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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들 1부 -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추천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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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정신대연구회 편, 한울, 1993. 추천 편집위원 : 윤명숙(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조사연구팀장)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정신대연구회 편, 한울, 1993) 시리즈는 『중국으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 2권까지 포함하여 총 7권이 발간되었다. 이외에도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모리카와 마치코 저, 김정성 옮김, 아름다운 사람들, 2005)와 같이 한 사람의 생애사를 중심으로 출간된 증언집도 있지만,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책은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시리즈 중에서도 제1권이다. 한국 정부에 등록된 한국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총 240명이다. 이 중에서 2019년 기준, 증언집에 실라자 않았더라도 공개 증언이 확인되는 피해자는 총 183명이다[1]. 183명의 증언 중에 1993년 2월 초판이 발간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에 19명의 증언이 실려있다. 이 책에는 김학순을 필두로 김순덕, 황금주, 이용수, 문옥주, 강덕경 등의 증언이 실려있는데, 이 이름들은 이제 모두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 되었다. 책 초판이 나올 때만 해도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보다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 더 많았고, 책에는 이름이 가명으로 실려있던 피해자가 이후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 앞장선 경우도 있다. 꽤 오래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증언 내용에 집중하느라 본문과 함께 실린 피해자들의 옆모습 사진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새삼스레 옆모습 사진이 주는 쓸쓸함이 가슴에 사무치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책이 출간된 1990년대 초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집중된 한국 사회의 관심사는 진상규명이었다. 이에 따라 피해자들의 "생생한 체험담은 …(중략)…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을 밝힘으로써 새로운 문서자료의 발굴을 선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책 해설내용처럼, 당시 한국 사회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이들의 생애사로 접근하기 보다는 피해자들의 <증언집>이라는 점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증언집의 단점을 보완하여 피해자 각자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도록 편집된 것이 『역사를 만드는 이야기 – 일본군'위안부'여성들의 경험과 기억』(여성과인권, 2004)이다. 단점이 있음에도 굳이, 지금 증언집 1권을 추천하는 이유는 조국이 해방된 지 50여 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공개 증언을 한 김학순을 비롯한 피해자들의 목소리에서 90년대의 우리 사회는 어떤 이야기를 듣고자 했는지, 또 피해자들이 절박하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원점으로 돌아가 보았으면 해서이다. 각자 원점에서 느끼고 알게 되는 것이 무엇이든, 30여 년의 세월이 피해자들에게도 우리에게도 헛된 시간이 아니었음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2. 일본군 군대위안부 요시미 요시아키 지음, 이규태 옮김, 도서출판 소화, 1998. 추천 편집위원 : 윤명숙(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조사연구팀장) 1991년 김학순의 공개 증언은 우리 사회에 수많은 긍정적 파장을 일으켰다.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는 김학순이 1991년 12월 도쿄지방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하고 일본에 오기 직전 NHK와 진행한 인터뷰를 듣고 감동하여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게 되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요시미 요시아키는 1992년 1월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일본군이 '위안부' 징모에 직접 관여한 사실을 보여주는 공문서를 발굴한 연구자이다. 요시미 요시아키가 발굴한 자료 6점은 아사히신문을 통해 보도되었고, 보도 다음 날인 1992년 1월 12일, 일본 정부(총리 미야자와 키이치(宮澤喜一))는 군이 "관여"했음을 공식 인정하는 가토담화를 발표했다. 1995년 4월에 초판이 발간된 『종군위안부(従軍慰安婦)』(이와나미서점(岩波書店))에 앞서 1992년에 『종군위안부 자료집(従軍慰安婦資料集)』이 먼저 발간되었다. 자료집에는 해제에 갈음하여 「종군위안부와 일본국가」라는 글이 들어 있다. 내용은 총 10장 구성으로 1장 군위안소의 개설, 2장 종군'위안부'의 징집과 도항, 3장 육군 중앙의 군기 유지‧성병 대책, 4장 중국의 '위안부'‧위안소, 5장 필리핀의 '위안부'‧위안소, 6장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의 '위안부'‧위안소, 7장 인도네시아 지역의 '위안부'‧위안소, 8장 버마(현 미얀마)의 '위안부'‧위안소, 9장 남서태평양 지역의 '위안부'‧위안소, 10장 일본의 '위안부'‧위안소로 되어 있다. 글은 자료의 구성에 맞추어 이에 대한 해설을 겸하고 있다. 다만 『종군위안부 자료집』의 글이 일반 대중이 읽기에 쉽지 않은 전문서라면, 『종군위안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책 중 처음으로 출간된 대중서라고 할 수 있다. 『종군위안부 자료집』과 『종군위안부』의 집필 사이에는 3년 정도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종군위안부』에는 자료집에서 다루지 못한 그간의 연구성과가 반영되어 있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책이지만 1995년 8월에 출간된 『공동연구 일본군위안부(共同研究 日本軍慰安婦)』(오오쓰키 서점(大月書店))는 요시미를 비롯한 7명의 저자가 '일본의전쟁책임자료센터(日本の戦争責任資料センター)', '위안부 부회'에서 1년 정도 세미나를 한 결과를 책으로 묶은 것인데, 이때의 연구 결과가 『종군위안부』에 반영되어 있다. 『종군위안부』는 한국에서는 『일본군 군대위안부』(소화, 이규태 번역)라는 제목으로 1998년에 출판되었다. 일본군 위안소‧'위안부' 문제에 이제 막 관심을 가지는 입문 단계에서 읽으면 좋은 기초 서적이다. 3. 일본군 성노예제 :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상과 그 해결을 위한 운동 정진성 지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6. 추천 편집위원 : 김소라(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소장) 우리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해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이 문제가 우리 사회에 알려진 시기는 식민지와 점령지의 여성들이 '위안부'로 동원, 착취된 지 50여 년이나 흐른 뒤인 1980년대 후반이었다. 여성운동의 성장으로 피해자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귀와, 성폭력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이해가 생겨난 가운데 많은 피해자, 활동가, 연구자들이 '위안부' 문제에 관해 말해왔다.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어 자신의 경험을 증언하고, 활동가들이 서로의 곁을 지키며 이 문제를 국내외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며, 연구자들이 증언을 채록하고 자료를 발굴‧해석하며 일본 정부에 대응하고자 노력했기에 우리 사회는 '위안부' 문제에 관해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다. '위안부' 문제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역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운동의 역사에 관한 이해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2004년 출간 후 12년만인 2016년 개정판으로 출판된 『일본군 성노예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상과 그 해결을 위한 운동』은 이 같은 '위안부' 운동의 역사를 살펴보기에 좋은 입문서다. 이 책은 일본 정부와 군이 위안소를 설치하고 '위안부'를 동원한 과정과 사회 구조적 배경, 피해자 증언, '위안부'를 지칭하는 다양한 명칭들의 의미 등을 통해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실상을 보여준다. 동시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국내외 시민사회가 펼친 다양한 활동들을 소개한다. 특히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 UN 인권소위원회 위원과 UN 인권이사회 자문위원 등을 맡아 '위안부' 문제의 연구와 해결에 참여해온 저자의 경험 속에서 1980년대부터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이르는 '위안부' 운동이 폭넓게 다루어진다. 한국에서 시작되어 북한, 재외 동포, 일본, 아시아 피해국의 시민과 사회단체가 함께하며 형성된 국제연대, 이 과정에서 여성 인권과 평화구축의 문제로 확장된 의제는 '위안부' 운동의 역사가 단순하지 않으며, 사회운동이 '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실상을 파악하는 것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이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 갖는 의미를 질문하고, '위안부' 운동의 미래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좋은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4. 성노예와 병사만들기 안연선 지음, 삼인, 2003. 추천 편집위원 : 김선미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교육홍보팀장) 『성노예와 병사만들기』는 중일전쟁기부터 태평양전쟁 기간까지의 위안소 제도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여성학자인 저자 안연선은 이 책을 통해 위안소 제도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본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에서 만난 13명의 '위안부'피해자와 일반 사병, 장교, 군의관 등 옛 일본군 출신 생존자들의 구술을 통해 국가 차원, 젠더와 섹슈얼리티 차원에서 나타난 식민주의 권력의 맥락에서 '위안부' 제도를 명료하면서도 포괄적으로 드러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식민주의와 가부장제라는 특정한 맥락 아래에서 가해 남성인 일본군 병사와 피해 여성인 '위안부'에게 남성성과 여성성이 어떻게 강요되었는지, 일본의 식민주의와 한국의 민족주의가 민족 정체성을 어떻게 구성하고 재생산하였는지, 식민지 국가권력과 전쟁 폭력에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작동되었는지, '위안부' 제도가 일본을 제국주의 국가로 (재)생산하는데 어떠한 기여를 했는지 사유한다면 '위안부' 문제와 위안소 제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위의 책들 중 일부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자료센터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코로나19로 인해 개관이 연기됨에 따라 현재는 자료센터를 이용하실 수 없으며, 향후 자료센터를 개관하는대로 소식을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카이브814 바로가기 각주 ^ 여자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 2019년 6월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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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의 재현 〈1부〉 - 〈여명의 눈동자〉부터 〈허스토리〉까지,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재현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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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결>의 두 번째 좌담회의 주제는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의 재현'이다. 2015년의 ‘불가역적 합의’와 『 제국의 위안부』사태를 경유하여, 한국 사회에는 일본군‘위안부’ 담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일본군‘위안부’를 다룬 극영화나 다큐멘터리의 상영이 증가하고, 소설화되는 빈도도 높아졌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위안부’ 재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도 커졌다. 이번 좌담회는 이러한 현상에 대한 연구자들의 고민을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사회 : 허윤(부산외대 만오교양대학 교수) 패널 : 권은선(중부대 연극영화과, 영화평론가) / 오혜진(한예종, 문학평론가) / 김청강(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교수) <1부> - <여명의 눈동자>부터 <허스토리>까지,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재현전략 <2부> - '위안부'를 둘러싼 재현의 윤리, 어디까지 묘사하고 재현할 것인가 <3부> - 재현물로서 <허스토리>의 성공과 실패 <여명의 눈동자>부터 <허스토리>까지,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재현전략 허윤 안녕하세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의 두 번째 좌담회입니다.