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박필근’이다 - 창작판소리 ‘박필근뎐’과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창작노트

김도연

  • 게시일2021.09.13
  • 최종수정일2022.11.25

웹진 <결>은 2021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박필근’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경북지역의 유일한 ‘위안부’ 피해 생존자로 알려지는 그는, 일본군에 의해 16세 당시 강제로 끌려가 공장에서 위안소로 옮겨져 2차례의 탈출 시도 끝에 겨우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포항의 작은 집에서 포항여성회를 비롯한 지역의 많은 이웃들과 함께 더불어 ‘박필근 할머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해에는 지역 창작자들이 함께 모여 창작 판소리 <박필근뎐>을 만들어 그의 삶을 알리기도 했었죠.

이렇게 역사는 계속해서 쓰여지고 있습니다. ‘피해자’에서 ‘생존자’를 넘어 단단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는 박필근과 또다른 많은 박필근들. 그 모든 소중한 이름을 우리가 계속해서 불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박필근뎐’ 연주자들이 연습을 하고 있다 ©김도연


#NOTE 1 박필근뎐

캄캄한 방
몸 하나 겨우 눕는 방
창문 하나 없이
비명소리 벽지가 된 방
나도 캄캄해져
벽 틈 사이로 들어오던 그 빛 
고향하늘 달빛처럼 환한
엄마, 엄마 우리 엄마 
보고 싶은 우리 엄마

2019년 5월. 포항 KBS라디오 이용일 PD님과 포항여성회 회장이자 KBS라디오 작가였던 김은주 님이 한터울 공간으로 찾아오셨다. 두 분은 포항여성회에서 펴낸 일본군‘위안부’피해자 박필근 할머니의 삶을 국악으로 들려주고 싶어 했다. 구술생애사를 읽는 내내 판소리가 들렸다. 많은 작품을 만들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단원들에게 할머니와 판소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자 할머니의 구술증언에 당시의 일본군 자료, 뉴스 기사, 증언 등을 보태 작품을 만들어보자는 의견들이 쏟아졌다. 그렇게 뜻을 같이 한 포항의 젊은 국악인들이 박필근 할머니의 기억을 ‘우리 모두의 기억’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지를 보여주어 창작판소리 ‘박필근뎐’이 시작됐다. 

나비야 살아서 날개를 꺾인 나비야
퍼덕거리고 날개를 치면
나비야,
방문 앞에 줄을 선 전쟁귀들
날개를 꺾는구나
나비야
날개를 꺾여 날지 못하는 슬픈 나비야

일본은 가장 추악한 짓을 저질러 놓고 그 추악한 짓이 인정되면 오점이 될까 봐 온갖 거짓말로 덮어왔다. 우리는 70년의 기나긴 세월 동안 할머니들의 가슴에 박힌 대못을 뽑아드리지 못했다. 가족들은 부끄럽게 생각하고 많은 할머니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내가 이런 짓을 당했다’ 겨우 말하게 한 일이 못내 부끄럽다. 그런 우리에게 ‘박필근이라는 거울’을 함께 들여다보자고 이 판소리를 창작한다. 일본으로 하여금 추한 역사를 속죄하게 하고 우리도 상처를 일찍 보듬지 못한 것을 반성하는 늦은 일기쓰기, 창작판소리 ‘박필근뎐’은 그래서 ‘우리 모두가 박필근이다!’라는 선언이다. 


창작의도를 정리하고 대본 작업을 위해 박필근 할머니의 구술생애사와 다른 할머니들의 활동과 증언들을 찾아보며 다들 많이 울었다. 가사 한 줄 한 줄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할머니의 절망이, 고통이 느껴져 작창을 하던 소리꾼의 소리도 자주 끊어졌다. ‘고통을 덜어내는 힘’이 아니라 ‘고통을 드러내는 힘’을 내야 하는 공연이라 모두들 힘겨워했다. 기존의 판소리가 누구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듯 ‘박필근뎐’도 단원들의 ‘더늠’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앞으로 ‘박필근’이 될 더 많은 예술가들이 마음을 보탤 것이다. 

