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하는 감각, 삶의 진실 듣기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의 <소장품섬_최찬숙: 밋찌나> 전시 개최 후기
광복 80주년 역사적 의미 되새길 소장품섬 <밋찌나> 전시
부산현대미술관은 시대의 흐름을 포착하고 예술 가치가 높은 작품을 시민들과 공유하고 후대에 전승하기 위해 해마다 특별한 작품을 선정해 수집하고 있다. 이렇게 수집한 소장품 가운데 부산현대미술관의 정체성을 담은 작품은 정기적으로 관람객에게 공개된다. 낙동강의 토사가 퇴적돼 형성된 모래섬, 을숙도에 자리잡은 미술관은 그 지리적 특징을 살려 소장품 상설 전시관에 '소장품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기서 해마다 학예연구사들이 추천한 작품이 전시된다.
2025년, 미술관은 소장품섬 첫 전시 작품으로 최찬숙 작가의 작품 <밋찌나>를 선택했다. 광복 80주년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기 위한 기획으로 선정된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부산에서 미얀마 밋찌나 지역으로 끌려간 조선인 일본군'위안부'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3월 29일부터 6월 29일까지 열릴 소장품섬 <밋찌나> 전시를 앞두고 차가운 공기가 가시지 않은 어느 날, 서울 삼청동에서 최 작가를 만났다. 작가는 곧 주요 활동지인 베를린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위안부' 이야기를 하면서 미얀마를 떠올리는 일은 흔치 않은데, 어떻게 <밋찌나>를 작업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작업을 오랜 숙제처럼 마음 한구석에 안고 있었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죠. 친할머니의 삶의 여정을 쫓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마주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와의 시간은 저에게 증언의 무게를 피부로 감각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아픈 감각이죠. 일단 제가 해결할 수 없는 어떤 벽에 부딪혔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연구해온 서울대학교 정진성연구팀의 증거집을 보게 되었죠. 미얀마 밋찌나 지역의 여성들이 인상적이었어요. 증거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죠. 생생한 표정이 담긴 사진, 차고 넘치는 증언들, 심지어 명단도 있었지만, 전후 그 누구도 '내가 거기 있었다'고 증언하거나 나타나지 않았죠. 증언자가 사라지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현실에 대한 질문이 생겨났죠."[1]
2015년 결성된 서울대학교 정진성연구팀은 2016년부터 서울시와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피해자의 명예회복 및 인권 증진을 도모하고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생산한 기록들을 수집·연구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과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태국 현지 등을 방문해 일본군'위안부' 관련 자료를 발굴, 조사했고, 그 결과 미·중 연합군 공문서, 포로 심문 자료, 스틸 사진, 지도, 동영상 등 가치 있는 자료를 다수 수집하였다.[2] 이와 관련한 결과 보고 형식의 전시[3]에 최 작가가 초대된 것이 <밋찌나> 제작의 계기였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들어보기, 함께 기억하기[4]
정진성연구팀이 발굴한 연합군 공문서 등 사본 기록을 따라 소장품섬 공간 안으로 들어가 만나게 되는 <밋찌나>는 TV 모니터와 벽 한 면 전체를 가릴 만큼 큰 프로젝션 2개의 영상 채널로 이루어진 18분 30초 분량의 영상 작품이다. 이 영상에서는 세 여성이 등장해 '나는 밋찌나(I am Mytkina)'라고 소개한다. 이 생소한 단어, 밋찌나[5]는 미얀마 이라와디강 상류에 인접한 지역 이름으로, 전쟁 당시 이곳에 위안소가 있었고, 남아 있는 문서와 사진을 통해 스무명 정도의 '위안부' 피해자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진 피해생존자는 없었다.
영상에는 누군가가 던진 동일한 질문에 세 여성이 답하는 장면이 연이어 나온다. 하지만 이들의 증언은 계속 일치하지 않는다. 예컨대 위안소나 막사 지붕에 대한 묘사는 모두 다르다. 한 명은 소의 뿔처럼 생겼다 하고, 다른 한 명은 교회 모습으로 기억하는 식이다. 각자의 기억을 토대로 이야기하지만 이들의 진술은 모두 엇갈려 무엇이 사실이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작품에 등장하는 세 여성은 '위안부' 증언자 그 자체가 아니다. 세 밋찌나는 각각의 인물을 대변하기 보다는 가상의 인물로 세 가지 헤게모니 축을 대변한다. 즉 제국주의적 관점, 가부장적 민족주의, 페미니즘적 관점으로, 작가는 하나의 이미지지만 각기 다르게 보이는 상황을 <밋찌나>로 연출하였다.
결국 이미지 자체는 비물질적이기 때문에
그러다 보니 제일 강조하고 싶었던 건
살아있는 생명체로써 체험하는 감각들이 진실이라는 것
"결국 이미지 자체는 비물질적이기 때문에 그러다 보니 제일 강조하고 싶었던 건 살아있는 생명체로써 체험하는 감각들이 진실이라는 거죠. 이건 실제 증언에서 나온 기록인데, 일본군들이 수류탄으로 물고기를 잡았다는 것, 그 엄청난 폭발음, 뒤 이어 물 위를 떠다니는 비늘을 목격한 직관적인 경험…"
심문을 받는 세 여성은 되묻는다. "정확한 기억?" "어떻게 하면 정확히 말할 수 있죠?"라고. 기억의 취약성이다. 그들에게 기억이란 밤 배에서 보던 달빛, 밋찌나 이라와디 강 추위, 내리쬐던 빛줄기, 손으로 움켜잡으려고 할수록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던 진흙 같은, 무언가를 움켜쥐었다고 하기 어려운 감각이었다. 유일하게 동일한 진술은 '내가 그곳에 있었다.' 살아있었다는 감각,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관점에 따라 공방 하는 견해들이 '위안부'의 삶을 과연 재현할 수 있을까? <밋찌나>를 관통하는 이 질문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을 들어보기, 함께 기억하기'라 압축하는 미술사학자 조혜옥의 분석에 공감한다.