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 재현을 중심으로 좌담회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웹진 <결> 편집위원이고 부산외대에서 재직 중입니다. 참석해주신 선생님들은 중부대 권은선 선생님, 한양대 김청강 선생님, 한예종 오혜진 선생님이십니다. 그러면 일단 돌아가면서 인사하고, 선생님들께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나 혹은 재현 문제에 대해서 관심 갖게 되신 계기나 이유 등을 자유롭게 얘기해주시면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오혜진 저는 한국 근‧현대문학 연구자고요. 주로 식민지기 소설과 비평, 문화론을 공부했습니다. 식민지 문화론을 공부하다 보니, 한국 문학사를 통틀어 유독 너무 많이 재현되거나 혹은 거의 재현되지 않는 섹슈얼리티의 한 종류가 일본군‘위안부’의 섹슈얼리티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위안부’ 역사를 재현한 텍스트들을 최대한 찾아 구해 보면서, 그것에 개재한 정치적 쟁점이 뭔지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2015년 12월 28일에 있었던 이른바 “불가역적 최종합의”, 그리고 박유하 선생님의 저작 『 제국의 위안부: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뿌리와이파리, 2013)와 관련된 논쟁이 점화되면서 ‘위안부’ 역사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지고, 이를 바탕으로 한 대중 서사들도 눈에 띄게 늘어났죠. 이런 상황에서 ‘위안부’의 역사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지 돌아보게 됐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다툰다고 해결되는 문제도 아닐 테고, 더구나 ‘위안부’ 역사에 접근하는 여러 관점, 민족주의나 민족주의 비판, 여성주의, 탈식민주의 등을 서로 대치되는 사조들의 경합으로 이해한다면 곤란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재현과 재현물을 향유하는 행위 자체를 ‘정치적인 것’으로서 사유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재현의 윤리’, ‘재현의 정치’라는 말이 자명한 테제처럼 이야기되는데요. 어떤 소설이나 영화가 재현의 윤리에 어긋났다든지 충실하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할 때, 과연 그 ‘재현의 윤리’란 무엇이고, ‘재현의 윤리’에 충실하기 위해 소설이나 영화는 어떤 관점과 기술, 전략 등을 시도할 수 있는지 논의해보고 싶습니다. 김청강 안녕하세요. 저는 한양대학교에 있는 김청강이라고 합니다. 저는 1950~60년대 한국 대중영화를 가지고 박사 논문을 썼고, 그쪽으로 계속 공부를 해왔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우리 사회의 수면 위로 나온 건 1990년대 이후인데, 우연히 얼마 전에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다룬 영화들이 그 이전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거의 처음 알게 되었어요. 과거에는 ‘위안부’ 재현이 어떻게 되었는가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좀 찾아보고, 우리나라에서 재현된 것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재현된 것들도 찾아보면서 새로운 사실들을 좀 많이 발견하게 되었죠. 그래서 논문을 한 편 쓴 거고요(김청강, 「‘위안부’는 어떻게 잊혀졌나?-1990년대 이전 대중영화 속 ‘위안부’ 재현」, 『동아시아문화연구』 71, 2017, 149~193쪽). 방금 오혜진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저도 재현의 윤리라는 부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고, 재현의 윤리에 관해서는 '위안부'만의 문제뿐만 아니라 역사적 폭력, 식민지 폭력까지 확장해서 조금 더 생각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관점에서 '위안부' 문제를, '위안부' 재현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권은선 안녕하세요. 권은선입니다. 중부대 연극영화학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역할을 바꿔가며 오랫동안 일을 해왔습니다. 앞의 두 분처럼, 저도 '위안부' 문제 전문 연구가라고 말씀드리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제가 나와도 되는지 조금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아마 이전에 ‘위안부’ 영화의 재현과 관련된 논문 2편을 발표해서 이 자리에 저를 불러주신 것 같습니다(권은선, 「일본군 ‘위안부’ 영화의 자매애와 증언 전수 가능성」, 한국콘텐츠학회 논문지 17(8), 2018, 414~421쪽; 「‘용납할 수 없는 것’을 이미지화한다는 것의 의미」, 『여성학논집』, 34(1), 2017, 3~28쪽). 그 논문들은, <귀향>(조정래, 2016)을 보고 즉자적으로 몸으로 느낀 불편함과 분노에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제가 느낀 그 ‘문제적 관객성’을 영화 안에서의 시각적인 장치의 검토를 통해서 해명해보고 싶었어요. 아울러 그 영화가 구성해내고 있는 ‘위안부’ 이슈에 대한 공통감각과 정치적 효과가 적실한 것인지 규명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 연구를 시작했던 것이고, 그 연장 선상에서 계속 고민하는 중입니다. 허윤 저는 최근 일본군‘위안부’ 재현에 대해 사회적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2015년 이후에 조정래 감독의 <귀향>(2015), 이나정 감독의 KBS 특집극 <눈길>(2016)이 영화로 편집이 되어서 2017년에 개봉을 했고, 김현석 감독의 <아이 캔 스피크>(2017), 민규동 감독의 <허스토리>(2018)에 이르기까지 상업 영화로 극장에 개봉한 영화가 4편 정도 되고요. 그다음에 2016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일본군‘위안부’ 쟁점 섹션으로 다뤘었고, 2017년 DMZ 영화제에서 이대 한국여성연구원과 같이 다큐멘터리 영화제를 진행했고, 2018년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위안부' 기림일 제정을 맞아서 일주일간 특별전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김숨의 소설 연작이 있죠. 『한 명』(현대문학, 2016), 『흐르는 편지』(현대문학, 2018)와 증언소설 『(김복동 증언소설)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현대문학, 2018), 『(길원옥 증언소설)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이 있는가』(현대문학, 2018) 두 편이 있습니다. 제가 자료를 찾다 보니까, 지금 문학과 영화 장에서 일본군‘위안부’라는 소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선생님들 공통으로 <귀향> 얘기들도 해주셨는데, 최근에 일본군'위안부' 재현물의 특징이나 흐름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방금 설명한 것처럼 <귀향>이 크라우드펀딩으로 성공을 거두고 관객 수 300만을 넘어섰다는 것이 큰 기점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당연히 중요한 일이고 역사적으로 재현해야 할 책무가 있다는 것이 2015년 이후에 강화되면서 텍스트들이 쏟아지고 있는데, 치열하게 비평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약간 '재미는 없지만, 만듦새는 훌륭하지 않지만, 의미 있는 텍스트'라는 말이 최근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재현한 작품들의 큰 특징이 아닐까 싶습니다. 네이버 댓글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천만이 봐야 하는 영화”라는 식으로 설명이 되지, 그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비평하려고 하는 작업은 별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죠. 오혜진 '위안부’ 역사가 서사화되기 시작한 게 대략 해방 직후라고 하면, 그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위안부’ 역사를 재현하는 방식에 분명 변화가 있겠죠. 최근만 보더라도 확연한 변화가 느껴집니다. 최근 ‘위안부’ 역사를 다루는 대중서사의 공통적인 전제는 이혜령 선생님께서 지적하셨듯, 일본군‘위안부’를 국가에 신고‧등록된 ‘위안부’ 피해생존자라고 한정하고, 그 연로한 피해생존자들이 모두 사망하기 전에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입니다. 이때 ‘위안부’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있는 존재로 여겨지죠.[1] 그런데 실제로 조선인 ‘위안부’의 수는 2만 명 설부터 20만 명 설까지 있을 만큼 그 규모를 ‘확정’할 수 없다는 게 특징인데요. 그렇다면 ‘위안부’의 역사를 산정 가능한 특정 당사자의 문제로 규정하는 발상에는 문제가 있죠. ‘위안부’의 역사를 ‘위안부’였던 이들의 문제로 축소하는 것이 ‘위안부’ 역사를 역사화하는 오늘날의 한 경향이며, 그것의 정치적 효과를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현재 이렇게 ‘위안부’ 문제를 산정 가능한 피해생존자들의 문제로 한정하니, 이 ‘피해생존자’들과의 직접적 연결을 강조하는 것이 곧 ‘위안부’ 역사를 다루는 텍스트들에 매우 중요해집니다. ‘위안부’에 ‘빙의’한다거나, 피해생존자들의 ‘증언’으로 서사를 갈음하는 재현방식이 선호되죠. 그렇게 할 때 ‘위안부’ 역사를 다룬 서사의 당위성과 윤리성이 담보된다고 믿는 경향이 짙어집니다. 이는 비단 ‘위안부’ 문제뿐 아니라 광주항쟁 등과 같은 역사적 폭력을 재현하는 최근 대중 서사에서 널리 확인되는 경향입니다. 광주항쟁을 재현해 평단의 호평을 받았던 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창비, 2014)의 재현전략도 바로 그것이었죠. 이런 재현전략이 반드시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것이 ‘위안부’ 문제를 역사적‧정치적‧미학적으로 사유하는 최선의 방식인지 질문해볼 필요는 있습니다. 이런 재현전략이 선호되는 원인을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겠죠. 허윤 선생님의 논문에서 지적된 대로, ‘재현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폭력을 재현하는 데 따르는 부담을 덜기 위해 당사자들의 재현(증언, 기록)으로 재현 불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덜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사자들과 윤리적‧정치적으로 연대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고, 즉 일종의 ‘진정성의 정치’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고요.[2] 또는 반대로, ‘위안부’ 역사를 후대 시민사회의 문제로 사유하기보다는, 지지 가능한 특정 존재를 ‘당사자’라고 규정함으로써 사실 ‘위안부’를 비롯한 식민의 역사를 자기 문제로부터 분리하고 싶은 욕망의 반영이라고도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이런 것들을 다각도로 사유하는 게 ‘재현의 정치’를 사유하는 한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예컨대 식민지기에 ‘위안부’의 역사를 직접적으로 다룬 서사는 거의 없었고, 해방 직후에 우리 민족이 겪은 수난으로서 ‘위안부’의 역사를 다룬 소설들이 조금 등장합니다. ‘동네의 아는 처녀가 일본군에게 끌려가 어디에 다녀왔다더라’라는 식이죠. 이때의 화법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빙의하려는 최근 서사의 전략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죠. 김청강 저는 과거에 어떻게 재현이 되어왔는가를 조금 살펴봤기 때문에 그 추이를 좀 본다면, 지금은 피해 생존 할머니들이 계시고 그 할머니들이 운동을 사실 꽤 오랫동안 해오신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 자장 안에서 이야기가 되고, 그랬던 것에 비해서 그 이전에, 그러니까 운동화 되기 이전에 '위안부'를 표상하는 것은 사실 피해자의 입장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그게 체화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더라고’ 돼있기 때문에, 재현들이 사실은 굉장히 거리감이 있죠. ‘위안부’들이 계속해서 나오기는 하지만, 굉장히 추상적으로 나오는 거죠. 어떤 생생한 피해자로서의 목소리 같은 것이 드러나지 않는, 피해를 얘기하지만, 피해자의 목소리는 없는 그런 재현의 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특히 영화로는 1960년대에 나왔던 <사르빈 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가 '위안부'를 드러낸 가장 첫 번째 영화인 것 같은데요. 이 영화 자체가 굉장히 독특한 영화예요. 1965년에 만들어졌고, 당시 한일협정이 체결되면서 한일 간의 문제, 혹은 식민지에 대한 기억을 사회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허용되는 분위기에서 이 영화가 나왔습니다. 남자주인공은 버마전선으로 파견된 장교이고, 거기에서 ‘위안부’를 처음 만나요. 그런데 영화에 '위안부'가 나오는데 그게 어떻게 형상화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 것 같아요. 그래서 '위안부'가 나오는 방식이 유엔 마담 같은 미군 ‘위안부’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지금은 다 한복을 입고 있고, 민족의 피해자라는 모습으로 나오는 것에 비해서, 1960년대 영화에는 당시에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위안부’의 모습, 그러니까 미군 ‘위안부’의 모습이 영화에 재현되고 있었던 거죠. 피해자의 직접적인 진술이라든지 증언이라든지 이런 것이 없기 때문에 '위안부'가 있었고 피해가 있었다, 그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다는 것은 표현이 돼있지만, 그게 나의 목소리를 가지고 나의 피해를 증언하는 그런 방식과는 대단히 달랐고, 그래서 거리감이 있는 재현들은 쭉 지속이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수용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굉장히 그 맥락들이 달라집니다. 