‘박필근뎐’ 공연무대(20.08.14) ⓒ포항여성회


#NOTE 2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창작판소리 ‘박필근뎐’에 함께한 대학생 소리꾼 김채은은 “진짜 이런 일이 있었어요? 포항에 살아계시는 할머니 이야기라니 믿기지 않아요”라며 처음 접한 충격적인 사실에 놀라 “에이, 나쁜 놈들!”을 연발했다. 어느 날 자신이 맡은 어린 박필근 역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자료가 없느냐고 물어왔다. 김금숙 작가의 책 『풀』을 건네주었다. 다음 날 퉁퉁 부은 눈으로 나타나 “이런 역사를 여태까지 몰랐다는 게 부끄럽다.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까지 폭력적일 수 있느냐”고 했다. 그 후, 연습 때 소리가 달라진 걸 느꼈다. 우리가 ‘박필근뎐’ 공연을 본 관객들에게 바랐던 변화가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젊은 세대들이 할머니와 같은 ’위안부‘피해자들을 자신의 할머니처럼 가깝게 느끼며 공감하고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박필근뎐’ 공연을 마친 다음 해 포항문화재단에서 지역의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공모했다. ‘젊은 포항의 소리꾼에게 포항의 이야기가 담긴 대본을 주고 작창과 소리 지도를 해줄 스승을 만나게 하고, 소리꾼으로 하여금 판소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원리를 체득하게 하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지역의 이야기를 담은 자신만의 판소리를 수련하여 지역을 넘어서는 큰 소리꾼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든다’는 컨셉으로 지원해 선정되었다. 전북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수궁가 이수자이자 국악방송TV <국악아니?>의 진행자이기도 한 김봉영 선생님이 연출과 작창 및 연기 지도를 맡아주기로 해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 

김봉영 연출은 “삶을 살아가는 것과 작품을 만드는 일은 비슷하고, 삶의 매 순간의 선택이 곧 창작이며, 축적된 선택들은 인생이라는 작품이 된다. 그래서 작품을 만드는 일은 삶의 갈등을 줄여가는 일일 것이다. 소리꾼의 내면적 성장이 주가 되고 작품은 그냥 그 과정의 자연스런 결과물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방향을 정했다. 판소리를 창작하는 전 과정을 공유하는 것도 큰 자산이 되도록 대본, 기획, 제작에 소리꾼, 고수 등 모든 스탭이 함께하는 ‘공동창작’ 제안에 모두가 흔쾌히 동의했다. 주제, 스토리, 노래 가사, 작창의 방법과 연기지도까지 모두 공유하며 함께 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아래에 소개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담은 가사 ‘사방이 벽뿐인데 진로, 진로’는 회의 후 가진 술자리에서 번뜩 튀어나왔다. ‘먹고사니즘’, ‘꿈과 빚은 패키지 상품’으로 이어지는 가사는 취기 오른 이들의 ‘알코올 더늠’이다. 

진로, 진로 진로라니 술 이름 한번 고약하다. 사방이 벽뿐인데 진로, 진로. 취업률 바닥인데 진로, 진로. 꿈도 없는데 진로라니. 술 술 넘어가는 게 술이라던데 그놈 참 안 넘어가는구나. 아무리 쳐다봐도 못난 년 너도 한잔. 지질이 운도 없는 년 너도 한잔. 한잔 두잔 석잔 주거니 받거니 진로가 금방 거덜 났네. 텅 비어버린 진로. 빈병 같은 청춘. 한라산 같은 꿈. 진로, 진로 진로라니! 그놈 이름 참 고약하다. 그래도 처음처럼 보다 났네. 노력해서 최종면접까지 왔는데, 다시 처음처럼 이라니! 지긋 지긋한 먹고사니즘. 열심히 살아도 신용불량. 꿈과 빚은 패키지 상품. 언제쯤 좋은 데이? 이술 저술 다 마시고 고르고 골라 참소주 그마저 짠소주. 쥐포처럼 잘근 잘근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망할 놈의 세상이야.

‘악의 평범성’은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일어난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더운 여름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연습하다가 “저 밖에 있는 길고양이들은 어떻게 지낼까”라는 누군가의 한 마디에 다들 한없이 작아지던 경험도 가사가 되었다.

배고파서 먹을 거 찾는 게 잘못이냐? 아파트, 대형마트 지어 사람만 잘 사는 세상 만들었으니 삶터를 뺏긴 동물들이 배고픈 건 당연지사. 음식물 쓰레기로 연명하고 물도 구하기 어려운 도심 아픈 몸으로 고작 3-4년을 산다. (중략) 눈빛이 싫다고 돌 던지는 사람은 놔두고 돌 맞아 다리 저는 놈을 보고 절름발이라 놀리면 동물들 입장에선 얼마나 아프겠느냐.(중략) 상처를 주는 것이 나쁜 일이지 상처를 받는 게 나쁜 게 아니다!

