참석한 아소 다로(麻生太郞) 일본 부총리 접견 석상에서, “이웃나라인 한·일 간의 진정한 우호관계 구축을 위해서는 역사를 직시하면서 과거의 상처가 더 이상 덧나지 않고 치유되도록 노력하고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진심어린 이해가 있어야 한다”면서 ‘위안부’문제를 포함한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 측의 성의 있는 대응을 촉구하였다.[3] 그러나 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를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은 문제 해결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기는커녕 일본군‘위안부’ 동원에 대한 강제성을 부인하는 발언을 반복함으로써 한·일 관계는 악화되었다. 일본 외무성은 2014년 2월~6월에 걸쳐 ‘고노 담화’에 대한 검증을 실시하고, 6월 20일 “위안부 강제동원의 증거는 없고, 고노 담화는 한·일 간 정치협상의 산물이었다”는 검증결과를 발표함으로써 한국 정부와 피해자들의 또 다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의 대통령 취임 이후 1년이 넘도록 일본과의 정상회담이 개최되지 않는 전례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에 양국 외교당국은 경색국면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만이 아닌 다른 현안도 함께 다루는 ‘국장급 실무협의’를 개최키로 의견을 모았다. 2014년 4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총 12차례 회의가 개최되었다. 실무협의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방안에 관한 합의점을 찾지 못하게 되자,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과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 국가안보국장 간 고위급 협상이 개최되었다. 수차례 협상 끝에 극적인 타결이 이루어졌다.  

2015년 12월 28일 양국 외교장관이 「일본군일본군‘위안부’피해자문제에 관한 합의」를 발표하게 되었다. 청구권협정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입장만을 되풀이해온 일본 정부를 상대로 마침내 한국 정부가 새로운 해결책을 도출해낸 것이다.

 

12.28 한일 합의 1년 즈음한 국회-시민사회 공동 기자회견 ©참여연대

 

12.28 합의, 화해·치유재단 및
그에 대한 비판

12.28 합의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일본 정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총리가 사죄와 반성의 마음 표명 ▲한국 정부가 설립하는 재단에 일본 정부 예산으로 자금(추후 10억 엔으로 결정)을 거출, 양국 정부가 협력하여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 및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사업 시행 ▲앞의 조치가 착실히 실시된다는 전제하에 양국 정부는 이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하고,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 상호 비난·비판을 자제 ▲한국 정부는 주한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에 대해 관련 단체와의 협의 등을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합의에 대해 한국 국내에서는 정대협 등 피해자 지원단체를 중심으로 비판론이 제기되었으며 대다수의 언론도 비판에 동참하였다. 비판의 주된 내용은 ▲협상주체가 되어야 할 피해자가 협상과정에서 배제된 점 ▲그간 피해자들이 계속 요구해온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인정되지 않은 점 ▲일본 정부가 거출한 금액이 너무 적다는 점 등이었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합의에 따라 2016년 7월 28일 ‘화해·치유재단’을 설립하였고, 일본 정부는 8월 31일 10억 엔(약 108억 원)을 재단에 송금하였다. 재단은 피해자 치유 사업으로 2017년 12월말까지 생존 피해자 47명 중 34명에게 각각 1억원, 사망자 199명 중 58명의 유가족에게 2,000만 원을 지급하였다.

피해자와 유가족들에 대한 지원사업이 진행되는 가운데에도 12.28 합의와 화해·치유재단에 대한 비판은 계속 이어졌다.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고, 같은 해 7월 31일 외교부에 12.28 합의를 검토하기 위한 태스크 포스(이하 ‘위안부’ T/F)가 설치되었다. ‘위안부’ T/F는 5개월여의 검토 작업 끝에 12월 27일, ▲12.28 합의는 일본 정부의 책임인정, 사죄, 금전적 조치 등 면에서 과거보다 진전된 내용이 있었다고 할 수 있으나 ▲양국 외교장관의 공동발표로 이루어진 합의의 형식과 성격, 일본 측 구도대로 합의가 이루어진 점, ‘최종적·불가역적’ 표현, 소녀상 관련 언급 등이 한국 내에서 논란을 야기하였으며 ▲합의에 따라 한국 쪽이 취해야 할 조치(최종적, 불가역적 해결 확인, 국제사회 비난 및 비판 자제 등)를 피해자에게 알려주지 않았고 ▲돈의 액수에 관해서도 피해자 의견을 수렴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이들의 이해와 동의를 이끌어 내는 데 실패하였다는 비판적 결론이 담긴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T/F의 검토결과에 대한 후속조치로 2018년 1월 9일 강경화 외교부장관은 「위안부합의 처리 방향에 관한 정부입장」 발표를 통해 ▲일본 정부가 출연한 화해·치유재단 기금 10억 엔은 전액 한국 정부 예산으로 충당 ▲‘위안부’ 피해자 중심의 해결 방안 모색 ▲생존자 의사를 반영하지 않은 2015년 ‘위안부’ 합의로는 진정한 문제 해결 곤란 ▲그러나 일본 정부에 재협상은 요구하지 않을 방침 ▲과거사 문제의 지혜로운 해결과 한·일 미래지향적 협력, 노력, 병행 등의 입장을 밝혔다. 같은 해 9월 25일 뉴욕에서 개최된 한일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아베 총리에게 “위안부 피해 할머니와 국민의 반대로 화해·치유재단이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고 고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혜롭게 매듭지을 필요가 있다”고 함으로써, 정상 차원에서 재단을 정리하겠다는 입장을 일본 측에 전달하였다. 