일본인이 재현하는 조선인 '위안부'라든지. 1960년대에 스즈키 세이준의 <춘부전> 같은 경우에는, 원래 <춘부전>이 1947년인가? 그때 다무라 다이지로의 소설에 기반한 건데. 거기에선 주인공이 조선인 여성이었죠. 근데 당시에는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오락물로 소비되는 맥락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굉장히 성적으로 대상화된 모습으로 나오는 거죠. 일본군 병사의 애인들, 이런 식으로 일본 사회에서 유통되었던 것이 1960년대에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를 보면 그 주인공이 일본 여성으로 바뀌어요. '위안부'이긴 한데 일본인. 그리고 거기에 조선인 피해 ‘위안부’ 여성이 등장하는 거죠. 어떻게 보면 굉장히 독특한, 스위칭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이 <춘부전>이 한국에서 <여자 정신대>(나봉한, 1974)라는 영화로 다시 리메이크될 때는 다시 조선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이게 또 스위칭이 일어나는 거죠. 그러니까 재현이라는 것이 그 당시에는 피해자의 목소리라는 것이 증언되지 않았기 때문에, 재현의 코드들이 계속 피상적으로 스위칭되면서 만들어졌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거기에 더 진정성이 있거나, 개인의 목소리나 복잡한 목소리들이 들어가 있지 않고, 코드가 스위칭 되면서 순환되는 그런 형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왼쪽부터) 권은선, 김청강, 허윤, 오혜진 권은선 저는 주로 최근에 생산된 대중영화를 눈여겨보고 있는데요. <귀향> 이후에 눈에 띄는 어떤 특징들이 있습니다. <귀향> 이전에 군 '위안부' 소재를 다룬 대중 서사들에는 일본 군인이나 조선인 남자와의 이성애 로맨스가 반드시 주요 서사적 요소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귀향> 이후에는 이성애 로맨스가 탈각되고 여성들 간의 자매애, 혹은 우정이 강조됩니다. 그것은 ‘유령과 함께함’의 형태를 취합니다. 위안소에서 돌아오는 길에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 그래서 <눈길>에서처럼 유령이 되어 계속 함께하거나 <귀향>에서처럼 영매와 빙의를 통해 유령을 데려오기도 하고요. 이는 '위안부' 증언 구조의 한 특성과 부합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다른 사람(이미 죽은 자, 영혼)을 대리하여 증언한다’는 감각입니다. 또 다른 서사적 특징으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세대 간 배치의 문제입니다. '위안부' 할머니와 후속 세대 인물 간의 관계, 우정이 서사 장치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세대 간 배치는 ‘증언 전수’ 가능성과 후속 세대의 책임의 문제를 함의합니다. <귀향>의 정민(강하나 분) 같은 후속 세대 인물은 그야말로 몸을 내어주는 (빙의) 매개체 차원에 머물러 있지만, <눈길>에서 옆집에 거주하는 ‘헬조선’의 소녀나 <아이 캔 스피크>의 구청 직원 청년은, 텍스트 내에서 ‘위안부’의 증언을 듣고 책임감을 느끼는 후속 세대의 형상화입니다. 그리고 허윤 선생님이 언급하셨던 것처럼, 일본군‘위안부’ 서사가 지금 대중 서사로서의 가능성을 열심히 탐색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특히, 이는 <귀향>의 360만 관객 동원에 힘입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장르적으로 보면 <아이 캔 스피크>는 (로맨틱) 코미디의 요소가 강하게 들어가 있고, <허스토리>는 일종의 ‘법정 멜로드라마’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 영화에서 미 하원과 일본 법정에서 수행하는 일본군‘위안부’의 연설 장면은, 마치 1950~1960년대 한국 영화사에 등장했었던 ‘고백하는 여자들’(근대적 여성 주체의 출현)의 귀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귀향>이나 <눈길>이 일종의 고통 전이, 그러니까 오혜진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빙의되는 감각’ 같은, 시각적‧서사적 장치에 의존했다면, <아이 캔 스피크>나 <허스토리>는, 이혜령 선생님이 말씀하신, ‘커밍아웃 스토리’ 이후, 공적인 장소에서의 운동가로서의 일본군'위안부'를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한편으로는 굉장히 대중적인 장르 서사로서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기도 하고, 기존의 축적된 담론을 대중적인 언어로 녹여내려고 하는 것들이, 최근 ‘위안부’ 영화를 둘러싼 흥미로운 지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청강 허윤 선생님이 최근에 쓰신 논문 제목이 「할머니와 소녀 그 사이의 여성들」인가요? 그 키워드가 보여주는 부분이 굉장히 명백한 거 같아요. 최근의 재현에서는, 운동가가 된 할머니의 삶과 동일시하는 방식 혹은 폭력이 재현됐던 그 순간 소녀들을 재현하는 방식. 1960년대나 그 이후에 재현됐던 건 다 성인 여성들이거든요. 성인 여성들이 주인공을 바꿔가면서 코드 스위칭이 되는데, 그에 반해서 2015년도 이후 최근에는 성인 여성의 경험으로 되는 것보다는 소녀에게 가해진 폭력, 그리고 현재 운동하고 있는 할머니들의 모습, 이런 것들이 강조되는 측면이 특징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허윤 30대 이상 세대에게 가장 강렬한 일본군'위안부' 재현의 서사가 <여명의 눈동자>(김종학, 1991)잖아요. 저도 초등학생 때 봤는데, 권은선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이성애 로맨스 코드가 굉장히 강렬해서 북한군을 사랑해서 비극적으로 죽는 여자라는 기억만 단편적으로 남아있습니다. 명절에 온 친척들이 다 모여서 <여명의 눈동자> 재방송을 봤던 거예요. 그런데 드라마의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채시라 씨가 하얀 조선옷을 입고 처연하게 등장했던 기억만 있습니다. 그때 일본군‘위안부’에 대해서 아무도 소녀를 떠올리지 않잖아요. 성인 여성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이게 세대 감각이 확실하게 있는 게, 20대 친구들에게 일본군'위안부' 표상에 대해 물으면, 100% 소녀상을 떠올리더라고요. 기억이 세대별로 분절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여명의 눈동자>는 1970년대 일간스포츠 연재작이잖아요. 소설은 1장부터 강간으로 시작해요.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런 작품이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보는 소위 ‘국민 드라마’였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좀 충격적이기도 합니다. 김청강 저도 말씀하신 것처럼 <여명의 눈동자>가 굉장히 충격적인 드라마였던 것만 기억에 남았다가, 논문을 쓰면서 1편을 봤는데, 1편이 딱 윤여옥(채시라)이 강간당하는 것으로 시작을 하는 거예요. 이게 어떻게 공공 드라마로, 이렇게 공중파에서 방송이 됐던가. 1990년대 초반의 젠더 감수성이라는 것은 정말 너무 놀라울 정도라는. 그리고 더 이상했던 건 뭐냐면, 저는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있었던 1991년도 이후, 적어도 그게 운동화 되기 직전이지만 그때는 그래도 조금 낫지 않았을까 기대했었거든요. 예를 들어서 1980년대보다. 1980년대는 영화가 너무 에로화됐기 때문에. 그런데 사실 가장 성적으로 착취하는 구도를 가졌던 건 1991년도 작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지영호)였어요. 그 감독 자체도 에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었고, 그러니까 소재적으로만 가져다가 정말 센세이셔널하게 보여주고자 했던 의도가 너무나 명백한 그런 영화였던 거잖아요. 그래서 공개적인 증언이 있었던 1991년도 당시에 ‘위안부’ 문제를 소재적으로 소비했다는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 어떤 폭력이 있었는가 궁금해하는 이런 식의, 여성들이 어떻게 당했지 그 모습이 어떨까? <여명의 눈동자>도 그런 맥락에서 소비되었을 것 같아요. (왼쪽부터) 권은선, 김청강 오혜진 ‘위안부’라는 역사적 존재가 해방 직후까지 ‘소문’의 대상으로만 전해져왔다면, 1991년 고 김학순 님의 증언은 ‘위안부’ 역사 재현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젖혔습니다. 그 증언의 장면이 있었기에, ‘위안부’를 ‘말하는 주체’의 형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최초의 미투’였다고까지 이야기될 정도죠. 이 증언을 계기로 수요집회 등 ‘위안부’ 문제를 ‘운동’의 문제로 볼 수 있게 됐고, 그래서 ‘싸우는 주체’로서의 ‘위안부’ 형상도 등장했습니다. ‘위안부’의 역사를 ‘민족의 수난’이라는 식으로 보던 관점에서 나아가 여성 인권의 문제로 사유하는 경향도 확고해졌죠. 최근 ‘위안부’ 재현 서사에서 새롭게 등장한 변수는 ‘시민사회’인 듯해요. 두 가지 방향인데요. 하나는 ‘위안부’를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라 현재 한국 사회를 함께 사는 ‘시민’으로서 그리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위안부’와 연대하는 ‘시민사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 영화 <눈길>에서 ‘위안부’는 단지 ‘소녀’나 ‘할머니’가 아니라, 일반 시민이자 다른 동료 시민을 보살피는 이 사회의 ‘어른’으로 등장합니다. 가족과 사회가 방기한 여성 청소년 ‘은수(조수향 분)’를 돌보는 유일한 시민이 바로 ‘종분(김영옥 분)’이죠. 이건 ‘위안부’였던 이들이 사회의 동정과 연민의 대상으로만 재현되던 그간의 경향과 다릅니다. 게다가 여성 청소년 은수는, ‘종분’이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말하는 첫 번째 커밍아웃 대상이죠. 국가와 사회에 대한 ‘커밍아웃’ 전에, ‘종분’의 이야기를 가장 먼저 들은 사람은 또 다른 사회적 약자이자 여성 시민인 ‘은수’였어요. <아이 캔 스피크>에서도 ‘옥분(나문희 분)’이 그저 사회에 숨어 조용히 움츠리고 사는 ‘피해자’가 아니라, 구청에 8,000건의 민원을 넣을 만큼 이 사회에 변화를 일으키고 싶은 열망이 강한 ‘시민’으로 묘사됩니다. 민원을 넣는 행위는 이 사회의 법과 제도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가능한 거잖아요. 지금까지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숨겨야 했던 것이 이 사회의 편견과 혐오, 불합리한 법과 제도 때문인데도 ‘옥분’이 사회와 제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는 존재라는 점은 의미심장한 설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이 캔 스피크>의 핵심 중 하나는 ‘옥분’이 증언할 수 있도록 돕는 구청 직원 ‘민재(이제훈 분)’의 역할이었죠. <허스토리>는 아예 주인공을 ‘위안부’ 피해생존자라기보다 그들의 증언을 돕는 ‘문정숙(김희애 분)과 여성단체들’로 설정했고요. 연대주체로서의 ‘시민사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거죠. 이런 최근의 경향은 ‘위안부’ 역사를 재현하기 위해서는 ‘위안부’가 경험한 고통을 ‘사실적으로’ 재현해야 한다는 그간의 인식과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귀향> 등의 사례를 보면, 여전히 ‘위안부’ 역사 재현의 핵심은 ‘위안부’가 당한 고통을 ‘실감 나게’ 재현해서 독자/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는 듯합니다. 이는 손희정 선생님의 언급대로, ‘위안부’ 경험을 가진 이들의 가장 큰 고통을 ‘강간의 고통’으로 고착[3]시키는 남근주의적 발상의 소산일 수도 있죠. 여기서 한나 아렌트가 소개한 루소의 ‘고통과 연민의 원광경’이라는 이야기를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루소는 ‘어머니 눈앞에서 야수에게 물어뜯기는 아이와 그 광경을 감옥의 창문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지켜보는 죄수’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해요. 이 이야기에서 시모코베 미치코는 세 가지 차원의 고통을 읽어냅니다. “찢기는 아이의 죽음에 이르는 고통, 자식을 짐승에게 물어뜯기는 것을 보고 있는 어머니의 비탄에 찬 고통, 그리고 그것을 목격하면서도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죄수의 고통. 이 중에서 연민compassion의 원형이 되는 것은 세 번째 죄수의 고통이다.” 아랍 페미니즘을 연구하는 오카 마리는 이 이야기를 정확하게 ‘위안부’ 문제에 대입해서 이야기해요. 야수에게 물어뜯기는 아이가 ‘위안부’이고,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어머니는 “성노예가 되었던 자신의 고통을 지금 증언하고 있는 생존 ‘위안부’ 여성들”이며, ‘감옥 속 죄수’는 야수에게 물어뜯기는 고통을 함께 체험하지는 않았고, 그에 대해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지만, 그것을 목격한 증인이 됨으로써 그 고통을 ‘분유’하는 존재. 그렇다면 과거에 ‘위안부’라는 고통의 역사가 있었다는 걸 알고 있으며, 그것을 없던 일로 만들 수 없다는 점에서 무력하지만, 대신 그 고통을 ‘분유’해야 하는 존재로서 후대의 시민들이 바로 그 ‘죄수’의 입장에 있는 것 아닐까요? 그렇게 이해할 때, 사건의 폭력성은 “타자의 고통에 의해 담보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압도적인 무력함, 그 고유의 고통에서 이야기되는 것이 아닐까”라고 오카 마리는 말합니다.[4] 저는 이 말을, ‘후대 시민들은 ‘위안부’ 역사에 대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바로 그 사실 자체가 고통’이라는 뜻이 아니라, 후대 시민들은 그 ‘무력함’을 고통의 역사를 사유하기 위한 조건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했어요. 그렇다고 할 때, 현재 ‘위안부’ 관련 대중 서사는 야수에게 물어뜯기는 존재들의 “몸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고통을 재현하는 데에만 주력할 뿐, 그 고통의 역사를 사유하는 이들이 짊어져야 하는 고통과 책무에 대한 상상은 지체돼 있죠. ‘위안부’의 역사를 피해당사자들이 생존해 있을 때 “해결”해야 하는(역으로 말하면, 피해생존자들이 모두 사망하면 종료되는) 문제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 존재로서 ‘나’의 역할을 성찰하게 하는 문제로서 ‘위안부’ 역사를 상상하는 재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위안부’ 역사 재현의 초점을 그렇게 이동해보면, 그건 ‘위안부’ 할머니에게 빙의하거나, ‘할머니’의 말을 대변한다는 식의 상상력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죠. <아이 캔 스피크>는 흥미로운 영화지만, ‘위안부’ 피해생존자의 가난과 고독, 침묵의 원인을 그녀가 ‘가족과 사회에게 버려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민재’와 그 동생이 옥분에게 ‘유사 가족’을 만들어주는 방식으로 끝나죠. 