최찬숙은 '재현'이 '대표' 하지 않는 방식을 깊이 있게 고민한다.
그들이 기억하는 빛, 소리, 냄새, 촉감처럼 거기 살아있었던 존재로서
그들을 듣고 기록하기 위해 온몸으로 다가가고 함께 기억하는 작업이다.
"최찬숙은 '밀려난' 여성들의 이야기를 대변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기억과 경험을 온전히 재현하거나 표상할 수 있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또 감히 그들을 말하게 할 힘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는 '재현'이 '대표' 하지 않는 방식을 깊이 있게 고민한다. 그 방식은 그들이 기억하는 빛, 소리, 냄새, 촉감처럼 거기 살아있었던 존재로서 그들을 듣고 기록하기 위해 온몸으로 다가가고 함께 기억하는 작업이다. <밋찌나>에서도 작가는 그들이 기억하는 햇빛, 달빛, 진흙과 같은 감각과 실존의 기억들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지 고심한다. 말할 수 없음을 듣는 것은 '하나의' '중대한' 진실이 아니라 삶의 작은 진실들을 듣는 방식은 아닐까? '증언자'들이 어떤 방법으로 포획, 재현되는 '대상'이 아니라, 여러 순간 속에서 다양한 형상으로 살아있었던 '생명을 가진 존재'들로 드러나기'를 원하는 최찬숙은 그렇게 말이 아닌 감각의 기억으로, 피부로 그들에게 가닿는다."[6]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대화를 하다 보니 '보여주는 것만을 보진 않겠다'는 것이 최 작가의 관점으로 보였다. 그가 앞으로 계속 '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최 작가는 '가치'를 말했다.
"제가 하는 작품이 인식을 바꾼다고 자신하지는 못해요. 사실 어떤 변화는 정치가 이뤄낸다고 믿었거든요. 예술은 너무 미미하다고 생각됐죠. 하지만 최근에 한국의 상황을 겪으며 그 생각이 바뀌었어요. 정치적으로 이루어 내는 변화, 그 외형은 거대하고 실질적으로 여겨지지만, 실체가 부풀려진 거품과 같을 수 있죠. 하지만 예술은 거품처럼 사라지지 않는, 인간 마음 깊은 곳에 어떤 단단한 토대를 만들어주는 거 같아요. 더 정확히는 그런 작업을 하고 싶어요. 관객과 함께 흔들리지 않고 지키고 싶은 어떤 가치를 떠올리거나 만들어 주는 그런 작업을 하고 싶어요"
각주
- ^ 《소장품섬_최찬숙:밋찌나》 부산현대미술관 전시 브로슈어, 2025.
- ^ 서울기록원, 서울대 정진성연구팀이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수집한 일본군 ‘위안부’ 기록, 2016~2018, https://archives.seoul.go.kr/contents/comfort-women
- ^ 《기록 기억: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다 듣지 못한 말들》, 서울도시건축센터, 2019.
- ^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제작한 《소장품섬_최찬숙:밋찌나》 브로슈어에 게재된 미술사학자 조혜옥의 글 제목이다.
- ^ 국립국어원 표기에는 미치나로 되어있으나 이 글에서는 최찬숙 작가의 작품명 ‘밋찌나’를 본떠 그대로 사용한다
- ^ 조혜옥,「무브 투 리-멤버」, 『밀려나고 새어 나오는(최찬숙 아트북)』, 아트북프레스, 2024, p.18.
연결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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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전시정보국 49번 보고서, 작성자의 주관적 편견이 투영된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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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에 관한 미국보고서 자료해제 3부. 미 전시정보국(OWI) 49번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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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멘터리 〈코코순이〉 제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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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들의 삶을 한 분이라도 더 확인해서 널리 알려서 같이 공유하는 게 현재 우리들에게 남아있는 중요한 숙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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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미야마 다에코의 예술-운동: 비/인간 존재의 ‘포스트 메모리’를 기다리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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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야마 다에코가 ‘위안부’의 삶에 공감하며 벌였던 예술-운동은, 당사자와 친밀한 관계가 없는 비체험자의 위치에서, 뒤늦게 당사자와 마주한 가해자의 위치에서 그 간극을 극복하고 연결되고자 형식과 내용을 혁신했던 과정이었다.
- 글쓴이 김소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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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이다. 주요 관심 주제는 공동체에 관한 것으로, 사회적 공명이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을 바탕으로 전시, 교육 기획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수행성'이라는 개념에 관심을 가지며 미술계 내에서 안무가와 음악가, 극단과도 협업해 왔다. 최근 기획한 주요 전시로는 <이것은 부산이 아니다: 전술적 실천>(2024), <존 아캄프라: 공항>(2023), <누구의 이야기>(2022), <그 후, 그 뒤,>(2021), <푸른 종소리>(2020) 등이 있다. 상하이 하우 아트 뮤지엄에서 큐레토리얼 리서치(2019)에 참여하였고,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와 학술 컨퍼런스(2021)를 진행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