단원들이 ‘나비가 그랬어’ 연습을 위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도연


대본 작업을 위해 박필근 할머니뿐 아니라 여러 ‘위안부’피해자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찾아보던 중에 말년에 치매로 아기 인형을 자식이라고 애지중지하셨다는 이수단 할머니의 사진 앞에서 모두가 말을 잃었다. 친구들과 나물 캐던 ‘수단이’에서 일본 군인들이 부르던 ‘히도미’로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중국인 ‘리평원’으로 생을 마치신 이수단 할머니의 삶은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할머니가 지금 젊은 세대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을 감히 상상하며 가사로 만들기도 했다.

이 못난 늙은이도 이름 세 개로 험한 시대를 살았는데 한 개 이름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을 우리 예쁜 다미가 못 살까 그냥 돈 몇 푼 벌어주는 직업은 꿈이 아니다 꿈을 잃지 말거라 꿈마저 잃으면 죽은 사람이야 

‘나비가 그랬어’ 공연무대(20.11.28) ©김도연

 
그렇게 만들어진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는 낯선 할머니와 만난 소녀 ‘다미’가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성장하는 과정에서 우리 안의 ‘다름에 대한 폭력성’을 성찰하고 다양한 생명들이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따뜻하게 살아가는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바람을 담은 작품이 되었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전쟁 중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이지만 지금도 여성들과 사회적 약자, 동식물들, 심지어 지구마저도 폭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악의 평범성’을 확인했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이 길고양이들에게 하는 것을 보라. 평범한 사람이 생각하지 않고 세상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일을 ‘너무나 성실히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얼굴을 하지 않는 전쟁’을 겪었기에 복수 대신 용서를 선택하신 할머니들. 진정한 평화가 정착하려면 우리와 같이 살아가는 평범한 이웃들의 폭력을 줄이는 일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가 길고양이를 아끼는 ‘위안부’ 할머니와 소리꾼을 꿈꾸는 한 소녀의 만남을 통해 생명을 가진 어떤 것에도 폭력을 가해서는 안 되며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로 만들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일상 속에서 평화를 만들어 살자는 노래. 그래서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는 ‘위안부’ 할머니들은 물론이고 코로나로 힘든 이웃들을 위한 응원가이기도 하다. 

‘나비가 그랬어’ 리플렛 ©김도연

 

창작 판소리 <박필근뎐> 소개

대본: 김은주 / 연출: 김도연 / 소리: 곽미정, 김채은
2019년 경북의 유일한 ‘위안부’ 피해생존자이신 박필근 할머니의 구술생애사를 바탕으로 포항 KBS 라디오에서 ‘판소리 다큐멘터리 박필근뎐’이 제작됐고 이를 기반으로 2020년에는 포항여성회에서 지역의 예술가들과 손을 잡고 ‘창작판소리 박필근뎐’을 비대면 영상으로 제작했다. 2021년에는 여성가족부가 진행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민간단체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포항에서 판소리에 연극적인 요소를 가미한 공연으로 중앙아트홀에서 공연 예정이다.

 

<솔직히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소개

대본: 이원만 / 연출: 김봉영 / 소리: 김채은
2020년 포항문화재단에서 지역의 문화예술지원사업 중 공공프로젝트 글로컬아티스트 육성지원사업으로 선정되어 쇼케이스로 발표했다.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는 ‘위안부’피해자로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었던 할머니와 소녀의 만남을 통해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소녀 다미가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서로에 대한 이해, 공감으로 따뜻하게 살아가는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바람을 창작판소리로 표현한 작품이다.

 

 기사 게재일: 2021.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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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도연

(주)아트플랫폼 한터울 대표. 경북 포항에서 1988년 창단한 ‘맏뫼골 놀이미당 한터울’이라는 전통연희단체에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단원으로 들어가 풍물꾼으로 문화예술활동을 시작했다. 지금은 문화체육관광형 예비 사회적기업 (주)아트플랫폼 한터울이라는 이름으로 포항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과 협업하며 창작과 문화예술 교육사업을 열심히 펼치고 있다. 지역의 예술가들이 교육자와 예술가로 자기성장을 할 수 있는 행복한 일자리를 만드는 게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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