이런 발상은 권명아 선생님 책에 잘 설명됐듯, ‘근친성’ 혹은 ‘육친적 상상력’을 경유해서만 동정과 공감, 연대의 대상을 만들어내는 방식입니다.[5] ‘저 할머니가 우리 할머니였다고 생각해봐’라는 발상. 그런데 누군가의 ‘할머니’나 ‘엄마’가 아니더라도, ‘위안부’ 피해생존자는 사회의 일원이자 시민으로서 자신의 경험을 한국 사회 공통의 역사로 올리기 위한 ‘증언’을 한 것이고, 그는 누군가의 ‘가족’으로서 보호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서 이 사회에 개입할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죠. <허스토리> 역시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증언과 법정투쟁을 다루는데, 그것은 ‘문정숙(김희애 분)’이라는 영웅적이고 탁월한 개인이 불굴의 의지와 경제력으로 상황을 주도한 덕분으로 묘사됐죠. ‘위안부’라는 존재가 경험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리는 게 급했던 시대, 그것을 ‘민족의 수난’으로만 의미화하던 시대가 있었고, 지금은 또 다르죠. 달라야 하고요. ‘위안부’ 재현의 초점이 이동하는 것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그에 대한 정치화와 재역사화가 필요합니다. 허윤 역사성이 다 소거된 채 언제나 그 시점으로 계속 돌아가는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는 점이 큰 문제인 것이죠. 각주 ^ 이혜령, 「그녀와 소녀들─일본군 ‘위안부’ 문학/영화를 커밍아웃 서사로 읽기」,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학사』, 민음사, 2018. ^ 허윤, ^ 손희정, ^ 오카 마리, 이재봉・사이키 가쓰히로 역,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현암사, 2016, 216~218쪽. ^ 권명아,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한국사회의 정동을 묻다』, 갈무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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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인터뷰 공통의 역사로 연대하기 -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 연구자 에카 힌드라티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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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는 한국과 함께 과거 일본의 침략를 경험했던 나라다. 그렇기에 인도네시아에서도 일본군‘위안부’라는 슬픈 역사가 존재한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내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에 대한 조사와 지원은 한국만큼 활발하지 못한 실정이다. 에카 힌드라티(Eka Hindrati)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인도네시아의 연구자다. 서면 인터뷰를 통해 그녀에게 인도네시아 내 일본군‘위안부’ 연구와 조사의 진행 상황, 그리고 공통의 역사로 연대하기 위해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어떤 노력이 필요할지를 물어보았다. 인도네시아의 일본군‘위안부’ 문제 연구자 에카 힌드라티 Q.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결>의 독자를 위해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제 이름은 에카 힌드라티(Eka Hindrati)입니다.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를 독립적으로 조사하는 사람이에요. 1992년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를 대외적으로 처음 밝힌 일본의 고이치 기무라(Koichi Kimura) 박사와 협력해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를 파헤치고 있습니다. Q. 선생님과 고이치 기무라 박사님께서 함께 쓴 책 『그들은 나를 '모모예'라고 불렀다』(Momoye Mereka Memanggilku)는 일전에 웹진<결>에서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활동 혹은 연구를 하게 되신 계기가 따로 있었을까요? 제가 처음 ‘위안부’ 문제를 알게 된 계기는 1999년 자카르타의 <Internews> 라디오 기자로 근무할 때였습니다. 당시 여성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요, ‘위안부’ 문제를 다룬 프로그램에서 고이치 기무라 박사와 지금은 고인이 되신 욕야카르타(Yogyakarta) 법률구조단의 부디 산토소(Budi Santoso) 씨를 만났어요. 그때 처음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알게 되었죠. 저는 ‘위안부’ 피해자인 마르디엠(Mardiyem)에 대한 취재 기사를 작성했는데 그녀는 자신뿐 아니라, ‘위안부’ 피해를 입은 여성들이 정당한 배상을 받기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앞장선 상징적인 인물이었어요. 그녀가 바로 『그들은 나를 '모모예'라고 불렀다』(Momoye Mereka Memanggilku)의 주인공입니다. 당시에 썼던 취재 기사는 인도네시아 전역 50개 라디오를 통해 방송되었지요. Q. 에카 힌드라티 선생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끄럽지만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인도네시아의 일본군‘위안부’ 피해 상황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한국의 웹진 <결> 독자를 위해 당시 인도네시아의 일본군‘위안부’ 피해가 어떠했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 인도네시아에 주둔했던 일본군이 있는 곳이라면 위안소가 개설되어 있었습니다. 일본군을 위한 위안소는 인도네시아 서쪽 끝에 위치한 아체(Aceh)에서부터 동쪽 끝인 파푸아(Papua)까지 널리 분포해 있었어요. 인도네시아 국토 중 동부 지역에 산재해 있었던 위안소에는 특히 한국과 타이완에서 온 여성들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었고요. 인도네시아 출신 ‘위안부’는 등급별로 구분되어 배치되었는데, 흰 피부를 가진 인도네시아 북부 술라웨시(Sulawesi) 머나도(Manado)출신의 인도네시아 여성과 중국계 여성, 그리고 네덜란드계 여성들은 일본군 장교들 몫이었습니다. 반면에 갈색 피부를 갖고 있는 인도네시아 자바(Java) 출신 여성들은 계급이 낮은 일본군들에게 할당되었지요. ‘위안부’들 나이는 16세에서 25세 정도였고, 그중에는 아직 생리를 시작하지 않은 어린 여성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알려지지기까지 Q. 그렇다면 인도네시아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알려지게 된 시기는 언제였나요? 인도네시아에서는 1992년에 처음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알려졌습니다. 신문기자인 조코 산토소(Joko Santoso)가 일본군‘위안부’로 감금되었던 숙모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언급했어요. 그의 숙모였던 투미나(Tuminah)는 중부 자바, 솔로(Solo) 지역에 후지 여관(Fuji Ryokan)이라고 이름 붙여진 위안소에서 3년 6개월 동안 일본군을 위한 성노예 생활을 했다고 해요. 조코 산토소는 본인이 속한 수아라 머르데카(Suara Merdeka) 신문에서 1992년 7월 16일, 7월 21일 두 차례에 걸쳐 숙모의 ‘위안부’ 사연을 기사화했죠. 기사를 본 고이치 기무라 박사와 그의 부인인 평화 운동가 옥초 기무라(Okcho Kimura) 씨가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직접 만나면서 처음 인도네시아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의 조사 결과는 일본의 다양한 매체에 소개되었고, 이를 통해 일본인들은 그들이 저지른 부끄러운 과거를 알게 되었죠. 1993년 일본 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Nichibenren) 소속 5명의 변호사가 자카르타 법률구조단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들을 통해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을 위한 성노예로 착취당한 희생자들을 위한 손해배상 문제가 제기되었죠. 일본 변호사들의 방문은 인도네시아 전역에 생존해 있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 여성들을 끝까지 파악하겠다는 당시 인도네시아 사회부 장관인 인텐 수웨노(Inten Suweno)의 성명으로 이어졌습니다. Q. 처음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밝혀졌을 때 사회적 반응은 어떠했나요? 당시 사회부 장관이었던 인텐 수웨노의 성명은 1993년 4월 20일, 머르데카(Merdeka) 일간지에 게재되었고, 성명에 따라 일본군 성노예 피해를 입은 인도네시아 여성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어요. 1945년 인도네시아가 독립한 이래로 반인륜적인 ‘위안부’ 문제가 한 번도 공론화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반향과 충격을 가져다주었죠. 사회부 장관의 지시에 따라 비정부기구인 자카르타 법률자문단이 ‘위안부’ 피해 여성들과 노무동원 피해자들의 등록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후에 본 등록 업무는 욕야카르타 법률구조단으로 이관되었고요. Q. 등록을 받은 결과는 어땠습니까? 1993년 4월 29일부터 1993년 9월 14일까지 등록을 받은 결과, ‘위안부’ 피해자 1,156명과 노무동원 피해자 17,245명의 인적 사항이 확인되었어요. 그리고 1995년 아시아 지역 보상을 위한 아시아-태평양전쟁 희생자연합 국제위원회(The International Committe of Asia Pasific War Victims Organizations Claiming for Asia Compensation)에 인도네시아가 가입한 후, 1996년 일본군 보조병인 헤이호(Heiho‧兵補) 출신 연합이 ‘위안부’ 피해자 등록을 받았는데 그 목적은 일본군 침공에 따른 아시아-태평양 지역 희생자 개인별 보상 약정(Agreement Individual Compensation for Asia Pacific Victims of Japanese Aggression)에 따른 인도네시아 희생자들의 보상 추진이었습니다. 1996년 3월 30일에 마감을 통해 ‘위안부’ 피해 여성 19,573명이 등록하였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공개적으로 밝혀짐에 따라 인도네시아 정부도 공식적인 대응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어땠나요? 당시 인도네시아 정부는 인도네시아 여성들이 일본군 성노예로 전락한 사실에 대해 경악과 충격, 부끄러움을 표했지만, 일본 정부와의 조화로운 협력 관계를 우선시했습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과 노력에 개입하기를 원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위안부’에 대한 학교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부끄러운 상황입니다. Q. 그렇다면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단체의 상황은 어떤가요? 앞서 말씀드린 일본 변호사연합회(Nichibenren) 인권위원회의 자카르타 법률구조단 방문 이후, 법률구조단은 ‘위안부’ 현황 조사와 등록을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Women's 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 on Japan's Military Sexual Slavery) 시기에 법률구조단은 인도네시아부인회(회장: 누르샤바니 캇자숭카나(Nursyahbani Katjasungkana)와 반 여성적 무력 반대 포럼(Forum Resistance Military Against Women. 의장: 고이치 기무라 박사)과 연계해, 인도네시아 ‘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대신한 제소를 준비했고 많은 변호사가 재판에 참석했습니다. 본 연계 활동은 결속력 있게 인도네시아에서 ‘위안부’ 관련 캠페인을 진행하였고 이를 통해 국민 여론에 영향을 주었어요. 그런데 아쉽게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 끝난 후 인도네시아 ‘위안부’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식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2006년에 법률구조단의 몇몇 분과 저, 그리고 ‘위안부’ 문제 해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자카르타에서 ‘위안부’ 연대(JAJI)를 결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중부 자바 지역 운동가들과 연계하여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정부가 정치적으로 해결하라고 촉구하는 캠페인을 진행했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활동을 하다가 본 연대는 와해되었습니다. 그리고 2012년 저와 고이치 기무라 박사가 인도네시아 ‘위안부’ 연대(JSII)를 결성하게 됩니다. 본 연대의 조직은 유연하게 운영되고 있으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협력과 지원을 원하는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어요.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공통의 슬픈 역사를 가진 나라,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가 필요하다 Q. 인도네시아 ‘위안부’ 연대(JSII)는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요? 현재 인도네시아에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관장하는 특별기구나 단체가 없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위안부’ 연대(이하 JSII)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인도네시아의 사회적 문제로 이슈화하기 위해 다양한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책 출간, 사진전, 회화 전시회, 영화 상영뿐 아니라 여론 형성을 위한 기자 초청 간담회 등을 개최하고 있어요. 