외교부의 2018년 1월 발표에 대한 후속조치로 여성가족부는 같은 해 11월 21일 화해·치유재단의 해산을 통해 재단사업을 종료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였다. 2018년 10월 말 기준으로 57.8억원이 남은 재단의 잔여기금은 7월 양성평등기금 사업비에서 마련된 103억원(일본이 재단에 송금한 10억 엔에 해당되는 금액)과 함께 일본군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관련 단체 등의 의견을 수렴하면서 합리적인 처리 방안을 마련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어 2019년 1월 21일 재단에 대한 허가가 취소되었다. 이러한 한국 정부의 일련의 조치에 대해 일본 정부는 여러 경로를 통해 한국이 12.28 합의를 착실히 이행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재단 해산은 한·일 합의에 비춰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한국 측에 전달하였다.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 정부의 선택지

2018년 1월 강경화 장관이 천명한 대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와의 재협상을 배제한 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중심의 해결방안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한국 정부가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가능한 선택지로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여론을 환기시킴으로써 간접적으로 일본을 압박하여 일본이 스스로 새로운 해결방안을 제시토록 하거나 ▲피해자와 피해자 단체들이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그들이 원하는 국내적 조치를 성의껏 이행해 나가는 방안 등을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강경화 장관은 지난 2월 25일 제네바에서 개최된 국제인권이사회(UNHCR)에서의 연설을 통해, 김복동 할머니의 별세에 관한 소식을 전한 뒤 “전쟁 수단으로 벌어지는 성폭력을 철폐하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피해자, 생존자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며 이들이 결코 잊혀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 강 장관의 연설은 일본 정부의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왔다. 일본의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菅義偉) 관방장관은 2월 26일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인 해결을 확인한 한·일 합의는 정권이 바뀌어도 책임을 가지고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앞으로도 유사한 공방이 계속될 것이다. 극도로 악화되어 있는 한·일 관계와 아베 총리의 장기집권이 이루어지고 있는 일본의 정치상황 등을 고려할 때, 국제사회의 여론 환기를 통해 일본이 스스로 새로운 해결방안을 모색토록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성사 가능성도 희박해 보인다. 

일본이 이처럼 반발하더라도 현재 일본 정부의 로비로 ‘대화를 전제로 한 보류’라는 애매한 상태에 놓여있는 일본군‘위안부’ 기록물의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사업은 계속해서 추진해 나갈 필요가 있다. 전시 하 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인권침해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역사적 기록물을 국제 사회가 공유토록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한때 한국 정부의 공개적인 지원 하에 추진되었던 이 사업은 12.28 합의 이후 정부가 관여하지 않는 민간사업의 성격으로 전환되었으나, 12.28 합의가 무용화된 만큼 외교부, 여가부 등 관련 부처가 다시금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음은 국내적인 조치이다. 피해자들이나 지원단체들도 이제는 더 이상 일본 측의 성의를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피해자들이 원하는 해결방안 가운데 국내적으로 가능한 방안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이를 중점적으로 추진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 정부의 예산이건 일본 측이 제공한 돈이건 그간 상당한 금액이 피해자들에게 지원되어 왔기 때문에 더 이상의 금전적인 지원은 피해자들도 원치 않을 것이며, 사회적으로도 지지를 받기에는 무리가 있다. 금전적 지원보다도 피해자들이 더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이다. 이미 진행되고 있겠지만, 정부가 피해자와 지원단체를 만나 명예와 존엄 회복을 위해 피해자들이 구체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듣고 협의할 필요가 있다. 

최근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일본군‘위안부’연구회,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 함께하는 마창진 시민모임,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 함께하는 통영거제시민모임,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시민모임 등 5곳의 시민단체와 몇몇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국립 일본군“위안부”역사관(가칭) 설립을 위한 전국행동’을 결성하였다. 국립일본군‘위안부’역사관 건립에 관해서는 찬성과 반대의 의견이 혼재되어 있는 만큼[4], 공청회 개최 등을 통해 의견을 수렴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스물 한 분 남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시게 되면 일본군‘위안부’문제는 그저 우리의 아픈 기억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그간 우리는 일본의 사죄와 배상에 천착해 왔다. 이제는 일본군‘위안부’문제를 역사적 교훈으로 기려 나갈 수 있도록 우리의 시각과 접근 방식을 서서히 바꾸어 나갈 때가 되었다. 

각주

  1. ^ 외교부, 『일본개황』, 152쪽, 2015
  2. ^ 朝日新聞, 1995.6.15. 朝刊, “當事者の要求ある程度反映, 韓國外務省が評價”
  3. ^ 세계일보 인터넷판, 2013.2.26., “朴대통령 '日, 역사직시하며 과거상처 치유 노력해야'”
  4. ^ 『여성신문』, 2019.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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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유의상

37년 간의 외교부 재직 기간 중 15년 이상을 대일외교 분야에 종사하면서 과거사 문제, 독도 이슈 등을 직접 담당함. 주일본대사관 정무과장, 외교부 동북아1과장(일본담당), 국제표기명칭대사(독도, 동해표기 담당)등을 역임하였으며, 2016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함. 학위논문은 『대일외교의 명분과 실리』제하 저서로 출간(2016년 역사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