개별적으로 참여하는 단체이기 때문에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JSII는 지금도 계속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Q. 에카 힌드라티 선생님께서 인도네시아의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의 유품을 다수 보유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유품들을 갖고 계시는지요? 인도네시아 여러 지역에 찾아가 조사를 하면서 일본 점령기 때 만들어진 유물이나 만행의 장소들을 직접 볼 수 있었어요. 생각하지 못한 인도네시아 ‘위안부’ 관련 물품들을 접할 기회도 있었고요. 예를 들면 일본군 술병, 도자기 잔, 탄피, ‘위안부’들이 입었던 인도네시아 전통 복장, 치마, 신발 가방, 모자, 의료 기구 등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에 남아 있는 물품은 ‘위안부’용 의료기구예요. 이 의료기구를 처음 본 것은 지난 2002년도예요. 중부 자바, 암바라와(Ambarawa)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헤이호 출신인 사르무지(Sarmudji) 씨가 저와 고이치 기무라 박사에게 보여준 사진에서 처음 보았죠. 그 사진에는 1992년에 찍은 손잡이가 달린 철제 의료기구, 유리로 만들어진 주사액 3병, 2개의 낡은 붕대가 찍혀 있었습니다. 사진 속의 ‘위안부’용 의료기구는 수라바야(Surabaya)에 있었던 위안소에서 헤이호 출신 친구가 가져온 것을 사르무지 씨가 인수한 것이었어요. 그러나 아쉽게도 사르무지 씨가 당시 집을 수리하느라 이 의료기구가 집 안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찾지를 못했어요. 사르무지 씨가 밝히기를 어떤 일본인이 찾아와 본 의료기구들의 인수를 간절히 원했다고 했어요. 2004년에 저는 사르무지 씨를 다시 만났고 그제야 일부 파손된 ‘위안부’용 의료기구를 직접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르무지 씨는 기꺼이 이 역사적인 유물들을 저에게 넘겨주었죠. Q. 비록 서면을 통한 인터뷰지만, 성실하게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앞으로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협력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의 다양한 활동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어요. 국제적인 호응과 협력을 얻기 위한 ‘소녀상’ 설치와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한 캠페인 전개 등을 통해 많은 것을 느낍니다. 저도 이에 힘을 받아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한국, 대만, 미국, 독일, 일본에 있는 동료들과 함께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위안부’라는 공통의 슬픈 역사를 가진 나라죠. 하지만 아쉽게도 이러한 공통성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양국 간의 협력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과거 일본의 침략을 경험했던 인도네시아와 한국은 상호 지원과 협력을 통해 일본 정부에 대한 압박과 ‘위안부’ 문제 해결을 정치적으로 촉구하는 국제 운동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과 인도네시아 두 나라가 함께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공동 세미나 개최, 책자 발간, 영화 상영, 사진 전시회 등 다양한 협력 활동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경제적으로 크게 일본에 의존하고 있는데다 ‘위안부’ 문제의 본질과 현황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인도네시아 국민들에게 한국의 다양하고 활발한 사회 운동은 큰 영향을 줄 수 있어요. 끝으로 인도네시아 일본군 성노예 ‘위안부’ 참상을 한국에 계시는 여러분들에게 알릴 기회를 마련해 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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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편집회의 1부 - '위안부' 문제를 통해 무엇을 사유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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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의 발행을 앞두고 10인의 편집위원이 모여 웹진의 앞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2019년 1월 31일, 2월 25일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편집위원 좌담회는 지금껏 '위안부' 문제가 논의되어온 방식과 한계, 그리고 앞으로 웹진 <결>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자리였다. 권명아 (동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김헌주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 소현숙(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연구팀장) / 여순주 ((전) 한국정신대연구소 연구원) / 윤명숙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조사팀장) / 이선이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 임경화 (중앙대 중앙사학연구소 연구교수) / 조경희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 / 정용숙 (중앙대 독일유럽연구센터 연구교수) / 허윤 (부산외대 만오교양대학 교수) 편집회의 1부 - '위안부' 문제를 통해 무엇을 사유할 것인가 편집회의 2부 - '위안부' 문제로 대중을 어떻게 만나야 할까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 소현숙 본 좌담회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웹진이 앞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어떤 역할을 해나갈지를 모색하기 위한 자리다. 우선 웹진 편집위원님들께서 각자 어떻게 '위안부' 문제와 접속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위안부' 문제에 관한 문제의식이나 고민은 무엇인지 말씀해달라. 먼저 저부터 이야기하자면, 2000년대 초반 석사과정 때 '위안부' 생존자들의 구술증언 작업에 참여하면서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접하기 시작했다. 저는 여성/젠더사 전공자로서 어떻게 이 여성들의 삶과 경험을 역사 속에 기재할 것인가에 관심이 많다. 사실 식민지시기 여성의 삶을 말할 때, '위안부' 경험이란 것은 일반 여성들의 경험과는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저는 그런 경계를 허물고 식민지하에서 평범한 여성들의 일상과 위안소로 동원된 여성들의 경험, 평시와 전시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 극단적인 경험에 녹아 있는 평범함이라 할까, 또는 평범한 일상 속에 감춰져 있는 극단성이랄까, 그런 연결성에 관심이 있다. 식민지하 여성들이 경험해야 했던 전반적인 차별과 억압의 맥락 속에서 '위안부'로 동원되었던 여성들의 경험을 역사적 언어로 풀어내고 싶다. 허윤 저는 여성 문학 연구자의 관점에서 민족 문학 담론의 젠더를 질문하는 작업을 해왔다. 민족 문학 속에서 주체가 되는 여성은 주로 피해자로서의 여성인 경우가 많다. '위안부' 서사 역시 (마찬가지 목적으로) 동원되는 방식으로 등장하는 경향이 있어서 늘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저의 세대적 경험상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위안부'의 표상은 <여명의 눈동자>였던 것 같다. 뭔가 가련하고 비장한, 하얀 한복을 입은 사람의 이미지가 박혀있어서,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위안부' 이미지를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된 것은 박사 논문을 쓰면서부터다. 1950년대 한국문학에서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서술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정신대'를 기억하는 사람, 소문으로 들어본 사람이 오히려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정신대' 여자들을 재현하지 않았다. 당시는 '위안부'라고 하면 미군 '위안부'를 지칭하는 시기였는데, 미군 '위안부'를 타락한 여자로 재현하면서 "저런 여자들이 민족을 더럽히고 있다"라는 방식으로 담론을 재생산하곤 했다. 일본군'위안부'가 부재한 기억 장에 관심을 가졌던 셈이다. 이선이 '위안부' 문제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딩링이라고 하는 중국 문학가의 작품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딩링이 1941년에 쓴 『내가 노을마을에 있었을 때』는 일본군'위안부'가 되어야만 했던 중국 여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소설 속 주인공은 일본군에 의해 성폭력을 당하고 '위안부'가 되어, 이후 공산당에 의해 스파이로 활용된다. 그런데 그 여성을 바라보는 중국사회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고 이에 대한 작가의 위화감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딩링의 작품을 접한 이후 '위안부' 피해자 구술집을 통해 중국의 피해자들을 만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딩링이 문제를 제기 했던 방식처럼 지금의 내가 '피해자'의 시점에서 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용숙 서양 현대사, 독일사 연구자다. '위안부' 문제 관련 전공자가 아니어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일반인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는 뭔가 복잡하고 다가가기 어려운 주제라는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한국의 서양사 연구자는 한국 사회의 어떤 필요나 요청에 부응할 수밖에 없는 면이 있다. 2015년에 열린 여성 인권과 전시 성폭력을 주제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해외 사례 발표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위안부 문제'와 간접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이 문제에 대한 지식도 인식도 부족한 상태에서 유럽 사례를 가지고 발표를 했고, 이후 내용을 더 보강하여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유럽의 전시 성폭력과 독일군과 친위대가 기획하고 실행한 강제성매매에 대한 논문을 썼다. 논문을 준비하면서 “과거사 청산의 모범국”으로 알려진 독일에서도 전시 성폭력에 대한 문제는 반세기 넘게 침묵 되었고, 그 기억 자체가 억압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후에도 공론화되는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여전히 제대로 된 피해자 인정이나 배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문제들을 보면서 서양에서 전시폭력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동아시아와 비교할 지점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순주 한국 정신대연구소 활동을 20년 넘게 했다. 주로 증언집 작업을 해왔다. 한국 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뿐 아니라 중국 등에 계시는 할머니까지. 굉장히 다양한 분들을 만났다. 최근에 과거에 진행했던 피해자의 구술 인터뷰 내용이 담긴 녹음테이프를 디지털로 변환하고 녹취록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했는데, 이 작업을 하면서 관련 활동을 꾸준하게 해온 입장에서 반성을 많이 했다. 어떤 경우에는 연구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위안부' 피해자를 만나면서 준비라 너무 부족해서 인터뷰 내용에 지장을 주기까지 했더라. 할머니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해서 똑같은 질문을 만날 때마다 계속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연구자라는 사람들의 준비가 부족한 부분이 있었구나 하고 새삼 반성하는 기회가 되었다. 윤명숙 일본 유학생 시절, 대학원 석사 때부터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일본에서 유학할 당시,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님께서 한국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개 증언을 하셨고, 그 직후에 인터뷰할 기회를 가졌다. 당시만 해도 나 역시 일본군'위안부'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몰랐다. 그런데 얘기를 들으면서 이 문제가 계급문제구나 하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석사과정 연구 주제도 여성사회주의자 독립운동에서 '위안소·조선인 위안부 실태'로 바꾸었다. 이때는 '위안부'는 군인이 총검을 앞세워서 처녀의 머리채를 잡아채 트럭에 싣고 끌고간다는 식의 강제연행 문제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대학원 세미나 수업에서 '위안부' 동원을 계급문제로 접근하는 시각으로 처음 발표했을 때, 엄청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런 시각으로 박사논문도 썼는데, '여성주의 시각이 부족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 문제를 여성차별 문제로 바라보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나는 '위안부' 문제가 식민 정책에 의한 일상적 폭력이나 계급차별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민족차별 문제에 더 중점을 두었다. 여성주의 시각과 관련해서는 최근 공부중인데,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깊게 사유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위안소·위안부 문제'를 천착하다보면 국가라는 것을 깊게 사유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위안소·위안부 문제'를 연구한다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힘든 주제이긴 하다. 아마도 처음에 이 문제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후회하지는 않는다. 김헌주 7년 전부터 한국사연구소에서 '위안부' 관련한 자료들을 정리 및 해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원래 기존의 연구 분야는 근대사회사 쪽이었는데,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위안부'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위안부' 자료를 정리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자료는 엉뚱하게도 아주 일상적이고 건조한 내용이 담긴 문서였다. 장교는 '위안소'를 몇 시부터 몇 시까지 활용하고, 사병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활용하는지, 그리고 각 계급마다 돈을 얼마를 내는지, 위생검사는 어떻게 하는지 등이 적혀있는 문서들이 많았다. 이 건조한 문서들을 보면서 약간 묘한 느낌이 들었다. 끔찍한 일을 겪었던 '위안부' 피해자들이 상대했던 사람은 그냥 평범한 일본(군)인들이었다. 이들은 군인이지만 동시에 전쟁터에 나와서 본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편지 보내면서 눈물 흘렸던 일본인들이었던 것이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이 떠오른 대목이었다.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제 '위안부' 문제를 기존에 논의되었던 민족주의적인 문제의식과 방식을 넘어 그 수준과 범위를 더 확장해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임경화 일본학 전공자로 전공은 달라도, 연구대상으로서의 일본을 생각할 때,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나에게 회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그래서 일본에서 전개되어 온 논의들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수년 동안 지속해 왔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연구가 일본 연구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 수정주의 주장이 나올 때마다 그에 논박하고 대중적으로 설득하는 작업도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고 나는 그것을 한국어로 옮기고 있기만 하다는 사실을 자주 느끼게 되었다. 나에게 그 이유는 일본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일본학계에 지나치게 종속적이라는 사실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한국에는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적인 논리를 내면화한 '일본학'이 존재하지만, 그에 맞서는 학문으로서의 다른 '일본학'을 구상하고자 한다면, 나 스스로 주체적으로 이 문제를 파고들어 고민하고 행동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경희 일본의 식민주의와 근대성, 통치성 등에 관심이 많다. 일본에서 나고 자라서 재일조선인 문제에 관해서도 쓰거나 강의를 해왔다. 90년대 초중반에 재일조선인 대학생들끼리 민족적인 활동을 하면서 조선인 강제동원(당시는 강제연행) 문제의 일환으로 '위안부' 문제를 알게 되었다. 공부 모임도 했고 당시 헌책방에서 센다 가코 책을 찾아서 읽었지만, 제대로 알지는 못했다. 2000년에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 개최되었고, 정치압력에 의한 NHK의 영상개편 문제가 있었다. 히로히토의 유죄를 선고한 법정은 확실히 천황제 국가 일본의 근간을 흔드는 사건이었는데, 이에 대해 너무나 노골적인 억압이 일어났다. 이미 90년대 후반부터 우파진영에서는 일본군'위안부'나 난징대학살을 부정하는 역사 수정주의가 시작했었고 리버럴 진영에서도 국민기금을 통한 민간협상을 시도하는 등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위안부' 문제는 늘 일본 사회의 반동적 움직임의 중심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해오지 않았다는 점에 늘 부채의식이 있다. 열심히 활동하는 재일 선배 연구자들을 보면서 “내가 아니어도…”라는 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수준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삼으려고 한다. 권명아 전시동원체제의 연장에서 '위안부 문제'를 고민해왔다. 증언 문제뿐 아니라 좁게는 일제 말기 전시동원체제만 이야기하더라도 '위안부' 동원이라는 건 전시동원체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와 뗄 수 없는 문제다. 그래서 전시동원체제를 젠더정치의 맥락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이것은 여성사와 좀 다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젠더 연구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기존의 지배적인 학문 체제와는 다른 역사상을 구축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위안부 문제' 역시 그룹화되어 있거나, 혹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정립하기 위해서는 전시동원체제 역사상을 젠더적 관점에서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위안부' 문제 연구를 하게 되었다. 또 전쟁과 폭력의 경험과 증언, 국가 주도 기념의 한계와 대안적인 기념 정치 등의 맥락에서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게 되었다. (왼쪽부터) 김헌주, 소현숙, 허윤, 이선이, 정용숙, 여순주, 윤명숙, 권명아 민족주의적 접근은 왜 보완이 필요하나 이선이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분들의 삶을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민족주의'가 피해자분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족주의적인 접근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들이 삶의 터전인 국가 안에서 자신의 지위와 장소를 부여받을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중요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윤명숙 그렇다. 하지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민족주의적 시각만으로 바라보게 되면 일본군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일을 했는가와 같은, 민족 차별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그러나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민족 차별의 문제도 있지만, 여성차별, 성(性) 문제, 계급의 문제, 식민 지배 청산 등 다양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는 이슈다. 특히, 미투 운동으로 대표되는 현재의 여성 인권에 관한 이야기와도 연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동안 '위안부' 문제를 민족주의적 시각으로만 바라보던 경향이 있어서인지 상대적으로 이런 부분들이 거의 이야기되지 않았던 면이 있다. 김헌주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식민지 전시체제의 강제동원이라는 구조, 즉 민족문제가 우선으로 거론되지만, 여성들이 '위안부'로 동원된ᅠ맥락에는ᅠ조선ᅠ사회ᅠ내부의 가부장제도ᅠ한몫했다. '위안부' 동원에 조선인ᅠ업자들이ᅠ개입한ᅠ부분, 한국전쟁기의 위안소 운영, 그리고 '위안부' 피해자를 바라보는 같은 민족의 불편한 시선 등 다양한 측면들이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가려지는 면이 많았다. 윤명숙 1990년대 일본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여성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국은 민족주의 관점을 중심으로 운동을 진행해갔다. 동시에 수용되어야 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주의와 민족주의 관점이 대결 구도로 이야기되었다. 90년대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ᅠ해결ᅠ운동이ᅠ처음ᅠ불 붙었을ᅠ때는 식민지ᅠ문제와ᅠ강력하게 결부되어ᅠ있었기ᅠ때문에ᅠ민족주의ᅠ색채가ᅠ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지금까지 정도로 점화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조경희 현재는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민족주의적인 시각으로만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려고 하는 경향이) 어느 정도 극복이ᅠ되었다고ᅠ생각한다. 실제로는 지난 20년 동안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식민주의의 문제, 전시 성폭력의 문제 등 다양한 시각으로 다루고자 하는 담론이 많이 형성되었다. '민족주의 시각으로만ᅠ바라보면ᅠ안ᅠ된다'는 비판 자체가 한국 사회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담론이라 생각한다. 물론, 여전히 많은 사람이 '네 딸이나 여동생이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해봐라'라는 식으로 문제를 접근하는 것을 보면 보편적인 여성주의 시각이 여전히 많이 부족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소현숙 최근에 민족주의적 해석을 넘어서 한국의 가부장성이라던가, 피해자들의 해방 이후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존의 연구에 문제를 제기하고 새로운 사실들이 발굴되고 있다. 예를 들면 해방 직후 미군정시기, 열차에서 미군에 의한 한국 여성의 성추행이 일어났다. 이례적으로 이 사건이 신문에 보도가 되었는데, 당시 사회적 명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서 논의를 했다. 거기서 한다는 이야기가 '미군들의 성욕이라는 어쩔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일반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일제강점기 때처럼 위안소를 만드는 게 좋겠다' 이런 이야기를 버젓이 한다. 한국 사회의 가부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런 사료들은 그동안 역사적 사료로서 포착되지 않았던 것이다. 최근에 '위안부' 문제를 다양하게 바라보는 문제의식이 생기니까 이런 역사적 사실들이 새로 발굴되기 시작한 거다. 윤명숙 실제로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지와는 별개로, 민족주의 관점으로 바라보려는 시각이 강하거나 강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국내 미디어가 주로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을 중심으로 뉴스나 이슈를 전하게 되고, 이때 대중들은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묻는 기사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여전히 이 문제를 민족주의적인 시각으로 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김학순의 공개증언이 있은 지 28년이나 지났다. 우리 사회도 해결 운동과는 별도로 '위안부'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역사의 교훈으로 남기 위해서는 현재 한국 사회의 우리들, 즉 바로 나의 문제로 더 많이 사유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왼쪽부터) 김헌주, 권명아, 소현숙 '위안부' 문제를 통해 무엇을 사유할 것인가 윤명숙 한가지 문제를 제기해보자면, 우리가 '위안부'ᅠ문제ᅠ해결이라고ᅠ얘기했을ᅠ때ᅠ'해결'을ᅠ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도 사실은 공적인 장에서 논의된 바가 없다. 1990년대 초부터 '위안부' 피해자들이 계속 커밍아웃을 했고, 약 28년 동안 굉장히 다양한 얘기들을 하셨는데, 이 사회는 누구의 관점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해결'인지에 대해서 논의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권명아 할머니들의 '사과를 원한다'라는 이야기에 대해 누군가는 “할머니들은 왜 사과를 요구할까. 그럼 사과는 누가 해야 하는가. '위안부' 문제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 당시 지도자? 일본군? 일본 국민? 한 때 일본에서 있었던 일억총참회(一億総懺悔)[1] 설처럼 일본 전 국민이 사과를 하면 되는 일일까? 만약 그렇게 한다고 해서 과거가 바뀌나?”라는 말들을 한다. 물론 과거는 바꿀 수 없다. 백만 번을 사과하고, 일본의 일억 총 인구가 참회를 한다고 해도 과거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미래는 바뀔 수 있다는 거다. 사과를 요구한다는 것은 바로 그 의미다. 예를 들어 일본의 '위안부' 문제 관련하여 시민사회 운동하시는 분들에게 “어쩌다 이런 활동을 하시게 되었느냐”고 물으면, 거의 공통적으로 “'위안부' 문제를 알게 된 순간 이전처럼 살 수 없었다”라고 말을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되니까 개인의 미래가 바뀐 것이다. 이처럼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역사적인 잘못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다. 임경화 해결이라고ᅠ했을ᅠ때,ᅠ공식 사죄, 피해배상, 추모와 기념, 역사교육, 재발 방지와 같이 큰 틀 안에서 공유되고 있는 것들은 있다. 이렇게 공유되어있는 틀 말고, 우리가 해결이라고 했을 때, 과연 그것만이 해결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하게 논의할 필요는 있는 것 같다. 해결의 방식은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운동을 해야 한다는 관점을 웹진에서 제시해주면 좋을 것 같다. 이선이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가ᅠ제기된 이후,ᅠ일본ᅠ사회의ᅠ많은ᅠ양심적인ᅠ지식인들이ᅠ이 문제를 통해 일본 사회를ᅠ바꾸려는ᅠ노력을ᅠ함께 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ᅠ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엄청난 시간, 노력, 비용이라는 자원이 들어가는 것에 비해 이 논의가 한국 사회를 그만큼 성숙시키고, 한국 사회의 (여성)인권이 성장하도록 하는 데 얼마나 기여했는가 냉철하게 생각해보면 그다지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운 것 같다. '위안부' 문제를 일본 제국과 일본군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에서 더 나아가 앞으로 한국 사회가 보다 더 나은 사회가 되기 위한 지렛대로 이문제를 생각했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볼 지점이다. 소현숙 한국 사회가 아예 진전이ᅠ없었다고ᅠ생각하지는ᅠ않는다.ᅠ예를ᅠ들면ᅠ2014년 미군ᅠ‘위안부’,ᅠ기지촌ᅠ여성들이 대한민국 정부를 피고로 하여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ᅠ제기했다. 여성의 성을 국가가 동원한 것에 대해 정부의 책임을 묻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부만 승소하는 다소 미흡한 판결이 나왔지만, 그럼에도 한국 사회가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피해자들이 스스로 피해자임을 자각하고 문제제기를 할 수 있었던 과정에는 '위안부' 문제에 관한 운동과 연구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을 한다. 이선이 지난 편집회의 때 임경화 선생님께서 이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가져가기로 마음을 먹어서 이곳에 왔다는 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아까 김헌주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내용(건조한 문서로부터 보이는 악의 평범성)도 이 문제를 나의 문제로 가져가는 사유가 되는 것 같다. 웹진 안에서 '위안부' 문제가 '나'에게는 어떤 의미인지 계속 물을 수 있다면, 이 문제가 일본제국의 전쟁범죄를 넘어서 보다 더 확장된 사유를 가능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김헌주 한국에서 여성을 대상화한 유흥문화는 일반적이며, 남성들은 그 문화의 소비자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제쳐둔 채로, '위안부' 문제를 대면하는 것이 한국 사회의 모습이다. 그런 차원에서 건조하게 이용하는 일본군 남성의 모습과 평범한 '위안부 문제'에 분노하는 한국 남성 사이에 괴리라는 게 생각보다 크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ᅠ군대ᅠ문화에서ᅠ'위안부' 문화의ᅠ연속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소현숙 선생님께서 관련된 사례를 잠깐ᅠ말씀하셨지만, 한국전쟁기 특수 위안대가 설치될 당시에 그 목적이 군의 사기 증진이었다. 일본군'위안부'를 만든 맥락과 똑같은 것이다. 또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2월 30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휴가를 나와서 귀향해 있는 장병들을 위해서 국가 차원에서 보상을 해주기 위해 각 지역마다 위안소를 만들어서 장병들을 위로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연장선상에서 1960~70년대의 양공주 문제 즉 미군 ‘위안부’ 동원이 가능했던 것이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각주 ^ (편집자 주) 1945년 8월 28일 기자 회견에서 패전 처리 내각의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東久邇宮稔彦) 수상이 ‘1억 국민이 모두 참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한 발언. 전쟁의 책임을 일왕에게만 물어서는 안 되며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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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위안부피해자법에 대한 역사적 검토: 보호·지원을 넘어 인권의 문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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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필자의 2021년 석사논문 「일본군‘위안부’ 피해와 피해자의 의미: 한일청구권협정 부작위 위헌소송을 중심으로」의 2장의 2절과 3절을 수정, 보완하여 작성한 것이다. 2023년은 「일제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이하 위안부피해자법, 법률 제4565호)이 제정된 지 30년이 되는 해이다. 1993년, 위안부피해자법은 “국가가 인도주의정신에 입각하여” “일본군위안부로서의 생활을 강요당한 자”를 “보호하고 지원”할 것을 명시했다(제1조 목적). 현재 이 법은 여러 차례 개정되어 피해자들의 생활 안정과 복지뿐만 아니라 국민의 역사관 정립과 인권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로 변모했다. 30년의 세월 동안 위안부피해자법은 한국 사회의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그 피해자들을 보는 시각의 변화를 반영하며 바뀌었고, 또 그것을 바꿔온 기제이기도 했다. 가령, 현재로선 당연해 보이지만, 국가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보호와 지원의 대상으로 인정하는 변화는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이 글에서는 법 제정 30주년을 맞이하여 위안부피해자법의 제정 경위와 내용의 변화, 그 의미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1. 위안부피해자법의 제정 경위 위안부피해자법은 1993년 3월 13일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정부 의안으로 제출되어 같은 해 4월 국회에서 통과되고, 6월에 제정되었다. 이러한 법안은 일본 정부에 법적 배상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한일 간 도덕적 우위는 가져가되 피해자는 우리 정부가 구제하겠다는 방침에서 나온 것이었다.[1] 외무부는 법 제정이 당시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에 제기한 손해배상소송,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유엔 인권위 제소와는 별개의 조치라고 밝혔다.[2] 이러한 조치에 일본 정부는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다고 언론들은 보도했다.[3] 법에 따른 지원으로는 피해를 신고한 생존자에게 생활보호기본금 500만 원 및 생활지원금 15만 원 지급, 영구임대주택 입주, 의료 무료 혜택 등이 결정되었다. 외무부에 따르면 이러한 금액은 법규나 제도상의 제한, 다른 국가지원대상자와의 형평성을 고려하여 정한 것이었다. 외무부는 근로정신대나 강제징용자 등 다른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해선 장기적 대책을 마련할 것이지만, “종군위안부 보호 조처를 먼저 다룬 것은 가장 반인륜적이고 해결이 시급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4] 이러한 조치는 단순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경제적 상황이 열악하다는 실상이 알려졌기 때문은 아니다. 국가 차원의 보호·지원을 요구하는 일본군‘위안부’ 운동[5]의 목소리와 그것을 추진하려고 했던 외무부의 시도는 이전 정권부터 있었다. 그렇다면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기점으로 한, 굴욕적인 대일 외교를 청산하라는 운동의 지속적인 요구가 한국 정부의 일견 급진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움직임을 만들어낸 것일까? 먼저 한국 정부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떤 시각에서 보고 있었는지를 알아야 ‘급진적’이었다거나 그렇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일본군‘위안부’ 문제화를 둘러싼 운동의 흐름과 한국 정부의 대처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1990년대 냉전의 붕괴는 뒤늦게 2차 세계대전의 ‘전후(戰後)’를 불러왔고, 1987년 민주화와 함께 한국 사회는 되돌아온 식민지기와 전쟁의 기억, 그것에서 비롯된 고통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두고 들끓었다.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원폭 피해 및 강제동원 피해자 운동, 한일 여성 연대를 기반으로 한 기생관광 반대 운동의 교차점에서 등장했다. 1990년 10월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외 여성단체들은 한일 정부에 일본 정부의 ‘정신대 문제’에 대한 사실인정, 공식사죄, 보상, 역사교육 등을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냈으나 거듭된 부인과 책임회피가 이어졌다.[6] 이에 맞선 1991년 8월 김학순의 기자회견에서의 공개 증언, 그리고 12월 일본 정부에 대한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 청구소송’ 제소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한일 양국 간 현안 과제”로 ‘격상’시켰다.[7] 1992년 1월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가 위안소 제도에 대한 일본군의 관여를 보여주는 자료를 발표하자, 가토 내각 관방장관은 정부의 관여를 인정하고, 관계성청 자료조사 방침을 발표했다. 곧이어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한국 정부는 선 진상규명, 후 보상 또는 배상 방침을 세우고, 자체 진상규명 작업을 맡을 ‘정신대문제실무대책반’ 구성 계획을 밝혔다. 이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는 한국 정부의 “피해 여성에 대한 응급생활보호조치”를 요구했으나 묵살되었다.[8] 이에 비하면 김영삼 정권의 위안부피해자법 제정은 한발 나아간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여전히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한일 외교 관계의 장애물로서 해소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고, 진상규명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일본 정부의 배보상을 정부 차원에서 요구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1993년 8월 진상조사 발표와 함께 설치, 관리 및 이송에 관해 구 일본군의 관여를 인정한 고노 내각 관방장관 담화에 한국 정부가 만족하며 이 문제를 더는 한일 외교 현안으로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9] 정대협은 위안부피해자법 제정을 환영하긴 했으나 이것이 일본 정부를 대신한 “물질적 보상”인지, “민족 수난의 희생자에 대한 동포적 차원의 위로와 생활 지원”인지 질의했다. 또한, 중대한 인권침해[10]를 입은 피해자는 배상의 권리를 갖는 주체이며 이들을 대신해 정부가 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11] 주지하듯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일본 정부의 민간을 경유한 금전적 보상이 법적 책임에 따른 것이 아닌 시혜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닌지, 그럼으로써 피해자들을 단순 수혜자로 만드는 것이 아닌지를 경계해왔다. 운동이 1996년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하 국민기금), 2015년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이하 2015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을 통한 의료·복지 사업에 반대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1996년 정대협은 국민기금에 반대하는 한편, 피해자를 위해 생활안정지원금을 증액해달라고 요청했다.[12] 이러한 일본 정부의 조치를 두고 법적 책임과 정부의 향후 대책을 고려해야 한다는 김대중 대통령과 한일 관계가 경색되어선 안 된다는 외무부가 갈등을 빚었지만, 1998년 5월, 한국 정부가 2차 지원금을 지급하되, 민간의 배상 요구에는 개입하거나 공식적으로 일본 정부에 요구하진 않는 것으로 국민기금 사태는 일단락되었다.[13] 종합하자면, 1990년대 위안부피해자법과 그에 따른 지원은 정부가 민족의 자존심과 도덕적 우위, 한일 관계를 둘러싸고 내린 타협책이자 (그래서 다른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보다 신속하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보호와 지원의 대상으로 상정한 출발점이었다. 2. 위안부피해자법의 내용과 그 변화 먼저, 명칭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이 법의 정식 약칭은 위안부피해자법이지만,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받은 피해자의 입장을 반영”하기 위해 제명과 조항에 ‘피해자’가 들어간 것은 2002년 일부 개정된 「일제하일본군위안부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 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법률 제6771호)에서부터이다.[14] 민주화 이후 과거사 청산 운동과 반성폭력 운동의 전개가 ‘피해자’ 용어를 일상화했다는 점도 고려할 수 있겠으나 이러한 변화는 무엇보다 후술할 노무현 정권의 대일 과거사 청산 작업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법 개정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라는 명명을 제도화한 것이라는 데서 의의가 있다. 관련해서는 다음 절에서 다루고자 한다. 현재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관련 명칭(특히 가족주의적 호칭)과 관련해 열띤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는 점은 명명하는 작업이 갖는 정치성을 잘 보여준다. 주지하듯 일본군‘위안부’, 정신대, 종군위안부, 일본군 성노예와 같은 각 호칭은 주로 사용된 시기, 맥락이 다르며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함의를 갖는다. 위안부피해자법 제정 당시에도 위안부라는 명칭이 적절한지에 관한 논란이 있었다. 당사자의 자존심(또는 ‘프라이버시’ 침해)과 인권 문제가 있으니 성적 피해 여성과 같은 표현이 어떠냐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외무부가 당시 실제로 사용된 용어로서 그 역사성을 살리는 게 일본 정부의 책임을 부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 받아들여졌다고 한다.[15] 전술했듯 1993년 위안부피해자법은 “일제에 의하여 강제동원되어 일본군위안부 생활을 한 자” 중 “생존자로 법 적용대상자로 결정·등록된 자”를 대상으로 “국가가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이들을 보호·지원”하기 위한 목적에서 제정됐다. 지원 내용으로는 “생활보호”, “의료보호”, “생활안정지원금의 지급”이 있었고, “임대주택의 우선임대”도 명시됐다. 이후 위안부피해자법은 여러 번 개정되었으나 중요한 변화만 정리해보고자 한다. 2002년 개정 법안에서는 “국가가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한다는 어구는 삭제되고 피해자를 보호·지원해 “이들의 생활안정을 기”할 뿐 아니라 “기념사업을 수행”해 “국민의 올바른 역사관 정립과 인권증진에 이바지”한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이어 2005년 개정 법안(법률 제7637호)에서는 기념사업이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한 것임을 명시하게 되었고, 생활안정과 “복지증진을 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게 되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수행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념사업 등의 사업내용도 획정되고 다양해졌다. 지원 내용 역시 점차 확장되었다. 이처럼 피해자뿐만 아니라 국민을 대상으로 한 기억/기념 조치의 제도화, 피해 회복을 인권이라는 중대한 가치와 연관 짓는 법문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보는 시각의 전환이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사회공동체의 과거, 현재, 미래를 재해석하고 재구성해야 할, 공적 역사/기억의 일부로 삼게 된 것이다.[16] 이러한 2000년대 법 개정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의 국제인권레짐의 정착과 과거사 청산작업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노무현 정권은 과거사 피해자들의 고통의 치유 및 해소가 사회 재통합과 화해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보았고, 이를 위해 과거사청산 메커니즘을 이행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17] 피해자 보호·지원에서 나아가 이들의 명예회복, 진상규명, 기념사업, 역사교육을 법에 명시하게 된 것은 200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요구해온 바가 그 법적 기반을 다지게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2005년 개정 법안이 제2조의2(국가의 의무)를 추가해 “진상규명”과 “역사교육”에 대한 적극적 노력, 그리고 피해자 “발굴”과 생활 안정을 위한 조치 강구를 국가의 의무로 명시한 데 이어 2017년 개정 법안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법률 제15207호)은 “피해자의 권리·의무와 관련된 정책” 수립에 있어 피해자 등의 의견 청취, 국민에 “정책의 주요내용”의 “적극 공개”를 규정했다. 이러한 2010년대 후반의 법 개정은 2015 위안부 합의가 “피해자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국민과 같이 호흡하는 민주적 절차와 과정”이 없었음을 문제화한 문재인 정권에서 이뤄졌다.[18] 2015 위안부 합의가 고위급 외교 인사들의 비밀협상으로 진행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처음으로 피해자 중심적 접근이 한국 사회의 화두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위안부피해자법의 제·개정에 따른 변화> 제명 일제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제·개정 시기 1993년 제정, 시행 2002년 일부개정, 2003년 시행 2005년 일부개정, 2006년 시행 2017년 일부개정, 2018년 시행 정의 일제에 의하여 강제동원되어 일본군위안부로서의 생활을 강요당한 자 일제에 의하여 강제동원되어 성적학대를 받으며 위안부로서의 생활을 강요당한 피해자 좌동 좌동 대상 일군위안부 중 생존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생활안전지원대상자 등), 국민 좌동 좌동 담당 부처 보건사회부 여성부 여성가족부 좌동 목적 국가가 인도주의정신에 입각하여 이들을 보호하고 지원함 피해자를 보호·지원하고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기념사업을 수행함으로써 이들의 생활안정을 기하고 국민의 올바른 역사관 정립과 인권증진에 기여함 피해자를 보호·지원하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한 기념사업을 수행함으로써 이들의 생활안정과 복지증진을 기하고 국민의 올바른 역사관 정립과 인권증진에 기여함 좌동 지원 내용 생활보호, 의료보호, 생활안정지원금 지급, 임대주택 우선임대 생계급여, 의료급여, 생활안정지원금 지급, 임대주택 우선임대 생계급여, 의료급여, 생활안정지원금 지급, 간병인 지원, 임대주택 우선임대, 국적회복 등의 지원 생계급여, 의료급여, 생활안정지원금 지급, 간병인 지원, 장제비 지원, 임대주택 우선임대, 국적회복 등의 지원, 법률상담 등의 지원 사업 내용 X 기념사업, 역사적 자료의 수집·보존·관리·전시 및 조사·연구, 교육·홍보 및 학예활동 기념사업, 역사적 자료의 수집·보존·관리·전시 및 조사·연구, 교육·홍보 및 학예활동, 국제교류 및 공동조사 기념사업, 역사적 자료의 수집·보존·관리·전시 및 조사·연구, 교육·홍보 및 학예활동, 피해자의 명예회복 위한 국제교류 및 공동조사 등 국내외활동, 위령사업 국가의 의무 X X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인권증진을 위하여 진상규명·올바른 역사교육 등에 대한 적극적 노력, 피해자의 적극적 발굴과 안정적 생활유지 위해 필요한 조치 강구 피해자의 명예 회복과 인권 증진 및 이와 관련한 진상 규명, 올바른 역사교육 등을 위한 국내외적 적극 노력과 필요한 조직과 예산 확보, 피해자의 적극적 발굴과 안정적 생활유지 위해 필요한 조치 강구, 피해자 권리·의무 관련 정책 수립시 피해자(그 대리인 포함) 의견 청취 및 정책 주요 내용 국민에 적극 공개 3. 위안부피해자법의 제·개정의 사회적 의미 첫째로, 위안부피해자법이 최초 법이 제정될 때처럼 “인도주의정신에 입각하여” 보호·지원을 하는 데서 나아가 “복지증진” 등 복합적인 목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인도주의적 대응은 자연재해, 전쟁 등으로 인해 기본적인 인간적 삶의 수준을 영위하는 데 어려운 이들의 긴급한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것을 의미한다.[19] 국가의 지원이 30년 동안 이어진 현재, 피해자들에게 필요한 바가 인도주의적 대응이 아니라는 점은 쉽게 동의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법적 책임에 의거한 배상을 일본 정부에 요구해왔고, 국가가 외교행위를 통해 피해자의 이해관계를 대리해주길 정부에 요구해왔다. 일본군‘위안부’ 피해는 누락되었으나 개인의 청구권을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한다고 선언한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은 일본 정부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에 대한 법적 책임은 없다는 단언, 그리고 한국 정부의 수세적인 태도의 배경이 되었다. (남성으로 재현되곤 하는) 징용·징병 피해자의 청구권에 대해 체결한 협정과 그에 따른 보상으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청구권 역시 변제됐다고 여겨지게 된 점은 전쟁 피해 여성들이 마주하게 된 모순적 상황, 즉, 체계적으로 참여가 박탈된 계약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종속되는 상황을 드러낸다. 그러나 2005년 개정법의 의안이 발의되었을 당시 국가의 의무 조항에 포함되어 있던 “배상(에 대한 적극적 노력)”은 법 목적이 생활 안정과 복지증진에 있다는 사유로 삭제되었다.[20] 또한, 한일청구권협정 제2조 1항에 따라 개인 배상청구권이 소멸되었는지에 관한 해석상 분쟁이 존재하기에 제3조의 해석상의 분쟁 해결조치를 취할 의무를 다하라는, 즉,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배보상 문제를 우선 외교적으로 해결하라는 2011년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21]에도 불구하고, 졸속으로 이뤄진 2015 위안부 합의는 또다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의 피해자 지원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둘째로, 위안부피해자법이 ‘피해자’로 그 대상을 호명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전술했듯 1990년대 한국 정부의 방침이나 현실주의적 국가 외교정책의 관점에서 피해자는 잔여적 복지 지원으로 고통이 해소되어야 할 존재로 여겨졌다. 반면, 2000년대와 그 이후 과거사청산 흐름에서의 법 개정에서 ‘피해자’는 적절하고, 실효적이고, 신속한 방식으로 마땅히 피해가 구제되어야 하는 인권 주체이자, 또 그러해야 한다고 요구를 하는 정치적 주체로 여겨지게 되었다. 법의 ‘피해자’라는 호명 자체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와 피해자를 통해 우리 사회가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지, 피해자의 상처와 고통에 대한 응답을 요청하는 것이 사회에 환기하는 과제는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일부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남지 않은 고령의 피해 생존자들의 고통 경감, 즉, 개개인에 대한 인도주의적 조치로 문제의 해결방식과 목적을 한정하는 것은 2015 위안부 합의 이후 강력한 흐름이 되어왔다. 전술했듯 국가의 의무 조항에 피해자 중심적 접근이 반영되었으나 누가 피해자인지, 무엇이 피해자를 위한 것인지, 피해자의 입장은 무엇인지는 계속해서 논의되어야 할 열린 문제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이라는 정의의 ‘내용’을 정하는 데 있어 우리가 계속해서 ‘피해자’ 기표를 통해 ‘당사자’를 설정할지, 법과 외교를 통한 ‘방법’을 어떻게 민주주의적인 것으로 가져갈 수 있을지와 같은 질문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글쓴이는 양국 정부 간의 대화가 동북아안보체제의 강화를 위한 것이 아닌, 여성의 경험과 젠더 관점을 바탕으로 평화구축 메커니즘의 일부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각주 ^ 정부 의안. 의안번호 140239. 1993.5.7. 동아일보, “挺身隊(정신대) 보상 日(일)에 요구않겠다”, 1993.03.13. ^ 한겨레, “정부 구호조처 배경·의미 ‘종군위안부 피해’ 인도적 배려”, 1993.03.30. ^ 한겨레, “종군위안부 물적 보상 한국 불요구방침 호의”, 1993.03.15. ^ 한겨레, “정부 구호조처 배경·의미 ‘종군위안부 피해’ 인도적 배려”, 1993.03.30. ^ 이 글의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주도한 활동(1998~1990.11.16.)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1990.11.16. 결성, 현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의 활동을 가리킨다. ^ 한교여연 외 38개 여성단체, “공개서한: 내각총리대신 가이후 도시키 귀하”, 1990.10.17.; 한교여연 외 38개 여성단체, “공개서한: 노태우 대통령 귀하”, 1990.10.17. ^ 대한민국 국회사무처, 「제161회 국회 보건사회위원회회의록 제1호」, 1993.5.10., 76쪽. ^ 한국교회여성연합회(1992), 『정신대문제 자료집: 종군위안부 발자취를 따라서』, 96쪽. ^ 매일경제, “謝罪(사죄) 뜻 표명…誠意(성의) 보였다”, 1993.08.05. ^ ‘중대한(gross) 인권침해’란 국제법 규범을 위반하는, 피해자 숫자가 대규모이고 피해가 막대하며 장기적 영향을 미치는 피해를 의미한다.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1990년대 부상한 국제 전시 성폭력 이슈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며 국제인권법, 국제인도법에 근거해 그 불법성을 중대한 인권침해로 재정의하고 법적인 문제해결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해왔다. ^ 정대협,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김영삼 대통령의 3월 13일 자 지시에 대한 우리의 입장”, 1993.3.14. ^ 이효재·윤정옥·성봉희(정대협), “일본군위안부피해자에대한생활안정지원금증액”, 청원번호 150040, 1996.09.19. ^ 김수아(2000),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담론 구성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석사학위 논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20년사 편찬위원회(2014),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20년사』, 한울아카데미. ^ 이미경 의원 등 29인, 의안 번호 1393, 2001.12.31. 발의. ^ 대한민국 국회사무처, 「제161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록 제5호」, 1993.5.17.; 매일경제, “군대위안부法案(법안) 명칭논란”, 1993.04.30. ^ 2017년 개정법부터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지정하고 있다(제11조의2). ^ 대통령비서실편집부(2006), 『노무현 대통령 연설문집 제3권』, 대통령비서실, 306쪽. 2005년 한일회담 관련 문서의 전면공개와 ‘한일협정문서공개를위한 민관공동위원회’ 구성과 후속 대책 발표, 그에 따른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법 제정과 변화한 대일기조방침의 표명은 이 지점을 잘 보여준다. ^ 한일일본군위안부피해자문제합의검토태스크포스,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2015.12.28.] 검토 결과 보고서」, 2017.12.27, 30-31쪽. 이 보고서에 따르면 ‘피해자 중심적 접근’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해결이 피해 여성의 존엄과 명예의 회복, 상처 치유에 있고, 피해 구제과정에서 피해자의 참여가 가장 중요하며, 정부는 피해자의 의사와 입장을 수렴해 외교협상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 조시현(2012),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인도주의 문제인가?: 한·일 정부의 최근 입장에 대하여」, 『민주주의 법학』 49, 165-193쪽. ^ 여성위원회 심사보고서, 2005.6, 14쪽. ^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제3조 부작위 위헌확인」 소송(2006헌마788, 2011.8.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